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년 의 추 억
' 연주...소식을 들었다 '
동석이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그녀를 찾아헤매며 괴로워했는지
잘 알고있는 그였기에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냥!..네가 알아야 할것 같아서..'
' 연주네집 가까이 사는 사람 누구야?..'
' 윤형구요!..' 누군가가 대답했다
' 그래 그럼 형구 네가 학교 끝나고
이걸 전해주거라 '
연주와 나는 6학년때 같은반이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아
학교에 나오는 날보다 빠지는 날이 더 많아서
같은 반이라도 그녀에대해 아는게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시험이 있거나 하는 날이면
시장에서 행상을 하는 그녀의 어머니가
업어서 학교에 데리고 오곤했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에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지만 늘 눈빛이 맑고 차분한 아이였다
학교에 있을때면 항상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이나들여다볼뿐 도통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적이 없었다
다만 놀랍게도
학교수업을 제대로 받지않았어도
시험을 보면 늘상 일등을 해서
선생님의 칭찬과 우리의 시샘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것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않았다
그녀의 집은 우리집 골목 끝에 있었다
젊어서 과부가 된 연주 어머니는
시장 어물전에서 행상을 했고
거동이 어려운 연주는 종일 집안에서
혼자 지냈기에 한동네라곤 하지만
그녀를 본적이 거의 없었다
선생님 심부름이 있을때면
작은 목소리로 문앞에서 '정연주'하고
불렀는데 용케 알아듣고는 방문을
빠꼼이 열고 내다봤다
' 이거 선생님이 써오래!..
낼 아침에 가질러 올께..'
아무 대답이 없는 그녀에게 다시 묻기가
머쓱해서 그냥 돌아나오는데
그녀의 맑은 눈빛이 눈 앞에 어른거려
제 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 기집애!..대답이라도 좀 하던가..'
다음날 아침 등교길에 그녀집에 들르니
방문이 열려있었다 ' 어제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종이른 내민다
집을 나서려는데 ' 고마워!..형구야...'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소리를 들은게 처음이다
더구나 내 이름까지 알고 있을줄은 몰랐다
주책없이 또 얼굴이 화끈거려
뒤보지않고 달려 나왔다
그날이후
선생님 심부름으로 연주네 갈일이 생기면
괜히 가슴부터 쿵쾅거렸다
연주가 알아차릴까봐 일부러 숨차게
뛰어온척 하거나 마루에 올려놓고
후다닥 달려나왔지민 그녀가 내내
보고있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라
쌓여있던 연탄재에 괜한 발길질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날은
내린 눈이 녹아 땅이 질퍽한데도
가족들이 같이 교정 여기저기서 사진찍느라
온통 북새통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속에 연주는 보이질 않았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마치고나서
선생님은 내게 연주의 졸업장을 전달토록 부탁했다
그날은 마침 연주어머니가 집에 계셨다
' 네가 형구구나 '
' 맨날 심부름만 하느라 고생이 많지?..'
우리 연주가 졸업식인데 아파서 가지도 못했구나..'
' 중학교는 어디로 가니?..'
' 서산중이요!..'
' 좀 멀구나 '
' 괜찮아요!..자전가 타고 가면 되요!..'
' 우리 연주는 여중인데..멀어서..아픈애가
걸어갈수도 없고 난 또 새벽일찍 시장에
나가봐야하니..'
' 그럼 제가 자전거로 데려다줄께요!..'
순간 아차! 싶었다
말을 나눠본적도 없는 아이인데
매일같이 자전거를 같이 타고 다닌다니
게다가 여중가는 길은 양쪽으로 단발머리
여학생들만 우글거리는데 거길 내가
연주를 태우고서 다니겠다니..
어이쿠!..내가 미쳤지!..' 마음속으로 제발
연주 어머니가 ' 아니다!..' 하고 말해주길 기대했는데 ' 정말이니?..정말 착한 친구구나
고맙다! ' 하는게 아닌가?..
엮여도 정말 제대로 엮였다 싶어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단발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연주는 예뻤다
작고 야윈 그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핸들 양쪽에 가방을 걸고 달려도 별반
힘들게 없었다 오히려 연주와 함께라는
들뜬 마음에 쉬지않고 페달을 밟아서
여중이 이렇게 가까웠나 싶을정도였다
학교를 마치면 같이 놀자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여중 교문으로 향했다
까만 교복 모자를 눈까지 눌러썼지만
날 알아보며 킥킥웃는 동창 여자애들을
애써 무시하며 연주를 찾았다
' 형구야!..얼굴에 와닿는 바람이 너무 좋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이 좋아 나는
더많은 바람을 몰아주리라 자전거를
빨리 몰았다
어쩌다 돌뿌리를 밟아 자전거가 덜컹하고
중심을 잃으면 ' 어맛!.. ' 놀란 연주가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는데 등뒤로 느껴지던
그녀의 체온에 하루종일 얼이 빠져있기도 했다
햇볕을 느끼고 바람을 맞으며 연주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길가의 나뭇잎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기도
하고 색색의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무엇보다도 연주가 내 뒤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가끔 오르막길에서는 자전거에서 내려 같이
걷기도 했다
'너는 남자애가 눈이 어찌 그리 예쁘니?
나중에 네 눈을 닮은 딸이 생기면 정말
예쁘겠다 '
중학교 시절은 빨리 지나갔다
연주는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상
여상에 진학하기로했고 나는 큰물에서
놀아야한다는 부모님결정에 서울로 보내졌다
부모님 기대를 알기에 '그래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리라' 다짐했지만 떠나온 고향생각과
친구들 그리고..연주생각에 외로운 생활이었다
나는 점차 서울에서의 메마른 고등학교생활과
똑똑한 서울아이들에게 치이며 주눅들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하숙집에 친구들을 들이고
술과 담배를 뻐끔거리기도 했다
이웃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과 시내를
쏘다니며 어울려 놀기도하던 내게
촌스럽고 걸을때마다 어깨가 휘청거리는
연주의 기억은 괜한 짜증을 불러왔다
연주의 편지에 답장보내는 횟수가 줄어들다
나중에는 뜯지도 않고 방구석에 던져놓기
일쑤였다 답장없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듯
그녀의 편지도 차츰 뜸해지기 시작했다
대학 입시 실패는 나를 더 좌절케했고
명분뿐인 재수생활에 나는 더 망가져갔다
다음해에도 대학진학에 실패한 나는
도망치듯 군대에 입대해버렸다
12월 춘천보충대의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다시 중학교때처럼 빡빡 깎인 머리를
거울로 보고있자니 문득 연주가 생각났다
그녀는 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지만
몸이 약해 몇달 못버티고 나와 시내의
한 약국에서 보조로 일한다고 들었지만
차마 연락을 해보거나 만나지는 못했다
부모님께 입대 인사를 드리고 버스에 올라
황망한 시선으로 차창밖을 내다보다
그녀가 일한다던 약국 간판을 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의 군 생활은 춥고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것은 끝없이 밀려드는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몇번을 망설이다 나는 연주에게 편지를 썼다
무슨 얘기를 할까 생각하는데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군복소매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다가 그냥
' 보고싶다..보고싶다 '
이렇게 쓰고는 봉투에 넣어보냈다
입대한지 1년이 지난때였다
' 윤일병 면회왔다! 근무교대하고 나가봐 '
고참병이 내 머리를 두드리며 눈을
찡끗했다
' 새끼!..여자친구없다더니..'
서산에서 서울로 와서 홍천까지 버스를 타고내려 다시 하루 세번 있는 버스를 기다렸다 타고 들어와야 하는 산골짜기라서 면회오는 사람이
드문곳이었다 그래서 주말 면회가 오면 무조건
외박을 준다 어차피 그날 다시 돌아갈 차편이
없기때문이다
외박신고를 하고 정문 위병소로 나가보니
저만치 서있는 연주의 모습이 보였다
' 어떻게 여기까지!..'
' 와!..너무 오랫만이다!..'
몇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예전과 똑같았다
여전히 단발머리에 맑은 눈빛을 한 그녀가
밝게 웃었다
버스 정류장옆 식당에서 그녀가 싸온 보자기를
풀었다 색색이 예쁜 김밥이며 잡채에 불고기까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이걸 다 네가 만든거야?..'
' 그럼 어제 일끝나고 밤새 만들었지
그러니까 다 먹어야 해!.'
먼길을 걷지 못하는 그녀가 무거운 음식까지
싸들고 여기까지 오며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미안했다
' 아줌마 소주 한병 주세요!'
술을 한잔 들이키고 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않고 내 눈을 보았다
' 미안해 연주야!...'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을 다먹었는지
술은 또 어찌 그리 마셨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참을수 없는 갈증에 눈을 떠 주전자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나서 보니
바닥에 이불이 깔려있었고 연주는 벽에 기댄채
웅크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니
어둠속에서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두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 아!..'낮은 탄성과 함께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나는 가시지않는 그리움의 갈증을
채우듯 그녀의 입술을 더 깊이 파고들었고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꼭 감은 그녀의 눈이
촉촉해지는게 느껴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떠보니 방안 어디에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 형구야!..너를 만나서 기뻤어 그리고 고마워
늘 이말을 하고 싶었어.. '
문앞에 그녀가 남긴 쪽지 한장이 있었을뿐..
그녀에게서 더이상 연락이 없었다
수없이 편지를 보내보고 친구를 통해
그녀 소식을 수소문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녀와 그녀 어머니의 소식을 몰랐다
그렇게 그녀는 홀연히 서산을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나를 떠나갔다
그녀를 잃은 상실감에 고된 훈련을 마치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마음속 슬픔은 처절했고 더이상 감당하기
힘들어질 무렵 제대를 했다
' 대학은 나와야하지 않겠냐?..'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시작한 대학생활은
처음부터 희망을 주지 못했다
여전히 감당할수 없는 슬픔의 출구를 찾던
내게 불안정한 시대상황은 각성제처럼
내 몸안의 세포들을 자극시켰다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전경들과 싸우다 두들겨맞고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고 그럴수록
오히려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늘을 뒤덮던 돌맹이와 펑펑터지던
최루탄의 공방이 나를 위한 불꽃놀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디서건 치열하게 싸웠고
어느날 내 자취방앞에서 잠복중이던 형사에게
잡혀갔다 ' 시국사범 '이것이 나의 죄명이었지만
정작 나는그무엇을 위해 싸운것이 아니었다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던날 차라리 헛웃음이 나왔다
' 쪽팔리게 2년이 뭐야!..'
파란색 수의를 벗고 두꺼운 철문을 나서니
친구 동석이 교도소 문앞에 서있었다
' 연주..소식을 들었다..'
순간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듯 통증이 느껴졌다
' 몇달전 재석이 바다 낚시를 갔다가 우연히
원산도에서 연주 어머니를 보았던 모양이야!..'
' 네가 나오면 전해주려고 기다렸다!..'
나는 즉시 서산으로 내려가 안면도에서
배를 타고 원산도로 향했다
눈앞에 보이는 저 섬에 연주가 있으리라 생각하니
온몸이 떨려왔다 연주를 만나게 되다니..
선착장에 내려 동석이 알려준 동네를 물으니
섬뒤편 인가가 드문 곳이라했다
급한 마음에 가게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얼마를 가니 저만치 산비탈밑에 작은 집 한채가
보였다 담장없는 마당에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쪼그려앉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 혹시 어른들 안계시니?..'
아이는 집 뒤쪽을 가리키며
' 저어기 밭에 갔어요 ' 말했다
' 언제쯤 돌아오시는데?..'
' 이따가요!..'
' 그래?..그럼 아저씨랑 같이 밭에 가줄수 있겠니?..'
아이는 심심하던 차에 잘 됬다는 듯 금새 마당을
달려나갔다
' 얘!..아저씨 자전거타고 같이 가자!..'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뒷자리에 냉큼 올라탔다
길을 조금 벗어나니 잔잔한 바다 풍경이 펼쳐졌다
' 우와!..난 자전거 처음 타봐요..'
' 그래?.. 아빠는 자전거 없으셔?..'
' 우리 아빠는 내가 태어날때부터 멀리
여행가셨대요!..'
자갈이 많은 비포장길이라 한껏 조심하며
운전했지만 앞바퀴가 큰돌멩이를 밟아
자전거가 크게 휘청하고 말았다
' 어맛!..' 아이가 놀라며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순간 온 몸에 전율이 돋았다
' 설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 엄마는 어디 계시니?..'
' 저 길 뒤쪽이요!..'
아이가 가리켰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키가 큰 소나무 밑에 자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었다
순간 가슴이 쿵!..내려앉으며 두 눈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 네 엄마가 ...여기...계시니?..'
' 예!..엄마가 많이 아프고 힘들어서 여기서
쉬고 있는댔어요 엄마가 보고싶을때는
여기와서 얘기하면 엄마가 내 얘기 다 듣고
있는다고 그랬어요..'
' 엄마...이름이 뭐지?..' 묻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 정연주예요...'
난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체할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가슴찢는 처절한
그리움에 사뭇치게 보고 싶었던 연주의 모습을
더이상 볼수없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숨조차 쉴수가 없었다
' 크헉!..'속에서 불덩이를 토해내듯 꺽꺽 소리내어
울었다 무릎으로 기어가서 연주 무덤에 얼굴을
부비고 안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연주의 따듯한
온기는 없었다 어디에도 그녀의 맑은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딱 한번만 보게해달라고 그토록 빌고 또 빌었건만 이렇게 무심할수가 이리 허망할수가...
' 아저씨 울어요?..' 나의 행동에 놀란 아이가 물었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눈에
민망해진 내가 얼굴을 돌리자
' 아저씨 눈이 예쁘네요!.. 엄마는 내 눈이 아빠를
닮아서 예쁘다고 했어요..'
느닷없는 아이의 칭찬에 '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가 금새 ' 할머니!..'하고 큰소리로 외치며
비탈길을 달려내려갔다 단발머리를 풀썩이며
달려가던 아이가 잠깐 멈춰서는듯 싶더니
휙! 돌아서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아!..연주야..' 내 어린 기억속에 남아있던 바로
연주의 모습이었다
아이가 달려가는 길 너머로 노을이 붉게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은 길게 바다를 덮고 어느새
내 눈과 마음까지 채워갔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팔짝 팔짝 뛰어오는
아이를 보며 내 젊은날의 방황이 점점 끝나가고
있음을 느낄수있었다 연주를 찾아나섰던 길고
외로운 여행이 이제 이곳에서 멈추게 될거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