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걸음
최유지
‘우리는 인연이었을까?’
매번 던지는 물음엔 답이 없었다. 괜스레 찡해지는 코가 아팠다. 붉게 물든 눈가를 비비며, 애써 울음을 삼켜냈다. 마음속엔 보고 싶다는 말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생겨났다.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아무리 속으로 외쳐보아도 여전히 듣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이 너무도 서글펐다.
괜한 오기가 피어났다. 입을 열어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아, 목을 가다듬으며 크게 숨을 삼켜냈다. 보고 싶어, 꾸역꾸역 쏟아낸 말이 침묵 속에 사라졌다. 목에 뭔가 턱 걸린 듯, 목소리가 쉬이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목소리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바람 새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유리는 결국 참아내던 울음을 쏟아냈다.
정말이지,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제자리 걸음 上
차가운 바람이 승훈의 볼을 스쳐지나갔다. 꽤나 추워진 날씨에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뜻하게 입고 나올걸. 괜히 멋을 낸다며 얇게 입은 셔츠가 오늘따라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오랜만의 데이트라고 너무 오버했나? 머릿속에 피어오른 생각에 빠르게 걷던 승훈의 걸음이 금세 우뚝 멈추어졌다.
“다시 갈아입고 올까?”
무심코 뱉은 말에 한참이나 망설여졌다. 분명, 집에 다녀오면 약속시간이 빠듯하긴 할 것 같은데 이 옷을 그대로 입고 가기엔 날이 너무 추웠다. 승훈은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아 마음이 조급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승훈은 결국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가서 옷만 갈아입고 오자. 마음속에 피어난 결심은 승훈을 움직이게 했다. 승훈은 뜀박질을 시작했다.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승훈의 모습이 점처럼 사라져 갔다. 날은 더 추워졌고, 차가운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었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은 이미 한참을 지나가고 있었다.
“승훈 오빠!”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금세 회상에서 깨어났다. 승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채연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노란색 목도리에 빨간 스웨터 위로 길게 늘어트린 긴 생머리가 찰랑 거렸다. 승훈은 작게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다. 밖의 날씨가 꽤나 추운 듯, 채연의 코끝이 붉었다. 채연은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끌어 앉으며 승훈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어? 뭐 그냥.”
“뭐야, 다른 여자라도 생각한 거야?”
불퉁하게 내뱉는 말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승훈은 그저 작게 웃어보였다. 뭐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할 말이 없기도 했고, 그녀와의 추억을 굳이 채연의 앞에서 꺼내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말을 아꼈다. 금세 정적이 맴돌았다.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쏟아내는 승훈을 본 채연이 아 하는 탄성을 내며, 울상을 지어보였다.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머쓱하게 웃는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이었다. 승훈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채연아.”
힐끔, 바라본 시계는 이미 약속시간을 40분이나 지나고 있었다. 굳어버린 승훈의 얼굴을 본 채연의 얼굴이 죽상으로 변했다. 너무 미안해, 응? 꽤나 미안한지, 평소에 부리지도 않던 애교까지 쏟아내며 미안하단 말을 반복했다. 승훈은 그저 괜찮다는 말을 던질 뿐이었다. 이젠 익숙해진 상황에 화를 내는 것도 지겹게만 느껴졌다. 이럴 거면 일찍 나오지 말걸, 괜히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준비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져 한숨이 쏟아졌다.
“미안해, 응? 미안해 오빠.”
채연의 사과는 여전히 무한반복이었다. 대답하기도 귀찮아진 탓에 승훈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며 시선을 피했다. 미안한걸 알면, 늦질 말던가. 마음속에 피어난 생각은 승훈의 기분을 땅으로 떨어지게 했다. 갑작스레 치밀어온 짜증에 좀처럼 기분이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승훈은 마른 세수를 했다.
‘그녀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매번 채연이 약속에 늦고,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 약속시간을 지키라며 승훈에게 화를 내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도 그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기억의 저편에서 승훈은 그녀와의 추억을 꺼냈다. 징징거리는 채연의 목소리는 이미 귓가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승훈은 느긋했고, 그녀는 빨랐다. 천천히 하자는 주의였던 승훈에게 그녀는 전혀 다른 나라의 사람과도 같았다. 그녀는 항상 빨랐고, 급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지 빨리 해야 한다는 성격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승훈과의 약속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승훈은 그러지 못했다. 모든지 빨리하면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이 강하게 가지고 있던 탓에 어떤 일이던지 느긋하게 행동을 하곤 했다. 약속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뛰기보다는 걷는 것을 택했고 몇 분 안남은 시간에도 천천히 준비를 끝마치곤 했다. 그녀와의 시간 속에서 승훈은 지나치게 느렸고, 여유로웠다.
그래, 어떻게 보자면. 이기적이었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그녀의 시간도 소중하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그녀와 다르게 채연은 약속시간을 자주 어겼다. 느긋한 성격의 승훈이 일부러 천천히 나오는데도, 항상 그에 몇 배 이상을 늦고는 했다. 처음엔 준비를 하느라 그러겠지, 차가 밀려서 그러겠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마음들이 몇 번이 반복되자 금세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채연을 위해 준비하던 시간이 아깝게만 느껴졌고, 나와의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기분 나쁜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도 그럴까’
기다리는 동안 불쑥 차오른 억울함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보면 늦는 것 같지가 않은데, 항상 자신과의 약속은 한 번도 빠짐없이 늦곤 했다. 내가 우스운 건가? 툭 튀어나온 혼잣말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배려를 하던 마음에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차 금세 배신감으로 그 모양을 바꾸었다.
‘나처럼 그녀도 그랬을까?’
문뜩 피어오른 생각은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녀와 만나던 그때에는 그게 배려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연인사이니까 조금 늦어도 이해해주겠지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늦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조금 늦는다고 잘못 된건 아니었기에 스스로 합리화하며 빨랐던 걸음을 저도 모르게 천천히 늦추었다.
그래. 어떻게 보자면, 난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강제로 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연인이라는 틀로 포장을 하며, 이해라는 감정을 강요하며 그녀가 모든걸 온전히 받아주길 바랬다. 어쩌면 난 그녀를 사랑한다는 핑계로 그녀를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빠!”
버럭, 하는 목소리에 금세 정신을 차렸다. 승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잔뜩 화가 난 듯한 채연의 얼굴이 보였다.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엔 짜증이 가득이었다. 아, 승훈은 작게 탄성을 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그게.”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없고 이럴 거면 왜 만나자고 한 건데?”
채연의 목소리엔 울분이 가득했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상황에 꽤나 화가 난 듯 보였다. 승훈은 금세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딴 생각에 빠져있느라, 채연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채연아. 응?”
“오빠 요즘에 이런일 얼마나 많은줄 알아? 툭하면 넋놓고 있고 딴생각하고 나 혼자 바보된 기분이라고!”
채연의 눈에선 곧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 하는 한숨이 샜다. 승훈은 말을 아꼈다. 좀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단 말로도 바뀌지 않을 상황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하기가 싫어졌다.
“나 갈래.”
채연에게서 나온 말은 참으로 뻔했다. 싸움의 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채연의 모습에 승훈은 작게 아악 비명을 토해냈다. 또 다시 반복되는 상황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카페 유리창 밖으로 저 멀리 사라지는 채연의 모습이 보였다. 승훈은 마른 세수를 했다. 정말이지,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제자리걸음 中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밤공기가 가득 찬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삐걱, 거리는 시소가 움직이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뿌옇게 모래바람이 일었다. 꽤나 거세게 부는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내가 알던 그가 맞는 걸까? 환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차가웠고 냉정했다.
‘이러지마. 이러지 말아줘.’
머릿속에 피어난 생각은 그것 뿐이었다. 항상 따뜻하게 대하던 그가 아닌 시리도록 차가운 그의 모습을 볼 거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두려웠고 무서웠다. 저렇게 달라져버린 그가 뱉을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아서 너무 두렵고, 슬펐다.
유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식어버린 마음만큼이나 버석한 모래가 시야에 가득 찼다. 머리위로 쏟아지는 시선이 두려워서 차마 마주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찼다.
“이제 그만하자.”
그에게서 나온 말은 정말로 뻔했다. 수 백번 수 천번, 이 상황을 그렸고, 그 말을 들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처음 듣는 말처럼 아팠다.
“너도 알잖아, 우리 이미 끝이라는 거.”
아, 하는 탄성이 샜다. 유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안다. 너무도 잘 안다.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냈다. 상처 나고 상처 난 마음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도대체, 왜.
“헤어지자 우리.”
이렇게 죽을 듯이 아픈데….
“그게 너를 위한 일이야.”
어떻게 나를 위한 일이라는 걸까.
그날 이후로, 채연은 연락두절이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고, 카톡을 보내도 읽고 씹는 것이 반복되었다. 승훈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 누구보다도 채연이 더 지쳤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다.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다. 내가 채연이를 사랑 하는 걸까? 내가 붙잡아도 되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은 승훈을 더 힘들게만 만들었다. 헤어짐과 만남, 두 개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꾸만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채연을 잡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놓고 싶었다. 승훈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의 그녀와 채연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채연에게서 그녀의 모습을 찾고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채연은 그녀가 아니었다. 채연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그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눈을 뜨면 그녀가 내 옆에 있을 것만 같았고, 손을 뻗으면 그녀가 잡힐 것만 같았다. 참으로, 바보 같았고 미련했다.
제발 할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그녀를 잡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고, 그녀와 모든 시간을 같이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녀는 이미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고, 승훈이 사랑했던 모습을 잃어가고만 있었다. 그래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승훈은 그녀가 그녀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기를 바랬다. 나를 만남으로 인해서 변하지 않길 바랬고, 그 사랑스러움을 계속해서 간직하길 바랬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언제든지 행복하길 바랬다.
그래서, 헤어짐을 고했다.
그녀가 상처 받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아파할 사람이 란 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을 했다. 이게 널 위한 일이야, 이게 맞는 거야. 모든 걸 스스로 결정했다.
그때의 승훈은 자신이 한 선택이 맞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선택이 맞아야만 했다. 그래야 둘 다 끝을 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울고 불며 매달리는 그녀를 내치고, 버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려 하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 승훈은 그때 그녀의 배신감과 힘듦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기적이었다.
이별의 끝에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찾은 게 바로 운동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하루에 6시간씩 운동에만 매달렸다. 이상하게도 더 힘든 일을 할때 마다 그녀생각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만난 게 채연이었다.
채연은 그녀와 많이 닮아있었다. 좋아하는 음식, 옷 입는 스타일, 말투와 행동까지. 그래서 채연에게 빠지게 되었다. 비슷한 듯, 다른 그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사랑스러워보였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연애 초반에만 해당하는 일 뿐이었다.
승훈은 채연에게서 자꾸만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채연은 그녀가 아닌데도, 그녀인 것 처럼 대하고 행동했다. 채연에게서 그녀가 한 행동을 기대했고, 그 기대에 충족되지 않으면 혼자서 실망을 했다. 참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인데도 내 마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헤어져야할까?’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이별의 끝은 아프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다. 헤어짐의 끝에 승훈은 항상 밥을 잘 먹지 못했고, 맨정신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술을 찾았다. 더 고통스럽고 더 힘든 일을 해야지만, 어떻게든 사랑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기적이게도, 그런 기분을 또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아픈게 두려워서 피하는 것을 택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으니까. 승훈은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참아넘겼다. 이별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도, 자꾸만 피하고 싶어졌다.
그때 변한 건 그녀가 아니라,
내가 아니었을까?
채연에게서 연락이 온건,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 카페에서 만나자는 채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했으며, 모든 걸 단념한 듯 차가웠다. 뚝, 끊기는 전화가 채연의 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승훈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는 조용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흐린 날씨 탓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승훈은 두 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한참 끝에 채연의 입이 열렸다.
“헤어지자.”
채연의 말은 그것뿐이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굴엔 진심이 가득했다. 승훈은 아 하는 탄성을 냈다. 커피 잔을 꽉 쥐고 있던 손에 땀이 차길 시작했다. 이럴 걸 알고 있었음에도, 왠지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언제나 이기적인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다. 승훈은 또 다시 그걸 깨닫고 말았다. 채연은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은 채, 꾸벅 인사를 건넨 뒤 몸을 일으켰다. 금세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시리도록 차갑게만 느껴졌다. 승훈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이별은 한사람의 헤어짐으로도 가능했다. 상대방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 연애라는 건 언제나 그랬다.
채연을 잡고 싶지만, 이번에도 잡지 못했다. 그동안 준 상처가 커서 또 다시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승훈은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채연과의 이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다지 아프지도, 그다지 슬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마음이 아팠다.
언제나
이기적인 연애의 시작은,
이기적인 끝맺음으로 돌아왔다.
제자리 걸음 下
유리는 틈틈이 그를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 얼굴, 숨결, 향기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떠올리고 또 생각했다. 혹시나 잊어버릴까봐, 그와의 추억이 나중에 더 이상 생각나지 않을까봐, 어떻게든 잊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를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매일 그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차고, 울음이 터지는데도 신기 했던 건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새벽까지 울다 잠든 후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했고, 회사를 갔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마치, 이별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을 하고 행동을 했다.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픈데, 숨은 쉴 수가 있었다.
‘그도 그럴까?’
문득 생각을 떠올렸다가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 헤어짐을 고한 건 그였는데도 자꾸만 그 사실을 까먹고는 했다. 마치,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사이처럼 그를 생각하면 설레고 마음 아프고를 반복했다. 참으로, 바보 같았다.
유리는 또 다시 울음을 토해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슬픔을 혼자서만 참고 간직했다. 두 눈에서 흐른 눈물이 베개를 축축이 적셨다. 하늘엔 어둠이 내리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밝았다.
유리는 여전히 잠이 들지 못했다.
언제나 상처를 주면 그대로 되돌아왔다.
승훈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유리에게도 채연에게도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을 때 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왜 그랬을까? 그땐 왜 그렇게 상처를 주었을까?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은 좀처럼 답을 뱉지 못했다. 자꾸만 한숨이 샜다.
연애를 하면서 성숙해진다는 말은 그만큼 아픔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기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2번째의 이별에서 승훈은 여전히 아파했지만, 그녀와 헤어졌을 때 만큼 힘들진 않았다. 생각보다 밥도 잘 먹었으며, 회사도 잘 나갔고, 일상생활도 문제없이 해냈다. 그녀와 헤어졌을 때에 비하면, 큰 발전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계속해서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말을 한마디 할때마다 신경이 쓰였고, 가끔씩 떠오르는 추억들이 숨통을 조였다. 잠을 잘때마다 그녀가 꿈에 나타났고, 꿈 속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내게 왜 그랬냐며 원망 섞인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승훈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픈 걸까?
“승훈씨.”
“아, 네.”
“이 파일 좀 복사 부탁해요.”
툭 던져지는 파일 더미에 승훈은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꽤나 두툼한 종이들을 보아하니,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만 같았다. 이걸 언제 다하지,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끝없이 쌓여있는 파일더미들을 챙긴 채, 승훈은 복사실로 향했다.
복사실은 이미 만석이었다. 비슷해 보이는 또래들이 복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파일을 몇 개씩은 들고 있는 걸 봐서 빨리 끝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커피나 한잔 하고 올까?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승훈이 파일 더미를 복사기 위해 올려놓은 채, 자판기로 향했다.
「밀크커피」
언제나 승훈이 마시는건 밀크 커피였다. 커피들은 많았지만, 긴 이름으로 적혀있는 커피들은 딱히 손이 가질 않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이상했다.
자판기 버튼을 꾹 누른 승훈이 빨간불이 사라지기까지 기다렸다. 삑,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꺼내들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커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금세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승훈은 커피가 식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미지근한 커피가 좋았다. 너무 뜨거운 커피는 입을 데지 못했고, 너무 차가운 커피는 맛이 없으니까. 그 중간인 미지근한 온도가 좋았다. 맛도 좋고, 입술에 닿는 따뜻함이 기분을 좋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승훈은 소파에 앉으며, 물끄러미 커피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가 채연이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이상하게도 문득 커피를 볼때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는 했다. 그 질문에 대해 굳이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채연과 있을 때, 심장이 떨린 적도 보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불타오르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식어버린 사랑도 아니었다.
승훈은 그게 이 커피처럼 미지근한 사랑이라서 라고 생각했다.
두 번의 연애를 겪으면서 느낀 건, 연애가 언제나 뜨거워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뜨거우면 서로에게 다칠 위험이 컸고, 너무 차가우면 서로에게 식어버릴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이런 미지근한 연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언제나 중간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모든 게 마음처럼 되지가 않았다. 유리는 이런 미지근한 연애를 싫어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식어버린 우리 둘 사이를 뜨겁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승훈에게 선물을 사줬고, 편지를 써주며, 일주일에 몇 번은 잠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하면, 다시 뜨거워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처참했다.
승훈은 유리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행복하길 바랬다. 혼자서 애를 쓰는 연애가 아닌, 서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고 또 바랬다. 매일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면서 승훈은 점점 지쳐만 갔다.
그래서, 헤어짐을 고했다.
연애는 서로의 노력이 필요 하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 노력한다고 해서 달라 지는 게 없다는 걸 바보 같게도 이제야 알았다. 그때, 그녀와 같이 노력했다면 분명 달라졌을 사이를 그저 지친다는 이유로 포기해버렸다. 그래야만 살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채연과의 사랑은 미지근했지만, 머지않아 금세 식어버리고 말았다. 그저 힘들다는 이유로, 승훈은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기울던 마음이 땅으로 떨어지고,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서로 쌓아오던 마음과 추억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하아….”
짙은 한숨이 샜다. 승훈은 식어버린 커피를 들어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과거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울컥하는 뜨거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승훈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랑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아팠다.
‘다 너를 위한 일이야.’
이렇게 죽을 듯이 아픈데,
어떻게 그게 나를 위한 일이라는 걸까?
제자리걸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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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유지
이메일 : bizzy82@naver.com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 작가가 꿈인 최유지라고 합니다!
제가 이번에 적은 소설은 사랑을 통해 성숙해져가는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 적은 소설입니다.
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도, 과거엔 왜그랬지? 하는 후회가 생겨날 때가 많더라구요.
후회를 할때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잘 되질 않는 그런 상황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