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신의 저울

by fairday posted Jun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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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회색의 공간에 한 사내가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이 낯선 공간에서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그 시선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도중, 어딘가에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지팡이를 짚은 한 백발의 노인이 그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참으로 조용한 공간이지? 풍경도, 소리도, 사람도 없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곳보다 비일상적이고 낯선 공간이겠지. 그래서 그런 것일까, 다들 처음에 이곳에오면 같은 반응을 보이더군.”

 

자신의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사내는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피식 웃으면서 그를 향해 물었다.

 

여기가 사후세계라는 곳인가요?”

이곳을 가리키는 명칭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들 부르지.”

전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그런 곳도 있긴 하지.”

 

노인은 사내의 말이 끝나자 그를 향해 따라오라고 손짓한 다음 등을 돌려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는 곧바로 노인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럼 어르신께서 저를 천국이나 지옥으로 안내해주시는 건가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되게 모호하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말하는 것에 따라 네가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회색의 공간을 걸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른 색깔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회색뿐이라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사내는 다시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은 저승사자에요? 천사에요? 제가 믿는 종교는 없었지만 그래도 들은 바는 있는데 어르신은 검은 옷에 갓을 쓰고 계신 것도, 하얀 날개를 가지시지도 않았네요.”

둘 다 아니니라.......넌 내가 뭐로 보이더냐?”

, 글쎄요.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신선은 아니실 거 아녜요. 그럼 혹시 신?”

흔히들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지. 그리고 그 개념이 가장 나를 잘 표현하는 것이고.”

 

노인의 말에 사내는 깜짝 놀라며 그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았다. 설마 싶었는데 신이라니말로만 듣던 신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돼서 그런 것일까, 사내의 얼굴은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가득 찼다. 노인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탓인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많이 놀란 게냐?”

, .......신이 정말로 있긴 있었군요.”

나를 가리켜 저승사자나 천사의 존재를 물었으면서 신은 믿지 않았다니, 말의 앞뒤가 이상하구나.”

아니 뭐, 신이 있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은 했지만 말씀 드렸다시피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아서요. 아무튼 진짜 신이시라니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닌데요.”

 

노인은 얼떨떨해하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등을 돌려 걸음을 이어갔다. 사내는 혹시나 뒤쳐질까봐 서둘러 노인의 뒤를 바짝 쫓아가면서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어르.......신께서 직접 제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를 심판하시는 건가요?”

종교를 믿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천국 또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죽어서 천국 아님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사내의 말에 노인은 그를 슬쩍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 이가 있다면, 생명의 윤회를 믿어서 자신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는 이도 있지. 사후세계의 존재를 영원한 안식처 또는 심판이 공간이라 보는 이가 있으면, 죽은 생명이 잠시 머물러가는 중개지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만 이번에는 사내를 향해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 이어서 말했다.

 

보아하니 너는 사후세계를 영원한 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그럼 묻겠다. 넌 자신이

칭찬 받을 만한 선행을 베풀고 살았거나, 심판을 받을 만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게냐?”

 

노인의 말에 사내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제가 지옥에 떨어질 만큼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천국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착한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도 안 드는데요.”

솔직한 아이로구나.”

 

담담하게 말하는 노인과 달리 사내는 혹시 방금 대답이 자신의 사후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노인은 사내의 대답을 듣고 칭찬의 한 마디만을 했을 뿐, 별 다른 반응이 없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서는 걸음을 이어갔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에 사내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노인을 향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신님은 생각한 거랑 이미지가 묘하게 다른 것 같네요.”

무엇을 생각하였기에 다르다고 말하느냐.”

아니, . 보통 신이라고 하면 자애롭고, 인자하고, 그런 따뜻한 이미지거나 아니면 권위적이고, 무섭고, 위엄 넘치는 이미지잖아요. 근데 신님은 뭔가어느 쪽도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일반적인 신의 이미지랑 많이 다른 것 같네요.”

 

사내의 말에 노인은 이번엔 바로 대답을 안 하고 잠시 말없이 걷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신의 모습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을 공포와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에게 신은 두려움을 지닌 존재의 모습을 할 것이며, 신을 사랑과 믿음으로 생각하는 이에게 신은 자애로운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생각하듯이 너희도 나를 생각하고, 그 관계가 바로 신과 인간의 관계이니라.”

하하어렵네요.”

 

사내가 멋쩍게 웃자 노인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사내를 향해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너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지금 내 모습은 바로 네가 생각하던 신의 모습이니라.”

“!”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그런 사내를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고 사내는 그런 노인의 시선이 불편한 것인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신선 같은 모습을 떠올린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 저는 속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백발의 노인으로 여기고 있었나 보네요.”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신에게 외형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지. 네가 보고 있는 것이 그저 단순히 백발의 노인이더냐?”

 

노인의 말에 사내는 눈을 살짝 올려서 신을 쳐다본 다음, 그의 말을 이해하였는지 살짝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네요. 사실 저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신이 자비롭고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하질 않았어요. 애초에 신이란 그저 하늘에서 아무런 감정이 없이 인간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한가?”

하지만 그러면서 신당신을 향해 불평이나 불만은 엄청 많이 했었죠. 신은 불공평한 존재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등등 제가 불리한 상황에 쳐했을 때는 항상 신을 원망했었죠. 딱히 종교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욕하는 줄도 모르고 실존여부도 잘 모르는 대상을 향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었죠.”

 

노인은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위기의 상황에서 신을 찾거나 신을 원망하는 것이 어디 너 하나뿐이겠느냐, 입으로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도 그럴 때는 신을 입에 담는단다.”

“.......그럼 그들도 저처럼 당신을 만났나요?”

를 만나는 것은 오직 너 뿐이란다. 그들이 만나는 것은 그들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의 다른 모습이겠지. 하지만 신을 부정하는 이도 내면에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있단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초월적인 존재가 없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게지.”

누구나 마음속에 신을 품고 있다는 뜻인가요?”

신은 곧 믿음에서 탄생한 이니라, 믿음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느냐. 자신에 대한 믿음, 물질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누구도 믿지 않는 인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설령 신이 없다고 믿는 이들도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있지,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신의 다른 모습이니라.”

 

노인의 말을 들은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동안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로 제 마음속에 계셨던 신이라면 몇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사내의 물음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째서 당신은 제 삶을 이렇게 불행하게 만드셨나요.”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지는 것이 울먹거리는 것을 애써 억누르는 것처럼 들렸다. 노인은 여전히 그를 바라본 채 아무 말이 없었고, 사내는 말을 시작하자 감정 때문에 목이 막히는지 몇 번이고 침을 삼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말을 이어나갔다.

 

제 인생은 언제나 잘못된 것들뿐이었어요. 나름 잘해보려고 한 것은 많았는데, 돌이켜보면 구체적으로 이룬 것이나 잘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죠.”

“......”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는 부모님의 기대는 보통의 성적으로 지방 국립대를 가는 정도로 마무리가 되었죠. 부모님은 저를 위해 과외나 학원 지원도 아끼지 않았고, 밤늦게 저를 데리러 와주는 것은 물론이고 간식이나 선물도 아끼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제가 기대에 못 미치자 실망하시면서 저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리게 되었죠.”

하지만 그들은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실망한 것은 실망한 것이죠. 물론 처음에는 저도 나름 또래 애들에 비해 성적이 좋았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높은 기대를 받게 되었고, 어느새 저는 주변의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적을 받아도 이 정도로는 부모님을 실망시킬 것이라는 불안감과 강박감에 시달려서 마음의 병을 얻어버렸죠.”

 

사내는 작게 한숨을 쉰 다음 이어서 말을 했다.

 

대인관계도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물론 처음엔 저도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웃으면서 살았죠. 사람을 잘 믿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했고, 어렸을 적에 저는 그랬어요.”

알고 있단다, 너는 누구보다도 착한 아이었어.”

그렇기에 저는 저 말고도 다른 친구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구해주려고 했고, 그 결과 제가 그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버렸죠.”

 

사내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운지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난생 처음 당해보는 괴롭힘은 대체 뭐가 뭔지 몰랐어요.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저를 괴롭히는 대상이 누군지 알자 저를 외면했고, 제가 구해주려던 친구들은 혹시나 다시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서인지 저를 피했죠. 괴롭힘은 1년 정도만 계속되었고 마치 장난감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끝났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저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겨버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도 사라져버렸죠.”

하지만 너는 여전히 힘들고 외로운 이들을 무시하지 않았잖느냐.”

글쎄요, 그건 제 심성이라서 어쩔 수 없나보죠. 그렇지만 예전처럼 사람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어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생물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든지 배신당할 수 있고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사내는 이번엔 두 팔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외관이 작았어요. 키도 작고, 체격도 작았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게 얕보였고 저는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얕보이는 일이 없도록 운동을 했죠.”

 

그리고 사내는 자신의 팔과 손을 바라보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심장과 폐가 망가져서 오랫동안 달리기를 하는 것도, 격한 운동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죠. 무리하지 않는다면야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가 한계였을 뿐 다른 것은 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넌 조금씩이나마 운동을 하지 않았느냐.”

간단한 맨몸운동 정도는 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봤자 겨우 체력을 유지하는 정도였지만요.”

 

사내는 말을 멈추더니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던 하나씩 반박하시네요.”

반박하는 것처럼 들렸느냐?”

“......조금은요.”

네가 하려는 말을 부정하고 반박할 생각은 없느니라. 단지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가여워서 그랬단다.”

 

노인의 말을 들은 사내는 잠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쓸쓸한 눈빛을 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제 병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씀해주실 거죠?”

“........”

알고 계시겠지만 전 오랫동안 병을 앓아왔어요. 물론 신체적인 병도 있었지만 제일 큰 것은 마음의 병이었죠. 그리고 그 마음의 병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오다가 나중엔 결국 큰 병으로 커져버렸죠.”

 

사내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괴롭힘과 외면으로 인한 인간불신, 기대감을 충족시켜야한다는 강박감과 그러지 못했다는 자학 등등 저는 온갖 속병을 앓고 있었고, 혹시 남에게 알려질 까봐 혼자서 숨기면서 괴로워하다가 결국 이것들은 공황장애나 우울증, 심장병으로까지 커져가서 진짜로 저를 위협하기 시작했죠. 그렇다고 제가 이것들을 가만히 놔두기만 했겠어요?”

안다. 네가 혼자서 무슨 말을 하며 괴로워했는지도, 무슨 노력을 했는지도.”

, 그리고 그 결과도 아시겠죠. 정신과 상담이나 약도 먹고 온갖 짓을 다 해봤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저 정신병자나 이상한 놈을 보는 것처럼 차갑고 이질적으로 변해버렸고.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놈이란 것을 깨달았죠.”

 

스스로가 생각해도 처지가 우스운지 사내는 허공을 바라보며 큰 한숨을 내쉬면서 웃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알아요. 단순히 제가 자존감이나 자기애가 엄청 낮은 아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죠. 사실 제 삶은 다른 사람들보다 덜 불행한 것이겠죠. 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텨나갔죠. 하지만 저는 한순간에 완전히 뒤틀려버리게 되었죠.”

 

노인은 여전히 말없이 사내를 바라보고만 있었지만 그가 이어서 할 말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그 눈빛은 조금 측은한 것으로 변했다.

 

마음의 병은 생각보다 더 무시 못 할 놈이더군요. 아니면 원래 다른 병이 있었던 것인지설마 저한테 정말로 심장병이 있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어요. 더구나 과도한 약 복용으로 인해 위와 간까지 망가져서 일상생활도 힘들다니불행이라는 놈이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까지 했어요.”

 

사내의 목소리가 작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병치레 때문에 저는 점점 더 틀어박히게 되었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진 돈을 전부 병원비에 쓰는 신세가 되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정신만이라도 도피하고 싶었는지, 아님 미치기라도 한 건지 그런 몸에다가 술을 붓는 위험한 짓까지 했고, 그 결과 정말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몰렸죠. 그 결과는 뭐이렇게 됐죠.”

 

사내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그런 사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어딘가에서 의자를 가져와 사내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사내는 갑자기 나타난 의자를 보고 어리둥절했지만 노인의 정체를 생각하면 이건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자리에 앉자 노인은 손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이 남은 모양이로구나.”

속 안에 얘기를 전부 털어놨다가는 며칠 동안 이야기해도 모자를 것 같은데요.”

내 비록 너에게 일어난 일과 네 기분은 전부 알고 있다만 그 이야기를 네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녔지.”

“.......말 안 한 부분도 이미 전부 알고 계신다는 뜻 같네요. 제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모두.”

 

노인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뗀 다음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더니 살짝 슬픈 눈빛을 하고 말했다.

 

그래, 모두 알고 있단다. 네가 수없이 많은 자살시도를 한 것도, 잠도 제대로 못자고 매일 밤 울고 있었던 것도, 모두 보고 있었느니라.”

 

노인의 말에 사내는 조금 움찔하더니 방금까지 울고 있던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차갑고 어두운 목소리로 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럼 왜 보고만 계셨죠?”

“.......”

엄청난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적어도 괴로운 일을 겪은 만큼 행복한 일도 주는 것도 공평하지 않나요? ‘신은 불공평하다라는 말이 인간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나요?”

너도 신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게냐.”

 

노인의 나지막한 물음에 사내는 잠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지금 쟤 얘기를 듣고도 이렇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당신을 보니 더욱요 .”

 

사내의 말대로 노인의 표정은 아까 전부터 전혀 바뀌지 않은 담담한 상태였다. 분명 그는 사내의 말을 전부 들었고 무엇 하나도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노인의 얼굴에는 작은 변화는 있었지만, 마치 큰 공감을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무감정하고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서운함과 분노, 원망이 담긴 눈으로 그런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노인은 그 시선을 받고 있음에도 잠시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불공평하다모두가 그런 말을 하더구나. 신은 공평하지 않다고, 신의 사랑에는 편애가 있다고. 너희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는 싶지 않구나, 너희들이 그리 느꼈다면 그것 또한 옳은 말이기에.”

제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불공평하게 대해줬다는 건가요?”

 

사내의 차가운 말에 노인은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무표정을 풀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 변화에 사내는 잠시 흠칫했지만 노인은 따뜻한 온기가 담긴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의 사랑은 절대로 기울지 않는다. 신은 언제나 공평해야하기에 누구도 더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덜 사랑하지 않는단다.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과 시련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신의 사랑이란다.”

공평? 그럼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을 주신다는 뜻인가요? 아니지,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됐습니다. 그렇다면 제 삶 중에 대체 어디가 공평하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죠? 아니면 원래 불행 쪽에 가까운 것이 신의 사랑인건가요?”

 

사내의 가시 돋친 말을 듣고도 노인은 여전히 자애가 담긴 미소를 한 채로 말을 받았다.

 

네가 가진 불행을 나는 모두 알고 있느니라. 헌데 너는 내가 내린 사랑을 알지 못하는 구나.”

 

노인은 조금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너는 부모의 기대가 너를 옳아 메었다고 생각했지, 분명 네 부모는 기대에 이르지 못한 너를 보고 실망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을 게다. 하지만 괴로워했던 것은 너만이 아니었느니라. 네 부모도 자신들의 기대 때문에 힘들어하는 너를 보며 함께 괴로워했느니라.”

그걸 어떻게 알죠?”

기억해 보거라, 네가 힘들고 지쳤을 때 너의 부모는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너를 핍박하고 미워하였느냐?”

“!”

 

사내는 노인의 말을 듣고 잠시 움찔했다.

 

네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괴로워할 때 그들도 너를 보며 자신을 반성했단다. 그럴수록 그 기대의 자리를 너에 대한 사랑으로 채웠단다. 자식이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부모는 너에게 실망해서 외면한 것이 아니니라, 너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한 것이었느니라. 단지 안타깝게도 이미 자괴감과 우울증에 빠져버린 네게 그 뜻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 게지.”

 

노인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생전의 자신의 부모에 대해 천천히 회상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의 부모는 한 번도 그를 핍박하고 다그친 적이 없었다. 실패했을 때도 위로해주고, 조언을 해주었지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을 보고 사내는 그것을 애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시키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더욱 더 스스로를 옳아 메었던 것이다. 왜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을까, 갑자기 속 안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사내는 방금 전과는 다른 느낌의 눈물이 눈가에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한때 괴롭힘을 당했다는 것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일로 큰 상처를 받았던 것 또한 슬프게 여겼느니라. 많이 힘들었을 게야, 그 뒤로 네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의심과 불안을 심하게 느낄 때마다 나도 눈물을 흘렸느니라.”

“........”

하지만 그 뒤로 네가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거라, 비록 너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지는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네 곁에 남은 이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느냐.”

 

그 말에 사내는 이번에는 자신의 친구들, 선후배, 그 외에 주변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 모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전부 떠올랐다.

 

비록 많은 이들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너를 진심으로 친하게 여기고, 함께 웃고, 울어주던 이들이지 않았느냐. 너 또한 그들과의 우정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있던 시간을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았느냐.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는 너였지만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벗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너는 우정과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지 않았느냐. 지금도 내게는 너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는 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느니라.”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은 눈물을 참을 수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노인이 말했던 것은 전부 그 역시 마음속에서 어렴풋이 느껴왔던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울었던 추억들이 머릿속에 지나갔고, 그 안에서 언제나 행복함을 느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언제나 사이좋게 웃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다투기도 했었고,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었고, 서로 미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진실 된 친구들이었다. 잠깐의 다툼이 있었어도 다시 함께 웃었고, 미워하더라도 다시 함께 했다. 그렇기에 친구들이었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아무리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아왔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서,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서 행복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소중한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 사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넌 작은 아이었지, 키도 작고 팔 다리도 가늘었지. 네 친구들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했고 너 자신이 그것을 많이 신경 썼다는 점은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렇기에 전 계속해서 가벼운 운동이라도 해나갔지요. 체격이 작다고 남한테 무시 받을까 봐가 아니라, 적어도 남들과 같아 보이고 싶어서 가벼운 운동이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죠. 그 결과 비록 남들보다 작은 체구일지라도 그것 때문에 얕보이면서 살지는 않았어요.”

그랬지.”

 

사내는 눈물도 닦지 못하고 말했다. 노인은 그런 사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들어 사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에 나는 화를 내지 않는단다. 사람들이 신을 가장 다급하게 찾는 때는 항상 절망과 괴로움에 빠졌을 때니깐그때는 당장 눈앞에 괴로움 때문에 신이 평소에 자신에게 준 행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테지. 하지만 기억하거라 사랑하는 아이야, 신은 언제나 평등하게 대해준단다. 내가 너에게 주는 행운과 불행은 모두 공평하단다. 신의 사랑의 저울은 언제나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느니라.”

 

노인이 까칠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서 사내는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연민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그 손은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위로를 해주고 있었고 사내는 그 온기에 더욱 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어느 때라도 잊지 말아다오, 신은 절대로 널 외면하고 있지 않는단다. 언제나 네 안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이후에도 네게 또 다른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앞으로 행운이 다가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구나.”

 

신의 사랑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훌쩍이는 목소리로 애써 말을 꺼냈다.

 

하지만 전 이미 죽었잖아요. 이젠 끝이라고요.”

 

당장이라도 더 터뜨리고 싶은 울음을 겨우 참으면서 말하는 사내를 바라보며 신은 한층 더 따뜻한 웃음으로 짓고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병이라는 불행에 상응하는 행운을 주지 못하였구나.”

 

그 말과 함께 사내의 눈앞에 신의 모습이 하얀 빛에 휩싸였다. 가뜩이나 눈물 때문에 뜨거워진 눈가에 환한 빛이 들어와 사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눈을 감은 채 작은 신음을 냈고 이내 다시 눈을 떴다.

 

“......!”

 

사내는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가족이 잔뜩 글썽이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몸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몸이 무거웠다. 순간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서 사내는 눈을 열심히 굴리며 주변을 확인해보았고 이내 그가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알아챘다.

 

병원?’

 

사내는 다름 아닌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자신의 팔에 링거가 꽂혀있음을 확인했다. 멍한 눈으로 왜 자신의 가족들이 울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려고 하던 도중 의사로 보이는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기억 안 나나? 자네는 위궤양 때문에 쓰러져서 이곳에 실려 왔다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술은 줄여야겠어. 다행히 눈도 떴으니 식사랑 약만 제대로 챙겨먹으면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걸세.”

 

의사가 따뜻한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 의사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묘한 익숙함이 느껴져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책은 사랑으로불신은 우정으로유약은 노력으로……죽음은 생명으로

 

 

 

그 저울정말 공평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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