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아버지

by 윤별 posted Feb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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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아버지

 

 

2000420일 구름조금

지금은 밤 아홉시. 곧 자야할 시간이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낮에 엄마랑 외할머니랑 갈비를 먹었다. 크고 맛있는 고기였다. 아빠는 어제 출장을 가셔서 집에 안 계신다. 내일 오신다고 했는데 선물을 사오실진 모르겠다. 떼쓰면 안 된다. 아빠는 힘드니까. 아빠는 항상 바쁘시다. 우리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기 때문이다. 아빠는 훌륭한 분이시다. 가끔 크게 소리를 지르시지만 속상해서 그런 거다. 내가 아빠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은 속상하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속상하지 않으면 엄마도 좋고 나도 좋다.

 

둘만의 암호가 있었습니다.

누구새끼?

아빠새끼!

아빠새끼?

예쁜새끼!

아빠 무릎위에 앉아 되바라지게 웃는 모습도 선명한 잔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언젠가는 유치원에서 아빠와의 시간이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빠는 바빴지만 저를 위해 참석해 주었습니다. 함께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동요를 불렀습니다. 급한 전화통화로 아빠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친구와 말다툼을 하여 원장선생님께 혼이 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달려온 아빠는 이놈의 유치원 당장 문 닫게 만들 거라며 역정을 내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컴퓨터책상 유리가 깨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저는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습니다. 다행히 유리조각이 깊게 박히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살이 찢기는 자상을 입었고 스무 바늘을 꿰매야했습니다. 아빠는 이놈의 초등학교 당장 문 닫게 만들 거라며 교육청에 신고전화를 했습니다. 컴퓨터책상 유리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던 건 저의 활발함 탓이었습니다. 최신 유행하는 춤을 친구들에게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학교 측에 유리 값을 물어줘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빠는 결국 병원비 십오 만원을 받아냈습니다. 병원은 엄마가 같이 가주었습니다.

아빠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멋있어 보였습니다. 피곤에 찌들어 주말이면 하루 종일 잠에 빠져있는 것도, 이따금 담배를 물고 신문탐독에 열중하는 모습도, 혼자 귀지를 파는 것까지.

제가 지금 지방에 내려와 와있어서요. 예예, 죄송합니다 사장님. , 서울 가면 찾아뵙겠습니다. , 들어가십시오.

포커카드를 손에 쥐고 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아빠도,

거래처 새끼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술 쳐 먹자고 지랄한다. 돈 내라는 거지 씨팔.

욕을 하는 아빠도 영화배우처럼 멋있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빠가 전화를 끊자 숨죽이고 있던 아저씨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저씨들은 아빠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부랄친구라고 했습니다. 저는 친구가 뭔지는 알았지만 부랄이 뭔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아빠와 닮아있었습니다.

아빠랑 아저씨들이랑 중요하게 할 일이 있으니 들어가서 자거라.

아빠가 저를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거실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습니다. 탁탁, 불꽃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닫힌 방 문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스며들어왔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계속 기침이 나왔습니다. 엄마가 친정에 간 날이었습니다.

너 장모님 오락가락 하신다며? 안가 봐도 되냐?

저는 인형을 꼭 끌어안고 누워있었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장모님은 무슨, 그 노인네 지겨워죽겠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지 딸 책임지라고 동네방네 소리치고 다니던 기세는 다 어디가고 사람 귀찮게시리 병원신세나 지고 있냔 말이야 젠장.

아 맞다! 그때 너 동네아줌마들한테 돌팔매질 당할 뻔하지 않았냐?

그래 새끼야.

야 그렇다고 말을 그렇게 하냐? 천벌 받을 새끼.

천벌이고 뭐고 내가 한 푼도 못준다고 버티니까 여편네 식당 나가서 설거지 하더라 병원비 번다고.

존나 나쁜 새끼네 이 새끼.

아빠와 아저씨들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주제에 나 같은 남편 만나서 여태 밥 얻어먹고 살았으면 감사할 일 아니냐? 얼굴이 반반하길 하냐 몸매가 죽이길 하냐? 가끔 정 안되겠다 싶을 때만 쑤시는 거지.

아가씨 살돈 없을 때만?

정화 그년이 요즘 비싸게 굴더라고.

다시 한 번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저의 입 꼬리도 슬그머니 올라갔습니다. 뭐 때문에 웃는지는 몰랐지만 아빠가 자꾸 웃으니까 웃음이 났습니다. 꿈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았습니다.

 

집에 들어와 한참동안 험한 인상을 짓던 아빠는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친구란 벼룩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 좆같은 년놈들. 토막 내도 시원찮을 쌍년. 내가 지한테 갖다 바친 돈이 얼만데.

엄마는 악을 썼습니다. 친구를 매도하는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지금 그년가지고 경쟁하니? 아주 꼴값들 떨고 있구나.

엄마가 같잖다는 듯 몸을 떨자 아빠의 입에서 괴음이 났습니다. 동시에 물건 몇 개가 박살났습니다. 마치 제우스가 인간세계로 번개를 내려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전날 본 그리스로마신화를 생각하느라 저는 미처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엄마의 울음소리와 짐승의 천둥 같은 고함소리를 귓가에 고스란히 저장해야했습니다.

 

 

우리 아빠는 훌륭하신 분이야.

저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모르는 게 없으셔.

코웃음 치는 친구와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벼룩보다 못한 존재니까요. 아빠는 훈수를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 이 돌대가리야 옆으로 돌리면서 끼라고! 생각을 좀 해라 생각을!

엄마가 힘들게 전구를 갈 때도, 크고 징그러운 벌레를 잡을 때도 옆에 누워서 입만 놀려댔습니다. 그 또한 아는 게 많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무식한 여편네, 저렇게 무식해서야.

저는 엄마가 왜 무식한 여편네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식한 게 뭔지도 몰랐지만 엄마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니 좋은 말이 아닌 것 같기는 했습니다. 아빠는 저에게 동의를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치?

그 시선을 받을 때마다 저는 곤란했습니다.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실망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턱을 끌어당기고 주억거렸습니다. 아빠는 성에 차지 않아했습니다. 저는 끝내 작은 벌레에게 속삭이듯 입을 열어야 했습니다.

.

 

 

많던 친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저는 기피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저랑 말을 섞지 않았고, 나란히 걸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더럽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아빠만 있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아빠도 부모에게 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아빠가 땀 흘려 번 돈이 없었다면 저는 밥을 먹지 못했고, 옷을 입지도 못했으며, 이불 한 장 사지 못해 잠을 잘 수도 없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특히 아빠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 안 듣는 자식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아빠는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뒤에 도착할 낙원 따위도 없다고 말입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한심한 의존증 환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기준에서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조각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야말로 나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 따위 저 마음 편하기 위한 합리적인 핑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신도 친구 같은 건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하자 이미 한 마리 있는데 뭘 또, 라고 중얼거리는 엄마를 저는 술에 취한 아빠의 벌건 눈과 휘두르는 손을 마주하기 전까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술이 깬 다음날의 아빠는 한없이 다정했습니다. 저를 앉혀놓고 고민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털어놓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남몰래 고민해왔던 일을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짝사랑하던 남자아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반 학우이며 친절하고 다정하고 공부도 잘하는 이였습니다. 저는 그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몰라 속앓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빠의 표정이 일그러진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수줍게 그의 장점을 늘어놓던 저의 몸이 이울어졌습니다.

한심한 새끼.

무지근한 통증과 함께 부어오르는 뺨을 어떻게 가눠야할지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제 애한테까지 손찌검하니?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엄마가 달려와 앞을 막아서고, 둔탁한 손이 다시 엄마의 뺨을 후려치는 와중에도 저는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게 얻다 대고 짐승을 들먹여?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야 너 같은 거한테 발목을 잡히는 거냐? 너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여자랑 고상하고 품위 있게 살았을 거라고! 다른 집 마누라들은 내조한답시고 남편 떠받들기 바쁜데 넌 뭐야? ? 어디하나 쓸모가 있어야지 나 원!

여자가 나다니는 것은 천박한 짓이라고 했습니다.

애 교육 똑바로 시켜! 니 배운 거 없다고 애새끼도 막 키울래? 너도 니 애미 꼴 나고 싶지 않으면 처신 똑바로 해! 알았어?

한참동안 이어진 아빠의 폭언은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 덕분에 끝이 났습니다. 통화를 마친 아빠는 왜인지 즐거워진 표정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속상한 일이 있나.

 

 

엄마와 아빠는 단지 하룻밤의 정분을 나눴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순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혈기가 좋았던 건지 그 짧은 만남에 덜컥 애가 들어섰습니다. 실수로 태어난 아이. 저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걸까요.

 

 

아빠는 제가 당신을 무시한다고 했습니다.

사는 게 얼마나 고되고 힘든 건지 아냐?

밥 벌어먹고 산다는 게, 일을 해서 가정을 지탱해 나간다는 게 어떤 건지 요즘 애들은 팔자가 좋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제가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자 아빠는 굳이 참지 않았습니다. 지켜보거나 조용히 타이르지도 않았습니다. 늘 그랬듯 화를 냈고, 저는 매순간 그 화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착한 딸이 될게요. 죄송해요.

아빠의 허름한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저는 외쳤습니다. 그 순간에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착한 딸이 될게요. 죄송해요.

 

 

아빠의 배려 없는 말투가 거슬리기 시작할 즈음 저는 입을 닫았습니다. 제 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벼룩보다 못한 존재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뒤에서 침을 뱉거나 근친하는 년이라는 욕을 지껄여도 저는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집에 도착한 저는 엄마의 몸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은 언뜻 선잠을 자는 것 같기도, 깊은 꿈에 빠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동안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말을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이상해요.

저는 119를 눌러야할지 112를 눌러야할지 몰랐습니다. 헤매던 손가락을 움직여 아빠에게 전화를 건 것은 싸구려 탁상시계 안에 갇힌 시침이 자정을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침이 자정을 넘기면 저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엄마가 떠나고 아빠는 괴로워했습니다. 밤마다 술에 취해 알 수 없는 막말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져 동이 틀 때까지 저를 울리는 것도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들어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지만 밥상 하나도 제대로 못 차리는 저 때문이라고 자책했습니다. 회사에서 퇴직권고를 받은 것도 엄마가 죽은 것도 모두 너, 너 때문이라고 아빠가 소리칠 때도 저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남자를 가엽게 여겼습니다. 저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쓰다듬는 상사를 애써 못 본척하는 아빠일지라도 가엽게 여기려했습니다. 엄마가 떠난 뒤 간부모임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매일아침 안방으로 신선한 사과와 커피를 대령하는 것과 같이 저는 엄마의 빈자리를 자연스레 채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치욕을 무릅쓴 보람도, 아빠의 매정한 눈길을 견뎌낸 보람도 없이 이번에 잘만 보이면 부장승진은 염려 없을 거라던 바람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네년의 몸이 다부지지 못한 탓이라고 술에 취해 떠드는 아빠를 저는 가엽게 여겼단 말입니다. 속상하니까. 아빠는 지금 속상하니까.

 

 

저는 전문대에 입학했습니다. 아빠는 제가 수도권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다닌다며 거짓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하게 만든 저를 원망했습니다.

내가 창피해서 밖에 나갈 수가 없어 알아? 지 애미 무식한 것만 빼다 박아서는. 아휴, 속 터져.

차마 꺼낼 수 없는 말이 혀끝을 맴돌았습니다.

아빠는 훌륭한 분이시잖아요. 근데 왜 자꾸 저를 속상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엄마의 기일 날이었습니다. 아빠는 여자를 집에 데려왔습니다.

네가 기어코 음식 준비한다며? 그럴 거면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아빠는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여자는 옆에서 가증스럽게 웃어보였습니다. 싸구려 색조화장품으로 얼굴의 주름을 덮고, 탄력 잃은 허벅지를 천이 얼마 쓰이지 않은 치마로 가린 여자였습니다. 술집여자라는 걸, 그것도 아주 저급한 술집에서 데려온 여자라는 걸 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둘은 곧 부엌에 있는 저를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망설임 없이 문이 닫혔고 곧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도 웃음이 났습니다. 마구 웃음이 났습니다. 아빠는 주기적으로 여자를 집에 들였습니다. 저한테 하는 짓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지만 엄마의 제사상이 차려지는 날 더러운 신음소리로 집안을 물들이는 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당신도 죽여 버릴 거야.

나른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러 나온 여자에게 저는 말했습니다.

,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죽여 버린다고. 꺼져. 꺼지라고! 꺼져!

그날의 저는 복날의 개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더 이상 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얻어맞는 동안에도 저는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목청껏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어머, 쟤 정말 미쳤나봐?

여자가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든 말든 저는 아빠의 바지춤을 쥐어 잡지도, 살려달라고 외치치도 않았습니다.

이년이 진짜 돌았나!

머리채를 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매를 맞아도 저는 다만 웃고 또 웃었습니다. 꿈속에까지 들리도록.

 

 

저는 꿈을 꿉니다. 무성영화처럼 사위가 고요한 곳에서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죽일 듯 노려봅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엄마가 소리칩니다. 이혼 절대 못해 차라리 날 죽여 네 새끼 불쌍하지도 않니? 나쁜 놈아! 아빠의 발이 엄마의 가슴팍을 내려칩니다. 지지직. 그 순간 제 입안의 모든 치아가 건물붕괴 되듯 쏟아져 나옵니다. 고통은 없습니다. 약간의 역겨움과 무력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아빠의 세월이 무거워 질수록 저는 성숙해져갔습니다. 저는 어느덧 스물다섯 살이 되었고 아빠보다 키가 커졌습니다. 아빠는 따르는 여자가 줄었는지 밖에 나가는 일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영양제 좀 잘 챙겨 드세요. 비타민D는 무조건 드셔야 해요. 약이 아니라 식품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빠는 말없이 알약을 받아들었습니다. 제우스 같았던 얼굴엔 더 이상 생기가 돌지 않았고 맹수같이 빠릿빠릿하던 눈빛은 공허해졌습니다. 현저히 적어진 말수와 쇠해진 기력까지. 저는 아빠가 걱정스러웠습니다.

아빠, 이러다 정말 돌아가시겠어요.

아빠는 자리에 누운 채 저를 바라봤습니다. 할 말이 있는 듯 쉴 틈 없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코 저에게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온갖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에 엄마는 스스로를 질식시켰습니다. 저는 엄마의 사진 앞에 향을 켰습니다.

엄마, 내가 집이 수영장으로 변했다면서 좋아했던 적이 있었잖아. 장판이 온통 물로 철퍼덕 거려서 되게 신났었어. 무슨 일 때문인지 아빠는 샤워기로 집에 물을 뿌리고 있었고, 엄마는 바닥에 앉아서 물을 주어 담으려 애쓰고 있었지. 그땐 엄마가 울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 나는 철없이 웃기만 했는데 엄마는 아마 숨이 넘어가도록 울고 있었겠지.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더는 웃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서산에 있는 농장까지 찾아가 분양받은 토종 풍산개였습니다. 개는 한 살도 채 되지 않아 이십 킬로그램에 육박해졌습니다. 삼십 킬로가 넘게 자란다고 했습니다. 덩치와는 다르게 잘 짖지도 않는 순한 아이였습니다. 역삼각형 모양으로 쳐진 귀와 검은색의 큰 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이름을 지어줄까 하다가 개는 그냥 개로 놔두기로 했습니다. 개는 사료를 잘 먹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대형견은 고기를 먹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닭 이십 킬로그램을 주문했습니다. 저는 냉장고를 바꿀 때 함께 산 냉동고를 안방에 두고 그곳에 개의 먹이를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두 개를 함께 두기엔 부엌이 너무 비좁았습니다.

정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는 닭을 먹지 않았습니다. 생닭이 싫어서 그런가싶어 삶아서 일일이 살도 발라 줘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굶어죽긴 싫었는지 사료를 야금야금 깨물어먹던 개가 안방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코를 씰룩거리며 구석구석 냄새를 맡고 다니던 개의 기운 빠진 눈빛이 순식간에 야수의 눈빛으로 돌변하는 것을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 무거운 암막커튼을 열어젖혔습니다. 잠시 햇빛을 몸에 쏘인 뒤 이불을 개키고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와 토마토하나, 사과하나를 꺼냈습니다. 달걀은 작은 냄비에 담아 삶고 토마토는 네 갈래로 잘라 프라이팬에 구웠습니다. 그것들이 잘 익혀지고 삶아지는 동안 사과를 깎아 접시에 올리고 찬장을 열어 홈쇼핑에서 산 하루 분 견과류를 꺼냈습니다. 만족스러운 아침식사가 식탁에 차려졌습니다.

언젠가부터 귀마개와 안대가 없으면 잠들지 못했습니다. 암막커튼은 햇빛을 빈틈없이 차단했지만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독한커피 없이는 정신을 잡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연한 블랙커피 한잔에도 혀가 마비되는 듯 인상이 찌푸려지던 저였지만 이제는 아침마다 집안의 적연한 공기를 커피 향으로 채우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 되어버렸습니다. 밤낮 할 것 없이 물보다 많은 양의 커피를 마셨고 잠이 오지 않으면 수면제를 털어 넣었습니다. 점차 수면제의 효과가 수그러들었지만 의사는 복용량을 늘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커피를 마셨습니다. 잠들지 못할 바엔 멀쩡히 깨어있겠다는 심정으로.

점심시간이 되자 딸은 플레인요거트에 생 블루베리 몇 알을 떨어뜨리고 꿀을 뿌렸습니다. 스푼으로 한입 떠 넣자마자 흡족함에 탄성이 자아졌습니다. 익숙하게 연어스테이크를 굽고 키위와 노란파프리카 한 개를 잘랐습니다. 아침때와 비슷하게 만족스러운 식사가 차려졌습니다. 저녁에는 다음날 있을 약속을 위해 바나나와 고구마로 간단하게 배를 채웠습니다. 저는 직업이 없었습니다. 대신 아빠가 있었습니다.

넌 나없으면 유기견보다 못한 년이야. 실패자. 인생실패자라고.

아빠 제발 그만하세요. 제가 죄송해요.

저는 아빠의 입을 막고 싶었습니다. 아빠가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지독한 말들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묵혀둔 집안을 청소하고, 은은하게 공기를 감쌀 향초를 켜고 안방을 슬쩍 확인한 뒤 값싼 와인에 어울리는 어설픈 토마토파스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연이 운명에 의해 정해져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날 중 하필 그날, 수많은 영화관 중 하필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 중 아침 첫 영화를 보러온 사람이 하필 우리 둘 밖에 없었다는 건 우연 따위가 아닌 필시 일어날 운명적 사건이었다며 쉽게 흥분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남자에게서 쾌락은 얻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와 충분히 거리를 두고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도 때때로 그를 집으로 불러 거친 섹스를 나누었습니다. 더 머물고 싶다는 그를 한 편의 영화가 끝난 뒤에 내보내는 것도 몇 마디의 달콤한 말장난 정도면 가능했습니다.

 

 

저는 매일아침 사과를 깎고 커피를 내렸습니다. 저의 가뿐한 걸음이 안방으로 향하면 개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따뜻한 봄날이었지만 아빠의 몸은 무엇보다도 차가웠습니다. 저는 옆에 앉아 사과를 포크에 찍어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금세 사과 한 알이 해치워졌습니다. 저는 뜨거운 커피의 증기를 맞으며 조심스레 한 모금 넘겼습니다. 옆에 앉아있던 개는 제가 커피를 다 마시자 세차게 꼬리를 흔들어댔습니다. 맛있는 고기가 먹고 싶다는 신호였습니다. 저는 개를 진정시키며 냉동고를 열었습니다. 닭 이십 킬로그램 사이로 아빠의 썩은 생선 같은 눈알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오래전 제가 한 짓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냉동고의 성능은 좋았습니다.

자랑스러워하세요. 아빠가 열심히 벌어놓은 돈이에요.

저는 미리 토막 내어 놓은 아빠의 팔 한쪽을 꺼내들었습니다. 적당히 삶아서 던져주자 개는 야무지게 살을 발라먹었습니다. 저는 얼어붙은 아빠의 머리로 다가가 속삭였습니다.

다행이에요. 당신이 갈 수 있는 낙원 따위 존재하지 않아서.

또한 꿈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이름>

윤 선미 

 

<전자우편>

yoonstar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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