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참깨

by 보거스 posted Feb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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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날 열어주길 바라. 내 마음은 잠겨있지 않아. 하지만 아무도 열어보려 하질 않지.

흥은 오른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에서도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오른쪽 팔과 어깨가 동시에 들썩거리다 오른손을 앞으로 부드럽게 쭉 뻗으면서 세 번을 연속 둥글게 말아서 스무스하게 밀어준다. 이때 가슴과 상반신 전체가 일치되어 함께 바운스를 해 줘야 한다.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나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동작이 아니다. 박자의 강약 템포에 맞춰 자연스럽게 나오는 춤사위. 흥은 생각한다. 동작도 마음도 모두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진정한 음악가가 될 수 있는 거라고. 한 때 뮤지션을 꿈꾸었던 그는 서글픈 미소를 잠시 흘리더니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아쉽게도 도착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저기 멀리서 오는 사람, 흥씨 맞지?

- 정말? 어떻게 알아?

- 흥씨는 100미터 밖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을걸. 술 취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흔들거리며 걷는 사람은 아마 흥씨 밖에 없을 거야.

- 하긴, 정말 그러네.

매표소 안의 두 여직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가볍게 스치듯 인사를 하며 지나치는 흥의 귀에는 여전히 이어폰이 걸려 있다. 정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중 흥은 자리에 멈칫 서더니, 이번엔 왼쪽 귀에 걸려 있던 이어폰을 뺀다. 그리곤 걸음 폭을 길게 가지며 현관을 지나 판매대 옆 카운터를 힐끔 쳐다본다. 역시나 카운터에 예가 앉아있다.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키에 길쭉하고 마른 몸. 가늘고 긴 팔다리에 한 번도 맞대보진 않았지만, 분명 손바닥 크기도 흥보다 한 마디는 긴 것 같다. 흥의 그런 체형이 매우 부러운 듯 예를 바라본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예는 고개를 들어 현관 입구를 바라본다. 회색 후드 티에 모자를 푹 눌러쓴 흥이 느린 박자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예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 남 의식 않고 여전히 춤을 즐겨 추시네요. 춤이 그렇게 좋으세요?

흥이 예를 살며시 웃으면서 예에게 다가간다.

- 고등학교 때까진 브레이크 댄스를 췄어요. 그때면 모를까 지금은 춤을 춘다고 말할 수 없어요.

- 실력이 녹슬지 않은 거 같은데요? 댄스 대회 같은 거 준비하시는 건 아니고요?

- 이젠 살 때문에 나가고 싶어도 못 춰요. 춤을 관두고 나서 한 10킬로는 더 찐 것 같아요.

- 아직도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왜 관둬요?

- 제가 체구가 좀 작잖아요. 처음엔 동료들 모두 귀엽다고 해서 좋아라 들 했는데, 나중에 동아리 리더 선배가 와서 넌 관두는 게 낫겠다고 했어요. 몸집이 작으니까 어떤 동작들을 취해도 멋이 안 난다고. 사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관뒀어요.

- 겨우 그런 말 한 번 들었다고 그만둬요?

- 그 선배 때문에 춤을 춘 거였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가 춤추는 의미가 사라져 버린 거죠.

-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어머, 미안해요.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린 거 같네요.

- 괜찮아요. 지난 일인데요. 그리고 음악은 지금도 제 곁에 남아 있는 걸요.

흥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이어폰을 톡톡 친다.

- 아문 듯 보여도 상처가 늦게까지 아물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도 있어요.

여운을 던지고 사라지는 예. 흥은 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손을 더듬어 이어폰을 찾는다. 다시 귀에 꽂히는 투명 이어폰. 탄력을 받은 듯 흥의 동작들이 더욱 날쌔진다. 현관을 지나 들어간 족욕장 안에는 아침 청소가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오픈 전에는 항상 회의가 열린다.

- 이번 주부터 성수기에 들어갑니다. 모두 바쁜 시기니까 긴장들 풀지 마시고 특히 족욕장에는 신입 분들이 많이 오셨으니, 서로 도와가면서 같이 잘해 봅시다.

후렴 가사처럼 매일 반복되는 차장의 목소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고음에 가깝다. 오늘은 다행히 마수걸이 손님이 빨리 입장하면서 회의가 일찍 마무리된다. 오픈 조에서 먼저 손님을 받는다. 편주임이 제일 먼저 뛰어나가면서 손님을 맞이하고, 그사이 다른 직원이 다가가 족욕 세팅을 돕는다. 족욕 진행은 총 30분으로 실제 진행은 정확히 20분이다. 그리고 뒷정리 및 청소와 새 세팅 준비로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진행을 돕는 흥은 자투리 시간마다 빼먹지 않고 춤을 춘다. 진행 중에는 뒤에서 춤을 추지 말라는 차장의 경고가 여러 번 있었지만, 흥은 개의치 않는다. 족욕장 밖 카페에 있는 예는 유리창 너머로 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끔 흥과 눈이 마주칠 때도 있다. 손님이 적어 눈치가 보여도 혹은 반대로 손님이 많아 분주해도 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즐겁다. 이번엔 흥의 시선이 카페를 향한다. 어느새 첫 팀의 진행이 끝나가고 있다. 유리 너머로 족욕이 끝난 손님들을 확인하고 맞이할 준비를 하는 예. 족욕장 안에서 흥겨운 진행으로 기분들이 한층 업 된 손님들을 상대로, 족욕에서 사용한 물건들을 파는 것이 예가 맡은 업무다. 이미 제품의 효과를 본 상태라 적절한 타이밍에 설명만 살짝 얹으면 쉽게 판매량을 늘릴 수 있다.

- 차 한 잔 드세요. 열을 내려주는 향기가 진한 백합 차입니다. 전통 허브차 드시고 가세요.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예의 맑은 목소리가 타고 온다. 흥은 예의 목소리가 족욕 진행에 무난한 목소리, 아니 엇박자에 고음이 섞인 노래를 부르기에도 꽤 괜찮은 목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 손님 나가셨는데 아직도 청소 안 하나?

차장의 째지는 목소리가 분위기를 깬다.

- 네이~ 요. 갑니다이~ 요! 고고!!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흥의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동그란 족욕 통을 닦는 그의 손놀림은 매우 능숙, 익숙하다. 둥글게, 둥글게, 리듬에 맞춰 통을 돌리는 흥. 청소를 마치고 나면 이번엔 흥의 진행 차례다. 흥은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만큼 진행도 뮤직 스타일로 한다. 손님들의 연령대에 맞춰 어르신이면 트로트 분위기로, 젊은 층이면 댄스나 랩 스타일로 진행이 바뀐다. 야한 이야기를 주로 하는 19금의 편주임과 함께 흥은 족욕장 안에서 꽤 인기가 있는 진행 강사다. 물론 교과서적인 틀을 고집하는 차장은 그런 진행 스타일이 아류라고 우기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틈만 나면 흥과 편의 트집을 잡곤 한다.

- 어제도 뒷마무리가 잘 안 된 것 같아요. 그러면 늘 오픈 조가 힘이 들죠. 그러니까 마감 조에서 특히 신경을 좀 더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쉬는 시간에서 마감 전까지 차장의 잔소리는 어김없이 전진이다. 편주임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흥을 바라본다. 겨울철이라 오픈 조와 마감 조는 퇴근 시간이 30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차장과 편주임이 퇴근한 뒤, 남은 직원과 마감 정리를 하는 흥. 이번 주 내내 그는 마감 조다. 다들 보내고 흥이 마지막으로 족욕장 안을 다시 확인해 보고 나오는데 예가 서 있다.

- 이제 끝난 건가요?

- 기다린 건가요?

- 물건을 두고 가서 다시 온 건데 그렇게 된 셈이 되었네요.

- 뭘 두고 가신 건데요?

대답 대신 예가 핸드폰을 들어 보인다. 함께 퇴근하는 두 사람. 한참을 같이 걷는데도 둘은 서로 아무 말이 없다. 해가 일찍 져서 벌써 어둑어둑하다.

- 저도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한 흥.

- 뭘요? 설마, 춤이요?

- 방금, 멈칫했어요. 제가 너무 뻣뻣해서 안 될 거라고 생각했죠?

- 아뇨. 춤보단 노래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 노래요? 그건 또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낯서네요. 근데 정말 말 한마디 때문에 관둔 건가요?

- 아까 말하던 춤 얘긴가요?

- 예.

흥이 뒤집어쓴 모자를 돌리면서 머리 정수리에 손을 집어넣고 긁적인다. 족욕 진행이 뜻대로 안 되거나 뭔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나오는 버릇임을 예는 알고 있다.

- 그만요. 더는 안 바래다주셔도 돼요.

- 왜요? 저쪽이 더 어둡고 깜깜한데 무섭지 않아요?

- 무섭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서 더 들어오면 그건 민폐가 돼요.

- 신경 쓰이나요?

예는 아무 말이 없다.

- 알았어요. 길 건너는 곳, 횡단보도. 여기까지만 바래다줄게요.

함께 길을 다 건넌 뒤, 예는 돌아가는 흥을 향해 큰소리로 외친다.

- 흥씨는 언제나 즐거운 것 같아요.

- 예? 예예.

차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신호가 바뀌면서 차들이 경적을 울리지만 흥은 서둘지 않는다. 아픈 다리의 상처가 그를 뜀박질을 사로잡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흥은 쉽지 않겠지만 예도 춤을 배운다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처음엔 흥도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 마냥 쉽지 않았다. 깊은 체력을 요구하는 동작들. 특히 체구가 작은 흥에겐 더 많은 힘이 필요했다. 괜히 시작한 건가 싶은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춤을 추는 동안 흥은 자신의 몸이 남들보다 더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길이 막혀 좌절할 때마다 힘이 되어 준 선배의 도움도 컸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흥은 무대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이름난 댄서는 아니었지만, 기술 습득에 있어선 누구도 부럽지 않은 넘버원이었다.

 

다음날 출근하는 흥의 귀에 여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예씨가 어제까지였다며?

- 그러게. 신입 분들 많이 들어온다 해서 왜 그러나 했더니 떠나는 사람이 있었네.

- 왜 갑자기 관둔 걸까. 알아?

- 잘 모르겠어. 예씨가 누구랑 친했더라.

이어폰을 꽂은 귀 사이로 침투해 들어오는 불쾌한 단어들. 흥은 어이가 없다. 춤을 가르쳐 달라며……. ‘왜 관둔 건가요?’ 하는 의문이 족욕 통을 돌리는 내내 흥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편주임이 다가와 묻는다.

- 선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산만해? 청소도 굼뜨고, 진행도 흥이 안 나고?

- 응, 뭐가? 아무 이상 없는데?

- 없기는. 장르로 치면 발라드 같잖아. 그것도 장르에 전부 슬픈 발라드풍. 겨울인데 가을 타나?

- 그래 보였나? 너무 티 나나?

- 나도 음악 좀 들었다고. 선배가 일단 진행에 힘을 안 내니, 흥이 안 나고, 흥이 안 나니 매출이 안 나오잖아. 같이 일 이등 하는 사이끼리 왜 그래? 이번 달 진 사람이 술 사주기로 한 것도 잊었어? 봐주는 건가. 힘내라고 선배.

편주임이 가볍게 스킨십을 하려다 말고, 주먹을 맞댄 채 툭툭 치고 간다. 하지만 편주임의 위로도, 차장의 높은 잔소리도 오늘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침에 보낸 카톡은 온종일 답이 없다. 아니, 1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퇴근하면서 전화를 해 봤지만 역시 받지 않는다. 어제 바래다준 횡단보도까지 가 본다. 흥은 예의 집을 알지 못한다. 매번 여기까지만 바래다주었던 기억. 흥은 횡단보도를 건너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갈 때도 올 때도 혼자다. ‘왜 관둔 거지?’ 다리의 상처가 유난히 땅기는 듯 쑤신다. 흥은 횡단보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 넌 아닌 것 같아. 그만두는 게 좋겠어.

- 그게 무슨 소리야?

- 전에도 한번 말했잖아. 넌 춤이랑 안 어울려.

- 그런 말 두 번 다시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왜 또 그래?

- 그 이유를 또 말해 줘야 해?

- 얼굴 보지 마요. 우리.

화가 난 흥은 대꾸도 하지 않고 뛰어간다. ‘선배는 왜?’ 미친 듯 뛴다. 진심으로 잡아주길 바랐다. 학교 정문을 지나 사거리로 튀어나온다. 그 뒤로 선배가 허겁지겁 흥을 쫓아 뛰어온다.

- 조심해…….

그렇게 춤을 포기해야만 했다.

 

며칠 후 예한테서 카톡이 왔다. ‘나 보고 싶지 않나요?’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쉼표가 흘러넘쳐 마치 숨이 멎을 것 같다. 빠른 비트로 뛰기 시작한다. 얼마 못 가서 다리의 상처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고 달리기에서 경보로, 다시 도보로 박자가 느려졌지만 걸음을 멈추진 않는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예가 바르게 서 있다.

- 끝난 줄 알았어요. 왜 연락 안 했죠?

- 끝난 거 아닌가요?

- 그럼 왜 연락했죠?

- 연락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 예의를 잘 아시나요. 아무 답도 없다가 먼저 연락도 주시고, 그래서 이름이 예인가요.

- 농담치곤 썰렁하네요.

- 좀 걷죠. 우리.

어색하게 걷는 두 사람. 답답함을 참다못한 흥이 핸드폰 볼륨을 최대한 높인 채 음악을 크게 튼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다 웃음이 터진 예.

- 어떻게 좋아하게 됐죠?

- 뭘 말인가요?

- 음악이요, 언제부터 좋아했느냐고요.

흥은 모자를 또 한 바퀴 빙글 돌리면서 정수리를 긁적인다.

- 아주 어릴 적 아버지는 시끄러우셨어요. 고음 불가인데도 자꾸 고성을 지르고 물건을 막 던지고 그러셨어요. 어머니가 집을 나가신 뒤로는 더 심해지셨는데, 한 번은 그걸 말리는 제게 무언가를 집어 던지셨어요. 그때 펑 하고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음악 소리가 들렸어요. 아버지가 던진 건 라디오였어요.

- 현실 도피네요.

- 아니요, 아버지보다 머리가 굵어졌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전 음악을 듣고 있으니 도피는 아닌 거 같아요.

- 그럼 흥씨한테 음악이란 뭔가요?

- 움직이는 거요. 지친 나를 충전해주는…….

- 다른 사람도 충전해줄 수 있나요?

- 하고 있어요. 어떤 코드가 맞나 찾고 있을 뿐이지.

- 맞는 코드가 있는 거 같나요?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못 찾으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거란 자신감은 들어요.

- 어떻게 자신하죠?

- 예를 들면요. 서양음악을 국악이랑 섞기는 참 힘들어요. 하지만 흥보가 기가 막혀 같은 경우는 판소리를 음악과 잘 섞어 놓았죠. 또 서태지의 하여가에는 강한 락 사운드에 전통 악기인 태평소가 나오는데 상당히 잘 어우러져요. 일종의 퓨전 음악 같은 건데 그런 식으로 찾아가는 거 에요.

어느새 횡단보도 앞에 와 있는 두 사람. 흥이 손을 내민다.

- 우리 악수해요.

- 악수는 싫어요.

- 왜요?

-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 말도 안 돼. 회사도 멋대로 관두고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죠?

- 화내지 마요. 나에게 화내는 사람은 내가 절대 가까이할 수 없으니까요.

- 화내지 않았어요. 근데 왜 말 안 했어요?

- 가까이 있는 사람이 상처받는 게 싫었으니까요. 어디 가요?

- 배웅해주려고요.

- 여기까지라고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요?

- 그거 봐요. 거리를 두는 건 제가 아닌 당신이에요.

- 됐어요. 그런 말 할 거면 얼굴 보지 마요. 우리…….

- 이젠 볼 수도 없잖아요.

흥은 휙 하고 돌아서서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온다. 돌아갈 수 있다면, 선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한쪽 다리가 아니라 양쪽 다리 모두가 박살 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예 춤을 못 추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니, 예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무어라고 외치고 있다.

- 연락할게요.

 

- 읔, 읔.

흥은 자신의 신음에 놀라 잠에서 깬다. 온몸이 비명에 흠뻑 젖은 채 다리에만 쥐가 침투했다. 방바닥을 기어 화장실로 간다. 온수를 틀어놓고 대야에 물을 받고, 쥐가 든 발을 물속에 담근다. 온수는 점점 데워지고 있고, 쥐는 한참 동안 발끝을 뱅글뱅글 돌더니 허우적거리며 사라진다. 죽은 선배도 살리지 못한 돌팔이 같은 의사는 흥은 아무런 상처 하나 없다고 진료했다. ‘거짓말!’ 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쥐가 왕래할 정도로 큰 구멍이 나 있는데 상처 하나 없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흥은 춤을 포기해야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론 너무 들어가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는 않는 다리는 흥이 가진 유일한 장기인 유연함마저 가져가 버렸다. 의지하던 기둥을 잃어버린 흥에게 댄서란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어 버렸고, 환통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상처는 흥에게 더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처음엔 춤을 잃었고, 그다음으론 뜀박질을, 정상적인 생활을 잃었다. 한참을 방황한 뒤에야 흥이 간신히 찾아낸 유일한 처방책은 족욕이었다. 쥐는 물을 싫어했다. 뜨거운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던 고통도 수그러졌다. 육지를 떠나 제주를 찾은 이유도, 족욕 진행 강사라는 다소 특이한 직업을 가진 것도 모두 걸핏하면 흥을 찾아오는 그놈의 쥐 때문이었다. 움직임을 잃은 뒤, 흥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음악이었다. 예전 아버지가 던진 라디오에서 나오던 음악, 흥얼거림, 비트, 박자. 끊어진 박자와 리듬. 또다시 일주일이 넘도록 답톡도 연락도 없다. 흥은 횡단보도를 몇 번씩 반복해 되 걷는 버릇이 생겼다.

 

흥은 이번 주도 어김없이 마감 조다. 차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픈과 마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돌아간다고 했지만, 흥과 편주임에게는 일반적인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 편주임은 그런 차장의 불공평한 처사가 늘 불만이었지만 흥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일찍 퇴근하는 오픈 조보다 늦게 퇴근하는 것이 좋다. 퇴근 시간보다 일찍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나면, 마음껏 족욕을 할 수 있었는데 마침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는 편주임을 애써 보내놓고 흥은 흥얼거리며 족욕 준비를 한다.

- 지금 이 시간에도 족욕이 가능한가요?

귀에 익은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예다. 흥은 반가움보다 화가 울컥 치민다.

- 아니, 앉아요.

예가 다소곳하게 다가와 앉는다. 양말을 벗고 흥이 하려고 준비해 놓은 세팅이 된 족욕 통 속에 발을 담근다.

- 돈 다 내고 온 거니까, 진짜 손님처럼 진행해 줘요.

흥은 어이가 없다. 멍하니, 예를 바라보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진행을 시작한다. 이번 컨셉은, 이번 진행은 이상하게 악보가 떠오르지 않는다. 흥이 묻는다.

- 어떤 음악을 좋아하죠?

- 아무거나요.

- 그래도 좋아하는 장르라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 음, 느린 거요. 느리고 느리다가 갑자기 확 빨라지는 거. 그런 곡도 있나요?

그런 음악은 있을 수 없다. 흥은 자신이 어떤 스타일로 진행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최악의 엉망진창 진행. 흥은 말없이 예의 발을 바라본다. 처음 보는 예의 발. 어느 책에선가 어떤 원시 부족은 발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서 함부로, 특히 애인이 아니면 절대 발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의 종류도, 부족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예의 백합같이 하얀 발이 뜨거운 물에 데워져 장미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

- 화상을 입은 거 아니에요?

- 발이 민감해서 그래요.

- 손보다 발이 더 민감하다고요?

- 당연하죠. 못 믿겠으면 물에 손을 넣어 봐요.

예가 그대로 한다.

- 발은 뜨겁지만, 손은 따뜻하죠? 손이 발보다 더 둔감해서 온도 차를 잘 못 느끼는 거 에요.

- 하지만 손을 더 많이 쓰는데요.

- 많이 쓰는 것과 민감한 것은 다르거든요.

- 근데 진짜 화상을 입으면 어떡하죠?

- 금방 돌아와요. 한 10분 정도면.

- 10분, 지금 30분도 넘었는데, 아까 끝난 거 아니에요?

흥이 족욕 진행시간을 틀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가 족욕 통에서 발을 꺼내 수건으로 닦고 양말을 다시 신고 나서야 흥의 정신은 돌아온다. 같이 족욕장을 마무리하고 함께 걸어 나온다.

- 바다가 보고 싶은데, 방파제까지 같이 걸어요.

흥은 진행도 말도 잃어버린다. 중간에 예는 살 것이 있다며 편의점에 들른다.

- 맥주 한 잔 할래요?

예가 고개를 끄덕이자, 흥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카운터에 놓는다. 편의점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으려다 흥을 힐끔 보고는 묻는다.

- 저기 죄송한데,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 맥주를 사는데도 신분증이 필요한가요?

- 시간이 늦은 시간대라 서요.

말을 얼버무리는 게 변명 같았지만, 흥은 가방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민다.

- 죄송한데, 혹시 번호 좀 불러 주실 수 있나요?

- 팔육일영영일에 이일…….

- 네, 맞는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바생이 뒤쪽에 서 있는 예를 보고는 바로 신분증을 돌려준다.

- 근데 확인이 너무 에프엠이신 거 아니에요?

- 얼마 전에, 한 번 걸려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알바생이 깍듯이 인사하자, 흥은 따질 말을 잃는다. 예는 뒤에서 그 상황을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다. 방파제에 도착하고도 한참 후에야 흥이 가까스로 입을 연다.

- 왜 또 연락이 없었죠?

예는 대답이 없다가, 캔을 내밀면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 맥주 마셔요.

흥에게 맥주를 건네주고, 예도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신다.

- 믿는 사람한테 배신당해 봤어요?

- 네?

- 형제가 셋인데 전 샌드위치에요. 위로 인, 아래로 지가 있어요.

- 아, 그래서 이름이 예. 순서대로 인, 예, 지. 이렇게 인 건가요?

예가 고개를 끄덕인다.

- 그런데 의는 왜 없는 걸까요?

- 아버지 이름이 의였어요.

- 형제가 넷이 아니고요?

- 처음 만난 애인 이름이 의였어요. 가장 오래 사귄 친구였는데 서로 가까워질 수가 없었죠. 그래서 헤어졌어요.

- 그냥, 그렇게 끝? 사랑이 아니었나 봐요.

- 아니요, 몇 년 후에 그 애를 다시 만났어요. 그 애도 나도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그 애한테서 입술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 느낌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그 애를 보내고 나서 한참을 펑펑 울었어요.

- 왜 운 거죠?

- 사실, 그건 첫 키스는 아니었어요. 키는 내가 더 커도 가슴은 당신보다 작아요. 아마 그때부터 제 성장이 멈춘 건지도 몰라요.

흥은 갈증이 나는지 캔을 단숨에 비운다. 예도 맥주를 이미 다 마셨는지 캔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어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곤 파도를 막기 위해 설치된 테트라포드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 생각보다 운동 신경이 좋지 않나요? 춤도 잘 출 것 같지 않나요?

흥이 보기에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하다.

- 그러다 다쳐요.

순간, 예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더니 아래로 떨어진다.

- 앗, 어떡해.

- 뭐가 떨어진 거죠?

- 핸드폰이요. 잃어버려서 산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 그거 봐요,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예는 발을 동동 구른다. 흥은 핸드폰을 꺼내 최근 통화 버튼을 누른다.

- 가만, 있어 봐요.

어딘지 정확하진 않지만, 테트라포드 밑, 깊은 어딘가에서 조그맣게 음악 소리가 들린다.

- 소리가 들려요. 망가지진 않았나 봐요.

- 어디 떨어졌는지 알 거 같아요?

고개를 젓는다. 흥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결국 테트라포드 아래로 뛰어 내려간다.

- 위험해요. 어떻게 올라오려고요.

- 조금만 찾아볼게요.

흥은 계속 전화를 걸면서, 손전등 기능을 사용해 사라진 예의 핸드폰을 찾는다. 해는 이미 완전히 떨어져 주변이 매우 어둑하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는 유별나게 크다.

-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 잘 모르겠어요. 소리가 들리는 거 같기도 하고, 이 삼발이 때문에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서 위치파악이 더 힘들어요.

한식경쯤 지났을까. 물은 점점 차오르고, 흥이 걱정되는 예.

- 이제 됐으니까 그만 올라와요.

- 조금만 더 찾아보고요.

- 안 그래도 깜깜한데, 핸드폰도 꺼져서 더 어둡잖아요. 어서 올라와요.

- 앗, 차가워.

물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 왜 그래요?

- 발목이 물에 찼어요. 물이 벌써 여기까지 들어온 거 같네요.

- 거봐요. 빨리 올라와요.

찬 바닷물은 거꾸로 쥐를 부르는 것 같다. 테트라포드에 붙은 따개비와 굴 껍데기도 흥의 몸과 손을 스치듯 베어낸다.

- 키가 작아서 팔도 닿지 않고, 손댈 곳도 없이 전부 따가워 올라가기가 쉽지 않네요.

- 그러게 왜 내려갔어요. 어떻게 하지. 사람을 불러올까요.

- 잠시만요. 물이 차면 몸이 뜨지 않을까요?

- 춥잖아요. 얼어 죽겠어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 물에 어떻게 뜬다고 그래요.

안달이 난 예. 근처를 돌아보지만, 마땅히 쓸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사이 물은 더 차올라 물에 잠긴 흥의 몸이 예에게도 보인다.

- 어째, 어떻게 해.

예는 엎드려 손을 길게 뻗어본다.

- 내 손 닿아요?

- 잡는다 해도, 이미 젖은 난 무거워서 못 끌어올려요. 그러다 둘 다 빠져요.

- 그럼, 어떡해요?

예는 거의 울먹이고 있다.

- 근처에 비상용 튜브 있죠? 그거 찾아서 가져다줘요.

- 잠깐만 기다려요.

예는 아까보다도 더 급하게 뛴다. 따개비가 얇은 신발 바닥을 뚫고 통증을 유발한다. 아플 틈조차 없다. 비상용 튜브를 찾아서 가져와 흥에게 던진다.

- 떠요? 올라탔어요.

예의 시야에 흥이 사라진다. 잠시 후, 옆에 있는 틈으로 흥의 모습이 보인다. 예는 얼른 뛰어가 손을 쭉 내민다. 그 손을 잡고 흥이 기어서 간신히 올라온다. 다듬어지지 않은 유리에 베인 듯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 휴, 살았네.

- 미쳤어, 미쳤어.

예는 눈물을 글썽인다. 흥의 바지 아래는 거의 젖어 있고, 체온을 많이 잃었는지 오들오들 떨고 있다.

- 왜, 그랬어요. 위험하게. 그깟 폰이 뭐가 중요하다고.

- 중요하죠. 이제, 연락 끊지 마요.

흥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예에게 내민다.

- 찾았어요?

- 아뇨, 구했어요.

 

먼저 선배를 구한 건 흥이었다. 흥을 쫓아오느라 미쳐 달려오는 차를 보지 못한 선배를, 역방향으로 되돌아가 있는 힘껏 밀쳐 냈다. 다행히 첫 번째 차는 둘 다 피할 수 있었지만, 역모션이 걸린 흥은 발목을 크게 접질렸고, 불행히도 두 번째 차가 흥에게 돌진해 왔다. 움직일 수 없는 흥에게 다시 온 건 흥이 밀어낸 선배였다. 억지로 흥을 안전지대로 끌어 당겨놓고 선배는 흥 대신 차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 춤추는 즐거움을 알려줄까? 추다 보면 힘들 때도 있을 거야. 그때마다 너의 기둥이 되어줄게 - 기억을 잃은 흥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선배와 춤이 사라진, 한참 뒤였다.

 

- 춥지 않아요?

- 이제 좀 괜찮아요.

- 정말 바보 같네요. 지금 이 상황에서 춤이 나와요?

- 가만히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는 게 더 나아요.

- 왜요?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도 부르시죠.

- 진짜 그럴까요?

흥은 예를 바라본다. 예는 흥이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 그럼, 즉흥 랩 같은 것도 가능해요? 지금 이 자리에서요.

- 많이 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 해 볼게요.

흥은 리듬을 타기 위해 먼저 어깨와 고개를 들썩인다. 좌로 우로, 우로 좌로, 조금씩 처음에는 작게 흔들흔들한다. 흔들거려야만 잠자는 리듬을 깨울 수 있다. 작았던 동작이 점점 커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사가 하얗게 비어있는 흥의 머리에 들어온다.

- 열려라 참깨. 열려라 참깨. 우린 평생 가까워질 수 없을지도 몰라. 네 손을 잡는 것도 더는 불가능할지도 몰라. 하지만 괜찮아. 너와 나의 맘은 백합보다 가까이 있고, 또 유리처럼 알 수 있으니까. 기다릴게. 평생 네 손만 잡고 산다 해도, 더 이상 우리가 가까워질 수 없다 해도 나는 괜찮아. 네 곁에 있어 줄게. 언젠간 너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거야. 열려라 참깨. 열려라 참깨.

흥의 오른손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예는 바닥을 짚고 있는 흥의 왼손을 주목한다. 어둠 속이지만 빨갛게 베인 상처가 여기저기에 가득하다. 상처가 장미 가시처럼 아련하고 쓰리다. 흥은 상처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과 상처를 의식하지 않는 흥은 언제나 그렇다. 물에 젖은 한기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흥이 온몸을 타고 손가락까지 퍼져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각자의 박자에 맞춰 제각각 춤을 추고 있다. 엄지와 검지가 가장 빠르고 가장 움직임이 느린 건 새끼손가락이다.

- 약속 지킬 수 있나요?

흥의 들썩거림에 예도 움직임으로 답한다. 예는 가장 느릿한 새끼손가락에 가만히 자신의 손가락 끝을 대본다. 그 손가락 끝으로 흥의 리듬이 살며시 다가오고 있다.

 

이름: 조흥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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