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by 은하수 posted Oct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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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행 가 방



 아마도 15년 동안 살아온 집을 정리하고, 이사란 걸 하지 않았더라면, 너라는 한 여자를 떠올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겠지. 너라는 한 여자를 내 가슴속에서 꺼내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아마도 너도 나를 가슴 밑바닥 쯤 어딘가에 가둬놓은 채, 꺼내 볼 용기조차 못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 데, 나는 너를 잊으려고 애썼다. 잊으려고 애쓰면서, 애쓰는 내가 안타까워 울고, 또 울었다.

 

 창호지 문을 살며시 통과해 달빛이 비춰 내리고 있었지. 그 사이로 곱게 물든 단풍잎 여러 장이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항상 웃을 일만 가득하라며, 네가 내게 준 선물이었지. 어머니는 해마다 가을이 깊어 가면 숭숭 구멍이 난 창호지 문에 단풍잎을 곱게 물들여놓으셨지. 곧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거라고 하시면서......,

  나는 네가 내게 보낸 단풍잎을 어머니 곁에 앉아 무슨 모양으로 부칠까 생각하다가 웃는 모양을 만들었지. 어머니는 내가 만든 단풍잎 모양 그대로 내게 웃어 보이신다. 나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웃어 보이는 게 너무 좋았다.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조금 전 일인 것처럼 가슴이 따스해져 오는데, 어머니의 향기가 지금도 맡아지는데, 그 기억이란 건 왜 그 해에 마지막이 되어 버렸는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그 집을 정리하면서 도시로 이사를 했지. 나는 그 창호지문에 담겨있는 단풍잎을 그대로 버리고 가기 싫었어. 그것을 그대로 두고 가자니 추억까지 버리는 일이 되어 버릴까봐 두려웠는지도 몰라. 나는 그것을 아버지의 면도칼로 네모지게 오려내었지. 그리고 곱게 접어 백과사전에 넣어두었었다.

 

  15년 동안 살아 온 집을 정리하면서, 버리고 갈 책들과 가져가야 할 책들을 구분하면서, 무엇인가 눈에 띄어 꺼내 본 그곳에 이것이 들어있더군. 어머니를, 너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풍잎이 말이야. 그 옆에, 먼지가 쌓인 색 바랜 파란비단천이 눈에 들어와 열어보니, 네가 내게 보낸 편지가 가득히 쏟아져 내려앉더군. 한 겨울 눈이 내리듯 소리 없이 말이야. 많은 책들을 정리하다 말고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아내가 밖에서 정리가 다 되어 가냐고 묻는다. 나는 곧 다 되어 갈 것 같다고 말하곤, 서재 문을 잠가버린다. 그리고 울었다. 내일 모레면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왜 마르질 않는 걸까? 가슴이 시리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가실 줄을 모르나봐. 나는 너의 편지를 펼쳐 놓고 그 안으로 사라져 간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비가 와서 성재 네 생각이 났어. 또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자가 바보처럼 비가 온다고 울기나 하고, 나는 씩씩한 남자가 좋은데, 그래도 성재 네가 우는 건 이해하고 싶다.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또 생각해보면 성재 너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나도 울었어. 성재야, 너에게 나는 무엇일까? 친구? 가끔 너와 나 사이를 생각해본다.


  일기처럼 써 내려간 너의 편지를 읽는다. 늘 오늘은 이란 첫 글자로 시작되는 너의 편지......, 아마도 너는 오늘이란 걸, 시작이란 걸 나와 함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항상 오늘은 이란 첫 글자로 편지를 써내려갔던 것 같다. 누가 먼저 그렇게 시작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습관처럼 그렇게 되어 버렸다. 너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세상어디쯤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겠지. 널 닮은 아이들과 네 얘기 전부를 가만히 들어주는 좋은 사람과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겠지. 보고 싶다. 네가 간절히 보고 싶다.

 

  오늘은 성재야, 하늘이 너무 맑고 깨끗하다. 오래도록 하늘을 올려 다 보았어. 하늘이 구멍이 날 정도로 말이야. 저렇게 예쁜데 나는 눈물이 난다. 나뭇잎 사이로 비춰지는 하늘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건만, 난 왜 눈물이 나야 하는지, 내가 참 답답해서 눈물이 마를 줄 모른다. 나뭇잎이 싱그럽게 반짝인다. 빛이 더하니 나뭇잎이 투명하게 반짝인다. 그만큼 저 빛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건만, 나에겐 그 모든 것이 상실된 느낌이야.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저 뜨거운 태양의 빛이, 나에겐 사치로 느껴진다. 가만히 저 태양을 들이마시고 있는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나는 학교에 와 있어도, 이렇게 나무그늘에 앉아있어도, 어디를 가 있어도 엄마 생각뿐이다. 어디를 가도 마음이 편치가 않아. 엄마 때문에......, 새벽같이 기사 식당에 나가 밤새 일을 하고 들어오면, 반기는 건 매타작뿐......, 그래도 엄마는 나를 위해 집에 들어오신다. 벌써 한 바탕 나에게 퍼부었건만 엄마에게 또 퍼붓는 아버지, 엄마는 누굴 위해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한 번이라도 엄마는, 행복했던 적이 있을까? 엄마의 삶이 너무 고단해 보여 눈물이 난다. 왜 나는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볼 수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이 왜 다 슬픔으로 엮어버리는지 모르겠다. 너를 생각하는 지금, 너 마저도 엄마에게 가려 너를 기억에서 지운다. 오직 엄마, 엄마의 생각뿐이다. 내게도 행복이 찾아올까? 엄마에게도 행복이란 게 찾아올까? 공평한 게 없는것같다. 누구나에게 주워지는 행복과 불행, 왜 내겐 불행의 연속인지 모를 일이다. 아주 잠시 너를 생각할 때,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성재 네가 저만치 내게 뛰어 오는 모습이 보인다. 얼른 눈물을 닦지만 너는 금세 알아차린다. 널 속일 수 없는 나는......,

 

 바보처럼 너에게 내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너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너를 내 옆에 두는 일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모질게 돌아서던 너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그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헤어지는 일이 쉬운 일이 되어 버릴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늘 곁에 있던 네가 내게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사실이 절망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너를 나는 그저 돌려 세웠지. 네 손을 잡고 떠났어야 했을까? 네가 그걸 바란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떠난 다음날, 너의 아버지의 시신이 저수지에서 발견이 되었다. 너의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나, 어떻게든 너를 찾아야겠다고, 여기 저기 찾아 헤매었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도 알고 보면 꽤 넓은 나라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많고 많은 사람들의 헤어짐 속에서 슬픔을 얻고 슬픔을 더하고 슬픔을 잊어야 하는 것들 또한 무수히 일어나는 곳이라는 걸 잊고 있었었다. 내가......,

  어머니를 묻었듯, 너를 가슴에 묻고, 너의 아버지를 땅속에 묻고, 절망도, 아픔도 함께 묻었다.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아마도 빗물이 씻겨내 주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져 가는 가슴을 안고 산을 내려왔다. 질척질척 비가 내렸다. 원망스러웠다. 내리는 비도, 내 자신도, 너라는 한 여자도......,

 

 오늘은 이불 빨래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어제도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와서는 모든 것을 다 게워내셨다. 그리고 내게 뭐라 뭐라 퍼부으신다.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듣고 있다. 나는 맞고 있다. 한 번도 어긋나지 않는 그 자세, 최대한 동글동글 몸을 말고, 귀를 틀어막는다. 소리라는 것,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라는 것, 귀를 틀어막으면 그 소리는 차단되어지지. 그저 맞는 것에만 열중하면 된다. 소리가 들려주는 두려움을 잠시 잊을 수 있다. 그동안 서러움도, 언제 끝날지 모를 공포도 함께 사라져 준다. 귀를 틀어막기 전에는 바지가 흥건히 젖도록 오줌을 쌌다. 눈은 감았지만 내 귀로 들려오는 온갖 소리가 더 두려움에 떨게 했는지도 모른다. 성재야,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끝내버리고 싶다고......, 아버지가 떠나든 내가 떠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 때라는 걸......, 그동안 성재, 너라는 한 사람을 위해 참아왔다. 아버지를 떠나면 너를 떠나는 것도 함께 이루어져야겠지. 지금은 성재야,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만 생각할래. 곧 떠날 거야. 슬픔이 뭔지도 모르게 그저 떠나는 일에만 집중하다보면 너를 두고 갈 수 있겠지. 이별이 아프다는 것도 모른 채 훌훌 떠나버릴 수 있겠지. 너를 떠나 살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성재야, 안녕

 

  나는 가슴을 움켜잡는다. 더 이상 너의 편지도 읽을 자신이 없다. 어디서 오는 고통일까? 온 몸이 불덩이가 된다. 나는 정리하는 걸 멈춘 채 그 자리에 누웠다. 아내가 노크를 한다. 문 좀 열어보라고 한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그저 그렇게 누웠다. 아내는 아마도 걱정스러워 열쇠를 찾으러 간 듯하다. 조금 뒤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내게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언어는 다른 나라의 언어인 것처럼 내게 들려오지 않는다. 너에게 가 있는 나는 이곳으로 오기가 너무 힘들다. 아내는 울고 있는 나를 놀란 듯 바라본다. 그러다가 가만히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아마도 아내는 흐트러져 있는 편지를 발견했겠지. 그리고 곧 이해했겠지. 그러면서도 지금 마음은 어지러울 거야. 섭섭해 할 거야. 그걸 알기에 나는 이곳으로 와야 함에도 나는 너에게 가있다. 너무 아프다. 아파서 일어날 용기조차, 말 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아내는 가만히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다, 일어나 문을 닫는다. 여태껏 한 번도 내가 하는 일에 토를 단적이 없는 아내다. 그래서 더 미안하다. 창문 안으로 여름바람이 싱그럽게 들어온다. 매미가 시끄럽게 운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나? 나는 다시 이곳으로 생각이란 걸 되돌린 채 돌아선다. 나는 흩어진 편지를 다시 정리하고 이사 준비를 한다. 아내는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내게 말을 붙이지 않는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나는 누군가 내게 실망이란 걸 하는 게 제일 두렵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네게 내게 준 잔혹한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떠나고 나는 그것이 내게서 보이는, 어떤 실망감에서 비롯된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들어, 지금까지 가지고 왔다. 잔인하게도 그것은 참 잘도 따라 다닌다. 생각을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다.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식사를 마쳤다. 나는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을 생각한 끝에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당신에게 정말 미안해. 생각을 좀 정리할 게 있어. 잠시......,”

  아내는 내 말이 끝맺기도 전에 내 생각을 읽어낸다.

  “알겠어요. 다녀와요. 이사하는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아내가 괜찮지 않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습관처럼 불안함을 눈을 껌벅이는 것으로 대신한다. 누군가 내게 실망하는 기색이 보이면 눈을 껌벅이던 습관을 지금까지 가지고 왔다. 너로 인해,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인해......,

 아내가 내게 어느 크기만큼 실망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간단히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한다. 아내는 내게 어색한 손짓을 하며 다녀오라고 한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녀의 그늘진 얼굴이 그것을 더 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곧바로 차를 끌고 고향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너를 다시 끄집어낸다. 예전에 내가 있었고, 네가 있었던 그곳에 와 있다. 어머니를 묻고, 너의 아버지를 묻고 너를 가슴에 묻었던 곳이다.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곤 다시 찾았다.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서 다시 찾았다. 나는 이곳에 와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세월은, 너는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여행가방 안에서 파란 비단 천을 꺼낸다. 그 속에서 너를 끄집어내고 너를 추억한다. 여름바람이 젤 발라넘긴 딱딱하게 굳은 내 머리를 조금씩 어떻게든 날려보려 한다. 그의 노력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젤 발린 머리가 바람에 조금씩 흩날린다. 아주 두꺼운 느낌으로......,

 

  오늘은 너무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지 않고 일찍 들어오셨다. 웬일인지 낮선 느낌이 든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몰고 밭으로 가신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서서 지켜보았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내 가슴깊이, 머릿속에도 간직해두었다. 언제고 아버지가 미울 때마다 꺼내보려고......, 아버지 등 뒤로 커다란 미루나무가 그늘을 만든 채 우뚝 서있다. 예전엔 아버지가 저 미루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든든하게 엄마와 나를 지켜주실 것 같았어. 그런데 내 착각이었나 봐. 아버지는 엄마와 생각이 달랐어. 엄마는 힘들게 번 돈이 정말 값있는 인생을 살게 하신다 생각하셨고, 아버지는 한순간에 얻어지는 큰돈을 생각하셨지. 한 번 발을 잘못 담그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그곳에, 아버지가 발을 담그고부터 일이 시작된 거야. 노름빚이 점점 불어나면서 엄마는 식당에 다시 나가셔야 했고, 아버지는 그 돈으로 한 번에 부자가 되는 길을 택하셨지. 한번으로 부자가 되면 그런대로 멈춰서야 함에도, 그 한번은 끝이 나지 않는 법이지. 늘 제자리, 또 그 자리, 끝을 봐야 끝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지. 엄마가 돈을 내 놓지 않자 엄마를 때리고, 나를 때리고......, 예전엔 그런 분이 아니셨어. 정말 따듯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어.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무한한 이야깃거리를 저장해두는 커다란 창고가 들어 있나봐. 책보다도 더 재밌는 아버지의 이야기 세상은 늘 끝이 없었지. 한 번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신기하지?

성재야, 아주 잠깐이라도 내가 행복한 시간에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 감사한다. 늘 네게 나의슬픔만 보여준 것 같아. 오늘은 성재야, 정말 행복해. 늦은 시간까지 내가 행복하길 기도해줄래?

 

  그래, 네가 행복해하던 시간이었지. 너의 편지를 받고 그 날은 푹 잠을 잤던 것 같다. 너는 아픈데 나는 아프지 않은 게 나를 잠 못 이루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행복하다는 것에 짜증이 났던 것 같다. 누군가는 미친놈이라 하겠지. 먹고 살기 편하니까 별소릴 다 지껄인다 말하겠지. 아마도 그럴지도 몰라. 네가 뭘 아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나의 편안함이 너를 더 힘들게 할까 두려웠던 것 같다. 왜 그때는 네게 아무런 말도 못해주었을까? 어떤 위로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에 있다. 너는 어디에 있니?

 

  오늘은, 변함없는 날이야. 변함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버지도, 엄마도......, 우리 집은 늘 그래. 저 미루나무도 똑같아. 지저귀는 저 어린 참새들도, 푸드덕 날아가는 까치들도 다 똑같아. 저들은 그래도 쉴 곳이라도 있지. 나는 쉴 곳이 없다. 집을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한다. 심장은 내가 뛰는 것에 적응이 안 되는지 뻐근해져온다. 그래도 뛰고 또 뛴다. 이대로 달리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지구 끝이라도 뛰어가야지. 그곳에 쉴 곳이 있다면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지구 끝엔 무엇이 있을까? 그 끝에 네가 서 있었으면 좋겠다. 성재, 네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편안히 쉴 수 있을 텐데......,

 

  아, 어쩌면 좋니? 미칠 것 같이 아프다. 왜 그때는 네 모든 편지들을 읽어 내려가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일까? 너의 진심을 읽어내려고 하지 못했을까? 너무 어렸단 말이니? 너는 그런 내가 무엇이 좋았니? 그럴 수 있었다면, 네가 오는 그 끝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걸 그랬다. 왜 그때는 용기가 나지 않았을까? 너는 나보다 훨씬 한 뼘쯤은 생각이 깊었고, 어른스러웠다. 나는 늘 너의 그늘을 더 그늘지게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네가 내게 있다면, 내 옆에 있다면 가만히 안아줄 텐데, 네가 바라는 대로 네가 가는 곳 마다, 그 자리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너는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 거니?

색이 예쁜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와 열어본다. 연보랏빛 편지봉투에 내 사랑 성재에게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이 글귀가 지금은 왜 가슴이 시리고 가슴이 뛸까? 내 심장이 고장났나봐. 수줍음 많은 소년처럼 심장이 마구 뛴다. 너무 거칠게 뛰어, 나는 내 심장을 큰 손으로 움켜잡는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편지봉투를 열어 가만히 읽어 내려간다.

 

  오늘은, 천둥번개가 무섭게 내리친다. 무서워서 밖에 나가질 못하겠어. 번개가 무섭게 내리 꽂는다. 불빛이 어둠속을 뚫고 무섭게 질주한다. 하나, , , , 다섯하고 숫자를 세어본다. 조금 뒤 우르르 쾅쾅 하고 굉음이 들려온다. 모든 게 어둠속에 묻혀버렸다. 이 커다란 굉음이 모든 어둠을 삼켜버린 것 같다. 작은 소음이라도 내면, 널 잡아먹겠다, 하면서 덤벼들 것 같다. 매일 천장위에서 뛰어다니는 쥐 들 조차 오늘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오늘은 성재 너를 못 본 채 하루가 지나간다. 섭섭하다. 너무 보고 싶은데, 하루라도 널 못 보면 나는 힘을 낼 수 없는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신다.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싫다. 나는 엄마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옆방으로 뛰어 가봐야 함에도 내 발은 어딘가에 묶인 채 움직여지질 않는다. 아마도, 나도 두려웠나봐. 엄마를 지켜내기 위한 그 대가가 두려웠나봐. 천둥번개와 함께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온갖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귀를 막는다. 귀를 막았음에도 엄마의 비명소리는, 천둥소리는 지워지질 않는다. 귀를 아주 틀어막을 수 있는 문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들을 수 있는 것들만 살며시 문을 열어 듣고, 듣기 싫은 소리는 문을 닫아 버리면 좋겠다. 아주 작은 소음이라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재야, 네가 믿는 그 신께 기도해줄래? 나를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말이야. 그 분은 뭐든지 다 하실 수 있겠지? 그렇겠지?

뭐든 게 끝이 났나봐. 천둥소리도 엄마의 비명도 들려오지 않아. 순간 나는 내 기도를 들어주었나 생각했다. 조금 뒤 아버지의 거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무거운 내 발걸음을 안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엄마의 얼굴에 붉은 핏물이 범벅이 되었다. 아버지는 비 내리는 마당에 무릎을 꿇고 크게 소리쳐 울부짖는다.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나봐. 엄마를 때려도 이렇게 비를 흠뻑 맞아도, 아무 소용이 없나봐. 아버지는 천둥소리처럼 무서운 소리를 계속 내 지르신다. 나는 엄마를 깨운다. 엄마는 일어날 생각조차 않은 채, 그저 그렇게 누워만 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당을 가로 지르고, 언덕길을 오른다. 어둠이 무섭지 않다는 걸 느꼈다. 오직 엄마만 생각하며 내 달렸다. 이장 양씨아저씨 집 대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저씨, 우리 엄마가 죽어요. 도와주세요.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아저씨는 눈을 비비며 대문을 열어 주신다. 아저씨는 내 설명을 들을 것도 없다는 걸 아셨는지 트럭을 몰고 우리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읍내에 있는 병원에서 엄마는 머리를 이십 바늘 넘게 꿰매었다. 엄마는 밤새 열이 심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길로 나가 들어오지 않으셨다. 차라리, 영원히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무섭다. 성재, 너도 그렇겠지? 네가 아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게 실망스럽겠지? 성재야, 너는 아파하지 마. 좋은 일만 가득해야해. 네겐 불행이란 게 피해갔으면 좋겠다. 나는, 나는 그래도 견딜힘이 있지만, 너는 아니잖아.

 

  왜 나는 견딜힘이 없다고 말했을까? 어머니 때문에? 내가 너의 편지를 읽고 뭐라 답변을 했을까? 도통 기억에 없다. 왜 기억이란 건 흐려져 버리는 건지, 그때는 너무 아팠던 기억들이 지금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까닭은 뭐지? 안타깝고 간절했던 그때 그 기억은 왜 사라져야 하는 거지? 아마도, 내가 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너를 기억에서 꺼내버리면 아프니까, 너무 아프니까 자신이 없었나보다. 지금처럼 기억에서 찾아내면 죽을 것 같이 아플 거라는 걸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냈듯, 기억 속에서 지우려 했듯 너를 떠나보내고, 기억 속에서 지우려 애쓰고, 생각은 자연스레 차단되어진다. 너무 기가 막히게 추억까지 앗아가 버린다. 그리움이란 건 말이야. 저 나무들 같아. 아주 천천히 나이테를 만들어가듯 천천히 자라나는 것 같아. 아주 작았던 그리움들이 저 하늘을 닿을 듯 솟아나고 있어. 하늘까지 닿아버리면, 아마도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그리움이란 걸 안고 살아 갈 용기가 없으니까. 그립다. 모든 것이 다 그립다. 너무 많이 변해버린 고향마을이 낯설다. 너무 오랫동안 찾지 않았나봐. 우리가 걷던 그 흙길도 시멘트가 가득히 덮어 버렸다. 내가 추억을 덮어버리려 했듯이 말이야. 누구 탓을 할까? 내가 덮어버린 결과인데......, 내 나이 마흔일곱이야. 너무 오랫동안 너를 내 가슴속에 가둬버린 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너는 나를 기억할까? 너무 많이 변해버려 못 알아보면 어쩌지?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너를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 , 엉뚱한 생각, 참 우습다. 여름바람이 분다. 아주 가벼운 느낌이다. 물길을 가르며 보트를 즐기는 사람, 오리 배를 열심히 발로 구르는 사람, 노부부가 저수지길 을 나란히 걷는 모습이 정겹다. 모두들 함께인데, 나는 혼자다. 그저 이 여행가방안에서 너를 꺼내놓은 채 홀로 추억하기 바쁘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나를 기억 속에서 꺼내보려 했을까? 딱 한번만이라도 말이야. 그랬다면, 그래주었다면 내가 이 세상을 헛살진 않았나봐. 너는 누구일까? 너라는 사람은 내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너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너무 완전하게 기억 속에서 지우려 했나봐. 바보같이......, 이제와 후회할 걸, 왜 지우려 했을까? 네가 떠나버리고 나는 많이 아팠다. 네가 남기고 간 아픈 상처가 내게는 너무 커다랗게 자리했나봐. 견딜힘이 내게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너는 내가 강하다고 생각했었나봐. 그러니 그렇게 나를 두고 떠날 생각을 했겠지. 차곡차곡 너라는 한 여자를 잊기 위해 하루를 살았다. 하루를 견디면, 너와의 하루가 지워지고, 또 하루를 견뎌내 살아지면, 너와의 하루를 지워냈다. 아주 완벽하게 지워내, 이름조차 잃어버렸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오는 그때, 나는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픈 기억만 남아있는 고향 따위는 잊어버리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묻고 너의 아버지를 내 손으로 묻었다. 술에 절어 사시던 너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로 인해 네가 떠났다는 생각에 나는 죽을 만큼 괴로웠다. 아무도 오지 않는 빈소 앞에서 나는 밤을 지새웠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고향마을이 내다보이는 뒷산에 너의 아버지를 묻었다. 원망도, 나의 분노도, 그리움 모두를 묻었다. 죽음 뒤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결과물이 보인다 했던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네가 알면 많이 섭섭해 하겠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했다. 네가 떠난 그날 나는 너의 아버지께 두들겨 맞았다. 내가 너를 빼돌렸다는 그 이유하나를 대면서 나는 저수지까지 끌려갔다. 가는 내내 두들겨 맞으면서......, 나는 거의 죽다가 살았다. 내가 저수지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너의 아버지는 나를 더 깊은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숨이 차서 얼굴을 내밀면, 또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을 우리아버지께서 발견하셨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 물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내 다리를 잡아당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보였다. 정말 진실이었나 보다. 늘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어머니가 눈에 보였다. 내 눈이 떠있었는지, 아니면 감겨있었는지 기억에 없지만, 내 눈에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물위로 올라가신다. 아직 그곳에 내가 올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셨나봐. 폐에 물이 차올라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동네 사람들이 너의 아버지와 나를 빙 둘러 섰다. 너의 아버지를 향해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해댔다. “죽일 놈, 죽고 싶으면 지나 죽지. 성재는 왜 건드려? 성재가 뭘 잘못했다고? 네 딸년이 성재를 꼬였지, 성재가 네 딸년을 꼬였겠어? 죽일 놈,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모두가 똑같이 하는 말들이었어. 아버지는 나를 업고 읍 내 병원으로 내달리신다. 나는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며 아버지께 내 몸을 맡겼다. 너무도 좋은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등이......, 그리고 너를 생각했다. 남아있는 너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마도 너의 아버지는 그 분노를 못 이겨 몸을 저수지에 던지셨는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목숨이란 걸 내 던질 수 있는지, 그리운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 술이 모든 걸 망쳐놓았다. 나는 지금도 술을 입에도 가져가지 않는다. 술이 입에 닿으면 나도 너의 아버지처럼 돼 버릴까 겁이 났는지도 모른다. 너의 아버지가 저수지에서 발견이 되고 경찰이 몇 번이나 오가고, 사람들은 찌푸린 얼굴로 모두들 돌아선다. 동네 무서워서 못살겠다고 하시는 아주머니도 계신다. 여기를 뜨고 싶다는 분도 계셨다. 나는 그 모두를 이해했다. 너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 있으니까......,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함께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나를 죽음까지 가게 했던 너의 아버지를 내가 왜 용서했는지......, 내가 믿는 신께서 그걸 바라셔서일까? 그 계명을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용서라는 단어 앞에, 나는 정이란 걸 생각했다. 그래도 한 동네에 함께 살았던 추억이란 걸 생각했다. 아주 기분 좋은 추억들만 떠올렸다. 한때는 아주 근사한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기억을 송두리째 잊었나봐. 한 순간 벌려놓은 그 큰일들만 기억에 담아 두었나봐. 쓸쓸히 보냈다. 너의 아버지란 사람을......, 우리 어머니와는 너무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모두가 함께 밤을 지새워주었었는데, 외롭지 않게 보내드렸는데......,

너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너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너를 추억하고 있는데.......,

너라는 한 여자를 추억하는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라 하면, 내 마음의 지도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지도가 나오겠지. 아마도, 혼란스러운 내 마음은 너를 그려내느라 힘이 들 거야. 지금의 모습, 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너를 잊는 다는 건 내게는 가능한 일이 될 수 없나봐.

  마지막 남은 너의 편지를 꺼내든다. 편지 봉투 안에 색 바랜 국화꽃이 살며시 내려앉는다. 그 국화꽃은 15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여름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잡을 듯 잡히지 않는 꽃잎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짝인다.

 

  오늘은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듯이 뛰쳐나와 너의 품에 안겨 울었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란 것들을 네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네게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 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내 발자국은 너를 향해 뛰어간다. 너를 보는 순간 와락 눈물부터 쏟아내었지. 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힘주어 안아주었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내게는 힘이 되던지......, 그러면서도 네게 보이지 말걸 보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에 절어 사시는 아버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를 맞고 있는 나,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한 번도 너는 내게 아버지의 대해선 묻지 않았지.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서운한 생각이 든다. 네가 내게 물었다면 말해 주었을 텐데......, 속 시원히 말해 주었을 텐데......, 기억 속에 없는 얘기를 하신다. 아버지는......, 네 년이 엄마를 보냈다고 말이야. 도망가는 엄마를 아버지께서 붙잡으셨지만, 내가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놔주질 않았대. 그 사이 엄마는 아버지에게서 해방이란 걸 하셨지. 그 뒤로 엄마는 찾아오지 않았어. 지긋지긋하셨겠지. 나도 그런데......,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려 엄마를, 나를 때렸지. 아버지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든 풀어야 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술을 이해했다. 나도 아버지처럼 술을 들이켜다 보면 어떤 용기가 솟아나겠지. 소주를 안주 없이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들이부었다는 말이 맞겠다. 단숨에 들이켰으니까. 태어나 처음 술이란 걸 마셔봤어. 쓰더군. 너무 쓰고, 목이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어. 이런 걸 왜 마실까 생각하면서, 한 병을 더 들이켰다. 취하지 않을까 두려웠는지도 몰라. 단숨에 한 병을 들이켰다. 조금 뒤 세상이 돈다. 세상이 돌아. 아버지가 이해가 갔어. 이렇게 좋은 느낌인데, 어떻게 술을 끊을 수 있겠니? 술김에 뭐라도 다 할 것만 같았어. 기분도 좋다가, 화가 치밀어 오르다 그런다. 술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걸 느꼈다. 쏟아지는 별들이 싫증이 나고, 어둠이 두렵지 않다. 까짓것......, 그러다 보면 술에 의지해 무엇인가 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마도, 그때 내가 용기를 내었나봐. 술에 잔뜩 취했어도 엄마를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은 지워지질 않았나봐. 고맙게도 술이란 녀석은 내 편이 되어 준거지.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지. 아버지는 놓으라며 한발로 나를 걷어차고 나는 다리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꼭 잡고 놓아주질 않았지. 엄마가 떠나면서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깊은 밤, 어둠이 내려앉아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엄마의 슬픈 눈망울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 다시 올게 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나질 않는다. 성재야, 성재야......,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왜 도망치지 않느냐고 묻고 싶겠지? 다 똑같은 대답, 엄마도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래버리면 아버지라는 사람은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만 같았어. 그게 두려웠는지도 몰라. 미우면서도 아버지니까, 아버지니까 그냥 그렇게 하루를 사는 거야. 가끔 꿈을 꾼다. 누군가 날 데리고 도망치는 꿈을, 헛된 꿈을......, 그게 너라면......, 아니다. 아니야. 내가 네게 뭐라고......, 무슨 이런 엉뚱한 말을......,

 

 

  여행가방안에는 스무 살을 건너던 네가 있고, 내가 있다. 이 가방을 닫아버리면 그저 닫힌 대로 살아지겠지. 내 마음 모두를 닫아버린 채, 너라는 한 여자의 기억을 묻어버리게 되겠지. 여전히 너라는 한 여자의 이름 석 자도 기억 못해내는 나로 살아지겠지.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되겠지. 아내가 있고, 두 딸이 기다리는 그 곳으로 돌아가야 되겠지.

두렵다. 내가 너를 잊고 다시 삶을 살아 갈 거라는 걸 알기에 두렵다.

곧 가방이 닫혀버릴 시간이야. 하나, , ......, 열까지만 셀 거야. 그 안에 너의 이름 석 자 기억나게 해줘.

, 숫자를 세어볼게. 하나, , , , 다섯, 여섯, 여섯, 여섯......, , 임 미정, 임 미정이었다. 너라는 사람, 너라는 한 여자의 이름은 임 미정이었다.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너 때문에 아파하는 너의 이름은 임 미정이었다. 지우려 했을 때, 완전히 잊혀버린 너의 이름......, 기억하게 해줘 고마워. 이제는 완전하게 널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제로가 될 때까지, 바닥이 다 드러나 아무것도 없어질 때까지......,

이 여행 가방을 다시는 열지 않을 거야. 이것이 너와의 마지막 여행이야.

  행복했었다.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