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루카 씨의 일주일

by luca posted Mar 0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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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서의 일 년은 참 길었다. 허나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그렇듯이, 이 촌구석에서 내가 보낸 시간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터무니없이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모든 회상에서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지나가버린 유년시절의 행복한 추억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나른하고 한가로운 하루하루의 지겨운 반복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이 과연 여유롭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이곳에서의 여유가 지겨움으로 탈바꿈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토씨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던 반복. 어쩌면 내가 꿈꿔 왔던 삶을 나는 살고 있었다. 아닌가? 나는 내가 과연 무엇을 바라며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몰랐다는 것을 여기 온 후 한 달 정도 후에 알게 되었다. 여기서 내가 느낀 끝없는 지겨움과 권태에 대한 보상이 그것뿐이라면 그것은 좀 너무하다. 그 사실을 패기와 열정이 가득했을 적에 알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으나, 이미 이곳에서의 반복적인 생활과 지겨움에 익숙해져버린 나에게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이곳에 오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 시골에서의 삶과 비슷했던 시기들을 나는 이미 한번 겪어 보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의과대학 입시 때문에 매일 도서관으로 출퇴근했던 시절이 바로 그 때였다. 그때의 생활도 지금과 다름없이 하루하루가 그저 반복될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도서관으로 가서 어제 보았던 문제집을 펼친 뒤에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분량을 풀고, 점심을 먹고 또 다시 아침에 했던 짓을 반복하고, 그렇게 밤이 깊어서 도서관 닫을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서 차린 지 두 시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찬밥을 데워 먹고는 자고, 또 일어나서 도서관으로 가고……. 그저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나는 그렇게 지냈다. 내가 편히 쉴 수 있었던 때는 잠잘 때와 점심을 먹고 나서 포만감 때문에 졸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먹은 것을 소화시키려고 잠시 산책할 때, 그렇게 두 번 뿐이었다. 일 년 후에 나는 지방의 한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졸업한 뒤 십년간 여기저기 떠돌다가 부탁을 받고 마침내 이곳 구석진 시골에 있는 치과 병원의 원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나의 대학 은사님이 고향에서 운영하시던 치과였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비워져 있던 자리를 내가 잽싸게 채간 것이었다. 이곳에는 치과 말고는 다른 병원이 없었다. 사실 치과가 있는 것도 좀 우스울 만큼 이 동네는 정말이지 작았고 사람들도 몇 십 명밖에 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치과가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치과가 있다면 왜 소아과나 이비인후과 같은 병원들은 없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무의미한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다시금 이곳에서의 지루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답고 편안함을 주는 풍경이 이곳에 없어서 내가 권태와 지겨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 온갖 편안함에 둘러싸인 채로 안락함을 느낄 때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사실 하루하루가 평안하거나 불행한 것은 별 차이가 없고, 그것이 반복되느냐 아니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너무나도 넘쳐나는 자유로움은 도리어 속박이 될 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자유의 노예가 된 채로 점점 무기력해져가고 있는 중 이었다.

 

일요일

 따가운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일어나 보니 일요일이었다. 주말은 병원이 휴일이라 늦게 일어나도 되지만, 나는 지금 눈을 감으면 하루 종일 침대에만 붙어 지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어제 먹다 남은 찬밥을 데우지도 않고 서너 개의 반찬통을 냉장고에서 꺼내 같이 먹는다. 너무 맛이 없다. 그렇다고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바로 먹는 밥이 진수성찬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나는 그저 밥알들을 입 안에 쑤셔 넣고는 물과 함께 삼킨다. 다 먹고 나서는 가만히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벽과 마주하고 있었다. 재떨이에 다 타버린 담배 몸뚱어리를 짓누른 뒤에 나는 일어난다. 좀 더 앉아있고 싶었으나 명색이 치과 의사라 양치는 제때에 하려는 것이다. 양치하고 세수도 좀 하고 나서 나는, 그래, 오늘은 과연 어떻게 보내야 하나. 또 어떤 권태가 나를 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생각에 잠기며 잠시 눈을 감는다. 눈을 떠 보니 창밖의 풍경이 보기 좋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다시금 오늘 뭘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나의 권태는 시작된 것만 같은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지겨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지 무거운 몸을 움직여봐야만 한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시골이라 공기가 좋다는 생각은 여기에 처음 오자마자 했다. 매번 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마실 때 드는 생각이지만 이제는 그것도 지겹다. 나는 하품을 한번 하고 포장도 안 된 흙바닥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동네 사람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전부 밭일하러 나간 것인가? 모르겠다. 동네에 처음 왔을 때 논이 많이 있는 것은 보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농사짓는 걸 본 적은 나는 없다. 나는 그렇게까지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상관없다. 지금은 혼자 걷는 이 길이 마음에 들 뿐이다. 고요하다. 그러나 길 양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의 풍경은 그리 고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들이 한 번 더 나에게 고독감을 주었다. 나는 그저 피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자주 올라가보고는 했던 동네에 하나뿐인 언덕으로 갔다.

 그리 힘들지 않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이 동산을 나는 꽤 좋아했다. 올라 보니 공기가 더욱 상쾌하다. 바쁜 도시인들이 한번 와 보면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니다. 지금의 나의 상태로서는 나는 오히려 도심의 빌딩 숲 한가운데로 떨어져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곳에서의 편안함은 나에게 오히려 고통을 준다. 벗어나고만 싶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나는 또 너무 무기력하다. 나는 잠시 동네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돌 위에 누워서 조금 잤다. 아니, 조금 잤나 싶었는데 일어나 보니 태양이 내 바로 위에 떠 있는 한낮이다. 나는 좀 놀랐지만 그러려니 하고 다시 눈을 조금 붙였다. 일어나 보니 언덕 아래 동네가 조금 시끄럽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다. 나는 다시 자려고 했으나 이제는 잠도 오질 않고 지겹다. 일어나 앉아서 바라보니 멀리 있는 큰 산 너머로 벌써 해가 지려고 한다. 해가 산 아래로 조금씩 내려가면서 그 주변의 하늘의 색이 황금빛에서 붉은색을 띄는 주황색으로 바뀌는 것이 제법 아름답다. 나는 이러한 자연의 경치에 감탄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지만 그뿐이다. 나는 다시금 지루함을 느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네 사람들이 몇 명 어슬렁거리는 것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 내가 보기에 여기 사람들은 너무 조용하고 차분하기만 한 것 같다. 채 열 명도 안 되는 아이들만이 낮 동안에 잠시 뛰어다니며 놀 뿐이다. 나는 이제 지겨운 집으로 가야만 할 것을 또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갈 때는 발걸음이 터덜터덜해서 왠지 더 귀찮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 버렸나 하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점심 저녁 안 먹은 것도 잊고는 씻지도 않고 옷만 벗어 놓은 뒤에 침대 위에 엎어져서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잤다.

 

월요일

 오늘은 병원이 여는 날이구나. 침대에 엎드린 채 깨어난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일어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어제 산 위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고 잠을 많이 자서 나는 그리 피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일어나서 밥을 입안에 집어넣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한 다음 옷을 입고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것들 같은 일들이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고 나면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것이 좀 귀찮았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해 놓고 보면 별 것 아니다.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 집을 나섰다. 해가 뜬지 한두 시간쯤 된 것 같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산으로 가는 길하고는 정반대다. 나는 그것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았다. 좋다면 좋을 이유는 무엇이고 또 싫다면 싫을 이유는 뭔가. 모두 나와 별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나는 그저 머릿속으로 이런 귀찮기만 한 생각들을 하지 않을 날이 오기를 희망해 볼 뿐이었다. 길 양옆의 논밭에서 마을 사람 몇몇이 위를 쳐다본 뒤 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나도 고개를 살짝 비틀어 답례를 하지만 나는 저들이 누군지 모른다. 저들은 나를 아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 같다. 처음 왔을 때 서울에서 온 의사라고 소문이 조금 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동네에 한 명밖에 없는 의사라는 것은 이럴 때 보면 참 기분이 이상하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병원에 잘 오질 않는다. 잘 다치지를 않는 것인지, 아니면 다쳤는데도 다른 이유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다쳐도 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치료비 때문일까.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마을이 가난한 편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동네는 다칠 일조차도 없는 세상 최고의 마을인 것이다. 최고로 지겹다. 지겹고 지루하다. 지겹고,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동네 사람들은 잘만 사는데 의사인 나만 아프다. 나는 그렇게 조금 무기력한 채로 병원 안으로 들어가 원장실 의자에 앉았다. 들어올 때 딴생각을 해서 간호사들이 내게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그건 아무 상관없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이 병원에서 손님을 맞아본 적이 없다. 아주 가끔 환자들이 와도 그저 간호사들이 하는 간단한 치료로도 해결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병원에 간호사는 세 명밖에 없지만, 이럴 때 생각해 보면 참 고맙기도 하다. 그들 덕분에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작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너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나는 더 힘이 빠지는 것이다. 그래도 손님을 맞는 것은 꽤 귀찮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조금 놀란 채 들어오라고 하자 간호사 한 명이 나에게, 환자 한 명이 나를 불러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게 무슨 큰 변화를 준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의사 노릇을 오래 해왔으니까 말이다. 나는 조금 어리벙벙한 채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박 씨라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광대가 조금 튀어나와 있고 오른쪽 광대 정 중앙에 작은 점이 한개 있고 내가 평소 갖고 있던 시골사람의 이미지에 비해서는 꽤나 잘생겨 보이는 박 씨는 나를 보고 이가 아파 죽을 지경이란다. 입을 벌리게 하고 안을 보니 좀 심각했다. 잇몸까지 상한 것 같으니 이도 빼고 잇몸 치료도 해야 한다. 참 오래간만에 하는 수술일 것 같다. 박 씨에게 치료비를 말하니 그는 조금 놀란 눈치다. 그러더니 비실비실 일어나서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면서 볼을 만지며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잠시 박 씨가 걸어 나간 쪽을 바라보다가 간호사들에게 수고하라고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간호사들은 환자들이 없는 동안에는 무얼 할까가 궁금해졌다. 그들은 여성들이니까 서로 떠들고 놀지나 않을까? 그러나 나는 방 안에 있으면서 내가 내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가만있자, 나는 그럼 그 동안 여기 이 작은 방에서 무얼 했나?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무기력해지면 기억력도 같이 시들어버리는 것인가?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다음 순간 작은 창밖의 멋진 시골 풍경을 바라보면서 안정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일랑은 다 잊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또 속절없이 지나가 버릴 오늘 내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했지만, 하루 종일 내게는 아무 특별한 일도 없었다.

 

화요일

 오늘도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원 원장실의 크고 제법 폭신한 의자에 앉아서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는가 싶어서 나는 꽤 크게 지겨움의 하품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벽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내 방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인 듯싶은데, 그곳은 진료실이니 지금은 간호사들이 있을 곳이다. 과연 자세히 들어보니 익히 들어본 여성들의 말소리다. 나는 이런 적은 처음이라 조금 흥미로웠다. 간호사들은 항상 조용했다. 그게 아니라면 떠들었는데도 내가 못 들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은 들린다. 간호사들이 수다 떠는 것은 내게는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그들도 거의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 할 일도 없어 심심할 터라 떠드는 것도 내게는 쉽게 용납되는 것이다. 다만 나는 혼자라 떠들지 않을 뿐이다. 나는 간호사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다. 그래도 나는 저들의 대화에 보이지 않는 청자로서의 역할을 한번 해보고는 싶었다. 나는 왼쪽 벽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귀를 기울여 보니 간호사들은 어제 잠시 찾아왔던 박 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박 씨가 잘생기고 키도 훤칠하다며 칭찬 일색이다. 게다가 힘도 장사라서 동네에 힘 쓸 일만 있다 하면 나서서 혼자 뚝딱 처리해버려 마을에서도 명성이 높다는 것이다. 내가 계속 들어 보니 그런 것들 말고도 그들은 박 씨에 대한 온갖 잡다한 것들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박 씨에 대하여 잘 아나? 그야 간호사들은 여기에서 내 은사님이 계시던 적부터 있었고, 그리고 또 그동안 여기 이 작은 마을에서 계속 살았으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박 씨가 이처럼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지는 몰랐다. 어제도 간호사들은 박 씨를 내게는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소개했기 때문에 내가 박 씨에 관해서 뭔가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어제 나에게 박 씨를 그저 떠넘겨 버리고는 뒤에서 소리 없는 웃음들만 짓고 있던 연유는 유명한 박 씨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소녀감성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 자체는 알 수 없다. 나는 그때 간호사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다가, 박 씨 아내는 참 복도 많이 받았지, 내가 그 자리였음 얼마나 좋을까이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그 이야기를 꺼낸 한 간호사를 다른 두 명이 짐짓 나무라는 척하며, 누군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것이다. 나는 조용해진 그들이 내 방 쪽 벽을 쏘아보는 것만 같아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조금씩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박 씨 아내 흉을 보는 것이었다. 아내 얼굴이 저렇게도 못생겼는데 박 씨 같은 사람이랑 사는 것을 보면 분명 돈으로 꾄 것이다, 얼굴이 못생기면 살림이라도 잘 해야 할 터인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집안일도 거의 박 씨가 다 한다더라, 시집살이가 몇 년인데 아직도 애를 못 난 것을 보면 가정 일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호호거리며 웃는 저 간호사들과 내 거리는 멀기만 하다. 저들은 이곳에서 나만큼 지루하지는 않은가 보다. 문득 서글퍼져서 나는 벽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귀찮아졌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해는 여전히 푸르다. 나는 좀 힘이 빠져서는 한잠 자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지겨웠다.


수요일

 조용하다. 손님 없는 병원에서의 내 삶은 참으로 무료하기 짝이 없는 지루함의 연속이다. 아니, 혹시 환자가 몇 명 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들은 모두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저 간호사들에게 간단한 치료만 받고 내게는 얼굴도 비치지 않고 떠나 버린다.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픈 사람이 와도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너무 심심하여서 오래 전부터 여기에서 할 일들을 정해 본 적이 있었다. 그중 기억나는 것들은, 독서, 음악 감상, 그림 그리기 같은 따분한 것들이었다. 소설책을 집어서 읽어 봐도 재미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또 철학책 같은 것을 보자니 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만 같아 따분하고 어려웠다. 음악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음악도 몇 번 듣다 보면 질려 버리고 귀가 아파온다. 그림 그리는 것은 내가 너무 못 그려서 도리어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연필을 집었으니 글도 좀 써 보려고 했지만 방안에만 갇혀 있다 보니 떠오르는 이야기도 없었다. 일기라도 쓸까 보니 그것은 또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오늘은 또 무엇을 하며 보내나 하고 있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날씨가 꽤 좋았던 것이다. 간호사들 몰래 나가도 그들은 여기 도통 오지를 않으니까 모를 것이 분명하다. 내가 필요할 만큼 크게 아픈 환자도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몰래 나가서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날씨가 좋으니 경치도 볼 겸 자주 가던 언덕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바람이 산뜻했지만 매일 걷는 길이라 갇혀있던 원장실 방을 빠져나왔다는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을 나는 별로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언덕에 오르니 예상대로 경치가 좋았다. 나는 그저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가 되니 그것도 이제는 지겹다. 나는 커다란 돌을 침대 삼아 누워서는 또 무었을 할까 이런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언덕 밑을 좀 바라보니 저번처럼 동네가 훤히 보인다. 사람들이 제법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온종일 방 안에만 갇혀 있는 바람에 가끔 나 혼자 이 동네에 산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지 좀 새로웠다. 나는 시력이 좀 좋다. 아래를 주의 깊게 바라보니 얼굴들도 꽤 자세히 보인다. 그러나 다 모르는 얼굴들이라 나는 좀 김이 빠진다. 그래도 나는 동네 풍경을 좀 더 관찰해 보았다. 주변을 휘 둘러보다가 어느덧 언덕 바로 아래 쪽 구석진 데까지 시선이 미치자, 나는 좀 놀라서 눈을 약간 찌푸리며 더 가까이 간다. 더 자세히 보니, 사람들 없는 외딴 곳에서 두 짐승이 옷을 걸치지 않은 채 붙어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내게는 좀 흥미로운 구경거리다. 나는 오호라 하면서 그들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 참 재밌는 것이, 더욱 고개를 기울여 똑똑히 보니 내가 아는 얼굴이다. 수컷의 얼굴은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내가 그저께 보았던 박 씨의 얼굴이 아닌가? 게다가 박 씨와 몸을 비비고 있는 암컷은 과연 내가 그래도 꽤 오랫동안 보아서 잘 아는 우리 병원에 근무하는 세 명의 간호사 중 한 명인 것이다. 나는 좀 징그러워서 금방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으나, 하루 종일 심심한 나에게 저것은 분명 재밌는 구경거리고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먹을 걸 몰래 숨긴 것 마냥 가슴이 제법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는 저 위에서 보았던 두 명을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왜 여기서 일 년씩이나 살면서 여자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가 궁금해졌다. 비록 젊은 시절은 다 지나간 뒤지만 나도 어릴 때는 여자에 울고 여자에 웃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왜 여자가 없나. 아마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오면서부터 나는 다 잊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점점 잊어 갔던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오히려 생각할 것들이 줄어드는 법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왜 여성을 원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지금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다. 나는 이미 여기서 일 년을 혼자 잘 살아왔지 않느냐. 나는 단지 이 지옥 같은 지겨움과 지루함의 연속인 이 동네에서 아내 몰래 행했던 박 씨의 정사가 이 동네를 감싸고 있는 권태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박 씨가 약간 부럽기도 했다. 밤늦게 병원에서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재밌는 꿈도 꾸며 잘 잤다.

 

목요일

 오늘은 왠지 밥이 목구멍 안으로 잘 넘어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이 조금 나 있다. 나는 병원에 출근해서 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 이유는 오늘도 과연 어제 보았던 박 씨와 간호사 둘이서 같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어오면서 진료실 안을 힐끗 들여다보니 간호사들은 세 명 전부 안에 있었다. 그것은 나는 좀 더 기다렸다가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방 안에서 옆방에 귀를 갖다 대고는 수시로 기척을 확인하며 얼른 나가지 않나 하고 마음을 졸였다.

 헌데 창밖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구름이 해를 덮어서 그리 된 것이다. 그냥 구름인가 자세히 보니 새까만 먹구름인 것이 여간 낭패가 아니다. 잠시 후부터는 빗줄기가 제법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오늘은 둘이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좀 불안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옆방에서 누군가 나가더니 둘만 남아서 수다를 떤다. 나간 한 명이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이 살짝 들렸다. 그러고는 곧 통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는지 문 밖에서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잠깐 크게 들리더니 곧 잠잠해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가만히 안절부절못하다가, 누군가 나간 것은 확실해 보이니 일단 어제 갔던 곳으로 가 보기로 하고는 우산을 펴고 밖으로 나갔다.

 빗줄기가 제법 세차게 내리치는 바람에 바지와 우산을 들고 있는 팔 부분이 금세 젖었다. 나는 불쑥 짜증이 나서 그냥 들어가 버릴까 생각했으나, 다행히도 잠시 후 세찬 소낙비는 가는 이슬비로 바뀐다. 나는 안심을 하며 어제 갔었던 언덕길을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른다. 정상에 도착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어제는 보이지 않던 안개가 산 전체에 뿌옇게 흐트러져 있어 꽤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보았던 신선이 등장하던 신비로운 산속이 바로 이런 곳이었을까, 눈 바로 앞까지 가리는 안개에 나는 잠시 눈길을 빼앗겨 휘청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고,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박 씨를 보기 위해서임을 다시금 깨달은 나는 어제 내가 올랐던 바위 위로 힘겹게 올라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바위를 단단히 지탱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고는 밑을 한번 내려다보니 실망스럽게도 밑의 경치 역시 산 주위를 둘러싼 안개 때문에 온통 하얀색뿐 다른 것은 도통 보이지를 않는다. 좀 더 자세히 보면 뭔가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더욱 뚫어지게 보아도 안개와 빗방울 말고는 보이는 것이 전혀 없다. 나는 좀 많이 실망해서 우산도 내팽개쳐버린 채로 바위 위에 에라 하고는 드러누웠다. 생각해 보니 이런 날씨에 바깥에서 정사를 벌인다는 것도 참 웃기는 일이다. 분명 그들은 다른 곳 어딘가에서 만나서 즐겁게 놀고 있을 터이다. 나는 너무 들떠서 그런 간단한 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 무지가 참 억울하고 한탄스러웠다. 허무한 마음을 좀 달래려고 안개가 껴서 신비스러운 풍경으로 시선을 돌려 보려고 했으나, 이제는 그 무엇도 재미없고 지루할 뿐이다. 나는 꽤 많이 침통해진 채로 우산도 챙기지 않은 채로 병원으로 돌아왔다. 와 보니 간호사 한 명은 아직도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와 앉아 다시금 평소처럼 지루함을 느끼며 멍한 얼굴로 천장이나 바라본다. 옆방에서 들리는 간호사들 수다 소리가 서글펐다. 나는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어 보이는 저 깔깔거리는 간호사들이 좀 부러워서 나도 의사 말고 간호사나 할 걸 하고 생각하며 그날 하루를 보내었다.


금요일

 오늘은 날씨가 맑다. 나는 그래서 또 몰래 병원을 빠져나왔다. 진료실을 흘끔 엿봐서 한 명이 없는 것을 확인했음은 물론이다. 언덕을 오르면서 그들이 또 그제와는 다른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면 어쩌나 하고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나는 날씨가 좀 갰고 병원에 남아있는 사람이 두 명뿐이라는 것은 자명하니 내가 오늘 그들을 볼 확률은 어제보다는 꽤 많이 늘었다라고 생각하며 안심하려고 애썼다.

 꼭대기에 올라 제법 아름다운 주변 경치는 볼 틈도 없이 나는 바위에 올라 마을 이곳저곳을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나는 앗 하고 소리치며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앉았다. 박 씨와 간호사는 그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오늘도 역시 몸뚱이만 내놓은 채로 서로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우 신나서는 그들이 추는 춤을 구경하는 관객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물론 그들은 내가 보는지 몰랐다. 아니, 여기서 저 곳이 이렇게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은 저들도 나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니 알아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 주위에 벗어놓은 옷가지 위에 안경 같은 것이 두 개 있는 것을 알아챈 나는 좀 안심했다. 나는 시력이 좀 좋았던 것이다.

 나는 계속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들에게서 눈을 좀처럼 때지 못한다. 선홍빛 피부 덩어리 두 개가 서로 엉켜져서는 마구 뒹굴었다. 분홍색의 색상은 참 아름답다. 그들은 아직 젊었던 것이다. 잘 익은 복숭아 두 개가 나무에서 떨어져서 구르는 것만 같이 저들은 움직이고 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나는 문득 왜 저 두 사람은 바깥에서 저런 짓들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박 씨 집에는 아내가 있으니 여자를 함부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박 씨와 함께 있는 저 여자의 집은 내가 잘 모른다. 아무튼 둘 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저기 외진 곳까지 나올 수밖에는 없었을 터이다. 나는 그저 그 사실이 고마웠고 그들에게도 고마웠다. 저들의 저 제법 당황스러운 행위는 나를 꽤나 즐겁게 해 주었고, 나는 저들이 저렇게까지 이 동네의 지루함과 지겨움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 좀 놀라웠다. 이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이렇게 매일 나와서 저 재미있는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참 소중하고 기쁨을 주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외롭고 지루했던 것이다.

 조금 더 있다가 두 사람은 옷을 입고는 거리로 나간다. 나도 그들이 사라지자 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리로 내려왔을 때 나는 우연히 박 씨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조금 당황한 듯싶다. , 안녕하십니까어색하게 서울말을 쓰는 박 씨의 모습이 조금 우스워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산에 갔다 오시는군요운동하러 갔다 오십니까네 그런 셈 이지요어색하게 이런 말이 오가고 나서 한동안 어색하자 나는 아무 말이나 하려고 산 위에서는 마을 전체가 환하게 다 보인다고 했다. 그랬더니 박 씨는 꽤 많이 놀라서는 그, 그렇습니까하고는 잠시 후 내가 그것을 이상하게 볼 것을 예상했는지 차분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또 우습다. 나는 그런 박 씨에게 왠지 정감이 가서 하마터면 같이 있던 여성분은 어디 계시냐고 물을 뻔하였다.

 박 씨는 조금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자기 이가 저번에 갖다 간 이후로도 계속 아프단다. 돈은 꽤 모았으니 치료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 내게 묻는 것이다. 나는 좀 생각하다가 내일 당장 오셔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씨는 조심스럽게 주말은 쉬는 날이 아니냐고 말했다. 역시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다니는 병원 일정은 잘도 안다 싶었다. 나는 상관없다고, 간호사들은 집에서 쉴 테지만 저 혼자 나와서 치료해드릴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박 씨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하고는 뒤돌아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왠지 신이 나서는 얼른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면서 간호사들은 모르는, 내일 있을 박 씨의 수술을 기쁜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진료실에는 간호사 세 명이 시끄럽게 조잘대고 있었다.

 

토요일

 매일 똑같이 지겹고 좀 우울도 하였던 한결 같은 출근길이 설레고 떨리기는 또 처음이다. 나는 이전에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본지라 이 분야에서는 꽤 베테랑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행해야 할 박 씨의 수술은 왜 이런 새콤달콤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 동네에 와서 처음으로 꽤 큰(사실 그렇게 크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간단한 치료였다. 이 동네에서는 그렇게까지 이가 아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수술을 행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 설레지는 않을 것 같다. 뭔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법한데, 그것은 이따가 박 씨가 오고 나면 알게 될 수도 있지나 않을까 하고 나는 진료실에 도착하여 치료 준비를 하면서 박 씨를 애타게 기다렸다.

좀 기다려도 환자는 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박 씨는 오늘 온다고만 내게 말했지 정확한 시간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깨닫고 좀 오래 기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화장실에 한 번 다녀왔다. 좀 더 기다리다 화장실에 두 번째 갔다 올 때까지도 박 씨는 오지 않는다. 나는 조금 지루하였으나 박 씨가 오늘 온다고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더 기다릴 수가 있었다. 간호사들이 없는 진료실은 조용했다.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

 박 씨는 내가 화장실을 세 번째 갖다 오니 어느새 진료실 안에 들어와 앉아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들어온 날 보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또 그 어색한 서울말로 인사를 한다. 나는 그런 박 씨의 모습이 오늘은 우습기보다는 반갑다. 치료비를 먼저 받고 나서 나는 박 씨를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밑에 달려 있는 핸들을 조종해서 머리 부분을 높였다. 진료실 안이 어두웠지만 전체 불을 키기에는 뭔가 낭비인 것 같아서 침대와 연결되어 있는 위에 달린 조명등만 하나 켰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는 이제 벌린 박 씨의 입을 들여다보았다. 치아도 얼굴만큼 가지런한 것이 참 잘도 생겼다. 그러나 썩은 이는 별로 보기 좋지가 않다. 새까만 줄이 그어진 충치 몇 개를 뺀 다음, 잇몸 치료까지 끝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끝나고 나자 박 씨는 눈치를 챘는지 볼을 문지르며 나에게 선생님 이제 다 끝났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잠깐 멈칫 하고 나서는, 아니오아직 하나 남았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깨끗해진 박 씨의 입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박 씨는 내게 참 좋은 구경거리를 주어서 내가 이 동네에서 빠져 허우적거리던 권태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게 박 씨는 은인이자 심지어는 신과도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당연히 안 될 말이다. 그러나그러나? 그러나라는 한 단어가 갑자기 내 머릿속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하루하루가 똑같고 지루한 지겨움의 연속이던 마을에서 나를 구원해준 박 씨를 건드린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꼭 박 씨가 아니더라도 내가, 나 자신이 이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지나 않을까?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박 씨는 물론 내게는 신과 같은 높은 존재인지라 언제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지만, 오늘만큼은 사정이 다른 것이 그는 내 앞에 누워서 방심한 채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만 있고, 나는 이빨 뽑는 도구를 들고 그의 앞에 서 있다. 나는 정말 내가 내 힘으로 이 마을의 권태를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걸 박 씨를 통해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박 씨는 이 뽑은 자리가 아픈지 볼을 계속 문지른다. 내가 다시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손을 내리고 얌전히 입을 벌렸다. 나는 천천히 그 입 속으로 포셉을 집어넣은 다음 새하얀 생니 하나를 단단히 집어서 세게 비틀었다. 박 씨는 조금 움찔했지만 여전히 얌전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누워 있는 박 씨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여전히 집고 있던 이빨을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비틀어서 확 뽑아 버렸다. 뽑는 동시에, 이제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내 하얀 가운을 꽉 움켜쥐며 아악, 아파요라고 말하는 박 씨의 그 가련한 얼굴을 본 나는, 박 씨의 그 쪼그라든 얼굴 위에서 꽤나 만족스러운 해방을 느끼며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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