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풍경이다. 나무 한그루 없이 누군가의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순백의 풍경. 하늘에 있는 구름과 구름에서 떨어지는 가루들. 하얀 가루들과 함께 입김은 하늘로 날아간다. 그런 하얀 풍경 가운데에 서있는 나는 얼어서 빨개진 손으로 땅을 판다. 개가 먹이를 숨겨놓듯이 그 하얀 풍경 한가운데서 땅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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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본다. 그러고 핸드폰을 뒤집어놓고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본다. 아직 멍한 머리를 두드려 오늘 뭘 해야 하는지,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도 가시지 않는 잠기운에 찬물로 세수를 하자 조금씩 생각을 하게 된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빈둥빈둥 먹고 자는 집안의 곰팡이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쳐 보인다. 머리는 기름지고 얼굴에는 살이 없어 해골과 같고, 눈 밑은 검다. 전형적인 백수의 모습. 군 제대를 하고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수업을 듣다 학사경고를 먹은게 바로 지난달. 학사경고를 통지하는 편지를 보자 다음 학기에 바로 휴학계를 냈다. 학사경고를 먹었다고 학과장을 만나 얘기를 나눴지만 솔직히 별로 감흥은 없다. 지금 같은 백수 생활이 몸에 맞는 거겠지.
찬물로 세수만 하고 화장실을 나와 바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검은 컴퓨터 화면이 켜지고 비치던 얼굴이 사라지자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머리를 긁고 인터넷을 돌아다닌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내가 대학교에 가서 이런 백수 같은 생활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을 듣고 학점을 받고 졸업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니 주변을 따라 다니는 것이 벅찼다. 과제는 있지, 처음 듣는 수업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는 모르는 사람 뿐. 주변 환경에 나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그렇게 바쁘게 따라 다니다 군 입대를 했다. 훈련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훈련을 받고 자대에 가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일을 배우고 그 사람들과 21개월을 같이 살았다. 남자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 중 하나가 군대라는데, 그 군대를 제대할 때만 하더라도 군대 밖에 나오면 더 이상 주변을 따라가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나온 군대 밖은 더 적응하기 힘들었고, 밖에서 무슨 일을 할지 정하지도 않은 나는 어느 길을 골라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학교 수업은커녕 주변사람들과도 친해지는 일도 하기 힘들었다.
인터넷을 켜자 눈에 보이는 것은 내일은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와 그런 눈을 주제로 적은 글들. 하얀 눈을 희망이나 순결, 인정 같은 것에 빗대어 쓴 글들이 눈에 보인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글들만 쓰고는 했는데. 밝은 이야기, 좋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그 글들을 지금 보자면 부끄러움에 치를 떨 정도이다. 고등학생에게 보이는 것은 그런 것들뿐이었다는 거겠지.
원래 주변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라 오면 오는 데로 가면 가는 데로 사람들을 지나쳐다니니 학교도 재미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 친해진 친구들에게는 허세를 섞어서 혼자서도 잘 논다고 얘기를 했지만. 정작 대학교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학교에 있는 것 보다는 집에 있는 것이 더 좋았다. 그 때에 수업이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닌 것이 학교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서는 누구나 조용했고, 누구나 떠들지 않았다. 혼자 오는 사람도 많았고,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책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럭저럭 도서관에 있는 것이 편했다. 오히려 도서관에 있다가 수업을 빠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은 학교에 와서 도서관에 앉아있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 나와 버스를 타러가는 사람들을 볼 때는 이 많은 사람들이 수업을 들으러 오는 구나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과 다르게 수업도 듣지 않는 내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혼자 감탄도 하고, 고개도 끄덕거리다 바로 다른 것들로 시선을 돌린다. 국내 어디서 사고가 나고, 어떤 일이 있었다는 기사와 세계 어느 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런 곳은 역시 위험 하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어디까지나 잠깐 생각하고 다른 글들을 찾아본다. 우중충한 글보다는 재미있는 글을 찾아본다.
수업에 나가지 않는 날들이 많아지고 그나마 얼굴을 알게 된 사람들과도 이질적이다 느껴지자 학교를 가려고 나왔다가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수업에 들어가도 모르는 이야기만 하고, 만날 사람도 없어 지루한 곳에 갈 생각이 없어졌다. 차라리 그러는 것 보다 동네 피시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을 한 것 보다는 그냥 재미없는 것보다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피시방을 들락거렸던 것 같지만. 그 때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여행에 대한 글들을 둘러본다. 가까운 일본에서부터 유럽, 미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여행기를 본다. 이곳에는 이런 음식이 있고, 저곳에는 저런 음식이 있다는 글. 다른 나라에서 먹은 음식이 또 다른 나라에서 먹은 음식과 비슷하다는 글. 다른 나라의 음식이 국내의 어떤 음식과 비슷하고, 국내의 프렌차이즈 음식점과 본토의 음식이 어떻게 다르다는 글. 그런 글들을 보고 신기함도 느끼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이 든 김에 여행을 가는 방법을 검색해본다.
별 의미 없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하고, 가까운 오락실이나 피시방에 가고, 집에 와서 잠을 자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하나하나 졸업하고 취업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학생이면서도 학생처럼 보내지 않는데, 친구들은 벌써 사회인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에 나라는 존재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밑바닥처럼 느껴졌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회사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맞장구를 쳐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항상 돈은 친구들이 대부분을 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고,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때문에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의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했거나 학교를 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내가 견디지 못한 환경을 전부 견디어 내거나 그런 환경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곳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였다.
여행 방법을 검색해 보자 나오는 글들은 비슷한 글뿐이었다. 모두 여기로 가면 얼마가 들고, 저기로 가면 얼마가 든다는 가격에 대한 글이 적혀있었다. 기본적으로 얼마의 돈을 들고 가라는 말 뿐이다. 집에서 하루하루 빈둥대며 지내는 휴학생에게는 큰 돈 뿐이다. 해외로 여행을 가는 것은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려나. 여행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 담고 인터넷을 끈다. 예전에 받아놓았던 게임들을 전부 깨려는 생각으로 컴퓨터 이곳저곳을 뒤적여 게임들을 찾아내어 켠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그동안 받은 돈을 이곳저곳에 썼다. 특별히 뭔가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계획 없이 돈을 쓰니 금방 돈이 동나 버렸다. 그 후에 돈을 어디다가 썼는지 되돌아보고는 아까워하면서 지냈었다. 그리고 다음 학기를 시작했고, 이전과 같은 일상이 돌아왔다. 학교에 가도 수업을 들어도 머리에는 남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어서 이곳에 들어왔나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그냥 성적에 맞춰 들어온 곳이라는 생각에 뭔가를 이루자라는 의욕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왔다가 가는 것뿐이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간동안 고등학생 때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나 하고 생각도 해보고, 앞으로의 일들도 생각해보았다. 졸업을 해도 뭘 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대학교 졸업장을 받는다고 해도 특별 할 것이 없다. 지금은 누구나 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다. 누구도 대학교 졸업장을 갖고 있다고 바로 취업을 시켜주지 않는다. 창업을 하자니 돈이 든다. 하고 싶은 일도 모르겠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 졌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배가 구르륵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역시 지금까지 물 한 컵만 마신 것은 아니었나 보다. 냉장고를 뒤적여 반찬을 꺼내고 국을 데우고 밥을 푼다. 대충 배를 채우고는 그릇을 씻어두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잡는다. 핸드폰에 받아놓은 게임을 하다 졸음이 몰려와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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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풍경 속에서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고, 땅을 파고 있다. 파도파도 나오는 것은 하얀 눈이다. 얼어서 빨개진 손은 기어코 터져서 손끝으로 피가 배어 나온다. 피가 배어나오는 손으로 땅을 팔 때마다 하얗던 눈에 빨간 점이 찍혀 나온다. 피가 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땅을 판다. 개가 땅에 묻어놓은 먹이를 다시 찾듯이, 아이들이 땅에 묻어놓은 보물을 찾듯이. 그렇게 미친 듯이 땅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