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생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택배 왔습니다.”
어...? 이상하네. 나는 물건을 주문한 게 없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뭔가 주문한 적이 없다. 일단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예빈 씨 세요?”
“네. 제가 지예빈 인데요. 그런데 이거 누가 보낸 건 지 알 수 있나요?”
“보내신 분 이름이 안 적혀 있어서 잘 모르겠네요.”
“아. 네. 알겠습니다.”
상자였다. 상자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보낸 건지 모르니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더 상상할 수 없어서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이걸 열어봐야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상자에 귀를 대봤다. 다행히 째깍째깍 거리는 시한폭탄의 소리라든지 뭐 그런 것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무 궁금해서 상자를 열어보기로 했다. 상자는 테이프로 붙여진 게 아니었다. 풀로 붙여졌나? 상자를 왜 풀로 붙였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열어보기로 했다.
드디어 열었다. 엥? 휴대폰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누가 쓴 것처럼 화면엔 지문이 묻어있는 스마트폰 이었다. 전원을 켜보았는데 배터리가 없는 지 전원이 켜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충전을 했다. 드디어 전원이 켜지고 휴대폰을 작동시켰다. 잠금도 되어있지 않았다. 개통되지 않은 휴대폰이어서 전화기록이랑 연락처 이런 것은 없었다. 사진첩에 사진도 없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하고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메모장에 아주 긴 메모가 적혀있었다. 메모의 내용은 이랬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전생의 너다. 내 이름은 김시준이고 20살이다. 여기는 1920년이다. 네가 있는 곳은 2017년이니 거의 100년 뒤에 내가 환생하나보다. 너는 지예빈, 18살이지? 놀라지 마라. 나도 18살에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를 하나 전달받았다. 인간에겐 네 번의 생이 있다고들 하지. 나는 두 번째 생이다. 너는 세 번째 생이고. 나는 20살이 되어 미래를 보았다. 2017년 네가 택배를 받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본 미래가 맞다면, 너는 이 편지를 읽고 있겠구나. 미래는 자면서 꿈을 꾸면 볼 수 있다. 미래에서 물건을 하나 가져올 수 있다. 나는 이 물건이 미래에 편지를 주고받는 것 같아서 선택했다..’
헉! 난 여기까지 읽고 믿을 수 없어서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람? 이건 말도 안 된다. 갑자기 보낸 사람도 없는 택배를 받았는데 뭐? 전생의 내가 보낸 거라니!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볼을 꼬집어보았다. 아야! 아프다. 꿈이 아닌가보다. 차라리 꿈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꿈이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아까 택배를 받은 것부터 잘못된 것 인가보다. 택배를 받지 말았어야 했나? 진짜 믿을 수 없지만, 저게 진짜라면 어떡하지? 나는 뭐지? 혼란이 너무 와서 계속 읽어볼 수가 없었다. 다시 휴대폰을 상자에 넣고 닫았다. 무서웠다. 친구인 수현이한테 전화를 했다. 수현이한테 오늘 일을 이야기 했다. 수현이는 말도 안 된다면서 헛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수현아, 진짜라니까? 나 내일 학교에 들고 가?”“아니. 무슨 소리야. 갑자기. 너 어디 아프지?”
“그런 게 아니라고. 진짜라고. 아니다. 너 어디야 지금?”
“나? 집이지.”
“그럼 내가 너 집으로 갈게. 딱 기다려!”
전화를 끊고 상자를 들고 수현이 집으로 막 뛰어갔다.
수현이네 아파트 밑 벤치에 앉았다. 수현이가 내려왔다. 얼른 이 믿기지 않는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이건 내 꿈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걸. 상자에서 휴대폰을 꺼내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수현이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수현이는 메모를 읽다가 휴대폰을 나한테 다시 건넸다.
“야, 이게 뭐야 진짜?”“봐. 나 거짓말한 거 아니라니까. 이거 내 휴대폰도 아니야.”
“내용이 믿기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이거 왜 이렇게 길어. 넌 다 읽어봤어?”“아니, 아직. 솔직히 집에 혼자 있는데 이런 거 받은 것도 무서운데 내용이 소름끼쳐서 기절할 뻔했다. 나는. 그러니 이걸 다 읽을 정신이 있겠어?”
“그것도 그렇다. 계속 읽어나 보자. 지금은 나랑 같이 있잖아.”
“그럴까...?”
“우리 집 올라와. 너 학원 없지 오늘?”
“응. 엄마한테 연락해야겠다. 와. 그나저나 엄마한텐 뭐라고 말해야 되냐.”
“그냥 일단 우리 집 놀러온 거라고 해.”
“그래.”
수현이 방으로 갔다. 으아. 일단 이걸 계속 읽어봐야겠다. 옆에 수현이도 있으니 이젠 조금 덜 무섭다.
‘이게 스마트폰이라는 것이라지? 보아하니 넌 이걸로 너의 모습을 간직하고 음악도 듣고 전화도 하더구나. 아무튼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훨씬 중요하다. 너는 지금 18살이지만, 나처럼 20살이 되면 꿈에서 다음 생의 너를 보게 될 것이다. 너도 다음 생의 너에게 보낼 물건을 미래에서 찾게 되겠지. 내가 받은 편지는 우리의 첫 번째 생을 살았던 ‘고현’이라는 사람에게 왔는데, 그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해서 굉장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이 나의 미래에서 편지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에 자신의 이야기와 내가 해야 할, 해야만 하는 일을 적어놓았다. 그가 알려준 내용에 따라 나도 너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꼭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너는 다음 생을 살 너에게 고현과 내가 했던 것처럼 이 사실을 이야기해줄 미래의 물건을 찾아 이야기를 써 놓아야한다. 그래야 마지막 생을 사는 그 아이가 우리의 사실들을 기록해놓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미래의 그 아이만이 알 것이다. 아마도 그 아이가 20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의 꿈에 나오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두 번째로 다음 생까지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너의 다음 생이면 우리의 마지막 생이니 그 다음 생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음의 다음 생은 볼 수 없다.
세 번째는 절대로 이 사실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지금 이렇게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나는 미래의 선 없는 전화기인 스마트폰을 내 주위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이 신기한 물건을 비싼 값에 팔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팔았던 사람에게 돈을 받고 이것을 건네주려는 순간 이 물건은 사라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 놓여있었다. 어떤 것을 고르든 너의 이야기를 쓰는 데만 미래의 물건이 유효한 것 같다. 나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고현 또한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보니 그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나보다. 전생, 환생, 후생. 나는 이런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있어도 죽고 나서야 알겠지 싶었다. 고현 또한 그랬다고 한다. 너도 그렇겠지. 이런 돌고 도는 생을 믿지 않았겠지. 아마도 우리의 공통점은 그것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비교적 빨리 연결되어 돌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기도 하다. 참 신기하다. 나는 윤회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쉬워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의아하다. 이제 어느 정도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해준 것 같다. 궁금한 것들이 많을 것 같아서 내가 알아낸 것과 고현이 알려준 정보를 계속 적겠다.’
“휴!”
수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한숨을 쉬려던 참이었는데. 뭐 아무튼 더 읽고 나니까 머리가 훨씬 복잡해졌다. 일단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은데. 이 부분을 확실하게 말을 안 해주네.
“수현아, 그런데 왜 하필 나일까?”
“그러게. 전생, 환생. 이런 건 나도 안 믿어. 너랑 나 말고도 안 믿는 사람 많을 걸?”
“이 넓은 세상에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거라고? 왜 하필 나람.”
“나도 그게 딱 궁금하다.”
“그리고 내가 왜 다음 생의 나까지 챙겨야 되냐. 어차피 걔는 나 없어도 잘 살텐데. 이렇게 나처럼 대혼란을 안겨주라는 게 내 의무일까?”
“하하. 대혼란. 맞다. 진짜 대혼란이 왔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누가 장난친 건 아니겠지?”
“장난치고 너무 정성스러운데. 편진지 뭔지 저거 길이를 봐.”
“휴. 하긴. 스마트폰을 하나 사서 저 정도 길이의 디테일함을 가진 메모까지 적어놓을 장난이라면 보통사람이 장난칠 수는 없겠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거 진짜 과거에서 보낸 건가? 어떻게 왔지.”
“택배! 택배로 왔어.”
“무슨 택배?”
“어? 그러고 보니까, 택배 아저씨 조끼에 택배회사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뭐였지? 안 적혀있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당연하지, 그럼!”
“...!”
“왜 그래?”
“기억났어. 택배회사 이름. 고현통운이었어.”
“고현? 아까 그 메모에 적혀있던 첫 번째 생의 이름 아니야?”
“어 맞아. 뭐지. 그 사람은 아니겠지?”
“에이, 첫 번째 생이라며. 어떻게 아직 살아있을 수가 있니. 그건 말도 안된다.”
“지금 이 상황도 딱히 말이 되진 않는데.”
“하하하. 그렇네.”
“아오, 꺼림칙해. 야. 벌써 7시다. 나 이제 집에 가야겠어. 내일 마저 읽고 전화한다. 후...기다려..알겠지... 아님 우리 집으로 오는 걸 추천할게. 그럼 난 이만.”
“읽다가 쓰러지지나 마. 그리고 엄마한테도 말해봐. 믿진 않으시겠지만.”
“어휴, 엄마가 뭐 이것저것 물을 줄 알고? 경찰한테 신고나 안하면 다행이다. 야. 우리엄마 성격에.”
“앗. 그걸 생각 못했네~”
“일단 내일 보자. 난 간다!”
집에 오니 엄마가 와 있었다.
“넌 어딜 갔다 와?”
“아, 수현이 집에서 놀다가.”
“일찍 들어오지. 저녁이나 먹자.”
“응. 근데 엄마.”
“왜?”
“어? 아니야. 그냥.”
“뭐야, 얼른 앉아.”
밥을 먹는 동안에도 머릿속에는 그 생각 밖에 안 들었다. 밥을 후다닥 먹고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계속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일 수현이를 만나면 수현이에게도 이야기 해주기로 했으니까 마저 읽었다.
‘꿈을 꿀 때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했었는데 꿈을 꾼다는 게 꾸고 있는 동안은 굉장히 오랜 시간으로 느껴지겠지만 실제 시간은 굉장히 짧기 때문에 항상 꿈을 꾸는 동안, 즉 미래를 보는 동안은 정말로 필요한 미래들만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짧은 시간 동안 네가 후생의 너에게 건네줄 적당한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후생의 우리에게 편지를 전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 모른다. 왜 우리가 해야 하는 지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만약 네가 알아낸다면 후생의 너에게 알려주도록 해라. 그리고 네가 지금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안다.
이 일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하지? 너의 미래를 보았으니 아마도 그렇겠지. 네가 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20살이 되어 네가 이 내용을 미래의 물건에 적어놓지 않으면 네가 꾸는 매번 꿈에 후생이 보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끝내는 게 너에게 낫겠지. 그런데 이 일을 끝내면 아마 이 일에 대한 기억도 없어질 것이다. 지금 너에게 모든 내용을 거의 다 해 가는데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고 있는 걸 보니. 아무튼 너도 이 일을 끝까지 잘 수행’
어? 내용이 끝나가는구나 싶었는데 내용이 이게 끝이었다. 쓰다가 배터리가 나간 게 분명했다. 아무튼 내가 궁금한 내용들을 다 알게 되어서 좀 덜 답답했다. 나는 여전히 오늘 하루 만에 일어난 일들이 믿기 힘들었다. 그만큼 실감나지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수현이에게 남은 메모의 내용을 이야기 해주었다. 역시 수현이도 벙 찐 상태였다. 둘 다 넋이 나간 상태라고나 할까.
“그럼 너는 20살이 되어야 이 이상한 상황들을 겪게 된다는 거지?”
“그렇겠지. 왜 하필 20살일까?”
“글쎄, 어른이라서 뭔가 판단을 잘할 것 같아서?”
“고작 2년 뒤다. 2년 뒤. 솔직히 난 지금의 나와 2년 전 나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봐. 정신상태가.”
“그건 당사자만 못 느끼는 거겠지. 중3이랑 고2가 같냐?”
“아무리 그래도 무슨 판단이래. 너무 아무말대잔치다.”
“사실 나도 말하고 나서 딱! 그 생각을 했는데.”
“얼른 20살이 돼서 이 머리 아픈 거 해결하고 잊어버리고 싶다. 언제 20살 될려나아아.”
“금방 지나가겠지. 2년 밖에 안 남았어.”“20살이 되기 전엔 잊을 수 없냐? 어휴. 왜 하필 한참 공부해야할 이 중요한 시기에!”
“너 공부 안 하잖아.”
“아오! 정곡을 찌르네. 그래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빨리 해결하는 게 좋지. 이게 뭐라고. 괜히 거슬려. 진짜 거슬려.”
“20살 되기 전까지 잊고 지내도록 노력합시다. 예빈 양~”
그 후로 며칠, 아니 몇 달 동안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고3 쯤 되어서는 완전히 까먹고 바쁘게 지냈던 것 같다. 수능을 치고 며칠 뒤에 수현이를 만났을 때, 수현이가 먼저 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예빈아, 그런데 그거 기억나?”
“응? 뭐?”
“너 작년에 무슨 택배 왔는데 스마트폰 왔다고. 막 전생, 후생. 이러면서.”
“응?”
“아 왜 있었잖아. 너가 무슨 후생의 너한테 뭐 무슨 이야기를 전해줘야 한다고. 막.”
“아. 맞다. 그랬지. 완전 까먹고 있었네.”
“어떻게 그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건을.”
“너무 바쁘게 살았잖냐.”“그래서 까먹은 건가? 나도 바쁘게 살았는데. 흠.”
“뭐 아무튼 그게 왜?”
“너 이제 곧 20살이다.”
“헐, 맞네. 그 미래인지 후생인지 그걸 꿈에서 본다는 거잖아. 좀 있으면.”
“그럼 새해 종치고 딱 그 꿈을 꾸기 시작하는 건가? 오. 좀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시간을 건너서 온 그 스마트폰부터 일단 말이 안 돼.”
“하하.”
“나도 뭐 어떤 식이라는 건지 감이 안 온다. 그 사람은 이런 건 못 봤나봐? 어휴 사람 귀찮게스리.”
“배터리 없어서 내용도 끊겼다며.”
“응. 그랬지.”
“말하려다가 실패한 게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야. 근데 이거 상당히 중요한 데 왜 미리 말 안 해줬냐. 으아.”
“또 머리 아프지?”
“어휴, 머리 안 아프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할 걸?”
“엄마는 아직 모르시고?”
“모르지. 나도 까먹고 살았는데 이야기할 틈이 어디 있었겠니.”
“하긴, 또 그렇다. 맞아.”
“아직은 19살이라서 꿈에 그런 거 안 나오던데.”
“새해 되고나서야 알 수 있겠네.”
“그렇겠지? 딱히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궁금하긴 해.”
“금방 될 거야.”
대학 발표가 나고 어느 새 연말이 되었다. 다가오는 새해는 여러모로 나에게 의미가 많았다. 그 궁금증도 풀 수 있을지 모르고, 이제 학생이 아닌 어른이 되는 평생 딱 한 번 있는 소중한 그런 새해 첫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록 원하는 대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내가 또 다른 가고 싶었던 학교의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수현이는 나와 다른 학교를 가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이 커서 우린 새해가 밝게 되면 연초에 만나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12월31일이 되었다. 난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새해 종 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부모님과 새해 첫 날 새벽을 함께 보내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 잠을 자러갔다.
하지만 내가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아니면 역시 그 의문의 상자와 메시지는 모두 누군가의 장난이었던 걸까.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못했다. 꿈을 꿨다면 뭔가 분명히 조금이라도 기억을 할 텐데.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을 단지 장난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누군가가 장난친 것에 내가 걸린 거다.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억지로 꿈을 꾸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다음, 그 다음 날도 나는 꿈을 아예 꾸지 않았다. 그 일을 장난이라고 추측했던 나는 점점 확신이 생겼다. 일주일 쯤 후였을까.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은 그냥 내가 놀이공원에 가는 뭐 그런? 평범한 꿈이었다.
결국 수현이와 만나는 날까지 나는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수현이도 의아해했다.
“왜 꿈에 안 나오는 거지?”
“난 이미 포기했어. 그냥 장난이야. 이거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난치고 너무 정성스러운데,”
“그럼 사기겠지... 아무튼 난 미련을 버렸다. 아예 마음을 비웠어.”
“...?”
“왜?”
“그냥. 난 장난이 아닌 것 같아.”
“꿈을 안 꾸는데 뭘.”
“그건 좀 이상하네. 나도 잘 모르겠다.”
수현이와 놀고 숙소로 가서 잠을 청했다. 나는 그날 밤 묘한 느낌의 꿈을 꾸었다. 바로 그 꿈.
꿈에서 후생의 나는 이름은 서은진이었고 얇은 전자패드?라고 하기엔 종이 같이 생긴 것에 필기를 하며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은 가상현실처럼 은진의 앞에 선생님의 수업하는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나는 그 꿈속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보통 꿈을 꾸면 내 시점으로 주변의 것들을 보게 된다. 현실에서처럼. 그런데 이번에 꾼 꿈은 내가 관찰하는? 아무튼 옆 사람의 시점으로 보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은진이란 아이에겐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고 은진이에게서는 약간의 빛이 나고 있었다. 마치 이 아이가 너가 맡은 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꿈에서는 내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수현아, 수현아!”
“으음. 왜?”
“나! 꿈을!”
“꿈...?”
“꿈을 꿨어! 꿈! 대박. 대박!”
“무슨 내용인데?”
“어.. 걔 이름은 은진?이고 막 빛이 나고 있었어. 진짜 홀로그램같은 걸로 수업 듣고 무슨 엄청나게 얇은 전자패드에 뭔가 적고 있었어.”
“정말? 헐. 신기해. 근데 그거 너 아니야?”
“확실히 내가 아니었다니까! 그게 무슨 묘한 느낌이 있더라고.”
“우와. 근데 왜 갑자기 보게 된 거지?”
“그러게... 새해 된 지 좀 지났는데?”
“모르겠어. 피곤하면 꾸는 건가...?”
“음. 뭐 아무튼. 미래 물건들은 좀 봤어?”
“아까 얘기했잖아. 얇은 전자종이 같은 거랑 홀로그램 선생님? 근데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너무 잠깐이었어.”“아~. 기분이 어때?”
“그냥. 신기하다?”
“에이. 그게 다야? 미래를 보고 왔는데?”
“너무 짧았어. 다시 잘까?”
“벌써 아침이거든. 오늘 피곤하게 놀아야 또 꾸지 않을까.”
“음. 그런가? 그럼 얼른 놀러나 가자.”
수현이와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갑자기 꿈을 꾼 것인지. 도통 추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밤도 꿈을 꾸었다.
이번 꿈에서 은진이는 친구와 함께였다. 친구는 혜연이었다. 은진과 혜연은 놀이공원에 있는 듯 했다. 이번엔 은진이와 혜연이의 대화도 들을 수 있었다.
“혜연아, 나 부모님이 홀로그램 프로젝터 바꾸려고 하는데, 네가 쓰는 거 좋은 것 아냐? 어때?”
“좋은데, 소리가 너무 울린다고 해야 되나. 울려서 잘 안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에휴. 뭘 사야하는지. 너 이거 타봤어?”
“안 탄지 몇 달 됐지. 너는?”
“나도 많이는 안 타봤어. 근데 이거 너무 재밌더라.”
“맞지? 나는 ‘눈 내리는 놀이공원’ 버전에서 타는 게 제일 재미있더라고,”
“오~ 그래? 나는 ‘단풍공원’ 버전이 재미있던데.”
“맞아. 그것도 단풍 사이를 지나다녀서 예쁘더라.”
“오늘은 무슨 버전 하지?”
“오늘은... 추우니까 ‘늦은 봄 초여름’ 버전으로 타자!”
“그래. 그런데 뭐뭐 타지?”
“나는... 롤러 뱅뱅뱅 타고 싶은데.”
“그럼 롤러 뱅뱅뱅이랑 뛰뛰뛰 타자!”
그러더니 전자 주문대로 가서 ‘늦은 봄 초여름’을 누르고 ‘롤러 뱅뱅뱅’, ‘뛰뛰뛰’를 눌렀다. 전자 주문대에 두 사람의 지문을 가져다 대고 결제하고 등록했다. 두 사람은 화면의 표시대로 2번 방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2번 방은 꼭 동전노래방 부스처럼 생겼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서 지문등록하는 곳에 지문을 가져다 대고 의자에 앉았다. 그랬더니 그 방이 잔뜩 옆으로 늘어나서 넓어졌으며, 계절이 늦은 봄에서 초여름 사이 쯤 따뜻한 날씨로 바뀌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느 새 ‘롤러 뱅뱅뱅’이라는 놀이기구의 배경 속에 앉아있었다. 롤러 뱅뱅뱅은 롤러코스터 같은 것이었다.
“은진아, 우리 좀 걸을까?”
“그래. 저기 솜사탕도 사먹자.”
두 사람은 일어서서 의자를 뒤로 밀고 마치 작은 러닝머신처럼 보이는 판 위에서 걸었다. 그랬더니 주변의 배경이 두 사람의 뒤로 지나갔다. 두 사람이 어느 곳에 멈춰서 솜사탕을 주문하자 벽의 작은 구멍에서 두 사람 손에 솜사탕을 쥐어주었다. 두 사람이 솜사탕을 먹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나는 꿈에서 깼다.
너무 신기한 풍경을 한 번에 많이 보았다. 나는 정말 상상 속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진짜, 상상도 이런 상상이 없었다. 두 번째 꿈을 꿔서 신기한 와중에도 무슨 물건을 골라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그 이후 며칠이 설레고 걱정되는 날들이었다. 나는 몇 번의 꿈을 더 꾸었고, 드디어 무슨 물건을 가져올지 결정했다.
그래서 5번째 쯤의 꿈을 꾸었을 때, 은진이의 행동보다도 그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는데 집중했다. 내가 가지고 올 물건은 바로 그 얇은 전자종이 같은 것이었다. 그간 꿈을 통해서 보니 그 전자종이에 대고 말을 하면 그 종이에 바로 말이 적혔다. 그래서 그 종이를 찾기 시작했다. 5번째 꿈에서 은진은 다행히 자신의 방에 있었다. 분명히 지난 번 필기를 했으니 소지품은 집안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여기저기 찾았는데 도통 보이질 않았다. 나는 꿈에서 깰까봐 두려웠다. 그런데 은진이 자신의 가방에서 그 얇은 종이를 꺼내어 보고는 들고 거실로 나가버렸고 나는 꿈에서 깨버렸다. 나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수현이에게 전화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물어봤다.
“수현아, 꿈에서 그 아이가 종이를 들고 거실로 나가버리고 꿈에서 깨는 바람에 내가 그걸 못 가져왔는데 어떡하면 좋냐?”
“다시 꿈을 꿨을 때 가지고 오면 되잖아.”
“걔가 그걸 손에서 안 놓으면 어떡해.”
“에이 설마.”
“그것보다도 더 걱정되는 것은 내가 그 종이를 가져왔을 때 걔가 알아차리면 어떡할까. 이게 걱정 되지.”
“알아차리려나?”
“그럴 것 같아.”
“그러면 아예 새 거를 가져오자. 새 거를.”
“새 거?”
“너도 네가 잃어버린 휴대폰을 다시 받은 건 아니었잖아.”
“그랬지.”
“그럼 그 사람도 새 걸 구한 거 아닐까?”
“그런 것 같아. 개통도 안 되어있었고.”
“그러니까 너도 새 걸 구해봐.”
“그래야겠다. 나 잡히진 않겠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데 어떻게 잡히냐! 그럴 리가 없어. 걱정 마. 그 사람도 그 비싼 휴대폰을 가져간 걸 보면 절대 안 들켜.”
“좋았어. 도전!”
다음에 꿈을 꿨을 때, 나는 은진이를 상관하지 않고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로 달려갔다.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를 두리번거렸는데, 전혀 그런 얇은 전자종이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대형서점으로 갔다. 서점에 있는 문구점에 가기 전 서점을 보게 되었는데, 서점에는 책은 몇 권 없고 책을 구경할 수 있는 대형 전자패드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서점을 지나 문구점으로 갔더니 전자종이를 구할 수 있었는데, 전자종이도 얼마나 종류가 다양한지 은진이가 가진 종류는 내가 도저히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꿈이 깨기 전에 아무 종류나 골랐다. 그리고 그 전자종이를 들고 달리는데서 꿈이 깼다.
꿈을 깨고 나서 내 손엔 정말로 그 신기한 전자 종이가 들려있었다. 전원을 겨우 켜고 내가 알고 있는 내용, 들은 내용, 그 전 사람이 나에게 적어준 내용을 보면서 말을 하고, 하다가 지치면 타자를 치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며칠 뒤, 나는 기록을 끝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이대로 까먹게 되면 뭔가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수현이와 함께 영상을 찍어 이 신기한 경험을 간직하기로 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배송 받았던 스마트폰, 스마트폰과 관련된 신기한 전생의 이야기와 내가 꿈에서 본 내 후생. 그렇게 나의, 네 번의 삶.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돌고 돌았던 삶에 대해서. 영상을 찍고, 서서히 나는 기억을 잊어갔다. 그리고 책장 한 켠에 놔두었던 전자종이는 언제는 있었나 싶을 정도로 슥- 사라져있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진이에게 갔겠지. 나는 그렇게 어느 순간 모든 관련된 기억을 모두 까먹었다.
3년이 지났다. 나는 오랜만에 수현이와 만나기로 했다.
“수현아,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어휴. 이게 얼마만이냐.”
“그러니까! 너 그동안 잘 지냈지?”
“당연하지. 요즘 피곤해 죽겠다.”
“피곤하다고..? 너 요즘은 그 꿈 안 꿔?”
“무슨 꿈?”
“네 후생인지 뭔지 그거 있잖아! 미래!”
“엥?”
“너 정말 잊어버린 거야? 그 충격적이고 신기했던 모든 일을.”
“무슨 일이었더라.”
“진짜 그 사람이 말해준대로 넌 다 잊어버렸구나.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서 기억하나보다.”
“아니~ 무슨 일인데?”
“우리 3년 전에 찍은 영상을 보여줄게.”
수현이는 나에게 우리가 3년 전, 내가 전자종이에 글을 모두 쓰고 난 뒤 나의 이야기와 경험을 담은 바로 그 영상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는지 멀뚱거리는 나에게 보여주었다. 수현이는 동영상을 보는 나의 반응을 틈틈이 살폈다.
“이제 기억나?”
“응.”
“진짜?”
“응. 진짜.”
“완전히 기억이 다 나는 거야?”
“응. 진짜 완전히 다 기억났어. 처음에 그 휴대폰을 받았던 순간부터.”
나는 완전히 까먹었던 기억을 영상을 본 후 모두 기억해냈고, 더 이상 다시 까먹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다시 기억해낸 것들을 이렇게 적어낸 것이다. 이 신비롭고 이상하고 묘한 이야기. 후생의 나인 은진에게 전자종이가 잘 전달되었을까? 내가 제대로 해낸 것이 맞는지 궁금하다. 은진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마지막 우리 넷의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는 은진이에게 이미 모두 맡겼으니, 나는 나의 이 세 번째 생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면서 잘 살아가야겠다.
김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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