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크레이지 아케이드

by 소블리 posted Jun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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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아케이드


  내가 병실로 들어갔을 때 간이침대에 앉아 있던 윤이 일어섰다. 네가, 로라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윤은 묵직하게 보이는 짐 가방을 들고서 내 손을 잡았다. 교통사고로 실려 온 의조가 여덟 시간 동안의 대수술을 받고 깨어나지 않은 지 네 시간 만이었다.

  눈이 안 보일 수도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보험 회사 직원은 윤에게 규모가 큰 사고였다고 전했다. 사고는 새벽에 일어났다. 음주운전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해 택시를 들이 받았다. 당시 음주운전 차종은 페라리였고 시속 180km로 달리던 중이었다. 택시 앞 범퍼가 찰흙처럼 찌그러졌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의조의 머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가 반동으로 크게 들렸다. 순간 의조 쪽 에어백만이 터지지 않았다. 깨진 유리가 의조의 얼굴로 쏟아졌다. 아니다. 내리 꽂혔다는 표현이 맞겠죠. 보험회사 직원이 경찰을 통해 보고 받은 사고 내용을 윤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의조의 가족은 나뿐이었으나, 내가 고작 열세 살의 미성년자이기에 의조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고도 했다. 합의금 문제는 의조가 깨어나면 다시 얘기하자며 보험회사 직원이 떠났다. 병실 로비로 간 윤이 간호사와 상의를 하더니 간병인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자신이 값을 먼저 지불했다고, 안심해도 된다며 윤이 내 등을 토닥였다. 그때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쥐죽은 듯 잠든 의조를 바라보았다. 의조의 눈에는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었다. 그 외엔, 작은 타박상뿐이었다. 의조의 팔에 꽂힌 링거액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자. 의조가 눈 뜰 때까지 보살펴줄게. 윤이 말했다.

  의조네 집은 부엌을 제외하면 두 개의 방이 있는 구조였다. 의조는 큰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잠이 들었다. 나머지 하나는 놀이방이었다. 놀이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대신에 기다란 책상 위에 컴퓨터 한 대와 각종 레고 장난감, 텔레비전, 베개, 고무줄, 거울 등의 물건들이 질서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윤은 방을 둘러보다가 놀이방에 짐 가방을 두었다. 그 후엔 레고 장난감을 집어 들어 팔을 이리저리 조작했다. 의조한테 들었어. 동생이 자기랑 같이 노는 걸 좋아해서 놀이방을 만들어 줬다구. 좋은 오빠구나, 생각했어. 의조에 대해 말하는 윤의 입 꼬리 옆에서 인디언 보조개가 깊게 파이는 것이 보였다.

  의조가 그렇게 말해요?

  응? 윤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무줄을 오른손에 걸고 총 모양을 만들었다. 왼손으로 당기자 윤의 얼굴 바로 옆으로 고무줄이 튕겨 나갔다. , 아쉽게 빗맞았네. 더 연습해야겠다. 나는 손을 털며 놀이방 안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서는 여배우가 우는 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윤은 아무 말 없이 제자리에 서 있다 방을 나갔다.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애가 자기 오빠랑 노는 걸 좋아한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윤이 당황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윤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윤의 손에는 비빔밥이 들려 있었다. 금방 요리를 했는지 접시 위로 김이 훈훈하게 올라오는 중이었다. 안 먹어. 나는 윤이 들려주는 수저를 바닥에 내팽겨 쳤다. 윤은 조용히 내가 던진 수저를 집어 들고 상을 폈다. 그 위로 김치와 비빔밥을 내려놨다. 식기 전에 먹자. 이거 먹고 너 하고 싶은 거 해. 귀찮게 안할게. 윤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볶은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가 든 비빔밥이었다. 젓가락으로 당근과 감자, 시금치, 고기를 하나하나 골라냈다. 상 위에 그것들을 종류별로 모았다.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나는 어떤 것이든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싫었다. 싫다기보다 무서웠다. ‘같이라는 말보다 불안정한 단어는 없었다. 음식을 따로 놓고 보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나는 밥부터 차근차근 씹었다. 윤이 나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다 착하네, 라며 다시 한 번 웃었다.

윤이 의조의 애인이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의조는 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윤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윤은 의조가 다니던 대학교의 한 학년 후배였다. 얼마 전 졸업을 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직을 한 의조보다 세 살이나 어리니 윤의 나이는 스물세 살로 추정되었다. 의조는 과 여자애들 중에서 윤이 가장 예쁘다고도 친구에게 말했었다. 의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수리부터 굵게 웨이브 진 머리를 하나로 묶은 윤은 웃는 게 매력적인 여자였다. 윤은 내가 어떤 부루퉁한 말을 해도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게 언니가 있다면 이런 다정한 얼굴일 거라고 상상했던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윤이 나를 향해 웃는 것을 보자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거는 언니랑 게임하는 거야.

  주말 내내 윤과 나는 나란히 앉아 게임을 했다. 컴퓨터 화면엔 크레이지 아케이드가 실행되고 있었다.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물로 된 게임이었다. 반대편 적을 물 풍선에 가두고서 터뜨려 죽이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굳이 터뜨리지 않아도 되었다. 상대방을 천천히 죽이고 싶다면 물속에 가두고 익사하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다. 윤과 나는 한 팀이 되어 싸웠다. 블록 맵에서는 세워진 벽들을 앞뒤로 밀어가며 방어했다. 공동묘지 맵에서는 귀신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무덤 사이에서 상대방을 공격했다. 우리는 게임 덕분인지 조금 친해진 것도 같았다. 서로 아이템을 골라주면서 캐릭터에게 옷을 입히기도 했다.

문제는 결과가 항상 같다는 점이었다. 매번 상대방의 물 풍선에 맞아 죽는 것은 윤과 나였다. 계속 지기만 하니 윤은 지루해진 것 같았다. 게임 도중에 이 게임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냐고 종종 내게 묻기도 했다. 이거 너무 어렵다. 지친 윤이 무릎 위로 손을 털썩 내려놓았다. 나는 윤의 손을 잡아끌고서 화를 냈다. 힘을 키워야 돼. 안 그러면 계속해서 죽어.

  이 게임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의조야.

  병원에서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의조가 드디어 잠에서 깼다는 연락이었다.

 

 

 

*

 

 

 

  의조는 병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껍게 감겨 있던 붕대를 풀었는지 맨눈이었다. 윤이 달려가 의조를 껴안으며 한참동안 울었다. 의조가 깨어난 것은 사고가 난 지 삼 일만이었다. 나는 병실 문 앞에 서서 들고 있던 가방을 꽉 쥐었다. 묵직한 가방에서 물건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에 가기 전, 나는 의조네 방 안에 걸려 있던 거울을 모두 꺼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가는 콤팩트형 거울부터 가방만한 메이크업용 거울까지 다양한 종류의 거울들이 모였다. 나는 그것들을 가방에 모조리 담아 왔다. 간병인은 윤에게 의조의 수술부위 상태가 좋다며, 희망을 걸어 봐도 되겠다는 의사의 진찰 내용을 전했다. 윤의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로라는?

  의조가 윤에게 물었다. 나는 가방 지퍼를 조심히 열며 의조에게 다가갔다. 의조의 동공에는 초점이 흐릿했다. 무엇을 보고 있기 보다는 안간힘을 다해 뜨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해. 의조는 기척을 느꼈는지 내게 말했다.

  오빠가 옆에 있어 줬어야 됐는데.

  나는 의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방을 열고 거울을 꺼냈다. 손에 들린 것은 한 쪽 눈 정도만 보이는 작은 거울이었다. 나는 그것을 의조의 오른쪽 눈앞에 들이밀었다.

  보여?

  의조의 초점은 거울을 빗겨나 있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가방에서 다른 거울을 꺼냈다. 이번엔 얼굴 전체가 보이는 좀 더 큰 직사각형의 거울이었다. 나는 그것을 의조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댔다.

이걸 봐봐. 보이냐고.

  의조는 대답이 없었다. 의조의 눈이 거울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막 같은 게 눈앞을 가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윤이 내 손을 잡아끌며 그만하라고 했다. 의조가 희미하게 웃으며 윤에게 괜찮다고 했다. 로라 잘 챙겨줘, 윤아. 의조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우리가 병실을 완전히 나갈 때까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는 의조가 보였다. 나는 윤의 손에 끌려 나가며 끝까지 의조를 응시했다. 아직 가방에는, 더 많은 거울들이 남아 있었다.

  다음날 내가 집에서 나와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문구점이었다. 윤은 학교 수업을 갔다가 늦게 돌아올 예정이었다. 나는 온라인 게임에 벌써 질려 하는 윤을 위해 다른 새로운 게임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방구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는 문방구 주인이 보였다. 부모님이 사고로 한꺼번에 죽기 전까지는 아빠와 자주 술자리를 즐기던 남자였다. 남자는 아빠가 죽은 이후에도 종종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그런 남자에게 늘 챙겨주셔서 감사하다고 의조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남자가 오랜 시간 거실에 앉아 있다가 문방구로 돌아가고 난 뒤면 의조는 방에 틀어박혀 욕을 했다. 시발새끼. 괜히 보험금 따먹으려고.

  부모가 한 줌의 재가 되고 나서 상당량의 보험금이 의조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갖고 있던 집도 의조의 명의가 되었다. 부모를 잃었지만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건 나뿐이었다.

  풍선은 문방구 계산대 바로 옆 코너에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휙 낚아채 뜯고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손에는 풍선 네 봉지가 들려 있었다. 뒷면을 보니 한 봉지에 20개입이나 들어 있었다.

  윤이 의조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이었다. 윤은 피곤한 얼굴로 장 봐온 마트봉지를 내려놓았다. 나는 윤에게 오늘은 새로운 게임을 할 거라고 말했다.

물 풍선 던지기 게임이었다. 수도꼭지에 풍선을 감아 물을 넣었다. 세면대에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물 풍선이 한가득 담겼다. 윤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배고프진 않니? 라며 화장실 벽에 기대 물었다. 나는 최대한 많은 물 풍선을 만들었다. 그것들을 대야에 담고서 놀이방으로 끌고 갔다.

  이거는 모의실전이야. 한 번 던져봐.

  처음에는 방이 더러워진다며 말리던 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물 풍선을 집어 들었다. , 던져. 윤이 던진 물 풍선이 엉뚱한 데로 빗나갔다. 일부러 내게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야에서 가장 큰 물 풍선을 골라 집었다.

  언니, 정확히 맞춰야 돼. 상대를 정확히 맞춰야 내가 안 당하는 거야.

  나는 상대를 정확히 바라보며 물 풍선을 던졌다. 명중이었다. 윤의 이마에서 물 풍선이 터졌다. 물로 범벅이 된 윤이 마른세수를 했다. 빠져나온 윤의 머리카락에 남은 풍선 껍데기 일부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꼭 이걸 해야겠니? 윤이 화를 눌러 참고 있는 게 내게도 느껴졌다. 나는 윤에게 최대한 천진난만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 크면 크아 고수가 되어 있겠지?

  윤은 대야에 손을 휘젓고 있는 나를 자리에 앉혔다. 우리, 다른 게임 하자. 상대방이 모르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은 어때? 윤의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의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윤은 의조가 자신에게 처음 다가왔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대학교 때까지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었어. 숫기가 없었거든. 근데, 어느 날 선배인 의조가 다가오더니 번호를 묻는 거야. 처음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 당황스러웠거든. 매일 그렇게 와서 묻고 거절하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은 의조가 주머니에 뭘 꽂아두고 가는 거야. 보니 영수증 종이야. 쓰레기를 왜 준 거지? 싶었는데, 뒷면에 자기 번호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더라. 윤이 여기까지 말하고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애꿎은 물 풍선만 손톱으로 터뜨리는 중이었다. 윤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몰랐는데, 의조는 학교에서 인기스타였어.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데 학점까지 높은 선배로. 영수증 얘기를 해주니까 과 여자애들이 다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거야. 그런 사람이, 내게 번호를 그런 식으로 건네고 가다니. 너무 귀엽지 않니?

  그게 좋아?

  응?

  왜 언니 허락도 없이 함부로……, 그건 일방적인 거잖아.

  내가 물 풍선을 손톱으로 터뜨릴 때마다 윤의 무릎 쪽으로 물이 튀었다. 윤은 무릎을 손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에이. 너무 예민하다, 그건. 이번 게임은 내가 이긴 거 맞지?

 

 

 

*

 

 

 

  윤과 함께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돌고 있었다. 처음으로 의조가 병실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간병인이 사고 낸 당사자가 찾아 와 합의금을 어마어마하게 건네고 갔다고 윤에게 귀띔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윤이 의사에게 조용히 말하는 것이 내 귀에는 아주 크게 들려왔다.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지만 좋아질 것 같네요. 테스트 한 번 해볼게요. 검사를 준비하던 의사 선생님은 인상이 좋아 보였다. 좋아 보이는 게 의사 선생님뿐이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왁자지껄한 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의조의 친구들이였다.

  의조의 친구들은 의조의 침대 주위를 둘러싸고 앉았다. 모르는 얼굴들도 있었고 아는 얼굴도 있었다. 의조의 친구들은 로라야, 안녕? 하며 내게 인사하기도 했다. 의조의 얼굴에 웃음기가 피어났다. 그들은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웃었다. 친구들이 의조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똑같이 따라한다며 윤은 즐겁게 맞장구 쳐주었다. 나는 의조의 침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짧은 단발머리에 귀엽게 생긴 여자애였다. 여자애는 윤과 의조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여자애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너네 친했었어? 윤의 친구 중 하나가 여자애에게 물었다. , 둘이 동생까지 알 정도로 언제 그렇게 친하게 지냈냐? 손가락으로 여자애와 의조를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말들이 오갔다. 여자애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놀리는 친구들을 말리며 장난치듯 말했다. 꼬마야. 나는 너 처음 보는데? 내가 얘 동생까지 어떻게 알아! 내 남자친구 만나기도 바쁜데. 나는 윤의 표정을 살폈다. 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의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의조가 내게 장난치지 말라며 크게 웃었다. 윤아, 로라가 장난을 이렇게 많이 쳐. 매일 이러니까 힘들어 죽겠어.

  로라야, 그렇게 말하면 내 여자친구가 오해하잖아.

  의조는 이런 장난은 위험하다며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윤이 얼떨떨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의조네 집으로 종종 찾아오던 단발머리 여자애를 노려봤다.

단발머리 여자애는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내게 인사도 없이 의조의 방으로 들어갔다. 의조네 방문은 잠금장치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방문 틈 사이로 의조와 단발머리 여자애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간혹, 의조네 방문이 삐걱대며 움직일 때도 있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방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단발머리 여자애가 가고 난 뒤 화장실 쓰레기통에서는 휴지에 싸여 있는 풍선 같이 생긴 고무가 자주 발견되었다. 고무를 꺼내 만질 때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불투명한 액체가 손가락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둘이 풍선놀이 하는 것 같던데.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게도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아무도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의사가 의조에게 거울을 비춰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보이세요? 의사가 의조에게 물었다. 형체가 흐릿하게 보여요. 나는 의조가 보고 있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의조가 비쳐 보였다. 순간, 의조가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봤다. 그건, 바라보는 것보다 노려보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심장이 뛰었다. 의조가 나를 벽에 세워두고 노려볼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의조가 나를 벽에 세워두는 이유는 사소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텔레비전 볼륨을 크게 틀거나 늦게 들어오면 나는 어김없이 놀이방 벽에 서야 했다. 그곳에서 의조의 손과 발이 자주 내 뺨을 넘어왔고 멀리서 장난감을 던져 정수리에 맞추기도 했다. 어느 날 의조는 나를 그저 세워두고 하염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그날 나는 차라리 빨리 맞게 해달라고 믿지 않는 신까지 동원해 빌었다. 맞는 것은 순간 아프면 끝이었다. 맞을 걸 알면서도 그걸 기다리는 시간이, 맞는 것 순간보다도 질식할 만큼 두려웠다.

  의조의 친구들이 모두 돌아갔다. 나는 윤에게 우리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속삭였다. 윤이 간병인과 잠깐 이야기 하는 사이 의조는 조용히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라야, 오빠 곧 퇴원할거야.

  윤과 함께 의조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는 풀들이 길게 자라 있었다. 여름밤이라 매미 우는 소리 또한 시끄럽게 들려왔다. 나는 윤의 손을 잡고 가며 벌벌 떨었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추웠다. 이상하네. 냉방병인가. 윤이 떨고 있는 나의 어깨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언니는 사람 말을 믿어?

  윤이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더욱 힘주어 내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길거리엔 커플들이 서로에게 팔짱을 끼고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윤은 커플들을 바라보며 내게 선언하듯 말했다. 의조가 졸업하면 결혼하재. 나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었다. 매미 울음소리가 그날따라 더욱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윤에게 물었다. 언니가 보기에 의조는 사람이야? 윤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나는 걷는 내내 내가 알고 있던 의조 얘기를 윤에게 털어 놓았다. 언니가 알고 있던 의조는 다 거짓이라고,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고 제법 담담하게 말했던 것도 같다. 단발머리 여자애 얘기는 하려다가 참았다. 거기까지 들려주기에는 우리가 걷던 곳과 의조네    집의 거리가 짧았다. 윤은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로라가 많이 힘들었구나. 그랬구나, 이젠 언니 있잖아, 라고 말하며.

의조네 집 앞에 다다랐을 때에 누군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구점 주인 아저씨였다. 팔짱을 낀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윤이 영문을 몰라 나와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챈 것은 순간이었다. , 이 도둑년아. 니네 부모 돌아가시고 나서 어린 두 년 놈들 불쌍해서 내가 잘해줬어 안 잘해줬어. 반찬도 갖다 주고 인심 써줬더니 고마운 줄 모르고 도둑질을 해? 이 싸가지 없는 년 봐라. 남자는 말에 힘을 실을 때마다 머리카락을 쥐던 손가락에까지 힘을 주어 흔들어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이 옆에서 남자를 말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뽑히는 상황에서도 무서운 것은 아저씨가 아니었다. 내가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윤이 알았다는 게 가장 무서웠다. 남자는 싹싹한 의조를 봐서 이정도만 하는 줄 알라며 소리쳤다. 그 후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정수리에 침을 칵, 뱉었고 자신의 집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돌아갔다. 머리카락을 타고 남자의 불투명한 침이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랬어, 로라야?

  물건 훔친 게 뭐 어때서. 누굴 때린 것도 아닌데.

  머리를 빗을 때마다 뭉친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되도록 윤이 앉아 있는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윤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놀이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크레이지 아케이드 배경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윤이 놀이방으로 먼저 들어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의조의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곧바로 의조와 통화하는 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구려 자재의 벽이라 방과 방 사이에 방음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놀이방 벽에 몸을 밀착하고 섰다. 윤의 목소리가 조금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윤은 의조와 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늘 있었던 문방구 아저씨 이야기도 잠깐씩 언급되었다.

  근데 의조야. 로라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해. 네가 자기를 때린다느니, 나도 자기와 같이 도망쳐야 한다느니 하는…….

  나는 벽에 귀를 더 가까이 댔다. 윤은 여기서 잠깐 쿡쿡대며 웃었다. 설마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지?

  컴퓨터 화면을 언뜻 보니 어느새 나의 캐릭터가 물 풍선 속에 갇혀 익사하는 중이었다.

 

 

 

*

 

 

  놀이방 바닥에 누워 과제를 하던 윤은 피곤했는지 잠이 들어 있었다. 통화를 마친 뒤 놀이방에 들어온 윤은 내일이면 의조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말했었다. 나머지는 통원치료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쭈그려 앉아 잠든 윤을 바라보았다. 악의 없는 얼굴이었다. 윤과 의조와 함께 사는 상상을 했다. 놀이방에 서 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화장실로 가 개수대를 모두 막고서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샤워호스도 열어두었다. 화장실 바닥에 가득 찬 물이 바깥으로도 새어 나왔다. 놀이방 안으로 물이 흘러들었다. 쓰고 남았던 풍선 조각들이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컴퓨터 화면 속에서는 게임 음악이 계속해서 재생되는 중이었다. 방에 놓여 있던 가방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 속에 깨진 거울이 담겨 있었다. 나는 깨진 거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깨진 거울 위로 잠이 든 윤을 비쳐보였다. 언니, 게임 속에서 이제 그만 나가.

  의조네 방이 물속에 잠긴다. 나는 윤이 있던 놀이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이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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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정소영

  이메일주소: tkdzma03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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