제 35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두 사람이 있다.

by 정윤재 posted Jun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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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있다

정윤재

1.

 

내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론 약. 칸막이 세 개에 네 칸짜리 통에 담겨 있다. 네모진 빨간약, 작은 파란 약에 반 알짜리 하얀 약. 작은 통에 든 하얀 약도 있다. 흔들면 재밌는 소리가 나곤 한다.

 

둘째론 필통인데 여러 잡동사니가 있다. 볼펜 - 다 써서 나오지 않는 게 절반인 - 이 있고 칼도 있고 가위가 있다. 칼과 가위는 보다 보면 안 좋은 상상이 나서 뒤쪽으로 돌려놓고는 한다. 악력기도 있는데 눈에 띌 때 에만 한다. 중앙에는 노트북이 있는데, 낡아서 방향키가 잘 눌리지 않는다. 길을 걷다 받았던 사탕 한 움큼도 놓여있다. 왼켠에는 읽지 않는 책들이 꽂혀 있고 지금은 키우지 않는 물고기를 키웠던 어항도 저 켠에 보인다. 그리고 의자 위에는 내가 앉아 있다.

 

남자 혼자 살면 방 안에서 퀘퀘한 냄새가 난다고,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간혹 올 때마다 그랬는데, 나는 본인인지라 잘 모르겠다. 지금도 나고 있을까. 속옷은 보통 이틀에 한 번 갈아입는다. 너무 오래 갈아입지 않으면 냄새가 날뿐더러, 누레져서 세탁기에 넣어도 잘 안 빨리기 때문이다.

 

2.

 

엿 같다. 상스러운 말이지만, 달리 할 말이 없다. 저녁 겸인 핫바를 뜯으며, 주택가를 걸으며 생각한다. 알비씨라는 카메라 부품회사가 있다. 나는 생산 공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데, 기계를 점검하거나 인력을 관리하거나 하는 걸 시킨다.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는 게 느려서 선생들한테 혼나고는 했다. 지금도 그렇다. 혼나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3.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은 즐겁다. 취업한 뒤로는 가지 못했지만, 돈을 벌어야 여행도 다니니 어쩔 수가 없다. 여럿이서 가는 것은 질색이지만, 나는 혼자 밖에 나다니는 것을 좋아해 왔다. 모르는 번호의 버스를 얼마간 타고 내리고 바꿔 타고 내리다 보면 모르는 동네에 도착한다. 그러면 거기를 한번 쭉 구경한 후 하루나 두 밤 자고 돌아오는 것이다. 퍽 낭만적이지 않은가.

 

4.

 

돈이 필요하다.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사람은 어째서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이 둥둥 떠다니는 영혼이 아닌 육체를 가진 존재인 이상, 물질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리라.

5.

 

고통스러운 5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왔다. 간밤에 눈이 왔는지 커피 위의 우유 거품처럼, 눈이 얇게 쌓여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래침이라던지 누런 담배꽁초와는 거리가 먼, 새하얀 길을 따라 장을 보러 간다. 직장 일이 힘들기는 해도, 이렇게 돈을 쓰러 갈 때는 꼬박꼬박 돈 주는 데가 있어 다행이다, 하는 생각을 한다. 건널목 앞의 초록 불이 켜지고 길을 건너려는데 쌩하고 차가 앞으로 지나간다. 이 동네는 차가 워낙 쌩쌩 다녀서 걱정이다.

 

모퉁이를 돌아 상가 쪽으로 가려는데, 눈이 덮인 다리 위에서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있다. 잠시 흐뭇하게 지켜본다. 어른들은 시간과 장소와 할 일을 정하고 사람을 만나고는 한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한두 명이 먼저 아침에 썰매를 타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플라스틱, 종이 자루, 나무 상자 저마다의 썰매를 들고 다리 위로 모이는 것이다. 그러면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친구가 된다. 그리고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또 놀자고 약속하는 것이다. 치직 치직. 썰매 끌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고, 빨리 한 번 더 타려 다리를 뛰어 올라가는 아이들이 표정이, 천진난만하고 귀엽다.

 

장을 다 보고 은행 일을 본 다음에 집에 돌아가려 아까의 모퉁이를 지나가려는데, 다리 아래에서 한 여자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에 젖은 커다란 종이봉투가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까 썰매를 타던 아이 중 하나로 보인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에 긴 머리에 하얀 피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아이다.

 

나는 사실 누구랑 눈을 마주치면 시선을 잘 못 피한다. 잠시 소녀와 서로 쳐다보았다. 10초쯤 지났을까. 소녀가 먼저 짧게 목례를 하길래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

 

, 안녕

 

잠시 말문이 막혔다. 머리를 굴린 후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까 눈썰매 타고 있지 않았니?”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은 다 어디 갔어?”

 

걔네 내 친구 아닌데. 그냥 같이 논 거야.”

 

다들 점심 먹으러 집에 갔지.”

 

. 너는 밥 먹으러 안 가니?”

 

이제 먹으러 가려고.”

 

소녀가 주머니에서 오천 원을 꺼내더니 흔들었다.

 

엄마가 사 먹고 오래.”

 

그 말을 마치고 소녀가 앞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필 내가 가려는 방향이다. 요즘 세상에 어린 여자애 뒤를 쫓아가는 이상한 아저씨로 보이지나 않을까, 하며 나도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적막한 거리, 코트에 붙은 실밥을 떼며 걸어간다.

 

아저씨는 어디가?”

 

으응, 장보고 집에 가지.”

 

아저씨는 점심 안 먹어?”

 

이제 먹어야지, 집 앞에 현민 식당에서 먹으려고.”

 

나는 요리를 못한다. 자취하는 남자가 요리를 못하면 사 먹는 수밖에. 내가 사는 주택가 근처의 현민 식당은 내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식당이다. 백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양이 푸짐하다. 주인아저씨가 요리를 잘해서 장사가 잘되는 집이다.

 

갑자기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를 친다.

 

진짜? 나도 거기서 먹을 건데!”

 

아뿔싸. 다리 아래 아파트 단지 사이의 큰길을 따라 걷는 어색한 이 짧은 동행을 빨리 끝내기 위해, 나는 원래 저쪽 사거리에서 소녀가 어디로 가는지 물은 후에 다른 방향으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졸지에 밥까지 같이 먹게 생겼다. 소녀의 눈빛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 그럼 같이 먹을래?”

 

그래 좋아.”

 

소녀가 선심 쓰듯이 대답한다. 문득 걱정되어 물어본다.

 

근데 너 낯선 사람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 아저씨가 나쁜 사람일 수도 있잖아.”

 

소녀가 어이없단 듯이 쳐다본 후 깔깔 웃는다.

 

하하, 아저씨처럼 생긴 사람이 어떻게 나쁜 사람이야.”

 

내가 만만하게 생겼긴 하지. 순간 납득할 뻔했다. 뭐라고 더 하려다 그만뒀다.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다. 4차선 도로의 중앙선과 길가에는 눈이 쌓여있다. 도로에는 자동차 타이어가 밟고 지나가 검게 물든, 반쯤 녹은 찐득한 눈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소녀가 총총 건널목을 건너간다.

 

얌마, 빨간불이잖아.”

 

뭐 어때 차 안 다니는데.”

 

소녀가 반대편에서 외친다.

 

뭐해, 안 건너오고?”

 

그 순간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었다. 나는 소녀에게 보여주듯이 도로 좌우를 둘러본 뒤,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소녀가 빙긋이 웃는다.

 

내 동생도 그렇게는 안 하거든?”

 

이 녀석아, 무단횡단하면 안 되는 거야.”

 

아저씨도 솔직히 나 없었으면 방금 그냥 건넜을 거 아냐?”

 

순간 말문이 턱 막힌다. 어떻게 어린애가 이런 촌철살인을. 내가 말문이 막히자 소녀는 낄낄거린다.

 

하하, 어른들은 꼭 애들한테 하지 말란 거 뒤에선 다한다니까?”

 

이 녀석아, 그래도 좌우는 항상 보고 건너.”

 

소녀는 건성으로 대답한 후 옆에서 걸어간다.

 

배고프니까 얼른 가자.”

 

6.

 

이윽고 식당 앞에 도착했다. 식당들 사이에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는, 누렇게 변색된 네온사인 없는 네 글자 흰색 간판이 인상적인 식당이다. 널찍한 가게 바닥엔 체크 무늬 타일들이 놓여 있다. 옆쪽 벽의 시계는 벌써 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다. 앉아서 쉬고 있던 주인장 현민이 아저씨가 반겨준다.

 

여어, 우리 단골들 아냐? 근데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나?”

 

길 가다 우연히 가는 데가 같아서요.”

 

그래? 뭐 먹을래?”

 

저는 떡만두국이요.”

 

오케이, 친구는?”

 

돈가스가 먹고 싶긴 한데.”

소녀는 오천 원짜리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돈가스는 육천 원이다.

 

내가 천원 빌려줄게.”

 

고마워 아저씨!”

 

소녀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래, 손님도 없으니 금방 만들어 주마. 앉아서 기다려.”

 

늘 그랬듯이 시계 아래, 구석지고 그늘진 자리에 앉는다. 소녀가 따라서 맞은편에 앉았다.

 

나중에 천원 갚아라.”

 

쩨쩨하긴, 아저씨 하는 거 보고.”

 

기가 찬다. 이윽고 할 말이 떨어졌다. 소녀는 멍하니 상 위의 나무무늬를 보고 있다. 어색해진 나는 아무 말이나 했다.

 

밥 먹고 집에 갈 거니?”

 

아니, 서점에서 저녁때까지 책 보다 갈려고.”

 

겨울이라 금세 어두워지는데,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겠니. 일찍 가라.”

 

소녀가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 표정에,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타인에게 뻗은 손을 거절당하는, 그래서 사람에게 손을 뻗지 않게 된 사람들. 이 소녀에게서도 그러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나는 집에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그리고 엄마 아빠도 나 별로 안 좋아해.”

 

어린아이라면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직 잘 모를 텐데. 그게 철없는 생각이라는 걸 어떻게 돌려 말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떡만두국이 나왔다. 무럭무럭 나는 떡만두국의 김 사이로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 왜 부모님이 널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소녀가 머리를 한 번 긁적이더니 웃으며 말한다.

 

말해주면 아까 천원 까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 친딸이 아니거든.”

 

가능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실패했나 보다. 소녀는 한 번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지금 엄마 아빠 집으로 왔어. 그때는 나한테 잘해줬는데, 내 동생이 태어나고부턴 나한테 별로 신경을 안 쓰더라고.”

 

잠시 정적.

 

천 원짜리에 듣기는 좀 미안하네.”

 

소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아까의 소녀의 외로운 표정도, 어린아이답지 않던 소녀의 조숙한 말투와 분위기도, 쌀쌀맞은 성격도 이제는 왜였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할 때 돈가스가 나왔다. 바삭바삭하니 맛나 보인다.

 

맛있겠다.”

 

잠시 말없이 서로 음식을 먹는다.

 

나 만두 하나만 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젓가락으로 만두를 하나 집어가더니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어릴 때는 잘 먹어야 크는 법이다. 소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돈가스의 가장자리 가장 작은 조각을 집어서 나한테 준다.

 

아저씨도 하나 먹어.”

 

이왕이면 좀 큰 거로 주지.”

 

소녀가 한 번 째려본다.

 

주는 대로 먹지?”

 

장난기가 든 나는 재빨리 돈가스의 제일 큰 가운데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행복하다. 우물거리면서 소녀의 표정을 보았다. 어이가 없어 보인다.

 

와 진짜 유치하네.”

 

어른은 영악한 법이지.”

 

7.

 

맛있게 떡만두국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소녀가 돈가스 접시의 고기만 집어 먹고 채소랑 밥을 남기길래 그것까지 다 집어먹어서 배가 부르다. 일어나서 계산을 하러 갔다. 내가 계산대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카드를 내밀자 소녀가 살짝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아저씨가 사려고?”

 

이 정도쯤이야.”

 

아저씨 돈 잘 벌어?”

 

응 나 부자야.”

 

.”

 

그리고.”

 

비밀 값이 천 원이면 너무 싸잖아, 라고 하려다 말았다. 당기시오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유리문을 밀고 회색 보도블록이 깔린 식당가 거리로 나왔다. 가게 앞에는 다 죽어가는 화초 화분이, 저쪽에는 빨간색 배달 오토바이가 보인다. 하늘은 구름 몇 점 없이 청명하다. 저쪽 모퉁이에는 노르스름한 털의 고양이도 보인다. 소녀는 아까 서점으로 간다고 했다. 서점은 저쪽 사거리 건너, 내 집이랑 반대 방향이다.

서점 간다며.”

 

응 이제 갈려고.”

 

그래, 잘 가라 나도 이제 집에 가보마.”

 

소녀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그런 소녀의 얼굴에 아까의 외로운 표정이 덧씌워져 보이면서 문득 소녀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왠지 지금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망설임을 무릅쓰고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잠깐만.”

 

, ?”

 

소녀가 뒤를 돌아본다. 나는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는다.

 

아까 너가 했던 얘기 있잖아, 오지랖이겠지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소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집에서 힘들겠지만, 버텨. 계속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지금은 까마득히 멀어 보이겠지만, 너도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버리거든. 그때 부모님 품을 벗어나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찾아봐. 인생은 길거든 그러니 힘내.”

 

이런, 멋진 어른의 조언은 아니더라도 소녀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하고도 두서가 없다. 소녀가 잘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말하고 나니 뭔가 부끄럽다. 소녀는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자신보다 어린애를 보듯이 씨익 웃는다.

 

아저씨.”

 

, ?”

 

아저씨는 정이 많은 사람이구나?”

 

다시 부끄러워졌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잘 살게

 

그렇게 말하더니 소녀는 뒤로 돌아 걸어가더니 고개를 한 번 돌려 웃으며 인사했다.

 

잘 가, 다음에 또 봐.”

, 그래.”

 

소녀가 반대편으로 스무 걸음쯤 걸어가는 것을 멍하니 보다, 나도 집 쪽으로 돌아 걷기 시작했다. 담백한 겨울 공기, 오후의 회색 보도블록 길 위에 서로 반대로 걸어가는, 누구보다 외로운 두 사람이 있다.

 

8.

 

빌라 앞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앞에서 짖어대는 목줄 달린 개를 피해 계단을 오른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건물이라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내 방은 404호이다.

 

방문을 열고 나는 따분한 주말 오후를 어떻게 보낼까, 잠시 생각한다. 시계를 풀어놓고 옷을 벗어놓은 후, 잠시 쉬었다 어제 놓친 야구경기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깐 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시간이 꽤 지나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는 야구경기를 본 다음, 이 주 전에 충동적으로 샀던 아령을 들고 운동을 했더니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매끼를 사 먹지는 않는다. 저녁은 즉석밥과 데워먹는 국으로 때워야겠다. 작은 냉장고를 열어보니 데워먹는 국이 없다. 아까 장 보러 갈 때 메모장에 쓴 데로 빠짐없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빠뜨렸나 보다. 맨밥에 김치랑 먹기엔 심심하다는 생각과 여기서 좀 걸어야 나오는 편의점에 가기 귀찮다는 생각이 서로 싸운다. 고민 끝에 산책도 하는 겸 편의점에 가기로 한다.

 

겨울 저녁 공기는 무언가 그리운 냄새가 난다. 나는 검은색 삼선 슬리퍼에 바닥에 끌리는 긴 츄리닝 바지를 입고 방문을 나선다. 문득 하늘을 본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하늘을 푸르거나 검게 칠한다. 그것은 하늘의 분칠한 모습만을 보는 것이다. 여명과 황혼의 시간에 하늘은 화장을 지우고 자신의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다. 난간 너머로 숨이 꺼져가 헐떡대는 지평선 너머로 토해내는 햇빛이 비친 하늘은 잿빛 비구름을 희롱하듯 주황색, 남색, 자줏빛으로 찬란하게 물결친다. 사진기로는 절대로 담을 수 없는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나는 잠시 멈춰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둑해진 회색 거리를 따라 편의점으로 가는데, 머리 위에 비구름이 가득하다. 겨울이니 눈이나 비일 텐데, 눈이었으면 좋겠다. 우산을 안 가지고 나와서 눈이 비보다 그나마 맞으면서 갈만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내린 비는 쌓여있던 눈과 섞여 질퍽질퍽한 진흙이 되어 사람들의 짜증을 돋우는 것이다.

 

걷다 보니 아까 소녀와 헤어졌던 곳까지 왔다. 이제 앞으로 쭉 직진한 다음 나오는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편의점이다. 녀석은 집에 잘 들어갔을까. 어두워지니 슬슬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야 할 텐데. 조금 걱정이 된다. 이런, 순간 바람이 불어 모자가 날아갈 뻔했다. 불어온 바람결이 섬찟하다.

 

이윽고 편의점 앞에 도착해 사려고 한 즉석 국 봉지와 과자 몇 개, 그리고 담을 봉툿값을 지불한 후 집으로 돌아가려 사거리를 건넜다. 초록 불이 깜빡인다. 횡단보도를 다 건넜을 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두 번째 들렸을 때 뒤를 돌아본 나의 두 눈에 비친 것은, 깜빡이는 초록 불, 웃으며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소녀와 그녀를 향해 돌진하는 흰색 승용차,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늘빛.

 

그리고 암전.

 

9.

 

지금이 몇 시인가? 새벽 세 시다. 내가 해야 할 것이 있는가? 지금은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다. 의자에 조금 편안하게 고쳐 앉았다. 지금 나는 너무 지쳤다. 옆의 침대에 누워있는 작은 생명체를 한 번 살펴본 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마치 무서운 꿈을 꿨던 것만 같아, 잠들기 두렵다. 사실 지난 몇 시간의 일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기억을 되살려 지난 일을 떠올려 본다.

 

10.

 

소녀의 몸이 붕 뜨더니 저쪽 보도블록에 머리를 부딪치며, 너무나 힘없이 떨어진다. 소녀를 치고 간 흰색 승용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매섭게 달려간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번호판을 외워놨어야 했는데. 운전한 새끼와 얼빠진 나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후에 경찰이 이르기를 CCTV가 없는 인적 드문 지역이라 범인을 잡기가 힘들단 투로 말했다. 미친 새끼. 그 속도는 거의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아마 본인도 그걸 알고 죽었다 생각하고 나 몰라라 도망간 것이겠지.

 

너무나 무서웠던 그 광경 속에서, 나는 떨리는 몸을 이끌고 소녀에게 달려갔다. 보도블록과 도로는 소녀의 머리에서 나온 붉은 피로 가득하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나의 오래된 공황발작이 숨을 조여온다. 겁이 난다. 세상이 무섭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머리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눈을 감으며 못 본 체하며, 소녀를 안아 들었다. 의식이 없는 듯하다. 소녀를 인도에 눕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119를 부른다. 숫자 세 개를 핸드폰에 입력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니. 나는 지금의 위치를 설명한 뒤 소녀의 머리를 지혈한다. 지금 보니 팔이 말도 안 되는 각도로 꺾여, 피부 사이로 뼈가 튀어나와 있다. 입에서도 피가 나는데, 작고 흰 이빨이 부러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다. 대체 왜 구급차는 오지 않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구급차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내가, 이 소름 돋게 차가운 세상 속에서 너무나도 작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문득 죽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며 섬찟하다.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니 다행히 아직 숨을 쉬고 있다.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구급차가 왔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에 소녀를 싣는다. 덜컹거리는 구급차 안, 구급대원들은 자기들끼리 다급하게 얘기하며 나에게도 무언가를 묻는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피를 흘리며 의식이 없는 내 눈앞의 너무나도 여린 아이에 대한 연민이 나를 채울 뿐이다. 눈에서 물이 흐른다.

 

병원에 도착해 들것을 내린 뒤, 들것을 끌며 달리는 구급대원들을 따라 응급실로 달려간다. 수술실 문밖에서 평생 믿은 적 없던 신에게 기도한다. 내 평생 당신을 미워해 왔지만, 이번만 저 소녀를 살려주소서.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상상과 내 불안감과 초조함, 공황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응급실 복도에 앉아 있다. 메리야스와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의사가 나한테 조심스레 다가와서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OOO 환자분 보호자 되십니까?”

 

그러고 보니 소녀의 이름도 몰랐었지. B 실의 환자를 말하는 거냐고 물은 후에 대답했다.

 

아뇨 보호자는 아니고 목격자입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나는 사실 의사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들은 사실 조금이라도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사명감을 요구하는 건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은 치료가 아닌 수리를 하며, 의사보다는 시계공에 가깝다. 의사는 무척이나 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소녀의 상태를 읊었다.

 

차와 충돌한 부위의 내상이 심합니다. 내장이 꽤나 상했습니다. 뇌진탕의 충격이 심해 의식이 없으며 머리 부분의 출혈이 심해서 지금 수혈 중입니다. 그 이외는 자잘한 외상입니다. 왼쪽 팔의 골절과…….”

 

이해는 간다. 그들은 사람이 죽는 것을 매번 보고, 사망 선고를 내리니까. 하지만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너무나 무미건조한 그의 태도에 질린 나는 그만 소리치고 말았다.

 

잠깐만요, 그래서 살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의사는 잠시 생각했더니 말했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솔직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정황에서 저 정도 상태이면, 기적에 가깝습니다.“

 

기계 같지만 내게는 너무나 절대적으로 느껴졌던 그 의사의 말이 너무나 안심됐던 나는, 지금까지 온몸을 짓누르던 긴장과 맥이 풀리며,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11.

 

눈을 떴더니, 내 몸이 병원 침대에 눕혀져 있다. 팔에는 링거가 꽂혀져 있다. 안정을 더 취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을 무시하며 소녀가 있는 곳을 묻는다. 병상 위의 소녀는 창백한 얼굴로 인형같이 누워있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잠자는 공주처럼, 그녀는 언젠가 깨어날 것이리라.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소녀의 보호자와 연락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와서 병원비를 낸 다음, 소녀의 상태를 살피다 돌아갔다고 한다. 마음이 좋지가 않다. 친부모가 아니라지만 너무한 것이 아닌가. 공복 때문인가, 입맛이 씁쓸하다. 나는 소녀의 병상 옆의 등받이 없는 둥근 가죽 의자에 앉아 언제 깨어날지 모를 소녀를 바라본다. 아까 피로 범벅된 소녀의 머리와 얼굴은 말끔하게 닦여있고, 머리 뒤에는 붙여진 헝겊 사이로 꿰맨 자국이 보인다. 소녀의 입술은 크게 찢어져 있다. 팔에는 차가운 링거가 꽂혀 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그녀가 죽은 듯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병원 천장을 바라본다.

 

12.

 

아저씨.”

 

가늘고 갈라진 소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놀라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눈을 뜨고 힘없이 웃는다. 나는 여러 가지 말 중에 처음 할 말을 고른다.

 

일어났구나.”

 

, 실은 조금 전부터 일어나 있었어.”

 

몸은 좀 괜찮니?”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프면 진통제라도 달라고 할까?”

 

아냐 괜찮아.”

 

이윽고 침묵이 흐른다. 소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이불을 바라보고, 나도 바닥을 바라본다. 바닥 타일이 바람개비 무늬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녀가 입을 연다.

 

미안해 아저씨.”

 

, 뭐가?”

 

아저씨 말대로 차가 오나 안 오나 보고 건넜어야 됐는데, 바보같이.”

 

소녀의 미안해하는 마음이 전해져 온다. 사람으로부터 감정이 전해져 온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낀 나는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아냐. 너를 혼내려는 마음은 없어. 초록 불인데 뺑소니 치고 간 그 새끼가 나쁜 놈이지.”

 

뺑소니라는 말에 소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범인은 잡았어?”

 

아니, 근데 곧 잡히지 않을까.”

 

다시 침묵이 흐른다. 악몽 같았던 사고는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소녀도 같은 생각인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병실 속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천천히 열다섯쯤 세었을 때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왔어?”

 

누구?”

 

우리 엄마랑 아빠 말이야, 왔었어?”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입을 떼기 힘들다. 나도 기절해 있었기 때문에 보진 못했지만, 간호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준다.

 

아버지는 안 오셨어. 뭔가 사정이 있으셨겠지. 어머니는 와서 너 상태 살펴보시고 병원비 내신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셨어.”

 

그래……. 그렇구나.”

 

소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저렇게 하면 숨이 답답하던데.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아파.”

 

? 어디가? 많이 아파? 의사 선생님 불러줄까?”

 

소녀의 상태가 어디 안 좋아진 것은 아닌지, 걱정된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이불 속의 머리의 윤곽이 좌우로 움직였다. 고개를 저은 것이겠지.

 

아냐 그런 건 아닌데

 

그 말 들으니까, 상처가 좀 아파서.”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병상에 누워있는데 부모가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9살짜리의 기분은 어떨까.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문득 내가 그때 소녀가 차에 치인 거리에 있어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를 보니 어느새 이불을 걷고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다.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눈에 눈물 자국이 없다. 이불을 덮고 얼굴만 쏙 내민 소녀를 본다. 내 시선을 느낀 소녀도 나를 바라보더니 내게 말한다.

 

아저씨, 고마워.”

 

구해준 거랑 옆에 있어 줘서.”

 

낯간지러워서 뭐라 할지 모르겠다. 머쓱해진 나는 말했다.

 

밥 사준 거도 까먹지 말고.”

 

소녀가 빙긋이 웃는다. 창문 사이로 넘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소녀의 고운 얼굴에 비친다.

 

그래 그것도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들으니 많이 쑥스럽다.

 

고맙긴 무슨, 우리 친구 아니었나?”

 

뭐래, 아저씨가 무슨. 어제 처음 봤으면서. 그리고 난 친구 필요 없어서 안 사귀어.”

 

소녀가 당당하게 말하더니, 거만하게 말한다.

 

근데 뭐, 아저씨는 특별히 내가 친구 해줄게.”

 

그래, 고맙다 녀석아.”

 

소녀는 살짝 웃더니 눈을 감으며 말한다.

 

아저씨도 이제 가서 쉬어. 피곤할 거 아냐. 난 괜찮으니까.”

 

괜찮겠어? 무슨 일 있으면 의사 선생님 불러야 한다?”

 

그래, 알았으니까 가서 푹 자. 피곤하겠다.”

 

슬슬 가볼 때가 됐긴 했었다. 나는 앉아 있느라 쥐가 난 다리를 주무르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에 걸려있는 외투를 입고 병실 문을 밀었다.

 

또 올게.”

 

그래 잘 가.”

 

그래.”

 

집에 돌아온 나는 씻지도 옷을 벗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저녁이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던 주말이 다 지나가 버린 것이다.

 

13.

 

그날 이후, 퇴근 후 소녀의 병원에 들르는 것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한다.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 맛없는 병원 밥 욕, 점점 풀리는 겨울 날씨 이야기, 병실에서 본 책 이야기, 새로 나온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소녀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보냈다. 녀석도 온종일 병원에서 심심한지, 내가 오면 반긴다.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갔더니 녀석이 좋아했다. 병원에 있는 책과 잡지는 지루해서 재미가 없단다. 소녀는 팔에 깁스를 해서 내가 책을 들고 페이지를 넘겨 주면, 소녀가 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그날은 그렇게 책을 읽었다.

 

소녀의 심심함을 어떻게 달래줄까, 하다가 좋은 것을 떠올렸다. 퍼즐이다. 녀석은 맘에 들었는지, 나랑 맞춰보고 나서 6번 더 부쉈다 맞췄다고 했다. 맞추다 보니 요령이 생겨서 이젠 조각이 많은 퍼즐도 잘 맞춘다. 보드게임도 빌려다가 했는데, 이건 의외로 내가 재밌어서 열심히 했다. 소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승부욕이 세다는 것이다. 젠가 게임을 하는데, 나는 손이 커서 자꾸 다른 나무 블록을 건드려서 지곤 한다. 소녀는 그런 나를 놀려먹곤 한다.

 

소녀의 몸이 많이 나아져서 걸을 수 있게 된 뒤로는 같이 산책을 나갔다. 병실에만 있으면 근육이 약해져서 걸으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 몇 주 만에 실외로 나간 소녀는 신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쌓인 눈에 그림을 그린다. 나중에 팔의 깁스가 다 풀리면 같이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평범한 나날들이 일상이 되어가고 길가에 쌓인 눈이 녹아갈 때쯤 소녀가 퇴원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녀석에게 축하한 다음, 몰래 퇴원 선물로 무엇을 사줄까 열심히 고민했다.

 

소녀가 퇴원하기로 한 날, 병원 건물 앞에 왔는데 소녀가 문 앞에 사복을 입고 서 있다. 손을 흔들었더니 소녀도 손을 웃으면서 손을 흔든다.

 

뭐야, 밖에 나와 있었네.”

 

응 빨리 나오고 싶어서. 답답하거든. 아저씨 기다리고 있었지.”

 

그래 퇴원 축하한다. 아직 다 나은 거 아니니까 조심히 다녀 녀석아.

 

잔소리는. 고마워.“

 

쇼핑백을 들고 뒤로 하고 있었던 오른팔을 앞으로 내민다. 소녀는 이게 뭔가 하고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뭐야, 나 주는 거야?“

 

그래 퇴원 선물이다. 뜯어봐봐.“

 

소녀가 조심스레 쇼핑백 안의 네모난 포장지를 뜯는다. 소녀의 투명한 피부처럼 새하얀 스웨터다. 나 같은 이십 대 후반의 아저씨가 요즘 여자 꼬마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알 리가 있나, 나름 열심히 혼자 고민하고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결과, 실용적인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선물했다. 소녀의 첫인상과 흰 피부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 명품은 아니지만 싸지도 않은 그래도 나름 알아주는 브랜드다. 소녀가 마음에 들어 할까 걱정된 나는 소녀의 반응을 살핀다.

 

뭐야, 의외로 물건 보는 눈이 있네.“

 

소녀는 놀랍다는 듯이 말한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소녀는 활짝 미소지으면서 선물에 대한 감사를 표한다. 녀석이 기뻐하니 뿌듯하다. 소녀가 옷을 살펴보더니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근데 내가 맨날 받기만 해서 미안하네.“

 

됐어, 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잘 입어.“

 

그래, 내가 나중에 부자 돼서 10배로 갚아줄 테니까.“

 

소녀는 옷을 입고 나온다며 건물로 들어간다. 잠시 뒤 나온 소녀는 요정처럼 아름답다. 옷이 날개라더니 정말인가 보다. 소녀가 옷을 자랑하듯 한 바퀴 빙글 돈다.

 

엄청 예쁜데? 잘 어울려.“

 

옷걸이가 좋은데 당연한 거지.“

 

소녀가 웃으며 말한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따듯해져 누런 잔디 대신 초록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한 거리를 소녀와 걷는다. 집으로 간다. 소녀와 언제나처럼 잡담을 하며 걷던 나는 몇 개월간 퇴근 후와 주말에 보냈던 일상이 끝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쓸쓸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소녀와 헤어질 때가 됐다. 몇 개월 전, 사고가 났을 때 여기서 헤어졌었지. 그때 내가 소녀를 불러세우고 낯간지러운 조언도 해줬었는데.

 

아저씨, 나 이제 가볼게.“

 

응 그래 잘 가라.“

 

그래 잘 가.“

 

소녀는 몇 달 전 그날처럼 쿨하게 뒤로 돌더니 앞으로 걸어간다. 그 전처럼, 나는 소녀를 불러 세운다.

 

녀석아 잠깐만.“

 

, ?“

 

돌아보는 소녀의 얼굴이, 문득 몇 달 전 그날과 겹쳐 보인다. 그날과 비교해 훨씬 밝아 보인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웃으며 말한다.

 

퇴원하고도 아저씨랑 놀아 줄 거지?“

 

소녀는 어이없단 듯이 바라본 후 우습다는 듯이 깔깔 웃는다.

 

하하, 무슨 애도 아니고. 아저씨 외로움을 많이 타네.“

 

어른을 놀리기는. 건방지다니까.“

 

잠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이제는 정말로 헤어질 때다.

 

아저씬 그럼 가볼게. 잘 가라.“

 

그래, 잘 가.“

 

소녀가 먼저 뒤를 돌아 걸어간다. 그녀가 스무 걸음쯤 걸었을 때 나도 뒤를 돌아 집으로 걷는다.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헤어짐에 아쉬움은 적다.

 

그녀는 매정한 부모가 있는 외로운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나 또한 집에 돌아가 외톨이인 삶을 보내겠지.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서로를 알게 되었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어찌 됐든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끝나가는 겨울, 다가오는 봄의 회색 거리 위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누구보다 외로운 두 친구가 있다.

 

 

 

응모분야 : 소설

 

성명 : 정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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