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샤덴프로이데

by 다이무리 posted Jun 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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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덴프로이데

 

일 년이 지날 때마다 전등을 샀고 여덟 개의 전등을 가진 뒤에야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을 겨우 했다. , 정말 놀라운 발견이군. 모든 전등을 끈 새벽인데도 자꾸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졸린데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남자가 한 말과 비슷하게도. 그 남자는 천일 기념 부산 여행을 가선 호텔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있잖아요,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않는 게 뭘까요. 나는 그때 오래전의 나를 떠올렸다. 칠 년 전쯤이었다면 그런 말이 어딨냐며 웃었을 테고 그보다 조금 가까운 과거라면 잘 모르겠다고 인상을 찌푸렸을 테고 어제라면 지난 사랑은 착각일 뿐이라 말하며 혼자 이불을 덮었을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헤어지면 되지. 돌아오는 기차에서 서로의 번호를 지웠는데도, 남자의 물건을 옷장 깊숙이 넣으면서도, 결혼할 거라고 말했던 부모님에게 등짝을 맞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동생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던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보다 우스운 얘기를 작년에 들어본 적이 없다.

고양이나 개가 아닌 게 어디야. 아침이 되고 나서 그렇게 생각한 뒤에 문을 열고 바깥을 둘러봤다. 그 차가운 복도로 간밤에 무슨 부대라도 다녀갔는지 반달 모양으로 깎인 손톱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어떤 곡절이 어떻게 착각을 불러 애먼 집 문을 두드리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갑자기 흉한 흔적이나 남기고 간 건지 사립 탐정을 불러 물어봐도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또 잠들지 못한 채 손톱에 대해 생각했다. 일 년이 지날 때마다 고이고이 기른 손톱을 깎았던 걸까, 그런데 그게 이젠 너무 지겹고 구질구질해서 그만두려고 찾아온 걸까, 상자에 수북이 담긴 손톱들을 보면서 갑자기 툭, 하고 놓아버린 걸까.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다시 문을 열었다. 손톱을 전부 주워 손바닥에 놓고 주물렀다. 낮이 되기 전까진 아홉 번째 전등은 뭘 살지 고민했다. 한지로 만든 전등이 좋겠는데. 겨우 맘을 정한 저녁에는 조금 들떠 있었다. 정작 빵 한 조각 살 돈도 없으면서.

 

전시회장은 본가의 거실보다 작았다. 한 바퀴 둘러보는데 라면 끓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입구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은 적이 없는데도. 비를 피하려 차양 밑으로 피한 사람 중 몇몇은 전시회장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물기가 조금씩 미끄러운 바닥으로 흘러들었다. 신발에 묻은 벚꽃잎이 조금씩 늘어났다. 비 냄새, 벚꽃 냄새, 향수 냄새, 살 냄새가 섞여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전시회장을 채웠다. 아스팔트 바닥을 멍하니 바라봤다. 흙탕물에 둥둥 떠 있는 벚꽃잎, 공간 없이 거리를 메운 차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들.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들을 보험도 없고, 빌릴 돈도 없고, 납치당할 지인도 없는데.

다들 전등 옆 테이블에 올려진 동물들을 홀린 듯 쳐다봤다. 전시회장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동물은 펭귄이었다. 이게 펭귄이라고? 키득거리며 웃는 연인들뿐만 아니라 돋보기안경을 쓴 노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나는 그날 이후로 손톱을 모으러 다녔다. 처음에는 또 병이 도졌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미대를 다닐 때 동기들은 나를 고물상이라 불렀다. 진득이 자리에 앉아 캔버스를 두고 멀리 풍경을 소묘하는 그들과 달리 나는 자꾸만 뭔가를 만들려고 했다. 멀쩡한 페트병을 모아 찌그러트린 다음에 도화지에 올려놓기도 하고, 공깃돌을 모아 그 안에 든 가루를 흩뿌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돌사진을 모아 그 인물만 오려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돌잔치를 하는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강의 시간에도 뭘 만들지를 떠올렸고 한 번 정하고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덕분에 성적은 엉망이었고 어느 날은 몸이 아팠다. 기나긴 휴학 끝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내가 만든 작품들을 누구에게 보여줘도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동기들은 나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엉망으로 살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예술을 한답시고 삶을 망치면 안 되지. 그런데도 후배들 앞에선 나를 들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얘가 그래도 우리 중에 가장 예술가야. 그 말을 들은 뒤의 눈빛이란, 어쩌면 이렇게까진 살지 말아야겠다 같은 것이었다. 나는 연거푸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취한 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니까. 그 무렵은 우울한 일들뿐이었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돌아다닌 시간들이 그랬고, 그런데도 뭔가 자꾸만 만들어낸 뒤에야 그게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고민들이 그랬고,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라는 엄마의 말에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던 거짓말들이 그랬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선배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회사 생활에 대해 한탄하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작게 속삭였다. 니들도 잘 봐, 쟤처럼 자기 분수에 안 맞는 일이나 하고 다니면 이렇게 초라해지는 거다, 예술, 그거도 임자가 있는 거야. 내가 그 얘길 듣고 있는 걸 잘 알면서도. 혼자서 그림을 그리던 동기가 죽었을 때, 나는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땐 또 뭘 만들었을 테니까. 한 적도 없는 말이 나돌았고, 해본 적도 없는 일들로 유명해졌다. 저 선배가 예술한답시고 다른 선배들 앞에서 쌍욕하고 뒤로는 후배들이랑 자고 다녔대, 저 선배가 집안이 그렇게 잘 살아서 학교도 엉망으로 다니고 참 편하게 산대, 저 선배가 십 년을 저렇게 살았는데 어디 가서 상 하나를 받은 적이 없대. 졸업식 날, 별로 친하지도 않던 동기 하나가 물었다. 소문 말이야, 다 가짜인데 왜 해명하려고 안 해? 나는 학사모를 벗어 던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래야 하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아는 사람은 알 텐데 왜 그래야 하지?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아는 사람은 알 텐데 앞으로 평생 모르고 지낼 사람한테 왜 그래야 하지? 우스운 농담, 간헐적인 안부, 좋은 소식과 애써 좋은 척하는 소식들은 금방 식었다. 나는 곧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혼자가 되니 좋은 게 있었다. 아무도 내가 예술을 한다는 걸 몰랐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랬다. 나는 내가 뭘 만드는지, 그게 어디에 쓰이는지, 그걸 왜 만드는지, 만들어서 어떻게 할 건지 따윈 전혀 신경 쓰질 않았다. 그냥 맨 처음 생긴 우주와 그 우주 안에 맨 처음 생긴 지구와 그 지구 안에 맨 처음 태어난 사람처럼, 무언가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 하지만 곧 시들해졌다. 일 년에 나는 팔 개월쯤 시들했고 사 개월쯤 무기력했다. 그러니까 팔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대체로 시들했고 때때로 무기력했다. 그날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까지.

손톱을 모으러 다닌 첫날부터 모든 게 쉬울 거란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고, 손톱은 생각보다 잘 모이지 않았고, 손톱을 이어붙이는 작업도 쉽지 않았고, 게다가 손톱을 이어붙여 만든 첫 작품인 펭귄도 전혀 펭귄 같지 않았다. 그건 무슨 뼈대만 남은 고대 펭귄의 화석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몇 마리의 동물을 더 가지고 싶었다. 웰시코기와 뱅갈고양이를 만드는데 일 년이 걸렸다. 열 번째 전등을 샀다. 그 전등은 히말라야 소금등이었다. 혹등고래와 나무늘보와 청설모와 반달가슴곰을 만들 땐 요령이 붙어 육 개월이 지났다. 실제 동물들의 크기가 어떻든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만한 크기를 만들었다. 그만한 크기를 만들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톱이 들어갔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적게 잡아도 수천 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 만나진 못했어도 손톱만 전해 받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새 누군 죽었고 누군 중환자실에 누웠고 누군 자식을 낳았고 또 누군 이민을 갔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동물들로 전시회를 하고 나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삵과 산양과 수달까지 만들고 나선 열한 번째 전등을 사는 계획을 조금 미뤘다. 전시회 첫날은 아무도 오질 않았다. 아마 그 드라마에 전시회장이 잠깐 나오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수목드라마를 그렇게 많이 보고, 심지어 젊은 사람들까지 먼 곳에서 볼 것 없는 이 공간에 찾아오는 이유가 고작 드라마에 일 분쯤 나왔기 때문이란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 관계자는 내 전시회가 드라마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고 말했고, 전시회는 짧게나마 뉴스에도 잠깐 나왔다. 그 일 분이 내 십 년보다 나았다. 전시회는 고작 보름이었다. 드라마가 방영된 다음 날, 나는 수많은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전시회장에 잠깐 얼굴을 내비칠 요량으로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오래된 선배, 드문드문 술자리를 같이 한 후배, 정년퇴직한 교수님, 동네 친구였던 남자, 잠깐 사귀다가 헤어진 연인까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선배에 대한 소문이 다 가짜인 걸 알았다고, 학교 뻔질나게 안 나올 때부터 크게 될 줄 알았다고, 동네에 내가 자기 친구라고 자랑하고 다닌다고, 아직 혼자 산다고. 나는 종종 웃었고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커피를 사주기도 했지만, 끝내 바쁜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나는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열 개의 전등과 열 마리의 동물들. 밤이 되자 비가 그쳤다. 선술집의 불빛이 켜지고 교복 입은 학생들이 길을 지나가고 베란다에 넣어 놓은 빨래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낀 연인들은 웃으며 들어왔다가 역시 웃으며 나갔다. 동물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대게 다 비슷한 숫자였지만, 아무래도 펭귄이 가장 괜찮았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펭귄은 동물원 의자에 앉아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뒤뚱뒤뚱 걸어가다가 순식간에 물결에 몸을 맡기고 헤엄치는 작은 몸, 길쭉하고 날씬한 날개, 툭 튀어나온 부리. 그 여름날에 나는 내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다리에서부터 손톱을 이어붙이면서도, 몸통을 만들고 나서도, 얼굴을 뜨고 눈을 붙이면서도. 어설프게나마 펭귄을 다 만들고 동물원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면서 문득 여기 어딘가 숨어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니고 더더욱 사람도 아닌 무언가로.

처음 본 번호였다. 처음 봤는데도 나는 그 번호로 온 전화를 꼭 받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얕은 기침이 들렸다. 그 기침 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만날래요? 남자는 너무 뻔한 말을 낮게 뱉었는데도 그게 오히려 뻔하지 않게 들렸다. 만나자. 나는 오늘 내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한강은 아직 추웠다. 나는 다리 밑으로 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근처에 살면서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이었다. 대학을 다닐 땐 밤늦게까지 계단에 앉아 누가 노래 부르는 걸 들었다. 거긴 아저씨도 있었고 젊은 남자도 있었고 할아버지도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부르다 어느새 마지막 사람이 돌아가는 걸 바라보면 금방 새벽이었다. 남자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처녀 귀신처럼 기다란 흰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늘어뜨리고선 손도 흔들지 않고 가까이 걸어왔다. 조명은 낡고 희미했다. 어딘가 의자에 앉고 싶었는데 비가 온 탓인지 젖지 않은 의자가 없었다. 남자는 내가 졸업반일 때 신입생이었다. 뭘 그려도 끝까지 그리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사과를 그리면 사과를 반만 그리고, 풍경을 그리면 왼쪽만 그리고, 사람을 그려도 반쪽만 그렸다. 상체랑 하체 중에 뭐가 좋아요? 남자는 그렇게 물었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 싫은데. 남자는 그림을 보여주며 속삭였다. 선배는 상체가 없어도 하체로만 돌아다닐 거 같아요. 나는 그 남자에게 반했다고도, 반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무렵에 같이 살게 되었다. 남자는 꼼꼼하고 청결한 편이었다. 어떻게 된 사정이고 무슨 이유인지 물을 수 있었지만, 그냥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비밀 하나 알게 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어서. 한동안은 내내 불편했다. 모르는 사람과 사는 게 당연히 그렇듯.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익숙해졌다. 건조대에 널린 트렁크 팬티, 화장실 쓰레기통에 들어있는 누런 휴지 뭉치, 샤워하고 나온 뒤에 수건으로 가린 나체의 일부 같은 것들. 어느 날은 남자가 내게 시시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요, 선배 쩔쩔매는 게 꽤 재밌거든요. 나는 그런 말들이 곧 사랑인 줄 알았다. 남자는 노래가 잘 들리지 않는 광장까지 나와서 작게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선배 소식이 들려오던걸요?

별일 아닌데도, 그치?

또 누가 연락했어요?

글쎄, 받질 않아서.

우리가 왜 한강에서 만난 줄 알아요? 저 여기서 푸드트럭해요. 누군 공무원이 됐고 또 누군 변호사가 됐대요. 예술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선배뿐인 거 같아요.

우스운 얘기지.

손톱으로 만든 조형물이라죠, 갑자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한 거예요?

일이 좀 있었어.

거짓말.

남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실실 웃었다. 살짝 앞에서 남자가 걸은 탓에 표정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불빛 앞에 남자의 몸은 작고 야위어 보였다. 남자는 서서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좀처럼 그 눈빛, 그 얼굴, 그 오묘한 자세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데 조금 불콰하고 또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좀스러운. 남자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그제야 몸이 뜨겁고 손에서 땀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떠오른 게 아니잖아요. 그날 밤 내가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거 아녜요? 손톱에 관한 얘기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 걸 만든 거 아니냐고요. 난 사실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그런데도 그 얘길 듣는 순간 알겠더라고요. 선배가 내 걸 훔쳐 갔구나.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선배는 분명 알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일이 좀 있었다고 그런 생각이 들 리 없잖아요. 솔직해져요. 그거 표절이잖아요. 새빨간 표절이잖아요. 뭐 어때요. 좀 베끼고 훔치고 몰래 슬쩍 써도. 우리가 그때 결혼했으면 괜찮았을까요? 여기서 가장 우스운 게 뭔지 알아요? 선배가 새침 뚝 때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선배, 제가 신기한 얘기해드릴까요? 그건 천둥이 치는 밤, 같이 영화를 보다 남자가 꺼낸 말이었다.

 

제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일이에요. 오늘 같은 밤, 오늘 같은 날씨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죠. 거긴 그런 게 없으니까요. , 어렸을 때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아요? 우리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선배, 저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해 본 적 없어요. 선배한테 처음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별로 긴장되지 않아요. 왜냐면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선배가 믿지 않아도 괜찮거든요. 어차피 우린 거기로 갈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시작은 도시의 어느 작은 학교에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여러 무리가 있잖아요. 맨 앞자리에서 공부만 하는 학생도 있고, 어중간한 자리에 앉아서 공부도 안 하고 자는 학생도 있고, 맨 뒷자리에 몰려 앉아선 게임이나 하는 학생도 있고, 이런 애가 우리 반에 있었나 하는 학생도 있고요. 그중에 저는 냄새 나는 학생이었어요. 사실 저는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해요. 매일 밤 몸을 벅벅 씻는데도, 가족들한테 냄새가 나냐고 물어도, 온갖 나쁜 냄새를 맡은 후에 제 몸 냄새를 맡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잘 알아요. 냄새가 난 게 아니었고, 설령 냄새가 났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요. 저는 왕따였어요. 그 무렵엔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집이 좀 힘들었거든요. 그 문제로 담임 선생님께 몇 번 상담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죠. 사실 별말 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꼭 미대에 가고 싶다고 했고, 담임 선생님은 네 성적에 미대에 가는 게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래 봬도 저 성적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걔네들이 저를 괴롭힌 건 봄이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처음에는 좀 으스스한 장난에 불과했어요. 책상에 죽은 새를 넣어 놓는다거나, 사물함 안에 책을 전부 불태운다거나, 체육복 주머니에 지렁이를 넣어둔다거나 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살면서 여태까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요? 절대 피할 수 없는 곳으로 절대 가고 싶지 않은 상태로 가는 일이에요. 그런 일에 비하면 걔네들이 괴롭힌 건 그냥 우스웠어요. 반응이 없으면 그만둘 줄 알았거든요. 근데 전혀 아니었어요. 당연했겠죠. 그 일이 있던 건 어느 음악 시간이었어요. 제가 음악 교과서를 안 가지고 온 날이었죠. 걔네들 중 하나가 제가 다가와선 음악 교과서를 빌려줬어요. 제가 거절하기도 전에요. 전 당연히 그걸 조금도 보지 않고 걔네 책상에 다시 넣어뒀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문제가 생겼어요. 그 교과서가 사라진 거죠. 걔네는 나한테 책임을 물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교과서는 딱 한 종류뿐이었고, 시중에 파는 책도 아니었죠. 저는 아주 멀리 지하철을 타고 그 교과서를 파는 곳에 찾아가서 겨우 교과서를 구했어요. 그런데 다음엔 체육복, 다음엔 도시락, 다음엔 리코더, 끝이 없었죠. 선심 쓰듯 건넨 물건을 억지로 받아서 아주 조심히 돌려줘도 결국 잃어버린 건 나였어요. 그때부터 맞고 또 맞았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까마득히 떨어져 있었어요.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었죠. 그땐 더더욱 그랬어요.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죠. 늦은 밤에, 학교 옥상에 올라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제가 죽어서 걔네가 아주 끔찍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폴짝, 뛰었어요. 제가 죽었을까요? 그럼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때 가본 거예요. 삼십 년 뒤의 세계를.

어떤 느낌이었냐면 아주 밝았어요. 로봇 같은 거? 그런 건 없었어요. 다 사람이었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어요. 거기서 사흘을 지냈어요. 잠을 잘 필요도, 다른 곳으로 갈 필요도, 일할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배가 고프면 먹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수영을 하고 술을 마셨어요. 정신이 몽롱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좀 더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제가 그 집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누가 제 팔을 잡았어요. 군복을 입은 소년이었어요. 어디 가세요? 소년이 묻기에 대답해줬죠. 바깥으로 가보고 싶다고. 소년은 고개를 저었어요. 바깥은 없어요. 저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 입을 꾹 닫았어요.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어요. 주변을 둘러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지평선도 없고, 도로도 없고, 백화점도 없고, 교회도 절도 없고. 여기서 뭘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은 다음엔 뭐가 있을까. 그리고 거기서 걔네가 있는지 찾아다녔어요. 거긴 좁고 작아서 금방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이상한 건 거기엔 거울도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알 수 있었어요. 지금 제가 제가 아니란 걸요. 다른 사람의 몸 안에 잠깐 들어 와있다는 걸. 눈을 떴을 땐 병원 침대였어요. 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저는 곧 그 학교에서 전학 갔어요. 걔네는 남고 저는 떠난 거예요. 근데 진짜로 신기한 게요. 보통은 그런 걸 보면 믿지 않거나, 믿어도 그게 너무 나빠서 부정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괜찮았어요. 어차피 이렇게 엉망으로 살다가 다 죽어버릴 건데,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아프리카 기아들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한 사람도, 사람 눈알을 모으기 위해 수십 명을 죽인 사람도, 아프고 병든 누군가를 위해 평생 기도를 하며 산 사람도, 벽화를 그리거나 성당을 짓거나 나무를 기르는 사람도 결국 죽는 거예요. 오히려 죽지 않은 사람들이 불쌍했어요. 부모를 잃은 사람도 있을 거고, 연인을 잃은 사람도 있을 거고, 자식을 잃은 사람도 있을 테죠. 그런데 더 신기한 게 뭔 줄 알아요? 그게 너무 슬퍼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오히려 뭔가 두근두근한 기분이었어요. 좋은 일도 아닌데, 아직 머나먼 일인데, 그 전에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한 명씩 떠올렸어요. 나쁜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요. 그 사람도 거기로 가면 죽고, 그 사람도 거기로 가면 죽고. 선배는 어떤 줄 알아요? 혹시 선배도 듣고 싶어요? 제가 선배가 죽은 세계를 상상했는지.

 

내가 남자에 대해 많은 걸 잊어버린 건 서너 가지 기억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기억은 그 기억을 지닌 인물보다 더 커 보이기도 한다. 나는 마르고 건조한 음성으로 뱉던 고백의 날을 기억한다. 학교 축제에서 몰래 빈 강의실에 들어가 했던 첫 섹스의 날도,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던 어느 새벽의 날도, 예전에 다녔던 학교에 가보고 싶다며 조금 긴장했던 그 손을 꽉 쥐고 교문을 통과하던 날도. 그런데 그게 다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게 다 진짜가 아니었다면, 나는 생전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 셈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결혼하기로 결심한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남자가 멀리 가고 싶다고, 어디든 멀리 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대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극장에 갔다. 그 극장은 워낙 소극장이라 사람이라곤 표를 끊어주는 남자뿐이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 똑같았다. 우리는 큰 소리로 대사를 따라 하고 팝콘을 집어 던지고 화면 앞에 서보기도 하다가 이내 극장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국적인 풍경, 이국적인 언어, 이국적인 상황들. 나는 슬쩍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스웨터 안에 손을 넣고 싶었다. 몸을 부드럽게 만지고, 같은 목소리로 웃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곳에서 나가서 오늘은 잊어버리길 바랐다. 남자는 내 손이 스웨터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쓱 빼곤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게 거절의 표시인지, 아니면 그냥 부끄러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장난을 치는 건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갑자기 통통 튀듯 걸으며 극장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바라봤다. 남자는 오래 못 가 내 옆에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세계가 빙빙 돌아요.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던가요? 선배 말이에요. 괜찮아지던가요? 올해로 몇 년이 지났어요? 뭐라고 딱 말하기도 어려운 그 일 말이에요. 그게 괜찮던가요? 몹시 나쁘진 않던가요? 견딜만하던가요? 견딜 만은 한데 점점 무섭던가요? 선배, 선배는 왜 대체 그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뭐가?

우리 말이에요. 우린 무슨 관계에요? 선배는 나랑 어디까지 같이 갈 생각이에요? 결혼할 맘은 있어요? 애를 낳을 마음은 있어요? 같이 늙어갈 마음은 있어요? 같이 죽을 마음은요?

아직 그렇게까진 생각 안 해봤어.

거봐요, 선배는 몹시 불행하죠.

남자는 다시 벌떡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남자가 물어본 질문 중에 뭐 하나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게 조금 착잡했다. 영화는 혼자 떠나버린 연인을 찾으러 머나먼 길을 떠나는 남자의 얘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비행기도 아니고, 배도 아니고, 기차도 아니고, 그 먼 길을 걸어서. 걷다가 남자는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되는 그런 내용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목소리만 가만히 듣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말이 아닌데도. 나는 남자를 따라 눈을 감았다. 계속 들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자꾸만 남자가 물었던 모든 질문이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그냥 집을 빌려준 사람, 남자는 그냥 집에 잠시 얹혀사는 사람. 가끔 같이 잠을 자고, 또 가끔 비싸진 않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또 가끔 바람을 쐬기도 하는 사람. 나는 그제야 사랑을 위해 버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위해 버릴 수 있는 게 사랑뿐이란 걸. 남자는 그걸 알았을까? 남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선배랑 결혼하고 싶어요. 왜인 줄 알아요? 이건 정말로 아주 중요한 비밀인데요, 선배니까 특별히 말해줄게요. 사실은, 사실은요. 저 누가 불행한 게 좋아요, 그 누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어요, 그냥 불행하면 좋아요. 좋다는 게 막 간단한 게 아니에요. 저 변태도 아니에요. 근데도 그런 기분이 들어요. 선배가 불행한 걸 보면요,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요, 그건 어떤 모양인지, 어떤 냄새고 어떤 느낌인지를. 사실 그런 게 뭔지 선배는 잘 모를걸요? 정작 본인은 불행이란 걸 알고 싶지 않겠지만요. 그래서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고 싶어요. 선배가 가진 불행이 뭔지를. 그리고 저랑 결혼하면 더 불행해질 테니까요. 선배는 알려나 모르겠지만, 저 불행 보증 수표 같은 사람이거든요.

나는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남자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버스 안에서는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 남자는 갑자기 어딘가로 총총 뛰어갔다. 나는 남자의 뒤를 쫓았다. 남자는 그새 골목길을 돌아 사라졌다. 짧은 메시지가 왔다. 오늘은 돌아가지 않을래요. 나는 남자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나 먼 행복보단 아주 가까운 불행이 더 괜찮아 보일 때가 있을 것만 같다고, 그건 실제로 존재하고 게다가 아주 희미하다고, 동이 트기 전이 제일 어둡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절대 끝나지 않은 밤의 끝자락에 잡아둘 거라고.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잠이 깨고 나서야 남자가 집에 있는지 확인했다. 남자는 맨바닥에 누워 죽은 듯 자고 있었다. 나는 천일 기념으로 부산에 가자고 말했다. 아직 천일까진 백일도 넘게 남았는데도. 그때까지 모든 게 괜찮을 거란 믿음도, 질문 중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생길 거란 믿음도, 불행 보증 수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없는데. 남자는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다 대뜸 말했다. 저 일부러 선배한테 접근한 건 아니에요.

 

전시회의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거기에 있었다. 보름의 시간이 지날 동안 나는 전시회장 가까이 가려고 들지 않았다. 남자가 입구에서 커다란 팻말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한강의 길을 다시 거꾸로 올라간 남자가 푸드트럭에 올라타는 몸짓이 뭔가 의기양양해 보였다. 아직도 내 불행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듯. 나는 좀처럼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예 문 앞에 선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지막 날이어서 아침엔 손님이 많았다고 말하는 경비 아저씨에게 근래 이상한 손님이 없었는지 물었다. 이상한 손님? 괜찮아, 내가 계속 지키고 있잖아. 그거랑은 관련이 없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애석하게도 다시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이 건물 안에서 쏟아졌다가 기웃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헐레벌떡 들어 온 남자 하나가 바닥에 커피를 쏟은 것만 빼면 조용했다. 가끔은 손을 뻗어 펭귄을, 혹등고래를, 웰시코기를 만지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막질 않았다. 오늘 이 전시회가 끝나면 어차피 다른 걸 만들어야 할 테니까. 남자는 푸드트럭에 올라서기 전에 뒤를 돌아서서 물었다.

근데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선배는 왜 그렇게 집착하세요?

?

이제 정말 그만할 때도 됐잖아요.

이제는 정말로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뭔가를 만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비버 알아? 비버가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집을 만들어. 그걸 부수잖아?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다시 집을 만들어. 부수면 또 만들고 부수면 또 만들어. 우린 뭘 만들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다는 거야. 그게 뭐든 말이야. 평생 먹고살 돈일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할 아이일 수도 있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일 수도 있지. 다들 뭘 만들어. 그렇잖아. 근데 왜 나만 불행한 것처럼 난리야? 나만 불행해야 하는 거야?

아뇨, 아니에요, 선배, 다들 불행해요, 더 불행한 사람을 보고 위안을 얻는 척하지만, 사실 다들 자기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걸요.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대신 실어줄 택시를 불렀다. 사람들은 전부 어딘가로 돌아갔다. 전시회가 끝난 뒤에야 내게 아무런 사진도, 아무런 영상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보름은 이미 지나갔다. 술집에서 고기 냄새가 났다. 며칠 사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게 문득 떠오르자 배가 아팠다. 택시 아저씨는 이걸 전부 실을 순 없다고 엄포를 놓고선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아 거리에 남겨진 것들을 바라봤다. 가지고 돌아갈 수도, 아예 없었던 것처럼 버릴 수도 없는 것들. 남자는 검정 정장에 감색 베레모를 쓴 채 가로등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나는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늦었네?

불안하지 않아요?

뭐가?

제가 모든 걸 망칠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아직도 그래요.

망설이는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녜요. 그거 알아요? 한강에서 자살하면 그 가족들이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얘기. 선배가 거기서 죽으면 제가 돈을 내줄게요. 그리고 선배에 대해 말해줄 수도 있어요. 선배를 보는 내내 기뻤다고, 그지없이 좋았다고요.

 

그날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헤어지면 되지. 남자는 그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던 남자가 물었다. 먼저 씻을래요? 대답 없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물이 너무 뜨거워서 몸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다니. 변기에 앉아 나가서 뭐라고 말할지 생각했다. 그냥 농담이었다고, 무심결에 나온 말이라고, 돌이킬 수 없는 건 아니라고. 바깥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가슴이 덜컹했다. 혹시라도 테라스에서 뛰어내렸을까. 문을 천천히 열었다. 남자는 책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다 씻었어요? 나는 수건을 몸에 두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침대에 누웠는데도 남자는 도통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폭죽을 하기에도, 산책을 나가기도, 여행을 오기에도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남자는 차분하고 시큰둥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걸까? 갑자기 남자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미리 눈치라도 주지. 남자는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잡더니 묶는 시늉을 했다. 머리 좀 잘라줄래요? 나는 그게 남자가 물은 건지, 아니면 환청을 들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 그 말은 왠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진짜로 머리를 잘라 달라는 말 같았다. 한기가 들어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나는 그때 뭘 무서워한 걸까? 테라스의 창이 저절로 닫혔다. 서둘러 침대 옆의 작은 등을 켰다. 주황 불빛이 은은히 물들었다. 남자는 미동도 없이 뭘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물었다. 안 씻을 거야? 그때 남자가 갑자기 웃었다. 그건 기뻐서 웃는 것도, 슬퍼서 웃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고르고 편안한 숨결처럼 반복적이고 낮은 웃음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을 듣고 있을수록 마음이 안정됐다. 꼭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었던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남자는 또 갑자기 딸꾹질이 멎은 것처럼 웃길 그만두곤 말했다.

선배가 씻으러 간 사이에 손톱을 깎으려고 했어요. 손톱이 너무 길더라고요. 다행히도 서랍에 손톱깎이가 있었어요. 손톱을 깎다가, 깎다가 생각을 하니까요.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왜 여기까지 왔지. 여기까지 왔는데 왜 손톱이나 깎고 있지. 오늘은 좋은 날인데 왜 이런 우울한 얘기만 하고 있지. 그런데 선배는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지. 그런 식으로 말해놓고선 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씻으러 갔지. 그러다가요. 또 계속 이상한 걸 생각해내는 내가 이상하더라고요. 별일 아닐 텐데. 그렇죠? 별일이 아닌데도요. 다들 만나고 헤어지고 하잖아요. 손톱을 다 깎았어요. 책상에 손톱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는 순간에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 별로인가? 좋은 사람으로 살아본 적 없으니 그걸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다음엔 어떻게 생각한 줄 알아요? 어쩌면 손톱까지도 악질인 사람인가? 이 작은 손톱까지도 나를 경유하면 악질이 되는 걸까? 그렇잖아요. 자신이 너무 싫은 거예요. 누가 불행하고 누가 더 불행하고 그런 걸 보고 괜스레 기뻐하는 게. 이러다가 내 불행마저도 기뻐하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너무 싫은 거예요. 이런 사람은 나뿐일 거라, 세계에 이런 사람은 있으면 안 되는구나, 다들 이렇게 산다고 믿었는데 사실 아니었구나, 그래서 헤어지자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선배가 나왔어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게 너무 웃기잖아요. 어차피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닌데. 선배가 무슨 현자도 아닌데. 어차피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요. 선배가 내 머리를 잘라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선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어때요?

어떠냐니?

정떨어지지 않아요?

손톱까지도 악질인 사람은 없어.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아.

그럼 증명해봐요.

나는 남자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남자는 가만히 몸을 뉘고 나를 올려봤다. 전등의 불빛이 꺼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야 해, 나에 대한 일을 모두 믿지 않아도 이것만큼은 믿어야 해. 남자는 서서히 눈을 감고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눈 깜짝할 사이 새벽이 지났다. 이제부터 밤이란 밤은 전부 없다는 듯. 아침이 된 뒤에 우리는 짧은 식사를 했다. 기차에서 나는 조금 졸았는데 남자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남자는 나보다 먼저 내렸다. 굳이 역사에 서서 전화를 건 남자가 이렇게 물었다. 다시 만나면 날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뭐라고 말했던 걸까. 그걸 아는 건 남자뿐이었다. 영영 알 수 없는 데다가 좀처럼 믿을 수도 없는 어떤 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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