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의 방
아내는 촬영장에 오지 않았다. 산에서 조난을 당한 주인공들이 별장을 찾아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통나무를 쌓아 제작한 별장 세트 안에 부서진 탁자와 나무 의자 몇 개가 놓여졌다. 버려진 흔적을 연출하기 위해 소품 담당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에 거미줄과 타고남은 재 같은 것들을 흩뿌렸다. 꼭 맞는 세트를 구현하기 위해 수많은 섭외 가능 장소들을 무시하고 무리해서 제작 한 것인 만큼 먼지 자국 하나까지 치밀하게 세팅되어야 했다.
손수건으로 옷을 털던 나는 멀리서 분장을 고치고 있던 유한석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목례했다.
반대쪽에서 조감독이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지금 수연씨가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떻게 된 거래요?”
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조감독의 말투엔 은근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몸이 좀 아픈가봐. 한석씨 등장하는 씬부터 맞춰보지.”
조감독은 나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을 배치시켰다. 유한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장씬을 준비했다. 난 유심히 그를 관찰했다. 카메라 바깥보다 카메라 앵글 속에 잡히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만큼 선이 뚜렷한 미남이었다. 그를 보면 흰색이 떠올랐다. 피부가 유난히 흰 것도, 흰 옷을 즐겨 입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분위기가 가진 색깔이었다. 매일 같은 향수를 뿌리는 사람처럼 그의 색깔은 항상 같았다. 흰색은 어떤 색보다도 뚜렷하면서도 스스로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하는 색깔이다. 그래서 난 그를 캐스팅했다.
유한석은 집중력이 좋은 배우였다. 대본을 정확하게 볼 줄 알고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사실 유한석의 역할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었다. N이라는 배우가 있었고 나는 N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첫 눈에 알아보았다. N의 매니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에게 대본을 들고 와서 수정을 요구했다. 광고가 들어올 만한 장면을 부각 시켜달라거나 협찬을 받고 있는 제품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장면, 신체의 특정 부위가 노출되는 장면들 따위들을 걸고 넘어졌다. 난 물론 그러한 미개한 요구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번에 N에게 욕설을 퍼붓고 촬영장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나마 지켜보았던 것은 내 아내를 대하는 N의 태도 때문이었다. N은 첫 모임 때부터 오랜만에 영화계에 복귀한 내 아내에게 관심을 뒀다. N의 시선, 자세, 말투에서 내 아내를 향한 못된 욕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치근덕거리는 여배우가 감독의 부인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건지 날이 갈수록 N은 발정난 개처럼 아내에게 집요하게 접근 해댔다.
N의 수법은 뻔했다. 난 모르는 척 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기 전, 아내는 오랫동안 삭혀온 고민을 털어놓듯 나에게 N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그날 밤 N이라는 배우의 도덕적 몰상식함과 비루한 연기력, 썩은 인간성 같은 것들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실제로 N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 N이 내 아내를 불쾌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애초부터 내 아내가 끌릴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내가 스스로 N의 추악함을 알아보고 불쾌해질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었다.
N의 역할은 그 때 끝이 났다. 다음 날, N이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에서 나는 그의 옷을 벗기고 진흙탕을 뒹굴게 했다. 그는 기대만큼 형편없는 연기력으로 날 만족시켰다. 스턴트맨들에게 그를 수차례 밀어 진흙탕에서 올라오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매니저는 안절부절 하다못해 울상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결국, N은 진흙탕으로 뛰어든 매니저에게 업힌 채 반 실신 상태로 촬영장을 떠났다.
카메라는 문을 열고 별장 안으로 들어오는 유한석의 모습을 잡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별장의 문을 열고 들어와 천천히 안을 살폈다. 하루 종일 산 속에서 헤맨 조난자답게 그의 양 볼은 푹 꺼져서 광대가 튀어나와 있었다. 배낭을 바닥에 풀어놓고 먼지 쌓인 서랍장들을 뒤졌다. 숨겨진 편지를 발견해 읽는 장면에서 조감독은 나를 쳐다보았다. 끊고 가겠냐는 의미였다. 난 고개를 저었다. 씬이 나뉘는 부분이었지만 연극처럼 이어가 보기로 했다. 유한석의 몰입도는 그만큼 높았다. 그는 편지를 찬찬히 읽고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카메라는 멍한 그의 눈빛을 클로즈업 했다. 초점 없는 그의 표정이 화면 가득 잡혔다.
난 흠칫 뒤로 물러났다. 주변을 살폈다. 아내가 이미 들어와 함께 그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무랄 데 없는 연기였다. 내가 상상했던 인물을 그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입체적으로 표현해내는 유한석을 보며 아내는 감탄했었다.
어머, 너무 완벽하지 않아? 그가 합류해서 처음으로 연기를 보이던 때 아내가 나에게 속삭였다. 난 그때 웃었다. 나 또한 배역에 딱 들어맞는 배우를 찾아내어 기뻤다. 아내가 늘어놓던 유한석에 대한 칭찬에 마냥 동조해주었다.
아내는 그녀의 눈에 마냥 어린애 같았을 유한석을 잘 챙겨주었다. 나의 눈에도 유한석은 진지한 태도로 예술이라는 높은 벽돌담을 침착하게 응시하고 있는 영특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난 무시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모두 눈치 챘을 아내와 유한석의 미묘한 기류를. 쫓아낸 남배우 N에 대한 우월감에 도취되어 상황을 파악치 못한 내 잘못이었다. 유한석이 놀라운 예술적 기량을 보일 때마다 아내는 입을 틀어막고 그의 연기를 감상했다. 회식자리에 잘 남지 않던 아내가 유한석이 참석한 회식 장소엔 곧잘 남기 시작했다. 피곤하니 그만 들어가자는 나의 말에 고개를 젓고 다시 회식자리로 돌아가던 그녀를 난 잡지 못했다. 질투심이라는 것은 그녀가 반한 나의 모습엔 들어가 있지 않은 감정이었다.
난 집에 가겠다고 나선 나를 밖에 내버려 둔 채, 배웅했답시고 식당 문을 닫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녀의 머리에 질끈 묶여 있는 머리끈을 끝까지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아내가 나타난 것은 오후 촬영을 모두 끝마치고 붉은 노을이 어느 샌가 촬영장의 안팎으로 스며들 무렵이었다.
“이제 왔네, 대단한 여배우님 이제 납셨어.”
기분이 상한 조감독은 주변에 들릴 만큼 큰소리로 비아냥거리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아내는 선글라스를 쓰고 촬영장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화장기 없는 얼굴로 목례하며 인사하는 아내의 모습은, 아까 나의 거짓 변명처럼 어딘가 아파보였다. 스태프들 몇몇이 아내에게 얼른 달라붙어서 옷을 받아주고 분장실로 이끌었다. 조감독이 잔소리를 하려는지 아내의 뒤를 쫓아갔다. 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유한석은 아내가 들어간 분장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엷은 미소를 띄며 곧 시선을 피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주변의 스태프들도 갑작스러운 나의 움직임에 반응해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내가 단숨에 그의 앞에 서자 그는 짐짓 놀란 듯, 의외가 섞인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평소 그에게선 결코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안 그러는 척, 시선들이 우리를 찬찬히 훑고 있었다. 난 그가 보고 있던 대본을 채갔다. 대본은 그가 분석한 장면, 캐릭터 따위의 메모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느릿한 호흡으로 찬찬히 그의 대본을 읽었다.
“한석씨, 연기한지 얼마나 되었지?”
“연극 무대까지 합치면 10년 조금 넘었습니다.”
“10년이라.”
난 유한석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잿빛 불안감이 차올랐다. 난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중이었다. 배우로서 감독을 대면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일지, 아니면 여배우 김수연의 남편이라는 존재로부터 느끼는 불안감일지.
“분석은 신중해야해. 감독의 조언을 충분히 듣고 작업했으면 좋겠어. 그동안 어느 감독들과 같이 작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작품에 임해서는 나에게 먼저 의견을 묻도록 해.”
유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선 의문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아내는 어느새 분장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느려진 호흡을 다시 되찾은 영화의 연출된 장면처럼 스태프들도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난 메가폰을 쥐고 조감독에게 촬영 지시를 내렸다. 조명이 켜지고 세트들이 들어왔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내였다.
“늦어서 미안해. 몸이 안 좋아서 연락을 못했어.”
아내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작게 낮춰 말했다. 화장으로 가렸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지 눈엔 실핏줄이 서 있었다. 순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내의 머리칼은 가르마를 타고 잘 빗겨져 이마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어제는 어디서 잔거야?”
나의 질문에 희미하게 웃음을 짓던 아내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아내가 뭐라 대답하려 호흡을 삼키는 순간 조감독이 나를 찾았다.
“감독님, 우선 앞의 씬을 연결할까요? 아니면 수연씨도 왔으니 여기... 이 씬 장면 한번 따볼까요? 아니, 가만있자... 오늘은 무리이려나.”
조감독은 아내를 못 미더운 듯 훑었다. 난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내의 눈을 응시했다.
“그저께는 어디 있었어?”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조감독은 나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아내는 곁눈질로 주변을 의식하고는 대답했다.
“어디 있었냐니요. 감독님?”
아내는 여기서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감독님, 이라고 덧붙인 말에 탁한 감정을 섞었다.
“집에 안 들어오고 어디서 뭘 했냐고 묻잖아.”
나의 목소리에 수많은 시선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아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어딜 갔겠어. 엄마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었잖아.”
거짓말, 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려고 하자 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두꺼운 화장 아래의 내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장모님 댁이냐고 물었던 나의 문자메시지에 그렇다고 짧게 보낸 아내의 답장을 다시 떠올렸다. 유한석이 아내를 데려다준다며 함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것 같다는 메이크업 스태프의 목소리도 귀에 아른거렸다. 난 대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과민한 것인가. 아내와 나의 관계를 오히려 내가 망치고 있는 것일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굽이 높은 워커를 신었음에도 나의 시선은 아내의 미간 언저리에 머물렀다. 난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냈다. 아내는 머리끈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그거 당신이 가지고 있었어? 한참 찾았었는데.”
“내가 매줄게.”
머리끈을 잡으려는 아내의 손을 물리치고 나는 아내의 뒤로 돌아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날개뼈 언저리 까지 매끄럽게 흘러내려왔다. 목덜미에서부터 머리카락들을 쓸어 모아 쥐자 차고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달콤한 바닐라 향기가 풍겼다. 아내는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 요즘 이상해.”
“뭐가? 남편이 아내 거처 묻는게 이상한거야?”
머리끈을 고정시키고 물러섰지만 여전히 헐거운지 아내가 다시 머리끈을 매만졌다.
“밥은 잘 챙겨먹었어? 반찬 뚜껑 잘 덮어뒀고?”
“응. 덮어뒀어. 머리 묶으니까 훨씬 낫다. 촬영 때도 이렇게 묶고 찍자.”
“글쎄. 거울 좀 보고 올게.”
돌아서서 화장대로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난 가만히 지켜보았다. 위태롭게 매달린 머리끈이 걸음걸이에 맞춰서 흔들렸다. 문득 집에 불을 켜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반찬 뚜껑을 정말 덮어뒀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홀로 누웠던 소파와 커다란 괘종시계. 몰래 들어갔던 아내의 옷방. 주황색의 불 빛. 허물처럼 걸려있던 수많은 옷들. 아내의 화장대. 그 거울 위에 비췄던 나의 모습. 갑작스럽게 이미지들이 파도처럼 몰려들자 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조감독은 오디오와 조명기기들을 배치시키고 있었다. 난 감독석으로 돌아와 앉아서 조감독을 불렀다.
“여기 백삼십번 씬, 한석씨랑 수연씨 준비시켜. 바로 촬영하지.”
“아, 그 씬이요? 그런데 수연씨 몸 상태 안 좋아 보이던데 괜찮을까요? 일정대로 한석씨 촬영 마치고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지금 할 수 있어. 얼른 촬영해버리고 편집 작업 들어갈 테니까 준비시켜.”
“그럼 스태프들 밖에서 대기시킬까요?”
“됐어, 우리가 심한 장면 찍겠다는 것도 아니고.”
몇 분간의 준비작업 후에 별장 세트에 유한석이 들어갔다. 그는 배낭을 바닥에 깔고 누워 눈을 감았다. 촬영장은 금세 고요해졌다. 감독인 나의 지시를 기다리는 이목이 집중됨과 동시에 유한석의 연기적 호흡이 주위를 장악해가고 있었다.
“액션!”
나의 외침과 함께 유한석은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세 대의 카메라들이 유한석의 주위를 돌며 다양한 각도로 그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인 모니터에 그의 표정이 클로즈업되어 잡혔다. 검은 분가루가 묻은 매끄러운 콧대와 그 위로 시원하게 이어진 눈매가 내 시선을 이끌었다. 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더욱 세밀하게 살폈다. 아내도 나처럼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을까.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서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한 그의 피부와 높게 솟은 콧대, 진한 눈매를 보며 그녀도 사뭇 감탄했을까.
난 말아 쥐고 있던 대본을 펼쳤다. 씬 백삼십. 지문에 적힌 대로 유한석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별장 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왔다. 남루한 흰색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때를 묻힌 아내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를 본 유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한발자국씩 다가갔다. 마주 선 남녀의 묘한 긴장이 이제 막 끓기 시작한 냄비물처럼 달아올랐다. 난 모니터로 아내의 머리를 죄고 있는 머리끈을 확인했다. 머리끈은 마치 아내를 뒤로 잡아당기며 그 둘의 로맨스를 방해하는 작은 악마 같았다. 그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며 대사 없이 서로의 입술을 포갰다. 카메라 한 대가 멀리 뒤로 빠지자 두 대의 카메라가 그 둘을 멀고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했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조감독이 나를 쳐다보았다. 끊고 갈 것이냐 하는 물음이 담긴 표정이었다. 내가 계속 가자는 의미로 고개를 젓자 조감독은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유한석의 왼손이 뱀처럼 아내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오른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내의 티셔츠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오디오를 타고 들어오는 그 둘의 숨소리는 점차 짧고 빨라졌다. 격렬하게 밀어붙이는 유한석의 힘에 밀려 아내는 소파에 걸려 넘어졌다. 순식간에 유한석은 아내 위로 올라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를 넘어 나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심장은 쿵쾅 거리며 요동쳤다. 조감독이 다시 나의 눈치를 살폈다. 두 배우의 연기는 대본에 적힌 요구를 벗어난 것이었다. 유한석이 아내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난 아내의 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분홍색으로 열이 오른 얼굴에 시선은 유한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이토록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 깜냥의 배우였던가. 고집스럽게 집중을 풀지 않는 아내를 보며 난 가슴이 갑갑해졌다. 난 메가폰을 집어 들었다.
“더 붙어! 엉덩이 더 잡아당겨, 더 세게 밀어붙이란 말이야, 더!”
촬영장은 별안간 내 고함소리로 울렸다. 컷이 나올 줄 알았던 스태프들은 다시 각자의 장비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배우들의 연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 입에선 섣불리 컷, 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장 토해내지 않으면 영원히 심장에 감겨버릴 듯한 답답함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들을 끝까지 몰아붙여서 연기 뒤에 가려진 무언가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내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여느 때처럼 벅찬 연기 장면이 나오면 곤란한 표정을 짓던 아내의 모습을, 나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고함에 잠시 주춤했다. 서로를 더듬던 손과 입술이 갈 길을 잃은 듯 제자리만 맴돌았다. 그런데 그 때 유한석이 아내를 번쩍 들고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아내의 밑으로 들어가 소파에 눕고 그녀를 이끌었다. 그 위에서 아내는 반쯤 벌거벗은 그의 몸을 더듬었다. 난 메가폰을 꽉 잡아 쥐었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유한석의 손은 아내의 어깨를 타고 올라갔다. 목덜미를 지나 그의 손은 순식간에 머리칼을 잘록하게 묶고 있는 머리끈에 닿았다. 심장이 저릿했다. 어느새 나의 몸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앞으로 쏠려 있었다.
아내는 자신의 머리끈을 건드린 유한석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손을 물리며 아내를 쳐다보았다. 동공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아내는 오히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끈을 풀어서 던졌다. 아내의 생머리가 공작의 깃털처럼 허공에 넓게 펼쳐졌다. 머리끈은 힘없이 벗겨져 날아올랐다. 난 하마터면 터져나올 뻔한 탄식을 입으로 틀어막았다.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나의 눈 앞에 머리끈이 날아가는 장면이 느리게 재생되었다. 그것은 촬영장 조명의 주황빛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온 몸에 저릿하게 전기가 흘렀다. 아내와 유한석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내가 내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난 코웃음을 쳤었다. 이봐, 난 예술가야. 농담조로 아내에게 툭 던진 말에 아내는 발끈했다. 난 배우야. 배우는 예술가 아니야? 아내는 내 손에서 대본을 뺏어서 읽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상기된 얼굴로 대본을 한 장 두 장 넘기는 아내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톡스인지 뭔지를 맞아 두툼하게 부어오른 이마. 도자기의 굴곡처럼 매끈한 턱선. 티 없이 맑은 피부. 그녀의 알량한 자존심만큼 높은 콧대. 그리고 날개뼈까지 닿는 적당히 긴 머리를 머리끈으로 고집스럽게 묶은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오래도록 그녀를 압박해온 어떤 불안감을 읽었다. 우연히 광고 모델로 뽑혀서 몇 편의 싸구려 로맨틱 코미디를 찍은 뒤에 덜컥 삼십대를 넘겨버린 어중간한 여배우. 작품이 끊기자 서둘러 은퇴를 선언하고 한 남자의 아름다운 아내로 살고 싶을 뿐이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뒤 얼마 후에 나와 결혼을 했다. 아내의 삶의 서사는 이렇게 단순했다. 그 단순한 서사에서 나의 역할은 새빨간 스카프, 노란색 우산, 크리스탈 테이블 따위의 미쟝센 같은 것이었다.
진정한 예술을 추구하는 괴짜 감독. 추악한 외모만큼 뛰어난 천재성을 가진 영화계의 별. 세간의 별 볼일 없는 부류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내의 서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는 지도.
아내는 대본을 다 읽고는 가방에 넣었다. 나 이 작품 할 거야, 꼭. 아내가 자신의 머리끈을 다시 한번 동여매는 것을 난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는 중부내륙도로를 타고 부산을 향했다. 영화의 시사회에 감독이 빠지는 일은 역시나 주목을 끄는 일이었다. 투자자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조감독, 극장 관계자들의 전화까지 감당해야 했던 핸드폰은 지쳐서 시트에 널브러져 진동했다. 가끔씩 뜨는 모르는 번호는 기자들의 것인 것처럼 보였다.
아내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새어나온 유한석과 아내의 스캔들은 영화의 개봉 소식보다 빠르고 후끈하게 타올랐다. 스캔들 뉴스는 팝콘처럼 마구 튀겨져 나왔지만 아내와 유한석은 함구했다. 나 또한 함구했다. 봇물 터진 듯 떠들어대는 것은 기자들과 모니터 너머의 손가락들뿐이었다.
목표물을 막 포착한 조준 장치처럼 스캔들의 프레임은 삽시간에 자신의 아내를 미남 배우에게 빼앗긴 추남 감독의 비극에 맞춰졌다. 대중 영화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좋은 소재이자 플롯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피식 웃었다.
경부고속도로의 끝 무렵을 지나고 있을 때야 핸드폰의 진동은 잦아들었다. 시계를 보니 시사회의 상영이 시작되었을 시간이었다. 마지막 편집을 조감독에게 맡기고 나왔을 때 조감독은 이미 눈치 챈 듯 했다. 그 개새끼 분량 다 짜를까요? 난 조감독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감독의 말처럼, 유한석이 삭제된 내 영화를 상상해보았다. 아내 혼자 걷고, 책을 보다가, 웃고, 울고, 산을 헤매다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며 머리끈을 풀어헤친다는 내용의 예술 영화 같았을까.
아내의 머리끈은 내 손목에 감겨 있었다. 그 장면 이후로 아내는 머리끈을 까맣게 잊은 듯 했다. 재촬영 요구가 없었으므로 아내는 꽤 만족스런 눈치였다. 아내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모습으로 촬영장에 지각했지만 왠지 아파보였던 그 예전의 모습은 없었다. 그 대신 그녀의 눈동자와 콧대엔 충만한 생기가 돌았다. 아내의 나체를 가리기 위해 요란스럽게 모여들었던 스태프들에게 짓밞혀서 윤기가 사라진 머리끈을 번갈아보던 나는 아내가 머리끈에 담겨 있던 정기를 빨아먹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머리끈을 선물했던 날 우리는 파스타를 먹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흘러내리면서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정리하는 모습이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머리끈이라도 하는 게 어때? 내가 불쑥 건넨 질문에 아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머리끈이요? 그래, 수연씨는 머리를 묶은 모습도 예쁠 것 같아. 사뭇 다정스러웠던 내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엉겹결에 나온 말인지라 나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난 재빨리 사족을 달았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알지? 유명한 그림말이야. 난 그 소녀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머리띠를 해서 드러낸 목덜미 때문인 것 같아. 뭐랄까. 한없이 수수해보이거든. 예술적인 어떤 풍미가 느껴지기도 하고. 난 수연씨가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야. 두서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아내는 내 말에 매료된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밥을 먹고 나가서 길거리에서 파는 머리끈들을 둘러보았다. 아내는 여러 종류의 머리끈을 하나씩 매본 뒤 나에게 보여주고를 반복했다. 난 무난한 검정색 머리끈을 건넸다. 아내는 천진한 표정으로 머리끈을 매고는 어때요? 물었다. 바늘 같은 8월의 햇살이 아내를 통과해 내 눈을 찔렀다.
네이게비션이 멈춘 곳은 산 중턱의 별장 앞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젊은 재벌들의 은밀한 만남의 장소쯤으로 나오면 참 적절한 로케이션이라 생각하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저녁의 설익은 어둠이 별장의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은 꺼져있었고 집 안은 물론, 주위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전의 세상과 분리된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별장으로 다가갔다.
이곳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샤워를 하러 들어간 아내의 핸드폰에 유한석의 메시지가 떴고 난 재빨리 그것을 확인했다. 끝없이 올라가는 메시지를 빠르게 훑으면서 아내가 자주 간다고 했던 ‘엄마의 집’이 사실은 부산의 별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소를 얼른 받아 적고 아내의 서랍 안에 있던 열쇠를 복사해두었다.
열쇠는 잘 벼려진 칼처럼 문고리를 파고들었다. 힘주어 돌리자 문은 힘없이 밀리며 별장의 어두운 속이 드러났다. 별장의 안에선 고독의 냄새가 풍겼다. 핸드폰의 불빛을 비춰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널찍한 실내엔 나무 탁자와 싱싱한 생화를 꽂은 화분, 갈색의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부엌은 거실의 한쪽 면에 위치해 있었고 흰색의 방문은 총 3개로 모두 닫혀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발바닥이 싸늘했다. 저녁의 진득함이 열린 문으로 흘러오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유한석과 아내가 몸을 섞던 그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별장의 거실과 소파...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방에 들어갔다. 행여 누가 들어올까 문을 잠그고 조명등을 키자 주황빛이 가득 찼다. 수백 벌의 옷이 뱀의 허물처럼 속을 잃은 채 행거에 걸려 있었다. 정글을 헤쳐 나가는 탐험가처럼 심장에 언저리에 고인 약간의 흥분을 다독이며 나는 천천히 아내의 방을 탐험했다. 검지손가락으로 둥그렇게 정리된 목도리를 찔러보기도 하고 손등으로 모피 코트의 장식 털을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언젠가 보았을지도 모를 아내의 물건들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담겨 나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난 길게 뻗은 방의 한 가운데서 멈춰 섰다. 사방에서 아내의 향기가 났다.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한 호흡 두 호흡. 늑골이 터져나갈 정도로 깊숙하게 아내의 향기를 마셨다. 문득 침이 달게 느껴져 난 꿀꺽 삼켰다.
가운 차림의 아내를 뒤에서 끌어안는 것을 나는 좋아했다. 아내의 머리칼의 향기를 맡으며 코를 부비다가 슬그머니 그녀의 머리끈을 풀어 내 손목으로 감아놓고서 그녀를 침대 위로 이끌곤 했다. 한 차례 몸을 섞고 나서야 아내는 내 손목에서 머리끈을 다시 빼서 자신의 손목에 감았다. 머리끈은 아내의 머리를 동여메고 있지 않으면 손목에 감겨 있었다. 그러니 이 머리끈에서도 아내의 냄새가 났다. 달콤한 바닐라 향기. 그러나 싸구려 같지 않은 깊은 향기. 후각을 만족시키고 미각마저 자극하는 그 향기에 취해 나는 남몰래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난 주머니에서 그 머리끈을 끄집어냈다. 침이 고였다. 호흡기를 빨아대듯 머리끈을 코에 대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삽시간에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차올랐다. 난 머리끈을 쥔 손을 바지 속에 넣었다. 단단하게 부어오른 그것이 끈과 함께 손에 잡혔다. 짧게 숨을 내쉬고 다시 숨을 가득히 들이마셨다. 자신의 옷 방만은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될 장소라 했던가. 방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놀리듯 말하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움켜쥔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불안한 숨소리가 고요를 부쉈다. 소리가 밖까지 새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 비밀스런 아내의 옷 방 어딘가에 은밀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가능성 없는 상상은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문득 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내 앞엔 아내의 화장대가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온갖 종류의 화장품. 그 위로 길게 솟은 금빛 장식의 거울. 그것은 내 모습을 비췄다. 나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빠진 머리칼. 누렇게 질린 얼굴. 문드러진 코 위로 칼로 그은 듯 날카롭게 찢긴 눈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반쯤 벌어진 입에선 사그라져가는 쾌락의 쉰내가 났다. 추했다. 난 바지에서 손을 빼고 뒷걸음질 쳤다. 아내의 옷들이 일제히 눈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010-7321-2867
추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