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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역 posted Sep 3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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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岐路)


“저기요, 소리 좀 줄여줄 수 있어요?”
뒷자리 승객의 부탁을 듣고서야 비로소 태호는 얼마나 크게 음악을 틀어 놓았는지를 깨달았다. 겸연쩍게 고개를 까딱하고 태호는 음량을 낮추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옆자리에 앉은 건웅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할 말 없다는 듯 한 번 웃고,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홍대에서 집에 돌아가기까지, 서울의 야경이 눈앞에서 다채롭게 손짓하는 도중에도 그들은 음악에 빠져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 둘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밴드 ‘X’의 최신 앨범을 몇 시간 전에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큰 고양감을 주었던 것이다.
빛나는 야경이 단조로운 황색으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할 때쯤 둘은 버스에서 내렸다. 자정을 앞둔 시간이었지만 큰길에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쪽으로 향하는 도중, 바닥에 뭔가 종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이 둘의 눈에 들어왔다. 재수학원 H의 광고지였다. 아마 학원에서 사람을 고용해 척척 나눠주기라도 했나 보다.
“뭐야, 지저분하게.”
지저분해진 눈과 뒤얽혀 어그러진 종이를 태호는 보기 싫은 듯 걷어차 버렸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제 뭐 할까?”
눈을 돌린 태호의 시선 끝에 마침 PC방 간판이 들어왔다.
“야, 어때? 벌써 들어가긴 좀 그렇잖냐.”
어른이 되고서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기, 그에게 제일 실감나는 어른의 특권은 음주가 가능하다는 것과 PC방을 24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난 됐어. 오늘은 좀 쉴래.”
“어? 아, 피곤하냐?”
건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는 아쉽다는 듯 수긍했다.
“알았어, 그럼 먼저 들어가.”
“그래, 안녕.”
헤어지는 건웅의 어깨가 평소와 달리 축 처져 있었다. 태호는 그걸 보며 가슴에 무언가 이물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입 정시 결과 발표가 바로 얼마 전에 있었다. 애초부터 태호는 큰 기대를 갖지 않았지만 나름 우등생이었던 건웅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건웅이 왜 그러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럴 때마다 태호는 속에서 고슴도치가 뛰노는 것처럼 가슴이 쑤셔댔다. 고등학교 입학 후 옆자리에 앉은 계기로 친해진 건웅에게, 1년에 걸쳐 밴드 X의 진정한 매력을 알려준 이는 다름아닌 태호였다. 공부벌레였던 건웅이 태호를 통해 이런저런 것에 눈을 뜨게 되자, 그는 미친 듯 음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엔 처음으로 자신만의 곡을 써 보기도 했고, 학교 축제 때 친한 기타리스트 형까지 불러, 셋이서 모두의 앞에서 불러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가 음악을 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래도 변화에 휩싸인 건웅은 성적도 뒷전으로 여겼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반비례해서 성적은 하강곡선을 그렸다. 그의 부모는 그럴 때마다 계속 건웅을 압박했고, 건웅은 거기에 대해 태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태호는 떳떳할 수가 없었다.
낮부터 눈이 오던 어느 날, 집에서 무료하게 건반을 두드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태호는 밤에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 전화를 건 이는 아주 반가운 사람이었다. 태호보다 4살 위인 그는 태호의 주변인 중 음악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알고, 그만큼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타리스트였다. 이 바닥에 대해 깊게 파고든 사람이라면 기타리스트 강민택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였다. 학교 축제 때 그들을 도와준 이도 그였다.
얼마 전에 산 멋스러운 재킷을 걸치고, 태호는 흩날리는 눈을 뚫고서 큰길에 있는 통닭집으로 향했다. 건웅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민택은 못 본 한 달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한 달 전에는 그나마 얼굴에 살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턱선이 선명했고, 어둑한 가게 안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안색이 좋지 않았다.
“형, 한 달 사이에 왜 이렇게 늙었어요?”
다소 무례한 질문에 그는 씩 웃었다.
“늙긴 뭘, 아직 20대 초반이다. 너네도 이제 20대 아니냐?”
“크크, 20대죠 20대. 이제 진짜 어른이다, 야….”
대화는 한참 계속되었다. 시시껄렁한 일상, 얼마 전에 나온 X의 음반, 요즘 구설수에 오른 모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 등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은 성큼성큼 뜀박질을 해댔다.
“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오늘따라 말을 아끼던 건웅이 한참 듣기만 하다가 꺼낸 말이었다.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건웅이 가게 안쪽으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다가 태호는 말을 돌렸다.
“그럼 이제는 뭐 하시는 거예요?”
“음, 이제 또 알바 해야지. 이번에 돈이 좀 많이 깨져서….”
“뭐야, 또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살 빠진 것도 그렇고…. 혹시 형 저번처럼 그러시는 건 아니죠?”
1년쯤 전, 민택의 집에 놀러 갔던 태호 앞에서 갑자기 민택이 구역질을 해댔다. 내용물을 쏟아내고 보니 인간의 몸에서 나온 건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녹색의 물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민택을 추궁한 결과, 그가 최근 들어 에너지 드링크만 마시며 생활했다는 충격적인 일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밥을 먹으나 에너지 드링크를 먹으나 칼로리는 섭취할 수 있으니 밥값이나 아낄 생각으로 그리했다고 한다.
태호는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이 되냐며 소리쳤다. 다행히 민택은 다시 건강을 찾게 되었지만, 태호에겐 충격이 컸던 일이었다. 음악을 하는 데 있어서 적잖은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밥까지 굶어 가면서….
태호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화장실에 갔던 건웅이 돌아왔다. 맥이 끊겨 아무 말도 못 하고 태호는 어색하게 입을 닫았다.
“건웅아, 근데 왜 오늘따라 말이 없어? 뭔 일 있냐?”
민택의 물음에 건웅은 “아뇨, 별 일 없어요.” 하고 꾸민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화장실에 갔다 온 뒤로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굳어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너네들 학교는 어떻게 됐어?”
민택은 어제 저녁을 뭘 먹었냐고 묻듯 말했다. 둘은 짠 듯이 허탈하게 웃기만 했고, 그게 대답이 된 건지 민택은 더 묻지 않았다. 비슷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채워줄 뿐이었다.
화장실을 갔다 오고부터 건웅은 허기가 심해졌는지 열렬히 먹기만 했다.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뚫어 버려 그걸 채우기 위해 섭취 활동을 계속하는 듯했다. 그러나 음식과 알콜은 빈 속을 채워주지 못했다. 바닷물을 들이킨 조난자처럼, 끝없는 갈증 속에서 허우적댈 뿐이었다.
건웅의 요동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한이 지나고 셋은 한 번 더 모였다. 이번에는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한마음으로 X의 콘서트에 찾아갔다. 하지만 그 시간 내내 건웅은 예전처럼 열띤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콘서트가 진행될수록 건웅은 공연장의 열기에서 혼자만 소외된 채 겉돌고 있었다.
“야, 너 진짜 왜 이래?”
콘서트가 끝나고 민택과 헤어지자마자 태호는 곧바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태호는 짐작이 갔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아무 말 없이 혼자서만 앓는 건웅의 모습에 퍽 짜증이 났으리라.
건웅은 대답 대신 한숨부터 쉬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건웅을 끌고 태호는 단지 앞 편의점으로 향해 맥주를 건웅의 손에 쥐어 주었다. 몇 모금 들이키고 나서 건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전화가 왔는데…. 승필이 기억하지?”
“승필이? 으음… 아, 1학년 때 승필이? 알지.”
승필은 1학년 때 둘과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그 해 말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후로는 아주 가끔씩만 연락하며 지내던 사이였던 것이다.
“어제 오랜만에 전화가 왔었어.”
“그래? 걔가 뭐라고 했어?”
“으응…. 인성대에 붙었다더라고.”
태호의 마음에 다시 한 번 이물감이 생겨났다. 인성대학교는 예전에 건웅이 가고 싶다고 한 적이 있던 곳이었다. 건웅의 지금 기분이 어떨지 알 만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심란한 거야?”
“뭐…. 그렇지. 1학년 때만 해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수능에서 망했으니까. 그리고….”
건웅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다들 하나둘씩 대학에 가는데 말야. 요즘 느끼는 거긴 한데, 진짜 현실이구나 싶어. 계속 이렇게 있다간 진짜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거 같아. 정말로.”
“…그래서 어쩌고 싶은데?”
태호의 물음에 건웅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재수하자, 우리.”
“뭐…?”
태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결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태호는 깊이 알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을 계속 반대했다. 일단 이 길을 선택한 이상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맘을 굳힌 것이었다.
“어때? 너도 대학은 가야 하잖아…?”
이후 건웅과 헤어져 집에 돌아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피해 보려 했던 문제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태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용은 언제나와 다를 바 없었다. 계속 이렇게 막 살 거냐, 입시가 안 됐으면 생각이라도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너도 이제 어른인데 언제까지 그딴 데에 매달려 있을 거냐….
잇따른 폭언 앞에 태호는 재킷 모서리를 꾹 쥐었다. 한참 더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태호는 침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는 침대에서 멍하니 벽을 바라봤다. 멍한 태호의 시선 끝에 신디사이저가 들어왔다. 무언가에 끌린 듯이 태호는 그 앞에 앉았다. 그는 손도 올리지 않고 그냥 그 위에 몸을 수그렸다. 털썩, 둔탁한 소리가 방을 채웠다. 눈의 초점도 확실하지 않은 채로 태호는 한참 동안이나 엎어져 있었다.
아직 태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달력은 한 장이 뜯겨 나갔다. 그러나 새 달이 된 것을 실감도 하기 전에 태호는 급한 연락에 집에서 뛰쳐나갔다. 민택이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는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일전에 한참이나 야위어 보였기에 걱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나 갑자기 큰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온 태호에게 민택은 허탈하게 웃었다. 살풍경한 6인 병실 구석에서 쓸쓸하게 누워 있는 것이 태호는 퍽 안쓰러웠다.
“오랜만이구나, 태호야.”
함께 있던 것은 민택의 어머니였다. 그와는 따로 지방에서 살고 있었지만 태호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아들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상경한 모양이었다.
“대체 왜…. 큰일은 아니죠?”
“그냥 과로해서 쓰러진 거야. 좀 쉬다 보면 나아질 거라고 하더구나.”
민택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지금은 쉬어야 된다니까!”
크게 소리치는 말에 다른 환자들까지 돌아봤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민택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 누웠다.
“그래요, 지금은 무리하지 마세요. 좀 쉬어야죠.”
태호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민택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마침 간호사가 들어왔다. 잠시 검사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환자 본인만 오면 된다는 말에 민택은 홀로 병실을 나섰다.
“태호야, 넌 아직도 음악 하고 있니?”
간호사와 민택이 병실을 나서자 민택의 어머니는 태호에게 그런 물음을 던졌다.
“어…. 뭐, 그렇죠.”
태호의 대답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줌마는, 민택이한테… 그걸 허락한 게 잘 한 건지 모르겠구나.”
“네?”
“그땐 애가 워낙에 하고 싶어 했고, 또 잘 되는 거 같아서 괜찮겠다 싶었는데…. 근데, 이렇게 몸 다 버려가면서까지 하는 걸 보면….”
“…….”
“정말로… 후회가 되는구나.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고 말이지.”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다는 투였다. 태호는 무렴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바닥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눈알을 굴리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지하철에서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길을 택해야 할 때였다. 이제까지는 ‘인생 별 거 있나,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 막연한 답도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민택의 병실 침대가 자신에게 대물림될 것만 같다는, 손에 잡히는 불안감이 태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지하철 계단을 오르고 있던 태호의 앞에 무언가가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일전에 보았던 H학원의 광고지였다.
“…….”
그걸 들여다보는 동안, 그의 눈동자에 맺혔던 흐릿함이 점차 사라졌다. 그건 어떤 종류의 칼날과도 같았다. 그 칼날이 머릿속에서 자신을 묶고 있던 불안감을 난도질하는 것을, 태호는 느꼈다. 망설임 없이 태호는 전화를 꺼내들었고, 오래지 않아 전화를 받는 이가 있었다.
“건웅아. 나, 결정했어.”

일단 마음이 결정되고 나자 딱히 걸림돌은 없었다. 집에 가서 결정을 이야기하자 그의 부모는 두말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허락을 얻어내기 무섭게 태호는 건웅과 함께 H학원에 등록을 했다. 물론 둘의 공부 수준이 현저하게 차이가 났기에 같은 반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공부에 힘쓴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이 길을 제대로 걷기로 한 이상, 음악에 관한 건 접어야만 했던 것이다. 태호는 속으로 대학 갈 때까지만 참으면 되겠거니 했지만 부모님은 아예 그 모든 것들을 봉인하라고 요구해 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하다 싶어 태호는 화를 냈지만 돌아오는 부모님의 역정에 풀이 꺾였다.
결국 방 안의 책장에 쌓아 둔 음반들, 음원을 싹 몰아넣은 USB, 그리고 방 한편을 채우고 있던 신디사이저를 한데 모아서 베란다에 내놓게 되었다. 커버를 잘 씌워 놓아 비를 맞거나 할 걱정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태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아….”
그것들을 베란다에 내려놓고 돌아오는 것뿐인데, 태호는 아무래도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왠지 이대로 두고 나갔다간, 아무래도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그가 망설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별안간 아버지가 빨리 들어오라며 호통을 쳤다. 어쩔 수 없이 베란다를 나선 태호는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돌아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팔다리에는 정체 모를 탈력감이 가득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탯줄이 잘려나간 것처럼.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 새벽부터 짙은 구름이 끼더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태호가 집을 나설 때쯤에는 눈발이 좀 약해지나 싶었지만, 짙은 구름 속에서 으스스하게 천둥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게 퍽 음산했다.
“뭔 일이지. 눈이 올 때도 천둥이 쳤던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집에 올 때는 그치겠지 뭐.”
건웅은 확실히 최근의 우울함을 날려버린 것 같았다. 마음 속 고뇌에서 완전히 탈피했는지 얼굴에는 근심 하나 없었다.
“좋냐? 이제 좋아, 이 곰탱아?”
심통이 나서 태호는 건웅의 볼을 꼬집었다. 건웅은 한 번 씩 웃고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전에 보았던 위축된 등이 아니었다.
큰길 동편 오르막을 다 오르고야 H학원의 모습이 보였다. 학원에 들어서자 태호는 입을 떡 벌렸다. H학원은 전단지에서 묘사된 멀끔한 모습이 아니었다. 칙칙하고 좁은 복도에 학생은 넘쳐나 분주했고, 2월의 날씨였음에도 수많은 학생들 때문인지 상당히 습했다. 거기에 어둠침침한 도색과 조명, 그야말로 동굴 그 자체였다.
교실 안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복도보다 조명은 밝은 편이었지만, 짙은 색 블라인드로 인해 외부의 빛은 전부 차단되었다. 밖에 눈을 돌려서 마음을 뺏기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학원 측의 노력이 보였다.
답답함을 피하고자 태호는 맨 앞자리에 앉았다.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 담당 선생님이 와서 간단한 OT를 진행했다. 여러분은 이제 이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어른,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담당 선생님의 말은 공부하지 않는 이는 인간도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듣고 있는 태호에게 문득 짙은 향이 느껴졌다. 얼추 쑥 같은 그 향에, 그는 인상을 찡그리고 책상 밑에서 재킷의 모서리를 구겼다.
그렇지만 태호는 그런 자신을 잘 억누를 수 있었다. 12시까지 빼곡한 수업이 끝나고 잠깐의 점심 시간, 1시부터 6시까지 계속된 수업, 그리고 7시부터 10시까지 자습.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든 자리를 지켰지만, 10시에 자습 종료의 종소리를 듣는 그의 얼굴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인파로 가득 찬 계단을 뚫고 내려와서 조금 있으니 건웅도 1층에 도착했다.
“어땠냐?”
“난 그럭저럭, 버틸 만 했어. 넌?”
“나도 뭐…. 어떻게든.”
솔직히 말하자면 첫날부터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태호는 그런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향하다 보니 문득 허기가 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단지 앞 편의점을 향해 맥주와 컵라면으로 야식을 삼았다. 말없이 컵라면을 다 비우고서야 둘은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많이 답답했다. 그런 교실에 5~60명이 몰려 있으니깐….”
태호의 내뱉는 듯한 어투에 건웅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겠어. 대학 가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그래, 벽에 블라인드 쳐진 거 봤냐? 밖에 아무것도 안 보여. 완전 동굴이라니까….”
“하하. 그러네 진짜. 동굴이야 동굴.”
건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넌 자신 있어? 여기서 앞으로 7달은 있어야 되는데.”
태호의 말에 건웅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없는데…. 그래도 하루하루 견뎌내려고. 별 수 있냐 진짜.”
“으으, 난 그 선생이란 놈도 싫더라. 말하는 거 하고, 그 이상한 냄새 하며….”
꼭 쑥 같은 불쾌한 냄새를 다시 떠올리고 태호는 중얼거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다시 한기가 도사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다시 눈발이 날리는 듯했다.
“눈 오네?”
“아 뭐야, 또…. 일어나자.”
“어어…. 읏!”
살짝 당황해서 일어나다 손을 미끄러뜨린 건지, 건웅이 테이블에 있던 맥주 캔을 쳐서 넘어뜨렸다. 아직 내용물이 꽤 남은 맥주캔은 그 대부분을 태호의 옷자락에 토해냈다.
“아아, 뭐야 진짜!”
“미, 미안해…. 괜찮아?”
“아이씨…. 이거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불평하면서 태호는 재킷을 적신 맥주를 털어냈다. 맥주는 코트에는 묻지 않았지만 재킷의 앞자락을 다 적셨다.
“에이, 집에 가자마자 빨아야지.”
“으, 미안해 태호야….”
“…됐어, 뭐. 그나저나 눈 또 오는데, 빨리 들어가자.”
“…으응.”
코트로 가슴을 여미고서 태호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젖어버린 가슴은 바람을 맞으며 집에 들어가는 내내 그의 앞자락을 시리게 했다.

태호의 걱정은, 그래도 여섯 달 동안이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여름이 가면서도 태호는 어떻게든 자신을 붙들고 동굴 한켠에 앉아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욕을 했던 어둠침침한 복도도, 꽉 막힌 듯한 교실 벽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9월, 수능 모의평가를 본 후 얼마 되지 않은 목요일이었다. 가채점 결과의 순위표가 복도에 나붙었다. 건웅의 이름은 가운데 쯤에 걸려 있었지만, 태호는 그것을 볼 필요도 없었다. 정말 중요한 시험이었지만, 응시하는 내내 태호는 분명히 봤던 내용들임에도 답을 찾지 못하겠는 빌어먹을 상황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몇 달간 어떻게든 노력해 왔는데 이 모양이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태호는 전혀 집중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잡생각이 하나 둘 피어났다. 손가락은 제멋대로 계속 박자를 맞추어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건반을 두드린 기억도 아득할 지경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갈 때쯤 태호는 속으로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있어 봐야 자습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게 빤하니 오늘 자습은 하지 말자, 그런 위험한 약속을 스스로에게 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참작할 여지는 있었는데, 한 번 그러고 오면 충동이 해소되어 다시 학업에 잘 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럴듯한 생각 또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 시간이 시작되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그는 학원을 나섰다. 명백한 목적지 없이 그는 곧장 역으로 달렸다. 어느새 전화가 계속 떨리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플랫폼에 선 그의 마음에서 일탈의 두근거림은 킥의 비트가 되어 있었다. 열차가 진입하며 나오는 멜로디가 태호의 귀를 간질였다. 전철의 구동음조차 그에게는 멜로디로 다가오고 있었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달리듯 지상을 향했다. 땅에 다시 발을 디디자마자 그는 무언가에 끌린 듯이 홍대 거리를 향해 걸었다. 계속 걷는 그의 귀에 문득 어떤 노래가 와서 닿았다. 태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음악은 바로 옆, 통신사 대리점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X의 보컬의 목소리였다.
설마 그새 X가 신곡을 낸 건가? 그렇다 해도 X는 대중적인 밴드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방송도 많이 타지 않는 밴드였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궁금증을 안고 그는 계속 걸었지만, 가는 곳마다 그 노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거리 전체가 모두 그 노래로 일렁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노래로 버스킹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까운 PC방을 찾아 들어간 태호는 그 노래가 바로 얼마 전에 나온 X의 신곡임을 알았다. ‘Inner Whisper’라는 그 곡은 아주 이례적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원 차트를 휩쓸고 있는 듯했다. 곡 자체도 매력적이었거니와, 열정적이고 의지적인 가사와 보컬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된 듯했다. 태호는 그 피가 끓다 못해 핏줄이 터지기 직전까지 가 버렸다. 그 후로 몇 시간, 태호는 홍대를 떠나지 못했다.
밤 11시가 되도록 태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습이 길어지나 보다 했지만, 계속 연락도 없이 늦어지자 그의 어머니는 슬슬 걱정에 빠졌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몰라 건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건웅이니? 아줌만데…. 너 무슨 일 있니?”
건웅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놀랐다. 건웅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꼭 한참 동안 울다 억지로 태연한 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아뇨…. 아무 일 없어요.”
“솔직히 말해줄래 건웅아? 태호, 어디 갔는지 아니?”
“아뇨… 저도 몰라서 찾고 있었어요…. 집에도 연락 없었어요…?”
미심쩍었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 번을 더 추궁한 끝에 그녀는 통화를 끊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태호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말없는 아들의 번호만이 액정을 야속하게 채우고 있었다.
결국 주말이 되도록 태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집은 발칵 뒤집어져 가족과 지인은 모두 그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그를 알 만한 사람 모두에게 물어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대체 어디로, 갑자기 왜 사라진 건지 아무도 몰랐다.
그가 사라지고 이틀, 학원에서 자습을 마치고 돌아가던 건웅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웅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건웅아, 나다…. 태호.”
건웅의 목소리도 상당히 갈라져 있었지만 그에 뒤지지 않게 탁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렸다.
“…야, 너 지금 어디야!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분노해서 외치는 목소리에도 걱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태호도 그걸 깨달았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그건 상관없잖아. 그것보다, 넌 지금 어디야?”
“이…. 학원 앞이다! 왜 물어 그건!”
“좋아, 내가 10분 후에 그리로 갈게. 기다리고 있어.”
“뭐? 야, 잠깐, 태호야…!”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개자식.”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이틀이었지만, 그의 실종이 의미하는 게 어떤 것인지 그는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충동이 시나브로 그를 흔들어 왔으며 이젠 그게 겉으로 드러난 것뿐임을 알았던 것이다.
학원생들이 다 학원을 떠나고 길이 한산해지면서 건웅은 가로등 아래 홀로 남겨졌다. 멍하니 서 있길 몇 분, 문득 뒤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있었냐.”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태호가 그곳에 있었다. 겨우 이틀 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기색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눈은 퀭했고, 수염은 지저분했으며, 대충 걸친 재킷은 너덜너덜했다. 그 모습에 건웅은 뭔가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뭐야… 대체 뭐냐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울먹이듯 말하는 건웅의 말에 태호는 씩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공부랑은 안 맞는 것 같아.”
대뜸 그렇게 말하는 태호에게 건웅은 다시 열이 올랐다.
“뭐야…. 이제 두 달도 안 남았잖아. 그럼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잖아.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거야. 잘 들어, 반 년이나 난 전혀 발전이 없었어. 수업을 들어도 이해도 안 되고, 혼자 해도 그렇고, 시험을 봐도 망치기만 하고….”
“그건…!”
건웅은 말을 삼켰다. 그건 공부에 소질이 있던 건웅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함부로 무슨 말을 하는 것은 폭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저께 너무 화가 나서, 그냥 홍대로 갔었어. 그런데…. X가 신곡을 냈더라. 대박 났어 완전.”
“…….”
“가게란 가게는 다 그 노래를 틀고, 다들 그걸 부르고 있는데…. 난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더라. 그래서 진짜 오랜만에, 건반을 해 봤어. 그랬는데… 너무 잘 되는 거야! 내가 반 년 동안 쉬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행복했어. 진짜, 지금까지 왜 이 기분을 몰랐을까 한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심각하게 격앙되어 있었다. 그가 이 정도로 흥분했던 모습은 건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야. 너도… 같이 가자.”
“…뭐?”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너도 억지로 하고 있는 거잖아! 부모님이 시켜서, 아니면 다들 하니까 불안해서.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남들 시선이 뭐가 중요해? 지금 내가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냐?”
태호의 눈은 비록 퀭했지만 초점만은 활활 타오르듯 선명했고, 강건한 모습은 이제까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 나는….”
건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 길을 걷는 순간 잃게 되는 것, 그 길을 걸으며 계속 씨름해야 하는 것. 그게 그의 결정을 강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는 건웅이 답답했는지 태호가 재차 물었다.
“뭐야, 아직도 망설이는 거야?”
건웅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태호는 참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어쩔 수 없구나. 주위 사람이 신경 쓰여서, 미래가 불안해서 못 견디겠어?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새끼야. 행복해지려면 그만큼의 각오는 필요해. 그런데 그렇게 남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억지로 자기를 맞추고 사는 게 진짜 행복하냐? 남들 보기 좋은 것만 하고, 그렇게 착한 척만 하면서 사는 게 진짜 행복해? 이 미련 곰탱아!”
“…닥쳐!!”
몇 배는 격앙된 외침이 태호의 말을 끊었다. 그런 울림이 이제껏 건웅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었다. 한 번 말문이 트이자 건웅은 자기 안에 날뛰고 있던 걸 속사포로 쏟아냈다.
“내가 그걸 생각 안 해 봤을 거 같아? 내가 왜 모르겠어 그걸?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어떡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먹고 살 길도 없을 텐데! 민택이 형 보면 모르겠어? 그런 실력을 가졌어도 그렇게 힘들게 살잖아! 이건 현실이야, 우린 어른이고! 도망칠 데라곤 하나도 없어!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야! 나도 싫어, 문제 풀 때마다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울려퍼지고, 아직도 집에 가면 자연스럽게 오선지를 찾게 된다고! X 신곡?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빠져든 게 누구라고 생각해? 학원 끝나고, 몇 번이고 다시 불렀어! 이렇게 하면 좀 가라앉겠지 싶어서! 근데 더 심해지기만 하더라! 근데 어떡해? 지금 상황이 이 따윈데! 이렇게라도 안 하면,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데!”
쉰 목소리로 건웅이 쏟아내는 말에 태호는 그저 무렴해져 버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건웅의 눈빛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기가 어려 있었다.
“…꺼져.”
“…….”
“꺼지라구. 그렇게 행복하면,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란 말이야.”
건웅은 등을 돌리고 태호가 온 곳과는 완전히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태호는 그를 부르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불빛 너머까지 나가 버렸다. 태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건웅아….”
그는 돌아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건웅의 뒤를 따르지도 못한 채 그저 불빛 아래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태호는 무거운 발을 움직여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를 보자마자 그의 아버지는 다짜고짜 손을 들어 내리치려 했지만 어머니의 거센 만류에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태호의 이어지는 말은 그 만류마저 힘을 잃게 만들었다.
“저, 학원 그만둘 거예요.”
철썩. 그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시선을 되돌리는 그의 눈빛에는 별빛 같은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아닌 밤중에 둔탁한 소리가 몇 번이고 벽을 울렸고, 고함이 몇 번씩 오간 끝에 태호는 베란다에 봉인해둔 물건들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그의 등에 한 마디가 날아와 꽂혔다. 돌아올 생각 마라. 그는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닫았다.
“…….”
일단 행동에 옮기고 나자 뒤는 개운할 정도였다. 부모님이 어떻게 나올지는 그도 예상하고 있었다. 무거운 케이스를 힘겹게 들고 걸으며 태호는 민택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중에 찾아뵙고 용서를 구해.”
사정을 들은 민택이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태호는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의 집에서 얹혀 있기로 한 지는 2주. 그때까지는 다음에 뭘 할 지를 정해야 할 참이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방법은 있는 거야?”
“…음. 일단 돈부터 벌어야겠죠?”
“참,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한 건지.”
“제 나이에 깡이라도 있어야죠. 노력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죠.”
태호의 당찬 대답에 민택은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도 흘릴 수 없었다.
“일단 지인들한테 얘기는 해 놓을 테니까… 건반 주자 필요한 데 있으면 바로 얘기해 줄게.”
“그래 주시면 진짜 고맙죠, 헤헷.”
부모의 반대를 뒤로 하고 가출을 한 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태도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태호는 멍하니 있다가도 이내 싱글싱글 웃는 것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태호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큰길가의 PC방을 주말 동안 관리하는 일이었다. 은근히 피곤한 일이었지만 싫지도 않았다. 그렇게 힘겹게 길을 열기 시작한 지 또 일주일이 지나자 집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민택의 다그침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보름 만에 이전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네 맘대로 해 봐라. 대신 이제 지원은 없다.”
태호가 현관을 들어서고 나서 한참의 침묵 후, 그의 아버지는 이 말을 남기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남겨진 태호는 이걸 진심으로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묵묵한 척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있었고, 어머니는 그런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저녁때가 되어 태호는 다시 민택의 방으로 향했다.
“어떻게 됐어?”
“뭐… 잘 됐어요. 지원은 없다고 하는데, 이제 앞으로가 문제죠.”
잘 됐다는 말에 태호보다도 민택이 더욱 안도하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짐을 싸는 도중, 민택의 책상 위에 놓인 액자에 태호의 눈이 쏠렸다. 재작년 학교 축제 때 셋이 찍었던 사진이었다.
태호의 입에서 미약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때 음악과 노래에 빠져 공부마저 뒷전이었던 건웅의 모습은, 이제는 이 액자 안에만 존재했다. 이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쑥 냄새가 가득한 동굴 같은 교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동굴 속에 앉아 수능을 준비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태호의 마음은 아직도 쑤셔 오는 것이었다.

눈이 녹고, 꽃이 피고, 폭풍이 오고, 낙엽이 지고. 그렇게 한 해가 흘렀다. 단지 그것뿐인데, 변한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태호는 본격적으로 건반 주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택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자신의 열정과 노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한 해 사이에 그의 실력은 엄청난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듯 연습을 거듭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잠을 잤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쾌활했다.
어느 가을날 태호는 PC방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9시, 밤에 있을 연습까지 쉬었다 갈 요량으로 그는 일단 샤워를 했다. 거울에 비친 그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선명했고 살에는 뼈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
샤워를 마친 그는 얼마 전에 따로 시작한 카페 알바의 레시피를 외우려고 쪽지를 꺼냈다. 하지만 여태껏 잠도 못 자고 있었던 터라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안 되겠다는 듯 쪽지를 내려놓고 한숨 자려는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누구인가 싶어 태호는 심통이 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액정을 들여다봤다. 건웅이었다.
“…거, 건웅아?”
“응, 나야. 잘 있었어?”
“어, 나야 잘 있었지…! 오랜만이다 진짜.”
반가운 마음에 둘은 마치 어제 헤어진 친구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근황을 묻고 나서 너무 그리운 마음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날 것을 제안했다. 약속을 잡고 나서 침대에 누운 태호는, 잠기운이 싹 달아나 버렸는데도 설레고 기대가 되었다.
오후 5시, 큰길에 있는 식당에서 둘은 한 해만에 다시 만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태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건웅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무늬가 들어간 셔츠와 반질반질한 슬랙스, 머리에는 왁스로 잔뜩 힘이 들어갔고 얼굴 피부는 반질반질 윤이 났다.
“이야, 건웅이 맞어? 목소리 아니면 못 알아보겠다, 임마.”
태연한 듯 말하면서도 태호는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재킷 한쪽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어른이 되고 처음 샀던 이 옷도 그새 많이 낡았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 안 물어봐도 알겠다.”
“…그치. 학교 다니고 하다 보니 정신이 없네.”
“오, 어디 들어갔어? 시험은 잘 된 거야?”
“응. 인성대학교 경제학과. 승필이 1년 후배지.”
건웅은 처음에 걸었던 목표를 이뤄낸 것이었다. 태호는 그 말에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고마워. 그런데 넌 어떻게 지내고 있어?”
“응? 난 뭐….”
멋쩍어하면서 태호는 지금까지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한 해 동안 밴드의 건반 주자로 있으면서 계속 노력해 왔고, 그와 동시에 아르바이트도 병행하고 있다는 것.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지만, 태호는 빛나는 눈으로 이야기를 계속했고, 건웅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인 얼굴로 경청했다. 이야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갔다.
“넌 또 힘든 일이라도 있냐? 표정이 또 왜 그래.”
태호의 질문에 건웅은 느릿느릿 답했다. 대학에 와서 성적도 괜찮고, 좋은 친구들과 선후배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계속 가슴에 정체 모를 공허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뭐야…. 사치 아니냐. 인성대 경제학과에 성적도 좋고, 좋은 사람들 만났고. 근데 뭐가 모자라다는 거야?”
태호가 농담 삼아 그렇게 물었지만 건웅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방학 때 우울증까지 왔었어. 지금은 괜찮지만. 그래서 엄마가 점까지 보러 갔다더라.”
“점? 이 시대에도 그런 걸 하는구나…. 거기서 뭐라 그랬대?”
“앞으로 2년 후부터는 잘 풀린다더라. 그래서….”
순간 서로 말이 막혔다. 그게 의미하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입대?”
“으응, 이번 학기 끝나자마자. 그렇게 됐어.”
너무나 순식간에 밀어닥친 사실들에 태호는 입을 떡 벌렸다. 원래 같았으면 시시껄렁한 농담을 섞어 놀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건웅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수저만이 움직였다.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둘은 자리를 뜨기로 했다.
“이제 어디로 가?”
“난 연습하러 가야지…. 그래, 너도 같이 갈래? 오랜만에 노래도 불러 보고….”
태호의 제안에 건웅은 잠깐 솔깃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얼마 안 있으면 시험이라서…. 공부하러 가야 돼.”
“그래…? 잠깐이라도 와 보지. 머리 식힐 겸으로 말야.”
태호가 몇 번이고 간곡히 제안했지만 건웅은 끝내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결국 식당 앞에서 둘은 헤어지기로 했다.
“입대 전에 계속 연락해. 얼굴이나 보면서 살자.”
“응, 그래….”
손을 흔들며 둘은 서로를 뒤로 했다. 동쪽으로 언덕길을 오르는 건웅의 표정은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값비싼 옷과 멋진 학교, 그 속에서도 그는 외로웠다. 한결 낮아진 해 아래에서 그림자가 너무나도 길었다.
저 멀리서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 서쪽을 향하는 태호의 낡은 재킷이 바람에 나부꼈다. 하늘에서 손짓하는 햇빛에 태호는 눈을 반쯤 감았다. 눈 밑에는 여전히 다크서클이 짙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가슴 속에 넘쳐나는 삶의 에너지를 품고서 태호는 석양을 향해 발을 뻗었다.



이름 : 이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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