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은, 해는 크고 구름은 없는 날이었다.
고등학생인 나는 언제나처럼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서기에 아침의 태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새벽의 바람은 아직 차갑더라도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 쏘여오는 따끔거림을 참으며 학교로 향하는 버스로 들어섰고 그 순간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나를 식혀준다.
오늘은 중요한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라 버스를 가득 채운 학생들의 얼굴을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평소보다 깨어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방금 이 콩나물 버스에 올라탄 그녀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릿결은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어 푸석푸석해 보였고 장난기가 있어 보이던 입술은 의기소침 해진 것처럼 오므라들어 있었으며 원래라면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눈은 피로를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억지로 라도 치켜세우고 수식과 영어 문장이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를 한 손에 든 채로 빠르게 훑어보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 이 시험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교문 앞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추고서야 그녀의 눈은 종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는 버스에서 빠르게 빠져나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교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땡볕을 맞아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임 선생님도 그녀가 오자 밝은 미소를 씌우고 살갑게 인사를 한다. 그녀의 활기찬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은 적어도 학교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험시간은 눈 깜빡하니 끝나버렸다.
머리가 맑아질 무렵엔 교문 앞 버스 정류장에 섰을 때였다. 그리고 이곳은 언제나 그렇듯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막 끝난 시험 얘기로 평소보다 시끌벅적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조금 늦게 갈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나에게 별로 큰 의미를 갖는 시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문제가 생각 외로 많아 학생으로서 기분이 꿀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학교 담장을 쭉 따라가다보니 골목길이 있었고 거기서 조금 더 걷다 보니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어차피 이 근처에는 제대로 된 식당이나 놀만한 곳도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머리 위로 딸랑 거리는 종소리에 뜻밖의 풍류를 느낀다.
나는 메뉴의 제일 상단에 위치해있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기다렸다. 멍하니 앉아 기다리니 점원이 진한 검은색이 담긴 하얀 잔을 들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가져다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고 바로 한 모금 입으로 흘러 넣었다. 쓴맛이 입안에서 강렬하게 요동친다. 나는 찌푸린 얼굴로 잔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시간만 때우고 가야겠다고.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시간만 보낼 거라 생각하던 와중에 종소리와 함께 가게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내리고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고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반응하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살짝 들어 몰래 그녀를 지켜보았다.
“언제나 먹던 걸로 주세요.”
그녀는 이곳에 자주 오는지 자연스럽게 주문을 마치고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 옆 소파 자리에 앉아 점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별 볼일 없는 유리 밖 풍경을 바라보고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 모습에 두근거림을 느끼고서 부끄러움의 어쩔 줄 몰라 쓴맛도 잊은 채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고 다시 깨달은 쓴맛의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나는 점원이 그녀에게 건네는 하얀 잔을 감사해 하며 받는 모습에 또다시 쓴맛으로 입 안을 식혀냈다.
답답함과 더위의 교복의 위 단추를 푸는 모습과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잔을 입으로 가져대는 모습,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는 얼굴에 장난스럽게 테이블 위를 누비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상냥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소에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빠져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가 들고 있는 잔이 비어서는 가볍게 들어졌을 때였다.
그렇게 그녀와 내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녀의 핸드폰 벨소린가 생각하니 역시나, 그녀는 놀라며 치마 주머니에서 사자 인형이 달려있는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누르고 귀에다 가져다 댔다.
전화내용이야 잘 모르겠지만 ‘엄마’라고 말하는 걸로 보아 누구와 통화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고 그 외에는 그저 ‘알겠어’, ‘응’, ‘미안해’를 반복 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즐거운 대화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었을 때엔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고 그 모습은 가까운 친구에게도 보기 힘들 정도로 암울해 보였다. 그녀는 무겁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점장의 인사와 함께 가게 안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입안에 남아있던 쓴맛은 완전히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는 빈 머그컵만이 쓸쓸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녀가 나가고 약 1분 지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먹구름이 살짝 껴있었지만 비가 내릴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득 찬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니 먹구름은 그 크기가 더 커진 것 같았다.
오늘 버스에서 본 그녀는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찰랑 거리는 머리카락과 핏기가 도는 빨간 입술의 아름다움과는 반대로 껌뻑거리며 졸아가면서도 손잡이를 잡고 버티는 그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버스에서 내릴 때는 힘찬 걸음과 함께 학교로 들어선다. 그녀처럼 특이한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모습을 버스정류장 아래에서 잠시간 지켜보고는 본래의 일상대로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눈 한번 깜빡이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의 종이 울리는 것과 비슷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 큰 빗방울에 바깥 풍경은 마치 자잘한 선으로 스크래치 당하는 것 같았고 소리를 삼켜버릴 정도로 많은 양에 주위는 고요함으로 잠겨 저 버렸다. 나는 창밖의 장관을 멍하니 보다가 몰려오는 식곤증에 못 이겨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 후로 하교할 시간까지 나를 깨우려는 선생님과 잠을 버티지 못하는 나 사이의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고 그 외에 시간엔 아마 깊은 잠을 잤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빈 교실을 나와 정문에 서고 나서야 우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온몸을 홀딱 젖을 각오를 하고 뛰어갈 생각하던 와중에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저기 괜찮으면 이거 쓰고 갈래?”
나는 순간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놀람과 두근거리는 마음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기억대로 목소리의 주인은 어제 카페에서 주문을 시키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에게 비닐우산을 내밀고는 어색하게 빈 두 손을 뒷짐으로 무마하였다.
“너는 뭐 쓰고 갈려고?”
“괜찮아, 나는 엄마가 데리러 와주신 댔어.”
그렇게 말하며 사양 말라는 듯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하면서도 감사 인사를 전하였고 그녀는 별거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비가 닿지 않는 정문의 천장 아래서 묶여있던 우산을 펴고 비에 젖은 운동장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뒤쪽에서 느껴진 어떤 기척에 난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천장 아래 물 하나 댄 적 없어 보이는 깨끗한 손이 빗물의 젖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학교 아래의 서서 한 손을 팔꿈치까지 밖으로 빼내어 비를 맞게 하고 있었고 그 시선은 우수에 잠긴 채 먹구름이 진 바라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못 본척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천천히…… 운동장이 마치 비에 잠겨 늪이라도 된 것처럼 한걸음을 꾹꾹 눌러 넣어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뒤통수 너머로 비에 젖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데리러 와주세요.”
뜨거운 아침햇살은 울부짖는 먹구름의 가려져 있다. 어제보다 날씨가 더 험상 궂어졌다. 번개가 내려치는 빈도도 잦았으며 비는 오늘이 지난다 하더라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어제 그녀에게 받은 비닐우산을 품고 검은색 2단 우산을 꺼내 학교로 나섰다. 살짝 너덜해진 이 일회용 우산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그녀와 조금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 기분이 들떠있었고 바닥이 흥건해져 서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아무런 불편하거나 짜증 난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빌린 우산을 건네주려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나는 뚝하고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책으로 가득 채운 가방을 메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젖은 우산을 바닥에 꽂고선 단추가 몇 개 풀려있는 교복을 입고 공허한 눈을 바닥으로 떨구고 무기력해 보이는 어깨를 아래로 떨어트린 채 버스와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푹 숙인 고개를 보니 나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고 수많은 학생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뒤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맨 앞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만 문이 닫혀버렸고 나는 텅 빈 뒤 좌석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그녀는 학교로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멍해 보이는 옆모습엔 고민이나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머릿속은 학교로 돌아갈지 그녀를 따라갈지 혼란이 일어났지만 결국 이대로 그녀를 따라가 보기로 결정하였다.
학교에서 출발해서 약 4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거의 시외까지 와서야 그녀는 내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버스 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아뿔싸 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온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급히 생각해내야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이 분명하였고 출구 옆 뒤 좌석에 앉아있던 나와 그녀의 눈이 맞아버렸다.
그녀는 당황해하면서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우산을 끌고 밖으로 나섰고 나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변명거리… 변명거리….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고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한들 수상한 녀석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떠나고 어색함이 남은 정류장에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혹시 우산 돌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어… 그게 비슷해, 어쩌다가.”
나는 그렇다고 말하기도 뭣하고 아니라고 해도 뭣한 질문에 나는 시선을 회피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평일에다가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는 조용했고 그 덕분에 잠시 대화가 없던 둘 사이의 어색함은 더 빠르게 찾아왔다.
그녀는 별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나 또한 아무 말없이 그녀에게 비닐우산을 건네주었다.
“미안해 괜히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서. 이미 아침 조회는 끝났지 싶은데….”
그녀는 우산을 건네받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너는 괜찮아?”
나의 되물음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며 생각에 잠겼지만 다시 평소처럼의 밝은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물론 괜찮지. 평소보다 홀가분한 기분인걸.”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쏟아지는 빗소리에 우리 둘 사이의 침묵이 시작될 것 만 같았다.
“저기… 여기엔 뭣 때문에 온 거야?”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라면 못했을 행동이었지만 지독한 비 냄새가 나를 취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녀는 비닐우산을 펴고 정류장 밖으로 나가며 나에게 말했다.
“학교로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따로 갈 곳이 있어서.”
그녀의 뒷모습은 힘없이 내려앉아 버릴 것 같았다. 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불안해서 다음날이 올 때까지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괜찮다면 나도 따라가도 될까?”
나는 용기를 내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먼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관없어. 마음대로 해.”
나는 우산을 펴고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아침보다 비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검은 우산 아래에서 고개를 살짝 빼내어 하늘을 보았다. 비는 아직도 새까만 구름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고 있다.
도시의 건물들을 지나치고 자그마한 공원 지나 강변도로를 걷게 되었다. 강물은 어제부터 쏟아지는 장맛비에 엄청나게 불어나, 근처에서 자라나고 있는 풀들을 난폭하게 잡아먹고 있었고 거세게 뒤척이는 물살은 이 위에서 걷고 있는 우리들을 협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광경에 잠시 멈췄지만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저기, 어디로 가는지는 물을 수 있을까?”
나는 다리가 슬슬 아파 옴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녀에게 보채듯이 말해 보았다.
“구름다리.”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확실히 이제 점점 강에서 멀어지고 산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무슨 일이기에 학교도 가지 않고 구름다리로 갈려는 걸까? 궁금해 한다 해도 그녀는 쉽게 대답해주지 않을 눈치였기에 그저 걷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었다.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그런데, 너 오늘 중으로는 학교로 돌아 갈 거야?”
그 말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싸늘함을 느꼈고 처음으로 그녀가 무섭다고 생각 되었다. 귀의 일부분만 보일 정도로 고개를 약간 돌리고 나에게 신경질을 내는 것처럼 말하였다.
“학교가 그렇게 좋으면 지금 가면 되잖아!”
나는 깜짝 놀라 순간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춰버렸다. 딸꾹질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나는 굉장히 놀랐으며 그녀 또한 자기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란 듯 재빠르게 빈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 미안.”
나는 솔직히 잘못 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 사과를 하였다.
“아니, 내가 미안해. 그리고 아마 학교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십분 동안 등산을 한 결과 그녀가 말한 구름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녀는 상쾌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풀린 건가? 아니 어쩌면 방금 전에 그건 그저 단순한 감정변화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그녀라고 항상 기분이 좋은 건 아닐 테니까. 이참에 나는 대화를 이어나갈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넌 안 지치니?”
“비가 와서 힘들긴 힘드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었지만 말에서 숨이 차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구름다리는 어느새 나무에 숨어 보이지 않게 되어 얼마나 걸리는 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진짜 이렇게 고생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건가?
“따로 약속 같은 거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오르고 싶어서.”
“학교까지 빠지면서?”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깊게 질문한 것일까. 뒷모습과 우산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짜증이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바로 앞에서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선 손가락으로 어느 위쪽을 가리켰는데 그것은 잠시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구름다리였다.
“저기 보이지. 앞으로 10분 정도만 더 걸으면 갈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곤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였다.
비 때문에 질척이는 길 때문에 10분정도가 더 소요 되었다. 본래라면 산 아래의 경치가 훤히 보여야 했지만 빗살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밑이 완전 텅 비어있는 구름다리만 놓여있다.
그녀는 구름다리를 잡고 저 아래를 빤히 보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미끄러질까 불안해하며 바로 뒤에서 신경을 곤두서고 있었다.
“아, 어쩌면 좋을까…….”
그녀는 말에는 한숨이 섞여있었다. 나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여기에 왔으니 다리를 건널 것 이라는 것만 짐작될 뿐이었다.
“혹시 건널 거야?”
구름다리는 튼튼한 목조로 만들어 비바람에도 끄떡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건너기에는 웬만한 담력 없이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름다리 옆에 서서 절벽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면 벌써 현기증이 나서 물러섰을 것이다.
그녀가 일어서고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투명한 우산 아래로 그녀의 미소가 피어났다.
“아니, 역시 오늘은 안 될 거 같네.”
나는 마음속으로 안심하고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듯 아쉽다는 얼굴을 지었다.
“그럼 이제 내려갈까?”
내가 먼저 제안을 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갈래?”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발걸음을 가볍게 놀리며 내리막길을 걸어갔고 나도 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진흙투성이라 조금 고생하였지만 오르막길 때와는 다른 그녀의 힘찬 모습에 나는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산을 벗어난 우린 근처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볶음밥을 시켰고 그녀는 칼국수를 주문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대답을 망설이는 듯 했지만 곤란하거나 심각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냥 구름다리가 한 번 보고 싶었어.”
그녀는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비바람이 몰아쳤고 연약한 창문들이 일제히 소음을 내며 흔들렸다.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몇 가지의 즐거운 대화가 오갔고 그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맛은 별로 없었다. 그녀도 젓가락 짓을 몇 번하더니 그대로 놓아버렸다. 그러곤 그녀가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더니 나에게 턱하니 내밀며 말했다.
“혹시 일요일에 시간 있으면 이런데 같이 갈래?”
그녀가 건넨 핸드폰엔 온간 풍경 사진들이 있었는데 전부 비슷비슷하게 높은 곳이나 아래의 경치가 훤히 보이는 산 정상 그리고 커다란 강이 있는 대교 같은 곳이었다. 하나 같이 전부 집에서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거절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좋아. 그런데 전부 거리가 먼 곳들 뿐이네. 아,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야. 시간은 많으니까.”
“그게 어쩌다보니 먼 곳 밖에 없더라고.”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입에 맞지도 않는 칼국수를 입으로 가져다 되었다. 괜한 질문을 한 걸까.
비는 멎었지만 먹구름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행복하고 편안하였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나는 딱히 학교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학교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고 우리들은 올라탔다. 텅 빈 버스는 정말로 쾌적하고 편했기에 마치 리무진이라도 타는 기분이 들었다. 뒷자리에 앉아서도 대화는 계속 되었다. 학교로 돌아가게 되면 꽤 귀찮은 일이 생기겠지만 지금은 딱히 걱정되거나 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왔을 때엔 막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고 가득 찬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느긋하게 교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망설임 따윈 없이 먼저 학교로 걸어 들어갔고 나는 떨리는 가슴을 참고 참으며 겨우겨우 담임이 있는 교무실로 들어갔다.
얼마간 혼났었다. 이제 막 반으로 가서 확인하고 없으면 부모님이나 나에게 전화를 걸참에 내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이때까지 출석도 잘하고 있었고 점심시간에라도 왔으니 이번은 이쯤에서 봐주는 걸로 끝내었다.
그 후론 반에 돌아와서 눈 깜짝하니 모든 수업은 끝나있었다.
나는 졸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출입구에 서서 하늘의 동향을 살폈다. 비는 이제 더 이상 내리지는 않았지만 먹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뒤덮여 있었다. 정신이 없는 사람은 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밖은 어두웠다. 그런 때에 주머니에서 벨이 울렸다.
“혹시 잠깐 시간 있어?”
한사화에게서 온 전화였다. 한사화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처음들은 이름과 함께 얻은 핸드폰 번호를 교환 했었다. 이렇게 빨리 전화 올 줄은 몰랐지만. 나는 그녀에게 알겠다고 말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였다.
3분도 되지 않아 그녀는 나타났다. 사화는 들뜬 목소리로 카페에 갈 것이라고 하였고 나는 그 뒤를 다시 걸어갔다. 저번에 시험 끝나고 들렀던 그 곳이었다. 역시 자주 오는 곳인가.
그녀는 여유롭게 레몬에이드를 시키고 나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커피 좋아하나 봐?”
사화가 놀라며 말했다.
“아니, 그냥 마실 만해.”
저번과 마찬가지로 창가 옆에 위치한 소파 자리에 앉아서 웨이터가 내온 음료를 받았다. 그때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있었지만.
“학교 마치면 빼먹지 않고 들리는 곳 중 하나야.”
사화가 장난기 들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커피를 입에 물고 난 뒤에 말했다.
“그런데 너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그 말을 하자마자 사화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역시 혼났을 때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건데. 나는 ‘아차’하고 재빠르게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사화는 레몬에이드를 크게 들이 마시더니 신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모습에서 마치 술을 마시는 것 같아 실소가 터질 뻔 했다.
“하아… 글쎄 이미 엄마한테 전화를 넣었데.”
그런 말을 한 그녀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엄마한테는 이미 전화로 실컷 잔소리 들었고 학교를 빠진 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혼나도 어쩔 수 없지, 아! 이렇게 말하고 보니 너한테 조금 미안하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서는 장난스럽게 자신의 말을 덮었다.
“나는 그저 그렇게 넘어갔어.”
“그건 진짜 다행이네. 우리 담임은 좀 엄격하신 분이라서….”
그녀의 말이 끝나고, 서로 잔의 내용물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둘 다 쓴 맛과 신 맛에 힘껏 찡그렸고 이게 꽤 웃긴 상황이어서 어두웠던 분위기도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보니 여기 오자한 건 이거 때문이야.”
사화가 다시 오늘 식당에서 보여줬던 풍경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 많던 사진 중에서 딱 하나를 골라 나에게 내민 것 이었다.
“이번 주 일요일에 갈 곳. 여기로 정했는데 어때?”
그것은 얼마 전에 완공이 된 대교였다. 여기서 버스타고 간다면 아마 30분은 가뿐히 넘길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가볍게 수락하였다. 오히려 버스에서의 시간은 더 즐거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음… 이제 15분밖에 안 남았네.”
핸드폰에 띄어진 시계를 보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어디 약속이라도 있어?”
“학원. 매일 엄마가 이쪽으로 데리러 오거든.”
“아아….”
나는 다시 에스프레소를 머금었다. 사화가 곧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뛰어오기 시작했다. 아쉬움에 뛰는 것이다.
“진짜 잘 마셔. 그 쓴 걸…….”
그녀는 부럽다는 얼굴로 에스프레소 잔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얼굴로 내 앞에 놓인 잔을 빼앗아 들었다.
“나도 한 번 마셔보자.”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찌푸려졌다. 나는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가슴이 쓰라려 온다.
즐거운 시간은 계속 되었다. 그녀의 벨소리가 다시 울리기까지. 그녀는 전화를 받고 나에게 아쉬운 표정으로 내일 보자고 말하고는 카페를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혼자 있는 소파에 나는 잠시 앉아 있다가 반 쯤 차있는 에스프레소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와서 달력을 확인한다. 오늘은 목요일. 앞으로 3일 뒤를 기대하며 나는 잠에 빠졌다.
아침에 버스에서 사화를 보았다. 그것도 잠시 몰려 들어오는 아이들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가려져 말조차 못 걸어 보았다. 그녀는 날 못 본 것 같았다.
아이들은 태운 버스는 학교에 도착하고 열린 문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교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좌석에 앉아 모든 아이가 빠져나가길 기다린다. 이윽고 마지막 내가 버스에서 내리고 숨이 확 트인 버스가 도망가듯이 학교를 떠났을 때, 이미 한사화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야, 너 왜 이렇게 늦게 내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사화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나 못 봤어? 아, 하긴 애들이 보통 많아야지.”
사화는 그렇게 말을 하고선 나를 두고는 교문으로 걸어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자 그녀가 뒤를 돌아 안 오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침의 잠에서 깨어나 피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고 교문을 넘어 학교로 와 서로 이별을 했다. 그 후로는 모든 수업을 마칠 때까지 볼 일이 없었지만, 종례를 마치는 종이 울렸을 때, 사화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내용은 자기네 반으로 오라는 문자였는데 우리 반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위치해 있어서 찾아가는데 고생이었다. 아이들이 다 빠진 빈 교실엔 그녀가 덩그러니 남아 칠판을 지우고 있었고 내가 인기척을 내자 그녀가 깜짝 놀라 칠판지우개를 떨어트렸다.
“아… 너구나! 난 또…….”
그녀가 나를 보고는 안심하며 바닥에 떨어진 칠판지우개를 주웠다. 나 말고 또 올 사람이 있던 걸까.
“선생님인 줄 알았어?”
“비슷해 뭐. 잠깐 기다고 있어 봐. 이것만 정리하면 돼.”
칠판 구석에 오늘의 주번이라 적힌 곳 아래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반은 하루마다 주번이 바뀌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도와주려다가 이미 거의 깨끗해진 칠판을 보고 교탁 앞 책상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칠판지우개를 든 손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햇살이 아른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추처럼 흔들린다. 그게 너무 귀여워 보여서 웃음이 새어나올 뻔 했다.
그녀는 깨끗해진 칠판을 보고 만족해하고는 손을 허리에 가져다 대고 심호흡을 하였다.
“이게 은근 힘이 든단 말이야. 완전 지쳤어.”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나는 먼저 교실 밖으로 나왔고 교실을 둘러보고 빠진 거 없나 확인한 후에 자물쇠로 앞문을 잠갔다.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앞장서 걷고 있는 사화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지만, 썩 즐거워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사화도 곧 무슨 얘기를 할지 고민하다가 어느새인가 입을 꼭 닫은 채 천천히 걷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와 있는 게 재미없거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고 두근거렸으며 이렇게 걷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그녀의 귀가 쫑긋거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니 어제 산에서 고라니 봤어?”
“고라니는 못 봤는데, 다람쥐는 봤어.”
“아, 난 고라니는 봤는데 다람쥐는 못 봤어.”
그녀에게 다시 웃음꽃이 피었고 우리는 중간에 계단이나 복도에서 몇 번 멈춰서 얘기에 빠져 있을 정도로 즐겁게 대화를 했다.
정문에 도착했을 때 시계를 보니 20분은 지난 것 같았다. 딱 교문이 보일 정도로 나온 순간 그곳에 있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사화와 아는 사람이었는지 놀란 눈을 하고선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아주머니를 바라본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혹시 너희 어머니 시니?”
나는 그 질문을 하면서 속으로 참 눈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이제야 보고 말았다.
“아… 응. 우리 엄마야.”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큰 걸음으로 빠르게 우리 앞으로 다가온 사화의 어머니는 허리와 어깨가 완전 곧바로 펴져 있었고 날카로운 눈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고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가 공격적이고 차가워 보였다.
사화의 어머니는 오른손에 들린 핸드백을 다른 손으로 옮기고선 한쪽 눈을 나를 향해 치켜세우고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화랑 아는 사이니?”
“네.”
사화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사화의 어머니는 잠시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하였다. 마치 경계하는 뱀과도 같은 눈이었다.
“너 이번 모의고사 성적은 어떠했니?”
“네?”
나는 사화의 어머니가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의문을 표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말이 이해가 안 돼서 나온 말이 아니라 단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당황한 것이었다.
“몇 등이었냐고.”
“170등 정도….”
딱 절반에 약간 못 미친 성적이었다. 사화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과격하게 사화의 손목을 붙잡고는 교문으로 끌고 가듯이 걸어갔다.
멀리서 사화 어머니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의 내용은 들리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젯밤엔 자지를 못했다. 다행히 토요일이라 새벽에서 아침까지 잘 수 있었지만, 오후의 햇살에 눈을 뜨면서도 전혀 개운하지가 않았다.
멍하니 누워있기를 몇 분 머리맡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착신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받았는데 통화 상대가 한사화 라는 것에 나는 몽롱한 정신을 바로 잡고 침체한 목을 가다듬었다.
“어, 웬일이야.”
“아, 나… 내일 가는 거 말이야 아마 못 갈 것 같아… 과외가 생겨서…….”
목소리의 떨림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수화기 너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따로 이유를 물어보지 않고 그저 알겠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십 수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집에서 대교까지 가는 길을 검색하였다. 어차피 내일은 할 것도 없었다.
어젯밤 잠자기 전에 보았던 비가 오늘의 아침까지 내리고 있다. 일기예보를 틀어보니 오늘 밤까지 내리는 모양이다. 일요일의 아침치고 기운 나는 날씨는 아니었다. 나는 아침 일찍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빗줄기는 길고 두꺼웠다. 들고나온 우산은 빗방울에 부딪 칠 때마다 둔탁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대교에 가기 위해 탄 버스는 사람 하나 없었고 그저 시원한 에어컨 바람만 가득했다. 나는 빈자리 아무 곳에 앉아 창문에 머리를 대고 생각했다. 정말 할 짓 없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 버스를 탄 이유는 어제의 전화에서 가슴이 시릴 정도로 어떤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환승 할 곳에서 내리고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아마 사화하고 같이 갔다면 다른 루트로 갔을 것이다.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만….
대교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서 시간이 좀 지났기에 버스 좌석은 남겨진 곳 없이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우산을 묶고 손잡이 잡고 흔들거리는 버스를 버텨내었다. 대교에 도착했을 땐 버스는 이제 설 곳도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제일 먼저 빠져나가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비 냄새가 코를 적셨다. 8차선대로 너머로 대교가 보인다. 나는 우산을 펴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대교는 역시 커다랗고 웅장하였다. 바로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은 위협적이기 까지 했다. 밑으로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펜스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빗물에 불어난 강이 난폭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고 그 순간 구름다리에 갔을 때 보았던 강과 겹쳐졌다.
나는 더 그 광경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빼고는 휴대폰을 꺼내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다. 카메라 앱을 누르고 대교에서 본 경치를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고 그중에서 잘 뽑힌 사진 10장을 사화에게 보내었다. 전부 굵직한 비에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이거라면 월요일에 보게 될 때도 즐겁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것보다 만족감이 컸기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나는 그제 서야 자신이 대교를 완전히 건너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푹 씌운 우산 아래로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딱 우산 아래에서 누군가의 뒤꿈치 접힌 신발이 보였다. 양말은 완전히 젖어 있고 다리는 떨고 있었다. 갑자기 불안한 마음에 우산을 들어보았다. 검은 우산에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체형은 여자였으며 펜스에 올린 한 손은 엄청나게 힘을 주고 있어 멀리서 봐도 힘줄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설마 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멀리서 그녀가 들고 있던 우산이 천천히 떨어졌다. 한사화였다. 다른 한 손도 펜스 위를 잡고 눈에 들어가는 빗물은 신경 쓰지도 않고 강물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한사화!”
나는 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화는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손과 눈에 힘을 풀고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나는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흔들리는 눈과 우산에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아마 그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하고 있을 거라 상상이 되었다. 내가 거의 그녀의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눈에 띄게 흔들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고 손에서 놓아버린 우산을 줍고 있었다. 한시름 놓았다.
그녀의 앞에 완전히 서고 서로 마주 보았을 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무 당당하고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방금 무슨 짓 하려고 한 거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금 전 봤던 그녀의 행동이 떠올라 심장이 철컹하고 가라앉았다.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이상 묻지 않았고 그녀가 눈물이 그칠 때까지 가만히 앞에 서 있었다.
사화는 퉁퉁 부은 눈을 우산 끝으로 가리고 나에게 물었다. 이제 눈물은 완전히 멈춘 모양이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나는 방금까지 찍고 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핸드폰으로 보냈는데 한 번 확인해 봐.”
“아… 핸드폰은 놔두고 왔어. 엄마 몰래 빠져나온 거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은 굉장히 씁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산을 들어 통통 부어오르고 눈물 자국이 아직 선명히 남은 볼을 그대로 드러내고는 말했다.
“이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할게. 놀라게 해서 미안해.”
“힘든 일 있으면 언제나 말해.”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말했다. 계속해서 보고 있다간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린 그 뒤로 대교에 한참 동안 서서 경치를 구경했다. 물론 볼 것도 없고 볼만한 것도 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즐거웠다. 반대편 거리도 걸어보고 강변도로도 약간 걸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교를 건너갔을 때 이미 30분은 가뿐히 넘기고 있었고 그녀의 눈물 자국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퉁퉁 부어오른 눈은 장난기 어린 눈에 가려져 자세히 봐야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아… 돌아가면 조금 고생하겠네.”
“다음에 빠져나올 때는 핸드폰은 챙기고 와.”
사화는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우린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우린 우산을 접고 비를 막아주는 지붕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때 반대쪽에서 버스가 도착했고 그 순간 갑자기 불어오는 비바람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렸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바닥에 털썩 앉더니 곧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나는 그런 긴급 상황에서도 사화가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왔던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사자 인형이 달린 한사화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나는,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