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아웃

by 레비 posted Dec 30,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화이트 아웃 



  혓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개의 뼈를 핥는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쉴 틈 없이 혀를 놀린다. 모든 감각을 집중하면 어렴풋하게 짠 맛이, 혹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얼음으로만 겨우 축인 입안에서는 지독한 구취가 난다. 입김을 뱉을 때마다 풍기는 노린내를 견디며 나는 대원들을 바라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윌슨은 이제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다. 다들 언제 잠든 걸까. 윌슨의 옆 일찌감치 동사한 세 명의 대원들을 훑어보며 나는 살점 없는 뼈다귀를 핥는다.

  

  처음 고립되었을 때만해도 창밖으로 설산이 보였는데, 이제 보이는 건 백태 낀 혀처럼 하얀 어둠뿐이다. 애초 우리가 도달하려 했던 남극점의 중간까지도 가지 못한 채 횡단은 유보되었다. 세종기지가 있는 웨델 해에서 출발해 남극점 도달을 최종 목표로 두고 나와 각국에서 온 다섯 명의 대원들은 원정을 시작했다. 육 개월 동안 이어질 남극의 밤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원정을 마쳐야 했다.

  화이트 아웃이 일어난 것은 베이스캠프에 갓 도착했을 때였다. 블리자드라 불리는 강풍이 불고, 한 차례 폭설이 지나간 후로 이곳엔 화이트 아웃이 일어났다. 강설로 사방이 온통 하얘 어떤 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백야로 인해 원정은 점점 더뎌졌다. 혹여 햇빛이라도 섞여들면 눈도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둠의 농도가 옅어졌다 짙어지는 것으로 낮과 밤을 겨우 구분하며 우리는 원정을 이어갔다. 

  곧 남극의 밤이 시작될 예정이다. 속히 복귀 하도록. 

  전기가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교신은 이러했다. 거기 있던 누구도 장비를 챙기거나, 짐을 싸지도, 앞으로의 복귀 계획에 대해 섣불리 말하지도 않았다.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화이트 아웃이 일어난 뒤로 기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베이스캠프의 지붕은 눈 무게로 절반쯤 내려앉아 있고, 얼음이 팽창해 갈라진 창틈으로는 눈이 밀려들어 온다. 그저 䃰’밖에 없는 곳이다. 사람도, 동물도, 언어도 사라지는 곳. 소멸만이 이어지는 불모지에서 나는 머릿속이 하얘질 때까지 뼈다귀를 핥는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하얗게 표백된다.  

  

  그제는 허스키를 잡아먹었다. 레토르트와 통조림마저 떨어져 남아 있던 소금을 묽게 끓여 나눠 먹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사흘 전, 세 명의 대원이 죽고 나와 부대장인 윌슨만이 살아 있었다. 조국에서 몇 번 개를 먹어본 적 있는 나와 달리 윌슨은 개의 눈을 보며 한참 망설였다. 동조 없이 침묵하면서도 연신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며 나는 칼을 잡았다. 

  대장님, 차라리 소금물을 마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개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을 때, 침묵하고 있던 윌슨이 말했다. 그는 신실한 성도였다. 손목에 찬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잠시 코를 훌쩍였다. 

  꼬리를 흔드는 허스키의 눈동자를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오래 살아남은 개였다. 썰매개로 데려온 다른 허스키들은 일찌감치 얼어 죽었다. 잘 벼린 칼을 들고 나는 잠시 주춤대었다. 개의 푸른 눈동자에 기묘하게 일그러진 인간의 형체가 어른대고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윌슨. 내가 살던 곳에서는 다들 개를 잡아먹었거든. 그래. 다들 점심으로 개를 먹었어. 한국말로 하면 보신탕, 그러니까 스튜 같은 것. 그런 걸 먹었지.   

  손을 떨며 아무 말이나 중얼대는 나를 보며 윌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허기는 개의 그것처럼 날선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는 짖지도 않고 죽었다. 오랫동안 썰매를 끈 개의 목을 찌르며 나는 잠시 울컥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곳에서 죄책감 같은 사사로운 감정은 수신호도 없는 통신장비만큼이나 불필요했다. 

  허기가 가시자 윌슨의 얼굴에 잠시나마 혈색이 돌았다. 개의 고기는 따뜻하고, 생각 외로 부드러웠다. 미약하게나마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어 우리는 스토브에 고기를 익혔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만이 가득한 베이스캠프 안에 어떤 훈기 같은 것이 감돌아 꽝꽝 얼어 있던 창문에 금세 김이 서렸다.  

  대장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

  개의 간을 질겅질겅 씹으며 스캇이 물었다. 

  저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맥주도 마시고 싶구요. 

  점퍼 안에 몸을 파묻고 호기롭게 말하는 윌슨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었다. 굳어 있던 안면의 근육이 모아지고, 다시 펴질 때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묘한 감정이었다. 대장님은요? 한참 웃던 내게 윌슨이 물었다.

  

  나는…… 개고기가 먹고 싶네. 딱딱하게 굳은 혀를 움직여 아무도 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쏟아낸다. 윌슨도, 허스키도 가물가물 사라진다. 차가운 뼈다귀를 들고 나는 몸을 달달 떤다. 어제부터 윌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잠을 자려는 개처럼 몸을 둥글게 만다. 서늘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온몸을 쿡쿡 찌른다. 몸을 말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 얼음의 밑바닥 어디에선가 개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나는 빳빳해진 귀를 바닥에 바짝 붙인다. 조난 된 지 닷새째 되는 밤에도 비슷한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 때가지는 네 명의 대원 모두 살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막 취침 준비를 마치고 램프를 껐을 때였다. 처음에는 통신장비에서 나는 잡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으니 아니었다. 조그맣게 들리다 서서히 격렬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모로 돌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이곳저곳에서 들렸을 뿐이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마다 환한 밤이 조금씩 희미해진다. 대장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 눈이 감길 때마다 윌슨이 내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는다. 어디선가 퀴퀴한 피비린내가 난다. 끈적한 침이 턱을 타고 흐르는 듯한 환각도 함께 느껴진다. 가장 하고 싶은 것…….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아마 죽는 게 아닐까. 이대로 이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죽는 것.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이대로 죽는 것. 죽기 위해 남극점 횡단에 지원한 것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거의 이틀간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야 졸음이 온다. 마지막일까. 천천히 눈을 감는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 넘게 잔 것 같은데,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얼마나 잠들었던 건지 알 수 없다. 마비된 몸속 가득 눈이 쌓여 있는 느낌이 든다. 후우우 하아아. 아랫배를 부풀려 숨 쉬려는 노력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등과 가슴이 부드러워진다. 폐를 억지로 부풀리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숨을 들이쉬기가 괴로울 정도로 공기가 싸늘하다. 얼굴을 더듬어본다. 눈썹과 수염은 이미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다. 눈썹에 붙은 얼음 알갱이들을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통증과 함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불쑥 요의가 느껴진다. 참다 그대로 쏟아낸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아랫도리를 적신다. 온기가 거의 사라진 인간의 몸에서 여전히 이렇게 뜨거운 것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란다. 

  바지에 실례를 한 건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인데. 잠시 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본다. 수치나 모멸은 오래 전 잊어버렸다. 

  창틀에 쌓인 눈을 긁어모아 갈증을 달랜 뒤, 조심조심 여러 개의 몸을 건너 뛰어 윌슨이 누운 자리로 간다. 가슴 부근부터 천천히 더듬어본다. 예상한대로 윌슨의 몸은 차갑다. 팔뚝과 허벅지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다. 윌슨을 들어 올리려다 곧 포기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 윌슨의 점퍼라도 걸치려 했지만 이대로라면 어려울 것 같다. 행여 숨겨놓은 식량이 있을까 싶어 윌슨의 점퍼를 뒤져본다. 점퍼를 뒤져 발견한 건 은으로 만든 묵주뿐이다. 차가운 묵주 알을 하나씩 넘긴다. 

  윌슨은 작고 말랐고 말이 많은 편이었다. 가끔은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활기찼다. 

  대장님, 혹시 에우로파를 아십니까. 

  에우로파?

  네, 목성의 위성 말입니다.

  죽기 며칠 전, 개의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다 말고 그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입술이 얼어 발음이 자꾸 뭉개져 들렸다.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는 위성이라고 합니다. 듣기로는 그 두꺼운 얼음 층 밑에 바다가 있다는데, 그 바다 속에 생명체가 살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만약 그 밑에 생명체가 산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생명체는 아닐 겁니다. 왜냐면 거기는 빛이 없는 닫혀 있는 공간이기에.

  잠시 말라붙은 입술을 축이다 스캇은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얼음바다 속에 어쩌면 눈이 없는 고래가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섭식만 이어가는 그런 고래 말입니다.

  그게 스캇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유난히 짧은 대화였다. 어쩌면 그 뒤로도 며칠 더 살아 있었으니 그 대화가 마지막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한 말은 떠오르는 것이 없으므로 그 말이 마지막 대화가 되어버렸다. 에우로파와 눈이 없는 고래. 이제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이야기. 

    

  윌슨의 점퍼 안쪽으로 깊숙이 손을 넣어 몸을 더듬는다. 다행히 복부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진다. 안도하며 그를 다시 들어올린다. 윌슨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다. 몸을 굽힐 때마다 윌슨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다. 그 눈동자에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이한 형체가 비친다. 윌슨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점퍼를 벗긴다. 경직된 관절 때문에 한쪽 팔을 빼내는 것도 힘겹다. 숨을 몰아쉬며 팔을 빼낸다. 힘을 줄 때마다 한기가 감돌던 몸에 열이 퍼진다. 

  겨우 점퍼를 벗겨 낸다. 땀으로 축축했던 등이 다시 서늘해진다. 표면이 얼음조각으로 뒤덮인 점퍼 위에 윌슨의 방한 점퍼를 걸친다. 운신조차 어려울 만큼 갑갑하지만,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저절로 부딪히던 전보다는 한결 낫다. 다시 여러 개의 머리를 건너뛰어 내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누군가의 머리가 발등에 부딪힌다. 단단하고 작은 그 머리를 밟고 순식간에 넘어진다.


  꿈일까.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나는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와 마주한다. 에우로파의 두꺼운 얼음 층 밑에 산다는 눈이 없는 고래. 부력도, 중력도 미약한 그곳에서 섭식만을 이어가는 고래의 입 속으로 나는 서서히 들어간다. 

  환청인 걸까. 하얀 어둠뿐인 고래의 뱃속에서 울음소리를 듣는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그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린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뜨거운 무언가가 맺히는 것만 같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 먼 고래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는 천천히 운다. 


  벽 틈으로 파고든 얼음이 팽창해 뻐근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윌슨과 누군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패한 대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드러눕는다. 점퍼에 남아 있는 윌슨의 채취가 코를 후벼 판다. 점퍼 안주머니에 빳빳한 무언가가 짚인다. 손을 깊숙이 집어넣어 꺼내본다. 좀 바래긴 했지만 사진이다. 컬러사진이겠지만, 얼마나 만졌는지 손때가 묻어 바래고 바래 마치 흑백처럼 보이는 사진이다. 테마파크 같은 곳에 윌슨의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고, 그 가운데 아이를 든 채 환하게 웃는 윌슨이 있다. 언젠가 윌슨이 자신의 아이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를 닮아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었다. 

  곧 세 살입니다. 두 달만 있으면 생일인데 이번 생일도 같이 보낼 순 없겠네요. 

  말하며 그는 설핏 웃었다. 내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슬픈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려 윌슨을 바라본다. 파란 눈동자는 점점 뿌옇게 흐려지고 있다. 사진을 윌슨의 몸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의 생일은 지났을까. 손을 꼽아 날짜를 세다 이내 포기한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내게도 아이가 있었다. 아내도 있었다. 행복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때로 드라이브를 했고, 주말마다 함께 교회에 갔다.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아내와 어린 딸을 볼 때면, 이 가지런한 세계가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유지될 것만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날도 그랬다. 천국의 문이 가장 넓게 열린다는 크리스마스, 기상청이 생긴 이래 최대의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아이는 성탄 예배가 끝나고 실종되었다. 폭설이 그치고 사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는데, 눈이 다 녹고 신축공사 중이던 교회 부지에서 벌거벗은 채 발견되었다. 아이의 몸 곳곳엔 시퍼런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흉부에서 허벅지까지 듬성듬성 찍힌 발자국들을 나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의 몸은 냉동육처럼 찼다. 

  한동안 초등생 실종 살해사건으로 불리며 여기저기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떠들어대곤 했다. 아내가 자살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괴로워만 하다 범인이 잡혔다. 교회 소년부에서 중창단을 하는 중학생 남자아이였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긴 뭣 합니다만. 범인이 아직 미성년자고, 그 친구도 많이 반성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합의 생각을 해보시는 게……. 

  교회의 단상 아래 소년을 세워 둔 채 담당형사는 말했다. 중창단복을 입은 채 손톱을 깨무는 소년과 카메라로 소년을 연신 찍어대는 기자들을 멀거니 바라보다 그대로 그곳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전엔 생각조차 못했던 극지 횡단을 계획한 것도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눈이 먼 고래처럼 섭식만을 이어가며 극지를 차례차례 횡단할 때마다 나는 가족이라 불렀던 이들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갔다. 


  여전히 백야뿐이다. 하얗고, 하얗기만 한 세계를 올려다보며 보고 싶다, 중얼거린다. 한동안 발음하지 않아 낯설기만 한 말이다. 이제는 아무에게도 전해질수 없는 견고한 언어들이 입 안에서 둥글려지다 허공으로 서서히 흩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싶다. 되뇌다 한때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사람들이 생각나 울컥한다.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린다. 외로움엔 무뎌질 만큼 단단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눈이 감긴다. 허스키가 극점을 향해 썰매를 끈다. 대원들이 깃발을 꽂으며 헹가래를 한다. 얼굴이 까맣게 타버린 그들과 함께 환호한다. 성공적으로 횡단을 마치면 늘 그랬다시피 우리는 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눈앞이 하얗게 암전된다. 얼음 속에서 아내와 아이의 뒷모습을 본 건 착각이었을까.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천천히 녹고 싶다. 눈을 감는다. 이제야 깊게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언/ rjawjdclak9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