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마리오네트(marionette)

by 낭만주의자 posted Jan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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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마리오네트(marionette)

 

심규진

 

 

#태동: 오래된 미래

 

2층집 주택에 우린 1층이었다. 1층은 우리를 포함하여 세 가구가 살고 있다. 우리 바로 옆집 재복이네, 그리고 우리 맞은편 송씨 할머니네. 1층은 모두 월세를 내고 있었고, 송씨 할머니네가 가장 오래 사셨다. 송씨네 할머니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취업이 되지 않아 맨날 담배나 피며 집구석에서 잠만 자고 있는 신세였다. 쓰고 있는 안경이 맨날 뿌옇게 달아올라 앞이 보이는지 의심될 정도였고, 30대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래도 성격이 좋은 탓에 간혹 나에게 말을 걸곤 하는데, 나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대문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서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재복이 때문이다. 재복이 녀석은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내 말도 잘 듣고 생긴 것도 훤칠하다. 이 자식이 어른이 되면 분명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이다. 나도 왠지 녀석과 다니면 주변을 기분 좋게 의식하며 신나게 쏘다닐 수 있다.

 

내가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할 때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면면히 깨닫고 있었다. 나는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나처럼 살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아주 오랫동안 했다. 매달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의 일부는 주인집에 상납을 하고, 치킨을 사먹고, 오래된 자동차에 기름칠을 하고. 그러다 돈이 남으면 수준미달인 과목의 점수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학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다 어느 날 밤이면 매우 정기적으로 소주병이 날아가 오래된 벽지와 입맞춤하는 소리(간혹 소주병이 깨지지 않고 튕겨 나와 바닥에 뒹구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더욱 힘차게 벽을 조준하여 던졌다)에 잠이 깨고, 어머니는 울고, 아버지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것이 나의 소소한 일상이었다. 어찌나 반복해서 일어나던지 이제는 내가 혼자서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 어느 정도냐면, 어머니의 감정 상태까지 완벽히 소화해서 현장을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며 배우로 치자면 남우조연상을 받을 수 있는 수준. 내가 이렇게 재밌는 환경에 살고 있을 거라고 친구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할 것이다. 아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그럼 쪽팔려서 학교를 그만둬야하니까.

 

   - 재복아, 너희 집 돼지 저금통 밑구멍으로 동전 뽑아서 오락실이나 갈까

   - 저번에는 운이 좋았는데, 이번에도 괜찮겠지 형?

   - 너는 그때처럼 망만 봐.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돼지 저금통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밑구멍이 적당히 벌어져있어 동전이 근처까지 오면 손가락을 있는 힘껏 집어넣어 한 놈씩 꺼내는 수법이었다. 한번 손가락을 넣을 때 마다 웬만하면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려고 노력했고, 간혹 지폐도 있었기에 쇠가 아닌 종이가 손에 닿으면 어린 아이 다루듯 천천히 그리고 슬그머니 녀석을 달래면서 밖으로 유인했다.

 

   - 재복아, 가자가자!


누군가 본 사람도 없었고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지만 내 가슴을 짓누르는 양심이라는 녀석이 나를 달아나게 했다. 재복이는 그저 나를 따라 질주했고, 달리는 시간만큼은 우리가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15분쯤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삼송마트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트였지만 아이스크림 냉장고 옆 구석자리에 오락기가 두 대 설치되어있었다. 나는 줄곧 비행기 게임에 빠져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동전을 넣고 비행을 시작했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미사일을 수차례 피하고, 나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아이템을 주워 먹었다. 내가 아슬아슬하게 적군의 미사일을 피해 대장을 요격하는 순간, 재복이는 탄성과 함께 손뼉을 쳤다.

 

   - 나는 형이 비행기 게임할 때가 제일 멋있어

   - 말 시키지 마, 지금 초 집중 상태야

 

내가 세운 최고 점수 기록을 깨려는 찰나, 내 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다.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어찌나 가슴 찡하고 허무하던지. 다시 저금통 속에 돈을 가져다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내가 비행기 게임할 때만큼은 무언가로부터 제약 없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열심히 한 만큼 미사일도 강해졌고, 필살기 무기인 폭탄도 보너스로 주어졌다. 동전 100원만 넣으면 차별 없이 세상을 누빌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했고, 걱정이 산더미인 우리 집 공기와는 사뭇 다른 상쾌함을 비행 내내 맛볼 수 있다. 마치 광활한 대지에서 말을 타고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재복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 , 배고픈데 우리 컵라면이나 사먹을까?

   - 그래, 아이스크림도 같이 사서 놀이터에 가서 먹자

 

재복이네 어머니는 이혼하셨는데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일주일에 두 번은 낯선 남자가 재복이 집으로 찾아왔고, 그는 택시운전사인지 늘 노란색 유니폼을 입은 채로 재복이에게 만 원짜리를 두어 장 쥐어주곤 했다. 재복이는 딱히 싫지 않은지 감사하다며 날름 돈을 받아서 나에게 놀러가자고 달려오곤 했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나는, 그런 재복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터졌다. 아버지 없이 살아갈 재복이의 앞날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양아치인지 택시운전사인지 알 수 없는 그 아저씨도 왠지 모르게 싫었고, 재복이 어머니도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냥 재복이가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떨어진 만 원짜리에 마음이 설레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나를 사는 것인지 돈이 나를 사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재복아, 형이 커서 부자 되면 우리 같이 미국에 놀러가자. 거기는 모두가 평등하대

     대한민국도 민주주의 국가 아니야? 그럼 여기도 모두 평등해. 비싼 돈 주고 미국까지 갈 필요 없어

           - 재복아, 거기는 진짜 평등해

 

 

#해석: 재복이 생각

 

명환이형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생각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같이 있을 때도 한번 씩 먼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하소연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봐야 고등학교 2학년생인데 형은 뭐가 그리도 걱정과 고민이 많은지. 아무래도 고등학생이 되면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수준보다 확실히 어려워지나 보다. 특히 나는 수학에 약한데, 고등학교 가서 절절맬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그만 피터팬처럼 나이를 멈추고 싶다.

 

   - , 어젯밤에 형네집 무슨 일 있었어? 시끄러운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리던데

   - 나는 세상모르고 잤는데, 아마 부모님께서 싸우신 것 같네. 늘 그랬듯이

   - 역시 어른들은 생각이 각자 뚜렷해서 의견충돌이 종종 있는 것 같애

-            그럴수도 있고, 한쪽이 병에 걸린 것일지도. 근데, 부모님이 싸우면 고스란히 그 잔해는 자식이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부모님은 모를 거야. 아마도. 절대로.

   - 병에 걸렸다고? 다투시면 우리가 받는다고?

   - 재복아, 공터에서 공 던지기나 하자

 

형은 늘 어려운 말을 던져놓고 말을 돌려버린다. 자기가 무슨 시인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형이 좋다. 뭔가 나보다 똑똑한 것 같고, 나를 진심으로 챙겨주는 느낌을 늘 받기 때문이다. 형 때문에 내 삶이 어쩐지 풍성해진다고나할까. 한 번씩 나쁜 짓을 일삼는 일에 동참시키지만 나에게는 매우 쉬운 일만 시키기에 그 또한 즐겁다.

교과서에서는 잘못됐다고 지적할 일이지만 나의 일상에서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소소한 놀이일 뿐이다.

 

오늘은 엄마가 밤늦게까지 놀고 와도 된다고 했다. 내일까지 제출할 숙제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재복이형이랑 삼원빌딩 옥상에 놀러간다. 그곳은 우리 동네가 한 눈에 보이는 유일한 곳이며, 재복이형이 경비 아저씨와 친하기 때문에 우리를 늘 반가운 인사로 맞이해주신다. 아저씨는 늘 야간에 근무하시기 때문에 밤 8시에 가면 정확히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해줄 것이다. 빌딩에 놀러갈 때마다 재복이 형은 어김없이 박카스를 한 병 준비한다. 그러면서 늘 나에게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세뇌시킨다. 내가 보기엔 마음씨 좋은 아저씨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두고 형과 나의 성격차이라고 해야 할까.

 

   - 재복아, 혹시 마리오네트(marionette)가 뭔지 알아?

   - ? 그게 뭐야? 영어단어야?

     체코 프라하라는 곳에서 시작된 건데 인형을 실로 매달아 사람이 조작하면서 펼치는 인형 연극 같은 거야.

             인형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인간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행동하지. 때로는 춤도 추기도 해.

   - , 그거 티비에서 본거 같애.

     티비에서 봤겠지만 난 현실 속에서 늘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거든.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난 그 분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

   - , 형 그 마리오네트라는 인형 산거야?

 

형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를 알 수 없는 미소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쓴 시라면서 혼자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정해진 발걸음 나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숱한 가시가 온 몸을 향해 오지만 하나도 피할 수 없는 내가 맞이한 찰나

길거리를 헤매는 고양이는 언제쯤 집을 찾을 수 있을까

오늘도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서는 시간이 두려웠다

세상의 수많은 빛이 나를 향해 반짝이는 날을 기다려본다

내 손과 발 그리고 머리가 진짜 내 것이 되는 날에 빛이 보이리라

 

 

#숨소리: 거친 평화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귀가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볼 일이 있다고 한 저녁이었다. 혼자서 티비를 보다가 바닥을 뒹굴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형광등 주위로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그 와중에 형광등을 뚫고 속으로 침입한 벌레들의 도전정신에 감탄하며 침투 원리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조아려도 알 수 없는 벌레들의 묘기에 흥미가 떨어져갈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명환이 있는가?

   - ? 누구세요?

   - 나야, 순칠이. 시간되면 잠시 이야기나 할랑가?

 

힘껏 문을 열어젖히자 송씨네 할머니 아들, 순칠이형이 환한 미소를 한 채 맥주 한 병을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앉으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취기에 지배당한 순칠이형은 신발장 앞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맡기고 슬그머니 맥주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맥주 컵을 꺼내더니 힘차게 들이 붓기 시작한다.

 

   - 내가 오늘은 술이 땅기는 날이네 그려

   -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          - 하루하루 사는 게 일이지 뭘. 이러다가 평생 엄니의 짐이 되는 건 아닌지. 명환이는 아직 어려서 좋겠구먼. 나도 그때는 남몰래 간직한 꿈이라는 게 있었는데 말이여

           - 저도 똑같아요. 하루하루 쳇바퀴의 연속이죠.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기 보단 잠자리에 몸을 맡긴 시체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 처럼 이 나이 먹도록 시체처럼 지내면 정말 죽어버린 느낌이여. 나는 숨 쉬고 있는데 왜 세상은 날 죽은 사람 취급하는가 몰러.

 

순칠이형은 연일 한숨을 내쉬며 비련의 주인공처럼 혼자서 맥주를 마셔댔다. 그러다 갑자기 어머니께 효도한 적이 없다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안경 렌즈가 짜디짠 눈물방울로 뒤범벅되고, 양 미간은 찢어진 종이마냥 구겨진 채 흐느끼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컵에든 맥주마저 가늘게 요동쳤다. 마치 밤바다의 서늘한 파도랄까. 서른 살을 넘겨버린 남자가 고등학생 앞에서 우는 심리는 무엇일까. 나는 사람을 살리는 심정으로 형에게 있는 힘껏 온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온기(溫氣). 육신까지 닿지 않는 마음을 녹이는 따뜻함. 그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평화를 찾아갈 때쯤 남아 있는 맥주는 오줌이 되었다.

 

나는 순칠이형처럼 남몰래 꿈을 간직한 적이라도 있었는가.

 

 

#일상: 보이지 않는 검은 선()

 

오늘도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곧장 집에 오면 여유 있는 망상을 할 수 있었다. 교복에 가지런히 붙어 있는 명찰이 보기 싫어서라도 얼른 집으로 달려가는 내 마음을 몇몇 친구들은 안다. 그러다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현관문 유리로 보이는 실루엣을 감상해보자니 익숙지 않은 의문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누구세요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부모님이 계시냐는 말을 먼저 듣게 되었다. 평소에 반항적인 성격이기에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대답하지 않고,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게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친구라고 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메마른 체형이었다. 학교 선생님과는 확실히 다른 인상이었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입이 삐죽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무언가 화난 상태 같았다. 그 뒤에 있는 덩치 큰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벙어리인가 싶어서 얼마 전 특별활동 시간에 배운 수화라도 해볼까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힐끗 눈길만 주고, 나와 대면하고 있는 사내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어머니께 배운 예의범절대로라면 우리 집을 방문해주신 어른들에게 차라도 건네야 했지만, 고등학생인 나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기분 나쁜 기운 때문에 문전(門前)에 서서 방어태세만 취하고 있었다. 메마른 사내는 내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행동을 취하려 했고,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머리로 착륙하는 사내의 손을 노려보았다. 마치 중학교 시절 자연과학 시간에 돋보기로 나뭇잎을 태우듯 내 눈으로 마른 장작 같은 그의 손을 태우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을 때는 정수리에서 뒤통수를 거쳐 목덜미로 내려와야 정상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정수리에서 내 이마를 거쳐 양미간까지 빗자루 숱 고르듯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라운드 티셔츠 중앙에 매달려 있는 선글라스에 비친 나의 형상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는 참지 않고,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부모님 계실 때 다시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재빠르게 들고 와서 그들의 면상(面像)을 저장해 두고 싶었지만, 삽시간에 그들이 떠나버렸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일순간 동네 친구들 아니 명환이라도 불러서 저 녀석들을 혼내주고 싶은 정의감에 불탔지만, 이내 참기로 했다. 괜히 귀찮기 때문이다.


 

#상상: 마음에 요동치는 희망의 선()

 

내가 오후에 겪은 이야기를 아버지께 해드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밤 소주 한 병을 드시며 하루를 정리하시곤 하는데, 오늘은 세 병째 소주를 드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쯤 아버지께서 먼저 집에 누군가가 찾아오거든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밖에서 경찰관이라고 말해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하시는 거 보면 우리 가족이 아무래도 꼭꼭 숨어있어야 하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라고 박력 있게 대답했고,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은 그냥 말씀드리지 않았다. 내가 의심 없이 문을 열어버렸다는 실수가 혼날 것 같기도 했고, 괜히 좋지 않은 일을 말씀드려서 곧 있을 아버지의 꿈나라 여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괜히 나만 손해 볼 것이라는 엄청난 계산속에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밤은 정말이지 벽을 향해 날아가는 소주병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드시는 소주잔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후에 만난 메마른 사내의 선글라스에 비친 내 모습을 연상케 했다. 선글라스의 내 얼굴은 코를 중심으로 얼굴 중앙이 돌출된 모습이었고, 소주잔의 내 얼굴은 얼굴 전체가 사정없이 흔들려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흡사 유령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두 모습 모두 기분 나쁜 형상이었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날이 미치도록 창창한 고등학생인 내 삶에 왜 계속 누군가 훈수를 두려는 것일까.

 

   - 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 (사람들 말에 속지마. 넌 그저 열심히 일할 의무만 있어)

   - 나도 언젠가 행복해질 거야

   - (보이는 게 전부야. 너무 상상하지마)

 

뉴스에서는 연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빚쟁이에게 쫓겨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이야기, 빈부 격차가 역사 이래 최고라는 야이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긴 하루였다고 생각하면서 이불 속에 고단한 몸을 맡긴다. 눈을 감자 하루의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갔고, 일순간 어둠만이 남았다. 어둠 속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니 내 얼굴의 윤곽이 나타났다. 분명히 내 얼굴이다. 약간은 달걀형 얼굴에 찢어진 눈, 숨쉬기에 딱 알맞은 크기의 콧구멍, 솜털에 가까운 나의 소중한 수염, 그리고 학생으로서 부족함 없는 단정한 머리. 오히려 어둠에 비친 내 얼굴이 빛나 보였다. 물론 채색(彩色)이 필요하지만, 이것은 차차 살아가면서 채워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뒤로한 채 함박웃음을 짓고 잠을 청해보았다.

 

내가 잠든 날 밤,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운명: 거스를 수 없는 도면

 

잠겨버린 문 앞에 서서

천국을 갈망 한다네

두드릴수록 멀어지는 일상의 계획

 

라디오에서 존 케이브(John Cave)천국의 소리(sound of heaven)’가 들려온다. 이전에 몇 번 들어본 곡인데 가사는 기억나지 않아도 음정의 애절함이 늘 가슴에 남는다. 오늘은 재복이와 함께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볼 셈이다.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둔 상근이에게 몇 달 전부터 부탁해서 겨우 빌려낸 것이다. 상근이의 말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이미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고 한다. 상근이의 과장을 감안해서 듣더라도 난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내 오른손에 3D 프린터로 만든 총기를 버젓이 들고 있다는 것을. 영국에서는 이 총을 데스티니 건(Destiny Gun)이라고 부른다는데 정말 세상이 많이 발전했나 보다. 글자를 인쇄하던 프린터가 이제 총기를 제작한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 , 하얀색 총 어디서 났어? 새로 나온 모델이야?

   - 재복아 이건 비비탄 총이 아니야. 우리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아니라는 거지

     에이, . 누가 봐도 플라스틱 장난감 총인데? 그리고 형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놀던 거 보다 멋있지 않아.

 

어디를 겨냥해야할지 몰랐다. 지금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이곳에 서 있게 한 누군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현기증이 나에게 손짓하기 시작할 때쯤 나는 재복이와 함께 삼송마트까지 뛰어갔다. 안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오락기 앞에 말없이 앉았다. 재복이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면서 나와 같은 시늉을 하고 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데스티니 건을 꺼내어 오락기를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 끝자락에 집게손가락을 걸어본다.

 

   - 이게 누구야, 명환이 아니니

 

평소에 눈인사만 주고받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말을 건네 온다. 하필이면 이럴 때 긴장을 흐르게 만들어버리다니. 우리는 분명 악연임이 틀림없었다. 총에 묻은 식은땀을 닦아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재복이는 뭐가 좋은지 아주머니에게 헤벌쭉 입을 벌리고 필요 없는 대답을 연발하고 있다.

 

   - 재복아, 이만 집으로 가자.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재복이랑 맛있는 거 사먹어. 늘 챙겨주지도 못하는데 이럴 때 용돈이라도 줘야지

   - 아니, 괜찮습니다. 저희도 돈 있어요

   - 부담 갖지 말고 받아도 돼. 자식 같아서 그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 거절은 했지만 끝내 받아버린 5만 원짜리 지폐. 이 돈이면 라면이 몇 개이고, 아이스크림은 몇 개이던가. 오락 또한 실컷 하고 지겨워서 일어날 수 있는 큰 금액의 돈이었다. 이 돈으로 재복이와 함께 자장면과 탕수육을 실컷 먹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아니 상상까지 이미 해버렸지만, 나를 묶고 있는 굴레를 끊어버리기로 작정하고 욕심을 향해 데스티니 건을 발포했다. 한껏 도도하게. 어설프게 당긴 방아쇠 덕분에 5만 원짜리 지폐는 비스듬히 찢어졌고, 뒤편에 위치하고 있던 나의 유일한 즐거움인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것이 나의 미래이자 운명이라는 것은, 세상에 강제로 태어나 산부인과 병동의 인큐베이터에서 호흡을 가다듬을 때 이미 정해졌다.


몸부림쳐도 몸서리칠 것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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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심규진

연락처: 010-4198-6458

메일: zilso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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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책에 둘러싸여 온종일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한 단어를 음미하고 한 문장을 지나치게 곱씹으며, 작가가 의도했던 개연성에 또 다른 새싹을 돋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을 기다릴수록 외로움만 더해져 갔기에 이제는 용기 내어 읽고 힘차게 자판을 두드려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