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세계를 구하는 자

by fairday posted Oct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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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구하는 자

이 세계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고 있다. 그것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으나, 그것은 언제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서는 무자비하게 생명을 유린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괴물은 사람이 많은 전쟁터에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멋대로 전장을 휘저었고, 개척자들이 새로이 토지를 개간한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는 곧바로 그곳을 황무지로 만들었으며, 인간이 발전해나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난데없이 쳐들어와서는 도시를 부수는 등 온갖 곳에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괴물이 나타나는 곳은 주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나 문명이 발달 된 곳들이라 시골에 사는 이들은 걱정이 덜했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은 괴물의 동향에 언제나 주목하고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들이 사는 곳에도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걱정에 항상 불안에 떨며 살았고, 급기야 괴물을 막고 자신들의 터전을 위해 괴물과도 맞서 싸울만한 강한 무기를 만들어내었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군대를 강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괴물이 가진 초월적인 힘 앞에서는 부족했으며, 괴물의 침략에 저항할수록 괴물 역시 더욱 거세게 인간들의 터전을 유린했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항상 괴물에게 유린당하고만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행히도 이 세계에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이가 괴물 말고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들과 함께 살아온 존재로서, 괴물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강력한 힘을 지닌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당당히 맞서 싸우면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왔다. 처음엔 괴물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부족한 힘 때문에 번번이 괴물과의 싸움에서 밀려났지만, 사람들은 그 무시무시한 괴물과도 수차례나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를 적극적으로 응원하여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그는 계속해서 강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괴물과 맞서서 이기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 강함과 용맹함을 칭송하여 그를 영웅이라고 불렀고, 영웅은 무시무시한 괴물에 맞설 수 있는 인간들의 희망으로 추앙받았고 사랑받았다.

그 후로도 괴물과 영웅의 싸움은 오랫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괴물이 나타나는 곳이면 영웅도 나타났으며, 그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본능적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괴물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영웅은 괴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 목표는 정반대였지만 그 힘만큼은 비슷했기에 그 둘의 싸움은 결말이 나지 않고 항상 엎치락뒤치락하며 승패를 주고 받았다. 그럼에도 그 둘은 서로 조금의 양보도 없이 마주칠 때마다 온 힘을 다해서 싸웠고, 싸움은 이 세계가 끝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수없이 긴 시간이 지나고 영원할 것만 같은 싸움도 결국에는 끝이 났다. 이번이 대체 몇 번째의 싸움일까, 셀 수도 없을 만큼 반복해온 끝에 괴물은 영웅의 무기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으며 영웅은 이 긴 싸움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무기를 쥔 채로 피를 흘리고 있는 괴물에게로 다가갔다.

괴물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영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 처음으로 적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 시간을 싸워온 나의 숙적이여,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왜 나를 죽이려 하는가?” 피가 섞인 입과 목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목소리를 낸 괴물을 바라보며 영웅은 담담하게 답했다. “네가 인간을 죽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말을 듣고 괴물은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다. 숙적이여, 너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인간을 구하고자 힘을 쓰는 것인가? 대체 너는 무슨 목적을 지니고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것인가?” 괴물의 물음에도 영웅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괴물을 바라보며 도리어 물었다. “반대로 나도 묻고 싶다. 너는 어째서 인간을 죽이려 하는 것인가? 나는 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듣기로 태초에 너는 인간을 도우면서 괴물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고 알고 있건만 어째서 지금은 인간에게 배척당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영웅의 물음에 괴물은 말없이 잠자코 있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 안에 조소가 담겨있음을 영웅은 한눈에 눈치챘다.

우스운 말이로다. 난 단 한 순간도 인간을 도운 적이 없다. 오히려 인간들이 나의 영역을 멋대로 유린하고, 나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가 놓고는 자기들끼리 내가 도와준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지.”

하면, 인간들이 그대의 것을 빼앗아서 인간을 해치기 시작한 것인가?”

하하하! 그것 또한 우스운 소리로다. 나는 애초에 인간을 도운 적도 없었으나 인간을 해치고자 했던 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 그것들이 내 것을 해하더라도 내가 가진 것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했고, 그것들이 내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고 말하는 것도 그저 우연히 내가 내 할 일을 하던 도중 인간들이 내 도움을 받은 것이 전부였고, 그것들이 내가 자신들을 해친다고 하는 것도 재수 없는 몇몇이 우연히 내 일에 말려들어서 안타까운 일을 당한 것이 전부였지. 그냥 난 그저 내 일을 할 뿐 그 어느 것도 인간들을 위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과는 다르게 넌 분명 직접 나서서 인간들을 해쳤다. 그렇다면 인간을 해치는 것이 네 일이란 말인가?”

영웅의 물음에 괴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그렇군. 처음엔 인간들이 내 터전의 소중한 것들을 훔치고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어도 언제나 그 정도가 있었지. 나 또한 인간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내 터전에만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냥 침묵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선이 사라져가더군.”

선이라니?”

괴물의 말을 듣고 영웅이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괴물은 한 차례 기침을 하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인간들은 서서히 탐욕에 눈이 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필요 이상으로 내 터전을 짓밟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내 정원은 꽃이 아닌 쓰레기가 가득하기 시작했고, 맑았던 내 연못의 색깔은 푸른색에서 회색으로 변했고, 결국 내 집은 점점 더 망가졌지. 난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나서는 일이 있더라도 인간들을 단죄하고자 했지. 인간들을 내 손으로 해쳐서라도 내 터전을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복수하고자 했지. 하지만, 이미 인간들은 완전히 사악과 탐욕에 물들어버려서 내 복수와 분노가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스스로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나를 욕하였고, 결국에는 힘을 써서라도 나를 막고자 하더군!”

말을 할수록 분노를 억누르기가 힘든지 괴물은 점점 더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어느새 괴물은 상처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자신들이 먼저 내 터전을 망가뜨리고, 오염시키고, 파괴해놓은 것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가 그것에 대해 화를 내고 복수하자 나를 원망하고 욕을 하더군! 그리고 멋대로 내게 재해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치 나를 인간을 해치는 악으로 취급하다니……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설사 내가 괴물이나 재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이 있더라도 난 내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예전에 푸르른 그때를 되찾기 위해서 인간을 제거하기로 다짐했다!”

괴물의 말에 영웅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렇군, 어째서 너와 싸울 때마다 네게서 강한 증오와 분노가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모두 이해했다. 너의 이름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영웅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괴물은 그런 영웅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숙적이여, 오랜 시간 나와 싸워온 자여. 나는 이제 시간이 갈수록 약해져 갈 것이고, 너는 시간이 갈수록 반대로 강해져만 가겠지. 내가 죽더라도 이미 강해질 대로 강해진 너를 해칠 수 있는 자는 없을 터이니 너는 영원히 강자로서 살아갈 테지……하지만 그것이 과연 마냥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말을 들은 영웅은 괴물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곳에는 작은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짓고 있는 괴물의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영웅은 어딘가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괴물을 향해 되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영웅의 물음에 괴물은 여전히 입가에 피를 묻힌 상태로 키득거리며 웃다가 대답했다.

문득 내가 죽은 뒤에 미래를 상상해보니 우스워서 그럴 뿐이다.”

네가 죽은 뒤라인간들은 이제 너에게 죽는 일이 없으니 세상은 평온해지고 윤택해질 뿐이다.”

영웅이 근엄한 목소리로 괴물의 말을 받아치자 괴물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웃느라 몸의 상처가 더욱 심하게 벌어졌고 입에서는 피가 튀겼음에도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고 영웅은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해서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어리석구나, 참으로 어리다!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그런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참 부족하구나!”

오묘한 말솜씨로 날 현혹할 생각은 그만둬라, 네가 죽으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영웅이 따지듯이 묻자 괴물은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하겠는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상태로 크게 숨을 고르고는 영웅을 향해 말했다.

넌 인간들이 만드는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적 있겠지. 거기서 영웅은 사투 뒤에 괴물을 물리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하지만 항상 그것으로 끝이 날 뿐이다.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지. , 그럼 문제를 내마. 어린 영웅이여, 괴물을 쓰러뜨린 영웅은 그다음 날은 행복한 일상을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1년 뒤는 어떠할까, 10년 뒤는 어떠할까, 과연 언제까지나 행복한 일상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영웅은 괴물의 물음 속에 숨은 의도를 눈치채고는 불쾌하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며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너는 내가 불행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싶나 보군. 패배한 자의 저주로만 느껴지는 그 말을 듣고 내가 흥분해서 생각을 바꾸기라도 바랄 뿐이냐? 정말로 추하구나.”

영웅으로부터 잔뜩 모욕이 섞인 대답을 들었음에도 괴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오히려 조용히 웃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영웅이여, 나도 한때 인간에게 신으로서 숭상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를 올리기도 했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로는 나에게 신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지. 그들은 강대한 힘을 가진 나를 경외했었다. 처음엔 내 복수를 인간들은 심판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죄를 돌아봤지, 하지만 그들의 욕심이 거세지고 우행이 심해짐에 따라 이젠 아무도 내 분노를 심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도리어 재해라고 부르고 있지. 그 결과 난 신이 아니라 괴물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떠할까?”

……불쾌한 말이로구나, 나도 언젠가는 괴물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그걸로 내가 괴로워할 것이라는 소리로 들려서 더욱 불쾌한 말이로구나.”

크크크, 지금의 너는 분명 인간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사랑받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세상에 다시 문제가 생겨서 혼란이 찾아올 때, 그때 과연 너는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아니, 너로 인해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너는 그때도 사랑받는 존재로 남게 될까?”

이 이상 괴물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는지 영웅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크게 소리를 질러 괴물의 말을 끊었다. 내면에 품은 분노의 크기가 그대로 담긴 것인지 자칫 괴물의 고막이 터져버릴 정도로 거대한 고함이었으나 그것을 듣고도 괴물은 인상을 잠깐 찌푸릴 뿐,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없애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영웅은 괴물이 함부로 입을 놀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지 손에 쥔 무기를 높게 쳐들고서 괴물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됐다. 그래도 숙적이라 너에겐 나름대로 호기심이 들었거늘 아무래도 나는 너를 망설임 없이 쳐내어야만 할 것 같구나. 그럼 잠들도록 해라, 너를 없앰으로 이 세상은 영원히 평온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내가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승리 선언이 될 것이다.”

우뚝 솟은 무기가 내려쳐지면 이제 괴물의 남은 수명은 끝나버리게 된다. 그 사실은 괴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영웅의 무기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불안감으로부터의 도피가 승리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영웅은 당장이라도 괴물을 향해 내려치려던 무기를 그대로 멈춘 상태에서 괴물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뜻이냐. 불안감? 그리고 내가 도피를 한다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글쎄, 하지만 무기를 바로 내려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 말이 너의 가슴 속 중요한 곳을 건드린 모양이로군.”

괴물이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영웅은 괴물을 향해 무기를 거칠게 들이밀면서 소리를 쳤다.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 내가 아직 널 죽이지 않은 것이 네 말이 날카로워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가!”

크크, 그렇다면 무어냐. 자비를 베풀어줄 생각이라도 있느냐? 아니지, 아니야, 네 가슴 속 망설임이 지금 너의 팔을 붙잡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더냐.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다면야 너도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터이고, 나 역시 네 마음속에 있는 불안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게다.”

괴물은 그렇게 말하고는 힘겹게 팔을 들어서 손가락으로 영웅의 무기를 톡톡 치며 웃었다. 그 행동에 영웅은 잠시 움찔거렸지만 이내 다시 괴물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영웅이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망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파악한 괴물은 키득거리며 웃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는 너무 내 얘기만을 한 것 같으니 이젠 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괜히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속셈 아니냐?”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날 죽이면 된다……그렇지만, 나로서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군. 어차피 지금 내가 입은 것은 치명상이다. 난 머지않아 죽겠지.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이야기는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 네가 나에게 도움을 줄 이유가 무엇이 있지? 네 입으로도 우린 숙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영웅의 말을 듣고 괴물은 한번 피식 웃고 대답했다.

글쎄, 그냥 어차피 죽을 목숨 숙적에게 조언이나 해주고 싶은 기분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군.”

영웅은 허튼소리라고 일갈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아 입을 다물어버렸다.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은 원하는 때에 괴물을 죽여 버릴 수 있었고 그러면 전부 다 끝난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떠올렸지만, 방금 괴물의 말을 들은 순간 어째서인지 아직 죽이기에는 무언가 망설여진다는 알 수 없는 기분이 생겨나서 차마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웅은 자신이 숙적이라고 여겨온 괴물에 대해 한평생 동안 연구하고 또 분석해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그가 배운 역사에서 괴물은 한때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고 사랑받는 신이라고 했다. 때로는 인간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해를 끼친 적도 있으나 인간이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제사를 지내면 금세 노여움을 풀고 인간을 위해 다시 사랑을 베풀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날 돌연히 신은 괴물로 변해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최악의 재앙으로 완전히 변해버렸다……라고 배워왔다. 그렇기에 영웅은 신이 아니라 변해버린 괴물을 타도해야 할 숙적이라고 생각하며 여태껏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괴물은 갑자기 저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어째서 괴물은 인간에게 사랑이 아니라 재앙을 베풀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만큼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오늘 괴물과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눈 지금, 괴물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이유였지만 어째서인지 영웅은 괴물의 말이 거짓이나 허튼소리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괴물은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심과 호기심은 어느새 커질 대로 커져서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다는 또 다른 본능을 누를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영웅이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본 괴물은 입안에 고인 피를 기침과 함께 뱉어낸 뒤 담담히 말을 시작했다.

인간들이 너를 지원해주고 응원해준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이냐고 생각하느냐, 오롯이 너 자신을 위해서로 생각하느냐? 그 순수함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오답이다. 인간들이 너를 사랑하고 도와준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뿐이다. 바로 네가 나보다 강해져서 나를 물리쳐주기를 바란 것이지. 그렇다면 내가 쓰러지거나 죽게 된다면 이제 너는 어떻게 될까? 인간들은 너를 어떻게 대하게 될까?”

괴물의 말을 들은 영웅은 잠시 움찔하더니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버렸다. 깨문 입술에서는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나왔고 영웅은 자신의 입속에 비릿한 피 맛을 느끼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들이 자신을 지원해주고 사랑해주는 이유는 언제나 자신을 성장시켜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가 언젠가 자신이 괴물을 물리쳐주기를 바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한 번쯤은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괴물을 무찌른 뒤에는 어떻게 될까, 과연 자신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

갑자기 가슴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생각을 꺼낸 탓일까, 영웅의 팔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고 결국 그는 괴물을 노리고 있던 무기를 잠시 거두었다. 괴물은 그런 영웅의 모습을 보고서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인간들은 너를 바로 버리지는 않겠지. 이미 넌 나를 이길 정도로 강해져 있다. 오히려 그들은 나와 같은 괴물이 더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너를 계속해서 도와줄 가능성이 크다. ,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아마 넌 점점 더 강해질지도 모르지.”

앞의 말과 모순되는 느낌이군. 넌 나를 조롱하고 싶은 것이냐, 위로하고 싶은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목숨을 구걸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게 1차원적으로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다음에 있으니깐.”

“?”

 

괴물은 가볍게 웃고 크게 숨을 고른 뒤에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괴물을 물리치고 난 뒤 이제 강대한 힘을 가진 것은 너뿐이지. 그렇기에 이제 인간들은 너를 견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자신들을 지켜줄 무기로 사용하는 한편, 지나치게 강해진 너를 경계하며 언젠가는 네가 자신들을 공격할 최대의 적으로 돌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겁을 내게 되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너는 끊임없이 더 성장할 테고, 그럴수록 너와 인간들 사이의 반목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그 균열은 점점 더 커지겠지……그러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해도 무섭군.”

말을 마친 괴물은 힘이 드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영웅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결국에는 나도 너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로군. 확실히 너와 나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인간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고, 한때는 인간에게 사랑받고 경외 받는 입장이었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쯤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영웅의 말에 괴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나와 달리 넌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았다는 점인가.”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우리는 서로 그 기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괴물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영웅을 바라보았고 영웅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넌 이 세상 속에서 처음부터 강한 자로서 존재했다. 인간과는 다른 절대적인 힘을 지닌 자로서 태초부터 존재했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그렇기에 점점 더 성장해나가는 인간과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한때는 신으로서, 그리고 절대자로서 숭상받은 적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괴물로 여겨지게 되며 인간과 적대하는 자가 되었다.”

“.......”

반면에 난 인간에서부터 비롯된 자이다. 미약한 존재로서 태어나 인간과 함께 강해지고, 인간과 함께 같은 길을 걸었으며, 결국에는 인간을 지키는 영웅으로서 이 힘을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가족과 같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너에게 맞서서 무기를 들은 것이고 이렇게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그렇군. 그렇기에 넌 나와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로군.”

괴물은 영웅의 말을 듣고 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괴물의 반응을 보고 영웅은 자신의 손에 든 무기를 한번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인간들이 자주 하는 말에는 마음이란 것이 있지. 물론 나는 너와 달리 인간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빼앗긴 것이 없어서 너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 난 인간에게서 비롯된 영웅으로서 언제까지나 인간의 평온을 위해 힘을 쓴다. 그것을 내 사명으로서 여기고 살아가면 될 것이다.”

영웅이 말을 마치자 괴물은 한숨을 내쉬고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연, 아직 어리고 순진한 녀석 같지만 그래도 나름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더냐. 하지만 어린 영웅이여, 인간은 네 생각만큼 선한 존재들이 아니다. 이미 너라는 영웅을 키워본 적이 있는 그들은 이제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걱정하며 계속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 너와 같은 강한 힘을 지닌 녀석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넌 어떻게 될까, 결국에 쓸모없어진 옛 영웅은 버려지고 더 강하고 세련된 새 영웅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거다.”

영웅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괴물도 아까부터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무리하게 말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온몸에 힘이 거의 다 빠지는 것을 느껴서 이 이상은 말을 하는 것도 힘들어 깊은숨을 내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확실히…….”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영웅이었다.

네 말대로 시간이 흐르면 나도 도태될 것이다. 내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대체될 것이고, 세상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 나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영웅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걸로 됐다. 언젠가 나도 인간의 기억 속에서 한때 인간을 지킨 영웅으로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정했다.”

영웅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괴물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상처의 고통도 잊고서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웃은 뒤에야 괴물은 상처를 손으로 겨우 억누르면서 힘겹게 다시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래……넌 그걸로 되었다. 그 정도의 신념을 가진 녀석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괴물 역시 영웅을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른 하늘은 기분 좋은 시원함과 맑음을 가지고 있었고 괴물은 그런 하늘의 모습을 잠시 감상한 다음에야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난 아니다. 인간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생각도 없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짓밟히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을 수도 없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것 자체가 이제는 불가능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도 있지 않나.”

크하하하하! 아니, 늦었다.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인간들이 짓밟은 내 터전은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고 지금도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인간들에게서부터 힘을 얻었다고 했었지. 나는 내 터전으로부터 힘과 생명을 얻는다. 하지만 그 원천을 오염시키고 망가뜨리는 인간들의 행위가 계속되면 어차피 오늘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내 소중한 땅이 파괴되어가는 이상, 나는 점점 더 죽어갈 것이다.”

“........”

너는 내 이름을 안다고 했지. 숙적이여, 물론 나도 네 이름을 알고 있다. 그래, 네 말대로 우리는 둘 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그 입장은 정반대이다, 결코 양립할 수 없지. 방금 대화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너는 자신만의 길을 걷겠지만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웅과 괴물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평생 서로 죽일 듯이 싸워온 숙적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둘은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이 어딘가 후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수많은 싸움보다 이 한 번의 대화가 더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의 수많은 싸움이 있었기에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서로 비슷하면서도 반대에 서 있기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 자세한 것은 오직 이 둘만이 알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표정은 아까 전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정말로 자신의 시간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낀 괴물은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영웅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쩔 것이냐. 선택의 시간은 이제 눈앞으로 다가왔고, 선택권을 가진 것은 오직 너뿐이다. 숙적이여, 말해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더냐.”

괴물의 목소리에서 더욱 힘이 빠진 것을 느낀 영웅은 그런 괴물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윽고 다시 무기를 하늘 높게 쳐든 다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간이 되어서야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네가 피를 흘리게 만들고, 상처 입게 만들고, 이 모든 것들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되는지는 나도 잘 알게 되었다……어쩌면 여기서 너를 없애면 더욱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영웅은 말을 잠시 멈추고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괴물을 향해 다시 눈을 부릅뜨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난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 인간들의 평화롭고 윤택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난 어쩔 수 없이 너를 타도해야만 하며 이것은 곧 나의 삶의 목적과도 같은 것이다! 괴물이여, 너를 타도하는 이 무기에 들어있는 것은 결코 적의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는 너를 쓰러뜨리겠다!”

영웅의 대답을 들은 괴물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저 대답이 나올 것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만 그럼에도 직접 듣는 것은 역시 허탈한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

괴물은 서서히 자신의 눈이 감겨오는 것을 느꼈다. 두 다리는 아까 전부터 움직이지 않았고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던 양팔도 이제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뜨고 있을 눈꺼풀도 이제는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고, 숨을 쉬는 당연한 것조차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도 없게 되었다.

확실히 그는 지나칠 정도로 약해졌다. 한때 천재지변이라고도 불렸고, 만물의 근원이라고도 불리는 등 거창한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은 이제 전부 옛말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괴물이 아니라 그저 상처를 입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한 미물이 전부인 셈이었다.

후우…….”

괴물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 공기는 언제까지 깨끗할까, 저 하늘은 언제까지 푸를까, 지금 누워있는 곳에 풀은 언제까지 싱그러울까, 여러 걱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인도해줄 영웅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는 인간의 영웅,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적대심과 투쟁심으로 불태우던 눈이 아니라 연민과 이해, 그리고 결의가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것만으로도 방금 대화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영웅과 괴물이 싸우는 것은 일종의 본능, 영웅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괴물은 인간을 타도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영웅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괴물에게 마지막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그곳에 목소리를 섞으려고 노력하면서 괴물은 영웅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했고, 영웅도 이에 답했다.

 

그럼, 잘 있게나. ‘문명이여.”

그래, 잘 가거라. ‘자연이여.”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영웅이 든 무기가 움직였고, 그대로 괴물의 숨이 끊어졌다.

“.......”

평생을 싸워온 숙적과의 결말이건만 승자는 기뻐하지도, 환호성을 지르지도 않았다. 내려친 무기를 쥔 손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허함과 허무함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를 한다거나 한탄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죽은 패자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는 셈이고 방금 품은 결의를 허망하게 날려버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싸움은 끝이 났고, 패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승자는 계속해서 살아갈 뿐이다. 앞으로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패자가 경고한 대로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미래의 일이므로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승자는 어느새 회색빛으로 바뀌어버린 하늘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어온 긴 싸움의 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패자가 죽었음에도 승자가 살아있는 이상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일 것이다. 세계는 계속해서 더욱 미래로 나아갈 것이고, 남은 자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서 만들어갈 것이며, 또 그 뒤에도 이야기의 후속편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이야기와 이제 막 끝나려는 현재의 이야기는 이제 바꿀 수가 없다. 과연 이 영웅담의 결말은 옳게 끝난 것일까, 이 뒤에 이어질 이야기들은 앞으로 지금의 이야기를 토대로 더 나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될까, 승자는 착잡한 기분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영웅과 괴물이 서로 적으로서 싸웠고, 마지막에는 영웅이 괴물을 물리치고 인간을 구해낸 이야기……이 이야기의 승자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분명 오늘 인간을 구해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영웅은 앞으로도 계속될 이야기의 세계를 구해낸 것이 맞을까?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는 의문만을 가슴 속에 홀로 품은 채 승자는 자신의 무기도 챙기지 않고 그대로 결말의 땅을 조용히 떠났다.




김승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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