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아2

by 윤별 posted Feb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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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2

 

 

젠장.

권 반장은 점심도 거른 채 사건현장으로 향했다.

간만에 몸 좀 지지려 했더니.

그는 꺼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피폐해진 머리칼을 툭툭 털었다. 일주일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 터였다.

요즘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이 터지네요.

옆에 있던 박 형사가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찰청장이 특별수사지시를 내리며 온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된 현장은 어제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주택들이 단란하게 모여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집 앞엔 벌써부터 닫힌 창문 사이로 뭐라도 건져보려는 기자들과 카메라들이 떼를 지어 있었다.

통제 똑바로 안할래?

죄송합니다. 한다고 했는데.

뛰어나오던 김 형사는 신경질적인 꾸중에 난색을 표했다.

그나저나 이거 참,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나 모르겠습니다.

딸이 신고 했다고?

, 낮잠 자던 중에 거실에서 큰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까 엄마가 저렇게 돼 있었답니다. 외부침입흔적도 없고 유서도 없습니다.

몇 살인데?

서른아홉입니다.

딸 말이야 새꺄.

, 열두 살입니다 형님. 형사님. 아니 반장님.

이 자식이 정신 못 차리네.

현장이 너무 끔찍해요. 얼굴이 막, 어휴.

애는 어디 있어?

최 형사랑 서로 갔습니다. 많이 울더라고요.

남편은?

지금 정선에서 오고 있습니다.

강원도?

, 어제 출장을 갔답니다. LS전자 영업사원이에요.

들어가자.

현장을 보자마자 권 반장은 식사직전 청장의 긴급호출이 있었던 게 아주 탁월한 우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까지도 눈앞을 어른거리던 사우나의 뜨끈한 증기와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선사할 예정이었던 광양식불고기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극히 드문 총기사건이라 충격이 더했을까. 묵사발난 안면과 충격으로 튀어나온 한쪽 안구, 사방으로 튀어나간 잔재들은 시속 120km로 달리던 10톤 트럭이 10kg짜리 자전거를 들이받은 정도의 교통사고현장이나 광기어린 살인마의 칼부림으로 난잡하게 토막 난 시체들에 버금가는 광경이었지만 칼날의 흔적도 없고 20평 남짓한 집안에서 교통사고가 날일도 없으니 그야말로 곡할 노릇이었다. 이때다 싶어 중언부언 신나게 떠들고 있는 언론과 앞으로 작성해야할 보고서, 하루가 멀다 하고 성화댈 윗사람들을 생각하니 권 반장은 십년 치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최 형사!

, 반장님.

애 진술 받았어?

직접 하신다 그래서 대충 만요.

내가?

아까 현장에서 출발하시기 전에 전화로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얘기해볼 테니까 잘 달래놔! 라고.

참 그랬지.

, 근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뭐가?

자살이랍니다.

자살?

엄마가 자기 얼굴에 총을 쏜 거래요.

자살할 때 얼굴 정면에다가 총 쏘는 사람도 있나?

그러니까요.

직접 본거래?

소리를 들었대요. 아무래도 좀 이상하죠?

총은?

중국 쪽에서 들여온 거 같은데, 누가 도와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망자 본인은 연고도 없고, 평범한 주부가 혼자 구했다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요. 관련된 주변인 위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실수 없이해. 이 사건 잘못됐다간 전부 모가지 날아가게 생겼다.

걱정 마십시오.

다른 건?

주민들 말로는 부부관계도 나쁘지 않았고 누구한테 원한 살 만큼 모난 사람도 아니었답니다. 채무문제도 없고 탐문결과 아직까지 깨끗하고요. 남편도 특이사항 없습니다.

애는 취조실에 있나?

아니요, 박 형사랑 같이 순댓국 먹고 있습니다. 배고프대서요.

배가고파?

식성 좋던데요.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톱을 뜯고 있었다. 답답한 밀실에 들어온 것이 불만인 눈치였다. 권 반장이 요란하게 의자를 빼 마주 앉는 동안에도 아이는 검지손톱의 살갗을 떼어내는데 신경을 집중했다.

밥은 맛있게 먹었니?

조금 짰어요.

낮고 퉁명스럽게 아이가 대꾸했다.

나는 권석원반장이라고 한다. 넌 이름이 뭐니?

알면서.

뭐라고?

희나요. 박희나.

아이는 그때서야 고개를 들고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권 반장은 그 웃음에 소름끼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방금 전 읊조림에서 분명 알 수 없는 적의와 심오한 조소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또한 경찰의 체면과 위상을 지켜내야 했고 당혹감을 감추는 방법은 진즉에 터득해놓았으므로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일로 보게 돼서 유감이구나 희나야.

드라마에서 보니까 이런 데는 나쁜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이던데요.

미안하구나, 여기만큼 조용한 곳이 또 없어서. 밖엔 지금 난리거든.

아저씨도 형사예요?

, 그렇지.

다른 아저씨한테 말했어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너무 무서워요.

아이의 두 뺨은 순식간에 눈물로 젖어갔다. 왜인지 권 반장은 이쯤에서 한차례 더 소름이 끼쳤지만 민중의 지팡이로서 어린아이의 슬픔을 매도하는 건 옳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 알아. 이해한단다.

이해 못할 걸요.

어느새 눈물을 닦아낸 아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권 반장을 바라보았다. 더는 그가 대꾸하지 못하자 다시 아이 같은 웃음을 칠한 아이는 물었다.

아빠는 언제와요?

곧 오실 거야.

아이의 물음에 번뜩 정신이 든 권 반장은 난데없이 성가셔진 낡은 폴로셔츠의 옷깃을 잡아 늘어뜨렸다.

아빠도 알아요?

뭘 말이니?

엄마가 자살한 거요.

아직 모르셔. 그건 왜?

아빠가 많이 슬퍼하겠죠?

그러시겠지. 희나 너는 어떠니?

집에 가고 싶어요.

힘들겠지만 당시상황을 설명해 줄래? 큰 도움이 될 거야.

사실 잘 기억이 안나요.

그럴 수 있어. 천천히 되짚어 보렴.

그 남자요.

남자?

엄마랑 사귀던 남자요.

엄마한테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

아빠가 없을 때 집에 온 적도 있어요. 제가 있는데도 둘이서. 아빠를 배신한 거예요. 전 정말 슬펐어요 아저씨. 근데 오늘 아침에 전화로 싸우는 것 같았어요. 엄마가 소리 지르면서 막 울었어요. 아마 헤어지자고 했나 봐요. 엄마는 절대 안 된다면서 죽어버리겠다고 했어요. 그리곤 총소리가 났어요.

자고 있던 게 아니구나.

방안에 숨어서 듣고 있었어요.

숨어서?

자는 척 하면서요. 엄마가 통화를 마치면 나가서 아침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엄마가 죽었어요.

왜 자는 척을 했니?

엄마가 그 남자랑 통화중이니까요.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누가 침입하는 기척은 못 느꼈니?

전혀요.

싸우는 소리가 났다거나?

그 남자랑 싸웠다니까요.

전부터 엄마랑 사이가 안 좋았던 사람은 없었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순간 아이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느껴진 것은 순간 과로로 인한 피곤함이 몰려온 탓이라고 권 반장은 믿고 싶었다.

그래 그럼 그 남자가 누군지 아니?

이름은 모르지만 의사라고 했어요.

 

 

박 형사, 알아봤어?

49세 남재원. 정신과 전문의로 서운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 있다가 6년 전, 신정동에 개업했습니다. 사망자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곳입니다.

넌 밥 먹었지?

.

가서 데려와.

쏜살같이 다녀옵죠.

최 형사, 브리핑.

장혜원 39. 대학졸업 후 3년간 제지공장 경리로 근무하다가 영업사원인 남편 박준원을 만나 전업주부로 전향 했으며 슬하에 12살 딸 박희나 양이 있습니다. 오늘 0932, 엄마가 죽은 것 같다는 딸의 신고전화가 왔습니다. 10분 뒤 구급대원과 경찰이 도착했고 안면에 총상을 입은 장혜원 씨를 발견했습니다. 사망시간은 09시에서 0930분 사이로 추정되며 딸은 자살이라고 진술했습니다만, 총기자살은 주로 입에 물거나 관자놀이에 대고 쏘는 게 일반적인반면 사체분석결과 이 사망자는 양미간과 콧대사이에 총구를 대고 발사한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리고 신용카드내역 조회해보니까 진솔정신건강의학과라는 곳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총 13회 결제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남재원이 병원?

, 그렇습니다.

요즘은 직장에서 밀애를 즐기나 봅니다?

밀애를 즐기는데 결제는 왜합니까?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던 김 형사가 묘하다는 듯 말하자 막내 이 형사가 뒤통수로 날아오는 손바닥에 익숙해졌는지 따지고 들었다.

나중에 꼬리 잡히면 발뺌하려고 증거 만들어놨나 보지. 얌마 넌 형사가 왜 이렇게 상상력이 없어?

반장님, 뭐 특별한 건 없었습니까?

이 형사가 김 형사의 주먹을 피하는 수선에도 최 형사는 본분을 다했다. 권 반장은 별 건 없었고 단지 보통내기가아니더라며 너흰 나머지 증거물에 집중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여자아이 기에 눌려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까진 말할 수가 없으니. 그나저나 박 형사 올 때까지 우린 슬슬 잡채밥이나 시켜먹자고 하려던 찰나 박준원이 뛰어 들어오는 소리에 권 반장은 기지개켜던 팔과 하품으로 찢어지던 입을 오므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내한테 문제가 생겼다니요? 제 딸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진정 하세요 아버님. 따님은 저희가 안전하게 데리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요!

달려오는 박준원을 막서던 김형사는 곤란한 듯 권반장을 돌아봤고 권반장은 별 수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내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현재로서는 자살로 추정됩니다.

그게 무슨.

몇 가지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우리 집사람이요? 제 아내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당장 아내를 봐야겠습니다. 희나는 어디 있습니까? ?

보다 못한 권 반장은 박준원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다시피 의자에 앉혔다.

먼저 총에 대해서 알려주셔야겠습니다.

총이요?

모르셨습니까?

총이라니요. 그런 걸 어떻게 구합니까? 설마 총으로, 제 아내가 총으로 자살을 했단 말입니까?

아내 분께 정신과 진료기록이 있더군요.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그건,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태였나요?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할지.

박준원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권 반장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경청의 표시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가 치료를 권유했습니다. 아내 말로는 희나가.

물 한잔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아내 말로는 희나가 저에게 집착한다더군요. 비정상적으로 저를 사랑한다고요. 아니 형사님, 딸이 아빠를 사랑하는 건 당연한일 아닙니까?

집착이요? 왜죠? 아내분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희나가 아내한테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대요. 그래야 아빠를 자기가 가질 수 있다면서.

아까 취조실에서 보았던 아이의 눈빛이 다시금 권 반장의 뇌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물론, 희나가 절 특히 따르긴 했습니다. 퇴근하고 오면 한시도 떨어져있지 않으려하고, 씻을 때도 화장실에 따라 들어와서 기다리곤 했으니까요. 당연히 잠도 같이 자려하고 출근할 땐 현관문 앞에서 꼭 삼십분씩 달래줘야 했어요. 가지 말라고 매달리다시피 했거든요. 제가 출장이라도 가는 날엔 탈진할 정도로 울며 보채기도 했습니다. , 그랬어요. 근데 아무리 그렇다고.

박준원은 곧 울음을 터뜨렸고 권 반장은 조용히 갑 티슈를 내밀었다.

언젠가부터 집에 있는 날카로운 물건들을 모조리 버리더군요. 부엌에 있는 칼, 가위, 공구함, 액자에 끼어있는 유리, 샤프나 볼펜도요. 아내는 점점 더 망상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언제든지 자길 해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희나였군요.

,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기센 딸은 차치하고 총의 출처만 밝혀진다면 거의 끝난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권 반장이 짐작조차 못한 이야기에 허탈해져있는 사이 박 형사가 남재원과 함께 도착했다.

잠시 앉아계세요.

권 반장은 최 형사에게 이 양반 잘 보고 있으라는 손짓을 해보이고는 남재원이 들어가고 있는 제2취조실로 향했다. 단정한 차림새의 남재원은 모든 일을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침착했으며 절대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남편 분께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희나가 보인 집착에 대해서 말입니까?

잘 믿겨지지가 않는 얘기더군요.

희나는 단순한 엘렉트라콤플렉스가 아닙니다.

권반장이 못 알아듣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남재원은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말했다.

엘렉트라콤플렉스. 딸이 아빠에게 성적애착을 느끼고 엄마를 경쟁상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성적애착이요?

이성으로 보는 겁니다.

거참, 그럼 장혜원씨가 병원에 다니게 된 것도?

희나 때문이죠. 혜원 씨는 심각한 불안증세를 보였습니다.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자신의 딸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고작 열한 살짜리 아이한테요.

희나는 반사회적인격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소시오패스라고 들어보셨죠? 어떤 면에선 사이코패스보다 더 위험한 존재입니다.

직접 진단을 내리신 겁니까?

, 집에 직접 방문을 해서 행동을 살펴보기도 하고 아이가 생활하는 모습을 혜원 씨가 몰래 촬영해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거기엔 아이가 혜원 씨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모습도 찍혀있습니다.

잠깐, 아이는 남재원 씨가 부인과 사귀는 사이였다고 하던데요.

거짓말입니다. 소시오패스는 남을 조종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아주 능숙합니다. 거짓말도 아주 자연스럽죠.

찍었다는 영상 저희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가져왔습니다.

남재원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진갈색의 가죽 서류가방에서 카메라 칩을 꺼내 권 반장에게 건넸다. 그리곤 사뭇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희나는 웃는 모습이 예쁘지요. 그 예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장 아빠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널 죽일 거야 엄마.

 

 

카메라를 집안곳곳 설치할 여유는 없었는지 영상이 소파가 놓인 거실 정면에 국한되어 있어 그 밖의 상황들은 음성으로만 들을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중간에 끊긴 게 많아 쓸 만 한 건 10분 남짓의 대화뿐이었음에도 불시에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얼해 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딸이 소파에 앉아 화장을 한다. 한 손엔 손거울을 다른 한 손엔 마스카라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모양이다. 엄마의 화장품을 가지고 허락도 없이 행한 일이었는지 곧 다가온 엄마는 역정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뭐가 두려운지 조심스럽게 타이른다. 희나야, 화장을 왜 하니 피부 다 상하게. 딸은 대꾸하지 않고 서툴지만 야무진 솜씨로 손을 움직이며 화장에 몰두하다가 엄마 화장품이 너무 빈약하다고 투정부린다. 엄마는 오가지도 못하다가 소파 밑에 힘없이 다리를 모으고 앉아 딸을 쳐다본다. 화장을 마친 딸은 붉게 물든 입 꼬리를 씩 올리며 묻는다. 나 예뻐? 엄마에게서 말이 없자 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새침하게 다시 거울을 보며 말한다. 아빠한테 예쁘게 보여야 할 텐데. 희나야 너 정말 왜이러니.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듯 묻자 딸은 소파에서 내려와 엄마를 안아준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엄마가 그래도 아이는 아이구나,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눈물이 엄마 무기야? 딸의 목소리가 가슴을 찌른다.

화면 앞으로 바짝 몸을 구부리고 있던 형사들도 뒷골이 서늘해졌는지 하나둘씩 허리를 꼿꼿이 폈다. 아빠한테도 이런 식으로 꼬리치냐는 다음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는 의도적으로 엄마를 따돌리거나 아빠가 안보는 사이 엄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등의 행위가 있었으며 엄마가 조금이라도 언성을 높일 때면 아동학대로 신고할 거라는 협박이 이어졌다가 다시 아빠가 오면 온순하고 애교 많고 말잘 듣는 착한 딸이 되었다.

저걸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죽어라 팰 수도 없고.

가만히 보고 있던 김 형사가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반장님, 그럼 혹시 사건당시 상황도 찍고 있지 않았을까요?

박 형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들 그렇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증거물 다시 살펴보고 현장에 애들 보내서 샅샅이 뒤져.

알겠습니다.

 

 

사건당일을 찍고 있던 카메라는 없었다. 동시에 입맛도 없어진 권 반장에게 조금이나마 활기를 끼얹어준 건 총에서 남재원의 지문이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준겁니다.

그는 싸울 의욕을 잃은 패전병처럼 빠르게 인정했지만 품위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덕분에 권 반장의 활기 넘치던 의욕만 시든 꽃처럼 바스러졌다.

불법인거 아시죠?

압니다. 의사로서 선을 넘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넘어도 한참 넘으셨어요. 총은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중국에서 사업하는 제 처남이 개업선물로 준겁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젠 한국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면서,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으라고요. 저도 그땐 장난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죠. 처남에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직접 건네주신 겁니까?

아니요. 없어졌습니다. 책상 맨 아래서랍에 보관해 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없더라고요. 직감적으로 혜원 씨가 가져갔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었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총이 있다는 건 장혜원 씨가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말해줬습니다. 현대인에게 불안감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오죽하면 저도 서랍에 총을 넣어뒀겠습니까, 그랬습니다. 서로 웃고 넘겼어요. 그 이후로 친밀감도 형성되고 긴장도 풀어졌죠.

장혜원 씨가 가져갔다는 걸 알고 나서도 왜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습니까?

자만했습니다. 그녀가 어느 쪽으로든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치료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만했어요. 섣불리 총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간 더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영상을 본 박준원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경찰에서 조작한 거 아니냐며 의심을 하기도 하고 몰래 찍는 건 불법 아니냐며 역정을 내다가도 저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하다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희나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도 많습니다. 다만 예전에, 그러니까어느 날 병아리를 죽였어요. 친한 친구의 병아리를요. 처음엔 자기가 죽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더군요. 알고 보니 반장선거에서 딸아이가 떨어지고 그 친구가 붙은 거였어요. 그저 어린아이의 시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처벌을 받습니까?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형사님 부디 제 딸만은.

 

 

잡았어요?

권 반장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아이는 물었다.

누굴?

의사요. 아직도 안 잡은 거예요?

그 사람을 왜 잡아야하지?

?

네 말대로 엄마가 자살했다면 아무도 잡을 필요가 없잖니.

그럼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네요. 보내주세요. 될 수 있으면 집에서 아빠를 맞이하고 싶어요.

사실이 아니었더구나.

뭐가요?

오늘 네가 했던 모든 말이.

길 잃은 강아지 같던 딸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이 뭘 알아?

엄마가 외도하는 걸 정말 본거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여기에 네가 엄마를 협박하는 장면이 찍혀있어.

그냥 장난 좀 친 거예요. 그게 왜요?

이제 그만 털어놓으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알아내보세요. 그게 형사님이 하는 일이잖아요.

엄마를 이길 수 없어서 화가 났니? 아빠가 너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아빠는 나를 사랑해. 엄마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럼 왜 엄마를 괴롭힌 거니?

자꾸 방해하잖아.

아빠랑 너 사이를?

그래서 경고해 준거야. 매일매일 조금씩 고통스럽길 바랐어. 내 말대로 순순히 빠져줬으면 이런 일까진 없었잖아. 죽어서도 귀찮게 하네 정말.

제가 알던 딸이 아닙니다. 내 딸이 아니에요.

유리너머로 취조과정을 보고 있던 박준원은 몸서리쳤다. 딸의 냉소 가득한 목소리와 비정상적인 태도에 밤새 공포영화라도 본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는 겁니까?

곁에 있던 최 형사는 차마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이윽고 권 반장이 심란한 안색으로 취조실을 나왔고 박준원은 달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딸을 봐야겠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권 반장은 최 형사에게 열어주라는 눈짓을 해보였다. 박준원은 마른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딸은 아빠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 권 반장은 잠시 그들을 동정할 뻔했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람없이 어린소녀를 증오할 수 있었다.

울어서 눈이 팅팅 부었어. 나 지금 너무 못생겼지 아빠?

 

 

자살 맞답니다. 손에서 총기발사잔여물이 나왔데요.

전화를 받고 온 최 형사가 고개를 저었다. 권 반장은 그때서야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 것 같았다.

일부러 그랬군.

뭘 말입니까?

얼굴을 박살낸 것도, 총을 사용한 것도 말이야. 단순자살로는 경찰이 이렇게 파고들진 않으니까. 우리가 알아내길 바란 거지.

딸을 의심할 수 있도록 만든 거군요.

모든 일은 작은 의심에서 시작되니까.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건 어쨌든 사실이기에 몰래 찍은 영상 하나와 환자가 총을 소지하도록 방조한 정신과 의사의 진술로는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를 살인죄 비슷한 것으로도 기소할 수 없었다. 기소는 고사하더라도 엄마 잃은 어린 딸을 흉악범죄자로 몰고 가려는 걸 항간에서 곱게 볼일도 없어서 비웃음과 멸시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까. 더는 붙잡고 있을 구실도 없는 것이었다. 검사는 자료를 모아 판사에게 가져갔고 판사는 명예로운 정년퇴임과 함께 정계진출을 한 해 앞두고 골치 썩고 싶지 않았는지, 권 반장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건지 어쨌든 적당히 마무리를 짓고 싶어 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짬뽕에 들어있는 오징어를 씹으며 최 형사가 물었다.

주기적인 정신과 통원치료. 유사시 정신병원입원치료.

약도 없는 병이라던데. 아니 뭐, 그럼 또 누구 죽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 아니에요?

김 형사가 분하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럼 어떻게 해 인마 자살은 자살인데, 네가 판사 하던가.

아빠가 재혼한다고 설치지 않는 이상 별 문제없겠죠.

박 형사가 탕수육을 소스에 찍으며 말했다.

넌 또 먹냐?

배고파요. 오늘하루가 일 년 같았습니다.

그냥 부어버리라니까 왜 귀찮게시리 하나씩 깔짝대?

그럼 튀김옷이 눅눅해지잖아요. 친애하는 김 형사님 뭘 모르면 가만히 계십쇼.

에이 뭐 이딴 찝찝한 사건이 정초부터, 안 그렇습니까?

언제는 안 찝찝했냐.

괜히 의사한테만 똥물 튀었네요.

짜장면 면발을 먹기 좋게 젓가락으로 휘감으며 이 형사가 한숨을 내뱉자 권 반장은 비록 너와 같은 생각이지만 상관으로서 으레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괜히 라니,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권 반장은 편백탕에 몸을 누이며 그동안 삭혀왔던 몸속 깊은 끓음을 입 밖으로 내쉬었다. 그는 방랑하는 돛단배처럼 물결에 기댄 채 팔을 쭉 뻗고 고개를 젖혀 뿌연 천장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송곳 같은 수염이 꺼칠하게 얼굴을 덮고 있었다. 지난 15년간 그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맡은바 소임에 열렬했노라고 자부하던 그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피로를 풀고 있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망연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건 부녀가 경찰청에서 나가던 날, 그들 얼굴에 비치던 자유의 달콤함과 승리의 미소를 엿보았기 때문이리라.

아빠, 이제 다 끝난 거지?

그날 그곳엔 비극적인 방법으로 아내를 잃은 남자와 어린나이에 엄마를 여윈 딸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이좋은 연인은 다만 앞날에 대한 설렘으로 행복해보였고 마침내 조소의 의미를 알게 된 권 반장은 고약한 어둠에 잠식된 듯 솜털 한 가닥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한다는 평생신조가 천하의 쓸모없는 유리조각처럼 부셔지는 순간, 아빠 품에 안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된 아이는 굳어버린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내가 이겼어.

 

 

젠장.



 

<이름>

윤 선미 

 

<전자우편>

yoonstar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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