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용서'

by 하이앨리스 posted Jul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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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서

 

  

1

오늘도 혜원의 눈을 뜨게 한건 기계들의 성난 아우성이었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새것으로 교체한다는 공고문을 본지가 까마득한데 겨우 열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쏜살같이 지나갈 줄 알았던 공사는 혜원의 인내심을 비웃었고 머릿속을 울려대는 기계들의 소음은 시간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25년이 넘은 엘리베이터가 한번 씩 덜컹거리며 멈출 때 마다 혜원은 지금 자신의 모습과 그 낡은 기계가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살 집을 구하다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외곽 지역의 이 아파트를 구한 것이 벌써 2년 전이었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고 누군가 물었다. 익숙해진다는 것.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것 아닌가. 혜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익숙해질 수도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낡은 엘리베이터를 교체하듯이 혜원의 몇 년간을 바꿔버리고 싶을 뿐이다.

소음을 핑계 삼아 퍼부어 대는 욕설들은 어쩌면 죄 없이 뜯겨져 나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욕설. 그녀를 버리고 떠난 남편에 대한 욕설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혜원이 커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희미한 흐느낌이 들렸다.

혜원은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울고 있었다. 슬픔이 뒤엉킨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 울음 소리에 이끌려 혜원은 문을 열었다.

아래층과 연결되는 계단에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혜원이 다가갈 때 까지 아무 움직임 없이 앉아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승우니?”

혜원은 애써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승우는 잠시 놀란 눈빛으로 혜원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얼굴을 떨어뜨렸다.

승우는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는 아이다. 아니 이미 아이가 아니다. 아이 때 처음 만났지만 이제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렸다.

몇 년 전 초등학생이었던 승우가 혜원의 병원을 찾아왔다. 그때 승우는 심각한 신경성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을 뜯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동그란 모양의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말이 없는 아이였다. 묻는 말에 말로 대답하기 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던가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몇 달간 계속되는 상담과 약물치료에도 증세가 완화되지 않았다. 내면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에게 억눌림을 당하는 듯 느껴졌고 혜원의 노력에도 승우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방금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촉촉한 눈과 힘이 없는 어깨와 떨리는 목소리가 기억에 남았다. 장기간 상담을 다니기는 힘들다는 그 아이의 엄마에게 혜원은 애완동물을 키워볼 것을 권유했다.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지 몇 달 후 부터 승우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고 승우의 엄마는 무척 기뻐했다.

혜원이 이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 승우와 승우의 엄마를 만났고 훌쩍 커버린 그 아이가 조금은 낯설었지만 제법 의젓해 보이기도 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단지 인사를 하면서도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혜원은 승우가 여전히 억눌림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승우 맞구나.”

혜원이 승우의 한쪽 어깨에 손을 얹자 승우의 고개는 더 숙여지는 듯이 보였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승우는 대답 대신 좀 전 보다도 더 크게 어깨를 들먹이며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릴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승우가 떠올랐다.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뜯긴 흔적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혜원은 승우에게서 심하게 풍기는 알코올 냄새를 맡았다.

제가 형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승우가 떨리는 음성으로 넋두리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

뜻밖의 말에 놀란 혜원이 얼른 되물었다.

형과 무슨 일이 있니?”

승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혜원을 알아보기나 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사실 이젠 그럴 수도 없어요. 전 용서란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어도 형이 없어요. 형은 돌아올 수 없어요.” 승우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며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승우야, 형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같은 물음을 되풀이하자 혜원을 잠시 올려다본 승우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가까스로 울음을 삼킨 채 무겁게 일어나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렇게 승우가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내려가는 것을 혜원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불러 세워 무언가를 얘기하기엔 너무 힘든 발걸음이었다.

그냥 혼자 슬퍼할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승우에게 형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승우의 엄마는 가족과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형과도 잘 지낸다고. 원래가 어렸을 때부터 소심한 아이였다고. 생시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 같다는 말과 조상 중에 기가 쎈 분이 있어서 이 아이를 붙잡고 있는 것 같다는 엉뚱한 소리도 했다.

그런 승우가 지금 형에 대해 용서란 말을 하고 있다.

혜원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 이를테면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죽고 없는 경우와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죽고 없는 경우, 어느 경우에 더 허무한 기분이 들까하고.

며칠 뒤 혜원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이웃을 통해 승우의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2

그때가 봄인지 여름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계절을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내겐 어려운 일이다.

뉴스에서 이른 더위와 함께 여름이 길어질 거라는 말을 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소매가 짧아졌고 봄을 무시하고 파고드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는 그해에 있을 폭염을 미리 예고라도 하는 듯 했다.

봄의 끝을 빼앗긴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긴긴 여름의 예고에 대한 짜증 섞인 표정들과 어울려 거리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늦은 봄의 어느 날 오후 형은 몰아치는 빗발 같은 벨소리를 울리며 나타났다. 아마도 형의 부재로 인해 내가 느끼는 감정이 상실감에서 해방감으로 바뀌는 것을 이제 막 실감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짧은 머리나 군복에서 오는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과는 다른 느낌. 현관 문턱에 앉아 모자를 내려놓고 군화의 끈을 푸는 모습을 보며 강한 전율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형 또한 거실을 한번 휘둘러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과 같은 형이었다면 들어오자마자 내게 냉수를 한잔 가져오라 했을 테고 티비를 켜며 소파에 몸을 실은 뒤 저녁을 차리라고 말했을 것이다.

첫 휴가였다.

형은 말이 없었다.

엄마는 왜 하필 형이 첫 휴가를 나오는 날에 서울로 가신 걸까?

아직도 형이 미운 걸까.

군복은 형을 더욱 강하게 보이게 하는데 충분한 몫을 차지했다. 형이 총을 들고 훈련을 받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어디로든 도망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녁때까지 형은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문을 열자 형은 늘 입던 츄리닝 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서울로 가버린 엄마에 대해 무언가 변명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일 때문에 서울에 가셨어.”

아직 무어라고 말을 할지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입을 연 것 처럼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통화했어.”

난 방안으로 한걸음을 들여놓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한 말을 전달해야 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전히 형은 침대에 누워 돌아보지도 않은 채 두 팔을 베게삼아 누워 있었다.

서울 삼촌이 급히 오라고 했어.”

삼촌 얘기는 물론 내가 지어낸 것이었다. 어쩌면 형도 눈치를 챘을지 모른다. 옛날부터 형은 내 목소리만 들어도 거짓말인지 아니지를 금방 알아내곤 했으니까.

엄마가 주고 간 돈이나 내놔.”

내말은 들은 척도 않고 형이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두 다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방 화장대위에 있어.”

잠시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내가 물었다.

자장면 먹을래?”

너나 먹어. 약속 있어.”

형은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그게 전부였다.

첫 휴가를 나온 형의 얼굴을 본 것도 형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돈을 챙긴 형이 쇼핑백에 입고 온 군복을 넣어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형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이후 나는 형을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있는 형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휴가를 나온 지 두 달 후 형이 부대에서 함께 보초를 서던 선임 병사를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3

승우야?”

나를 부르는 형의 목소리는 항상 다급하게 느껴졌다.

…….”

난 대답하지 않았다.

, 이 자식아, 부르는 소리 안 들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형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날카롭게 울렸다.

…….”

때로는 몇 분 후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싫은 날이 있다. 지금이 그랬다.

소파에 일어나 앉는 형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와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천천히 방에서 나오는 나에게 이미 눈꼬리가 올라갈 만큼 올라간 형이 말했다.

리모컨 가져와.”

리모컨은 형이 소파에서 손만 뻗으면 되는 곳에 있었다.

바로 위에 있잖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형은 벌떡 일어나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개자식, 죽고 싶어? 빨리 갖다놓고 물이나 떠와.”

리모컨과 물을 가져다주자 이번에는 밥을 차리라고 했다.

잠시 형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가게를 하는 엄마가 거의 집을 비웠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내차지였다. 형은 줄곧 사소한 심부름으로 나를 불러댔고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발로 차거나 뺨을 때리거나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화가 난 채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가만히 있는 내게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거나 화가 풀릴 때 까지 때렸다. 형은 거의 날마다 화가 나있었고 왜 그렇게 항상 화가 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머리 등 다리 할 것 없이 온몸을 향했고 한번은 명치 쪽을 잘못 맞아 밤새도록 신음 소리를 낸 적이 있다. 그 후에도 명치의 통증은 수시로 찾아왔고 형의 구타가 원인인줄 모르는 엄마는 내가 밥을 급하게 먹어 체한 줄 알고 위장약을 사다 주시곤 했다. 코피가 터지는 건 예사였고 허리의 인대가 늘어나 몇 주 동안 고생한 일도 있었지만 형에게 맞아서 그렇다는 얘기는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한 달에 한번이나 찾아오는 아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다음에 찾아올 형의 폭력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소파에 한 움큼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걸 보신 엄마가 달려와 내 머리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놀라 소리를 지른 건 잠시 후였다. 대머리처럼 정수리 부분에 하얀 맨살이 드러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어린 내가 놀랄까 숨기실 만큼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분이 아니었다. 병원에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내 머리의 가운데는 하얗게 비어 있었다. 물론 우리 집의 곳곳에서는 머리카락들이 한 웅큼씩 눈에 띄곤 했다.

엄마는 전화로 누군가에게 이 일을 얘기 할 때면 머리의 가운데가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로 구멍이 뚫렸다고 표현하시곤 했다. 아마도 그런 전화를 하실 무렵에는 엄마는 그 사실에 익숙해져 더 이상 내 머리의 구멍이 큰 충격이나 비명거리가 아닌 걸로 생각하셨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형을 보고 그 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어디서 밤새워 놀다 왔는지 까칠해진 모습으로 들어와 하루 종일 잠을 자곤 했다. 그런 날은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다.

형이 중학교를 졸업하기 몇 달 쯤 전이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형이 돈을 훔쳤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바로 이웃집에 사는 같은 반 친구의 돈이었다. 액수가 꽤 많았고 형을 의심한 친구가 형의 가방에서 돈을 찾아내자 형은 사과를 하는 대신 친구의 코뼈를 부러뜨렸다. 학교 측과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찰서로 보내진 형은 3주 동안 정신 교육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엄마는 미성년자가 아니었다면 바로 구속되었을 거라는 말을 경찰에게 들었다.

그런 일에도 형은 달라지지 않았고 엄마와 몇 번 큰 다툼이 있은 후 부터는 더욱 밖으로 돌았다.

엄마가 고양이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온 건 내 정수리 부분의 구멍이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 만큼이나 커진 뒤였다. 난 머리를 만지는 대신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나자 머릿속 구멍엔 까칠까칠한 검은 털이 자라기 시작했고 고양이는 내게 가장 소중한 가족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형이 한 번씩 고양이를 쓰다듬는 걸 볼 때 마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 했지만 형은 나에게 하듯 고양이를 발로 차거나 때리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신기하게도 아침에 일어나 내 옆에 누워있을 고양이가 없어져 형의 침대에서 발견될 때면 나는 멍청한 놈이 형과 나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토요일 밤이었다. 뭔가를 잘못 먹은 고양이가 끙끙 앓기 시작했고 일요일이 지나고 나서야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집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엄마 말로는 식도가 막혀 죽었고 죽을 당시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나는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울었다. 다시 혼자가 된 느낌. 버림받은 외톨이 신세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내 기억 속에서 형이 우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우는 형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괴롭히고 때리는 것을 일상으로 여기는 형이었다. 나를 때릴 때보다도 그때의 우는 모습이 더 미웠다. 고양이 대신 죽어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고양이는 형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이 죽고 대신 형 없는 세상에서 고양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꿈속에서 고양이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안으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저만큼 가 있었다.

가까이 가려고 하면 조금씩 멀어지고 또 손을 뻗으면 재빠르게 저만큼 가버렸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누군가 저만치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형이었다. 고양이가 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난 소리를 지르며 형의 품속에 있는 고양이를 뺏으려고 했다. 내 고양이를 내놓으라고. 형은 죽어버리라고. 고양이는 내거라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아니 머리카락이 바람에 송두리째 뽑혀 온통 내 주위가 시커멓게 덥히기 시작했다. 내 눈과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감기기 시작했다. 나 두려움에 울었다. 하지만 울음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명치에서 죽을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난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두드리다가 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4

선생님.

형의 얘기를 말씀드리지 못했던 건 제가 겁쟁이였기 때문이에요. 전 맞는 게 두려웠어요. 제가 기억하는한 제 옆에는 항상 형이 있었어요.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자다 깼을 때 엄마나 아빠는 없더라도 형은 항상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형이 저를 때린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항상 함께 있는 악마에게 더 큰 무기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였어요. 형이 군대를 가고 나서 저는 한동안 무언가 제 몸에서 빠져나가버린 듯한 허전함을 느꼈어요. 제 몸이 맞는데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형은 어떻게든 군대라는 환경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나 봐요. 형의 성격상 그랬을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해버리곤 했었거든요. 제가 보기엔 틀림없어요. 그냥 나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을 거예요. 형은 그 정도로 막무가내였어요. 어린 손자가 할머니에게 사탕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것처럼 형의 생활은 막무가내이고 맹목적이었어요. 저를 때릴 때도 그랬어요. 시작은 물론 작은 이유 따위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맞는 도중에 팔등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힐끗 힐끗 본 형의 얼굴이 말해주었어요. 왜 때리는지 이유 같은 걸 물어본다면 죽여 버리겠다는 얼굴 말이에요. 처음부터 때리는 형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오래 맞다보면 그런 익숙함과 여유가 생기게 되요. 웃기겠지만 그건 여유였어요. 난 훌쩍거리면서도 형이 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알 수 있었어요. 형은 항상 내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한번 씩 울음소리를 들었을 땐 때리려는 동작을 잠깐 멈추거나 욕을 해대곤 했어요. 물론 내 훌쩍거림이 거슬렸겠죠. 당연하잖아요. 나도 또한 그걸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훌쩍거렸어요.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거든요. 형의 화가 절정에 다다랐다는 걸 느낄 때면 난 두려웠어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안 곳곳의 구석으로 도망가 숨었어요. 거기서 형의 화가 가라앉길 기다렸죠.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었는지. 형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던 거죠.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형이 자기보다 더 키가 커진 동생에게 말이에요. 그 사실이 가끔씩 끔찍하게 느껴질 때면 내 뒷덜미에서 머리꼭대기까지 뭔가 솟구치는 것 같았어요. 뭔가는 해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난 한 번도 뭔가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나였어요. 형은 그런 나를 알고 있었던 거구요.

형이 새벽 보초를 서다 어떻게 선임이라는 사람을 죽였는지 말해줄까요. 아니 그걸 말하기 전에 왜 죽였는지부터 말해야겠네요. 우습게도 형은 부대에서 선임에게 많이 맞았다고 해요. 내가 맞은 것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또 더 잔인하게 맞았나 봐요. 군인들이니까요. 그러다 죽인 거예요. 가끔씩 뉴스에 나오잖아요. 하지만 형은 뉴스에 나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형을 때리다 죽은 선임의 부모가 일을 조용히 처리하길 원했대요. 세상에 그런 부모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물론 우리 부모님과 합의를 했겠죠. 난 자세한건 알지 못하지만 말이에요. 형의 부대에선 당연히 조용히 넘어가길 바랬고 양쪽 부모님의 합의로 죽은 두 생명은 화장도 되기 전에 비밀이라는 항아리에 밀봉 되어버린 거예요.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그 일에 대해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의 전화통화 소리나 또는 두 분이 속삭이며 한숨과 함께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다든가 또는 나의 상상력을 조금은 더해서 형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어요. 끔찍했어요. 왜 형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을까요. 선임에게 맞으면서 형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저를 떠올렸을 지도 몰라요. 한번쯤은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형은 새벽 보초를 서는 자리에서 잠깐 졸고 있는 선임의 머리통에 총부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대요. 그 날 둘이 함께 근무를 서게 될 때까지 형은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까요? 일의 순서를 계획하면서 말이에요. 선임을 죽인 형은 그 즉시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진 않았어요. 이미 총에 맞아 죽은 선임의 가슴과 등을 칼로 여러 번 찔렀던 것 같아요. 피바다였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 말을 하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요?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제 상상력이 필요해요. 형은 아마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을까요? 용의주도한 사람은 아니지만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을 정도로 용감하고 철저한 사람 또한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잠시 주저앉아 있던 형은 정신을 차리고 누군가를 떠올렸을 거예요. 그리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형은 자신의 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어요. 거기까지만 말하고 싶어요. 형이 죽은 모습이나 그 후의 모습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 말할 수도 없어요.

 

승우가 혜원에게 보낸 편지는 거기서 멈춰 있었다.

마치 쓰다만 편지처럼 두 페이지와 두 줄을 채운 채 누가 썼는지 누구에게 보낸다는 따위의 내용 같은 건 들어있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 편지는 혜원에게 보낸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었다.

혜원이 오후타임을 맡은 병원에 출근하기 위해 막 출입문을 나서는데 문 앞에 승우가 쓴 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이 편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린 승우는 병원에서 한 번도 형에게 맞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머리에 구멍이 나도록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형에게 맞는다는 소리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혜원은 다시 용서를 생각했다. 용서할 대상이 없어진 승우를 생각했다. 아니 두려움의 대상이 없어진 승우를 생각했다. 승우의 외로움을 생각했다.

혜원은 승우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에서든 계단에서든 또는 집 앞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을 보며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혜원은 승우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고 싶었다. 형의 폭력에 억눌려 지냈던 암울했던 승우의 어린 시절이었다. 혜원은 울며 헤매고 있을 그 불쌍한 영혼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싶었다.

 

5

남편은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대로 계속 살 수 없다고도 말했다. 아이를 가지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10년 동안 그녀의 노력에 남편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빚을 얻어 시작했던 혜원과 남편의 병원이 5년을 버티지 못한 채 문을 닫았고 그 후 남편의 침묵은 절대로 열수 없는 자물쇠와도 같이 느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남편이었다. 일주일을 외박하고 돌아온 남편은 혜원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한 번 더 노력해보자는 혜원의 부탁을 남편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고 얘기했다.

처음부터.

레지던트 수련시절 만난 남편과 혜원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남편이 처음 혜원을 부모님께 인사시킨다고 데려가던 날 혜원은 놀라움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꼈다. 남편은 혜원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집에 살고 있었고 혜원의 부모는 초라한 차림의 혜원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병원으로 찾아온 남편의 엄마를 만난 것은 이틀 후였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날.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나갔지만 그런 말을 할 기회 조차 없었다. 만남은 불과 몇 분 만에 끝이 났고 돌아서는 혜원에게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소한 것으로 다가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때 혜원의 가슴에는 조그마한 불꽃 하나가 생겼다. 미움보다는 훨씬 더 강하고 질긴 것이었다. 그 불꽃은 남편의 가족들을 볼 때마다 이글거렸다. 어쩌면 그 불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 남편은 혜원을 안을 때 마다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첫아이를 유산하던 날 혜원의 불덩어리는 아이와 함께 빠져나갔다. 새벽에 하혈의 징조를 느끼고 두려움에 울던 혜원이 화장실 변기에 안자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밀어내는 듯 커다란 핏덩어리 하나가 빠져나갔다. 혜원은 기절했고 아이는 혜원을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남편의 말에 혜원은 무엇이 처음이고 무엇부터 잘못인지를 따져 묻고 싶었다.

그들의 사랑.

혜원을 무시한 그의 부모들.

부모를 거역한 남편.

혜원의 유산.

마음이 멀어진 그를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혜원은 쫓겨나듯 집을 나왔다. 처음부터 혜원의 것은 아무것도 없던 집이었다.

혜원은 3일 동안 잠만 잤다.

잠을 자는 동안 줄곧 꿈을 꾸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그녀를 원했던 남편과 첫 살림을 시작했던 작은 아파트가 보였다. 초라한 결혼식이었지만 두 사람의 얼굴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웃음이 가득했다. 아이도 보였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그와 혜원의 손을 잡고 노란 병아리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라진 저쪽에 안개가 짙게 낀 바다가 보였다.

조그만 배 두 척이 있었고 한배에는 혜원이 다른 한배에는 남편이 타고 있었다. 파도가 일렁이자 그녀의 배가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혜원의 배가 멀어지는 데도 남편은 태연히 쳐다보기만 했다. 애써 부르지 않았다. 혜원은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는 바다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혜원은 소리를 지르다 잠에서 깼다.

6개월이나 혜원은 비슷한 꿈에 시달렸다. 혜원이 정신을 차린 건 일자리를 구하러 나갔던 병원에서 후배를 통해 전해들은 그의 결혼 소식 때문이었다.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혜원을 언제 알고 지낸 사람이냐는 듯이 지나쳤고 물론 그 옆에는 혜원이 아닌 다른 여자가 그와 함께 나란히 팔짱을 낀 채 걸어가고 있었다.

혜원은 그 동안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에게서 그를 빼앗고 부모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그로 인해 아이를 잃고 남편도 떠나보낸 자신을 힐책하고 있었다. 버림받았지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그녀의 이러한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건지 그를 위한건지 그것 까지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혜원이 고독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용서를 생각하는 동안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이제 그는 그녀를 버린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과거와 미래까지도 짓밟아 놓았다.

승우는 용서할 대상을 잃었고 혜원은 용서의 의미를 잃었다. 그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6

선생님.

형이 떠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에요.

어제는 형이 있는 곳엘 다녀왔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0년 만에 처음 형을 찾아갔었죠.

전 이제 많이 변했는데 형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절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건 좋은 것 같아요. 늙지 않는다는 거.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젊을 수 있다는 거 말이에요.

창문을 열어 놓았는데 바람이 제 왼쪽 어깨를 건드리고 있어요.

한쪽 어깨만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제겐 무척 친근하게 느껴져요. 바람을 맞아 바뀌고 싶다는 제 마음과 바람을 맞지 못해 그대로 존재하고 싶은 제 마음을 두 어깨가 표현 해주는 것 같아서요.

티비에서 선생님을 봤어요.

아마도 청소년 문제 대담프로그램이었어요.

10년 전이나 변함없는 따뜻한 눈과 말할 때의 손동작들이 저로 하여금 시간을 거꾸로 느끼게 해주었죠.

그동안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많이 힘들어하던 저를 부모님보다도 더 애처롭게 쳐다보셨던 분이었으니까요.

정말 힘들었던 시간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걸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가 않아요.

그냥 10년이 지났다는 것이 제겐 작은 기적이에요.

지금 저는 시골 마을의 성당에서 신부님을 도와드리는 일을 하며 지내요.

안드레아 신부님.

저를 이곳으로 데려와 기적을 일으키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에요.

형이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그분들도 함께 겪어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 힘드셨겠죠. 함께 있으면서 더욱 힘든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곳에서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저희 가족들은 끔찍했어요. 전 집을 나와서 떠돌아 다녔고 어느 곳을 얼마나 떠돌아 다녔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어차피 그 속에 저는 없었으니까요. 빈껍데기뿐이었죠. 바닷가 마을의 작은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드레아 신부님을 만났어요. 몇 마디 물어보시곤 술을 주셨는데 나가시면서 따라오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신부님이 그러시더군요. 그냥 두면 죽을 것처럼 보였다고.

선생님.

며칠 전에 우연히 신부님을 따라 서울에 다녀왔어요. 천주교인들의 행사였는데 그곳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저를 알아보고 먼저 이름을 불렀어요. 제가 먼저 봤더라면 모른 척 했을 거예요. 저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아이였으니까요. 잠깐 동안 앉아 차를 마셨는데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죠. 형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아시겠지만 형과 저는 연년생이었고 같은 중학교를 다녔어요. 한 번도 같은 차를 타고 다닌 적은 없었지만요. 형은 저를 창피해 했으니까요.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형이 저를 창피해 한다고.

그 친구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저를 괴롭혔어요. 때리고 돈을 뺏고. 학교란 곳엔 항상 그런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부터 저를 못 본 척 했던 것 같아요. 제 기억 속엔 없는데 그 친구가 말해주니 확실히 다시 떠올랐죠. 그것이 형 때문이었데요. 제가 맞는 것을 본 형이 그 아이들을 사정없이 두들겨줬나 봐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와 다르게 형은 몸이 좋고 기운도 좋았어요. 때리고 오는 일은 있어도 맞고 오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친구와 헤어진 후 이 사실을 지금 알게 된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죠. 무언가 분명하게 정리가 되진 않았지만 제 몸속에서 씻기지 않고 있던 벌레의 분비물이 작은 애벌레가 되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느낌이었어요.

전 한 번도 형이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을 본적이 없어요.

두려움이 뭔지 느껴보신 적이 있으세요?

형이 저를 때리기 전 그 눈빛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건 동생을 쳐다보는 눈빛이 아니었어요. 아마도 살인을 저지르기 전 마음 가득히 살기로 충전되어 있는 인간의 눈빛이 아닐까 싶어요. 언제나 모든 순간에 전 죽음을 상상했으니까요. 형의 죽음으로 생긴 공허감과 형에 대한 미움이 제 마음속에 한동안 자리잡고 있었어요. 전 아직도 꿈을 꾸곤 해요. 시커먼 비가 오는 날 고르게 포장되지 않은 길바닥을 형에게 끌려 온몸에서 흐르는 피로 물들이고 다니는 꿈을요. 깨어나면 그건 피가 아니라 땀이에요. 신부님께서도 이 성당에 있는 신이라는 존재도 그 축축한 피를 제 몸에서 말려주진 못해요.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전 두려움에 떨었죠. 그건 제게 영원과도 같았으니까요.

제 기억속의 형이 저를 때리는 친구들을 혼내주는 모습으로 자리 잡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괴롭힘을 당했고 처참한 모습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겠죠.

신부님은 제게 용서를 말씀하세요. 언젠간 그렇게 될 거라고 말씀하시죠.

형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또다시 쓰다만 편지였다.

보낼까 말까 많이 망설였으리라.

과거 속에 묻힌 용서. 신이 말하는 사랑.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

혜원은 10년 전 달이 유난히 밝았던 밤을 기억한다.

전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 창밖으로 유난히 둥글고 밝았던 달빛을 쫓아 혜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집 앞 놀이터의 빈 벤치였다.

승우가 벤치의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구토를 하고 있었다.

혜원이 가까이 가자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얼마동안 씻지 않은 걸까. 달빛은 그런 승우를 잔인하게 비추고 있었다. 냄새는 악취뿐만이 아니었다. 혜원의 코를 자극하는 것은 분명 피냄새였다.

혜원은 허둥지둥 승우의 한쪽 손에 쥐여있는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손에 흐르는 끈적끈적한 액체.

그날 어떻게 승우를 끌어안았는지 승우의 손에서 그 날카로운 칼날을 빼앗았는지 그리고 병원으로 승우를 옮겼는지 혜원은 설명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혜원이 한 일이 아니라 달빛이 한 일이었을 것이다. 혜원은 그 날 밤 내내 밝고 둥근 달을 보았다. 달빛이 시키는 대로 승우를 끌어안았다.

 

7

몇 년 만일까.

혜원은 그야말로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이번 휴가에 혜원은 여행을 선택하지 않았다.

일부러 휴가 기간을 맞춰준 남편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조용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알람이 여덟시를 알리자 어제 남편이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깨워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편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노트북과 이어폰으로 봐서 밤새도록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음에 틀림없었다. 몇 번 흔들어 봤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건강검진을 받을 시간이 없었다.

혜원은 큰소리를 지르며 남편의 엉덩이 부분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지만 아직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혜원은 다시 큰소리를 지르며 아까 보다도 더 아프게 엉덩이를 계속 때렸다.

그제서야 남편은 찡그린 눈을 반쯤 뜨며 일어나 속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배웅을 할까 하다가 혜원은 아직 자신이 잠옷 차림인걸 알고 현관문을 조용히 닫았다.

이마에는 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어지러웠지만 아직 에어컨을 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부엌으로 가서 강아지들의 아침을 챙긴 후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젯밤 피아노 위에 올려놓은 우편물에 눈이 머물렀다. 승우의 편지였다. 혜원은 모임에서 적잖은 와인을 마신 채 귀가를 했고 승우의 이름을 보는 순간 얼른 봉투를 열어볼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아니 그 봉투를 열어보기 전에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지면으로나마 승우를 만날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 승우가 힘들게 살아왔을 시간들에 대해 왜 자신이 미안해하고 변명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혜원은 그 봉투를 바로 뜯어 볼 수 없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이었다.

승우는 아직도 형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의미 없는 용서였다. 용서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쓰다만 편지에서 혜원은 살려고 노력하는 승우의 몸짓이 느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힘들어했던 승우에게 형이란 존재는 거대한 산이었다. 아니 짓누르는 바위덩어리였을 것이다. 삶은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다. 승우는 용서보다 먼저 제대로 살 수 있어야만 했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덩어리가 양 떼들 처럼 어디론가 꾸물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천천히 작은 구름조각 하나가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길을 잃은 양이다. 혜원은 그 양이 다시 무리를 쫓아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쳐다본다. 햇살은 양치기처럼 작은 구름을 꾸짖고 바람은 날쌘 양치기 개처럼 찢겨져 나가는 양을 위협한다. 어쩌면 작은 구름 조각은 이대로 푸른 하늘의 빈 공간으로 흩뿌려 질지도 모른다.

 

혜원은 잠시 멍했던 정신을 가다듬는다. 승우에게 해줄 말이 떠올랐던 것 같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편지지를 찾는다. 아마도 운이 좋다면 쓰여진 편지는 승우에게 전해질 것이다. 혜원은 다 쓰지 못한 편지지에서 다시 한 번 찢겨져나간 구름 조각으로 눈길을 돌린다.

마치 승우를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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