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밤이었다. 자는 줄 알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뒤늦게 자는 척 하려고 했다.
“안 자는 거 알아.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정말 중요한 거야.”
나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우선,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부터 하자. 손가락 걸어, 빨리! 진짜 화내지 않는 거야.”
그는 아쉬운 소리를 할 때 마다 꼭 그런 식으로 운을 뗐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에 넘어가주는 법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가 억지로 손가락을 걸려고 해서 팔짱을 껴야 했다. “안 돼. 싫어!” 나는 필사적으로 내 손가락을 지켰다. 뭐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알몸으로 몸싸움을 하고 간지럼 태우다가 자리까지 바꿔 누웠다.
“화낼지 말지는 듣고 결정해야지. 말하기 싫으면 그냥 자자.”
내 말에 그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어둠속에서 속삭였다.
“우리, 같이 살자.”
뜻밖의 제안에 나는 재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너랑 같이 살고 싶어.”
그가 말했을 때 우리는 서로가 아닌 낮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사는 옥탑은 천장이 턱없이 낮고 창문이 작아서 가장 꼭대기 층인데도 지하에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홀로 지내기에도 비좁은 방이었다. 나는 그에게 진심인지를 물었다. 외로움이 많았던 나는 그 제안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원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겁하게도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
“정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깼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나는 실내에서는 흡연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도 알아야 했다.
“어디 가?”
“옥상에서 담배 피우러.”
“같이 가.”
“밤에는 쌀쌀하니까 외투 입고 나와.”
그는 속옷에 외투만 입고 밖으로 나왔다.
“참, 월세 반은 낼 거지?”
그 말은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일주일 만에 고시원을 정리하고 옥탑으로 이사 왔다. 짐은 단출하게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내가 본 캐리어 중에 가장 큰 것이기는 했다. 나는 그 안에 사람도 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시체는 토막 낼 것도 없이 집어넣을 수 있겠는데.”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나만 웃긴 농담을 할 때가 많았다. 그도 매일 실없는 말을 하면서 내게는 곧잘 핀잔을 주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연극 배우였다. 그래도 꽤나 이름 있는 극단의 막내였는데, 고졸인 그는 연기를 배운 적도 없었고 연기로 돈을 번 적 또한 없었다. 극단에서 행사가 있어도 그는 스태프 역할을 했고, 운이 좋으면 단역을 맡았다. 단원 막내였기 때문에 수당은 없었다. 무대에서 기회가 없어서인지 그는 일상에서 연기할 거리를 잘 찾아냈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는 농담이라며 웃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어색하게 굳은 내 얼굴을, 엉뚱하게도 그는 웃음을 참는 표정이라고 받아들였다.
너무 많이 속아서 나중에는 그가 진실을 고백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십대 중반이면 이제 막 제대했을 시기였는데 그가 군 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너는 군대 이야기 안 좋아하나보네.” 내 말에 그는 자신이 해병대 출신이며, 몇 사단에서 어떤 보직을 맡았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여자들은 군대 이야기 싫어하잖아. 그래서 안 했지.” 처음에는 그에게서 해병대 특유의 연대감과 소속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해서, 그를 조금 특이하다고만 여겼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자신이 해병은커녕 군 생활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황당해하자 여건이 되면 해병대에 지원했을 거라고 변명했다.
어느 날은 그가 “네 부모님이 날 보면 뭐라고 할까?” 묻기에 “글쎄. 별 말씀 안 하실걸.” 대답했다. 그래도 그가 믿지 않아서 말을 덧붙였다. “내 고집이 세서, 어머니가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말했어. 네가 외눈박이를 데려와 결혼한다고 해도 아무도 널 말릴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설명한 다음 날, 그는 자신의 왼눈이 불구라고 고백했다. 그제야 그의 왼눈이 약간 푸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선천적 백내장으로 한쪽 눈이 실명된 채로 태어났다. 그것이 군 면제 사유라고 했다.
그를 만나고서야 나는 교통을 이용할 때, 일반적인 교통카드와 우대용 교통카드의 소리가 다르게 난다는 것을 알았다.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부정승차를 검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지하철에서 나오다가 역무원이 그를 가로막으면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고 앞서 걸었다. 그동안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장애를 증명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 옆에 왔다.
사실은 유치하게도, 그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와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내가 아무도 말릴 수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외눈박이, 혹은 애꾸로 비유했었다. 실제로 어머니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아 출신인 어머니는 “나한테는 가정이 없어.” 말하는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하면 한숨을 쉬며 말을 끊었다.
“걔 이야기는 그만해.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나도 사랑해야 하니? 그리고 너 이제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나이는 지났어.”
회계사인 어머니는 계산에 밝고 합리적이어서 항상 내게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걔는 너보다 어리지만 너보다 더 계산적이고 현실적일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생각해 봐. 널 만나서 그 남자애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던 그는 내게 준 것도 없었고 줄 것 또한 없었기 때문에 언제든 쉽게 돌아설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다가도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지면 연락을 해왔다. 그는 늘 불행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제나 존재했다.
무대 조명 스텝을 하다 해고당했어, 내 눈을 고치지 않고 방치했던 아빠가(“태어나자마자 수술했다면 내 눈은 멀쩡했을 거야. 그깟 백만 원이 아까워서 나를 병신으로 살도록 내버려 뒀어.” 라고 그는 여러 번 술주정했었다.) 뻔뻔하게 생활비를 요구해, 나를 짝눈 새끼라고 부르는 누나가 새벽에 또 술 마시고 전화했어, 초등학교 때 이혼하고 사춘기 때 얼굴 한 번 안 비쳤던 엄마가 저번 달부터 이유도 없이 자꾸 연락해, 작년에 생긴 새엄마는 아빠를 무시하고 작년에 생긴 여동생들은 나를 무시해, 술자리에서 처음 본 연극 선배는 내가 예의가 없다면서 얼굴에 맥주를 뿌렸어, 며칠 밤 헤어진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술 취한 그가 새벽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빈 적도 있었다. 그는 우는 소리를 내며 모두 미안하다고, 자신이 모두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 주 후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었다. 나는 지쳐서 그가 불행하든 행복하든 상관 안 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동정하는 일이어서, 나는 그가 단지 사랑을 받지 못해서 내게 못되게 행동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직전에도 그는 내게 연락했다. 크리스마스에서 이틀이 지나면 그의 생일이었다. 그는 그 나이가 되도록 생일을 특별하게 여기는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당장 곁에 있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생각났던 모양이었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 겸 생일 선물로 두툼한 외투를 사 주었다. 그는 겨우내 검은 점퍼 하나만 입었는데 낡고 빛바랜 것은 둘째 치고 담배 쩐 냄새가 안까지 배어있어서 신경이 쓰였었다. 외투, 저녁식사, 술값, 모텔비 모두 내가 계산했다. 다음날 나는 먼저 일어나 씻고 객실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당황해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악몽 꿨어?” 그는 울고 있었다. “괜찮아. 꿈이야.” 그는 잠결에 고개를 끄덕이다 금방 잠에 들었다. 낮에는 호텔에서 서빙을 하고 밤에는 무대 장치를 옮기며 일했던 그는 휴일에 잠들면 열 시간 이상을 기절한 듯 잠만 잤다. 나는 그가 깨우거나 기다리지 않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그는 또 몇 달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와 헤어졌다고 해서 내 일상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구토했지만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혼자서도 꾸준히 글을 쓰며 내 할 일을 했다. 그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배우였고 나는 등단하지 못한 소설가였다. 집에서 독립한 후 나는 청탁받은 리뷰를 쓰고,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하고, 편지를 대필하고, 앱 게임 시나리오를 썼다. 그것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아서 무대 뒤에서 스태프로 일하거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평범하게 직장을 갖고 규칙적으로 생활할 자신은 없었다. 문과 출신의 내 기준에서는 다른 어떤 직업을 가져도 푼돈밖에는 벌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전공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것은 내 글도 아닌 작업에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것 같아 꺼려졌다.
내 가난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 겨울을 싫어하게 되었다. 올 초에는 기침을 많이 했다. 기침 때문에 잠을 설쳤고, 목 안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당시 대학로의 문예학원에서 사무보조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기침이 심하다는 이유로 열흘 만에 해고당했다. 원장은 내 건강이 걱정되어서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날 내쫓다시피 집으로 돌려보냈다. 기침이 심했지만 단순히 목감기라고만 생각했지, 보일러 폐가스가 옥탑 안으로 들어온 게 원인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월세가 낮은 만큼 아쉬운 점이 많은 방이었다. 한 번은 수도가 얼어서 아래층에 사는 주인집에서 샤워를 한 적도 있었다. 추위가 지긋지긋해서 온도를 높이고 지냈더니 그 관처럼 좁은 옥탑의 가스비가 10만원 가까이 나왔다. 또 내 우울증은 계절을 타는 편이어서, 겨울에는 하루하루가 고비처럼 여겨졌다.
우울증은 내가 독립을 결정하게 된 계기였다. 일반적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정신과 의사도 최대한 내가 혼자 생활하는 상황을 피하길 권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거의 격일로 폭음을 했는데 주사가 심했다. 고함을 지르고 주변 사람들을 부당하게 원망하고 방바닥에 침을 뱉었다. 자해하며 소리 내어 울기도 했는데 정작 나만 내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격일로 금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체력적 한계 때문이었다. 만취한 다음 날에는 밤 열 시까지 구토하느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새벽부터 토해서 나올 것이 없었는데도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났다. 동생은 질린 얼굴로 말했다. “누나, 물 좀 그만 마시라니까. 계속 토하고 싶어? 변태야?” 자해는 한 번 시작하면 습관이 되었다. 담뱃불로 지져 생긴 화상이 흉하다는 이유로 다리미로 화상자국을 이은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내게 행복해질 의지를 가지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힘을 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했다.
“네가 불행해서 온 가족이 불행해. 네 엄마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 말을 비난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부모님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서울에서 혼자 살기로 결정한 나는 월세가 싼 연신내 옥탑으로 짐을 옮겼다. 자존감을 찾기 위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부모님이 보낸 용돈을 돌려주기도 했다. 사실 독립을 결심한 것은 마음껏 우울해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내가 그 비좁은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부터 잘못이었다.
“나는 네가 또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 같아.”
내가 어떤 가능성을 말하면 그는 “또, 또. 소설 쓴다, 또.” 말하며 혀를 찼다. 내가 잠들기 전 항우울제를 먹을 때면 그는 다 소용없다고 말했다. “나도 다 해봤어. 약을 먹어도 상담을 받아도 똑같아.” 그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그는 내 우울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이해했다. 자기만의 불행에 집중하는, 환자 특유의 무심함이 편했던 것 같다. 나는 매끈한 손목을 가진 사람을 볼 때마다 그가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고 매도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불행의 종류가 달랐을 뿐 그는 나와 동류였다. 우리는 앞날에 대한 계획보다는 자살을 더 쉽게 생각했다. 거의 매일 밤을 술에 의존했으며, 취하면 눈앞의 상대를 원망하고 폭언했다. 가끔은 서로 손찌검했다. 두 사람 모두 지난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는 아침에 속옷을 입으며 전날 일을 묻고는 했다.
“우리 어제 했어?”
그러면 나는 이불을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우리는 돌아가면서 잠을 설쳤는데, 같이 설치거나 같이 잠드는 일은 드물었다. 대화를 할 때에는 경쟁적으로 자신의 불행과, 불운과, 악몽에 관해서 말했다. 나는 3년 전 죽은 기니피그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기니피그는 꼬리가 없는 큰 애완용 쥐다.) 내가 키우던 기니피그는 평생 피부병을 앓아서 털이 빠지거나 혹이 자란 자리에 매일 약을 발라줘야 했다. 2년 반을 그렇게 키우다가 3년 전에 집 근처에 묻어주었다. 그 녀석을 장롱 안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날 보자마자 한쪽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데 반갑다기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컸다. 몸집은 이전보다 자라 있었지만 여전히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더 악화되어서 한쪽 얼굴 가득 혹이 생겼고 심지어 왼 눈은 실명된 것처럼 보였다. 급한 대로 서랍을 뒤져서 삼 년 전 쓰던 약을 꺼내 발라주었다. 그러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닦던 나는, 그 짐승에게 약인 줄 알고 발라준 것이 목공용 본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새벽이어서 동물 병원도 열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통장 잔액은 이만 원이 조금 넘었다. 거실에서 쥐가 얌전하게 몸을 웅크린 채 나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소리 내어 울다가 잠에서 깼는데 그는 이미 출근한 후였다.
물론 우리가 악몽만 꾼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는 우습고 황당무계한 꿈을 많이 꾸었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품위 없고 천진하게 웃을 때면 그가 내 남동생처럼 느껴졌다. 그는 나와 함께 빵을 고르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빵집을 둘러보다가 괴상한 신제품을 발견하고는 둘이서 한참을 살까 말까 고민했다고 했다.
“처음 보는 빵이어서 맛이 상상이 안 되는 거야. 이름이 ‘광어회빵’이었어.”
그것이 기발하다면서 창업 아이템으로 좋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그가 소리 내어 웃어서 나도 같이 웃었지만 그 꿈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만큼 웃기지도 않았고 납득이 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빵 안에 회가 있는 거야? 반죽 속에 회를 넣고 빵을 구운 건가? 아니면 완성된 빵 위에 초밥처럼 회를 위에 얹은 거야?”
“초밥 같은 건 아냐. 그냥 평범하게 생긴 빵인데 광어회빵이라고 적혀있었어.”
“이상한데? 오븐에 들어갔는데 안 익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익으면 더 이상 회라고도 할 수 없고. 슈크림처럼 회를 갈아서 안에 집어넣은 건가? 아니면 빵에서 광어회 맛이 나나?”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웃었다.
“몰라. 말이 안 되는데 우리는 계속 고민했어. 살까, 말까. 아니면 다음에 월급 들어오면 살까.”
우리는 “월급이 들어오면” 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월급 들어오면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 먹으러 가자.” “월급 들어오면 옷 사줄게.” “월급이 들어오면 저 장롱 좀 바꾸자.” “월급이 들어오면…….” “그만하자. 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몇 백 버는 줄 알겠어.” 우리는 돈이 들어오기 전부터 쓸 궁리를 했다. 그러나 내 월급은 대부분은 월세와 생활비로 나갔다. 취미로 읽을 시집이나 소설책은 고사하고 옷이나 신발을 살 돈도 없었다. 그의 경우는 더 심했다. 아버지의 허리 수술비를 갚고 남은 돈은 정기 적금으로 나가서 잔액이 담배 한 갑 살 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계좌이체나 현금으로 용돈을 주고는 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었는데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라기보다는 관성의 한 종류처럼 여겨졌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극장에 남았지만 그것 외에는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가시간에 핸드폰 게임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잤다. 연기나 연극을 위해 공부하거나 고민하는 것도 본 적 없었다. 술을 마시면서는 자기가 정말 연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연기를 배우지 못해서 오디션을 볼 엄두도 안 난다고도 덧붙였다. 어쩌다 단역을 맡게 되어도 대사가 줄었다. 그가 대사를 잘 못 외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암기력은 근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재능이나 요령이라고 여겼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했지만 그를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무대 스태프를 하면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공연 쪽에서도 학연은 중요했다. 유명한 연출이나 배우는 대학에서 강사나 교수였다. 그들은 신인 배우를 보면 꼭 출신 학교를 물었다. 영향력 있는 사람과 알고 지내는 것은 다음 작품에도 도움이 되었다. 공연 스태프들도 전공 관련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배우나 배우 지망생들이 많았다. 스태프를 소개할 때에도 어디 학교, 누구 제자, 혹은 누구 딸 하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들끼리는 선후배 사이에 지켜야 할 것들이 엄격했지만 비전공자인 나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나는 찾아가며 인사한다기보다는 보이면 인사했고, 내게 인사하지 않으면 나도 굳이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극장 밖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관객석 뒤에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거나 누워서 책을 읽었다. 그는 나와 사정이 달랐다.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하고, 비위를 맞추고,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연극계 선배들을 도왔다. 그러나 보답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아서 자주 분노하고 눈물 흘렸다. 그러다가도 연락이 오면 웃으며 준비된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것이 비굴하다고 여겨 속으로 그를 한심하게 여길 때가 많았다.
그에 대해서는 일기에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너무 초라하고, 낡고, 신파였으며, 결론이 예상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것을 쫓으면서도 동시에 경계했다. 그가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 떠나있을 때, 아버지가 전화로 “이제 이 사람이 네 엄마다.” 하고 낯선 여자를 바꿔 소개해 준 이야기라든지, 고시원에서 지낼 때, 독감과 장염을 동시에 걸려서 편하게 잠도 잘 수 없었는데 연락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변기에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팠지만, 곧 그것을 글로 옮기면 얼마나 촌스러울지 가늠해보았다. 그와 내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뉴스를 보면 일억 원은 돈도 아니었는데 그는 고작 백만 원이 없어서 한쪽 눈을 잃었다.
극적인 반전 없이 우리는 이별했다. 우리는 가난하고 우울해서 만났지만 같은 이유로 헤어졌다. 그와 함께 살면서 나는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혼자 생활할 때에는 술과 담배를 살 돈이면 충분했다. 식사는 편의점 샌드위치나 시리얼로 저렴하고 간편하게 해결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내 생활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낮에는 무대 뒤에서 스태프로 일하고 밤에는 바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그는 내가 바에서 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는데, 내가 보는 앞에서 바 알바를 여기저기 지원하고 면접을 보러 다녔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매일 잠만 자고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보이지?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들어. 밤늦게 일하니까 걱정도 되고.”
그가 그런 말을 하면 울다가도 헛웃음이 나왔다. 바에서 번 돈으로 우리는 외식을 하고 술과 담배를 살 수 있었다.
앞날이 막막했다. 쉬지 않고 일했지만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없었다. 용돈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쉬운 소리를 하는 그에게 나는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바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취해 자고 있었다. 그가 아르바이트 하는 나를 마중 나오기로 했던 첫 번째 날이었다. 그에게서 술 냄새와 양파 냄새가 났다. 저녁을 먹지 않았던 나는 냄새에 더 예민해져 있었다. 내가 준 용돈으로 국밥에 소주를 먹고 잠들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다. 나는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몇 없는 그의 짐들을 책장에서 꺼내어 던졌다.
“더 이상은 안 참아. 넌 나를 이용하고 있는 거야. 천장이 낮다느니 수압이 약하다느니, 방세는 한 푼도 안 보태면서 불만만 많지. 날 돈 안 드는 창녀쯤으로 생각하지?”
그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게 한숨을 쉬고는 주섬주섬 내가 던진 짐들을 챙겼다. 천장이 낮아서 그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그가 말했다.
“이런 거지같은 방을 참았던 건 그래도 네가 좋았기 때문이었어. 그런 내가 정말 병신 같다. 하긴……. 나 눈 병신 맞지.”
그는 자다 일어나서도 연극배우답게 또박또박 대사를 내뱉었다.
“제발 그 놈의 눈 이야기 좀 그만 해.”
“네가 뭘 알아. 어렸을 때부터 차라리 두 눈 다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널 보면 그깟 한 쪽 눈 나도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닥치고 네 짐이나 챙겨서 나가.”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네가 정말 날 사랑한다면 이렇게 할 수 없어.”
나는 그의 왼눈을 노려보았다. 잔인하게도 나는 그가 울 때에 그의 먼 왼 눈에서도 눈물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네가 나를 버린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비통하다기보다는 불쾌한 표정을 했다.
“그래. 꺼져 줄게. 나도 네가 불행하든 행복하든 나와는 관계없어. 그런데 너 알아? 너 취할 때마다 연기하는 것 같은 거?”
그것은 내가 몇 주 전 만취한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또한 우리가 술을 마시며 함께한 모든 밤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우리가 정말로 헤어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합의 하에 이별했다. 나는 며칠 구토하고 두 번 담뱃불로 손목을 지졌지만 곧 이별을 합리화했다. 어차피 그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불행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이 싫어서 자취방을 정리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경제적 자립을 포기한 나는 더 뻔뻔해져서 부모님에게 해외에 나갈 수 있도록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겠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울음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넌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거구나.”
결국 부모님은 허락하셨다. 뜬금없는 결말이지만 ‘그래서’ 나는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다. 왜 하필 파리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꼭 파리일 필요는 없었다고 대답했다. 연고도 없거니와 불어도 인사밖에 못했다. 수긍할만한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발음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입 안에 사탕 물고 말하는 것 같잖아요.” 그 말에 프랑스인이 이상하게 웃었다.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파리에 온 이유는 꼭 파리여야 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는 농담하듯 술과 남자를 조심하라고 했다. 떠난 후에는 메일로 음주와 자해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남자가 자해로 치환된 것이 재미있었다. 그 메일을 읽을 때 나는 2유로짜리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한 달 째 매일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지만 아직까지는 자해하거나 기억을 잃을 정도로 폭음한 적은 없었다. 파리에 도착한 직후에는 어떻게 해야 인생이 재미있어질까 고민했다. 설거지를 하거나 세수하고 로션을 바르면서도 그 생각에 골몰했다. 하지만 금방 포기했다. 꼭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우울함도 그 자리를 인정하면 인생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며칠 전 비오는 밤에는 가로등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면서 한국의 시간을 계산했다. 시차를 생각하면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여전히 외롭기는 했지만 여덟 시간 전 한국에서 누군가 이미 겪은 밤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견딜 만 했다. 저 멀리 어두운 골목을 보고 있으면 크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방황하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곳은 파리였는데도 그랬다. 모두가 잠든 새벽, 그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서러워 가로등 아래서 담배 피우며 눈물을 닦았다. 한 자리에서 세 번째 담배꽁초를 버리면서는 짧게 욕을 내뱉고 다시 캐리어를 끌고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실 나는 그가 캐리어를 끄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 다만 그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그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해서 어쩔 때에는 그가 내 망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무거운 캐리어 안에 들은 것이 차라리 내 시체였다면 그의 뒷모습이 덜 외로워 보였을까? “또, 또. 소설 쓴다, 또.” 말하던 그의 억양이 기억났다. 나는 항상 나만 웃긴 농담만 생각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을 걷고 나무로 된 바깥쪽 창을 열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글을 쓰고 낮잠을 자고 다시 글을 쓰다가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창을 닫았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갔다는 생각을 하면 허무하기도 했지만 이 이상의 삶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따금 가족들과 친구들이 메일을 보내왔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많이 언급했지만 그들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야근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유행하는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심리 상담을 받기로 결심하고, 술을 마시고, 다음에 찍을 영화 시나리오를 고민하고, 애인과 다툰 후 화해하고, 정치적 사건에 분노하며, 세상이 얼마나 엉터리로 돌아가고 있는지 한탄하다가, 마감이 정해진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해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다 코미디같이 느껴졌다. 뉴스에서는 누군가 지어낸 것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 개인적인 우울과 가난에 대해서 쓰고 있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알지 못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했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내일은 파리에서도 대통령 퇴진을 위한 집회가 열린다고 들었다. 오후에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 나가기로 했다. 다녀와서 나는 또 싸구려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쓸 것이다. 자기 전에는 항우울제를 먹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내 기분을 확인했다. 가끔은 어제보다 덜 우울했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생각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소식을 확인했다. 그것도 지루해지면 침대에 누워 창을 통해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면서 창문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구름처럼, 아무것이나 무책임하게 생각했다. 오늘 오후에는 새삼스럽게 믿음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갖는 막연한 바람이나 믿음, 애정이 사이비 종교의 교리나 망상처럼 느껴졌다. 내가 괴롭혔던 남자가 떠올랐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번복했던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덜 외롭거나 덜 불행할 거라는 그 믿음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목공용 풀을 약이라 믿고 바른다고 약이 될 수는 없었다. 광어회빵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조금만 더 생각하면 발상만으로도 우스갯소리가 되는 관계였다.
그러니까 이별했다고 해서 외로움을 못 견딜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올해 겨울을 견뎌낼 것이다. 그에게는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에게 들킨 내 비열함과 이기심이, 그가 이별의 아픔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광어회빵은 내가 아닌 사람과도 나누어먹을 수 있었다. 그것에 대해 질투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방금 전에도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샌드위치를 입에 우겨넣었다. 먹다가 흘린 것들은 손으로 집어 먹었다. 종교는 없지만 때때로 기도는 했다. 그와 내가, 서로를 만나기 이전보다 더 가난해지거나 불행해지지는 않기를.
오늘도 나는 또, 또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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