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또 돌연히 사라졌다. 이 사실은 언제나 아빠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그렇지만 표정 속에서 보이는 아빠의 감정은 조금은 피로하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모가 사라진 것이 이번이 몇 번째인지 표시해 둔 달력은 이미 군데군데 찢겨져 있었다. 아빠가 어느 순간부터 줄 긋기를 관두었다. 지금은 그저 한숨 같은 중얼거리는 말을 입 밖으로 흘리면서 그릇을 닦고 있다.
나는 아빠의 뒷모습에서 들리는 읊조림을 미워했지만, 그릇 닦는 일은 하고 싶지는 않아서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냥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내 방으로 간다.
아빠가 홀로 부엌에서 물기를 닦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밖으로 눈을 빼꼼 내밀고 내다보니 나만큼 누가 왔나 궁금했던지 아빠는 하던 일을 금방 거두고 문으로 다가갔다. 무슨 마음에선지 아빠의 얼굴에 잔뜩 잡혔던 주름이 누그러졌지만 이내 곧 아빠는 연기자처럼 인상을 다시 구기고는 문을 열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방문자는 그 여자였다. 아빠의 예상도 빗나간 모양이다.
“표정이 왜 그래?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나 봐요. 호호호”
아빠는 그 여자의 말을 들으며 등을 돌려 돌아왔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던가 하지.”
아빠는 그러면서도 문은 열어두고 혼자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여자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을 닫고 뒤따라 들어왔다.
“애는요?”
“방에 들어 갔나봐.”
“그래요?”
나는 그 여자의 다음 행동을 미리 눈치 채고 방문을 살며시 닫았다. 그 여자는 아빠에게 눈을 돌려 내 방을 향해 말했다.
“나 왔어. 곧 운동회지?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줌마가 다 해 줄게.”
조용한 가운데 뽀드득 소리만 들린다. 아빠는 물기를 닦다 눌러 붙은 얼룩을 박박 문질러 닦기 시작한 모양이다. 묵묵부답인 내 방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래전부터 지워지지 않는 때랑 씨름이나 하고 있는 중인가 보다. 그 여자는 아무 대꾸도 없는 내 방문을 보고 또 빙그레 웃고 있겠지. 곧 말소리가 이어 들렸다.
“밥은 뭐 먹은 거 같고… 빨래는 아직 쌓여있죠? 나 화장실 들어가요.”
“그냥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돼. 번거롭게 일 힘들게 하지 마.”
“세탁기를 돌리더라도 손빨래 하고 돌리는 거랑, 그냥 돌리는 거랑 확연히 다르다고요. 또 안 그러면 흰 옷은 누렇게 바랜단 말이야.”
말은 저렇게 해도 저 여자가 돌아가고 내일이면 아빠는 오후 볕을 잔뜩 머금은 빨래를 걷어 섬유유연제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는 냄새를 코끝으로 맡다가 빳빳하게 마른 새하얀 옷을 쫙 펴 보고는 뽀얀 게 깔끔허네 하며 흡족해 할 거면서 어쩜 저리 또 속에도 없는 다른 말을 할까. 그러고 나서는 또 고모가 어디로 갔는지는 잊어 먹을 게 뻔하다.
밥 먹었어?
응 먹었어. 토끼는?
나도 먹었어.
오빠가 해준 밥 맛있디?
묻지마… 아, 지금 그 여자 와 있는 중.
뭐 하고 있대?
빨래하겠대.
잘 됐네. 일손도 덜고. 그래서 지금 숨어 있는 중?
응. 불편해.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 자는 척 하려고.
그때 방문이 열렸다. 머리 뒤로 들리는 소리였지만 벌컥 하는 박력으로 보아 아빠가 틀림없다.
“아빠는 청소하고, 아빠 친구는 빨래 거들어 주는데 너는 팔자 좋다?”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말고 좋게 구슬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 알았어, 그럼 집안일 같이 도와주겠니?”
“싫어요.”
“일루와.”
나는 냉큼 머리맡에 나있는 창문으로 훌쩍 뛰었다. 내 방은 일층이고 내 몸집은 두 뼘 창문을 가뿐히 통과할 만큼 앙증맞았다. 내 애칭이 고작 겨우 앞니만 톡 튀어왔다고 토끼인 것만은 아니다. 껑충 뛰어 창문 바깥 아래에 미리 숨겨 둔 운동화 위로 정확히 착지했다. 나도 고모처럼 빠져 나가는 데엔 나이에 비해 일가견이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눈 깜짝 할 새에 운동화를 고쳐 신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지만 아빠가 멈춰 세운다거나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휴대 전화를 놓고 왔다. 미처 화면을 끄는 걸 깜빡해 혹시 아빠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고모와 주고받던 문자를 볼지도 모를 텐데.
집을 벗어나도 마땅히 갈 곳은 없다. 고모는 늘 어디로 가버리는 걸까. 어디서 몇 날 며칠씩 밤낮을 보내는 걸까. 있을 곳이 집밖에 없어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가는 나로선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밥시간은 귀신같이 맞춰 들어오는군. 손 씻고 와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모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아빠가 놓칠 리가 없을 텐데. 내가 고모와 주고받던 내용은 간단한 인사나 그저 그런 수다로 끊겼고, 내가 아빠였다면 거기에 이어서 나인 척 가장해서 알고 싶은 정보를 캐냈을지도 모른다. 걱정이 된 나는 우선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아빠가 뭐라고 또 하는 것 같았지만 휴대 전화 찾기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전화는 가지런히 정리된 이부자리 위 베개 옆에 던져져 있는 듯 놓여있었는데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이부자리는 기억이 안 난다하더라도 내가 정리할 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으니 아빠의 손이 닿은 게 분명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 전화를 확인 해 보아도 대화 내용은 내 마지막 말에 고모의 한 마디 답장이 온 것이 마지막이었고 내용은 수신이 확인 된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아빠는 고모와 나 사이의 은밀한 내통을 알면서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나는 고모가 빨리 돌아오길 바랐다. 고모 있잖아, 고모는 왜 틈만 나면 집을 나가요? 라고 물으면 고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집이 싫어서가 아니야.
싫은 게 아니라면 좋은 것일 텐데 아무래도 고모는 집 밖이 더 좋나보다. 궁금한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나는 똑똑한 고모에게 틈만 나면 질문을 해대었고 무수한 질문 가운데 아직도 금방금방 떠오르는 것들이 몇몇 있다. 그 중 하나는 지난 번 고모의 대답을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생긴 의문이었다. 엄마는 왜 집 밖이 좋으셨을까요? 라고 물었는데 그때 고모는, 그건 집이 싫어서 일지도 몰라 라고 말했다.
나는 나대로 호기심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금한 것들을 바로 바로 꺼내어 물어봤고, 고모는 고모대로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왜 고모와 엄마는 집을 떠나는지, 왜 두 사람이 사라지는 이유가 다른지, 왜 둘 다 사라지면서 한 사람은 집이 싫어서가아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싫어서 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모는 설명을 어렵지 않게 해준다. 오히려 나를 아직 한참 덜 자란 어린 아이 대하듯이 퍽 쉽게 설명해 준다. 간단히 말하는 건 고모만의 신기한 재주이니까. 하지만 가끔은 들으면 간단한 것 같은 말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미들이 많았다. 이런 식으로 알쏭달쏭한 미로에 빠지게 되면 나는 고모에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투정을 한껏 부리고 그냥 후다닥 잠자리에 누워버리곤 했다.
한날은 같은 질문을 아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아빠는 아무 말도 않으셨다. 내 눈이 아빠의 눈을 마주쳤을 때 느꼈던 눈빛은 분명 내 말을 들었다는 확신을 주었다. 아빠는 담배를 끊은 지 꽤 되었는데 그 때 마치 가만히 있는 아빠의 뒷모습이 어쩐지 담배를 피던 아빠 모습과 닮아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 나는 더 묻지 않기로 하고 그날도 그대로 잠자리에 누워 버렸다.
고모한테 한 가지 더 물어 본 게 있는 데, 이건 중요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그 여자에 대해 고모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고모는 아빠처럼 아빠의 친구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고모는 역시 설명을 쉽게 해 준다. 그 여자는 아빠의 여자 친구라 했고, 나도, 그리고 정작 아빠도 아직 받아들일지 말지 확신이 없으니까 그냥 친구라고 소개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왜 그 여자는 나한테 싹싹하게 굴어요? 하고 물어봤더니 고모는, 지금도 토끼가 이렇게 안 좋아 하는데 싸가지 마저 없으면 오죽하겠어 라는 쉬운 말로 명쾌하게 답변해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데도 왜 자꾸 여기 오는 거에요? 여기가 싫어지면 나갈거라 생각했는데 라고 더 물어봤더니 그러자 고모는, 싫어도 떠나지 않을 수도 있거든 이라고 말했다. 나는 더욱 헷갈려만 갔고 잠자리고 뭐고 간에 우선 지금 당장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라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럼 아빠는 왜 집을 떠나지 않는가요 라고 물으려다가 문득, 머리는 작은 데 무리하게 공부를 많이 하면 바람이 잔뜩 들어간 풍선처럼 터져버릴 지도 모른다는 어느 옛날 고모의 가르침이 떠올라 촐싹거리며 잠자리로 뛰어갔다.
휴대 전화의 고모의 마지막 답변에 답장을 할까하려다가 내 질문이 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벽까지 깊어진다면 고모는 잠을 제대로 못 잘지도 모르니 그만두고 일찍 자기로 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무릎부터 보이고 고개를 위로 바짝 들고서야 아빠의 수염 난 턱 아랫부분이 보이는 걸 보니 이 시간은 내가 지금보다 더 작을 때인, 소위 아기 토끼 시절인 것 같았다.
아빠와 엄마는 일단 나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네들끼리만 비밀이야기를 하듯이 입술을 살짝만 들썩여가며 대화를 했다. 나는 너무 조그마해서 두 사람의 표정도 잘 안 보이고 목소리도 안 들리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건 꿈이니까 몽롱한 기분 탓에 정신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야기를 엿듣고 싶어도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 옴짝달싹 할 뿐이어서 꿈인데도 지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그러다가 갑자기 엄마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안쪽으로 열리는 문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아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문을 잡고 있는 네 손가락이 보이고 문턱에 얹은 한쪽 발은 문에 가려지고 나머지 한 쪽은 문 안쪽에 걸친 모습으로 굳어있었다. 그 상태로 꿈은 계속 이어졌다. 장면도 안 바뀌고 더 이상 내가 이 세계에 지체하고 있을 의미도 못 느끼고 있는데도 그 상황은 한참동안이나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지루하다 못해 내가 꿈에서 깨려고 정신을 흔들며 두 눈에 힘을 주어 꾹 감고 눈꺼풀을 번쩍 들어올렸을 때 나는 내 방 천장이 보이는 곳으로 돌아왔다.
잠에서 깼는데 시간은 아직 새벽인 모양이다. 꿈속에 더 머물러 있었다면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을까하고 늘어진 채 누워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깜짝 놀라 지금은 더 이상 잠이나 잘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옆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인데, 내 귀는 토끼 귀처럼 밝으니까 분명 잘못 들은 건 아닐 것이다. 내 방과 맞닿은 바로 옆방은 고모 방이고 그렇다는 건 고모가 돌아온 걸까? 그런 생각에 당장 달려가 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든다. 이런 새벽에, 내가 잠든 줄 뻔히 아는 오밤중엔 고모는 쥐 죽은 듯이 휴지 하나 버릴 때도 내가 깨지 않을까 살포시 내려놓을 만큼 극성인데다, 화장실을 가더라도 오리처럼 우스꽝스럽게 걸어가는 그런 고모이므로 잠 귀 밝은 나에게 있어서 배려심이 여간 어지간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군가 거칠게 내면서 물건들도 서로 부대끼는 소리를 내며 그런 소음들이 뒤섞여 불규칙적으로 들썩이고 있다. 뭘까. 설마 도둑이라도 든 건 아닐까. 아빠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문을 잠그는 습관을 잊어버렸다. 어떻게 그런 간단하고 중요한 습관을 홀라당 까먹어 버릴까. 우선 아빠를 깨워야겠다.
몸이 가볍고 잽싸 아빠 방까지 빠르게, 또 몰래 가는 일쯤이야 간단했다. 또 나는 문틈을 빼꼼 내다보고 들여다보는 데 능했으니까 조용히 방문을 여는 법도 똑같다. 하지만 방에 아빠는 없었다. 화장실을 갔다면 고모 방에서 나는 섬뜩한 소리를 들었을 텐데. 더 의심스럽고 겁이 난 나는 그래서 조용히 문고리를 돌리는 기술을 큰 맘 먹고 대담하게 사용해 보기로 했다. 고모 방으로 다가갈수록 어떤 감 때문에 두렵다기보단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중요한 순간에 침착함 없이 촐랑거려 저 조심성 없는 도둑처럼 들킬 소리를 낼 내가 아니다.
목적지에 도달해 조심스레 문고리를 살짝 돌려 안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좁은 문틈으로 확실히 보이는 건 커다란 뒷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은 장롱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오늘 걷은 빨래감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 뒷모습의 주인이 아빠인 걸 알았지만 왜 이 한밤중에 그러는지 잘 모르겠으므로 정말 도둑이 거기 있었다한들 그런 상황과 비슷할 만치 난 이상했다. 오전에 널어놓은 빨래가 밤이면 다 마르는 건 맞다만은, 그건 내일 날이 밝으면 넣어놔도 될 일인데 말이다.
“너희 고모 집이 있는 거 아냐?”
“응 당연히 있지. 우리랑 쭉 같이 살아왔잖아.”
“아니, 너희 아빠 집 말고 따로 집을 두고 거기서 사는 거 아니냐 이 말이야.”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리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할 근거가 없었다. 나는 고모가 나가면 그 이후로 어떤 정보도 깜깜했기 때문이다.
“그럼 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물어보면 되잖아.”
“바보야 그걸 어떻게 물어보냐.”
“물어도 못 보냐? 그럼 어떡해?”
어느새 나는 대화 밖으로 밀려났다. 친구들은 저들끼리 신나게 우리 고모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다.
“그래! 그럼 미행을 해보는 거야.”
“에이 뭐래. 야, 토끼야 넌 어때?”
“…사실, 나도 궁금하긴 한데…”
“좋아 결정난거다!”
나는 지난 번 고모가 보낸 마지막 답변의 다음 말로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냈다. 고모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약속 장소를 내가 알기 쉬운 장소로 역시나 쉽게 설명해주었다.
고모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의 야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아빠가 예전에 담배를 피우던 모습을 떠올리면 끔찍이도 미워졌는데 그와 달리 지금처럼 고모가 느릿느릿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 어째선지 미워할 수가 없다. 고모는 내가 보는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걸 지독히 싫어했지만, 나는 고모 입에 문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 까지 잠시 동안 조차도 기다릴 수 없었다.
“고모!”
“우와 우리 토끼 잘 지냈어?”
고모는 얼른 담배를 눌러 끄고 연기를 휘휘 저으며 나를 반겼다.
“고모 어디 있었던 거야, 정말 집이 따로 있는 거 아냐?”
“누가 그런 소릴 해? 정말 내 집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럼 우리 둘이 거기서 살게.”
“나는 우리 집이 싫지 않은 걸. 아니 잠깐만, 싫어하지 않아도 떠날 수 있댔나? 그나저나 곧 운동회란 말인데…”
나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고모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고모는 서서히 돌아갈 눈치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고모 나도 따라가 보면 안돼?”
“그건 안 돼 토끼야. 고모도 토끼랑 계속 이대로 있고 싶지만…”
고모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 변화는 평소 당차고 생기 있는 고모의 눈빛을 푸석푸석하게 말라 죽이는 가뭄 같으면서도 우리의 이별을 더 아프게 만들어 버리고만 나의 응석이 바늘이 되어 콕 찌른 아쉬움이 눈물처럼 울컥 올라오는 홍수 같은 것이었다. 여느 때와 달라진 고모의 그런 모습이 무서워 나는 곧바로 후회했고 얼른 고모가 다시 평소 같은 표정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에 내 말을 거두어 보려 했다.
“응. 알았어. 다음에 또 봐 고모.”
“그래. 고마워. 우리 토끼, 고모가 미안해.”
나는 고모와 헤어지는 그 길로 집에 와 버렸다. 친구들이 내일 한 소리 하고 놀려대겠지만 나는 그저 고모와 따로 헤어지는 게 아닌, 딱 그런 식으로 마주보고 작별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음날 다시 고모를 쫓게 되었다.
“야, 토끼야.”
“하고 싶은 말 있음 마음껏 해.”
“어라? 너 너무 당당하게 나온다.”
“그러니까 할 말이 없어지잖아 우리가.”
“그건 그렇고 너희 고모 왜 그런 곳에서 계시는 거야?”
“어디? 너희 설마 우리 고모 따라 가봤어?”
“응. 네가 나중에라도 궁금해 할지도 모르고, 뭐 사실 우리도 거기까지 따라갔는데 그냥 돌아오기 아깝잖아.”
“우리 고모가 왜? 어디로 가던데?”
“잘은 모르겠는데 무서워 보이는 곳이었어. 네모났고 커다란 쇳덩어리들이 막 여기저기 있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커다란 안쪽에서는 쿵쿵하는 소리가 우리가 있던 이만큼이나 먼 바깥까지 울리는 거 있지. 또 사람들은 어떻고. 지나다니는 아저씨들 옷이 얼룩덜룩 더러운 데다 하나같이 웃는 사람이 없고 인상도 투박하고 표정도 어둡고 그랬어.”
나는 반신반의 하면서 친구들이 알려준 곳으로 가는 길에 그곳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어떤 곳일지 상상해봤다. 하지만 상상 속의 모습은 고모처럼 예쁜 사람이 있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흑백 도화지처럼 그려졌다. 그러다 만약 혹시라도 내 상상보다 더 기분 나쁜 곳이라면 나는 더 상처 받을 것 같아서 아무 생각 말기로 했다. 막상 도착해서 실제로 보니 정말 조금 무서워 보이는 곳이긴 했다. 커다란 상자들은 쇠나 철로 만들어진 것 같아보였고 또 색깔은 붉은색, 푸른색 다 달랐지만 검은 때가 눅눅하게 구석구석까지 묻어 있는데다 녹이 여기저기 슬어 하나같이 모든 게 다 칙칙해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저씨들이었다. 나이는 아빠뻘 되는 사람들인 것 같아도 표정은 아빠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그런 똑같은 표정을 달고 다니는 아줌마들도 가끔 보이고 젊은 여자들은 아주 드물게 있는 것 같았다. 그들 중에서 우리 고모처럼 젊고 하얀 얼굴은 눈 씻고 찾아 봐도 볼 수가 없었는데 그때 문득 어쩌면 우리 고모 얼굴색이 저리 시커멓게 변해버려 내가 알아채지 못 한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덜컥 마음을 찔러 심장이 쿵쾅거리기도 했다. 이곳은 땅바닥도 밤하늘 같아서 잠도 편히 못 잘 것 같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방에 맘이 놓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커다란 쇳덩이, 친친 뭉쳐진 정체불명의 비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고무호스까지도 물론이고 심지어는 하늘까지 희끄무레 죽죽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모를 찾지 않기로 하고 돌아왔다. 괜히 또 쓸데없이 상상력이 커져서 그 예쁜 고모도 혹시라도 기름 때 묻은 것처럼 지저분한 누더기를 입고 있으면 어쩌나하고 무서워져 아예 마주치지 않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고모가 그런 곳에서 들어갔는지 통 이해가 안 갔고 혹 친구들이 장난으로 거짓말을 했다거나 그게 아니면 잘못 본 게 아닐까 의심도 들길 간절히 바랄만큼 지쳐버리고 말았다.
고모의 방 책장엔 책이 아주 많았다. 고모는 내가 물어 보면 책 내용 역시 쉽게 설명해 줄 만큼 확실히 책을 그저 장식으로 쌓아 놓는 게 아니었다.
고모는 뭐 하는 사람이야? 라고 물으면 고모는, 고모는 공부하는 사람이야 라고 대답했다. 그럼 공부하면 돈도 받는 거야? 라고 더 물어보면 고모는, 좀 더 열심히 공부하면 돈도 벌 수 있단다. 라고 답해 주었다. 그에 나는, 공부처럼 엄청 하기 싫은 일을 어른이 되어서도 한다는데 그렇다면 엄청 돈을 많이 줘야한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고모는 그 말에 명랑하게 웃었다.
고모도 공부 안 하면 아빠한테 혼나? 라고 물으면 고모는, 아니 오히려 오빠는 작작 하라던데 라고 애교 있게 말했다. 그리고 이어 고모가, 토끼는 공부 잘 안 하는구나. 아빠한테 혼나지? 라고 되물었다. 정말이지 나는 모범생이 아니었는데 아빠에게 공부하는 모습을 들켜 준적이 없었다. 하지만 난 공부 때문에 혼난 적은 결코 없다. 우리 또래에 단연 뜨거운 이야깃거리가 되는 시험 성적표 확인 사인 받는 날에도 나는 혼난 일이 없으니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고모 있잖아 아빠 화나면 많이 무서워? 가끔 이런 엉뚱한 질문이 고모를 즐겁게 했다. 뭐? 하하하. 별일이네. 그런 걸 고모한테 다 물어 보니. 오빠보고 토끼한테 혼 좀 내라고 해야겠다. 라고 고모가 귀엽다는 듯 겁을 주면 나는 폭 몸을 움츠리고 물어본다. 왜? 왜? 그냥 고모가 말해주면 안돼? 하고 하면 그럼 고모는, 뭐든 직접 보는 게 빠른 법이지 하하하 하고 웃어넘기고 말았다. 아마 아빠는 고모에게도 화 낸 적이 없었나 보다.
나는 어제 본 그 무서운 장소와 친구들의 증언을 고모한테 물어봐야 할지, 아니면 아빠한테 먼저 털어놔야 할지 고민되었다. 고모에게 물어보자니 고모가 차마 나를 데려가 주지 못하겠다며 짓던 표정이 떠올랐고, 아빠에게 말해 보자니 평소 고모가 사라져도 찾아보거나 하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는 지라 아무런 소용없는 말이 될 것 같다고 넘겨짚게 되었다. 그렇담 이참에 아빠를 슬쩍 떠보는 건 어떨까?
아빠는 또 부엌에서 바쁜가보다. 나는 저녁 준비를 하는 아빠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아빠 고모 안 찾어?”
“냅두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돌아오면 또 나가버리면 어떡해? 계속 사라지고 나타나고 없어졌다 돌아왔다 그럴거야?”
“그건 고모 마음이야. 결정은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어.”
“아빠 너무 무심해.”
아빠의 태도는 늘 기다리는 식이었다. 그런 행동은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런 방식이 거슬리거나 내게 충격을 심하게 주지 않았으니까 그냥 숨죽이고 지내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빠 입으로 너무도 남의 집 일인 것처럼, 그리고 자기 동생이 아니라 그저 아는 집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여자를 부르는 것처럼 애정 없이 고모를 부르니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엄마도 안 찾는 거야? 엄마가 왜 나갔는지, 고모가 왜 나갔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러고 있어야 돼? 혹시 내 탓이 있는 거야?”
순간 아빠의 몸이 굳었다. 나는 아빠가 버럭 화라도 내길 바랐다. 그래서 홧김에 모든 진실을 쏟아 붓길 바랐다. 그렇게 사라진 이유가 뭔지, 왜 나는 데려가지 않았는지, 그 원인이 내게 있었던지 아니면 아빠가 잘못해서 집이 못 견디겠어서 나가버린 건지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아빠는 숨소리 하나 달라지지 않고 말했다.
“너는 아무 잘못 없어.”
“그럼 아빠 때문이야? 고모도, 엄마도?”
“…그래.”
“고모가 그런 무서운 곳에 간 것도?”
순간 아빠에게 어떤 다른 느낌이 전해져왔다. 뒷모습은 여전히 굳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도망쳐왔다. 아빠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 쏘아붙여봤자 아빠는 가짜 연극을 끝까지 고집할 것이고 그럼 나는 진실과 더욱 멀어질 것이다. 여태 아빠가 누구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고모나 엄마와 사소한 다툼조차 벌이는 일 없었다. 나는 아빠 목소리가 날 때부터 큰소리를 낼 수 없도록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고모랑 장난을 칠 정도로 아빠는 언성을 높이는 일 없었다. 고모는 웃다가도 뒤에 아빠가 까칠하고 수줍어서 쌀쌀맞은 면이 있지만 그건 순진해서 그런 것이고 사람 관계에서 후회를 남기는 경솔한 위인은 아니라고 쉽게 정리해주었다. 그렇게 순진한 아빠는 자신 때문에 집을 나갔다는 거짓말을 용케 말로 내 뱉어도 나를 속이진 못했고 고모가 어디 갔는지도 뒷모습이 다 불어버리고 말았다.
고모 나 때문이야?
응? 뭐가?
고모 집 나간 거… 그리고 엄마도…
누가 그래? 어디서 이상한 소릴 듣고 왔구나. 절~대로 아니야. 우리 토끼는 하나도 잘못 한 게 없어요.
아빠한테 물어봤거든. 왜 모두 사라지냐고. 그랬더니 아빠는 자기 탓이래. 아무래도 나한테 또 숨기기만 하나봐.
고모?
고모는 내 마지막 말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혹시라도 다시 엄마 꿈을 꿀까 기대하며 잤지만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아침이 밝아 온 천장이었고 김이 더 팍 새버리는 건 밖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가 하루를 깨웠기 때문이다.
“잘 잤어? 아침 차리는 중이거든.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
“응? 왜 그러니?”
“아줌마는 왜 우리 집에 자꾸 오는 거예요? 다른 뜻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아침 다 됐어. 금방 갈게. 불편했다면 미안해.”
아줌마는 당황한 기색 보다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 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정말 아줌마가 싫으냐?…”
“…그냥 내겐 어려워요. 모든 게 어려울 뿐이에요.”
“그래. 알았다. 어찌됐건 여긴 너와 나의 집이니까 네 말도 무시 받아선 안 되겠지.”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그 여자에게 다가가 간단한 위로의 사과에 덧붙여 몇 마디 더 했다. 그 여자는 웃는 낯으로 아빠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고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는 기운도 없이 떠날 채비를 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 여자는 그 순간 까지도 밝은 낯빛으로 나와 아빠에게 작별을 건넸다. 그리고 아빠는 열린 문 뒤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 그리고 한 발은 문턱에 걸쳐진 상태이고 나머지 한 발은 안쪽에 두고선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다.
그 여자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 온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는 도시락을 싸 주고 갔는데 엄마가 안 계신 지금 만약 아빠 혼자 운동회 도시락을 쌌다면 오후에 있을 달리기 경주에서 순위권 도장을 받기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어색해진 분위기가 싫어서 이 얘기를 꺼냈더니 아빠도 웃으면서 나에게 딱밤을 톡 던진다.
오전 날씨는 그늘이 없어도 햇볕이 서늘하게 내리 쬐어서 시간이 짧다 느껴질 정도로 금방 지나갔다. 솔직히 그 여자의 음식은 맛있긴 했다. 성에 안 찬다는 티나 팍팍 내려고 한 두 젓갈 먹고 관두려했는데 어쩌다 보니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말았다. 뭔가 분한 느낌인데다 고개를 들면 아빠가 내 약을 살살 올리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운동장 쪽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아빠는 별 장난 없이 도시락을 챙기고 오후 경기가 뭐냐고 물었다. “달리기!”
“시원하게 달리고 와.”
“달리기는 자신 있으니까 1등은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야.”
“마음 급하게 먹다 다치지 말고.”
“걱정 마. 만약 1등을 놓치면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서 저 멀리 사라져 버릴 거야.”
고모. 나 1등 도장 받아서 사진 보내줄게.
응 우리 토끼 다치지 말고 힘내!
아빠랑 같은 말만 해. 걱정 마. 내 실력 이모가 제일 잘 알지?
…토끼야
왜? 아, 설마 방심하면 2등이나 3등으로 밀려날 거라고 또 걱정하려고 그러지?
…오빠는 …아빠는 기다리시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토끼 엄마도, 나도 아빠는 기다리시는 거야. 우리들의 선택을 그저 바라봐 주는 거야. 그리고 그 여자도 우리 토끼의 마음, 그리고 오빠의 마음을 기다리는 거고.
어… 고모. 무슨 말인지 당장은 어려운데. 평소처럼 쉽게 말해주면 안돼?
무엇이든 결론 지어진 건 없어. 억지로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없고. 우리가 어딘가로 방황하다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든, 혹은 다시 돌아오게 되든 원래 자리에 있는 아빠는 그저 문과 마음을 열어두고 기다릴 뿐이야. 그러니까 토끼야. 고모는 우리 토끼도 아빠랑 사이좋게… 그렇게 커갔으면 좋겠어.
고모답지 않게 말이 어려워. 아, 고모 나 나중에 천천히 다시 읽어 봐야할 것 같아. 달리기 지금 시작한대.
그래 우리 토끼. 사랑해. 너무 서두르지 마. 알겠지?
그럼. 믿으라구.
방송으로 달리기 시작을 알리고 준비 소식을 전했다. 나는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출발선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우리 가족 자리를 돌아보는데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자리를 잡은 모양인데 그럼 말이라도 해주고 가지. 그 여자라도 따라왔으면 빈자리에 짐이나 지키게 시켰을 텐데 꼭 필요할 땐 도움이 안 되는 여자라니까.
출발선 앞에 발을 턱 딛고 보니 주자들 중 내가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양 옆에 서 있는 아이들은 모두 나보다 한두 발 느린 아이이거나 한참 느린 아이도 있었다. 걔네들도 내 실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긴장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반면에 나는 딱히 긴장 없이 여유롭게 1등을 차지 할 것 같은 자신감이 솟구쳤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 포즈는 어떻게 잡을까? 고모가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엄마도.
체육 선생님이 출발선 바깥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화약총을 높게 들고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들의 시선은 한 곳을 꿰뚫을 듯 주시하고 있었고 1번 주자부터 차례차례로 몸을 움찔움찔 거리며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나 혼자 너무 평온하게 준비하고 있어서 마치 서너 살 더 위의 아이가 동생들과 마지못해 달려야 하는 것처럼 자세가 가장 부드러웠다. 체육 선생님의 선글라스 뒤쪽에서 눈썹이 살짝 씰룩거렸고 나는 이미 거기서부터 눈치를 챘다. 총을 쏘고 나서 트랙에서 비키려고 몸의 중심을 뒤쪽으로 미리 기울이려는 다음 동작의 미세한 기미까지 다 읽어냈고 눈 한 번 깜빡할 새야말로 화약이 터져버리는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왼쪽에서 허벅지를 들썩이던 녀석의 리듬이 꼬여버린 것을 감지했고 그녀석이 출발 첫 발 구르기에서 천근만근 무거워진 다리에 당황해 시작부터 뒤쳐져 울면서 달리게 될 거라는 것과, 오른쪽 편에 시작도 안 했는데 땀을 질질 흘리는 녀석은 왜 이렇게 시작 안 하지 라는 생각에서 왜 이렇… 부분에서 찢어지는 탕! 총소리에 놀라 그만 반의 반 박자 느린 출발을 달리는 내내 아쉬워하며 뒤에서 두세 번째 정도의 순위로 들어올 것 이라는 결과까지 훤하게 보였다.
나는 체육 선생님의 손가락과 동시에 튀어 나갔다. 보통은 탕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진 뒤 그 소리에서 한 숨 정도 쉬고 나서야 사람들의 응원과 환호소리가 시작되는데, 그 열광이 시작되기도 전에 한 선수가 놀라운 기량으로 번개 같은 스타트를 보여주니 사람들은 놀라움과 짜릿함으로 오늘 경기 가운데 가장 크고 높은 소리로 감탄을 질러댔다. 나는 그 소리 속에 녹아있는 칭찬, 과장, 듣기에도 민망한 소리 하나하나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었고 이미 이건 1등 중에서도 압도적인 1등 이겠군 하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 두 발이 가벼워졌다. 내 발바닥은 바닥을 떠나 하늘을 휘젓고 있었고 그러자 내 상체는 앞으로 쏠려갔다. 몸보다 마음이 서두르는 바람에 내 다리가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결국 나는 넘어졌고 얼굴로 넘어져 웅크린 몸이 데굴데굴 구르는 와중에도 정신이 공중에 흩뿌려지듯 조각났다. 순간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아니, 주위에 사람들의 입은 크게 벌어지고 혀뿌리가 요란하게 요동치는데 내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콜로세움 한 가운데 던져진 연약한 인간이 되었고 두려워졌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아빠와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는 꿈처럼 눈을 꼭 감았다 뜨면 내 방 천장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을 힘껏 들었는데 아빠가 보였다. 역시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아빠는 꿈속의 장면보다 내게 멀리 있었다. 그런데도 아빠의 모습은 또렷이 보였는데 그건 쭈그리고 앉아 내 눈높이를 맞춘 같은 선상에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빠는 두 발을 땅에 딛고 그 상태로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너무 깊게 잠 들어서 눈을 꼭 감았다 뜨는 것으론 부족하고 출구로 달려 나가야 꿈을 깰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출구를 향해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굴렀다. 원래 나는 분명 빠른데 꿈속이라 역시 몸이 무거운가 보다. 몸이 가볍지 않고 어떤 거친 손이 나를 아래로 잡아끄는 듯이 무겁지만 저 곳에 다다르기만 하면 모든 게 괜찮을 거다. 힘이 들수록 출구는 밝게 보였고 아빠의 모습은 마치 두 발로 깊이 뿌리 내리고 두 팔을 넓게 가지 뻗은 나무처럼 보였다. 저 먼 곳에서 아빠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