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by 지엔 posted Dec 02,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해당 내용으로 봤을 때, 이번 프로젝트는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수갈채가 나오며, 탄성이 흘러나온다.

“성운씨, 오늘 회의도 대박이야.

요즘 너무 혼자 잘 나가는거 아냐?”

3일 밤낮을 준비한 회의는 성공적이였다.

“아니요. 너무 띄어주지 마세요.”

기계적으로 대답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다시 기대고 한숨을 한번 쉬고 다시 다음 회의를 준비했다.

서른 한 살까지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잠을 자지 않는 날은 늘어만 갔고, 그만큼 회사에서의 내 입지도 넓어져갔다.

IT회사에 들어 온지 3년. 신입사원은 몇 번의 프로젝트로 초고속 승진을 하고, 지금 나는 한 팀의 팀장으로써 승승장구 중이다.

사장님은 언제나 나에게 다가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팀원들 역시 성공적인 나를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내준다.

그날 이후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3년전

대학 졸업 후 1년간의 백수 생활.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들과 같은 나와 친구들은 그날도 취업난이 지속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시기로 하루하루를 그저 술로 버티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이러고 살겠냐. 우리 엄마, 아빠 때는 대학 나오면 대기업 프리패스였다고...“

“너는 부모님이라도 계시지.. 나는 다 도망갔다. 나혼자야. 세상에 나혼자라고.”

“야! 우울한 인생 우울한 얘기 말고 없냐. 마셔마셔”

갑자기 울리는 전화 한통.

전화기 건너의 낮선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여부세요?”

조금 혀가 꼬인 채로 대답을 기다렸다.

“진상태님, 보호자 맞으세요? 지금 한국병원 응급실로 오셔야겠어요. 수술 바로 들어가야 하니 빨리 와주세요“

“네? 갑자기 무슨...”

문뜩 겁이 덜컥 났다.

“나 먼저 일어난다.”

“뭐야.. 왜그래”

가슴이 뛰었다.

가슴이 계속 뛰는게 내가 달리기를 해서인지, 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가슴이 계속 뛴다.

“진상태님, 금일 03시 32분 경으로 운명 하셨습니다.”

한참을 흰 천으로 덮여있는 아빠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패배자다.

나는 쓰레기다.

자책으로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점점 더 가슴은 빨라지고, 시선이 흐려진다.

나는 추락하고, 주변의 목소리가 희미해지며, 시야가 까매진다.

“진성운씨! 진성.. 운씨! 성운씨!”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마치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영정사진 앞에서 나는 울 수도 없다. 아니 울어서는 안된다.

초등학교 5학년 눈이 내리는 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것이 아버지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엄마는 떠나갔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을 하지 않는 순간부터 나는 엄마가 집을 나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도 않고, 나도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 없이 나는 커왔다.

바르고 착한 아들은 아니였지만,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아빠와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에 편지 한통 남기고 그는 나를 떠나갔다.

마치 엄마가 나를 떠나갔듯이..

그때부터 혼자 모든 걸 했다.

돈을 벌어야했고, 학자금을 빌려 대학을 다녔다.

아침에는 편의점, 저녁에는 고깃집 알바를 하면서 엄마, 아빠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

장례식을 치르고 문득 아버지가 떠난 것은 7년 전인데, 나는 지금에서야 세상에 내가 혼자임을 알게 됐다.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됐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가 가진 것이 통장에 30만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30만원을 들고 세상 혼자 사는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빠. 지켜봐줘 내가 어떻게 사는지. 나는 당신과는 달라요.”

회사에 입사 하고 3년을 4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다.

아니 그다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다.

피곤하다 싶으면 수면제를 먹었다.

그래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에게 남은 것은 일밖에 없었다.

내가 프로젝트를 성공 시키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성운씨. 오늘도 한잔 안하고 가면 사장님이 가만 안둔다는데”

“오늘도 약속이 있어서, 그리고 저 술 안 마시는거 아시잖아요.”

매일 하는 변명이 지겹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이 차장은 자리로 돌아간다.

모두가 퇴근하고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 준비를 위해 그날 밤도 회사에 남아있었다.

급한 일이 있거나 중요한 회의가 내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돌아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아침햇살이 눈부셔 잠에서 깨어났다.

회사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만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창문에 빛이 한번, 두 번, 세 번 반짝인다.

사람들이 한사람씩 출근하고 나에게 인사를 건낸다.

“팀장님 어제도 집 안들어 가신거애요? 몸 생각도 하셔야죠. 어떡해“

아부 섞인 인사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

“혼자 회사일 다하는 척하기는.. 병신같이..”

거친 욕설 때문인지, 선명한 음성 때문인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본다.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고, 각자 어제 본 드라마, 연예인 얘기로 잡담을 하는 중이다.

피곤함이 갑자기 몰려온다.

피곤함을 쫒으려 탕비실로 간다.

탕비실에는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이 자리를 뜬다.

커피 한잔 타서 담배한대 피우러 옥상으로 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새로 들어온 막내사원이 옆으로 다가온다.

“팀장님, 왜 이런 커피를 드세요~ 이거 제가 밑에 스타벅스에서 사온거거든요. 이거 드세요“

괜찮다는 내말을 무시한 채 커피를 바꿔 다른 곳으로 간다.

“아우 돈 아까워. 내 돈 4500원”

또 다시 들려온 음성에 놀라 그를 한번 바라본다.

그는 다시 한번 내게 웃음을 날린다.

자리로 돌아와 일을 하려는데, 머리가 아프다.

머리에서 지진이 난 것처럼 깨질듯 한 두통으로 참기가 힘들다.

김 과장에게 다가가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무리해서 그래 이 사람아. 쉬엄쉬엄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어제도 회사에서 잤다면서?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출근하도록 해“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돌아서서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 같이 일하더만 너 그럴 줄 알았다 임마. 새파랗게 어린놈이 팀장은 무슨“

빠른 승진에 나를 질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회사에서 말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왠지 참을 수가 없다.

뒤돌아서는 순간,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놀라 빠르게 걸어서 자리에서 겉옷만 챙긴 채,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것일까.

다리에 힘이 풀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휴, 요즘 취업 안된다더니, 저런 젊은 나이에 실직이라니.”

흐릿한 여성의 음성에 다시 놀라 주변을 바라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정말 머리가 이상해져버린걸까.

또 다시 십분 쯤 하늘을 바라보는데

다시 여성의 음성이 들린다.

“저 머리 좀 봐. 집도 없는...”

재빨리 주변을 바라보는데 운동하는 50대 여성이 보인다.

내 앞을 지나가는 그녀의 그림자가 해의 방향에 따라 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음성은 선명해진다.

“노숙자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녀를 거칠게 붙잡아 세웠다.

“아줌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당황한 모습의 여성은 마치 치한이라도 본 듯한 과장된 얼굴과 몸짓을 할 뿐이였다.

“말 좀 해보세요.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거시냐구요”

갑자기 같이 운동을 하는 듯한 여성이 나를 밀치며 그녀를 부축한다.

“젊은 사람이 엄마뻘 되는 사람한테 왜 그러는 거야? 그리고 이 아줌마 말 못하는 장애인이라고. 당신 뭔데 아줌마한테 막 말이야“

“뭐라고요? 말을 못하신다고요? 방금 저한테 뭐라고 하셨다고요.”

“뭔 소리 하는거야 정말. 이사람 어렸을 때 사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라고. 당신 누군데 이상한 소리하는거야?”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날처럼 가슴이 뛴다.

계속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집까지 앞도 보지 않고 달렸다.

달리는 내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집에 들어와, 바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아무리 볼을 쎄게 쳐도 꿈이라고 생각했던 현실에서 나는 깨지 않았다.

“그래. 요즘 잠을 못자서 그런거야.”

환청이 들린다는 무서움보다 지금 이 상황에 혼자 라는게 더 무서워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3일간 잠만 잤다.

아니 자고 일어나니 3일이 지나 있었다.

3일동안 배고픔도 어떠한 걱정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이 악몽이 끝나야한다는 생각 뿐 이였다.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3일간의 잠에서 일어나 다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달라진건 전혀 없다.

조금 살이 빠진건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볼을 쎄게 두 번 치고 회사 갈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수염도 깎고, 머리를 단정히 다듬었다.

가는 길에 새 양복도 하나 구매 했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머릿속으로 계속 그 생각 뿐 이였다.

회사에 도착 했을 때, 아무도 없었다.

다시 내 일상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회의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나고 햇볕이 다시 창을 세 번 반짝이더니, 이내 사람들이 출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팀장님 괜찮으신거애요? 걱정되서 죽는줄 알았다고요..살도 많이 빠지신거 같은데 병원을 가보신거애요?“

“네 괜찮아요. 감기몸살이 좀 심해서..”

됐다. 나는 안도감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뭐야.. 회사 그만 둔다는게 소문이였던거야? 업무괴물 다시 컴백이구나“

기분 나쁜 음성은 다시 들려왔고, 자연스럽게 나는 절망했다.

이대로 환청 때문에 다시 찾은 내 일상을 뺐길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조용히 다른 사람들이 올때 까지 기다렸다.

한명 씩 들어올 때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던졌다.

음성은 들린 적도 있고, 안 들린 적도 있다.

이 점을 유추 했을 때, 나와의 대화로 음성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씩 내가 알아간 것을 메모장에 적었다.

1. 음성은 아침에 들린다.

(단, 내가 저녁에는 대화한 적이 없으므로, 이 가정은 틀릴수 있다.)

2. 모든 사람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니다.

3. 사람들의 진심이 나에게 들린다.

4. 다른 사람은 그의 진심이 나에게 들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4번 내용을 적고 나서, 가만히 모니터 화면을 계속 보다가 눈이 아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몇 분간 누워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때,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가슴에 기쁨이라는 감정은 작은 촛불에서 화재가 일어난 초가집처럼 커져갔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

아침 조회를 하자며 팀원들을 회의실로 불렀다.

블라인드 쳐진 회의실에서 나는 회의 내용을 이야기 하면서 다른 음성에 집중했다.

음성은 보란듯이 나오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블라인드를 올렸다.

“아.. 회의 뭐야 짜증나...”

“오늘 팀장 이상하네”

“오늘 클럽에 뭐입고가지?”

“남친 오늘도 연락안오기만해라, 너랑은 끝이야”

여러 가지 음성이 섞이면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 심포니처럼 터져 나온다.

나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한명, 한명의 목소리를 차분히 듣기 시작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팀원 4명을 이끌고, 커피숖으로 갔다.

커피를 한잔씩 돌리며,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햇볕이 강한 테라스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저러지.. 머리 어떻게 된건가”

“또 얼마나 시켜 먹을라고 커피까지 사주지”

음성이 또 다시 들려온다.

“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제가 그동안 팀장되고 여러분한테 해드린게 없는거 같아서 마련한자리니까. 드시고 싶은건 다 드셔도 되요. 오늘은 제가 쏠게요. 아. 그리고 일 시켜 먹을려고 뇌물 주는거 아닌거 다들 아시죠?“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입사 동기 인 김 대리는 민망한듯이 다리를 고쳐 앉으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새롭게 재미있는 게임을 찾은 초등학생처럼 기쁨을 감출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마치 매일 웃으며 잠든 사람처럼 잠이 들었다.

“엄마! 엄마!”

나는 식탁에 앉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정색 흐릿한 물체들이 다리를 거쳐 허리까지 나를 삼키고 있었다.

“엄마! 아빠!”

아무리 불러도 마치 다른 세상인듯 그들은 화목한 웃음을 보이며, 나를 보지도 않은 채 그들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목.. 입... 코를 차레로 삼키는 검정색 물체를 보며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으로 온 몸이 젖어있고,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식탁으로가 한숨을 괜히 한번 쉬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 한잔을 컵에 따라 마셨다.

기분 나쁜 꿈으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쇼파에 가서 털썩 앉아 TV를 이리저리 돌렸다.

오늘은 주말로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나는 그날 이후로 회사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쇼파에 앉아 보지도 않는 TV를 하루종일 보았다.

TV를 돌리다가 문득 배고프다는 감정이 밀려왔다.

쇼파에 일어난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을 것을 찾아 집안을 뒤졌다.

하지만 집에서 뭔가를 먹은적 없는 나의 집에 먹을것은 없다.

“나가야한다.”

문득 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무작정 나가 차를 타고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를 주문하고 테라스에 앉았다.

샌드위치가 나오길 기다리는 나는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했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의 모습, 서로의 모습을 찰나의 순간도 놓칠수 없다는듯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연인들, 학원에 가는 듯 어깨가 축 쳐진 무거운 가방을 맨 학생까지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 따라가고 있는데, 샌드위치와 커피를 가져오는 종업원이 보여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놀라 자세를 고쳐 앉는다.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의 찰랑이는 머리와 따뜻하면서도 밝은 음색이 들려온다.

왠지 흐믓한 마음을 감추며 샌드위치를 한입 하려고 입으로 가져갔다.

“씨발. 짜증나”

날이 선 칼처럼 날카로운 음성이 아까의 분위기를 다 자르듯이 귀에 박힌다.

놀란 나는 샌드위치를 다시 내려 놓고 뒤돌아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녀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다시 한번 따뜻한 미소를 던진다.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본 사람처럼 나는 다급히 샌드위치를 먹어치우고 자리를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복잡한 마음에 잠은 오지 않았다.

어쩔수 없이 서랍에 마지막으로 남은 수면제 한 알을 먹고 서야 잠이 든다.

“성운씨는 인간미가 없어.”

“맞아. 성운씨 사람 같지 않달까? 왜 저렇게 악착같지.”

“성운씨, 가족이 없다면서? 혼자 살아서 사람이 저렇게 자기중심적인건가.”

회사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나를 향한 말들이 너무 선명해 더욱 잔인하다.

“아니야! 아니야!”

소리를 쳐도 나오지 않은 목소리는 누구도 듣지 못한 듯, 아니 나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인듯 자신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은 물체는 다시 나를 처음 꿈에서처럼 나를 뒤덮고 있었고, 벗어날려고 발버둥 쳐봐도 소용은 없다.

목에서 입으로 코로 눈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들이 나를 일순간 쳐다본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는 묘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러는거야!”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깬다.

이틀째, 기분 나쁜 꿈이라니, 월요일 아침임을 알고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나는 일에 집중할 수 없다.

또 누군가가 나를 욕하지 않을까. 나를 비난하지 않을까.

신경은 온통 사람들의 소리에만 기울인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성운씨, 어디 아프신거아냐? 말이라도 걸어볼까?“

마치 누가 따스한 빛이라도 내려준 것처럼 마음이 편해진다.

따스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나는 이내 그녀는 팀원 중 가장 말도 없고, 일 잘하는 한영애씨 라는걸 깨달았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그녀를 다시한번 쳐다보니 전에 없던 그녀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녀와 말을 하고 싶다.

나에게 유일하게 따스함을 준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

“저기, 영애씨? 잠깐만 와볼래요?“

“왜요? 팀장님? 할 말 있으세요?”

정말 그녀는 구세주처럼 한 걸음에 나에게 다가와 주었고, 처음 느끼는 감정에 가슴이 뛴다.

“저기.. 끝나고 밥이라도 먹을래요? 내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입으로 나왔을때 놀랐지만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아... 제가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드실 수는 없을까요?

저도 팀장님이랑 밥 꼭 먹고 싶어요“

살짝 볼이 빨개진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내 품으로 안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요. 다음에 같이 밥 먹어요. 자리로 돌아가셔도 되요”

“네. 팀장님 다음에 같이 밥 먹어요!”

돌아가는 그녀를 계속 바라봤다.

이제와는 다른 음성이 들려온다.

“갑자기 왜 저러시지. 내가 좋아진건가? 그냥 밥 먹을껄 그랬나..”

그래. 그녀는 내 빛이다.

그날 저녁이 되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 그녀의 SNS에 들어가 그녀의 사진을 보았고, 친구들과의 댓글을 읽으며, 괜히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였고, 그런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댓글 중에 남자로 보이는 댓글을 보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놈은 뭐야”

그녀의 환심을 사기위한 듯한 그의 행동이 거슬린다.

“영애씨는 내꺼야.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아.”

3년 전 죽었다고 생각했던 내가 다시 살아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준 그녀를 놓칠 수 없다.

다음날, 회사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다시 나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주고, 나 역시 그녀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성운씨, 오늘 회사 전체 회식인거 알지? 오늘은 빠지면 사장님이 면담하신다고 했..”

“갈게요”

“뭐라고? 간다고? 어.. 알겠어”

그녀에게 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루종일 그녀 생각으로 일도 못하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지 연습하고 있었다.

저녁 6시쯤 다 같이 회사 근처 모임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6시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빠르게 다음 시침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녀와 나의 거리는 테이블 하나로 가로막혀있었다.

“영애씨, 잠깐 여기로 와볼래?”

사장의 부름에 사장 옆자리로 가는 그녀를 나 혼자만 바라보는 느낌을 받았다.

사장과 그녀는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주고 받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던 나는 담배나 한 대 피러 밖으로 나간다.

“사실인가보네.”

“뭐가요?”

“사장이 영애씨 좋아한다면서.. 요즘 엄청 붙어다니자나.”

“정말요?”

“그렇다니까. 둘이서 집에 같이 가는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사장님 결혼 하시지 않았어요?”

“무슨 소리야. 사장님 솔로야”

먼저 나온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된 나는 화가 났다.

사장은 왜 그녀를 힘들게 할까. 그녀와는 띠 동갑도 넘을텐데,그녀는 나의 빛이자 공주인데.. 갑자기 악마의 성에 갇혀있는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휘몰아쳤다.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사장의 손은 그녀의 어깨에 올려져 있었고,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하지만, 단오한 그의 손에 눌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구해달라고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일어나, 사장님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끌고 나왔다.

“영애씨, 괜찮아?”

“왜 이러세요. 갑자기 왜...”

“영애씨 싫으면 싫다고 말해. 왜 바보처럼 ...”

“팀장님! 갑자기 왜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먼저 들어갈게요”

“잠깐만요! 영애씨, 가지마요.”

나를 이상한놈 취급하는 그녀는 지금 무엇 때문에 나를 거부하는걸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그녀의 진심이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빨리 아침이 되어야 한다.

아침이 되면 그녀는 다시 나의 빛이 되어 줄 것이다.

약국에 들어가 수면제를 한통 샀다.

그리고 방안에 누워 한줌을 입에 털어넣었다.

머리가 깨질듯 아프지만 잠이 온다.

그래. 아침이면 그녀는 다시 돌아 올꺼야.

낯익은 식탁, 그리고 주방.

그곳에 앉아 있는 아빠 그리고 엄마..

이내 자리를 뜨려는 엄마의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아빠의 모습..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는 그녀를 아빠와 나는 바라만 보고 있다.

나가는 그녀의 옆에는 낮선 남자가 그녀를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가 누군지 그를 본 적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내고 그가 누구인지 알수없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우리를 버리고 갔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저주하는 것이다.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일 뿐이다.

그녀를 저주한다.

꿈속의 어린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침이 밝아왔다. 눈을 떠보니, 빛은 또 찬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듯 아프지만, 나의 빛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아픔을 잊고 회사로 달려갔다.

회사로 가는 길, 햇빛이 너무 밝아 나도 모르게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뜬다.

회사에 도착하고 그녀를 찾는다. 그녀는 아직 출근 하지 않은 걸까.

하나 둘 출근하는 사람들은 어제의 일을 잊지 않았다고, 나에게 시위하듯 나를 조롱하듯 쳐다본다.

“어휴, 술버릇이 아주 개야 개”

“누가 아니래. 완전 꽝이라니까.”

“괜히 회식은 와서 왜 분위기 깨냐니까.”

비난의 화살이 나를 쏘는 만큼 그녀가 더욱 간절해진다.

회사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사장이 그녀의 어깨의 손을 올리고 그녀와 함께 들어온다.

“우리 결혼하게 됐어요.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영애씨랑 저 사귀는 사이애요.

더 이상 이상한 소문나지 않게 하려고 말하는거니까. 다들 잘 지켜봐줘요.“

그의 옆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그녀가, 그녀를 자신의 여자라고 소개하는 사장의 그림자가 늘어지며,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한마디를 한다.

“너에게 빛은 없어. 그림자 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