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편지

by 현실도피 posted Jun 09,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편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 이야기는 30년 동안 비밀로 간직해온 나와 그 사람. 그러니까 나와 너의 오빠에 관한 이야기야.

믿겨지니? 무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어서 몇 번이나 수화기를 들었다 내려놓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 사람의 마지막 말이 항상 나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지.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는지 전화보다는 편지로 이 사실을 전하는 게 나에게는 더 수월하게 느껴졌어.

혹시나 그 때 가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이 편지는 그냥 폐기하거나 장롱 깊숙이 꽁꽁 숨겨놓으면 그만이니까. 다소 비겁해보이지만 좋은 방법이지.

갑자기 드는 우스운 생각이지만 어쩌면 내가 죽은 후 누군가에 의해 이 편지가 발견될 지도 모르지. 만약 너 아닌 타인이 이 편지를 읽는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건 대체 무슨 마음일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내 심장을 할퀴고 상처 내는 거짓말이라는 수천 개의 가시보다는 네가 받게 될 충격이 더 마음에 쓰였던 모양이야.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까.

다만, 네가 이 이야기로 인해 어떠한 영향을 받을지에 대해 지레짐작하거나, 기나긴 시간 동안 내가 안고 온 이 무거운 짐에 비하면 너의 상처는 아무 것도 아닐 거라는 식의 피해망상적인 생각 따위는 집어치우도록 할게. 맹세해.

너는 나를 이해하려 애쓰거나 동정할 필요도 없어.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는 것 그거 하나뿐 이야.

그에게 있어 너는 항상 그저 하염없이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순수하고 착한 동생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이 비밀을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안고 가기를 바랐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너는 항상 남들보다 성숙했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수년이 흐른 지금 너는 더 이상 성장할게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성숙체가 되어있을 거라 확신한단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제 살만큼은 살았고 남아있는 생만큼은 아주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아 편안하게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이런 나의 생각이 너에게 너무 이기적으로 비춰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그저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내기에는 지칠 대로 지쳐버린 인간일 뿐 절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니? 그 당시 나는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촉망받는 우수한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너의 과외 선생님이기도 했지.

여느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자식의 성공에 열의가 가득 찬 너의 어머니에 비해, 공부에 대한 의욕 이라고는 찾아볼 데 없었던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기억이 다소 흐릿해지긴 했지만 그 시절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던 적이 없어서 그 때의 잔상이 그대로 남아 여전히 아련한 기분이 들곤 한단다.

지금도 순간순간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 마다 그 때의 기억을 꺼내보며 여태까지의 불행을 위안 삼곤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게 무슨 말인지 새삼 실감하고 있단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내 앞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 순간에는 아무리 엄청나게 심각한 일처럼 여겨져도 다음 날이 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금방 가물가물 해지거든.

그리고 너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던 그 해에 그 남자를 만났지.

지금부터는 편의상 오빠라고 할게. 나도 그를 오빠라고 불렀으니까 말이야.

그날은 오빠가 군대를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는데,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네가 자리를 박차고 현관까지 한걸음에 달려갔지.

평상시 네가 오빠와 함께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많이 들려주었기 때문에 그걸 기반으로 오빠의 성격을 비롯하여 너와 오빠의 친밀도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었어. 

심지어 때로는 내가 오빠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오빠도 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어. 어쩌면 네가 전화상으로 새로 온 과외선생님에 대해 멋지고 좋은 얘기를 해주길 바랐는지도 몰라.

나도 내가 대체 왜 그런 비이성적인 감정과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이미 네가 들려준 이야기만으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내가 그러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을 경험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에게는 너무 생소한 감정 이었어.

단순히 사춘기 때 또래 남자아이에게 느끼는 호감이나 설레는 감정이 아닌, 사막에서 느끼게 되는 갈증과 같은 그런 열망 말이야.

한 번은 오빠도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는 말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남자가 내 남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고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내 욕심이고 이기심이라 생각했어.

너는 오빠와 내가 이런 관계였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고 있었니? 이 편지에서 너에게 털어놓고자 하는 비밀 중 하나가 이거였는데, 만약 네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초반부터 너무 충격 받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직 시작일 뿐이니까 말이야.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책 중 하나인 ‘폭풍의 언덕’의 분량만큼은 충분히 쓰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편지를 쓰고 있자니 책 한 권은커녕 한 문장을 이어나가는 것조차 몹시 더디게 진행되는구나 싶다.

요즘 들어 유난히 표현하고자 하는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아 망설이거나 사전을 찾아보는 시간이 많아 졌어. 혹시나 나도 그 뭐라더라.

그래. 알츠하이머는 아닌가 싶어 병원에 가봤는데 다행히 의사선생님이 그건 아니라고 하셨어.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연령이나 스트레스가 기억력 상실에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지만 내 생각은 다르단다.

오빠가 떠나고 혼자가 된 뒤로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언어를 잊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너에게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찮은 얘기일가능성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지.

이제까지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혼자 끙끙 앓으며 간직해온 것이 별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하면서도 내 자신이 우습기도 하구나.

내 인생이 전부가 이 편지에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을 쓰는 것도 이렇게 버겁게 느껴지니, 대체 여태까지 무엇을 하고 살아온 건지 삶의 회한마저 든다.

어쨌든 이 편지의 목적은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고자함이 아니라 고백이니 만큼 밀려오는 나의 감정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었던 사실만을 그대로 전달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너도 나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궁금한 건 아닐 테니 말이야.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가끔은 너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린 적도 있었어.

네가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오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으며 사죄하고, 너는 그런 나를 용서해주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고 그 상상만으로 간신히 하루를 연명할 때도 있었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단다.

오빠와 함께 있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밤에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있을 때조차도 나를 향하던 너의 표정들을 떠올리곤 했단다.

그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행복해 해야 할지 죄책감을 가져야할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그 기억들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는 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쓴 편지를 읽어보는 수밖에 없었단다.

다시 이어나가자면 나는 그렇게 너에게 수학을 가르치러 가면서 가끔 오빠를 만날 때면 항상 마음속으로는 오빠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서는 오빠와 단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기대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회가 생겼어.

그 날은 무진장 더운 7월이었는데, 원래 과외시간보다 한 15분 정도 일찍 너의 집에 도착 했단다.

집에 가니 마침 너와 어머니는 쇼핑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며 오빠가 대신해서 문을 열어 주었어.

내가 간단히 인사를 건넸는데, 오빠는 내가 열고 들어온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후끈한 열기에 짜증이 났는지 얼른 문을 닫아버린 후에야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단다.

“밖에 날씨가 많이 덥죠? 뭐 시원한 거라도 드릴까요?”

나는 오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어. 내가 바라고 또 바라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연애경험이 전혀 없었던지라 너무 쑥스러웠던 거지.

오빠는 시원한 오렌지주스를 내주면서 자연스레 소파에 앉으며 켜져 있는 TV로 시선을 옮겼어.

이대로 가다간 힘들게 얻은 기회를 날려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용기 내어 말을 걸었어.

“오빠 여자 친구 있어요?”

내가 말하고도 스스로 당황한 건 처음 이었어. 왜냐면 나도 내가 이렇게 당돌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거든.

그 이후에는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어. 어느 순간 보니 오빠와 나의 관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해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깊어져만 갔어. 

물론 오빠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건 명백했지.

혹시라도 내가 편지에서 하는 말들이 오빠를 흉보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일단 그건 오해라고 말해둘게.

너도 알다시피 사람 마음은 결코 뜻대로 되는 법이 없지.

우리 모두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어떤 결과로 치닫게 될지 대략적으로라도 예측할 수 있고, 심지어 그 길이 명백히 잘못된 길이라는 의구심이 들지언정 내 마음이 이미 그 길을 향하고 있다면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잖아. 

그런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자괴감이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나에 대한 마음이 점점 멀어져가는 오빠를 보면서 그를 붙잡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했단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그 순간에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내가 노력하면 그의 마음쯤은 돌릴 수 있을 거라고 내 마음을 속이면서 이미 끝나버린 관계를 억지로 이어나갔어.

그렇게 곧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실로 유지된 관계가 얼마나 이어졌겠니.  

오빠가 나에게서 멀어져간다고 느끼기 시작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어. 물론 그 순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울고불고 매달리며, 무릎까지 꿇고 사정했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그렇게 나를 떠나갔어.

그러고 나서 한동안은 오빠가 없는 나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힘들어했는데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이 서서히 옅어져가더라.

굳이 비유하자면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 큰 흉터가 남았고, 그 흉터를 바라볼 때만 조금 힘들고 불편할 뿐 생활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는 정도랄까. 적절하게 비유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단한 시인은 아니니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해.

나는 다시 그가 없었던 때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 혼자만의 삶을 그럭저럭 잘 살아갔고, 한편으로는 더 이상 나를 흔들어놓을 사랑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던 거 같아. 

나의 바람대로 되었다면 너에게 이 편지를 쓸 이유도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빠는 그저 철없는 젊은 시절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대상으로 남아있었겠지.

오빠가 다시 나타난 건 우리가 헤어지고 2년이 지난 뒤였어.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서 외출하기조차 힘든 날, 초인종 소리에 의아해하며 나가보니 비에 흠뻑 젖은 오빠가 추운지 몸을 덜덜 떨며 문 앞에 서있었어.

그 순간 나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니? 만감이 교차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100% 이해할 정도로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엉켜 온갖 세포들이 되살아나 나를 자극하는..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표현해야 그날의 나의 기분을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추위에 덜덜 떨며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어.

그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고, 그 순간 마치 사고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거든. 그저 오빠가 먼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리면서 서있는데, 오빠가 먼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와 버렸어.

지금도 나는 오빠의 면전에서 바로 문을 닫지 않았던 것을 진심으로 후회해.

나를 버리고 냉정하게 가버린 그 사람을 매몰차게 돌려보냈더라면, 그 순간 아니 며칠 동안은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몸서리쳐질 정도로 괴로울지언정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정말 몰랐어. 그 때보다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정말 알지 못했어. 믿어줘.

오빠는 나의 집에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어. 왜 남에 집에 함부로 들어 오냐고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 건네주는 것뿐이었어.

돌아보니 오빠와 사귀면서 오빠가 하자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그 의견을 따르면서도 정작 내가 아무리 하고 싶었던 것이 있더라도 오빠가 안 된다고 하면 쉽게 단념하곤 했었어.

그게 어느새 몸에 배어 습관이 되었던 모양이야.

나는 소파에 앉아 오빠가 무언가 말해주길 기다렸어.

조금 어이없겠지만 어쩌면 오빠가 우리의 관계 아니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나를 밀어냈던 것에 대해 반성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말이야.

하지만 오빠에게서 들려온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뿐더러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말이었어. 그리고 너에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이 얘기를 너에게 직접 전해야만 하는 상황을 생각만 해도 아찔하구나. 이렇게 글로 쓰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려서 쉽게 써내려갈 수 없는데 말이야.

"나 사람을 죽인 것 같아."

정말이지 내가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고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고 되물었을 때도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어.

"사람을 죽인 것 같다고. 아니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근데 오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2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그런 끔찍한 소식을 가지고 내 집에 찾아올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을까. 오빠가 살아있다면 물어보고 싶을 정도야. 

내 추측으로는 혼자서 그 비밀을 갖고 가기엔 너무 버거웠던 거야. 누구에게 그 비밀을 털어놓을까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오빠가 시키는 일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을 한심하고 미련한 나를 떠올린 게지.

어쨌든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나는 악착같이 오빠를 찾아내서 대체 왜 나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냐고 따지듯 물어볼 거야. 그리고 만약 정말 나를 그 정도로 우스운 존재로 생각했다면 너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오빠를 죽어서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앞뒤 상황을 파악해야 했기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오빠에게 물어봤어.

"고의는 아니었어. 그냥 살짝 밀쳤을 뿐인데..."

오빠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쥐어짜며 그렇게 말했어. 오빠의 몸은 집 안에서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고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지경이었어. 

나도 최대한 이성을 잃지 않고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려 노력했지만 그저 나약한 인간 중 하나일 뿐인 내가 얼마다 담담할 수 있었겠니.

오빠를 향한 일말의 기대감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이 상황이 부디 꿈이기 만을 바랄 뿐이었어.

"누구를 죽였는데." 

오빠는 여전히 바닥만 쳐다보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손만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뿐이었지.

답답한 마음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싶었지만, 그 순간 나에게 있어 오빠의 존재는 살인자로 돌변해있었기 때문에 혹시 나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고 나니 차마 닦달할 수가 없겠더라. 

일단 오빠를 진정 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정성스럽게 녹차를 우려서 갖다 주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내 머리에서 쥐어짜낼 수 있는 온갖 최악의 생각들은 다 했어. 그렇게 해야만 오빠의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해 대비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그제야 조금 이성이 돌아왔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내가 온 마음을 쏟아 사랑했던 그 남자의 얼굴 그대로라 오히려 그게 더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어.  

"내 말 잘 들어. 나는 너에게 내가 저지른 일을 전부 털어 놓을 거야. 네가 할일은 네가 죽을 때 까지 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거야."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 날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난 지금 나를 억누르고 있었던 비밀을 너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오빠와의 약속을 깨고 있는 것과 동시에 아주 조금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어. 

어쨌든 오빠가 그 말을 했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절대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 남들에게 숨겨야만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한다는 것은 같이 지옥에 떨어지자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 

"난 오빠 얘기 듣고 싶지 않아. 당장 내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나는 오빠를 거부했어. 그 어느 때보다 내 의견을 단호하고 철저하게 전달하려 노력했고 그게 통하기만을 간절히 바랐어. 

하지만 오빠는 나의 얘기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이 가만히 앉아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내 손목을 붙잡았어.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나는 오빠의 말을 듣는 순간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될게 분명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오빠의 마수에서 벗어나야만 했어.

오빠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려했지만, 나의 힘으로 오빠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어. 

아. 그때 신께서 나에게 좀 더 용기와 힘을 주셨더라면... 나는 발악하는 것도 지쳐 혼이 나간채로 오빠의 말을 듣고 있어야만 했어. 여전히 나의 손목은 오빠에게 잡혀있었어. 

다음날 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더라.

"너와 헤어지고 어떤 여자를 만났어."

내가 왜 그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너는 이해가 가니? 그래도 혈육이니까 나보다는 감정적 연결이 더 깊을지도 모르지.  

"난 정말 걔가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어. 나도 그랬고."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어. 한마디 톡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괜히 그랬다간 화만 돋우거나 얘기가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겠더라.

오빠는 몇 분 동안 계속 자신의 연애스토리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는데,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핵심적인 내용만 말해줄게.

오빠의 얼굴에 일순간에 어둠이 드리운 듯 어두워졌어.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지.

"얼마 전에 내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카페에서 휴대폰을 두고 자리를 비운 게 화근이 되었지. 전화가 울리기에 대신 받아줄 요량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웬 남자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민정이 휴대폰 아니냐며.. 내가 민정이 남자친구라고 하니 얼른 전화를 끊어버리더라고. 그 때부터 나는 민정이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사실 의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확실했지만 그래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어."

이런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제대로 정신 나간 놈이구나 생각했어. 자꾸 너희 오빠에 대해 심한 말만 해서 미안하지만 잠시라도 내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 누구라도 나보다 덜한 반응을 취하진 못 했을 거라고 확신해.

"결국 민정이 집에 찾아가서 추궁했더니 사실을 털어놓더라. 심지어 나와 헤어지자고까지 말하기에 제발 이렇게 우리 관계를 끝내지 말라고 사정했더니 글쎄 화장실에 문까지 잠그고 들어가 버리는 거야.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문을 따고 들어가 어깨만 살짝 밀쳤을 뿐인데..."

뒤에 말을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어. 

결말이 이렇게 처참하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인과응보라며 그를 실컷 비웃어주었을 거야.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면서 인생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톡 쏘아주려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민정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를 생각하니 목이 메어 차마 입을 뗄 수 없었어.

"며칠 동안 경찰이 날 찾아오진 않을까 방구석에서 벌레새끼마냥 벌벌 떨어야만 했어. 1분 1초도 초조하고 긴장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죄책감이 나의 목을 옥죄어올 때마다 질식사할 것 같았어.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 이상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민정이 어머님께 연락했어."

오빠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녹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계속 이어나갔어.

"그리고선 아무 것도 모르는 그저 연락 안 되는 여자 친구를 걱정하는 상냥한 남자친구인척 가장하여 민정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연락이 안 된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어. 물론 스스로도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내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었겠니. 곧 민정이 어머님의 흐니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정이의 부고를 전하면서 실수로 미끄러운 화장실에서 뒤로 미끄러지는 바람에 욕조에 머리를 부딫혀 죽었다는 거야. 용의자에서 벗어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

오빠는 말을 마치고 내가 한마디라도 해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니. 그저 용건을 끝내고 빨리 사라져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야.

그렇게 오빠의 원맨쇼가 끝났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서야 그 자리를 떠났어. 특히 너에게만큼은.

나는 그 금기를 깨고 너에게 이 끔찍한 비밀을 넘기고 있긴 하지만 조금만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내가 이 비밀을 안고 살아야할 이유는 전혀 없잖아.

오빠와 나는 서로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너처럼 피로 연결된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 하물며 연인은 더더욱 아닌 완벽한 타인.

앞으로는 네가 이 비밀을 끝까지 떠안고 갈지, 아니면 지금에라도 모두에게 사실을 밝힐지 결정하면 된단다.

오빠가 나가고 몇 시간을 망연자실해서 앉아있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자신의 죄를 털어 놓은 건지 수도 없이 생각을 거듭했어.

어쩌면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내가 대신 경찰에 신고해주길 바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섣부른 행동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릴 엄두가 나지 않더구나.

세영아.. 그러고 보니 이 편지에서 너의 이름을 처음 불러보는구나..

세영아.. 내가 대체 어떻게 하면 좋았겠니? 이 사실을 알자마자 너에게 털어놓았어야 했던 걸까? 아니면 오빠의 말대로 이 비밀을 내 무덤 속에 함께 묻었어야했던 거니?

그걸 수도 없이 고민하는 사이 벌써 30년이 흘러버렸어. 세월도 무심하지...

오빠가 우리 집에 다녀가고 나서 내가 한 일은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7년 동안 혼자 살아온 집을 옮기는 거였어.  혹시라도 오빠가 다시 나를 찾아와서 괴롭힐까봐 두려워서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다잡고 부디 내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컸어.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연락처도 바꾸지 않고 이사도 가지 않은 것은 오빠가 내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엔 모두 부질없는 거였지.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오빠의 살인고백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어. 오빠의 삶도 나의 삶도 결코 예전과 같아질 수는 없었지.

결국 다니던 직장에서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금방 지쳐서 나가떨어져 버렸어. 회사에서 나와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접어버린 나는 집 안에 틀어박혀 버렸고, 부모님은 내가 대체 왜 멀쩡한 직장까지 그만두고 은둔생활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시면서도 다그쳤다가 내가 더 상처 받지는 않을까 싶어 한없이 조심스럽게 대하셨어. 그만큼 나의 상태는 남들 눈에 신경쇠약으로 보일만큼 끔찍했단다.

나도 자식 된 도리로써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을 망치는 것은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부모님은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나를 지지해주셨고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셨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 역시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로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빠가 내 인생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야. 더군다나 그 비밀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삶 전체가 이미 거짓으로 물들여진 것만 같았어.

더군다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지금보다는 더 극적으로 느껴졌어. 마치 내가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오빠가 나타나기 전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공부를 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를 거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오히려 전혀 특별할 거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지.

그런데 지금 내 몰골은 한없이 비참하기만 하구나.

나도 과거에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삶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장담컨대 절대 이런 절망적인 모습은 내 머리 속에 담아본 적조차도 없다고.

이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만해도 오빠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너에게 전달해주되 개인적인 감정은 일체 배제하겠다고 마음먹었었고, 표출할 감정 자체가 얼마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봐.

어쨌든 이 편지가 더 극단적으로 치닫기 전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들려줄 얘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도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주길 간절히 바랄게.

 

오늘은 마치 그 날처럼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야. 여기서 그 날이라고 하면 오빠의 비고를 들은 바로 그 날이란다. 화창한 날씨와 다른 울적한 소식이 다소 현실감 없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거든.

내가 그 소식을 어떻게 접하게 되었느냐면 끊어진 인간관계 속에 딱 한 명 1년에 한 두 번 정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가 있었거든.

그 친구를 알게 된 것도 역시 오빠의 소개를 통해서였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 친구의 부모님과 오빠의 부모님 그러니까 너의 부모님이 꽤나 막역한 사이로 지내왔었던 걸로 알고 있어.

그 친구는 오빠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빠와 연애하는 동안 그 친구에게 많이 의지했고 고민도 털어놓으면서 위로를 얻기도 했었단다.

그 날도 어김없이 할 일 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더라고.

나한테 연락 올 사람이 부모님을 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부모님이겠거니 하고 그냥 안 받아야지 하면서, 침대 안에서 끝까지 버티겠다는 일념으로 누워있는데 전화가 끊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울려대더라고.

자괴감과 우울감에 젖어 누워있기는 이미 글렀다는 생각에 억지로 침대에서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단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나도 깨닫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들이 그리웠던 모양인지 눈물이 핑 돌더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서로의 안부를 묻기가 무섭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들었거든.

오빠가 죽었다는.

그 얘기를 처음 들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너였단다. 네가 오빠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다 미어지더구나. 물론 너는 주제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이란다.

나는 그 친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었어.

나의 목소리는 내가 느끼기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차분하고 담담했어.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음주운전 이었어. 비탈진 커브 길에서 이탈하는 바람에 낭떠러지에 가까운 곳에서 추락했다고만 들었어. 하지만 난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아. 그 시간에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를 달려 대체 어디를 가고 있었던 건지. 게다가 진형인 음주운전 같은걸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너도 알지?"

물론 나도 알고 있었어.

오빠는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원칙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는 날이면 반드시 대리기사를 부르고 절대 자신이 운전대를 잡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너를 포함한 주변 많은 사람들이 오빠의 죽음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 어쩌면 지금도 말이야.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내 추론이지만, 오빠는 어쩌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걸지도 몰라.

오빠는 자신을 옭아매는 끔찍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을 거야.

시도 때도 없이 꾸게 되는 악몽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불현듯 차오르는 죄책감에 더 이상 일상생활이라는 사치를 누릴 수 없을 정도로 고통 속에 몸부림 쳤을지도 몰라.

어쩌면 조금이라도 마음에 위안을 얻고자 내가 이사 간 후 집에 찾아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내가 그 집에 살고 있었다고 해도 오빠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 했을 거야. 내 상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만큼 정상적이진 못했으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우리는 정확히 어쩌다 그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어. 모든 건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는 수많은 생각과 말 뿐이지.

어쨌든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어.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고 더 이상 너에게 비밀은 없어.

앞으로 네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온전히 너의 선택이야. 지금이라도 경찰서에 찾아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도 되고, 아니면 이제야 이 사실을 털어놓은 나를 평생 원망하면서 살아도 돼.

아직도 너에게 이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어. 앞에서 말했듯이 편지는 어쩌면 벽장 속에서 꽁꽁 숨어서 살게 될 운명인지도 몰라. 마치 여태까지의 내 모습처럼.

이 편지가 전달되었을 때 너의 반응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두려워.

너의 삶도 나처럼 균형을 잃고 그릇된 자리인 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그 자리만 맴돌다가 앞으로 전혀 전진할 수 없어 질까봐, 여태까지 아등바등 열심히 살면서 힘들게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져내릴까봐 선뜻 결정하기 쉽지 않구나.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통 받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해방감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편지를 거의 마치고 난 이 시점에 오히려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져.

세영아 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거니? 너에게 차마 물어볼 수도 없는 이 상황이 미치도록 답답해. 정답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이 편지가 만약 전달되지 못했다면,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나 혼자 오빠의 비밀을 끌어안고 살아서 미안해.

네가 이 편지를 받아보았다면, 이 진실을 진즉에 털어놓지 못하고 오빠의 죽음에 대해 30년간 의구심을 품고 살도록 내버려둬서 미안해.

이 편지를 받아보았지만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면, 끝까지 이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고 너에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최종적으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 뿐이야. 

오빠라는 한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만큼 나약하고 못난 사람이어서 미안해.

세영아. 세영아. 너무 착하고 예쁜 나의 학생 세영아.

부디 나를 용서해주렴. 

 

17년이 흐른 뒤,

60대 여성이 아파트에서 혼자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웃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옆집에서 며칠째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가 나서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경찰이 도착해서 문을 따고 들어가 보았을 때는 이미 사망한지 몇 주가 지났을 것이라 추정되는 여성의 시신만 덩그러니 있었다고 전해졌다.

그 여성의 손에는 동봉된 하얀 봉투가 쥐어져 있었고, 봉투 겉면에는 유언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 편지는 부디 열어보지 마시고, 저와 함께 불태워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Articles

4 5 6 7 8 9 10 1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