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오늘에 내일의 희망을

by 바람바위 posted Mar 1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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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오늘에 내일의 희망을

 

 

분명 난 지쳐있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더 이상 수습할 겨를도 없이 터져버렸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지만 유달리 그날따라 참을 수 가 없었다. 제때 흘려보내지 못한 불만과 짜증이 속에서 쓴물마냥 올라와 얼굴을 찌푸리게 했고 온몸에 퍼져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가 마치 나를 내리치는 채찍소리만 같았다.

 

왈칵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된 노역을 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고 지금당장 눈앞에 누군가 있다면 멱살을 잡고 화를 내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짜증에 머리를 쥐어 잡고 웅크렸다. 한계에 이르러 미쳐버린 사람마냥 이를 악물고 덜덜 떨었다.

 

평소라면 주말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래…….내일이면 쉬잖아' 라고 되뇌며 토닥이며 몸을 일으켰겠지만, 그날은 이미 홱 돌아 가버린 정신상태에 약간 다른 행동을 시도 해봤다.

 

오늘은 못해 이대론 못살아 미쳐 버릴 거야.’

 

"……. 죄송해요……. 오늘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나가기 힘들 것 같아요. 병원요? 가야죠. 지금은 온몸에 열이 올라서 조금 누워 있다가 가려고요....... , 죄송합니다. 월요일에 뵐게요. 네네"

 

 

소심하고 치졸한 나의 성격은 사실대로 느끼는 대로 버럭 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나를 숨겼다. 최대한 불쌍한 척하며 나를 탓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긴장되어 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제법 아픈 환자처럼 골골대며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허락을 해주니 도리어 허탈했다. 언제부터 사장님이 이렇게 관대했었나 싶었다.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일탈로 삼일간의 자유가 생겼다. 분명 죄책감은 있었지만 이 아까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알차게 보내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지금 당장 뛰쳐나가야만 이 터질 듯한 마음을 진정 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짐을 쌌다. 하루 만에 돌아올지 삼일을 채우고 올지 아무 계획도 없지만 분명한건 나는 오늘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너무 오랜만의 여행이 아닌가 싶다. 뭘 먼저 싸야하는 건지 가방을 열고는 멍하니 있었다.

 

삼일... 옷부터? 수건도 필요하겠지? , 충전기! 제일 중요하지. 속옷도 넣어야겠고, 세면도구가..... 샴푸샘플을 어디 놔뒀는데, 치약, 치약 여기 있네. 또또또 삼각대가 가방에 들어가나? 아아 이거 샴푸 너무 오래된 건데. 괜찮...겠지?”

 

쫓기는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하던 마음은 점차 진정되어갔다. 이미 삼일이라는 시간은 주어졌고 이제는 그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 것 인가 만 생각하면 되는 일이였다.

 

점점 마음에 신이 차올랐다. 짐 하나에 기대가 한웅 쿰씩 담겨졌다. 종래에는 가서 돈 주고 사든가 하면 되지라는 나답지 않은 낙천적이고 충동적인 생각에 까지 이르렀다. 계획 따위야 버스타고 가는 길에 세우기로 하고 가방을 매고는 문을 나섰다.

 

, 양말!!”

 

 

주머니에 대강 쑤셔 넣은 자주색 휘황찬란한 양말처럼 불안하고 유쾌한 기분의 여행의 시작이었다.

 

여행의 목적지는 통영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어제 재방송한 예능프로에서 그곳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4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긴 여정이지만 삼일간의 계획을 짜기엔 적당한 듯한 시간 아닌가 싶었다. 돈도 뽑고 간식도 사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니 버스시간은 금방 다가왔고 떨리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처음 한 시간은 통영에 대해 알아보느라 바빴다.

 

먹을 거 위주로 가야하나 으음... 생각보다 먹을 건 그리 많진 않네. 혼자 가서 먹을 거니까 2인 이상 주문가능한건 빼고...... 꿀빵? 맛있을라나 올라올 때나 기념으로 하나 사야겠다. 으음 여기먼저 갔다가 여기로 바로가면 되겠다. 가깝네? 걸어서 다닐 수 있겠어. 오오 여기 멋지다 그래 이런 곳을 가야지.......’

 

노트에 필기까지 해가며 여기저기 찾아보는 것도 잠시 잠은 몰려왔고 손은 귀찮아졌다. 결국은 눈 뜨니 도착해있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알딸딸하게 처음일정으로 정해놓은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잠시 지났을 뿐인데 눈이 번쩍 뜨였다.

 

바다다! 이게 얼마 만에 바다야. 터미널에서 10분도 안 지나서 바다라니 멋져! 최고야! 여기에서 살고 싶다. 매일같이 보는 바다는 매일같이 보는 빌딩과는 다르겠지....... 그래도 예쁘다. 반짝거려

 

어린아이마냥 들떠서는 창밖의 바다를 핸드폰을 꺼내 초단위로 찍어댔다. 나중에 흥분이 가라앉고 사진을 확인했을 땐 정말 세 살배기 아이가 찍어낸 사진마냥 죄다 흔들려있어 몽땅 버려야했다.

 

여행 기분 좀 낼 겸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에 취해 풍경에 취해 기분 좋은 햇살을 맞으며 몸을 늘어뜨렸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는 겨울이 갔다 알리는 봄의 바람이 꽃내음을 붙잡고 코앞에서 노닐었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흔들림도 요람의 흔들림에 견줄 만 했다. 나른한 기분에 눈을 살며시 감고 창에 머리를 기대고 보일 듯 말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다-”

 

나도 모르게 소곤거리며 튀어나온 말에는 일말의 거짓이 없었다. 내 마음을 이리 오롯이 뱉어내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듯했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속절없이 분위기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건 음악사이로 꽂힌 안내음성에 의아함을 느껴서 였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노선 표를 학인해보니 이미 내릴 곳에서 5정거장은 더 와 있었다. 내 기분이 느긋해서 버스도 느긋하게 간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일단 내린 장소는 우연하게도 첫날 계획의 마지막 장소였다.

 

아아 어쩌나--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하나?”

 

 

어이없었지만 금세 이마저도 즐거워 졌다. 제대로 짜인 계획은 아니지만 짜여진 계획을 거꾸로 행해 보는 것도 특별한 여행이라 치면 되니까.

 

배는 고프지 않지만 근처의 시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람이 복작복작했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을 보지만 항상 보았거나 얼굴정도는 아는 사람들과 달리 전혀 새롭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내가 서있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오히려 미동 없이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나를 이상하단 눈으로 흘깃거리고 갔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나의 틀을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 “잠시 만요

 

, 네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한참 오가는 길에 가만히 서 있으니 방해가 됐던 모양이다. 빠르게 지나치는 사람들과 함께 시장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에 점점 힘이 실리고 리듬이 섞이고 콧노래가 어울리며 나의 행복을 표출했다. 가벼운 발걸음처럼 마음도 가벼워져 갔다.

 

밥은 맛있었다. 다만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여서 적당한 만족감만 취하고 나왔다. 시장에서 벗어나 조금 걸어가니 아까의 소란스러움과 북적거림은 거짓말 같았다. 골목을 걸어가는 사람 중 급히 뛰어가는 이가 하나 없었고, 바삐 일하는 이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한가로이 제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느긋하게 걸어갈 뿐이었다.

 

터미널에서 미처 지도를 챙기지 못해 길 따위는 몰랐다. 그저 뭐든 나오겠지 하는 긍정을 넘어 게으르기까지 하는 마음으로 그저 걸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의 행복에 신마저 동화 되었는지 마침 걸어간 그곳에 도착예정지가 떡하니 있었다. 안 그래도 좋은 기분이 배가 되어서는 입 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앙증맞은 글씨체로 요리 가이소~’하고 나비가 반겨주었다. 이제 막 떠오르는 장소라는 소개답게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혼자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내가 민망하지 않았다.

 

노란 벽을 따라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뒤를 보고 위를 보고 또 앞을 보고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고 글귀도 보고 눈에 담겨지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선물로만 느껴졌다. 꼭대기에 올라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눈에 보이는 걸 사진으로 담고자 했지만 포기를 했다. 사진만으로는 이 상쾌한 바람을, 따뜻한 햇살을, 날아 오를듯한 행복을 담기엔 내 실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저 머릿속에 마음속에 꼭꼭 간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영은 크지 않은 곳이었다. 조금 더 걸으니 계획한 장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지도도 없이 뚜벅뚜벅 걷는 나에게는 완벽하게 알맞은 여행 장소였다. 바다가 좀 더 보고 싶어 바다를 따라 겉으로 걷다보니 이번엔 어린아이들과 엄마아빠들이 손을 잡고 웃고 울고 뛰고 넘어지고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친구와 또는 연인과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는 그네들을 보니 잠시 입이 삐죽 나왔다. 괜히 서 있다가 사진 좀 대신 찍어 달라 부탁이라도 할까 얼른 다음 장소로 걸어갔다.

 

 

이쯤 걸었을 때는 적잖이 지쳐있었다. 통영은 대체적으로 구경거리들이 언덕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반년 치는 걷지 않았나 싶을 때 오는 버스에서 여기는 꼭 가서 사진을 찍어야겠어. 내 인생 샷이 나올 장소야다짐했던 조각상 앞에 섰다. 하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이럴 수가 하고 충격을 먹어야할지 눈에 보이는 조각상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못했고 아무리 사진을 찍어 봐도 기대하던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던 기대가 한 풀 꺾이고 나니 다리가 아파왔다. 근처에 앉을 곳 없나 하고 둘러보다 가까이에 정자가 눈에 띄었고, 그 곳 까지 가니 더 깊숙한 곳으로 가는 오솔길 하나가 슬금슬금 나를 불렀다. 동심에 젖어 나무토막만 콩콩 거리며 밟아 끝에 이르니 길이 막혀버린 곳에 벤치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음습해 보일 수 있는 광경이었으나 대단한 비밀장소라도 발견한 듯 가슴이 뛰었다.

 

벤치에 슬쩍 앉아 앞을 보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에 사로잡혀버렸다.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바다와 산이 살짝 지기 시작한 노을에 노랗고 주황의 색으로 물들어 바람을 따라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사람한명 지나가지 않는 이곳은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고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까부터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는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 나왔고 또 다시 겉잡을 수없이 행복해진 나는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풀처럼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며 지치고 힘들었던 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따금 소리가 들려 노래를 멈추고 눈을 뜨면 아기 고양이가 살금살금 지나가고 있었고 작은 새 한 마리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떠났다. 또 하나의 선물을 받게 된 나는 오늘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걱정하듯 쌀쌀한 기운으로 볼을 스쳐지나갈 때쯤이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으러 내려갔다.

 

혼자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이 조금 떨렸었다. 그래도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동안 혼자 이리 저리 돌아다니던 것이 익숙해 졌는지 혼자 있다는 것이 즐거워졌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내가 먹고 싶으면 먹고, 내가 가만히 있고 싶으면 그저 가만히 있고, 같이 있는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아도 존중하고 배려해야하던 사회생활에서 짐을 좀 덜어내고 어릴 적 치기대로 하고 싶은 대로 떼를 쓰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통영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벽화마을로 향했다. 여태까지 간 장소 중에서 시장보다도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시장에서는 이곳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면 여기에는 나와 같이 여행을 온 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재잘대고 방긋방긋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며 개성 넘치는 벽화 앞에 개성 넘치는 포즈를 취하고 혼자서 잘도 놀았다. 인기가 많은 곳은 다음으로 사진 찍겠다고 사람들이 줄서있었는데 혼자 포즈취하고 찍어 대는 게 살짝 민망해져왔다. 그래도 이왕 온 거 철저하게 철판 깔고 즐길 거 다 즐겼다. 아침에 전화를 한 것 이후로 생에 가장 용기가 넘치던 순간이었다.

 

 

저기요

 

?”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네, 어디서요?”

 

여기서요!”

 

하나, -” 찰칵-

 

감사합니다. 혼자 오셨어요?”

 

, 그 쪽도 혼자 오신 거예요?”

 

네 저도 삼각대하나 챙겨올걸 그랬나 봐요. 셀카봉만 들고 왔더니 전신은 못 찍겠더라고요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챙겨왔었는데 잘 챙겨 왔나 봐요

 

저도 사진 찍어드릴까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 저는 여기에서

 

찍을게요하나--” 찰칵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네 저도 감사했어요.”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있었구나.’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순간 놀랐다. 왠지 혼자여행을 자주 다녀본 듯 여유와 익숙함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과 짧은 대화가 생각보다 부끄럽고 즐거웠다. 조금만 더 길게 얘기를 붙여볼걸 그랬나. 오늘 내내 한 말이라고는 이거주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 밖에 없었는데 대화다운 대화를 처음 했다는 게 떠올랐다.

 

혼자가 쓸쓸함이 아니라 당당함이 되고 남이 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도록 열어두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어쩌면 저 사람도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고 말을 건 걸지도 모르지만 그 용기 또한도 멋졌다. 저 용기를 약간만 빌려서 다음 여행지에서는 나도 말 한번 건네 볼까.

 

여행에서 야경을 안 볼 수 가 없어서 밤바다가 훤히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부른 배가 완전히 소화 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 또 풍경을 보았다. 아까의 노을빛과 달리 어두컴컴한 바다에 많지 않은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고요했던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간질거렸다. 남의 이야기엔 관심 없는데도 흘러들어오는 이야기에 어느새 집중을 해버리고 말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남편의 욕을 큰소리로 할 땐 나도 모르게 맞장구치며 위로를 해드릴 뻔했다. 정신을 퍼뜩 차리고 여기에 말려들면 괜히 내가 화병이 생기겠다 싶어서 보고 싶던 바다나 가까이서 봐야겠다하고 밖으로 나와 부두에 엉덩이 깔고 앉아 구경을 했다.

 

물결치는 소리가 솨악-’거리며 티끌만큼 남아있던 피곤을 쓸어 데려갔다. 바닷물에 비치는 불빛들이 일렁이는 게 눈에 눈물이 고여 일그러진 풍경 같았다. 고개를 들면 뚜렷한 불빛들이 내가 울지 않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내려앉은 어둠처럼 오늘의 기뻤던 기분들이 차츰 내려앉았다. 하지만 우울 감처럼 파고들어가지 않고 고요하게 잔잔하게 마음을 다졌다. 만족스럽게 내쉬는 큰 숨에는 미처 날리지 못한 기쁨이 뿜어졌다. 하루 종일 열심히도 돌아다녀서 다리는 아프고 목은 뻐근하고 한시라도 빨리 드러눕고 싶지만 지금의 평온을 조금 더 즐기고 싶기도 했다.

 

문득 친구 생각이 나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나는 그냥 바다 보고 있지....... 청승 떠는 거 아니거든요........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청승 아니라니까? 여기? 되게 좋아 오길 잘한 거 같아....... 나도 내가 이렇게 무작정 뛰어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어. 힘들긴 했나봐. 너는 요새 어떤데?...... 그렇지... 너도 고생이 많다....... 어유, 괜찮아, 괜찮아. 처음에는 못견디겠다아아 하고 뛰쳐나왔는데 막상 나오니까 맘이 탁 풀려서 너무 좋아. 다음엔 같이 여행가자....... 응응, 밥 맛있게 먹고 다음에 봐

 

얼굴 못 본지 꽤나 됐는데 매일 같이 함께하던 학창시절 때와 다름없이 편안하게 전화를 받아주는 친구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오늘 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도 너에게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 이었겠다싶어 친구를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나의 친구는 처음 우리가 떨어졌을 때 최대한 많은걸 공유하고자 했다. 그날의 감정, 그날의 해프닝 핸드폰이 뜨거워 질 때 까지 전화하는 게 일상이었다. 학교를 다닐 때면 둘이 같이 겪는 일이 대부분이라 막상 둘이 만나도 할 말이 그리 많진 않았다.

 

그런데 서로의 환경이 바뀌니 서로에게 할 말도 많아졌다. 그 덕분에 떨어져있지만 꼭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며 위로하고 응원하고 오해도하고 싸우기도 하고 둘이 딱 붙어 있을 때보다 도리어 더욱 많은 감정들이 오갔다. 매일같이 오갔던 전화와 톡들이 줄어들었을 때도 서운하기보다는 잘 살아가고 있구나. 적응하고 있구나 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안도감을 느꼈다.

 

친구란 어떠한 단어로 정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나의 친구는 나만의 친구가 아니고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지도 않았고 항상 한결같지도 않았다. 다만 친구는 나를 가장 온전한 나로 봐 주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친구의 존재만으로 많은 위안을 느낀다.

 

친구와의 전화를 끊고 나니 최근 전화 목록 저- 아래에 엄마의 번호가 보였다. 발신도, 수신도 아닌 부재중 통화였다. 그러고 보면 엄마를 본지도 통화를 한지도 오래되었다. 이끌리는 대로 죄송한 마음과 함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엄마? 응 나야. 밥 먹었어?...... 나야 진작 챙겨먹었지. 뭐 먹었어?...... 진짜? 나도 집 가서 먹고 싶다. 나 내려가면 해주는 거지?...... 일은 무슨...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이제 씻고 자야지....... 난 괜찮아. 힘은 좀 든데, 그래도 견딜 만 해. 그래도 나는 주말 꼬박꼬박 쉬잖아 주말에도 일 나가는 사람 많아....... , 그래. 나 이제 씻어야겠다, 잘자 엄마. 다음 주 쯤에는 갈게...... . 나도 사랑해

 

엄마와의 통화에서 언제부터인가 푸념이 줄었다. 힘들어도 웃었고 지친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나의 울음이 엄마의 가슴에 독이 되어 퍼져 간다는 걸 알았다.

 

언제나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던 엄마였기에 더 이상 떠 넘겨버리면 부러져버릴까 이제는 내 몫은 들 준비를 한다. 그래야 엄마가 지칠 때 잠시라도 넘겨받아줄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서로가 동반자로서 걸어가야 하니까.

 

밉다가도 고맙고 미안하고 감사한 엄마가 항상 내게 말해온 것이 있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나를 바라봤기 때문에 내가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위태롭게만 보인다고 그러는 엄마는 막상 자신의 길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우리가 독립을 할 때가 되서야 이제야 내려 본 본인의 길이 너무나 위태롭고 좁다는 걸 알게 되고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래도 내가 걷는 길이 자신과 같음을 알고는 무섭지 않다, 위험하지 않다, 겁낼 거 하나 없다티내지 않고 멀쩡한 척 걸어가야만 했다. 아직 당신의 뒤를 바라보고 따라 걷는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에 엄마는 오히려 쓰러지지도 못한다. 그마저도 따라 할까봐. 항상 강해야하는 이유는 내가 강해지길 바라서였고, 그러함에도 엄마의 눈에 나는 여전히 어리고 연약하여 당신의 짐이라도 덜어주고자 끝까지 이를 물고 참고 견뎌낸다.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큰 위안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음을 지금 느낀다.

 

 

위대한 사랑에 크나큰 희생에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 다시 일어나 걸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것을 보낸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하러 가야했다. 내일이 되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마음에 가득 차게 담아가야 할지도 모르니 오늘을 정리하며 내일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했다.

 

오랜만의 외박장소는 약간 허름한 찜질방이었다. 어렸을 때는 사우나에 가도 온탕이나 냉탕에서나 놀았는데 뜨거운 물에 온 몸이 풀어진다. 어릴 때라면 발 한번 담가보고 놀라서 얼른 내뺐을 텐데 딱 좋게 피로가 풀려서 이대로 잠들 것만 같았다. 사람도 없어 혼자 탕에 앉아 알게 모르게 쌓인 오늘의 피로를 몽땅 풀었다. 잠을 자기 위해 올라간 찜질방에도 사람은 몇 없었다. 다만 찜질 실도 하나 밖에 없긴 했다. 찜질도 오랜만에 해볼까 싶었지만 땀을 흘리면 다시 씻고 자기가 귀찮으니 다음 주말에나 한번가야지 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완전히 깜깜해져서 추운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바다와 산 사이에서 한줄 가지런히 켜져 있는 불빛이 왠지 귀엽게 보였다. 온통 밝기만 했던 눈에 익은 야경이 아닌 어둠은 어둠대로 불빛은 불빛대로 각각의 모습을 확연히 뽐내고 있었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져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내려와 잠을 청했다. 최근 느껴보지 못한 홀가분함에 웃음을 짓다가 어느 순간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정은 해저터널을 지나는 것과 케이블카 하나를 타는 것으로 끝을 냈다. 케이블카에 탈 때는 어제의 용기가 아직 남아있었는지 같이 타게 된 노부부와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도 했다. 시답잖은 얘기들뿐이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과 같은 광경을 보고 함께 감탄하며 감상을 나누는 경험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삼일동안 여행을 지속하기에는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어느 때의 여행보다도 많은 것을 얻고 가기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사실은 충전기가 고장이나 핸드폰을 충전 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쉴 새 없이 찍어댄 사진은 배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위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는 별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틀도 안 되는 시간사이에 꽤나 친숙해진 적막함이 함께했다. 나는 원래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언제부터 생각할 겨를 도 없어져 버렸을까. 아니 생각을 잡아둘 시간이 없었다는 맞는 말인 듯하다. 의미 없이 흘려보낸 생각들이 결국에는 생각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생각이 줄어드니 감정이 줄었다. 이번 여행 동안에 어느 때보다 바빴던 내 감정들이었다. 내가 이정도로 감수성이 풍부 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억눌러져있던 감정들이 기쁘다고 날뛰었다. 어떤 내가 진짜 나인가 고민도 됐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고민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내가 느끼는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거짓될 수 없으니까. 이 또한도 나의 모습이었다.

 

시간은 점점 깊어가지만 창밖은 점점 밝아져만 갔다. 마음에 들었던 어둠과 별빛이 사그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의 여행이 끝이 났다.

 

 

거창한 마음을 품고 떠나온 여행치고는 별거 없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새로이 담겨진 희망과 환희, 행복은 별거 아닌 여행으로 난생처음 혼자의 힘으로 꽃을 피워본 소녀의 마음을 맛보게 해 주었다. 놀랍고 경이로웠다. 나를 괴롭히고 불안하게하고 무던히도 짓누르던 것들이 씻겨 지고, 기쁨과 희망으로 채워졌다.

 

여행을 떠나온 것이, 일탈을 저지른 것이 나를 일어서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도 똑같이 느낄 수 있고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순간에 내 마음 속에 어떤 것이 담겨져 있는지에 따라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환경을 다르게 느끼게 만들었다.

 

내가 나를 돌아보고 나를 위해 줄때에 나를 둘러싼 벽을 허물고 나서야 모든 것을 온전히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가만히 앉아서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도 몰랐고 내가 지쳐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모든 것을 등 뒤로하고 떠난 여행에서 나는 나만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나를 보고나니 내 주변을 볼 수 있었다. 내 주변을 보고나니 그들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나 또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힘들어지고 무거워지고 지쳐갈 테지만 이미 한번 맛본 달콤한 휴식은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 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 속을 나 몰라라 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든 들여다 봐주고 위로가 필요하다면 위로를 해주고 휴식이 필요하다면 쉬게 해주고 뜨겁게 불타오른다면 흘러 가는대로 지켜봐주기로 했다.

 

아직 나는 내 삶을 다 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원하는 모양이 아닐지라도 그 완성된 모양이 내가 원하던 이상향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더 참을 수 있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모양을 만들어가는 이 시간들이 조금 더 즐거워질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선물을 주자.

 

 

내일이 되면 떠나자. 다시 그 때의 행복을 누리자. 그러니 오늘 쓰러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