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차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모르는데 아는 사이

by 다이무리 posted Aug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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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데 아는 사이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두 가지를 깨달았는데 하나는 아직 죽지 못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이대로 살면 얼마 못 가서 가장 우울한 죽음을 맞이할 거란 사실이었다. 그걸 깨달은 곳은 미국의 세쿼이아 공원이었다. 그날은 동행 없이 혼자 걸었다. 일주일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정장 입은 사람들을 만난 뒤였다. 날씨는 하늘을 기준으로 왼쪽은 우중충하고 오른쪽은 맑았다.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누군가 우산을 쓰고 다녔다. 곧 비가 올 거란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어느 길 사이로 들어설 때 길을 잃었다. 주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들이 있었다. 그 나무들은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거인의 발처럼 보였다. 어디서 저 나무들의 이름이 세쿼이아 나무고 점보제트기를 가득 실은 상태보다 두 배 무거우며 평균적으로 이천 년 이상의 나이라는 걸 읽은 게 떠올랐는데 그러다 문득 오늘이 월요일이란 것도 생각났다. 길은 한산해서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는데도 우비를 입을 필요가 없었다. 까마득한 높이에 달린 잎사귀 사이로 짙은 안개가 모여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그 길 안쪽으로 계속해서 걸었다. 어느 나무를 골라 두어 사람이 전기톱을 꺼내 양쪽을 잘라도 하루를 전부 보낼 것만 같았다. 걔 중에는 뿌리 부분이 타거나 썩어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조그맣게 난 나무도 있었다. 나는 그 나무들의 위치를 기억해두려 유심히 봤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지면 거기 잠깐 머물게 될까 싶어서. 중간중간 아예 드러누운 나무가 있었는데 절대로 넘어갈 수 없어서 빙 돌아가아만 했다. 나는 뭘 찾지도 않고 뭘 찾는지도 모르는데 한 길로 난 계단을 올랐다. 표지판 앞에 멈춰 섰을 땐 땀범벅이 된 채였다. 나는 그 영어 단어를 작게 읽었다. 더 프레지던트.

 

불빛 속에서 반짝이는 이름을 잠결에 봤는데 무어라 읽을지 몰라 계속 눈을 깜빡였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다. 천장에 붙여놓은 야광별을 보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먼 우주로 떠나는 꿈을 꿨다. 우주선은 캡슐 모양이었고 내 짐은 고작 가방 하나였다. 집이 어딘지 몰라 지하철역 구석에 앉아 졸았다. 이름이 적히면 죽는 노트에 적힌 사람처럼, 내 몸이 몸이 아닌 것 같이 걸었더니 애인의 집 앞이었다. 따뜻한 카레 냄새가 났다. 저녁 식사는 이미 끝난 뒤였다. 욕조에 받아 놓은 물도 미지근했다. 그 집 현관에는 처음 보는 국기가 걸려 있었다. 뉴스가 끝난 뒤에 할아버지가 자기 어렸을 때 한 놀이라며 쿠차 말라를 하자고 했는데 누구도 그 놀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여기가 무슨 나라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떠나기 전날 밤 먼 우주로 떠난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물었다.

얼마나 먼데?

그냥 멀지.

우주도 먼데 먼 우주는 얼마나 먼데?

우주에는 별이 하나도 없었다. 조종사도 없이 먼 길을 떠나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는 지폐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건 땔감으로 쓰기에 딱 좋아 보였다. 문제는 불이었다. 어디에도 부딪힐 게 없어 우주선도 터뜨릴 수 없었다. 지폐를 전부 바닥에 흩뿌린 다음에 침을 뱉었다. 작은 불씨가 조금씩 일렁거렸다.

눈이 조금씩 열린 뒤에 커튼을 걷었다. 전화를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전화했던 건지 문득 알아차렸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읽고 창문을 열었지만,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꿈을 열 시간이나 꾼 기분이 들었다. 시계를 보면 뭔가 쫓기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거울 옆에 내려놓은 게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그 시간이 뭔가 나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기도 하고 기간 같기도 하고 이내 아예 없었던 날들인 거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누가 자꾸만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얘길 수도 없이 들어야만 했다. 엄마는 늘 저녁 여덟 시쯤 전화를 걸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냐고 물었다. 나는 늘 똑같은 어조로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곤 긴 한숨. 바통을 이어받은 아버지는 먼저 한숨부터 쉬고 나서 내가 네 나이 때는, 같은 말로 포문을 열었다. 아무 대답이 없으면 중간에 듣고 있는지 수시로 물었다. 나는 이미 수백 번도 더 본 영화를 보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이미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동기의 연주회를 보면서, 컬러링북의 색을 칠하면서 네, , 하고 대답했다. 어디서 알았는지 어릴 때 친했지만 절연한 친구들에게도 전화가 왔다. 처음에 그 통화들은 안부를 묻는 식으로 시작했다. 아직 그 동네에 사는지, 결혼은 했고 아이는 있는지, 아직 연락하는 친구가 있는지, 요즘 뭐 하고 사는지. 그다음에는 그 시절이 좋았지,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별일 아닌 거로 싸웠다가 쉽게 화해한 것처럼 굴었는데 나는 그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걔 중에는 내가 사귀던 여자와 바람이 나 임신을 시킨 뒤에 낙태를 종용한 놈도 있었고 군대에서 뺨을 때리고 성기를 발로 차던 놈도 있었다. 마지막은 늘 똑같았다. 묻기 쉽지 않다는 듯 말을 질질 끌면서도 실은 너무 확인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불쑥 던지는 한 마디. 너 회사 그만뒀다며? 간혹 한 마디쯤 더 붙이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좋은 회사를 왜 네 발로 나가. 좋은 건 어떻게 알고 내 발로 나간 건 또 어떻게 아는지 묻기도 전에 다들 전화를 끊었다. 세계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 것만 같았다. 나는 그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을 것 같은 순간을 노려 전화를 받는 사람. 아내는 그게 감정이라고 말했다. 그 누구도 언제 전화를 끊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사람이 언제 전화를 끊을지 알 수 있어, 그래서 딱 종료를 누르기 전에 받는 거야. 언젠가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언젠가는 아내가 내 전화를 받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떠올렸다. 아내는 동굴 속에서 말하듯 물었다.

전화 왜 안 받아?

잤어.

오늘 월요일인데?

연차 냈거든.

자기 부모님 생일은 진작 지났고, 자기 생일도 아니고, 제사도 아니고, 명절도 아니고, 요즘은 축구 경기 시즌도 아니잖아, 그럼 남은 건 딱 하나네?

그게 뭔데?

보러 올 거면 저녁에 와.

그새 농담이 늘었네.

따로 산 지 일 년이나 지났는데 뭐라도 늘어야지.

누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웬 남자가 갈색 서류 봉투를 건네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뭘 보낼 일이 없어 남자에게 물으려는데 이미 사라진 뒤였다. 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어보니 잘못 배달 온 건 아니었다. 나는 보낸 사람의 이름을 읽었다. 맹효임. 그건 제주도에서 온 봉투였다.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그냥 뭐?

모르는 사람한테서 모르는 물건이 왔어.

뭔데?

갈색 서류봉투.

다행히 폭탄은 아니네.

그랬으면 했어?

, 왠지 자기한테 그런 게 지금 필요한 거 같아서. 목소리가 딱 그래.

봉투를 앞뒤로 훑어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종이칼로 윗부분을 잘라낸 뒤에 속을 조심히 확인해도 안에 들어 있는 건 종이 한 장뿐이었다. 나는 종이를 꺼내지 않고 겉면을 만졌는데 감촉이 부드럽고 빳빳한 게 절대로 구기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봉투를 잠깐 식탁에 올려놓고 이름을 떠올렸다. 맹효임. 그런 특이한 이름은 까먹을 리가 없었는데도 여러 여자가 떠올랐다. 처음 간 엠티에서 몰래 숲속에 들어가 입을 맞춘 여자인 거 같기도 하고 말이 많고 주근깨도 많던 아내의 오랜 친구 같기도 하고 고향이 섬이라며 지긋지긋한 곳이라고 불평을 늘어놓던 직장 후배 같기도 하고 273번 버스는 중랑구라는 2번 권역에서 출발해 마포구라는 7번 권역이 종점인 3번 노선의 버스라고 설명해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애인 같기도 했다. 나는 종이를 슬며시 꺼냈다. 그건 누가 어떻게 읽어도 편지였다.

 

오랜만일까. 거긴 늘 추운데 여긴 늘 온난한 기분이야. 편지를 쓰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 누군가에게 어떻게 쓰는지 묻고 싶지만, 난 여기 혼자 있어. 이 집은 내가 살기엔 너무 큰데도 이사 갈 맘이 들지 않아. 네가 지낸 방은 여전히 그대로야. 나는 거기에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어. 마치 선사 시대의 유적이 된 거 같아서. 돌아온다고도 안 돌아온다고도 말하지 않고 간 건 참 무기력한 일이구나. 잠을 자다가도 작은 소리에 몸을 일으켜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어. 우린 헤어졌지만, 헤어지지 않은 사이기도 하니까. 혹시나 이 편지를 제대로 받게 되더라도 여기로 전화를 걸거나 불쑥 찾아오지 않았으면 해. 아무 의미 없이 비행기를 타는 건 곤혹이니까.

아깐 아침인데 이젠 완연히 밤이다. 화분을 전부 들여놓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 여긴 아직도 네가 가져온 씨앗을 심은 화분이 여럿 있어. 물을 주는 걸 종종 잊어버리는데도 잘 살아 있더라. 아마도 주인을 닮아서 그럴 테지. 어젯밤엔 창문을 전부 닫고 거실에 앉아 도미노를 하다 잠이 들었어. 잠결에 도미노가 와르르 쓰러지는 소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네 방문 앞까지 멀쩡히 서 있었어. 혹시 네가 우렁각시처럼 도미노를 다시 세우고 간 게 아닐까 했다니까. 뭘 먹을까 냉장고를 열었는데 반찬이 전부 상해 버렸어. 미역 줄기 볶음도, 감자조림도, 계란말이도, 콩나물무침도. 멧돼지한테 음식 찌꺼기를 주며 군 생활을 했다던 네 말이 떠올랐어. 초소 안에서 북한군의 입 모양을 봤다던 네 말도 같이 떠올랐어. 이 편지를 우스운 입 모양이라 생각해준다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음식 찌꺼기라고 생각해도 좋을 텐데.

이 편지를 끝까지 읽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게. 이젠 뭐가 끝나는 게 정말 싫어, 끔찍하게. 자주 가던 가게가 닫았어. 한라봉이 전부 얼어붙었어. 누가 산에 오르다 떨어졌단 소식을 들었어. 길을 헤매던 고양이, 우리가 하온이란 이름을 붙여준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었어.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놓쳤어. 젊은 해녀 하나가 마을을 떠났어. 해변은 여전히 누군가 버린 물건들이 가득해. 크리스마스엔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카페 가득 앉아 있어서 자리가 없었어. 우체부가 또 내 우편을 다른 집에 전해주고선 미안하단 말 없이 가버렸어. 공원 근처에서 버스킹을 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제 버스킹도 안 하고 기타도 팔았단 얘길 들었어. 인도네시아로 선교 간 언니가 엽서를 보냈는데 우울한 얘기뿐이었어. 그래. 인도네시아. 네가 소파 밑에 숨겨놓듯 두고 간 책을 읽었어.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는 구눙 크뮤쿠스 산에서 하는 종교의식에 대한 글을 읽었어. 35일 동안 낯선 사람 7명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는 그 의식. 그 산에서 성관계를 하면 정말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적혀있더라. 네가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었을지가 궁금했어. 그래서 어쩌면 네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인도네시아로 갈 수도 있어. 언니가 지내는 곳에 잠깐 머물며 그 35일이 다가오길 기다릴 수도 있어. 그렇게 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까. 그런데 소원을 이루면 그게 끝일까. 네 소원은 낯선 사람 6명과 성관계를 한 후 7명째를 찾지 못해 이뤄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 소원이라면 어떨까.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어. 누구도 내가 얼마나 나쁜지 모를 정도로 나쁜 사람. 뭐가 끝나는 게 전부 내 탓인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길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나쁜 채로 남는 사람. 묻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어. 네가 불행하다면 좋고 이왕이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펐으면 좋겠어. 내 모든 기억이 네 모든 기억과 전부 달랐으면 좋겠어. 모르는데 아는 사이였음 좋겠어.

연필로 쓰는 도중에 자꾸만 눈물이 나서 어쩔 수 없이 타이핑한 종이를 인쇄했어.

박해인에게.

 

빈 곳 없이 한 장짜리 편지였다. 나는 종이를 조심스레 봉투에 다시 넣었다. 손에 든 전화기를 열어 내 안부를 물었던 모든 사람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걸었다. 박해인이 지금 어디 사는지 아느냐고. 예전에 롱보드를 타던 고등학생과 사귄 적이 있는 그 박해인, 노래방에 가면 가장 먼저 탬버린을 드는 그 박해인, 커피와 담배를 달고 살던 그 박해인, 생전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서 육개장을 먹다가 펑펑 울었다고 말하던 그 박해인, 같은 대학을 다녔고 같은 대학원도 다녔는데도 알 듯 알 수 없었던 그 박해인을. 나는 박해인이 어떻게 내 주소를 알고 왜 맹효임이란 여자에게 대신 그 주소를 알려줬는지를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행방을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나는 기다란 코트를 걸쳤다.

월정사는 아주 조용했다. 여기저기 쌓인 눈을 밟으며 절 내부를 돌았다. 간혹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고개만 꾸벅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에 새가 앉아 있었다. 스님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말없이 웃었다. 나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님이 앞장서 걸었다. 나무들만 빼곡 들어선 길 사이로 들어선 뒤에야 상쾌한 냄새가 느껴졌다. 관광객 같은 노부부가 스님 앞을 지나며 합장했다. 스님은 걷고 또 걷다가 발을 멈추고 바닥을 바라봤다. 개미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스님에게 가까이 가서 물었다.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물어보세요.

여기 혹시 박해인이란 남자가 묵은 적이 있습니까?

누굴 찾으러 오셨군요.

, 예전 친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시고요?

.

그럼 굳이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온 편지를 제가 대신 가지고 있어서요.

이 주변을 다 돌았는데도 보지 못하셨다면 이미 떠난 후입니다. 여기 있었단 사실조차 지나간 일이니 아예 없었던 것과 똑같은 셈이지요.

차릍 타고 절 주변을 조금 돌았다. 박해인을 닮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 고속도로 입구에 들어선 뒤엔 문자 한 통이 왔다. 자기랑 살 때가 그래도 제일 좋았던 거 같아. 아내는 가끔 그런 느낌의 글을 보냈다. 하루에 두 통은 기본으로, 이틀에 스무 통씩 보내기도 일쑤였다. 나는 문자를 지우고 나서 창을 열었다. 어디선가 옅은 담배 연기가 들어왔다. 담배를 태우던 박해인 앞에서 잠깐 어울려 도란도란 나눈 얘기는 대개 여자 얘기였다. 박해인은 콧날이 오뚝하고 양쪽으로 탄 가르마가 꼭 부잣집 도련님 같았다. 피부는 희고 옷을 잘 입어서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박해인은 성인이 된 후에 누구와도 사귄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린다고. 나는 그게 우스워 늘 핀잔을 줬다. 운명적인 사랑이란 말에선 운명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라고. 육교를 지나자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거기서 보낸 시간이 거기에 가기 위해 보낸 시간과 비슷했다. 나는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운동장 저편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축구공을 찼다. 건물 일 층에 유명한 패스드푸드 가게가 생겼고 공과대학 건물 뒤편으로 새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나는 학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선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가벼운 인기척에 눈을 뜨곤 정말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반가운 얼굴이 여긴 웬일이야.

선배는 아직도 여기 계시네요.

뭐 늘 그렇지.

커피 한 잔 어떠세요?

나 지금 되게 바쁜데 무슨 일인데?

그럼 여기서 얘기할게요, 선배 혹시 박해인 기억나요?

우리 과에 그런 애가 있었던가?

, 인기 많았던 애 있잖아요, 기독교 동아리 회장이었고, 학회장도 한 번 했고, 성적도 늘 좋았던 애.

기독교 동아리 회장은 나였는데 그런 애 몰라.

아니, 선배 졸업할 때쯤 들어온 애요.

나 기억력 좋은 거 알잖아, 그런 애 없다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어쨌든 걔가 왜?

걔 지금 여기서 일해요?

, 지금 나 혼자 개고생하는 거 안 보여?

그렇겠죠?

할 일 없으면 귀찮게 굴지 말고 가, , 근데 너 잘렸다며?

게스트하우스까지 가는 길은 꽤 가까웠다. 선배가 설마 거짓말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새 아내가 문자를 보냈다. 늘 가던 그 이탈리아 식당에서 기다릴게, 한 시간 뒤에. 그곳은 박해인이 다니는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늘 거리엔 젊은 사람이 가득하고 또 이상하고 요란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이 가득하고 그 상점 사이사이에 사주 보는 사람과 별자리 운세와 타로점을 보는 사람이 가득했다. 게스트하우스의 문에서부터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들어가는 여자와 마주쳤다. 나는 그 여자의 가방을 잠시 들어줬다. 계산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층 침대 네 개가 오목조목 붙어 있었다. 침대마다 검은 커튼이 있었고 누군가 커튼 안쪽에서 기침을 뱉었다. 나는 그 커튼을 걷거나 혹은 바깥에서 혹시 박해인이세요,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내 침대에 누워 누구든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잠이 왔다. 잠이 들기 전에 샤워했다. 몸을 구석구석 씻고 나서 전신 거울을 봤다. 누가 어디서 박해인이 이곳들에 있다고 말해줬는지가 가물가물했다. 그들이 어쩌면 나를 박해인으로 착각하고 말해준 게 아닐까 싶었다. 월정사 종 뒤에 숨어, 학과 사무실 쓰레기통에 들어가서, 게스트하우스 전신 거울 밑의 공간에 들어가서. 그 전화를 걸고 받고 한 게 어제였던가, 내일이었던가. 약속에 조금 늦었는데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밖으로 나갔다. 주인이 내게 벌써 나가시냐고 물었고 나는 여기 이틀이나 있었던 기분이 들어요, 하고 대답했다. 졸음운전 끝에 잘못 찾아온 줄 알았는데 식당은 간판만 바꾼 채 그대로였다.

 

늘 먹던 음식이 식은 채로 회전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아내는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김이 빠진 맥주잔 밑에서 물이 새어 붉은 천이 젖었다. 내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을 때까지도 조용했다. 팅팅 불어버린 면을 포크로 조금 먹었다. 이대로 다시 밖으로 나가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았는데도, 나는 부러 수저로 국물을 마셨다. 그제야 아내는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소토를 한 숟갈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서서히 일어나며 말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밖에 추워.

그럼 두껍게 입을게.

코트만 덩그러니 의자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릇 안에 든 새우를 골라 먹었다. 면은 이미 실뭉치처럼 뭉쳐 질기고 느끼할 것 같았다.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 그릇을 치우고 커피와 홍차를 시켰다. 식탁에는 아내가 먹다 만 리소토 그릇뿐이었다. 둥그렇게 나온 리소토 중앙 부분이 싱크홀처럼 뚫려 있었다. 역사상 제일 추운 겨울이라던 작년 겨울에 아내가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다. 예정된 죽음이었다. 그 고양이는 아내가 대학 입학을 할 때 지인에게 받은 벵갈 고양이라고 했다. 구 년을 함께 먹고 자고 지냈다고. 담요에 둘둘 만 고양이를 작은 상자에 넣어 추모실에 안치했다. 아내는 고양이 귀를 조금 만졌고 평소에 즐겨 먹던 간식을 옆에 놓았다. 그리곤 곧 화장했다.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장례는 간단하고 실감이 나질 않았다. 유골함을 품에 꼭 끌어안은 아내는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차에서 내려 저녁을 먹고 나서도, 아주 오래 욕조에서 훌쩍이면서도, 유골함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설치고 나서도. 아침에 아내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조용히 말했다.

자기는 진짜로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없잖아.

그날 아내는 모든 짐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고 가끔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뭘 놓고 갔다면서. 문자를 보냈고 주말이면 같이 저녁을 먹었고 옷을 사거나 선물을 같이 고르기도 했다. 나는 먼저 아내에게 연락해본 적이 없단 걸 헤어지고 나서야 늘 깨달았다.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한동안 그 물음은 내가 절대로 풀 수 없는 문제처럼 느껴졌고 또 풀더라도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우연처럼 느껴졌다. 그새 아내가 돌아왔다. 셔츠 단추가 두 개 풀려 있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아내가 말했다.

알잖아, 나 답답한 거 싫어하는 거.

그러다 감기 걸려.

자기가 뭔 상관이야, 내가 알아서 잘할게.

그렇겠지.

그런 식으로 얘기할 거면 갈래.

차는 마시고 가, 네가 좋아하는 홍차 시켰어.

연차 냈다면서 오늘 잘 보냈어?

사실 나 회사 그만뒀어.

종업원이 커피와 홍차를 반대로 줘서 내가 손을 뻗어 잔을 건넸다. 아내는 잔을 쥐고 한동안 그 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는 아내를 멍하니 바라봤다. 좀처럼 무슨 생각인지, 무슨 감정인지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의자에 걸친 코트가 조금씩 미끄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 코트를 다시 의자에 걸쳤다. 단체 손님이 들어와서 가게는 조금 시끄러워졌다. 입에 조금도 대지 않은 홍차를 내려놓으며 아내가 말했다.

뭘 잊었는데 뭘 잊었는지도 모르면 괜찮을까?

괜찮거나 괜찮지 않겠지.

자기가 그렇지.

그런가?

왜 그랬는데?

글쎄, 왜 그랬을까. 다들 그렇게 묻진 않더라. 그냥 다 내 잘못이래. 그럴까. 그 여름날이었어. 해외 출장이 끝나면 승진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말하더라.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잤는데 자꾸 잠이 깼어. 입맛도 영 없었어. 뭔가 꺼림칙한 얘기를 들은 것 마냥. 일이 끝나면 양탄자에 누워서 눈을 감았어. 몸이 무겁더라. 쿠차 말라라고 갑자기 그 놀이가 떠올랐어. 아이 여럿이서 서 있다가 누가 쿠차 말라, 하고 외치면 차례대로 몸을 포개어 누우면서 맨 마지막에 누운 사람이 조롱을 받는 그런 놀이인데 마치 내가 제일 밑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어. 보통은 그게 제일 좋은 건데 기분은 제일 늦게 집에 돌아가게 될 것 같았어. 어딘가 조용하고 오래된 곳에 가고 싶었지. 비행기에서 본 책자가 떠올랐어. 그래서 세쿼이아 공원에 간 거야.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천 년, 이천 년은 기본으로 산 나무들이 즐비했어. 그리고 그 길의 끝에 그 나무가 있었지. 더 프레지던트, 라는 이름의 나무인데 삼천 이백 년이 된 나무였어. 나뭇잎이 이십 억 개라고 하더라. 그 밑에 한참을 서 있었어. 뭐랄까. 나뭇잎이 떨어지지도 않았어.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뿐더러 발로 차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자 두근거렸어. 계속 위를 올려다보니 고개가 아팠는데 눈을 뗄 수가 없더라. 발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어. 다들 힐긋 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잠깐 머물렀다 떠났어. 나 같은 사람은 없었지. 처음에는 어릴 적에 처음 키스한 여자부터 생각나더니 오래전에 죽은 삼촌과 친척 중에 선인장을 키우던 애랑 이어서 친구들, 예전 애인들, 그리고 네가 떠올랐어. 한 개의 나뭇잎에 한 사람을 떠올리려 했지만, 곧 터무니없단 걸 깨달았지. 두 개의 나뭇잎도, 세 개의 나뭇잎도 턱도 없었지. 가만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뭐가 자꾸 생각났어. 생각은 끝이 없었어. 또 나쁜 기억, 또 나쁜 기억, 좋은 기억은 난로에 올려둔 얼음 같은 걸까 싶었어. 그 나무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고 하더라. 뭐 때문에 그럴까. 나는 그 나무가 가장 오래된 나무일까, 가장 큰 나무일까, 가장 나뭇잎이 많은 나무일까 생각하다가 웃음이 났어. 그게 뭐라고. 우주 한가운데에 이 나무를 심어놔도 어디서든 이 나무는 그냥 나무일 텐데. 그제야 나는 조금 정갈해진 기분이 들었어. 모든 이유와 모든 원인과 모든 관계로부터. 사직서를 내는데 아무도 말리질 않았어. 상자에 넣어 짐을 가지고 나오면서 모든 게 가벼워진 기분이었어. 나는 애써 지킬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토록 애썼을까, 싶더라. 그 기분은 누구한테도 설명할 수 없을 거야.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관심도 없는 그런.

나도 가볼까?

표는 내가 끊어줄 수 있어.

됐네요, 어딜 가지 않아도 어딜 간 기분이니까.

아내는 한사코 내 차를 타지 않고 택시를 기다렸다. 눈이 올 거 같지 않았는데, 눈이 왔다. 예감은 늘 반대로였다.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다가 문득 박해인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빈 차, 라고 적힌 택시 몇 대가 서둘러 지나갔다. 육교 근처로 돌아가는 길을 조금 걸어 더 번화가로 나오고서야 기다랗게 줄을 선 택시를 찾았다. 아내는 조수석에 타며 슬며시 물었다.

우리 다시 합치면 또 그대로겠지?

더 나쁘겠지, 지지고 볶고 그다음엔 서로 원망하겠지.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박해인에게 전화가 온 건 새벽이었다. 잠이 오질 않아 공포 영화를 음 소거로 보는 중인데도 돌연 들리는 음악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나는 그 새벽에 그런 번호로 연락할만한 사람을 떠올리려 했지만, 좀처럼 없었다. 망설이는 사이 음악이 꺼졌다. 그새 귀신이 나와 주인공의 발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왜 꼭 열리지 않는 문을 열어서 거기에 들어가고, 왜 꼭 갑자기 뒤를 돌아봐서 흉측한 얼굴을 볼까. 다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도끼를 든 주인공의 친구가 귀신의 팔을 내리찍었다. 형체 없는 몸이 아플 리가 없지. 나는 그런 생각 끝에 전화를 받았는데 귀신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박해인은 아주 작게 물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 오늘 내내.

, 저는 박해인이란 사람입니다만, 찾으시는 분이 제가 맞나요?

그럴 거로 생각합니다.

혹시 무슨 일로?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이 어디세요?

여긴 제주도입니다.

맹효임씨라고 혹시 아세요?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여자 웃는 소리가 났다. 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 주인공이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도망가는데 트렁크에 귀신 두 명이 붙어 몰래 따라갔다. 라디오를 크게 틀고 갓길에 차를 멈춘 뒤에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그들은 잠이 들었다. 귀신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한 명은 왼쪽으로, 한 명은 오른쪽으로.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주인공이 손에 든 권총을 쐈다. 총알은 여자 귀신 심장을 뚫었다. 붉은 피가 났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을 때 박해인이 말했다.

, 기억났습니다. 효임이를 찾으시는군요.

실례지만, 두 분은 어떤 사이셨는지?

꽤 오래전 애인입니다.

얼마나 지난 일인가요?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사 년은 지났을까요.

맹효임씨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 효임이가 연락을 끊었나요?

그게 무슨 얘기죠?

저도 그렇게 헤어졌거든요. 저도 효임이도 제주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거기 살게 되었지요. 타지 사람이 섬으로 이사 와서 말 붙이기가 그렇게 쉬운 편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같은 처지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되었지요. 저 이런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댁도 콜레라 얘길 들으셨나요?

처음 듣는군요.

그래요. 그 얘길 효임이에게 처음 들었어요. 사귄 지 일 년쯤 지났을까요. 집 안에서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그 무렵에 우린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요. 누가 봐도 금방 헤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죠. 서로 나란히 누워있는데도 몸이 전혀 닿지도 않았죠. 텔레비전에선 관심도 없는 영화가 나왔어요. 무슨 우주 영화인가. 갑자기 효임이가 말을 꺼냈어요.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란 책을 읽어본 적 있는지. 처음 듣는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콜레라 얘기를 하더군요. 심한 열과 오한 끝에 설사를 동반한 탈수 증세로 죽는다고요. 그 시대에 콜레라에 걸린 연인 얘길 해줬어요. 콜레라는 전염병이니까 격리되기 일쑤였다고요. 그래서 배에 노란 깃발을 걸고 같이 탄 연인들에 대해, 그 깃발이 의미하는 게 콜레라 환자라는 것에 대해, 그래서 어디에도 격리되지 않은 채 자기의 연인과 서로 죽음의 항해를 하는 것에 대해서요. 나는 그 얘기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껌뻑였죠. 효임이가 작게 묻더군요. 왜 우린 그렇게 사랑하지 못했을까. 그건 물음이 아니었단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바보 같이도 그 당시에는 침대에 누워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만 생각했죠. 지금 홍수가 난다면 우리도 이 침대 위에서 한없이 항해하게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대꾸했죠. 그게 썩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하면서요. 효임이가 웃으며 말하더군요. 그런 여행을 갈 생각이었다면 나는 지금 너와 함께 있진 않았을 거야. 나는 그게 정말 농담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동안은. 그다음에 연락이 끊겼죠. 별로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효임이에게 고맙더군요.

자꾸만 어디서 들은 얘기 같았다. 편지 얘길 꺼내야 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태연한 척 전화를 끊고 오랫동안 그 얘길 떠올렸다. 영화는 이미 끝난 뒤였다. 추운 겨울 한강 공원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나눴던 얘기, 공항에서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그 순간 짧게 나눴던 얘기, 두꺼운 전공 책을 태워 손을 녹이며 주차장 뒤편에서 속닥인 얘기, 밤중에 혼자 거리를 걷다 우연히 마주쳐 나눴던 얘기 중에서 효임이가 알려줬단 콜레라 얘기가 섞여 있을 것만 같았다. 노트북을 켰다. 빈 화면에 비치는 내 모습이 꼭 귀신 같았다. 첫 문장을 몇 번이나 썼다가 지웠다. 모든 문장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도 이른 아침 우체국이 문을 열 때 첫 번째 손님이 될 거란 기분이 들었다.

 

제주도가 너무 멀기도 하고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멀지도 않을 텐데 그새 한 번도 가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대해 잊었기 때문이야. 네 편지에 적힌 모든 게 연극 무대 위에 소품처럼 다 가짜 같아. 그러니 네 각본은 참 재미가 없고 꽝이야. 나에게 거기로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한 편지 한 장을 보내도 도무지 찾아갈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해. 편지는 네 말처럼 끝까지 읽지 않았어.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무얼 하고 사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일일이 물을 이유도 딱히 없지. 그런데도 잠에서 깨어나 오늘은 뭘 잊었나를 떠올려. 뭘 잊었는지도 모르면서 뭘 잊었는데, 뭘 잊었는데, 하고 자꾸 중얼거리게 돼. 그 안에 네가 잠깐 들어있었으니 이제 내가 뭘 잊고 산다는 게 참 다행이구나 싶기도 해.

오늘 낮에는 농구대를 설치했어. 아들이 한참 커서 벌써 다섯 살이야. 그 커다란 농구공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꾸만 들어달라고 해. 아마도 최근에 농구 만화를 봐서 그럴까. 자꾸만 덩크를 하고 싶다고 조른 다음에 쾅, , 하고 공을 던져. 만약 아파트에 살았다면 하루에 두어 번은 이웃이 찾아와 싫은 소리를 했겠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어. 딸은 아내가 사 온 종이 인형을 만지느라 정신이 없어. 그런 놀이는 우리 어렸을 적에나 하던 놀이인데도 딸은 도통 요즘 놀이엔 신경을 안 써. 아내를 닮아서인지 신중하고 계획적이야. 자꾸 시계를 보면서 이젠 책 읽을 시간이고, 이젠 밥 먹을 시간이고, 이젠 낮잠 잘 시간이라고 말해주는 게 참 신기해. 그러다가도 문득 불안해지곤 해. 이 애들이 크면 어쩌지. 혹시나 학교에 들어가서 왕따라도 당하면 어쩌지. 아들은 군대에 가서 몹쓸 일을 당하면 어쩌지. 딸은 늦은 시간 술을 마시다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일들이 나를 괴롭혀. 아내는 그 얘길 듣곤 해외 가서 살까 묻더라. 그러고 싶진 않았어. 아무리 내가 이곳에 미련이 없다고 해도 여길 떠나면 다신 돌아올 수 없을 거 같더라. 우린 위치에 참 민감해. 모든 위치에서 말이야.

나는 이 편지가 가는 도중에 사라졌으면 좋겠어. 고작 한 장의 종이일 뿐인데 이 편지가 넓은 바다를 건너 며칠을 지나 작은 우편함 안에 들어가는 걸 상상하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렇게까지 해서 읽어야 할 소식인가 싶기도 해. 침대에 누워 종이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봤어. 누가 읽어도 이거보다 지루한 글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아내가 가까이 와서 뭘 쓰냐고 물어서 옛날에 알던 친구한테 오랜만에 편지를 보낼 거라고 했어. 그랬더니 웃으며 말하더라. 너무 다정하게 써주진 마요. 이 정도가 적당한 걸까, 아니면 이 정도도 너무 다정한 편일까. 네 편으로 줄을 서게 되면 모두가 도미노처럼 펑펑 쓰러지는 상상을 했어. 버린 물건처럼, 죽은 고양이처럼, 본적 없는 사람처럼, 잘못 배달된 우편처럼, 마냥 우울한 사람처럼 되는 상상을 했어. 네가 내게 편지를 보내자마자 다른 나라로 떠나는 상상을 했어. 그런데 그 나라들에 인도네시아는 없었어. 스위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어디에 있어도 길을 잃고 울고불고하다 곧 여기로 돌아오겠지.

그 책이 정말 내가 남긴 책이었을까. 어쩌면 네가 표지도 보지 않고, 내용도 보지 않고 산 수많은 책 중 하나겠지. 아니면 네가 멋대로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지. 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가지지 않기로 했어. 그런 종류의 소원, 그런 종류의 감정을 지니지 않기로 했어. 그런 모든 종류의 기억까지도. 누가 고르고 고른 끝에, 고심한 끝에, 갈등하고 때론 싸우며 난리 친 끝에 선택한 무언가를 가지지 않기로 했어. 어디서 마주치게 된다면 그곳이 꼭 내일이면 없어질 자리였음 좋겠어.

이 모든 얘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길 약속해줘.

맹효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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