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by park posted Jan 3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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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이 오면


  나는 방 안에서 나무로 된 책상 앞에 앉아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리되지 않고 널브러진 책과 유인물들, 원고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하나, 하나 그것들을 확인해 본다. 몇 가지는 내 옆에 놓여있는 상자에 밀어 담고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책상에 던져 놓았다. 스스로만 만족하는 책상 정리가 얼추 끝나고 뒤이어 갈색과 흰색이 번갈아 페인트칠 되어 있는 4개의 서랍을 열어본다. 위에서부터 필기구, 원고지,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있다. 가져갈 물건은 딱히 보이지 않아 그대로 마지막 서랍까지 닫아버렸다. 의자에 앉아 몸을 반으로 접은 채, 눈을 굴렸다. 책상 아래 뒤쪽으로 우연히 발견한 졸업 앨범처럼 검은색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를 최대한 떼지 않으려고 실로 한심스러운 자세를 취해 검은색 쇼핑백을 향해 두 팔을 쭉 폈다. 뒤통수가 거의 책상 바닥과 딱 맞았다. 마치 내 머리로 무거운 책상을 지탱한 느낌이 듦과 동시에, 뒤통수를 두어 번 내어 주고 말았다. 만약 아내가 봤다면 얼마나 웃어댔을까? 꺼낸 검은 쇼핑백은 뚱뚱한 고양이처럼 두툼하고 컸다. 안을 살펴보자 여러 작은 상자들과 공책들이 들어 있다. 언젠가 한 번 봤던 기억이 났지만, 어렴풋한 기억은 뿌연 안개가 돼 버렸다. 안개 속을 헤매볼까 고민하던 중, 방문이 열렸다. 이젠 푸석한 피부. 코 양 끝에서 옅지만 생생하게 그녀의 팔자가 곡선으로 떨어져 있다. 예전 자두같이 곱고 탐스럽던 광대는 세월과 빛이 바래 은행이 됐다. 두 눈은 물고기처럼 양 끝으로 꼬리를 달아버렸다. ! 내 모습도 그녀와 마찬가지겠지. 거울을 안 본 지도 얼마나 됐을까? 이젠 쉰을 넘긴 나의 아내가 안타깝다는 듯 그 물고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갈 시간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단단하고 무겁게 나를 누른다. 나는 그녀의 말에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옴을 느꼈다. 침을 한 번 삼키자 괜히 코끝이 찡해지며 잠깐이나마 그녀가 세 명에서 한 명이 되기도 했다. 나는 서둘러 책상 밑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상자엔 종이 쪼가리 몇 개와 책 두 권 그리고 쇼핑백뿐이다. 별로 챙긴 것이 없다는 아내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상자로부터 묵직함을 느꼈다.

 

가져갈 게 별로 없더라고.”

 

왜 그렇게 말했을까? 더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곧장 집을 나왔다. 마음속에서 아내가 창문으로 내가 가는 모습을 보며 흐느끼길 바랐다. 슬쩍 뒤돌아볼까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놀랄 것이 분명하다. 상자 속 쇼핑백 위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괜히 비가 올려나 하늘을 바라봤지만, 하늘을 어느 때보다 맑았다.

 

전철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목 근육을 풀었다. 양쪽으로 길게 초록색 바탕의 딱딱한 소파처럼 보이는 의자가 늘어서 있다. 나는 그중 문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앉은 자리 뒤쪽 창문으로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인위적인 나무 몇 그루와 갑갑했던 도심의 풍경이 보인다. 갑갑함은 도심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부터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도시가 답답하다고 느꼈다.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늘 하던 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앞에 까만 안개가 펼쳐진다. 나는 그렇게 안개 속에서나마 답답함으로부터 도망쳤다. 경춘선 열차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아침 9시의 전철은 매우 한산하다. 승객은 9명 정도. 대부분 나와 같은 나이 또래 사람들이다. 난 내 바로 앞, 문 위에 있는 노선표를 바라봤다. 합정? 김유정? 아니야. 그대로 춘천까지 갈까? 부모님은 뵙고 가는 것이 좋겠지? 노선을 따라 관광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좋은 기분전환이 될 것이지만 너무 들뜰 것 같아 나는 생각을 고쳤다. 결과적으론 강촌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뵙는 관광을 한 후, 원래 목적지인 옛 집이 있는 춘천으로 곧장 가기로 마음먹는다. 예전에 살던 춘천 집까지 가는 길에는 자주 들렸던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내 발밑에 둔 상자 위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안에 있는 공책 하나를 행여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꺼냈다. 공책에는 한 페이지마다 짧게 한 문장씩 쓰여 있다. 너덜너덜해진 종이는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듯했다. 네임펜으로 거칠게 그어진 글씨가 있는가 하면, 또 단정하게 쓴 글자, 혹은 검은 볼펜으로 정성 들여 쓴 글자도 보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공책 속 문장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툭, 툭 나에게 던져진다. 글러브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지금은 받을 수 없다. 등 뒤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저 그렇게 공책을 넘겼다. 지금 타고 있는 열차가 그저 선로를 따라가듯이. 그러다 문뜩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을 똑바로 보자. ’

 

열차가 갑자기 멈춰 선다. 멈춰 선 열차의 문이 열리고, 나는 내린다. 그랬었다는 기억이 안개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갔다. 지금 눈앞에는 보통 사람 머리 두 개 정도 들어갈 유리창 안으로 부모님의 사진이 놓여있다. 사진 액자 유리에 나와 닮은, 아내와 닮은 내가 보인다. 그 옆엔 가는 줄기를 가진 하얀 두 안개꽃이 작고 아담한 유리병 안에 담겨있다. 꽃은 동네 아주머니의 파마머리처럼 서로서로 덮어주며 생기를 내뿜고 있다. 마치 꽃가루가 바람에 몸을 맡기는 듯, 나는 이곳에 흘러들어 왔다. 솔직히 그 문장은 생각하는 것을 멈출 정도로 너무나 충격이었지만 이건 분명 아내와 늦게 헤어진 후유증일지 모른다. 이 생각이 예전 구박하던 부모님의 증상과 겹쳐지며 헛웃음이 나왔다. 조금 더 조금 더 거리며 내가 아내를 붙잡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했다.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갈까도 생각했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두렵지 않다. 아내가 날 원망하고 나로 인해 아내가 후유증을 겪어 이내 지금 내 앞에 있는 부모님처럼 될까,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맹세하건대 나는 꽃이 된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천천히 유리병 옆, 손바닥만 한 푸른 분무기를 들고 안개꽃에 물을 뿌렸다. 몇 번을 왔었지만 올 때마다 뼈가 아닌 꽃이 놓여있는 부모님의 묘소는 어색하다는 생각을 한다. 두 분은 자신들의 묘소가 그 어떤 묘소보다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겐 그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단순한 병 속 안개꽃에 불과할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발견된 것은 춘천에 있던 부모님 집 앞 공원 근처 벤치였었다. 자주 두 분은 자신들도 모르게 어딘가로 사라질 때가 많으셨다. 만약 두 분이 꽃으로 변하기 전에 내가 발견하지 못했었다면, 영영 두 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었다면 그 날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벤치 근처 모든 꽃은 다 뜯어냈었을 것이 분명하다. 부모님이 내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일이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두 분이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는 나로선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두 분은 분명 후회는 없으셨다. 나란히 벤치에 놓인 안개꽃 두 송이는 서로의 첫 줄기를 제외하고 전부 연결돼 있었다. 영원한 연인임을 알리듯, 두 안개꽃은 서로서로 풍성하게 장식해주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난 아내와 이미 헤어질 약속을 했었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두 분이 마냥 부럽기만 했었다. 아내에게 나의 부모님, 그러니까 안개꽃을 보여주자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아내를 위로해주고 싶었던 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줬었다. 아내가 미세하게 떨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는 그 감촉에 눈앞이 어지러워졌었다. 흔들리는 나의 눈에 맞춰 아내의 어깨도 함께 떨렸다. 아내는 심하게 놀라며 나를 바라봤었다. 나는 그런 아내의 눈 그리고 그 속에 나, 그 끝으로 아내가 느끼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읽었다. 분명 그 두려움은 나의 부모님에 대한 애환보다는 곧 닥칠 우리들의 죽음 쪽에 더 가까웠었다. 내가 두려움을 읽어냈었던 그 순간 아내의 두 눈은 안도감으로 변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편안한 눈과 미소를 품고 아내는 나에게 안겨 왔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천천히,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한 손으론 머리를 쓰다듬어 줬었다. 그런 내 품속에서 아내는 하염없이 울며 다시 한번 나와의 약속, 헤어짐을 약속했었다. 어깨의 떨림은 멈추고 난 부드럽게 알았다고 말해줬었다.

 

분무기를 제 자리에 내려놓는다. 또다시 떠오른 그 날의 기억이 안개 속에 버리고 온 답답함을 다시 끄집어낸다. 심란해진 마음에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한 손으로 심장 쪽을 어루만진다. 그러면서 반대쪽 손으로는 주머니 속에 있는 손수건을 꺼냈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유리병을 가볍게 닦았다. 역시 그저 안개꽃이라 생각하며 유리창 문을 닫았다. 닫힌 유리창으로 나의 모습이 비친다. 바닥에 놓여있는 상자와 이젠 허벅지 부분이 허연색을 드러낸 청바지 그리고 무릎까지 오는 낙타색 코트가 보인다. 끝으로 아내의 얼굴이 보인다. 아니 그녀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내가 심각한 얼굴로 턱을 긁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황급히 나는 내 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유리창 문 하단에 네임펜으로 적혀있는 15년이라는 숫자가 회피하던 눈에 들어온다. 오늘따라 유전되는 이 숫자가 더 마음을 무겁게 한다. 고작 15년의 만남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너무나 긴 인생에 비해 만남은 짧다. 부모님은 복도 끝쪽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늘 이곳에 오면 반대쪽 복도 끝까지 걸어보기에, 상자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꽃이 들어있는 칸이 얼마나 늘었을까? 작년만 해도 오십 칸 중 일곱 칸 외에는 전부 비어있었다. 올해는하나 정도가 늘었다. 하긴, 누구나 더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하겠지. 새로 들어온 칸 유리창 하단엔 7년이라고 적혀있다. 최단 커플이 명예의 전당에 등록됐군. 나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가볍게, ,,. 부러워서 쳤던 손뼉이었지만 이들에게 과연 충분한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하니 안쓰러워진다. 더욱더 애석하게도 이 최단 커플 옆으로 23년을 기록한 최장 커플이 보인다. 미안한 마음과 주눅 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난 최단 커플에게도 분무기로 물을 주었다. 물을 줄수록 마음은 안정이 되지 않고 계속 열차에서 봤던 문장이 떠오른다. 최단 커플의 유리창으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내의 모습이 비친다.

 

나는 열차의 문 옆 끝자리에 앉았다. 부모님 묘소에 들리는 것이 좋은 기분전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처참히 부서졌음이 느껴진다. 오히려 안개꽃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낸 답답함과 공책 속 문장이 다시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을 계속해서 짓누른다. 언제부터 거울을 안 보기 시작했었는지, 그보다 왜 7년을 만난 그 꽃을 보고 다시금 공책 속 문장을 떠올렸었는지 머리가 궁금증으로 인해 뜨거워진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다시금 눈을 감고 검은 안개 속으로 도망치려 하면, 이번엔 답답함이 몰려온다. 감지도 뜨지도 못하는 두 눈덩이가 뻐근해지고 꽉 다문 입엔 힘이 들어갔다. 내 앞으로 고통 속에 일그러진 얼굴이 아득하게 보인다. 그 모습은 아내와도 닮아있고 나와도 닮아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젊었을 때 아내와 똑 닮았다고 생각된다. 그 생각은 점점 그녀를 자세히 바라봄으로써 확신이 되어 간다. 젊은 날의 내 아내 모습을 한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 눈은 작은 귤처럼 생기와 싱그러움 그리고 단단함을 모두 가지고 있다. 나의 아내는 만남의 순간부터 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생기가 넘치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볼 땐, 항상 그녀의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이 좋았었고 그녀처럼 되고 싶었었다. 그런 생기 있는, 싱그러울 정도로 솔직한, 눈을 갖기를 원했었다. 그녀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도와줬었다는 기억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점점 세월이 지날수록 내가 그녀를 닮는 것이 아닌, 그녀가 나를 닮아가는 것이 보였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보고 있을 나의 눈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내 눈, 그저 삶의 비린내를 품고 생기마저 잃은 물고기에겐 더는 귤이란 존재는 본적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그녀가 보이고 그녀의 뒤로 춘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복잡한 척, 바쁜 척하고 있는 춘천의 모습이 예전과 별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별반 다름없는 풍경 속에 나의 모습, 그녀의 모습이 함께 있다. 열차가 곧 멈추고 문이 열린다. 나는 서둘러 일어났다. 그때부터였다. 아니 사실 아내와 이별하고부터였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 내가 아내를 만나 결혼한 순간부터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내가 안개 속과 현실 사이에서 찾아낸 것이 무엇이던, 열차에서의 고통스러웠었던 순간이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인식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인식한 것일지도 모른다. 안개 속과 현실 속 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그녀가 보였다. 분명 나와 닮은 아내였었던 그녀가 이젠 젊은, 내가 동경하던 모습의 아내로 나타났다. 그런 그녀를 보니 또다시 안개 속에서 원하지 않는 기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는 거울 보는 것을 즐겼었다. 아내의 눈과 닮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좋았었다. 그땐 아내의 도움으로 늘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이 꽃이 되기 전에, 아내와 최초의 헤어짐을 약속하기 훨씬 전, 나는 아내와 자식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부부에게서 가장 큰 결심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기한이 짧을수록 아이와 부모 사이의 만남이 적기에 더욱 신중히 해야 한다. 나는 어머니 쪽, 두 번째 재혼에서 난 자식으로 아버지와 만났었다. 나와 아내 둘 모두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3번째 재혼으로 만났었다. 자식을 낳게 되면 둘이서는 7년 정도밖에 돌봐 줄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었다. 나는 반대였었고, 그녀는 찬성이었다. 나는 고집을 부려가며 내 의견을 밀고 나갔었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확신에 차 있는 나를 보았었다. 그녀의 눈처럼 솔직하고 싱그러운 나의 모습이 보였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는 말했었다.

 

나랑 꽃이 될 생각 없잖아.”

 

그 말이 무슨 의도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말은 그대로 날아와 내 뇌리에 꽂혔었고, 나는 스스로 안개를 만들어 내어 이 기억을 그 안에 구겨 넣었다. 아내의 눈 속에서는 더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정확히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아내는 결국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했었다. 나는 내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뿌듯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계속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었다. 거울도 거의 보지 않았었다. 그 후로 그녀와 나는 별 마찰 없이 지내게 됐었다. 내가 거울을 보지 않으려 급기야 거울을 깨부수게 된 것은 그녀와 나의 눈에 똑같이 물고기 꼬리가 달리고 그때 보았었던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닮은 지금 아내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었다.

 

나는 예정대로, 앞서 부모님을 뵐 때와 같이 흘러들 듯 집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종업원이 연거푸 불러서야 정신을 차려 주문했고 가장 구석진 자리, 꺼져있는 텔레비전과 같은 벽을 마주 보고 앉으려 할 때 놀랍게도 그녀가 나의 앞에 앉는다. 나는 당황스러워 의자를 거칠게 뒤로 뺐다. 그러자 그녀도 놀라 나를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라본다. 가게에 손님 몇 명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대로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재차 두 잔이 맞는지 확인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행동에 종업원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요상한 표정을 짓고는 계산을 해준다. 커피를 받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놓고 멀어진 의자를 끌어 다시 반듯하게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반듯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녀, 안개 속에서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 빌어먹을 기억들에 대해 하나하나 물으려 했다. 그중에서도 먼저 이 카페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렴풋이 낚아 올리려 하는 안개 속 또 하나의 기억에 관해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왜 헤어지자고 했었어? ”

 

 

책상이 일순간 흔들린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우물에 꽃잎이 떨어지듯, 커피 수면에 파문이 생긴다. 그 작은 파장이 내 앞에 있는 그녀와 옛 과거의 나, 그리고 결국엔 지금의 나의 모습까지 일그러뜨린다. 헤어지자고 한 것은 너라는 절규를 뿜어내며 결국 나는 또 안개 속에 버려둔 기억을 찾고야 말았다.

 

부모님이 안개꽃이 되기 몇 주 전, 이제는 정말 부모님이 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부모님 집으로 내려왔었다.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계신 부모님을 보고 아내와 집 근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었다. 아내는 우리도 지금부터 마음을 다잡아놓아야 한다며 나의 손을 잡았었다. 아내가 내 손을 그렇게 세게 붙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었다. 나는 앞에 놓인 커피잔만을 바라보며 꽃이 되자고 아내에게 말했었다. 앞에 놓인 커피의 수면으로 나와 같이 고개를 숙인 아내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커피잔 속 아내는 고개를 계속 숙인 채 되물었다. 정말 힘들지도 모른다고, 무서울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래도 괜찮다고 대답했었다. 아내는 눈물을 참으며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헤어지자. ”

 

아내의 그 말이 은행나무 잎들이 햇빛을 받으며 떨어지듯 들려왔었다. 그때 나는 아내의 손을 놓았었다. 아내의 손에는 빨간 손 자국이 남아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었고 커피 잔 속에 내가 보였었다. 고맙다고 말하려는 내가 비쳤었다. 그리고는 말하려는 입에 그대로 들어 올려 마신 커피 수면에 물결이 졌었다. 그 물결에 나의 얼굴이 일그러져 아내의 얼굴이 됐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말했었다.

 

다 너를 위해서야. ”

 

커피 수면이 잔잔해지더니 이내 다시 물고기 꼬리를 달고 있는 늙은 내 모습이 비친다. 나는 주먹을 강하게 쥐고 책상을 내려쳤다. 헤어지자고 한 것은 너인데 왜 나에게 그걸 묻는지 그녀를 향해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나에게 소리친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지고 분위기가 적막하다. 분명 우리 둘을 구경하느라 말하는 것도 잊었음이 분명하지만 지금 나에겐 그런 것들보다 어서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내 말들을 모두 빼앗아갔다. 그녀는 꽃이 되고 싶었던 것도, 함께 있고 싶었던 것도 다 자신이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사람은 나라고 면박을 준다. 어안이 벙벙하다. 열차에서의 두통보다 더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녀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그 힘은 철저하게 부서졌고 그녀가 또 나에게 외쳤다. 너는 누구냐고.

 

나는 카페에 더는 있을 수 없음을 느꼈다. 주위 사람들이 심각성을 깨닫고 나에게 하나둘 다가와 위로를 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떠났는지 그녀의 자리에는 가게 있는 손님 중 한 사람이 메우고 있다. 나는 그들의 위로를 뿌리치고 카페를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집으로 걸었다. 집에 들어와 잠금장치를 열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엎어졌다. 들고 있던 상자의 내용물들이 그대로 내 머리맡에서 쏟아진다. 쇼핑백 속 공책이 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천천히 공책을 열어본다. 여전히 문장과 단어들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하지만 이제 알 수 있다. 머릿속에 있는 안개는 모두 걷히고 나는 맨손으로 그것들을 붙잡기 시작한다.

 

아내가 보인다. 귤과 같은 눈을 하고 있는 아내가. 그녀는 나를 나무란다. 나는 공책에 무엇인가를 적는다. 그녀가 웃으며 그게 본심이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가 보인다. 나는거울을 똑바로 보자.’ 를 적는다.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가끔 그녀가 밉다.’를 적는다. 그녀가 쓰다듬던 나의 머리를 한 움큼 세게 쥔다. 나는 망설이다가 언젠가 그녀처럼 되고 싶다.’라고 적는다. 아내가 움켜줬던 손을 풀고 내 머리를 안아준다. 그리고 그녀는 펜을 움켜쥔 내 손을 잡고 앞으로는 그럼 앞으로는 솔직해지자고 적는다.

 

눈물이 흐른다. 턱을 바닥에 대고 앞을 바라본다. 앞에는 발코니와 이어지는 창문이 있다. 발코니 안에 젊은 아내가 나와 같은 자세로 엎드려있다. 그녀도 울고 있다. 그녀를 본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고 더 못나 보일 내 얼굴을 마룻바닥으로 숨긴다. 그리고 나는 공책을 든다. 상자 속에서 내 필통을 꺼낸다. 그리고 아내를 바라본다. 공책을 피고 맨 마지막 장을 펼친다. 그리고 샤프를 꺼내 적는다. 이것으로 그녀에게 했었던 나의 행동들이 사죄되기를 바랐다. 이젠 또렷해진 나의 기억 속에서 아내와 헤어지려 할 때마다 두려워하던 내가 보인다. 떨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 누구보다 두려워하던 내가 보였다.

나는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미안함은 이미 나와 그녀의 추억이었던 이 공책 속 모서리에 뚝, 뚝 떨어져서 크게 스며들고 있다. 그녀가 보았을 나의 표정과 나의 떨림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눈을 상상하자 샤프심이 거칠게 부러졌다. 샤프심은 젊은 아내가 서 있는 창 쪽으로 날라 간다. 나는 샤프심을 따라 고개를 든다.

 

창에 비친 젊은 아내의 모습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는 아낼 보고 싶어 서둘러 눈물을 닦는다. 닦여진 눈앞으로 젊은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곤 지금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물고기 꼬리를 달아버린 그녀가 보인다. 나는 고개, 내 시선을 아내에게 고정시킨 채, 샤프 끝을 눌러가며 다시 적기 시작한다.

 

지금은 늙어버린, 나와 닮아버린 내 아내가 점점 흐릿해진다. 나는 이젠 필사적이다. 공책을 밀치며 몸을 일으킨다. 공책과 내가 쥐고 있던 샤프가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나뒹군다. 나는 양말이 마룻바닥에 미끄러져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진다. 나는 그대로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의 볼과 머리 얼굴을 쓰다듬으려고 팔을 뻗는다. 그리고 나는 이젠 푸석한 피부를 본다. 코 양 끝에서 옅지만 생생하게 팔자를 곡선으로 떨어뜨리고, 자두같이 곱고 탐스럽던 광대가 세월과 빛이 바래 은행이 돼버리고만, 결국엔 두 눈은 물고기처럼 양 끝으로 꼬리를 달아버린, 온전한 나를 본다.

 

나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창밖으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어제 그대로의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옆에 거칠게 던저진 공책이 보인다. 샤프는 어디로 빨려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공책을 집어 든다. 공책을 넘기며 다시 훑어본다. 어제 있었던 격렬한 흔적들이 공책에 그대로 담겨있다. 나는 다시 짐을 챙기고 집을 빠져나간다.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기차에 몸을 실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