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에게 전하는 마음이 바람을 타고 가기를
누군가에겐 행복으로 가득 찬 웃음소리 혹은 문 앞의 한 소녀에게는 그녀를 거부하는 듯한 위협적인 신호음.
나는 언제쯤 이 문을 열고 나의 잠을 깨워주던 바람을 느낄 수가 있을까. 어둠에 파묻혀 버린 나를 눈부시게 만들어줄 햇빛을 만날 수나 있을까. 그러한 자연이, 그러한 풍경이 너무도 그리워 문고리를 잡을 용기를 내본다. 그러나 바깥세상이 그녀를 거부라도 하듯 문고리에서 손이 스르륵 미끄러진다.
집안이 모두 대대로 ‘판사, 검사, 선생님’ 같은 국가를 위해 일하는 ‘엘리트’들로 넘쳐났다.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한다면 아마 그 집안에서 ‘아웃사이더’로 불릴 것이다. 나는 늦둥이로 이미 20살이 넘은 두 명의 오빠와 한명의 언니를 두고 있지만 친척들 포함 그러한 아웃사이더는 내가 처음이었다.
“막내야, 많이 안 바래. 그냥 오빠랑 언니처럼 공부 잘해서 검사가 되면 좋겠다. 정 안되면 변호사라도 말이야.”
흔한 부모님의 자식을 향한 애정 어린 말이라며 주위에서 말한다. 정말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이 건네주신 그 희망의 끈을 끝까지 붙잡았어야 했다. 괜한 영웅심리, 남들과 다르다는 자부심, 평범한 공무원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감 따위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으로 남겨두었어야만 했다.
중학생이 되던 해였다. 나는 사명감이 넘치는 아이였다. 흔히들 가장 철없고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후회하는 시절이라는 중학교 2학년. 그러한 역동적이고 가장 스스럼이 없던 중학교의 시끌벅적한 반에는 어디에서나 그렇듯, 반 아이들의 시선에서 제외된 짙은 검은색 그림자를 내비치는 한 아이가 보인다. 아이들은 밥을 먹을 때나 쉬는 시간이나 교복이 얼룩진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저 수업 때 그 아이가 졸다가 머리를 책상에 박거나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버벅 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조롱 비슷한 웃음을 보일 뿐이다. 선생님이 분명 그 아이를 '이정인' 이라고 불렀다. 점심시간의 설렘으로 떠들썩한 분위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야, 이정인, 나랑 밥 먹을래?”
그녀는 새삼 놀란 듯, 고개를 휙 든다. ‘이정인’이라는 이름이 불린 순간 생기를 얻은 듯한 그 아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지 마는지 하다가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꽤나 귀여운 얼굴을 가진 소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음... 근데 급식실이 어디야?”
정인의 귀여움을 넘어 예쁘기까지 한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 대한 새삼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질문에 얼른 답해야만 했다.
“ 너 급식실이 어딘지 몰라?”
분명 1학년 시절을 보냈을텐데, 급식실 조차 어딨는지 모른다면 여태껏 밥은 어떻게 먹었단 말인가. 하지만 중학생의 나는 꽤나 ‘어른’이었기 때문에 이 놀라움을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밖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가자. 내가 알려줄게”
그날 이후였다. 나는 처음으로 대놓고 반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내가 정인의 곁으로 다가가 챙겨줄 때면 꽤나 위협적인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우리 반 친구들에 대한 실망감을 느낄 때쯤 나의 제일 친한 친구마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야 너 이정인이랑 왜 놀아? 걔 왕따잖아”
친했다고 생각하던 친구마저 그냥 나보다 ‘어린아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른인 나는 어린아이들의 한낱 유치한 모함은 뒤로 한 채 정인의 친구로 남았다. 고개를 숙이고 침울해 있던 정인의 웃는 얼굴을 보는 나날이 더 많아졌고 그런 날이 많아질수록 내 행복감은 더 늘어가는 듯 했다.
집에 들어가니 소복하게 눈이 내려앉은 듯한 하얀 케이크와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케이크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큰 오빠가 판사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오빠와 언니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겠구나.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상태에서는 부담감이 커질 테니. 그러면 작은 오빠와 언니는 저 케이크를 먹지 않고 의례적인 박수만 쳐 주고 방으로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밤을 새며 책과 씨름할 테고 그럼 저 케이크는 부모님 몫을 생각하더라도 절반 이상은 내가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어른인 나의 어린아이 같은 결론이 떠올랐다. 잠시 후,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는 부모님이 큰 오빠에게 수고했다며 케이크의 촛불을 밝혔다. 그 불빛 속에서 나는 작은 오빠와 언니의 표정을 살폈다. 달콤한 케이크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에는 예상대로 마냥 케이크를 먹겠다는 생각으로 행복한 나와는 달리 걱정과 근심이 서려있는 듯 했다.
나의 초등학교 2학년 때 꿈은 요리사였다. 주위 친구들 꿈 중에는 ‘가수’가 특히 많았는데 집에 텔레비전이 없는 나에게는 ‘가수’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알 턱이 없었다. 책으로 그득한 집에는 항상 오빠들과 언니가 판사가 되겠다며 그 책을 자신의 옆에 쌓아두고는 했는데, 그들을 따라 판사를 장래희망 칸에 적기에는 누구보다도 찬란한 꿈을 꾸는 그들의 표정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음은 어린 나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에 내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준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해주신 직업인 ‘요리사’를 택했다. 물론 그 꿈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단순한 바람을 보신 부모님이 걱정스런 눈길로 판사 또는 검사를 대신 장래 희망 칸에 적어주셨기 때문이다. 분명 나의 장래 희망인데, 요리사를 적은 뒤로 단 한 번도 꿈을 내 손으로 직접 적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요리사’라는 꿈은 사라져갔고 판사 꿈을 가진 나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았다. 공부도 잘하니 너는 분명 너가 말하는 미래의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요리사 이후로 스스로 꿈을 꿔본적이 없다. 부모님이 대신해서 꿈을 꿔 주었고 주위의 선생님들이 그 꿈을 뒷받침해주며 내 미래는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져 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나면서 촛불 속에 어른거리는 작은 오빠와 언니의 근심 어린 표정이 내 얼굴에 번져갔다. 난 그 때 내 10년 뒤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하며 떠올려지지 않는 미래를 생각했다. 순간 이 케이크의 달콤한 맛을 잊어버리게 될까 겁이 났다. 오빠들과 언니도 아마 내 어렸을 적과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는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박수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케이크를 자르며 큰 오빠를 칭찬하는 부모님과 슬며시 자리를 뜨는 작은 오빠와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보통 같았으면 돌고 돌아 순서를 기다리느라 애가 탔을 테지만 케이크 위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초콜릿을 미처 감상도 하기 전에 내 접시 위에는 달콤한 맛을 자랑하는 빵 한 덩어리가 놓여 있다. 입에 케이크를 밀어 넣으니 어찌나 예상대로 맛있는지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그런 내게 오빠가 많이 먹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막내야, 맛있지? 너도 큰 오빠처럼 공부도 잘하니 판사가 되면 엄마가 너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로 사줄게.”
이 완벽한 상황에 엄마의 그 따뜻한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이렇게나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내 속을 답답하게 만든다. 입은 너무나 달콤하다며 케이크를 더 원하는데 갑자기 나의 속이 체할 듯이 이를 거부한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고개만 끄덕인 채 우유를 마신다.
축하의 자리가 끝나고 엄마가 내게 언니에게 케이크를 갖다 주라며 접시를 내민 후 자신은 작은 오빠 방으로 케이크를 들고 향했다. 나는 잠시 언니의 방 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아까의 그 원인모를 체함 때문일까. 슬며시 문고리를 잡고 언니의 동태를 살핀다. 역시나 그녀는 책과 씨름 중이다.
“언니, 케이크 가지고 왔는데 먹을 수 있겠어?”
“됐어. 너 먹어, 너 케이크 좋아하잖아.”
“언니도 좋아하잖아, 나랑 예전에 생일 때마다 더 먹겠다고 싸웠으면서.”
언니는 고개를 돌리더니 웃음을 짓는다. 그러더니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래,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 맛 좀 보자,”
언니는 포크로 크림이 잔뜩 묻은 빵 쪽을 크게 떠서 한 입 먹더니 예전에 나와 싸워서 더 큰 케이크 조각을 차지할 때만큼 환호에 젖은 웃음은 아니더라도 이 근래에 본 표정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언니, 그러고 보면 우리 정말 안 싸운지 오래됐다. 어렸을 때는 진짜 언니가 죽도로 미웠는데 말이야.”
언니는 다시 크게 웃더니 오랜만에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째려본다.
“감히 언니를 미워했단 말이야? 하긴, 내가 맨날 싸워서 너한테 이기긴 했지. 뭐, 요즘은 너랑 싸울 일이 없네. 이제 난 어른이 됐나봐. 정말. 나이 어린 동생하고 마음 놓고 싸우지도 못하네.”
“나도 어른이다 뭐,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언니는 어릴 때였으면 버릇 없다고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을 테지만 이제는 나를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야, 넌 아직 어른 아니야. 너 지금 꿈이 뭐야? 판사 아니지?”
“응..? 아.. 음 아니지, 사실 언니, 그냥 고민중인 건데 청소년 상담 사회복지사! 멋질 거 같지 않아?”
“ 봐, 너 꿈이 있잖아. 그것도 너가 원하는 꿈. 그럼 아직 어른 아닌거야."
“왜? 언니도 꿈이 있잖아. 검사 하겠다고 그렇게 죽어라 공부만 하면서. 나랑 쇼핑도 안가고 놀러가지도 않고.”
잠깐의 정적 동안에 언니는 표정으로 자신의 씁쓸한 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 그래? 나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근데 말이야, 막내야. 꿈이란 건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자고 있는 동안 꿈을 꾸더라도 내가 그전에 생각한 걸 꿈으로 꾸잖아. 근데 나는 내가 생각한 게 아닌데 꿈을 꾸는 걸까? 너 말대로 ‘꿈’을 꾸고 있는 나라면 참 좋겠다.”
괜스레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꿈을 꾸는 건 생각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쉬운 게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었지만 언니의 더 없이 쓸쓸한 얼굴빛은 내게 최대한 예의를 갖춘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언니는 공부해야 하니 어린이는 자러 가라며 나를 다시 큰 방문 앞으로 내몰았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오늘은 눈만 감으면 펼쳐지는 나만의 꿈을 꾸겠노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정인아, 밥 먹자.”
정인은 갑자기 흠칫 놀라며 뭔가를 가린다. 그러고는 세상 누구보다 어색하게 공책을 책상 서랍으로 숨기며 급식실로 앞장을 선다. 나는 정인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궁금증을 잠시 뒤로 하고 요즘 들어 당당해진 정인의 자세에 뿌듯함이 앞서 정인의 등을 툭 친다. 정인은 그런 내게 항상 환한 웃음으로 답하며 이제는 내 손을 잡고 흔들어 보인다. 처음에 수군거리던 친구들도 이제는 우리의 곁에 다가와 한마디씩 걸어보고 그렇게 나의 발걸음으로 인한 정인의 변화는 학교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정인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양 내 옆으로 다가와 나를 빤히 바라본다. 항상 느꼈던 거지만 정인의 맑고 동그란 눈은 오늘따라 새삼 더 매력 있게 느껴졌다.
“있잖아... 나 학교 앞 분식집 진짜 가보고 싶은데,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못 갔거든. 거긴 항상 애들이 많아서.. 혹시 시간되면 같이 갈래?”
이 맑은 친구의 정중한 부탁과 같은 제안을 누가 거절할 수나 있을까.
“당연하지. 이정인, 네가 사야한다! 얼른 가자.”
시끌벅적한 소리와 어울리는 시뻘건 떡볶이는 오징어 튀김이 곁들어져 있고 중학생인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맛집이었다. 정인은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내게 떡볶이를 권하고 자신의 입에 얼른 집어넣는다. 그 친구와 함께 먹는 이 음식은 어느때보다도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인은 오뎅국물도 그녀 답지 않게 벌컥벌컥 마시더니 나를 다시 빤히 바라본다.
“실은 나 할 말이 있어. 사실 이거 누구한테도 말 안하려 했는데, 너 덕분인 거 같기도 하고.. 또 넌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데 비밀로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뭔데?”
정인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은 빛을 띠며 더욱 귀여워 보이는 것이 여태까지 어떻게 남자아이들의 관심 밖에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있잖아.. 내가 저번에 너한테 숨겼던 거. 그림. 그거 우리 반 정우야.”
“정우? 그 공부 잘하고 잘생긴 정우?”
“아, 응... 그렇지... 잘생긴...”
정인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아 보였다.
“물론, 정우가 너무 잘난 거 알아. 그래서 나도 그냥 항상 구경만 했어, 구경만! 그리고 그 아이를 동경한다고 생각했고.. 모든 친구들이 그 아이를 좋아하니깐. 근데 어느 순간 보니 내 노트에는 그 아이가 항상 그려져 있는 거 있지.”
나는 그 순간에 그러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인기 많고 멋있는 정우와 저 수줍은 소녀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고 말이다.
“그냥.. 난 좋아하는 걸 그 때 알았지만 마음속으로만 삼켰어. 그냥 그 아이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것으로 좋았으니깐. 그런데 항상 아이들의 관심 밖에서 놀림 받던 내 앞에 너가 나타나고, 그렇게 아이들이 날 바라봐주기 시작하니 나도 고개를 들 수 있게 되더라. 고개 숙이지 않으니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됐어. 그러고 나니 있지, 정우가 날 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더라고.”
정인은 그러고 물 대신 침을 꿀꺽 삼킨다. 나도 그런 그녀를 따라 함께 긴장감이 생겨 물을 마셨다.
“하... 나는 그것만으로 좋았는데.. 그렇게 정우와 마주볼 수 있는 것도 너 덕분에 생긴 나의 행운인데, 이틀 전에 정우가 나한테 쪽지를 줬어. 카페에서 만나자고. 근데 그게 당장 내일이야... 난 아직 그 아이와 단둘이 만날만한 용기가 없는데... 그래서 아직 답장도 못줬어...”
“뭐? 그럼 정우도 널 좋아하는 게 확실하네! 당연히 만나야지! 바로 답장 했어야지!”
“나도 내 마음은 너무나 그렇지만 두려워.. 이렇게 소심한 나를 보면 정우가 이제 바라봐주지도 않을 거 같아서... 그 아이와 만나는 건 내 꿈이었는데 그걸 현실로서 마주할 용기가 안나.”
세상에 이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가 있을까. 내가 남자였다면 정인과 같은 착하고 순한 아이를 만나는 것은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인아, 나 사실 너한테 처음 다가갔을 때 너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혼자서 어깨 펴고 당당히 걸어다닐 수 있도록. 근데 정인이 너가 나를 마주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너가 너무 좋아졌어. 왜냐면 넌 처음의 그 소심해 보이는 껍데기를 벗고 수줍지만 대담한, 너만의 매력을 보여줬으니깐 말이야. 분명 정우도 너의 그런 모습을 본 것일 테고 그렇다면 틀림없이 나처럼 너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될 거야.”
정인은 또다시 그 맑은 눈이 약간의 눈물로 글썽거리며 빛나더니, 고개를 계속 끄덕거린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난 너가 정말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나를 변화시켜 주었잖아. 난 너로 인해 걱정으로 지새던 나날에서 꿈을 꿀 수 있게 됐어. 나 진짜 너한테 평생 잘하려고! 우리 계속 친구하자!”
그리고는 싱그럽게 웃는 그 친구의 미소가 나까지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듯 했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나로 인해 인생을 살며 진정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해야겠다. 그 때 나는 나만의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됐다. 괜시리 가슴이 뛰었다. 이유모를, 진정되지 않은 설렘이 계속 내 마음에 방망이질을 했다. 그런 알 수 없는 흥분에 도취되어 있는 내게 정인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건넸다.
“있잖아. 혹시 내일 카페 앞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어?? 내일 돼서 내가 다시 용기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너가 옆에 있어주면 힘이 날 거 같아.”
“당연하지,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내일 보자!”
이상한 날이었다.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고 마치 구름을 타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주는 듯 했다. 마음은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햇살 없는 밤이었지만 달빛이 나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그 빛을 쫒아서 집으로 들어온 나는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던 다른 날과 달리 아무렇게나 신발장에 벗어 던진 채 부모님의 방으로 향했다.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았고,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아빠, 엄마. 나 청소년 상담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그 일을 하면 제가 행복할 거 같아요.”
나는 그 때 들었다. 아빠의 소리 없는 한숨을, 엄마의 희망의 끈이 풀어지는 소리를. 엄마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들여다봤고 아빠는 그래도 막내라고 어떤 일에도 지어주던 미소를 잠시 숨기고 표정을 굳히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막내야. 너 어렸을 적에 아무 생각 없이 요리사 하겠다고 그랬을 때 귀엽게 봐줄 수 있었어. 근데 너 이제 다 컸잖아. 오빠, 언니 다 집안 내력대로 판사, 검사 하겠다고 저렇게 노력하는데 너는 왜 그러는 거니.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안정적으로 살려면 지금부터 노력해야 해. 노력하지도 않고 쉬운 길로 가겠다고 하면 엄마와 아빠는 너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단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말인지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노력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판사 되는 길이 너무 어려워보여서 쉬운 직업을 택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제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건데, 대체 왜 반대하시는 거죠.’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설렘이 주는 잔잔한 울림이 아닌 절망의 큰 물결이 출렁거리며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귀여운 막내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가슴 아픈 표정은 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아직 어린 나에게 감정의 표현만은 숨길 수 없었는지 눈물이 계속 떨어져 내렸다. 오랜만에 다가온 설렘인 만큼 이는 크나큰 슬픔으로 밀려왔다. 부모님은 적잖이 당황해 하는 듯 보였다. 아빠는 고개를 돌리셨고 엄마는 휴지를 뽑아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아직 넌 아직 우리 집 어린 막내지. 너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은 어려서 그렇겠지만 더 크면 아빠가 말씀하시는 게 뭔지 알게 될 꺼야. 방에 들어가서 얼른 자렴. 좋은 꿈 꾸고.”
나는 방으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어떻게 좋은 꿈을 꿀 수 있나. 이제는 자면서도 상상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억울하면서도 역시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인가에 대한 오만가지 생각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저 이불에 얼굴을 묻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달빛으로 설레던 밤도 잠시 따스하지 만은 않은 햇살이 나를 깨웠다. 핸드폰을 보니 오후1시였다. 주말에도 항상 아침 일찍 깨우던 가족들인데 이 시간까지 자도록 냅두다니.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나를 아예 저버린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도 전에 문득 핸드폰을 다시 보며 놀라 화장실로 직행했다. 1시 30분까지 정인과 만나서 학교 앞 카페로 가기로 약속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아이의 설렘마저 저버리고 싶지 않아 얼른 세수를 하고 핸드폰을 다시 집었다. 역시나 정인의 망설이는 문자들이 쌓여있고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정인아, 나야. 미안해. 내가 늦게 일어났어. 너 절대 안가면 안돼. 내가 카페 앞으로 지금 당장 갈 테니깐 너도 얼른 와. 알았지?”
이렇게 메시지를 남긴 후 옷을 갈아입고 방문이 닫혀져 있는 집안을 한번 둘러본 뒤 곧장 뛰어 나갔다. 아파트를 나와 저 끝에 있는 횡단보도를 보니 곧 초록불이 켜질 것만 같았다. 저 신호를 놓친다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만 같았고 정인의 불안한 표정이 불현듯 떠올랐. 나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초록불은 이미 켜졌지만 건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가 그렇게 절실했던 걸까. 그것이 분명 나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인의 소망을 지켜주기 위한 나의 바람이 날 이토록 전력을 다하게 만든 것일까.
“있잖아. 미래를 꿈꾼다는 게 그렇게 설레는 일이더라고. 그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웃음이 새어나오는 듯한 정인의 행복한 얼굴만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아이의 꿈만은 지켜지길 바랬다.
“쾅”
그와 동시에 뭔가 커다란 소리가 내 고막에 울려 퍼졌고 어제와는 다른 느낌의 구름들이 날 에워싸서 어디론가 데려갈려는 듯 했다. 나는 이 몽환적인 기분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정인의 얼굴만을 생각했다. 그렇게 카페 앞에 와 있었다. 이미 약속 시간은 지난 듯 했고 카페 안을 들여다보니 정인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밝은 얼굴로 정우 앞에서 웃고 있는 듯 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밝은 미래가 그 아이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들의 자리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집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렇게 집이었다. 방 안에서 누군가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가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나 때문일 것이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방 문틈으로 몰래 다가가보니 아빠 또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오빠들과 언니가 그저 고개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도 모자라 말도 않고 외출을 하는 철없는 막내의 방황이 그들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죄책감만이 밀려왔다. 얼굴이 상기된 큰 오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이렇게 외면을 당한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1분인지, 1시간인지 모를 시간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다짐했다. 잘못된 꿈을 꾸지 않겠노라고. 오빠들과 언니처럼 부모님에 기대에 부응하며 열심히 노력하겠노라고 말이다. 그 때 이후로 줄곧 나는 책상에 계속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방문을 열고 나갈 일이 없었고 그 누구도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주말이 이렇게나 길었나 싶어 핸드폰을 확인하려 하니 밖에서 떨어뜨렸는지 핸드폰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 주말 동안 나를 찾지 않는 가족들로 인해 나는 방문을 당당하게 열고 나갈 용기를 잃어버렸다. 어느 친구들에게도, 정인에게도 먼저 다가서 말을 걸던 나였지만 잃어버린 꿈과 함께 용기조차 사라진 듯 했다. 그렇게 나는 더 오랜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책을 들여다 볼 뿐 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현재. 나는 문득 한 무리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오랜 잠에서 깬 듯 눈을 떴다. 햇살이 그리워 열지 못하는 방문 앞에 멍하니 서있다. 그리고 다시 그 시끌벅적한 소리가 잦아들기 까지 몇 시간이 지났다. 한 번 더 용기를 내서 문고리를 잡으려는 찰나 딸깍 하고 오랜만에 방문의 문고리가 움직였다. 엄마였다. 그 얼마나 그리운 얼굴이던가. 물론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화장실 한번 가지 않았던 거 보면 그리 많은 날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그리움 같은 것이 내 마음을 울려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엄마 손을 잡으려는데 그런 나를 엄마는 보지도 않고 슥 지나가 의자에 앉아 책상에 있는 내 사진을 집어 든다.
“미안해... 미안해.. 막내야..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 이제 너 방에 왔어. 6개월이나 지났는데... 여기 오면 환하게 웃으며 엄마를 반기던 널 보게 될까봐... 그럼 엄마는 더 이상 살지 못할 거 같아서 이제 왔어... 너무 보고 싶었어... 어떡해, 엄마 어떡해. 지금도 너가 너무 보고 싶어 막내야...”
엄마는 책상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을 했다. 왜 어린애처럼 우냐고, 나 여기 있다고 엄마의 등을 어루만지려는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내 손이 엄마의 몸을 통과하는 것을. 그리고 내 목소리가 이 공간에 울려 퍼지지 않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아. 그 때의 무너질 듯한 굉음은 잘못 본줄 알았던 트럭이 나와 부딪히는 소리였구나. 그리고 나는 죽었구나. 그럼에도 나는 이루지 못한 다른 사람의 소망을 지키고자 하늘로 곧장 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엄마는 눈물을 바닥에 뚝뚝 흘리며 콧물을 훌쩍거린 채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사진 속 딱딱한 얼굴을 쓰다듬는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듯 엄마는 계속 훌쩍이며 말을 이어간다.
“막내야. 엄마가 너를 꿈을 꾸지 못하게 해서 너가 진짜 꿈을 꾸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게 돼버린 거지? 그런 거지? 엄마 정말 못됐다. 그렇지?... 막내야... 이렇게 미운 엄마라도 그래도 그 곳에서 봤지? 언니가 너 대신 너의 꿈을 꾸고자 다시 대학원 가서 공부해서 오늘 사회복지사 됐어. 오늘 자기가 봉사하는 곳에서 상담해주는 아이들 데려와서 엄마가 차려준 음식 같이 맛있게 먹더라. 너 언니도 이 일이 참 좋나봐. 행복하게 웃더라. 우리 막내였어도 그랬겠지? 아니 우리 막내는 평소처럼 더 해맑게 웃었겠지? 막내야. 이제 엄마 더 이상 비겁하게 숨지 않고 막내 보러 자주 올게. 가족들이 더 열심히 너의 꿈을 함께 꾸고 너에게 말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일어서는 듯하다 다시 힘없이 주저앉는다. 그러고는 창문을 향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고개를 돌리더니 두 손을 모은다.
“거기서는 너를 위해 더 멋진 꿈 꿔. 눈 뜨고 당당히 너의 꿈을 말하렴. 엄마가 기도할게... 우리 딸 얼른 다시 태어나서 그 꿈 이뤄지게 해달라고. 맨날 기도할게.”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대성통곡을 엄마와 밤새 함께 했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그리고 나는 곧 나의 후회에 대한 진상을 알고 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에 대한 후회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린 내 꿈에 대한 후회.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을 빌미로 용기를 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회들이 나를 절망시키려는 찰나, 엄마의 간절한 밤샘 기도는 내게 다시 꿈을 꾸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현실보다도 더 가혹한 벽에 가로막힌 나지만 분명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에 힘입어 열심히 꿈을 꾸다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더 사랑했어야 할 가족들과 더 응원해줬어야 할 정인과 같은 친구들 곁에서 다시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의 꿈으로 다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용기를 내서 방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양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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