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회 공모전 응모합니다. <만개[滿開]>

by 도도탄 posted Dec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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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개[滿 開]

 

 

현재, 2000

 


   책을 읽던 석호가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석호는 잠을 깨겠다는 합리화로 라디오를 틀었다.

  “뉴스소식입니다. 오늘 낮,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한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월남전 당시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 사과하라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현재 김 대통령이 베트남에 내방한 시점이라 양국 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석호가 죄 없는 이마를 벅벅 긁어댔다. 석호의 양친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 석호를 큰외삼촌인 명인이 홀로 키웠다. 반평생을 홀몸으로 지낸 명인은 석호를 친아들처럼 여겨왔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큰외삼촌과 살고 있는 석호에겐 라디오에서 나온 음성이 달갑지 않았다.

   교과서를 꺼내 사정없이 책장을 넘겼다. 책에는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으로 인한 파급효과 즉, 대한민국의 경제가 한층 발전된 것과 국군의 선진화에 대해서만 서술되어있었다. 원하던 내용을 찾지 못하자 석호는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석호의 손바닥이 이마를 타고 올라가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 머리칼을 끼워놓고 움켜쥐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귀를 날카롭게 후벼 팠다. 명인이었다. 명인의 거나하게 취한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한쪽 다리를 저는 명인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은 흡사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었다. 술을 마신건지 술독에 빠졌다 온 건지 분간이 안됐다. 명인이 돌아오면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오늘은 포기해야 했다.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들어온 햇빛이 명인을 간지럼 피워 깨웠다. 집안은 온통 침묵에 삼켜져 있었다. 명인이 잠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석호는 어느새 집을 비웠다. 명인은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쳤다. 시민공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는 명인이 공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연못을 바라봤다.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이 한줄기의 햇빛도 용납하지 않는 탓인지 연꽃과 연못을 에워싸고 있는 무궁화들이 입을 오므리고 있었다. 컨테이너로 된 휴게실에 들어온 명인이 숙취에 못 이겨 쓰러지듯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똑똑. , 하며 몸을 일으킨 명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명인의 찰나 같은 휴식을 방해한 불청객은 다름 아닌 석호였다. 궁금한 게 있다며 찾아온 것이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던 석호가 반대편 소파에 마주앉으며 입을 열었다.

  “삼촌, 삼촌은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잖아. 그 당시 우리 한국군이 베트남 사람들한테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는데 사실이야? 그 잘못이라는 게 대체 뭔데?”

 명인의 눈이 석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땅에 박혔다.

  “사실이다. 아마 베트남에선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베트남 여자들에게도 몹쓸 짓을 했다는 것 때문에 우릴 아직도 많이 미워할 게다. 하지만 당시는 민간인조차 믿지 못할 상황이었어. 실제로 베트콩이 민간인으로 둔갑해서 주둔하고 있던 우리 군을 공격하기도 했지. 적군인지 민간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어. 그리고 소수의 부도덕한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범하기도 했지. 그들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를라이따이한이라 부르는 것 같더구나. 물론. 베트남 여성을 정말 사랑했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우린 두고두고 반성해야해.”

  “……….”

  “지금까지 사과나 보상은 해줬어?”

  “어느 정도의 유감표명과 시민단체와 전우회,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금전적 지원과 학교, 의료시설 등 복지기관을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공식적으로 대외적인 사과는 없었지.”

  “혹시 삼촌도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던 거야? 한 번도 나한테 월남전 참전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잖아. 왼쪽다리도 그 때 다친 거라면서.”

  불현 듯 명인은 왼쪽 허벅지 상흔이 아려왔다. 잠시 우수에 잠기는가 싶더니 운을 뗐다.

 

 

 

19664, 베트남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군의 선진화와 국가경제발전이라는 명목아래 실시된 파병사업은 1964년에 공병과 의무병 등 비전투병력을 보낸 이래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약 8년간 지속되었다. 명인이 소속된 해병대 11중대도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무덥고 습한 베트남의 날씨에 적응하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6.25전쟁 직후 미군이 놓고 간 M16 소총이 전부인 그들은 빈호아사 커우마을에 있는 숲속에 주둔지를 편성하고 사방에 철조망을 두른 뒤 24시간 경계를 섰다.

  “신명인 일병.”

 멀리서 누군가 명인을 불렀다.

  “백지용 일병님 무슨 일이십니까.”

유쾌하고 사교성 있는 성격으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지용이 다가왔다.

  “너 베트남 말 하나도 모르지? 간단한 것 정도는 알려줄게. 백병전 때 녀석들이 베트남 말로 욕을 하면 되받아치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한국말로 열심히 욕해봤자 놈들이 못 알아먹으면 억울하잖아!”

너털웃음을 짓는 백 일병을 보며 명인이 의아하게 물었다.

 “베트남 말은 언제 배우신겁니까?"


   "인마!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했다. 적의 언어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작년에 파병이 확정 나면서부터 죽어라고 공부했지. 웬만한 문장 정도는 통역도 가능해. 어라? 못 믿는 눈치인데?”

   둘은 마주보며 한바탕 웃었다. 11중대는 의무병의 역할까지 해주면서 현지 마을 사람들과 각별히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식량과 마실 물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베트콩의 지형을 이용한 매복전술은 미군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한국군에게 지형에 관한 많은 정보도 주었다.

    

   며칠 간 평화로웠던 주둔지에 두 번의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순간 주둔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병력들은 혼비백산 하였다. 유탄이었다. 두 발의 유탄은 다행히 막사를 빗겨나가 주변에 있던 나무에 맞았다. 나무가 쓰러지면서 철조망을 망가뜨렸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범인은 월맹군도 베트콩도 아닌 바로 마을주민이었다. 심지어 평소 중대원들과 가장 가깝게 지내고 교류하던 사람이었다. 그자는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 됐지만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조차 사전에 막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민간인이! 이 마을주민이! 설마 했던 것이다.

  “그자를 생포 했어야지! 그래야 배후를 추궁할 거 아닌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전우들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살했습니다.”

공적에 메말라 있던 김대성 상병이 자랑스레 중대장에게 말했다. 중대장은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면서도 배신감에 이를 갈았다. 소대장들과 논의를 한 뒤 중대장은 결정을 내렸다.

  “적진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이 마을에 더 이상의 호의는 없다. 이제부터 이 마을주민들을 민간인이 아닌 적군으로 간주한다. 지금부터 토벌작전에 들어갈 것이다.”

  병력들이 일제히 !’을 외쳤다. 명인은 순간 욕지기가 치솟았다. 비록 그들이 적인지 아닌지 확신은 안 섰지만 단 한명 때문에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을 처단한다는 결정만큼은 막고 싶었다. ‘이건 아니야.’ 명인이 속으로 되뇌는 동안 이미 병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인만 발이 땅에 박힌 듯 멍하니 서서 연신 도리질을 칠뿐이었다.

  “신 일병! 어서 대열에 합류해라.”

 중대장의 불호령에 도리질을 멈춘 명인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하릴없이 걸음을 청했다. 마을에 다다른 중대원들이 민가를 수색했다. 실제로 그들의 집안에는 온갖 무기들이 즐비했다. 자신들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전쟁터였던 곳에서 직접 주어 온 것이었지만 배신감에 불타오른 중대원들 눈에는 영락없는 복병이었다.

  “쏴라.”

 어금니를 꽉 깨문 중대장이 무겁게 말했다. 일순간 주민들에게 총이 겨눠졌다. 놀란 주민들은 황급히 달음박질 쳤지만 총알보다 빠른 이는 없었다.

  병력들의 총성은 그칠 줄 몰랐다. 오직 명인의 총만이 고요를 유지했다. 중대장을 비롯한 병사들의 눈에는 배신감에 대노한 눈빛만이 감돌았다. 명인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 마신 후 철모를 살짝 올려 총성이 자욱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늘에 찔린 듯 따끔거리는 감정으로 바라본 하늘에 검은 구름만이 너울거렸다.

  “그만! 그만 하십시오. 다들 그만해요!”

절규에 가까운 명인의 부르짖음에, 순간 총성이 그쳤다.

  “이제 그만 하라고요!”

  “지금 뭐라 지껄이는 거야! 저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 실제로 우리에게 공격까지 했다고! 애초부터 저들은 베트콩이었을 수도 있다.”

역설하는 중대장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공격을 한 사람은 단 한명이었고 이미 사살했지 않습니까.”

  “듣기 싫다. 더 이상의 항변은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고 즉각 처결 하도록 하겠다. 썩어가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손 전체를 썩게 한다면 그 새끼손가락은 잘라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저.”

  “도주한 주민들을 샅샅이 찾아 모조리 사살해라!”

명인의 말을 잘라낸 중대장이 다시 지시를 내렸다. 망연자실한 명인의 눈에 배가 불룩한 여인이 보였다. 이어 그녀 뒤에서 조심스레 총을 겨누며 다가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김대성 상병이었다. 무조건 막아야만 했다. 명인이 득달같이 달려갔다.

  “김 상병님! 잠시요! 멈추세요.”

명인의 외침에 놀란 여인이 뒤를 돌아보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새 그녀 앞을 가로막고 열십[]자 모양으로 막아선 명인이 대성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이 새끼야 저리 안 꺼져?”

  “이 여인의 배를 보십쇼. 임산부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임산부가 면죄부라도 된단 말이냐? 그래 네 말마따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총을 겨누진 못하겠지. 허나 우리 뒤통수를 친 놈과 출신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이유가 된다. 알아 처먹었으면 썩 꺼져.”

  “대성이형 제발 이러지 마.”

  “미친 새끼 누구더러 형 이래! 여긴 전장이야. 난 너보다 상급자다. 호칭 똑바로 해.”

대성은 명인을 서슬 시퍼렇게 쏘아봤지만 대성의 눈에 비친 세상이 마구 흔들렸다.

 

   어릴 적, 둘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6.25 전쟁의 여파로 마을에 또래 남자라곤 둘밖에 없었다. 둘은 친형제보다도 우애가 깊었다. 한번은 마을 뒷동산에 누어 명인이 물은 적이 있었다.

  “형은 나중에 크면 뭐가 될 거야?”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이 될 거야! 그래서 빨갱이 놈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거야! 망할 빨갱이 새끼들.”

대성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피의 능선에서 순국한 한국군 장교였다.

  “형도 참. 남북이 하루 빨리 평화적으로 화해를 하기를 바라고 통일이 되기를 바라야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안 돼! 우리는 같은 한민족인걸.”

  “, 너는?”

  “난 그냥 전쟁 없는 세상에서 예쁘고 착한 여자 만나서 자식들이랑 오순도순 살고 싶어.”

  “, 딱 너다운 소소한 꿈이네. 사내자식이 큰 포부가 없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기억 속, 과거에 다녀온 대성이 다시 표정을 다듬고 윽박질렀다.

  “마지막 경고다. 비키지 않으면 내 총구가 네 머리통을 겨눌 거다.”

멀리서 이 광경을 목격한 중대장이 미간을 짓이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황천에 가라앉은 듯 중대장의 목소리는 몹시 차가웠다.

  “신 일병이 군인의 본분을 잊은 것 같아 교육시키고 있었습니다.”

  “김 상병, 네게 안 물었다.”

  “평소에 중대장님의 빈틈없는 전략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자신의 부하를 정말로 아끼는 마음 본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중대장님 명령은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부디 사격을 멈춰주십쇼.”

명인의 뒤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본 중대장이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마음이 약해졌다. 곧이어 오른팔을 들어 사격을 중지시켰다.

 “전원 사격중지 하라.”

총성이 잠잠해지자 중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먼 옛날, 제갈량은 자신이 아끼는 부하 마속이 군령을 어겨 전쟁에서 패하자 울면서 그를 참형에 처했다. 이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 하지. 너는 지금 많은 군령을 어기고 있다. 후에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이 든다면 그땐 너의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다.”

  “하지만 중대장님.”

  “모두 철수해라!”

  중대장을 다시 설득하려는 대성의 말을 가로막고 철수할 것을 명했다. 명인이 대열에 합류하러 몸을 돌리다가 누군가 옷자락을 잡는 느낌에 멈춰 섰다. 옷자락을 잡은 손의 주인은 파리한 몰골의 젊은 베트남 여인이었다. 여인의 눈물이 눈을 비집고나와 가녀린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명인은 하루가 멀다고 마을에 들렀다. 마을에는 미처 수거하지 못한 시신들이 너부러져있었다. 명인은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죄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명인을 바라보는 마을주민들의 시선에 원망이 서려있었다. 마을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명인은 마을 한가운데서 두 무릎을 굽혀 땅에 댔다. 주민들은 차갑게 돌아섰다. 그들의 뒷모습에는 사무치는 슬픔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명인의 앞에 누군가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난번 명인이 구해준 여인이었다. 명인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를 돕고 싶었다. 그녀를 돕는 것이 마을주민들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사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전쟁 중에 커다란 배를 달고 혼자 살아가야 할 그녀가 가여웠을 뿐이었다. 그저 단순한 연민의 감정이었다.

  “어이 신 일병, 요즘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백 일병님! 마침 잘 됐습니다. 저번에 임신한 베트남 여인 기억나십니까? 그 집에 가끔 들르는데 의사소통이 안돼서 답답합니다.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말인데 저랑 같이 동행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 일병님은 베트남 말 곧잘 하시지 않습니까.”

  “큰일 날 소리! 요즈음 아무리 전투가 없다 해도 엄연히 전시상황인데 보고도 없이 움직인다는 건 탈영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제가 백 일병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믿을만한 분이 백 일병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용은 믿을만한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결국 지용은 명인과 위험한 동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약속해라. 삼심 분 이상 있지 않겠다고!”

  그녀의 집 앞에서 명인의 손목을 붙들고 망설이는 지용에게 명인이 미소로 답했다. 인기척을 내며 방문을 열자 안에 있던 여인이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근데 뱃속에 아기는 누구 애인 거야? 네 애는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죠. 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물어보지도 못하고.”

지용은 특유의 넉살로 그녀와 제법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랍니까?”

  “빌어먹을, 우리가 이 마을에 주둔하기 전에 먼저 왔었던 부대의 한국군이 겁간을 했다는 군. 소수의 몇 명이 나라망신을 시키는 꼴이네. 우리보다 족히 네 살은 어려 보이는데, 뱃속에 아이는 무슨 죄야.”

명인이 미간을 구기며 윗입술을 물어뜯었다. 분노를 삭이고 지용에게 그녀의 이름을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응우옌 티 쭝 린.”

  “그냥 죽린 이라 부르면 될 거 같아. 대나무 죽[]에 옥빛 린[]자 라는 군.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의 자도 옥빛 인이 아닌가?”

  “죽린.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명인과 린이 마주 웃었다. 이 날 이후 명인은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베트남 말을 배웠다.

한편 명인과 대성은 그 사건 이후 서로 데면데면 하게 되었다. 명인은 그날 대든 것이 미안하여 사과를 하려 했지만 대성의 외면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대성은 명인을 피해 다녔다. 어릴 적부터 본성이 선한 명인은 그렇지 않은 대성에게 껄끄럽고 불편한 존재였다. 분명 둘도 없는 친구였으나 자신과 어딘가 모르게 다른 명인에게 모든 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보여준다면 자신을 손가락질 하며 떠날 것만 같았다. 하나뿐인 친구 명인을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 있게 하고 싶었다. 명인에게 못되게 구는 것이 우정을 지키는 대성만의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베트남의 매미가 극성스레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대성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대성은 경계 비번일 때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명인을 수상히 여겼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아무렇게나 튕겨버린 뒤 조심스레 명인의 뒤를 밟아 도착한 곳은 낯이 익은 곳이었다. 명인이 에헴! 하고 기척을 내자 누군가 방문을 열며 나와 명인과 인사를 나눴다. 대성은 허업! 소리를 겨우 삼키며 담 뒤로 숨었다.

  “오늘은 왜 이리 늦게 오신 거예요.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애교 섞인 말투가 아양을 떨 듯 못내 귀여웠다.

  “미안 교대가 늦게 이뤄졌어. 뭐하고 있었어?”

  “어제 명인 씨가 가르쳐 주신 아리랑을 불러보고 있었어요.”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한쪽 발로 땅을 비비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명인은 린의 불룩한 배를 보며 와락 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순간 자신이 얼마나 간사한지 느꼈다. 연민이라고만 생각 했던 감정이 어느새 그 이상으로 변해버렸다.

  “언젠가 한국에 온다면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

  “명인씨는 한국에 꼭 돌아가야 해요? 안가면 안 되는 거예요?”

  “전쟁이 끝나면 가야해. 우리가 북베트남으로부터 꼭 지켜줄게.”

  “그럼 저도 한국에 데려가 주세요. 명인씨랑 헤어지기 싫어요.”

  “걱정 마. 상황이 좋아지면 꼭 너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린이 뒷짐을 풀더니 손에 쥐고 있던, 연꽃으로 엮은 목걸이를 명인의 목에 걸어주었다.

  “연꽃은 우리나라의 국화[國花]예요. 귀중한 꽃이죠. 이 목걸이가 명인씨를 항상 지켜줄 거예요. 영원불사를 의미하는 꽃이니까요.”

옥빛의 연꽃이 명인의 목을 부드러이 품었다.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야. 일편단심의 꽃이지.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꼭 보여줄게. 연꽃만큼이나 아름다운 꽃이거든.”

  제법 둘의 대화가 물 흐르듯 이뤄졌다. 이제는 혼자 다닐 정도로 베트남 말에 능숙해졌다. 벌써 린의 집에 드나든 지 한 달이 다 돼갔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짧았다. 명인과 린은 헤어질 때 즈음엔 항상 눈시울이 붉어졌다.

   담 뒤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대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성은 조용히 주둔지로 돌아왔다. 명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지난번 유탄공격으로 잘려나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명인의 목에 걸린 연꽃 목걸이를 보던 대성이 땅바닥에 침을 한번 찍 뱉었다. 명인은 누군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을 받아 고개를 돌렸다. 순간 대성과 눈이 마주쳤고 대성은 황급히 시선을 땅에 심었다. 고개를 한번 갸우뚱한 명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 주목! 전원 지금 당장 집합해라.”

중대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중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얼떨한 표정의 병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상급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흩어져있는 9중대, 10중대와 합류하여 움직이라는 지시다. 이틀 뒤 짜빈동으로 이동한다. 미리 채비들 해놔. 이상!”

  “그래 벌써 두 달 동안이나 이곳에만 있었어. 감나무를 봐야 감을 딸 거 아닌가? 좀이 쑤셔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전투도 없는 곳에서 지겨워 환장할 참이었는데 인제 몸 좀 풀겠네.”

  “그러게 말이야. 내 총은 녹이 슬 지경이다. 빨리 놈들을 싹쓸이해서 훈장 좀 받아야 할 텐데. 이놈의 마을은 개미 한 마리 뵈지 않으니 쯧쯧. 아무튼 월맹군이든 베트콩이든, 빨갱이 새끼들 걸리기만 해봐라 뼈도 못 추스를 줄 알아.”

해산하던 병사들이 격양된 어조로 한마디씩 했다. 명인만이 애꿎은 엄지손톱만 씹어댈 뿐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대성이 코웃음을 쳤다.

 

   부대이동 이틀 전 밤. 천막 안에 드르렁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동시에 밖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다. 한쪽 팔을 베개 삼아 누운 명인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후 하고 내뱉은 한숨은 심난한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짜빈동으로 가게 되면 앞으로 다시 린과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아니, 절대 못 만날 것이다. 그렇게 린에게 상처주긴 싫었다. 명인은 오직 전쟁이 빨리 끝나 린과 한국에 가서 함께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명인에게 지용이 다가왔다.

  “신 일병. 이제 그곳에 가지마. 부대이동 앞두고 유동병력통제가 심해졌으니 꼬리가 잡힐 거다.”

  “백 일병님. 전 가야해요. 이번에 못 보면 영영 못 볼지도 몰라요. 작별인사만큼이라도 해야죠. 분명 눈이 빠지게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안 돼, 정신 좀 차려 이 자식아. 절대 못가! 걸리면 넌 끝장이야.”

  “상관없습니다. 백 일병님께서 막으셔도 저는 갈 겁니다.”

  지용이 필사적으로 만류했지만 명인은 사전에 만들어 놓은 개구멍으로 결국 빠져나갔다.

 

   린의 집에 도착한 명인의 입이 벌어졌다. 방 안에는 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명인이 올 것을 믿고 린이 아침 일찍부터 상을 차린 것이다.

  “어서 오세요. 베트남 음식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정성껏 만들어 봤어요.”

명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탓에 린의 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이건 퍼(쌀국수)예요. 그리고 이건 고이 구 언(월남 쌈)이에요. 베트남 대표음식들이죠.”

  “홑몸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난 해준 것도 없는데 항상 받기만 하네. 미안해.”

  “그런 말 말아요. 뭘 바라고 하는 게 아니고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매일 찾아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절대 어디 가지 말고 항상 제 옆에 있어주세요.” 명인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멈췄다.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고 작별을 고하러 온 것인데. 린의 말이 명인의 입술을 굳게 잠가버렸다.

 

  “전 병력 지금 당장 집합!”

중대장의 우레 같은 목소리가 주둔지에 울려 퍼졌다. 인원이 어느 정도 모이자 중대장은 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긴급 상황이다. 현재 연대 급 인원의 월맹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미군 측 연락이 있었다. 우리가 그 숫자를 막아내긴 무리다. 지금 당장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군부대와 연합한다. 각 분대 분대장들은 인원파악 후 보고할 수 있도록 해. 준비할 게 많으니 신속히 파악해라! 바로 이동해야 한다.”

  “중대장님 현재 신명인 일병만 없습니다.”

중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성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지용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대성을 노려봤다.

  “무슨 말이야 그게. 신 일병이 없다니 어딜 간 거야!”

  “한 달 전 토벌 작전 때 살려뒀던 여자에게 간 것 같습니다. 그곳에 드나든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보고도 없이 줄곧 주둔지 이탈을 했었단 말이야? 너는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분대장이라는 놈이!”

소리치는 중대장의 목에 핏대가 꿈틀 거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방금 전에 알게 된 지라. 막 보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전 병력은 지금 바로 떠날 준비한다. 어차피 목적지로 이동하려면 마을을 지나야 하니 신 일병은 가는 길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 일병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성을 노려보던 지용이 중대장에게 시선을 돌려 걱정스레 물었다.

  “신 일병은 탈영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에 마땅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놀란 지용의 동공이 커졌다. 전시 중에 탈영이라면. 대성도 일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잘 먹었다. 진짜 맛있는 걸? 요리솜씨가 제법이네 린.”

 “아이 부끄럽게.”

 린은 쑥스러운 듯 옷고름을 만지작거렸다. 명인은 린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 나 할 말이 있어. 있잖아 사실은. 내일.”

  “신 일병!”

  내일이면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바깥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문을 열고 나간 명인은 군장까지 메고 있는 중대원들의 표정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읽었다.

  “전시 중에 사사로이 민가에 드나들다니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 죄송합니다. , 면목 없습니다.”

이때 중대장의 눈에 등허리를 받치며 나오는 린의 모습이 보였다.

  “너를 믿었건만.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여자 하나 때문에 군 기강을 헤이하게 만들다니.”

이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총탄 소리와 포탄소리가 물밀 듯 밀려왔다.

  “월맹군이다! 모두 신속하게 은, 엄폐를 하고 전투태세를 갖춰라!”

 순식간이었다. 군장을 메고 있던 병사들의 대열이 마구 흐트러지며 마을의 담벼락과 돌기둥 따위에 몸을 숨기고 총구를 겨눴다. 월맹군은 수십 대의 전차와 화염방사기, 박격포 등 무기 면에서 한국군을 압도했다. 마을 주민들은 황급히 피신 길에 올랐고 여기, 저기서 한국군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이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집채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린은 또 다시 망연자실하여 휘청 거렸다. 명인은 그런 린을 데리고 안전한 숲속 길로 갔다.

  “! 내말 잘 들어. 넌 일단 이 길로 무작정 가. 월맹군들이 저기 반대편에서 몰려오니까 몸을 피해. 우리가 꼭 막을게. 그리고 이따가 보자.”

  “싫어요! 혼자는 가지 않을래요. 같이 가요. ? 저랑 같이 떠나요.”

  “안 돼, 난 군인이야. 해야 할 일이 있어. 꼭 살아서 데리러 갈게.”

  명인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련 없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린은 멀어지는 명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꼭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언약을 곱씹으며 명인을 쫓아가고 싶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럼에도 눈치 없는 눈물은 린의 뺨을 타고 또 흐르고 말았다.

  “다들 정신 차려! 곧 미군 측에서 지원이 올 거다. 좀만 더 시간을 벌어야해!”

   하지만 중대장조차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미 월맹군이 마을 안까지 진입했기 때문이다. 11중대는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대성은 담벼락 하나에 몸을 엄폐 후 엎드려 쏴 자세로 적군을 하나씩 사살해갔다. 그것도 잠시 포격으로 인해 대성의 오른쪽 팔이 녹아버렸다. 너무 아파,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했다. 더 이상 총을 잡을 수 없게 된 대성은 모든 것을 체념하려 했다. 그러던 중 대성의 눈에 명인이 들어왔다. 머저리 같이 엄폐도 하지 않고 대놓고 사격을 하고 있는 명인에게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신명인 당장 엎드려!”

이 외침은 명인의 귀에 닿기 전에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러다 멀리서 명인을 겨누고 있는 월맹군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저 월맹군의 총구는 필시 명인을 향하고 있었다.

  탕! 한발의 총성이 명인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명인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명인은 피가 솟구치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다시 총을 지팡이 삼아 지탱해 일어났다. 그 월맹군의 총구가 다시 한 번 명인을 향했다.

  “저 등신새끼. 왜 일어나!”

 혼잣말과 동시에 대성은 행동으로 반응하였다. 대성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오른팔만 멀쩡했어도 총으로 월맹군을 쏴 죽이면 됐지만, 그러지 못하니 다리로 미친 듯이 뛰어야했다. 그 순간이었다. 대성은 몸통으로 명인을 밀쳐 넘어뜨렸고 또 총성은 울렸다. 명인은 땅에 고꾸라졌다. 넘어지면서 땅에 총상 입은 허벅지가 다시 한 번 쓸렸다. 쓰라림이 엄습해왔다. 그것도 잠시 명인의 눈에 복부에서 피가 흘러넘치고 있는 대성이 눈앞에 보였다.

  “대성이형! , 대성이형. 정신차려봐 형. ! 괜찮아?”

  “, 제길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냥 네가 맞게 할 걸 크흑. 더럽게 아프네. 흐흐흐.”

  “형은 지금 장난이나 칠 때야? 형 정신 차려. 죽지 마. 의무병! 여기 좀 와주세요.”

  “호들갑 떨지 마 이 새끼야. 그보다 뭐하나 물어보자. 얌마. 아직도 너한테 난 친구냐?”

  “당연하지! .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자꾸 피 나오자나!”

  “내가 너한테 그동안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내가 네 형이냐?”

  “그래! 젠장. 조용히 좀 해, . 여기 좀 누가 와주세요!”

  “사실 네가 얄미웠다. 항상 올곧은 네가. 나도 참 못났지? 크윽.”

  그때였다. 명인의 무릎을 베고 있던 대성의 머리가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눈을 감은 대성의 표정에는 고통스러움이 아닌 평온함만이 감돌았다. 명인의 눈동자가 강하게 떨려왔다. 그에 못지않게 입은 더 심하게 떨렸다. 명인은 대성을 넋 나간 듯이 한참을 부둥켜 앉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부대의 지원이 왔다. 헬기에서 내려오면서 월맹군들을 모조리 사살해 갔다. 미군들의 가세로 전세가 다시 기울었다. 결국 국군과 미군연합의 승리로 돌아갔고. 다들 시신수습에 여념이 없었다. 명인은 대성의 시신을 수습하고 임시막사에서 왼쪽허벅지 치료를 받았다. 그 순간 명인은 린이 떠올랐다. 중대장은 명인에게 이동통제 지시를 내렸다. 다리도 다쳤을 뿐만 아니라 이미 무단이탈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명인은 그날 이후로 린의 소식을 일체 듣지 못하였다.

     그렇게 세월은 야속하리만큼 흘러갔고, 전쟁은 끝이 났다. 결국 월맹군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고. 미군과 국군은 모두 철수 하게 되었다. 명인은 귀국하고 나서도 린에 대한 미안함으로 편히 잠을 자지 못했다. 대한 적십자사를 통해 여러 번 수소문을 하여 린을 찾고자 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명인은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어놓고 살았다.

 

현재

 

  어느덧 명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석호에게 웃어보였다.

  “그럼 삼촌은 그 린이라는 아줌마 때문에 결혼 지금까지 결혼 안한 거야?”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거야. 누가 나 같은 절뚝이랑 결혼하려 하겠니.”

  “하루빨리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진정으로 화해를 하고 가까운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어쩌면 명인만이 아니라, 베트남에 사과를 하지 않은 우리 대한민국도 절뚝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석호의 머릿속에 스친다. 명인은 석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으로 고마웠다. 평소에 명인이 생각하던 바를 대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똑똑.] 같이 정원사로 일하는 동료 이씨가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며 말했다.

  “어이 신씨. 어떤 여자가 자네를 찾던디? 중앙 연못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디 말이여.”

  “어떤 여자라니? 무슨 소리야 그게.”

  “나도 물러. 자네 숨겨둔 애인 아니여? 허허, 말투 보니께 우리나라사람은 아닌 거 같던디. 한번 어여 가봐.”

명인은 갸우뚱 하며 석호에게 잠시 TV 보고 있으라 한 뒤 중앙연못으로 향해 걸었다. 석호는 TV를 켰다. 마침 TV에서는 베트남에 내방한 김 대통령이 대 베트남 사과문을 낭독 중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이 베트남에 입힌 피해와 베트남 국민들에게 준 상처에 대해 대표로 깊은 사죄와 진심어린 반성의 뜻을 전합니다. 거듭 사죄의 말씀을 드리는바, 부디 베트남의 모든 국민들은 그간의 노여움과 설움을 떨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로 인해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진정한 친구의 국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김 대통령은 사과문을 다 읽고,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TV를 보고 있던 석호의 낯빛이 한결 환해졌다.

  그렇지! 이래야 우리나라답지!”

  석호가 자신의 양 무릎을 두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하루 종일 우중충했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사로워 졌다. 해가 구름을 밀어내고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먹구름이 가득하여 어두컴컴했던 날씨가 갑자기 맑아진 덕에 명인은 중앙 연못에 어떤 여인이 서있는 것을 멀리서부터 볼 수 있었다. 그 여인과 가까워질수록 명인의 동공이 점차 커져 갔다. 40년이 지났음에도 명인은 단번에 그 여인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채 한발로 땅을 비비고 있는 한 여인.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소리 없는 짙은 미소만 지을 뿐 이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연못의 연꽃과, 연못을 에워싸고 있는 무궁화들이 어느새 만개[滿開]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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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사항>

이름: 유도헌

나이: 25

거주지: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창동 467번지 중문빌 105호

소속: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

H.P: 010-4851-5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