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실조'

by 도솔찬 posted Jul 04,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실조 

 

-류재연-

 

우편함에 들어있던 비에 젖은 소포를 꺼냈다. 늦은 저녁 아르바이트를 마친 재연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칠 평짜리 월셋방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에게 올 것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소포의 앞뒤를 훑어보았다. 혹시 잘못 온 것은 아닐까. 주소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정자로 적혀 있는 그의 이름 세 글자 류재연이 소포가 제대로 온 것임을 알렸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룸메이트인 호영은 이미 잠이 든 지 오래였다. 척추 끝자락부터 올라오는 찌릿찌릿한 피로감은 아무리 오래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책상에 던져 놓은 소포를 가져와 천천히 뜯었다. 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한준희. 재연은 물기가 묻은 책 테두리를 만지다 책을 놓쳤다. 벌어진 틈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침대 옆에 있던 휴지를 찾아 손가락을 감쌌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재연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쓴다고 했는데, 이렇게 책까지 쓰게 되다니 준희가 자랑스러웠다. 재연은 책을 열었다.

 

글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다른 것처럼 글쓰기 또한 답이 있다면 어땠을까. 세상의 수많은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이것을 찾아내서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각자가 찾아낸 답은 어떤 것이었을까.

독자들은 작가들이 제출한 서술형의 답안을 읽고 평가한다. 개중에는 잘 다듬어지고 적당히 기교있는 답이 있을 수도 있고 단 한 글자로 마무리된 답이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사랑의 표현에, 누군가는 맥거핀에 집중해 답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설계과정에 집중해 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생각나는 또다른 누군가는 그저 별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답을 적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도 그들에게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놀라웠다. 책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재연의 입은 벌어져만 갔다. 이런 글을 쓴 것이 자신의 친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표지띠의 각종 찬사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문장의 완성도, 글의 구성, 적당한 문체, 폭넓은 분야의 지식사용 등 글쓰기에 문외한인 자신이 보더라도 이 책은 정말 엄청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재연이 오백 페이지가 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 달은 온데간데없고 어느 새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재연은 곧바로 자신의 친구 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른 승희에게 이 책을 소개해 주고 준희의 연락처를 아는 지 물어보고 싶었다.

 

승희야, 혹시 준희라고 알아? 한준희?”

 

준희?”

 

, 걔 작가 되었더라. 나한테 책도 보냈는데, 장난 아니야. 너도 꼭 읽어봐라.”

 

? 책을 받았다고?”

 

그렇다니까. 근데, 혹시 준희 전화번호 알아? 나는 폰 바꿀 때 지워졌는지 없더라고.”

 

재연의 질문에 승희가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한 순간 침묵이 일었다. 재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술잔을 들었다.

 

, 모르는 거야? , 상관없지. 짠 하자. .”

 

, 사실 그게 아니라.....”

 

승희가 입을 열었다.

 

준희, 최근에 소식이 아예 끊겨서.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가방을 뒤지던 승희가 책 한 권을 꺼냈다.

 

너도 우편함에 꽂혀 있었지. 사실 나도 받았어. 나도 너한테 물어보려고 한 건데...”

 

재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혹시 이 책, 언제 받은 거야?”

 

저번에 비 엄청 많이 오던 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우편함에 꽂혀 있었어.”

 

싸늘한 기운이 재연의 목을 스쳤다.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주소도 적혀 있지 않고 이름 석 자만 적혀 있던 소포가 생각났다. 분명 준희는 이 책을 직접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사라졌다. 눈앞에 있는 승희의 당황한 표정에서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재연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승희야. 오늘은 이만 파하자. 내가 집 가서 연락할게.”

 

.... 그래. 좀 있다 전화해.”

 

재연은 멀어지는 승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팔에 돋아나는 닭살을 문지르며 재연 또한 발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무언가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재연은 담뱃갑을 책상에 두드렸다. 담뱃잎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술기운은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느낌만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재연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준희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승희는 집에 도착한 걸까. 준희는 왜 사라졌을까. 우리에게 이 책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다. 이게 아니다.

 

준희는 우리들의 집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가.

갖은 생각에 복잡해진 머리로 재연은 날을 샜다. 피곤한 두 눈과 욱신거리는 편두통, 게다가 오늘도 날씨는 흐릿했다. 구름 낀 하늘을 보며 재연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준희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을 다시 펴 보았다.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따르르릉

 

승희였다. 재연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재연아. 준희가 준 책 있잖아.”

 

, 혹시 무슨 문제 있어?”

 

표지 뒤쪽에, 편지가 있어. 네 것도 확인해 보라고.”

 

편지?”

 

재연은 양장의 뒤를 확인했다. 무언가 두툼한 것이 느껴졌다. 포장을 뜯어내자 편지 두 장이 나왔다. 도대체 무엇을 적어 놓았을 지가 궁금했다.

 

B급감성이라는 것이 있다. 진행은 되는데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 그 부족한 느낌에 숨어있는 감칠맛들. 이런 작품들을 보고 부족한 점을 메꾸라 할 수 있을까. B급이라는 용어 때문에, 철저하게 포커싱된 작품이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우리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장에는 무언가 다른 내용이 있을까.

 

서울 성북구 화랑로 112 712

 

승희야, 편지 두 번째 장에 있는 주소 봤어?”

 

, 준희네 집 주소일까...”

 

그런 것 같아. 오라는 뜻이겠지.”

 

꺼림칙한걸.”

 

도대체 무슨 짓인지 직접 물어 봐야겠어.”

 

책장을 덮었다. 순간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진 한 장이었다. 올해 초에 길거리에서 공연하던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목 뒤로 느껴지는 찜찜함을 뒤로 한 채 재연은 휴대전화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윤승희-

 

이번 역은 월곡, 월곡 역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왼쪽입니다.’

 

승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던 재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재연과 함께 역 밖으로 나섰다. 고가도로를 지나 조금 길을 걸어가자 편지에 적혀있던 주소에 도착했다. 평범해 보이는 오피스텔이었다. 건물의 현관은 잠겨있지 않았다.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해 7층 버튼을 눌렀다.

 

7층입니다

 

긴 복도가 펼쳐졌다. 712호는 복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재연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승희는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달칵

 

재연아. , 열려있어.”

 

진짜?”

 

재연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책상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재연은 화장실을 살폈다. 그 사이 승희는 책상을 확인했다. 무언가 놓여 있었다. 봉투, 편지봉투였다.

 

재연아, 여기.... 편지가 있어.”

 

정말로? 어디 한 번 봐봐.”

 

재연은 편지봉투를 거칠게 뜯은 후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잘 쓴 글을 좋아했다. 글이 전하려는 바가 뚜렷하고, 표현이 입체적이고 풍부하며, 글 곳곳에 떨어져 있는 요소가 버려지지 않고 모두 사용되는 글들. 나는 이런 글들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 글을 쓴 작가를 찾아보고, 남들에게 그 글을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글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곡차곡 쌓인 글을 좋아하지만 스스로 쓰는 글을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며, 여러 갈래의 복선이 있는 글을 좋아하지만 한 방향으로 직진하는 글이 주를 이룬다. 이런 괴리가 스스로에게 불만족의 갈증을 일으켰고, 나는 더더욱 좋아하는 글들을 파고들며 그러한 글들을 쓰려 했다.

피폐했다. 매번 한계에 부딪히는 나의 표현능력에 절망감을 느꼈다. 펜을 던졌고 원고는 구겨져 방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시작부터 방향을 잘못 들어버린 자가 방향을 고치려 해봤자 더욱 이상향과는 멀어질 뿐이었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자기혐오의 가시덤불이 자라났고, 그 통증에 한동안 글이라는 것에 손을 떼었다.

꿈을 꾸었다. 죽음이 가까워졌고 나 자신은 초조함에 글을 서둘렀다. 떨리는 손으로 적는 글이 제대로 써질 리가. 몇 십번의 실패는 스스로의 정력을 앗아갔고 이내 나는 펜을 놓치고 말았다. 고개가 젖혀지고 뒤로 쓰러졌다. 내 주변에는 구겨진 원고지가 수백, 아니 수천 장 쌓여 있었다. 폭삭 늙은 손으로 그 원고지 중 하나를 펼쳐 보았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 종이를 끌어안고 눈물만을 뚝 뚝 흘릴 뿐이었다.

식은땀에 온 몸이 젖은 채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바깥은 어두컴컴했고 옅은 빗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불을 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원고지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하늘은 어느 새 노을이 지고 있었고 내 눈앞에는 그토록 내가 원하던 이상향이 적혀 있었다.

 

일기인가?”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던 재연은 이내 소리쳤다.

 

사람 가지고 장난하는 거야 뭐야!”

 

재연이 짜증이 솟구친 목소리로 말하며 편지를 내동댕이쳤다. 떨어진 편지를 승희가 주웠다. 뒷장을 보던 승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연과 승희의 졸업사진이 오려 붙여져 있었다. 그 밑에는 또 주소가 적혀 있었다. ‘화진군 영평312

재연아, 또 주소야.”

 

무슨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번엔 어디래?”

 

화진군 영평3.... ?”

 

승희는 재연을 올려다보았다. 재연도 승희를 내려다보았다. 여기는......

 

우리 동네?”

 

-한형우-

 

탁자에 놓인 커피잔을 들었다. 형우는 눈을 감고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감상했다. 쇼스타코비치의 로망스.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하던 형우의 귓속으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파고들었다. 젠장, 또 발작인가. 황급히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자신의 아내 강연미의 앙칼진 비명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꿇어앉은 채 흐느끼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보... 무슨 일이야.”

 

당신이 날 여기에 가둬놨지! 나를, 나를 당신이! 당신 누구야. 당신 누구냐고!”

 

여보, 나 모르겠어? 당신 남편 형우잖아.”

 

너가 왜 내 남편이야. 아하. 너가 내 남편을 죽이고 남편 행세를 하는 거야? 그리고 이제 나까지 죽이려고? 안 되지.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여보 정말 왜 그래! 정신 차려! 내 두 눈 똑바로 봐!”

 

형우는 연미의 어깨를 잡고 두 눈을 응시했다. 충혈된 연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연미를 안아주었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살려줘... 나 좀 살려줘 제발.....”

 

연미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린 채 흐느꼈다. 이내 흐느낌이 잦아들자 형우는 연미를 침대에 눕혔다. 서랍에서 주사기와 디아제팜을 꺼냈다. 주사액이 들어가자 연미의 거칠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철컥

 

문이 잠긴 걸 확인한 형우는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시금 탁자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눈을 감은 채 흘러나오는 곡을 감상했다.

 

-류재연-

 

재연은 버스에서 내려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장장 세 시간의 기차와 삼십 분간의 마을버스는 고역이었다. 오 년만의 고향이었지만 손에 들고 있던 준희의 편지와 사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승희와 함께 주소로 향하는 30분 동안 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재연의 머릿속에는 준희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 이상한 편지의 내용, 혹시 무슨 종교에 심취한 것은 아닐지.

여기다.”

 

승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재연도 걸음을 멈추고 집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색의 2층 목조주택이었다.

 

그러고 보니, 준희 집은 한 번도 같이 안 가봤었네. 오늘이 처음이야.”

 

그런데, 무엇 때문에 찾아왔다 말해야 하지?”

 

... 일단 들어가면서 생각해보자.”

 

가까이서 본 현관문은 생각보다 크고 어두워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작은 비프음이 들렸다.

 

누구세요?”

 

, 네 안녕하세요. 저는 준희 친구 재연이라고 합니다.”

 

“---”

 

잠깐의 침묵 이후 문이 열렸다.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재연과 승희를 웃으며 맞이했다. 복도의 리놀륨 장판은 방금 청소한 듯 반짝거렸다. 거실에서는 음악이 들려왔다. 턴테이블에 놓여 있는 레코드판이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재연과 승희에게 재연은 커피를 내어 왔다. 형우는 자연스럽게 과자를 하나 입에 집어넣은 후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준희 아빠 한형우라고 해요. 이름이 재연이라고 했죠?”

 

, . 저는 류재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윤승희입니다.”

 

준희가 완전 어릴 때부터 재연이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았었지. 많이 친했나 봐요? 요즘도 같이 지내나? 요즘은 준희도 못 본지 좀 되서......”

 

제 이야기를요? 하하, 저도 요즘은 준희를 별로 못 봤네요. 고등학교 때 이후로 연락이 조금 뜸해져서......”

 

, 그래요? , 다음에라도 보면 되겠지. 그런데 지금 준희는 집에 없는데......”

 

조용한 클래식 사이로 이따금씩 들려오는 과자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재연은 호주머니에서 준희의 편지를 꺼내 형우에게 건넸다.

 

이건....”

 

준희가 저희에게 남긴 편지에요.”

 

왜 우리 집 주소를.... 그래서 여기 온 거였구나.”

 

.”

 

“......준희의 방은 2층 왼쪽이에요.”

 

재연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2층으로 향했다.

 

, 2층에서는 조용히 해줘요. 준희 엄마가 신경증이 있어서.”

 

, 네 알겠습니다.”

 

방금 들었던 말 때문인지 이따금씩 삐걱거리는 계단이 마음에 걸렸다. 발뒤꿈치를 들어 까치발로 걸었다. 끼익, 끼익. 준희의 방문을 열었다. 역시나 내부는 깔끔했다. 책장에 무언가 있을까. 재연은 책장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서랍에 무언가가 있을지 열어보기 시작했다. 빨리 이 기분 나쁜 여정을 끝내고 싶었다. 첫 번째 서랍에는 구겨진 종이더미들이, 두 번째 서랍에는 다 쓴 볼펜들이, 세 번째 서랍에는.

 

---

 

쇠로 긁는 것 같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작은 오르골이었다. 오르골의 아래에는 또 다른 편지봉투가 놓여 있었다.

 

편지다!”

 

재연은 편지봉투를 뜯어냈다. 편지지 한 장과 사진 한 장. 가운데에 피아노가 있는 어딘가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뒤로 한 채 재연은 승희와 함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불필요에 의한 욕망은 언제나 파멸을 낳는다. 나는 과거에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다시는 써내지 못할 글을 적어냈고, 꽤나 과분한 명성을 받기에 충분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문학계의 미래. 글의 완성. 한 평론가는 나의 글을 읽고 문학의 완성이자 끝이라 인터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TV가 나에 대해 떠들고 인터넷은 나의 과거에 대해 파헤치려고 노력했다. 이 괴물같은 신인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

마침표. 나는 마침표를 더 이상 찍을 수 없었다. 내 모든 정력과 내면 깊은 곳까지 남아 있던 모든 상상력을 불태워버렸던 탓이었을까. 나는 그 글을 넘어서는 글을 적어낼 수 없었다. 한 문장을 적더라도 글에서 너무나도 많은 허점이 보였다. ‘그 글과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한 문장들이었기에, 나는 원고지를 찢어버렸다. 눈두덩이가 마르고 광대는 점점 불거졌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았고 물을 마셔도 갈증은 더해만 갔다. ‘그 글은 이 두 손과 두 발로 넘어설 수 없는 경사 구십 도의 수천 미터 암벽과도 같았다. 시간이라는 것은 의식할수록 느리게 흐르는 법이었다. 더 이상 글을 이어가지 못하던 나는 시계만을 바라보았고 시간은 1초에 1초라는 정직한 움직임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글을 완성한 것인가. 다시는 적을 수 없는 그런 글을, 그 글을 넘어서는 글을 어찌 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갈라진 비명을 지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너무 큰 성공과 관심은 나를 병들게 했다.

나는 며칠 뒤, 스스로 절필을 선언하고 자취를 감췄다. 작업실을 정리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수백 권의 책들 중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수백 권의 허영심을 상자에 쏟아 부었다. 가구들 또한 모두 치워 버렸다. 모두 비우고 남은 것은 색이 바래버린 벽지와 구석에 처박힌 채 잊혀졌던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적어 왔던 기억의 묶음들. 나는 한 장 한 장 원고지를 넘기며 계속해서 과거의 나를 살폈다.

 

계속 틀어져 있던 오르골 소리가 귀를 긁었다. 재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뚜껑을 닫았다. 길게 늘어지던 오르골 소리는 이내 멈추었다. 뒤를 돌아본 재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승희의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윤승희-

 

승희 자신을 쳐다보던 재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승희야. 너 뒤에...”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려는 승희의 목에 서늘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과도였다.

 

너 누구야. 우리 준희 어떻게 한 거야.”

 

, 저한테 왜 그러세요.”

 

우리 준희! 너희들이 죽였지? 어디에 숨겼어! 당장 말해!”

 

승희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앞에 있는 재연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 저 준희 친구 재연이에요. 기억 안 나세요?”

 

재연이?!”

 

, 재연이. 고등학교 때에도 같이 지냈었는데. 기억 못하시니 섭섭한데요.”

 

재연은 긴장감을 감추기 위한 미소를 흘렸다. 승희의 목에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승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재연이.... 재연이....”

 

, 재연이. 준희 부탁으로 뭐 좀 찾으러 왔어요.”

 

과도를 쥔 그녀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재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재연이!”

 

그녀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기억 나셨구나!”

 

칼을 든 손은 완전히 내려갔다. 재연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우리 아들 죽였지?”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과도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는 재연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그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형우였다. 과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재연과 승희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쓰러져있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겪은 일이 현실일까. 승희는 목을 더듬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손가락에 피가 묻어나왔다. 피다. . 숨이 막혀왔다.

 

털썩

 

-류재연-

 

형우는 쓰러진 그녀를 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 서랍에서 주사를 꺼냈다. 재연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주사? 집에서?’

 

진정제에요. 연미의 신경증 때문에 처방받은 거에요.”

 

......”

 

주사를 처방을 받을 수 있나?’

 

재연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형우가 정신을 차린 승희에게 다가갔다. 재연도 왜인지 모를 불안감에 승희에게 가까이 갔다.

 

목의 상처는 얕게 베인 거네요. 소독하고 치료만 하면 될 것 같아요.”

 

, .”

 

그래도 몸 상태가 걱정되는데, 좀 쉬었다 가는 건 어때요. 비도 올 것 같고.”

 

재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산 뒤로 진회색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찜찜함이 재연의 몸을 휘감았다. 자상한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위화감이 있었다. 그런다고 친구 아버지의 말을 날카롭게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 입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일이 좀 바빠서. 죄송합니다.”

 

승희가 대신하듯 입을 열었다. 재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었다.

 

, 죄송할 필요는 없는데. 뭐 조심히 가요.”

 

, 안녕히 계세요.”

 

승희가 재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마당을 나서서 큰길까지 나서는 동안 승희는 재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승희는 한숨을 쉬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안되겠어. 난 더 이상 못해.”

 

“......”

 

승희의 목에 생긴 붉은 줄이 그녀의 두려움을 설명하고 있었다. 준희 어머님의 기괴한 모습. 승희의 이러한 반응이 당연했다. 편지와 사진을 쥐고 있던 재연의 손이 떨렸다. 재연은 말없이 승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승희를 보낸 후 혼자 걷는 길은 유난히도 두려웠다.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이런 문제를 낸 이유가 무엇일까. 준희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생각이 재연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의 이 곳은 어디일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꽤나 넓직한 공간에 놓여 있는 피아노.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손톱을 입에 가져다 댔다.

어디선가 본 곳이었다. TV에서 보았을까? 재연은 하늘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 , 손톱과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버스에 울려 퍼졌다. 어느덧 승희와 함께 왔던 기차역이 눈앞에 보였다. 역에 도착하자 또다시 물씬 솟아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서울로 돌아갈까. 그냥 포기할까. 재연은 한숨을 쉬며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예약해 대합실의 벤치에 앉았다. 기차가 오기까지는 십 분 남았다.

 

건반 소리가 들렸다. 재연은 고개를 들었다. 한 아이가 대합실 중앙의 피아노를 만지고 있었다. 재연은 천천히 걸어가 피아노를 살폈다. 아니었다. 사진의 피아노와는 살짝 다른 피아노였다. 무언가가 재연의 머릿속을 스쳤다. 피아노가 있던 곳.

 

[화령단역]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단체로 소풍을 갔을 때, 화령단역의 피아노에서 연주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재연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화령단역이다. 재연은 매표소로 달려갔다.

 

화령단역으로 가는 기차 있나요?”

 

오후 11시 무궁화호가 있는데 괜찮으세요?”

 

, 그걸로 주세요.”

 

벤치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여덟시 이십사 분. 다리가 떨렸다. 재연은 창밖을 확인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한 방울씩 내리던 비는 어느새 유리창을 거세게 적시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방에 우산이 있는지 하나 둘씩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는 진 지 오래였고, 점차 어두워지는 대합실은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거친 무궁화호의 움직임이 깊은 잠을 방해했다. 벌써 며칠 째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일까. 재연은 눈 밑으로 축 쳐진 다크서클과 듬성듬성 나 있는 턱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바깥은 칠흑같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차창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방울은 마치 창문을 열어달라는 듯 화를 내고 있었고, 간간히 들리는 천둥소리로 번개까지 치는 강한 호우임을 알 수 있었다.

재연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서비스 권역 외임을 확인하고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간행이라 그런 걸까. 어두컴컴한 조명이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량 안을 살폈다. 약 네다섯 명의 사람들. 잠을 자고 있는 아저씨와 서로 기대고 있는 한 쌍의 사람들. 그리고 내 앞자리에 있는 여자 한 명. 화령단역은 마지막 종점이었다. 갈 길이 멀었다. 재연은 눈을 질끈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불편감에 재연은 눈을 떴다. 아직 종점은 오지 않은 걸까. 눈을 감기 전 보였던 이들도 잠들거나 목적지에 도착해 보이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마치 저승으로 가는 기차같이 느껴졌다. 재연은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막은 채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갔다. 구역질이 나왔다. 속을 게워냈다. 먹은 것도 별로 없어 누런 신물이 올라왔다. 목이 쓰라렸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궈냈다. 어지러웠다. 재연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얽매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헛것일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그것에 머리가 아팠다. 눈물이 흘렀다. 재연은 연거푸 세수를 했다. 며칠 간 잠을 못 자 헛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재연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재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찬 물 덕분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 삼십 분. 좌석을 젖혀 객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곧 꺼질 듯 전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톡톡,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기차는 멈춰 있었다. 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연은 겉옷을 고쳐 입고 서둘러 기차에서 내렸다. 아직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승강장 건너편에 있는 작은 역사로 천천히 걸어갔다. 약 삼 미터 정도의 녹슨 간판에 화령단역이라고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주위의 안개가 짙었다. 숨을 들이쉬자 비 냄새가 풍겼다. 역사는 단순했다. 작은 대합실과 매표소 하나, 화장실 하나. 그리고 오래된 피아노 하나.

재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표소의 역무원은 손님이 있는지도 모르고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천천히 피아노로 다가갔다. 겉의 색이 거의 벗겨진 그랜드 피아노. 사진의 실루엣과 똑같았다. 피아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피아노 의자를 열어 보았다. 먼지가 가득한 안쪽 공간에서 붉은 종이봉투가 눈에 띄었다. 재연이 봉투를 집자 끄트머리가 붉게 물든 편지 한 장이 힘없이 떨어졌다. 붉은 자국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모든 이들은 마음 속 역린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밝은 대학생도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당했었고, 방금 탄 택시의 기사도 다섯 살 난 자식을 바닷가에서 잃어 버렸다. 기차역의 승무원은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당해 학교를 자퇴했고, 옆자리에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어머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그 장례식에 가는 중이다. 모두들 깊은 흉터 하나씩, 금방이라도 다시 벌어질 듯한 상처를 꾸역꾸역 숨기고 살아간다.

눈을 감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모르지.” 그는 웃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그 글, 잘 썼더군. 어떻게 쓴 거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네가 썼다고 하기엔 과분한 글이었어. 악마와 거래라도 한 건가.” 말을 마친 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그가 웃는 소리가 왜 그렇게 신경에 거슬렸을까. 역정을 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너 누구야.” “그게 중요한가.” “네가 감히 나를 비웃어?”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졸랐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눈알이 뒤집혀 악을 질러댔다. “네가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 “네가 그 꼴이 된 거지. 스스로.” “너만 아니었으면.”

그 말.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쳤다. 사람들의 눈초리. 웅성임. 깨진 화분. 머리에 흐르는 피. 그 눈빛들. 이 암흑 속에서. 일흔 네 개의 눈동자. 어둠은 사이로 흐르는 소리를 잃었다. 사내는 그의 나비넥타이를 고쳐매고 내 앞에 섰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뒤편으로 빛이 내렸다. 밝은 빛. 천사는 말했다. 구원은 지금이라고. 악마가 정말로.

헤밍웨이 알지. 노인과 바다” “...” “체호프는? 현대 희곡의 거장!” “...압니다.” 나는 어느새 존대를 쓰고 있었다. 존경과 우상의 말투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잔인하다. 머리 한 쪽에서 짓누르는 이 손바닥같은 느낌을 떨치고 싶었다. “그들뿐일까. 큐브릭. 델 토로. 고흐. 뒤샹. 파가니니. 뱅상. 리스트. 마티스. 까뮈. , 또 기타 등등 많지.” “그 사람들은 왜....” “이자들의 영감은 어디서 왔을까. 세상을 바꾼 역사적인 영감!” “......” “미끼를 물어버린 물고기들은 자신이 먹이를 사냥했다 생각하겠지.”

그 사내는 코웃음(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콧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들었기에 이를 착각한 것일수도 있겠지.)을 쳤다.

장난 한 번 한 거 가지고 이렇게 쳐지면 쓰나.”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동공은 부르짓고 더는 무릎꿇고 마는 것. 뿐은 이었다. 더는 버티기라는 것. 생각해보니 여기서 고흐는 귀를 잘라버렸다. 흘리는 피 속 붉은 빛 속에서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가려던 마음을 돌려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가려있던 얼굴. 그 얼굴! 익숙한 이목구비.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려던 순간.

저기 여기 제 자리인데.....”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기차 안에 있던 모두가 나를 죽이려고 노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여기 있는 저 도끼 든 살인마들과 눈을 마주친다면 내 토끼들이 모두 짓이겨질것이기에 죄송하다 말의 매듭을 하고 허겁지겁 문 밖으로 도망쳐버리고말았다. 아까 전의 꿈(꿈을 요즘 자주 잃는다. 글로 적는물가은 잘못된것을 인정할수가없었다.)같은건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의 망치 콩콩콩콩. 머리 속 두개골은 평평해진 지 오래다. 저 산에 있는 평평바위에서 물구나무를 서면 지금은 다리를 저릴 수 있다. 이제 좀 생각이 정리가 된다. 앞의 글을 잊어주어라. 나는지금 쫓기고있다.빨리이곳에서도망쳐야한다. 몸을휘 감는이불쾌함과 귓가에서들려오는이울음소리로부터나는빨리도망쳐야만한다.

어디든.

 

재연의 목이 바싹 말랐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준희의 편지에서 준희 어머님의 모습이 겹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쿵쾅거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재연은 매표소의 역무원에게 달려갔다.

 

저기, 혹시 역에서 제 또래의 남자 못 보셨나요?”

 

잠에서 깬 역무원은 살짝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재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 피아노를 막 건들고 그런 사람은 없었던가요?”

 

!”

 

역무원이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손님이랑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가 여기 온 적이 있어요. 그 사람 상태가 이상해서 기억해. 혼잣말을 막 하더라고.”

 

! 맞아요. 혹시 어디 갔는지 아시나요?”

 

화령산으로 가는 길을 물어 봐서 대답은 해 줬지. 어제인가, 그저께인가 일거요.”

 

화령산......”

 

친구분 빨리 찾아야 할 거요. 낮에도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길을 찾기가 힘들고 오늘 오후부터는 폭우가 내린다고 합디다.”

 

, 고맙습니다.”

 

재연은 서둘러 역 밖으로 나갔다. 회색 구름이 여전히 하늘에 가득했다. 공기가 습했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역무원은 자리에 앉아 지역신문을 펼쳤다.

 

“...... 쯧쯧쯧. 화령산도 문제가 많아. 온다는 여행객들이 다들 자살 카페다. 뭐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역무원은 고개를 들어 재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이 나기 전에 찾아야 할 텐데.”

 

-한준희-

 

거의 다 마무리되었다.

 

이 쪽 좀 잡아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 . 준희의 머리에 차가움이 느껴졌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준희는 가슴팍에서 봉투를 꺼내 상자에 담았다.

 

조준 잘 해. 미끄러질 수도 있으니까.”

 

준희는 눈을 감았다. 그 여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으로 천천히 단상에 올라섰다.

 

 

밝은 섬광과 함께 천둥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내리는 장대비에 소리는 잦아들었다.

 

-류재연-

억수처럼 내리는 장대비에 시야마저 흐릿했다. 검은 하늘에 가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연은 휴대전화의 손전등을 켜 앞을 비췄다. 비를 맞은 낙엽은 미끄러웠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재연의 팔과 무릎은 어느새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준희야!”

 

재연의 외침이 빗소리에 묻혔다. 재연의 눈으로 자꾸만 빗물이 들어왔다. 이 깊은 산중에서 준희를 찾기는커녕 재연 자신이 올라왔던 길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깊은 어두움에 공포심이 물씬 올라왔다.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돋았다. 앞쪽의 나무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재연은 경사가 진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체크무늬 셔츠였다. 색이 변한 걸로 보아 꽤나 오래된 것 같았다. 무언가가 또 발에 채였다. 지갑이었다. 신분증을 확인했다. 준희의 것은 아니었다. 왜 지갑이 이 곳에 떨어져 있는지, 쎄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검은 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비린내가 났다. 재연은 천천히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았다.

 

씨발.’

 

그것을 무엇이라 지칭해야 할까. 얼마나 이 곳에 있었는지 모를 그것은 이미 검게 변해버린 채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재연은 깜짝 놀라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암흑으로 주변이 뒤덮였다. 눈물이 나왔다. 바닥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 황급히 움직였다.

제발, 어디 간 거야.”

 

저만치 떨어진 낙엽더미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재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빠르게 달려가 휴대전화를 주웠다. 손전등의 불빛이 주변을 쓱 훑었다.

재연은 비명을 질렀다. 그것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재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바위에 기댄 채 휴대전화만을 앞으로 내밀 뿐이었다. 떨리는 불빛이 떠있는 다리들을 비춰내고 있었다.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설 수 없었다.

온 몸을 떨며 천천히 기었다. 비를 오래 맞아서 추워서 떨리는 건지 압도되는 공포감에 몸을 떠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쁜 숨을 쉬며 기어갈 뿐이었다.

 

번쩍

 

번개가 쳤다.

한 순간 온 숲이 밝아졌다.

그리고 저만치에 그가 있었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십자가, 그 광경을 목격한 재연은 온 몸이 굳어버린 채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못박힌 손발과 꿰뚫린 목을 차마 제대로 올려다 볼 수 없었다. 휴대전화가 꺼졌다. 암흑이 찾아왔다. 나무 상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재연은 상자를 주워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 안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물에 젖어가는 종이를 천천히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재연에게.


 

--

 

작업을 마치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제부터 밤샘작업에 씻지 못한 호영은 가볍게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삑삑삑삑

 

하루 종일 연락도 없던 재연이 이제야 집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호영은 같이 아침밥이라도 먹을까 생각하며 샤워를 마쳤다.

 

왔냐. 비 많이 왔는데, 다 젖었네. 빨리 씻어라.”

 

“......써야 해.”

 

?”

 

물에 젖은 채 그를 쳐다보는 재연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글을... 써야 해. 엄청난,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어.”

 

무슨 아이디어?”

 

준희가... 준희가 말해 줬어.”

 

 

 

 

 

 

 

글을 쓰라고.”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