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

by 카르마포 posted Sep 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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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메랑

 

---!

 

  풀벌레들 조차 잠이든 고요한 밤의 깊은 어둠을 헤집고 퍼진 한발의 총성은 삽시간에 막사의 모든 사람들을 잠에서 깨우기에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관등성명"

난 어둠 넘어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했다. 곧 쇠붙이 마냥 차갑고 날 이선 목소리의 남자가 내게 화를 내며 재차 묻기 시작했다.

"! 이 새끼야! 너 귀 먹었어? 관등성명 대라고!"

난 그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병장 성기욱……."

남자는 무언가 잔뜩 적힌 종이 뭉치와 고개 숙인 나를 번갈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 김 일병하고 중·고등학교 동창 이였다지? 친구면 뭐 짚이는 거 없어?"

'친구?' 친구라…….

난 친구라는 단어를 건네 듣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보통 남자 중학교에선 첫 학년의 시작이 매우 중요하기 마련이다. 그 날 어떻게 다른 녀석들에게 인상을 남기느냐가 삼년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일찌감치 교실 창가 제일 뒷자리를 선점하고 교실로 들어오는 녀석들에게 하나하나 강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고, 하나 둘 녀석들이 고개를 돌릴 때 마다 점차 내게 제압 되어가고 있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여유까지 생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목뒤에서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화끈거리고 따가운 느낌이 순간 퍼졌다. 순간 돌아보니 한 녀석이 웃으며 그러나 살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 했다.

"뭘 꼬나보냐 이 새끼야! 눈 깔고 꺼져라 내 자리니까!"

 난 그 와중에도 여기서 물러나면 내 삼년 중학교 생활은 여기서 끝이라 생각해 외려 나보다 크지 않은 녀석을 보고는 자신 있게 바로 맞받아 소리 쳤다.

"이 새끼가 여기 네가 전세……."

-!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마치 돌망치 같은 녀석의 주먹이 내 관자노리에 박혔다눈앞이 흔들리고 헤아릴 수 없는 주먹질이 끝나고 정신을 대충 차렸을 무렵 녀석이 내 명찰을 만지다가 내뱉는 말이 들렸다.

"이 새끼 이름이 성기네? 변태 같은 새끼 이름값 하네!"

 녀석이 되도않는 논리로 떠들며 크게 웃자 다른 녀석들도 녀석과 같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녀석에게 완벽하게 사냥당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을 뿐 이였다. 그렇게 그날부터 나는 성기욱이 아닌 자지욱 이라는 새 이름으로 음식점의 차임벨 마냥 쉴 새 없이 녀석과 다른 무리들에게 콜 업 되며 그저 심심풀이 장난감으로 하루하루 사지가 뜯겨가고 있었다. 그 후 반년 쯤 지났을까? 그녀석이 없는 점심시간,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나와는 같은 부류지만 서열은 나보다 높은 기태란 녀석이 내 도시락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야 자지욱! 쌌네! 하하하!!!"

 녀석은 그렇게 한참을 웃어대며 날 조롱하기 시작했다. 난 더 참지 못하고 기태 녀석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동안 당한 분함이 터져서일까 난 맹렬히 기태 녀석을 몰아붙이고 사냥을 끝낼 한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문에서 녀석이 나타나더니 소리쳤다

"야 이 씨발 새끼야 그만 안 해?"

 난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초등학교에 다닐 때 몰래 지갑에 손대다가 아버지의 목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은 것 마냥 아니 그때보다도 더한 두려움에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녀석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이유를 듣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내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

"이 새끼가 나 없다고 대장질 하냐?"

 그 말 이후 몇 차례 내가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고 하면 녀석은 그 즉시 뺨을 쳤다. 그리고 몇 번 더 때리고는 내 입가에 피를 보고 나서야 녀석은 분이 풀렸다는 듯이 다른 녀석들과 나가 버렸다. 그날 이후 난 수업종이 울릴 때마다 잘 훈련된 개 마냥 녀석에게 달려갔다. 그때 마다 난 그 녀석에게 온갖 아양과 재롱을 피우며 적절히 비위를 마춰주며 맹수에게 살아남는 방법을 조금씩 습득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3학년이 되었다. 난 그 녀석의 노리개가 되어 단련 아닌 단련을 받으며 별 탈 없이 지내 왔고, 이제 일 년만 버티면 안녕 이란 생각에 녀석의 괴롭힘도 전과 다르게 버틸 만 했었다. 그 당시 내 고향은 비평준화 지역이라 삼년 석차를 최종 합산하여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 했었는데 400명중 120등 정도를 유지하던 나는 인문계 남고에 갈수 있었고 170등이던 녀석은 상고에 갈게 뻔했었다. 내심 성적이 조금 떨어져도 2차 인문계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 가게도 그 녀석과는 떨어 질것이라는 생각에 녀석의 괴롭힘 따위는 그저 순간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생각 하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날 쉽게 놓아 주지 않았다. 3 첫 중간고사 날 이었었다. 난 녀석의 앞자리 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시험 날 아침 녀석이 날 불러내서 말했다.

"자지욱이 너 수학 하고 영어 답 이따가 써서 티 안 나게 던져라!"

 순간 나는 멍해졌다. `이 자식은 사람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칠 무렵 녀석은 내 머리 속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딴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듯 곧바로 살기어린 눈으로 쏘아붙이며 말했다.

"씨발놈아 말 안하냐? 그냥 하라면 한다고 대답하고 할 것이지 뭘 멍하니 서있냐?"

녀석의 위압적인 말에 난 크게 대꾸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 미안! 할 게! 할 게! 영어랑 수학이면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그 제서야 녀석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리며 내 어깨를 툭 치며 만족한 듯 말했다.

"응 그거면 돼 ! 네가 그 두 과목 잘한다고 하니까? 나머진 진수랑 희성이가 하기로 했다. 나중에 성적 나오면 형이 한턱 쏠게 새끼야!"

 녀석의 고백아닌 고백에 나 말고 다른 두 명이 더 있다는 걸 알았고 나름 공범자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난 애써 거짓된 웃음을 보이며 맡겨 두라고 걱정 말라고 하며 난 녀석과 그 어느 때 보다 다정한 모습으로 교실로 들어섰다. 몇 시간 후 시험이 시작되었고, 떨리는 마음보다 앞선 두려움에 녀석이 원하는 대로 커닝에 난 동조자가 되었다 그 후 성적표가 나오던 날 녀석은 145등이라는 등수를 자기 것 이냥 마냥 자랑하며 나와 다른 두 녀석에게 밥을 샀다. 그 후 녀석은 전과 다르게 날 참 어여삐 여겼다 물론 자지욱 이라는 호칭에 변화는 없었지만 잦은 구타는 눈에 띄게 사라졌고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남자인문계 커트라인 등수는 130, 녀석은 그래봐야 인문계 남녀 공학 학교 까지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건 내 철저한 오산이 이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은 손 살같이 흘러 이학기말 최종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고 난 여전히 녀석에 편의를 제공하고 편안히 완전한 탈출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녀석에게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마지막 성적표를 받아든 순간, 아찔함이 몰려왔다. 지금도 떠올리기 싫은 내 등수는 173등 녀석의 등수는 88등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녀석의 등수가 오른다 싶더니 결국 날 크게 앞질렀다. 그리고 최종 합산 등수를 보았을 때 난 절망이란 단어를 몸으로 체득 하게 되었다. 그녀석의 3년 합산등수는 139등 이였었고 난 134등 결국 난 내 무덤을 내가 판 어리석은 먹잇감 이였다. 내 지옥 같은 중학교시절은 그렇게 고등학교로 운명처럼 이어지고 말았다.

  고등학교 또한 중학교와 별 다를것이 없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사이사이에 수컷과 다른 생명체가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 뿐 이였었다. 또한 중학교시절부터 따라붙은 자지욱이란 콜 싸인도 여자들 앞에서도 그대로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말았다. 중학교 때완 다르게 그녀석의 조롱은 여자아이들 앞이라서 그랬는지 엄청난 수치심을 불러왔다. 허나, 대들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아는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거짓 미소를 지으며 왜 그러냐는 애교 석은 대답으로 그 녀석에 부름에 응답해버렸다. 그런데 그 때였다. 교실 앞쪽에 서 누군가 일어나 그 녀석을 향해 소리 쳤다.

"야 너 왜 그딴 저질스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니!?"

여자아이였다.

 그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그 여자 아이에게 말했다.

"야 이 지지배야 내가 이 새끼를 뭐라고 하던 네가 뭔 상관이냐?"

여자아이는 지지 않고 받아 쳤다.

"넌 그렇게 말하고 부끄럽지도 않니? 그리고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여자들 앞에선 성희롱이고 나 또 그런 말 들으면 선생님께 말씀 드릴 거니까 뭣대로 해봐!"

당돌한 아이였다. 아니 내겐 그 어떤 사내놈들보다 멋진 사람 이였다. 그 녀석은 그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고 곧바로 그녀가 말했다.

너 돈 많으면 때려! 여자 때리고 학교 더 다닐 수 있나 보자 어디!”

 그녀의 말에 들어 올 린 손을 거둔 그 녀석은 욕 몇 마디를 하고는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오른팔 민석이와 교실을 나갔다. 그 후 난 그 여자 아이 에게 걸어가 말했다.

"고마……."

말이 끝나기 도전에 여자아이는 말했다.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런 소리를 듣고 웃는 게 남자냐?"

 무언가 한방 먹은듯한 상황에 난 소리 높여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누가 웃고 싶어 웃는지 아냐?"

 그러자 그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처럼 당당히 말하고 다녀! 이제야 남자답구만 성기욱!"

  그 날 난 집에 돌아와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나보다도 약한 여자애가 내가 삼년간 복종 하던 녀석을 이겨냈다는 놀라움과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대부 분이였으나 그 여자아이에 대한 알 수 없는 마음도 조금씩 생겼다. 그 후 그녀와는 같은 방송반도 들어가 부쩍 친해졌고 마침 집도 같은 방향이던 참이라 더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이상 나는 교실에서 자지욱 소리를 듣지 않았다. 2학년이 되어서도 나와 그녀 그리고 그 녀석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나날들을 이어가고 있던 그때 난 그 평화를 의심하고 경계했어야 했다. 그날은 체육 시간 이였고 여자들은 교실에서 남자들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곤 했다. 난 평소처럼 체육복을 입고 반으로 들어갔는데 뭔지 모를 날선 시선들이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게 다가와 낯익은 캠코더를 들이 밀며 말했다.

"성기욱! 너 이거 뭐야? 이거 네가 관리 하는 방송반 물품 맞지?"

조그만 스티커에 관리자 이름으로 성기욱 세 글자가 적힌 캠코더를 확인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근데 이게 왜? 무슨 문제 있어?"

옆에 있던 다은이란 여자아이가 나서며 말했다.

"야 이 변태새끼야! 너 언제부터 우리 옷 갈아입는 거 몰래 찍었어?"

난 순간 너무 황당해서 조금 말을 더듬거리다 이내 진정하고 대답했다.

"이거 내가 관리 하는 거 맞는데 난 그런 거 안 찍었어!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은이가 말했다.

"발뺌 하지 마 ! 내가 옷 갈아입다가 네 가방에 부딪쳤는데 이상해서 살펴보니 가방 사이로 이게 켜진 채 녹화 되고 있었어! 이래도 잡아 땔래?"

난 계속 억울함에 말이 헛 나오길 몇 번 이나 반복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 갔고 어느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망이야!"

그리고 내게 쏟아진 그녀의 눈빛은 내 입과 해명의 의지도 순식간에 부숴 버렸다. 잠시 뒤 나는 학생과로 불려갔고 억울함보다 그녀의 경멸의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변명 한마디 못 한 채 매를 맞았고 정신이 든 건 눈앞에 아버지께서 오셨을 때였다. 아버지는 선생님께 무릎까지 꿇고 비셨고 선처를 구하셨다. 난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억울함에서 오는 분노보다는 아버지를 무릎 꿇게 한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났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께선 내게 아무것도 물어 보지 않으셨고 그런 아버지의 배려가 오히려 내겐 더 큰 아픔이었었다.

며칠 뒤 난 2주 정학 1주일 교내 봉사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제발 오지 않길 바라던 3주란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나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 곳에 다시 돌아 갈 수 있었다. 그날 교실에 들어선 순간 난 곧 느낄 수 있었다. 3주간 그 안에서 난 철저히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미움보다 무서운 것이 무관심 이라 했던가? 그 녀석조차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하물며 그녀는 말해 무엇 할까. 그런 날이 지속 되던 어느 날 우연히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던 나는 기태와 그녀석의 이야기를 벽 넘어 엿듣게 되었다.

그 녀석이 말했다.

"야 자지새끼 엿 먹 인거 너 랑 나만 알고 가는 거다!"

기태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말 안 해……. 근데 일이 커졌다? 이제 더 별일 없겠지?"

곧바로 그녀석이 약간 짜증석인 어투로 말했다.

"야 이 쪼다새끼야! 아무튼 입 다물고 살어! 새끼야!"

난 살면서 처음 그 끝을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미 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무존재로 조용히 지내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 여겼다. 더는 내게 남은 힘도, 희망도 없었다.

  그 날 이후 그 녀석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있던 그녀의 옆을 차지했고 결국 난 완벽하게 모든 걸 잃었다. 나의 시간은 괴롭힘 당 할 때보다 더디게 흘러갔지만 세상의 시간은 전보다 세차게 흘러만 갔고 그 해 크리스마스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딱히 할일도 없었지만, 대입 시험을 보고 난 뒤 시간이 남던 형은 날 구태여 데리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었다. 식사를 마치고 별 소득 없는 대화 끝에 식당을 나서려 하던 길에 식당문의 종소리 아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그녀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몇 초 뒤 바로 뒤에 따라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그녀석 이였다. 난 순간 형에게 화장실을 다녀온단 말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는 거울에 비친 생기 없는 얼굴에 몇 번이고 연거푸 물을 끼어 언 고 나서야 잠시 흔들린 정신을 간신히 가담을 수 있었다. 그 후 저녁뉴스에 간간히 나오던 범죄자처럼 모자를 깊게 쓰고 고개를 잔뜩 숙인 채 그 둘의 정다운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겨우 나올 수 있었다. 집에 와선 좀처럼 잠을 청 할 수 없었다. 그 날 밤은 네온사인조차 들어올 수 없던 내방이 책속에서나 보던 북극해의 백야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 같았다. 몇 일간 끝날 것 같지 않던 백야가 끝나갈 무렵 언제 그랬냐는 듯 창밖엔 봄은 또 오고 나는 마지막 학창시절을 맞이했다.

고 삼이 되고나선 난 그녀와 그 녀석 모두와 다른 반이 되었다. 다들 입시 공부에 바빴는지 아니면 경쟁 상대를 견제 하는 건지 서로 대화를 자주 나누진 않았지만 간간히 농담도하고 웃음소리도 들리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철저히 투명 인간 이였다. 뭐 투명인간처럼 살아도 복도를 걷다가 혹은 등교를 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그녀와 그 녀석은 누가보아도 다정한 연인 이였고 굳이 내가 애써 묻지 않아도 아니 물을 수도 없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려오는 소문들은 이미 작년 크리스마스 때 목격한 그대로였었다. 뭐 그때마다 조금씩 알 수 없는 뜨거움을 느끼곤 했지만, 금세 더한 체념이란 냉기가 그걸 식혀 버렸다. 어느 순간 생각을 가다듬어 보니 수능 시험장에서 마지막 문제를 풀고 난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이제 정말 끝이란 크지 않은 작은 희열 이였다. 수능성적표가 나오고 나는 대충 성적이 되는 대로 그 점수에 맞추어 집에 2시간 떨어진 강릉에 한 전문대에 합격했다. 솔직히 말하면 과나 적성은 다 관심 없었다. 그저 이 학교를 이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이라고 해서 별 다를게 없었다. 이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온 몇몇 무리들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논 뒤였고 난 그 벽을 넘어 설수 없었다. 대학 생활이 채 한 달도 되기전에 국방부에서 날아온 신체검사 소집서를 받고 검사를 받은 후에 주저 없이 군대에 지원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래 다른 녀석들보다1년 정도는 빠르게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난 최전방 양구라는 곳 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도 가장 오지라는 GOP에 배치되었다. 그 뒤 여차저차 이등병 때는 어리바리 하게 잔 실수를 해서 욕도 많이 먹고 몇 번의 구타도 당했지만, ·고등학교 시절보다 힘들진 않았다. 일병 때는 정신없이 살다보니 이마에 하나뿐이던 계급장이 세 개가 되고 그 많던 선임들도 하나 둘 전역을 하였고 나는 이른바 소대의 실세 군기반장이 되어버렸다. 그 당시 나는 도둑질도 해본 놈이 잘 한다는 말 말다나 살면서 체득한 갖은 괴롭힘을 고스란히 후임 녀석들에게 선사하고 있었고, 그 결과 후임들은 내 그림자조차도 무서워 할 만큼 날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였다. 오후 경계 작전을 하고 막사에 복귀하고 나니 새로운 신병이 들어왔다고 호들갑을 떨며 막사 앞까지 나와 바로 아래 후임 정철이란 녀석이 말했다.

"성 상병님! 새로운 신병 말입니다! 성 상병님 고향 출신 이라 합니다. 혹시 아는 사람 아닙니까?"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야 이 새끼야! 고향 같으면 다 아는 사람이냐? 가서 물이나 한잔 떠와 새끼야!"

정철이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난 탄 반납 을하고 벤치에 앉아 환복도 하지 않은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고향 사람이라…….'

  조금 전 정철이가 말 한 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담배를 다 태웠을 무렵엔 빨리 들어가 라면이나 한 봉 먹어야겠단 생각만이 들었다. 잠시 뒤 걸음을 옮겨 생활관에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신병 녀석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석이였다. 무던히도 질긴 악연, 어쩌면 내가 지금 군대에 있는 이유인 녀석이 내 눈앞에 각 잡힌 자세로 앉아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 녀석을 바라보다 정철이 녀석이 날 불렀다.

"성 상병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제 서야 난 정신을 차리고 평소처럼 정철이 녀석에게 핀잔을 주며 말했다.

"무슨 일은 새끼야! 별일 없어"

그 말을 뱉고 나서 난 그 녀석에게 말했다.

"야 신병 너 잠깐 나 좀 보자!"

난 녀석을 데리고 방금 지나온 복도를 되돌아 막사 밖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한참을 녀석과 난 말이 없었고, 정적을 깨고 먼저 내가 말 을 걸었다.

"오랜 만이다."

녀석도 그제 서야 조심스레 그러나 군기 잡힌 어투로 대답했다.

"! 오랜만입니다!"

난 녀석에게 말했다.

"단둘이 있을 땐 편하게 말해"

그 녀석은 조금 주저하다 이내 편하게 내게 말했다.

"세상 참 좁다 그치 기욱아. 여기서 널 보다니 말이다 넌 전보다 건강 해진 것 같다."

난 아무리 편하게 하란다고 바로 말을 놓는 녀석이 조금 아니 꼬았지만 별 내색 없이 그 뒤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녀석이 쭈볏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 하고 있었다.

"저기...기욱아..."

순간 들려온 점호준비 방송은 녀석의 입을 막았고 난 무슨 할 말있냐 물었지만 재차 들려온 소대장의 점호준비 재촉 방송에 난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하며 녀석을 돌려보냈고 홀로 다시 떨리는 손으로 담배하나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정말 나는 저 녀석을 피 할 수 없는 건가? 저 녀석과 난 악연이다 그것도 질기디 질긴..'

녀석이 들어 온 뒤 며칠 뒤 몇 없던 선임들중 노진영 병장이 내게 그녀석때문에 전에 없던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난 은근히 화도 났지만 달리 그 녀석을 혼 낼 수 없었다. 녀석을 볼 때마다 스치듯 몸에베인 공포가 생각나서 도저히 다른 후임병에게 하던것처럼 할 수 없었다. 그날도 난 노병장의 경고를 그냥 그렇게 흘려듣고 말았다.후에도 후임들의 몇번의 볼멘 불만을 듣게 됐지만 난 여전히 녀석을 터치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일이 터졌다. 경계 작전을 나갔다 돌아온 그녀석이 대검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고 밤새 우리소대는 대검을 찾아다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풀숲에서 대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역을 앞둔 소대장은 날 불러 말했다.

"! 성기욱이! 이 개 새끼야 애들 관리 잘안해? 시발 내가 이 짬밥에 신병이 떨 군 대검 찿으러 돌아다니고 좀 있으면 안 볼 사람들한테 욕 처먹고 다녀야 겠냐?"

한참을 분에 못 이겨 욕을 내뱉던 소대장은 보고시간이 되서야 날 보내줬다. 생활관에 들어서니 역시 분에 못이기는 노 병장은 날 보자마자 후임들 앞에서 내 뺨을 세차게 걷어 올리며 말했다.

"야 이 씨발놈아! 내가 애들 관리 잘하라고 했지?"

그 뒤 몇 번이나 따귀를 맞았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맞고 욕 을 듣고 나서 노 병장은 날 막사 밖 벤치로 데리고 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말투로 엄마가 아이를 달래듯 주머니에서 양 담배 한 갑을 꺼내 내게 건네며 말했다.

"기욱아 맞은데 괜찮냐?"

난 좀 낮은 톤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노병장이 한 층 더 부드러운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 인마 화 풀어라 너랑 나랑 같이 군 생활이 얼만데 너 억울한 거 알지. 또 애들 앞에서 때린 것도 내가 잘못 한 거 안다."

곧 노 병장은 웃음기를 거두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기욱아? 신병 그 자식 너 잘 아는 애라며? 들리기엔 그 새끼 그거 믿고 정철이랑 다른 선임 말도 뭐같이 듣고 얼마 전엔 내가 손때고 싫은 소리 안하니까 나도 우습게 봤는지 말대꾸도 하더라. 기욱아 이게 맞는 일이냐? 어디 신병 나부랭이가……."

충격이었다. 내입으로 그 녀석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 적도 없거니와 내가 방조한 감은 있었지만 그동안 내가 못 보는 곳에서 있던 수많은 일들을 노 병장 입에서 담배 반 갑을 태울 동안 듣게 되니 난 분노 그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내가 겨우 그 녀석과 육식동물들을 피해 달아난 이곳에서 어렵게 쌓아올린 내 성 한축이 무너지는 거 같은 느낌 이였다. 노병장이 이야기를 마치고 막사로 들어간 뒤 난 남은 담배를 모두 태우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물러설 필요도 겁먹을 것도 없어! 여긴 내 성이고 난 지금 성의 주인이다'

생각을 마치고나자 난 바로 생활관에 들어가 그 녀석을 향해 십 여 분간 뺨을 날렸다. 녀석은 중학교 일학년 첫날 나처럼 아무 저항도 못한 채 그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맞고만 있었다. 난 한참을 녀석을 때리다 지치고 나서야 멈춰선 채 생활관에 다른 녀석들에게 소리 쳤다.

"야 이 시발 새끼들아! 이 새끼 앞으로 숨도 못 쉬게 교육시켜 나 전역 할 때까지 이 새끼는 후임병 들어와도 열외 없이 일시키고 선임취급 하지마!그리고 이 새끼 실수 할 때 마다 내 밑으로 다 뒤질 줄 알아!" 그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내말은 법과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날 이 후 녀석은 녀석을 제외한 소대전체의 갖은 갈굼 이른바 괴롭힘의 대상 이였고 내 눈 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날 저승사자 보다 두려워했다. 난 그런 녀석을 보며 내심 통쾌함과 희열도 느꼈다. 사람이란 한 치 앞도 모른다고 내가 이젠 그녀석의 목을 물고 사냥하고 있는 포식자가 된 것 이였다. 그리고 100일이 조금 안되어서 녀석이 백일 휴가를 가게 되었고 우린 그런 녀석은 원래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4일을 보냈고 5일째 되는 날 녀석이 휴가복귀를 했고 다음날 아무도 없는 생활관에 그 녀석과 나는 어색한 거리만큼이나 무겁고 조용한 공간을 두고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석이 들릴랑 말랑 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기욱아..."

난 잘 들리지 않았기에 녀석에게 재차 물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인마!"

녀석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아닙니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정철이녀석이 들어와 난 별 생각 없이 그 대화를 끝내버렸다. 그날 밤 점호를 마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 녀석은 정철이와 야간 경계 근무에 투입되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예고 없는 총성에 막사에 불이 켜지고 몇 분후 바들바들 떨며 들어온 정철이가 말했다.

"성상 병님! 화장실에...화장..."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가 고개를 돌린 채 불도 안 붙인 담배를 문 소대장이 주저 앉아있었고 내 눈엔 머리에 구멍이 나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그녀석이 보였다. 그날 그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마지막 그녀석의 모습 이였다.

 

날선 목소리의 남자가 내게 다시 물었다.

"야 성기욱 상병 정신 안 차릴래? 왜 대답을 안 해 새끼야!"

난 정신을 차리고 남자에게 말했다.

"! 죄송합니다! 짚이는 거 없습니다."

그 뒤에 몇 가지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눈앞의 남자는 이제 알아 볼 건 다 물었다는 듯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말했다.

"수고했어! 밖에 다음 들여보내!"

며칠 뒤에 군은 백일휴가 복귀 후 부적응으로 인한 총기 자살로 최종 발표를 했고 그 발표는 뉴스에 너무나도 짧게 방송되었다. 사람들은 가혹행위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한참 올림픽 기간 이였던 탓에 그녀석의 죽음은 그렇게 오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가 아니었었다.

그 후 우리 소대는 갈갈이 찢겨져 다른 부대에 배속되었고 난 몇 달 안남은 군 생활을 마치고 쓸쓸한 전역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석의 죽음은 내게 사그라진 사람들의 관심 마냥 별다른 생각을 갖게 하지 않았다. 외려 이제 길고긴 그 녀석과의 악연이 끊어졌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전역 후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 기태 녀석을 만났다. 녀석은 날 아는체 하더니 근처 편의점 앞으로 데려가 소주를 사와 내게 건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겁게 말을 꺼냈다.

"기욱아 중·고등학교 땐 정말 미안했다. 커서보니 정말 부끄럽더라."

난 애 둘러 괜찮다는 대답을 했고 문득 고등학교 때 화장실서 그 녀석과 기태의 대화가 생각나 녀석에게 물었다.

"기태야 나 고등하교 때 그 캠코더 말이야 그거 누가 그랬는지 너 알고 있냐?"

기태 녀석은 갑자기 조금 열을 올리더니 말했다.

"기욱아 그거 민석이 짓이야! 그 새끼가 다 한일......"

기태 녀석은 한참 민석이 욕을 했지만 순가 난 생각했다. 내 기억 속에 범인은 그 녀석 이였는데 민석이 라니... 난 기태의 말을 중간에 끊고 물었다.

"범인이 민석이라고? 찬우가 아니고? "

기태는 의아 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확실히 민석이 맞아 찬우는 그런 짓 할 애가 아니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 일을 알 던 거 찬우랑 나 뿐 이였거든... 찬우 놈이 민석이 지킨답시고 그일 묻어두자고 날 얼마나 몰 아 부쳤는지 넌 모를 거다. 찬우... 애는 걸걸해도 의리는 있는 애였는데 그렇게 죽다니...아참! 너 찬우 죽은 거 몰랐지? 글쎄……."

기태는 내가 녀석과 같은 부대에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 뒤 한참을 이미 알고 있는 찬우 녀석의 죽음을 설명하던 기태의 목소리는 내게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 조금씩 나의 성엔 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찬우의 죽음을 설명하던 기태는 긴 한숨을 내뱉고 연거푸 소주를 들이키곤 담담한 표정으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 갔다.

"죽은 놈만 불쌍하지... 고등학교 이학년 초 였을 거야 홀로 찬우 키우던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외할아버지 손에서 컸거든 그때부터였을까 전과 다르게 철이 들었다고 해야 되나? 갑자기 녀석이 변한 게 말이야. 넌 모르겠지만 너 정학먹고 왔을 때에도 찬우가 나서서 애들한테 티내지 말라고 하며 평소처럼 대하라고 하던게 찬우였거든.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도 안가고 생활비 번다고 밤낮 노가다만 오지게 하다가 군대 가고 나온 첫 100일 휴가 첫날 제천 오자마자 지은이랑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서는 외삼촌이 찬우 걱정 한다고 외할아버지 돌아가신 거 숨긴거 알고 그길로 집에서 나와 나랑 3일 을 술만 마시다 괜찮다며 웃으면서 들어가더니 그렇게 그냥 허무하게 가버렸더라..!찬우가 술먹다 그런말도 했었어.기욱이 너한테 졸업식날 사과 못 했던게 늘 걸린고.. 사실 군에 가기전에도 몇번 그런 이야기 했거든 죽기전에 너 꼭 한 번 만나 미안하다 해야한다고 말야.. 자식 결국 지 입으로 말 못하고 가버렸네..."

  

  한참을 이야기를 듣던 나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기태 녀석이 돌아간 뒤에도 난 쉽게 술잔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다 술잔에 비친 얼굴은 찬우 녀석인지 나인지 더이상 구분 할 수 없는 존재가 날 한없이 비웃고 있었다. 그 녀석은 그렇게 부메랑이 되어 내 눈앞에 다시 돌아와 날 또 한번 무너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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