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by 붉은달 posted Mar 31,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N은 배식을 받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 명은 넘게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규모의 식당이었다. 모두들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 저녁엔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도서관으로 가면 돼요. 도서관은 왼쪽으로 두 블록 지나서 나오고요. 아니면 운동하든가, 그것도 싫으면 게임방을 가면 되구요. 체육시설이랑 게임방은 모두 중앙 A동에 있어요. 입실 순간 개인카드로 출입 체크는 꼭 해야 하구요. 아무 것도 안 하고 산책이나 하는 건 안 된다는 거에요. , 열 명 이상의 모임은 운동할 때만 가능하고요, 안전관리요원이 옆에 있어야 돼요. 그리고......

 

N은 이미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전달받은 생활규칙을,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옆에 붙어서 지껄이는 L에게 담배가 있냐고 물었다. 담뱃값은 작년부터 세대별 가격차등제가 도입된 이후, 20대는 한 갑에 2500, 30대는 3000원에 팔고 있었다. 60대 이상에겐 만 원에 팔고 있었지만 그네들의 흡연율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N은 아직 만 나이로는 20대인 자신이 굳이 500원을 더 내고 피워야 하는 것이 억울했고, 가급적 담배는 여러 사람들에게 얻어 피우자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귀찮게 구는 사람에겐 되려 민감한 질문의 세례를 퍼붓는 게 제격이다 싶었다. NL에게 신상조사를 시작했다.

 

- 어디서 오셨어요?

- , 저요, 서울에서 왔어요. 마포에서.

- 직장 다니다 오신 건가요?

- , 그게, 뭐 직장이라 말하기도 뭐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고. 보습학원에서 아이들 자기소개서 첨삭 같은 거 해주고 그랬어요. 형님은 어떤 일 하다 오셨어요?

 

하긴, 내게 질문만 할 자격은 없지. N은 자신이 진취동에 배정된 이유를 사실 의아해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 면접 과정에서 어느 동으로 배정될지를 통보받는데, ‘진취동은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에, 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으며, 직장 생활을 하다가 실직된 이들만이 입실할 수 있었기에 가장 무난한 집단이 모여 있었다. ‘정의동은 중앙 A동 바로 뒤편에 위치해있었는데 사실 N에겐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더 적절해보였다.

 

공과대학이 유명한 종합 사립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부모 모두 어쨌든 살아 계시니까 (N의 어머니는 알콜성 치매 환자이다.) 결국 직장 조건이 진취동에 안 맞는 것이었다. N청년주거해방연대라는 이름의 청년운동조직의 정책국장으로, 주로 전경련이나 맥도날드 매장 등을 돌며 최저임금 인상을 외치는 캠페인을 조직했다. 알바연대와 학자금대출피해청년모임등과 연대해 종종 대학로나 강남역에서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정치적 활동 경력자나 과다 학자금대출로 인한 금융소외자, 그 외 여러 뭔가 석연찮은 이력을 보유한 이들이 모여 있는 동이 정의동이었다. ‘진취동과 정의동 외엔 계발동도 있었는데, 그곳엔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분야를 졸업한 뒤 아무런 직장을 잡지 않고 살아온 이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세 동의 청년들에겐 각각 다른 일과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간단한 점호와 세면 후 식사가 있다. 오전 프로그램은 각각의 전공이나 직무 적합성을 고려하여 편성된 강의가 네 시간 이뤄진다. N은 이곳을 수료한 후 외국으로 나가 한국어 강사를 할 생각이었기에 영어와 국어음운론을 선택해 듣고 있었다. 점심식사 이후로는 공통 프로그램을 이수해야했는데, 입소 청년들이 가장 고충을 겪는 시간은 이 시간대였다. 2시부터 6시까지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두 시간의 교양강의와 실무능력향상 실습강의로 이뤄졌는데 교양강의는 사실상 정신무장교육에 다름 아니었다. 일과를 마치면 저녁식사를 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운동을 하거나 PC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남녀 간의 제한된 사교적 놀이 또한 허용되었지만, 여자들은 이곳 남자들을 하층 바이러스를 보듯 하며 지나갔고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음담패설을 지껄이기나 할 뿐이었다. 몇몇 청년들은 중앙 B동의 심리상담센터에서 정밀상담을 받기도 했다.

 

하루를 마치는 마지막 의식은 인원보고 후에 각 방의 스피커로 들려오는 오늘의 명언방송을 듣는 것이었다. 41실로 된 방에 NL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다른 둘은 PD였는데 그들은 모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들어온 케이스였다. 어색한 통성명을 나눈 뒤 그들 모두 맞은편에 놓인 이층 침대에 정자세로 누웠다. 10분간 들려오는 이 방송만큼은 모두 쥐죽은 듯 고요히 들어야만 했다. 각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들려주는 성공과 삶의 처세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다 그 말이 그 말이어서 듣다가 자기 일쑤였다. 10시면 복도 중앙등은 모두 소등이 되었고 일부 개인공부를 할 사람들만 스탠드불을 켜고 있을 뿐이었다. 원칙적으로 야간 수면시간엔 방 밖 외출이 통제되었다.

 

- 그러니까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감옥도 아니고, 참 요상한 곳 아니겠습니까?

 

처음 들어온 N에 대해 간략한 신상조사가 시작되었다. PD는 매점에서 사온 마른오징어에 몰래 세면대 뒤쪽에 숨겨놓은 캔맥주를 갖고 와 홀짝거리고 있었다. L은 그 틈에 이곳의 정체에 대해 어떤 동의 섞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감옥은 아니죠. 우리가 자발적으로 들어온 건데.

 

D는 짐짓 불쾌하다는 듯 입가를 찡그리며 답했다.

 

- 군대랑은 비슷한 거긴 하지. 시발, 10시에 이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맥주 한 캔도 몰래 마시는 것만 보면.

 

P가 오징어 다리를 부욱 찢으며 말했다.

 

- 그래도 여기 들어온 지 두 달 되는데, 몸은 확실히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규칙적으로 지내고, 또 공기도 맑잖아. 여자랑 단절되어 사는 건 좀 그런데, 어차피 밖에 있었어도 여자 볼 일도 거의 없었고. 자격증 따기도 쉽고. 난 목공기술 관련 실습수업 내일부터 신청해서 듣는데. 뭐든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L은 서울 소재 하위권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는데, 법무사가 되고 싶었지만 비빌 언덕이 없었다고 푸념했다. 보습학원 아르바이트로는 백만 원 정도는 벌었는데, 정작 김밥 한 줄로 저녁 끼니를 때우고 예닐곱 시간을 목 터지게 수업해대면서도 당일해고 공포에 떨고 사는 강사들을 보면서 기술 자격증을 따야겠다는 생각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밤에 핸드폰 압수하는 거랑 이 거지같은 생활복 입고 살게 하는 건 좀 참을 수가 없어요. 아직도.

 

스마트폰 중독자들에 대한 예방 조치 차원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스마트폰 어플까지 관리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다. 페이스북이나 요상한 잉여짓 놀이에 중독되어 시간을 허비하는 건 문제니까. 문제는 이곳 단체복이었는데 잠자는 시간과 수료식을 제외하곤 늘 이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을 청년잉여군대라고 바깥에서 부르는 데엔 이러한 옷차림이 가장 큰 이유였다.

 

- 그나저나, 청년주거해방? 암튼 뭐 말은 괜찮네. 조심하셔요. 까딱 규정 뭐 어기거나 하면 정의동으로 옮겨지실 거 같은데. 거긴 장난 아니래요. 해병대 분위기라던데?

 

D는 자기의 대학 후배가 정의동에 있다며 N의 안위를 염려했다. 우선 정의동은 스마트폰 보유가 일체 금지되었다. 폭력 및 음주사범들도 있다고 했다.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건 학자금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하다 개인회생이나 사채로 빠진 이들이었다. 전과범들은 이곳 과정을 제대로 수행하면 사면 혜택이 주어졌고, 빚에 시달리던 이들에겐 원금탕감과 취업알선이 이뤄졌다. 달콤한 당근이 있기에 살벌한 채찍에 대해 정의동 아이들 상당수가 순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는 남녀 몇 명이 모여 맥주를 마시려다 발각돼 아침 점호 시간에 공개적으로 엎드려뻗쳐 후 엉덩이를 교관에게 걷어채인 적도 있다고 했다.

 

문제가 되는 부류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곳 세 동에 유일하게 온전히 자의로 들어오지 않은 부류가 있었으니 바로 정의동의 세 번째 부류, 청년운동조직 간부들이었다. N은 자신의 아버지 명의의 집이 경매로 팔리고 월셋방으로 가족들이 이사갈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신청했지만, 저들은 아니었다. 정부는 거리에서 기습 시위를 벌이거나 몇몇 기업의 청년노동 착취를 고발하며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의 간부들 중,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이들을 추려 이곳에서의 과정을 거치면 해외대학 교육 과정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끝까지 비타협적 원칙을 고수하던 이들은 정작 일반 조직원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해외로 떠나거나 자취를 감췄다. 청년주거해방연대의 회장은 이미 이 과정을 마치고 지금 미국에서 정치철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조건부 제의에 응해 들어온 이들 중 일부는 여기서 몇 번의 마찰을 빚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 어떤 놈은 플랭카드를 건물에 붙이려다 실패했다던데요. 청년의 가축화를 반대한다, 라는. 그러니 저쪽 동은 방 안에도 CCTV가 돌아간다는 소문도 있고.

 

L은 수다스러운 성격에 맞게 온갖 루머와 정보들을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 형님도 그런 꽈는 아니죠? 솔직히 오바 아니에요? 무슨 일제 시대도 아니고. 근데 뭐 나는 그런 단체들이 있는지도 몰랐어. 사실. 거기서 뭐 하는 거에요? 데모하면 뭐 페이도 좀 나오고 그래요? 한달에 얼마나 벌어요?

 

P의 힐난과 의심이 섞인 잇따른 질문에 N은 침묵했다. 2000년대 들어 이어진 청년실업과 장기불황은 지난해에 이르러서 결정적 국면을 맞이하는 듯싶었다. 누군가가 sns에 청년해방 만세운동을 제안했고, 기미년 3.1운동의 코스프레 정도로 이해되는 듯한 이 제안이 갑자기 들불처럼 번졌다. 백만이 넘는 좋아요가 있었고, 청년 세대에 우호적이라는 작가나 연예인 일부도 동참 선언을 했다. 우리 조직은 이 전환의 정국에서, 구체적인 투쟁지침을 꾸렸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최소 십만이 모인다면, 만세운동에 우리 청년세대의 구체적 요구사항을 선언서 양식으로 낭독하고, 곧장 청와대로 진격투쟁을 할 것. 선도적 기습투쟁을 벌일 결사대를 꾸려 최저임금 동결을 주장하는 전경련을 점거할 것. 2008년 촛불시위의 재현을 꿈꾸며, 우리는 각자의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여서까지 인쇄물을 만들고 sns 홍보 웹포스터를 만들었다.

 

문제는 두 가지의 예상치 못한 데서 발생했다. 우선 온라인 공간에서 청년들 대다수는 우리 청년조직을 희화화했다. ‘극혐 진지충의 쌍팔년도 웹포스터란 제목으로 우리의 홍보물들이 떠돌고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과 청년주거 해방을 위한 오등은 자에~ 일어서니프로젝트], 라는 우리의 기획 제목은 애초의 생각과 달리 촌스러움의 극치로 묘사되고 있었다. 게다가 너희들이 무슨 우리의 대표 단체도 아닌데 선언서를 낭독하냐는 정체성 시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첫 집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5월의 두 번째 토요일에, 원래 예정보다 앞당겨져 국가직 공무원 시험이 조기 시행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졸속 변경이라는 성토도 잠시, 각 시험장으로 고지된 중, 고등학교들로 청년 수험생들은 몰렸다. 인터넷 상에서 이것이 청년집회를 무력화할 정부의 비열한 술수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결국 경찰 추산 1, 주최측 추산 2만 정도의 규모 시위대가 모여 왼팔을 치켜 올리며 구호 제창하고 청계천 일대를 행진하는 걸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 일로 조직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1기 회장은 이곳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직원 각자의 생계유지가 제1 과제가 되었고, N 역시 부모와 함께 살기엔 너무도 좁아진 월세 아파트를 두고 고민 끝에 이곳에 들어오기로 했다.

 

우리에게 비상한 결의가 없었던가. 그도 아니라면 더 이상 이러한 방식의 운동이 통할 수 없는 시대이기에 좌절한 건가. 울분에 찬 N에게 그러나 급한 것은 당장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최장 1년의 무료 숙식이 보장되며, 매달 30만원의 자기계발비가 지급된다. 적어도 부모에게 손은 벌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면 국가우수청년인증서와 함께 전액 장학지원으로 공부를 더 할 수 있다. 변절인가, 전략적 후퇴인가를 고민하기조차 사치스러운 상황이었다.

 

- 일찍 자놔요. 근데 내일 교양강의 때 난리 나겠네.

- 왜요? 뭔 일 있어요?

 

L의 호기심 섞인 질문에 P는 대답했다.

 

- [청춘이면 청춘답게]의 저자 박 단 교수가 나온다던데? 대선 출마한다는 말도 있고. 게다가 영화배우 이 원이랑 결혼한다고도 하고. 인기 엄청 많잖아.

 

- 그 교수 나이가 몇인데요? 이 원이 이제 서른 아닌가?

 

- 박 단이 몇 살이지? 아마 쉰은 다 되어갈걸요? 약력 보니까 서울대 87학번이던데.

 

오피니언 리더들의 강의를 듣고 매달 1회씩 강연에 대한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수료과정 평가 항목 중 배점이 큰 것이었다. 지난달에는 유명 걸그룹 출신 프랜차이즈 분식 창업 CEO가 연사로 나왔고, 하버드 출신의 내 동갑나이인 국회의원이 오기도 했다. 연예인이 아닌 연사들이 나올 경우는 대체로 반응이 미지근했는데 박 단은 예외였다. 그만큼 훤칠한 조각남이면서 따뜻한 아버지와 독기 어린 감독의 이미지를 다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무엇보다도 국민적 청순 베이글녀로 인정되는 이 원과 결혼하는 남자라는 타이틀과, 인생역정에 가까운 성공신화의 스토리들. 두 차례의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수감 생활과 대학 교수 시절의 사학재단과의 투쟁 일화 등등, 이 모든 게 어우러져 그만의 카리스마를 내뿜어내고 있었다.

 

시발, 인생 열패자, 성공신화의 주인공의 들러리가 되어야 하는 건가.

 

N은 담배를 태우고 싶었지만 실내 금연 위반 시 벌점 10, 이라고 붙어 있는 경고문이 붙은 창을 한참을 노려보다가, 잠이 들었다.

 

 

 

*

 

대학에 입학할 때만해도 서른 나이에 부모 집에 얹혀살진 몰랐다. 국문과에 들어온 녀석들의 절반은 공무원이나 감정평가사 시험에 목을 매고 있었고, N은 그들에 대한 얼마간의 경멸도 품고 있었다. 진정한 인문학도라면, 무엇을 하고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술자리에서 강변을 토해냈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것들은 십 원짜리 동전 같은 거라는 가르침을 원투 펀치로 가르쳐줄 뿐이었다. 학자금 대출 빚에 시달리던 동기 한 놈이 아나운서 시험 준비를 그만두고는 호스트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자취를 감춘 것을 본 게 청년운동의 직접적 계기만은 아니었다. N에겐 그저 모두들 닥치고 바짝 엎드려 사는 삶이 싫었다. 그게 객기일 수도, 선천적 반골 기질일 수도 있었다. 간혹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차라리 이 시대가 일제 시대거나 유신 시대였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적어도 이렇게 궁상맞은 지랄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열단원이나 반독재 지하조직 투사가 적어도 투쟁을 결의한 뒤 다음 달 대출이자 따위를 고민하는 장면이 그려질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치매에 걸리고 그의 아버지가 집을 경매로 넘기는 것을 예상하면서 청년운동을 투신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N은 과외 아르바이트를 두 탕 뛰었고 주말 저녁에는 편의점 카운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학자금 대출이자를 갚고 등록금을 일부 마련할 수 있었다. 생활과 생활의 선()들이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었고, 하루 일과를 서너 편의 다른 영화의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기분으로 보냈다. 캠퍼스 리크루팅 행사로 설치된 기업 부스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취업 상담을 하는 동기들을 피하면서 그는 삼각김밥을 지하철에서 먹었다. 졸업하면 무얼 해야 하나.

 

졸업할 시기가 되자 청년실업률은 심각한 지표를 드러냈고, 몇몇 대학들은 사라졌다. 청년세대의 분노가 기존 차원과는 다르게 드러날 것을 우려하는 것은 기성 언론이었다. 정작 생존의 링 안에 들어갈 일할도 안 되는 가능성에 여전히 청년들은 전력투구를 하고 있었다. 저들의 고요와 침묵은 태풍의 눈일지도 모른다는 낙관적 견해가 우리 조직에 퍼져 있었으나, 그 낙관은 결국 순진한 기대였음은 청년해방만세운동의 대굴욕에서 드러났다.

 

통장에 단 돈 삼 만원이 남았을 때였다. ‘청년해방만세운동을 인생 최후의 결전 정도로 임했던 N은 과외 아르바이트도 잘렸고 편의점 알바를 그만 뒀다. 최소생계비는 조직의 후원금에서 일부 받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했다. 20만원으로 교통비와 삼각김밥 구입비용과 핸드폰비를 제하면 마이너스였다. 서른이 넘은 것이다. 의열단원이었다면 깨끗이 혀를 깨물고 죽었을 것이다. 전태일이었다면 몸에 불을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그때는 그들의 이상을 존중하는 누군가는 있었을 거 아냐. 이렇게 너절하게 사는 삶, 혁명가가 정작 스스로의 인생을 자조하는 그런 시대는 아니었을 거 아냐. 할 만큼 해 봤다고 나도.

 

백기투항을 선언한 건 그때쯤이었다. 정부는 청년수당제나 취업할당제를 뛰어넘는 자칭 획기적인프로젝트를 선언했다. 가난하거나 소외된 청년, 과다한 채무에 시달리며 꿈을 잃은 청년, 올바른 나라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린 왜곡된 사상에 오염된 청년들을 모두 모아 청년이 재활할 수 있게 하는 청년자력갱생프로젝트. 선발과정의 엄격함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에서 청년들을 선발하고, 선발된 청년들은 일련의 교육과정을 원만히 이수하면 국내외 취업 및 교육을 국가가 무한히 책임진다는 선언이었다. 언론과 소위 흙수저청년들은 일제히 환영했고, 이로 인해 나머지 청년운동조직들도 급격히 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청년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통제라는 비판 섞인 목소리도 나왔지만, ‘먹고 사는 진보 꼰대들의 힐난이라는 청년 당사자들의 반비판엔 꿀 먹은 벙어리였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선 입소자들을 다시금 훑어보았다. 이곳에 들어올 때는 머리 규정이 정해져 있었는데 남자는 스포츠 머리로 앞머리 5cm, 여자는 단발 커트만이 허용되었다. 식당엔 세 동의 입소자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었지만 각 동마다 먹을 수 있는 구역이 정해져있었고, 줄을 서는 위치 또한 달랐다. 태극기의 색에 따라 파랑, 빨강, 검정색의 생활복이 지급되었고 정의동 입소자들은 검은색 옷을 입었다. 유독 정의동 애들은, 옷의 색상 때문인지, 벅벅 깎은 머리와 어울려 묘한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자들은 기본화장만이 허용되었기에 그런지 몰라도 어디선가 찍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검정은 아나키였고, 붉음은 혁명이었다. 청색은 이상(理想)의 상징이라고, N은 중얼거렸다. 고작 이틀째라 그런가, 적응을 하기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어. 졸린 눈빛으로 식판을 들고 서 있는 이들 일부는 방송으로 나오는 하루 일과를 듣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냉이된장국의 냄새, 너무도 환해서 되려 우울함을 풍기는 벽, 감각으로 전해지는 모든 것들이 N에게 그저 낯설었다.

 

오후 교양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대강당에는 입소자들 외에도 외빈들이 와 있을 거라고 했다. 대선유력주자로 언론에 조명을 받는 박 단인지라, 아침부터 언론사 취재차량도 와 있었다. 생활 감독관들은 동별 청소 상태를 파악하느라 분주했고, NL, P, D와 함께 강당 앞 벤치에서 커피를 마신다.

 

- , 애들 자기소개서 첨삭해줄 정도면 글빨 좀 있는 거 아냐, 이번 강연 감상문 쓰는 거 좀 도와 줘요. 우리가 이번에는 맥주랑 담배 두 배로 보급할게.

 

PD는 이미 몇 차례 L에게 청탁했던 듯 했다. 강연을 듣고 감상문을 쓰는 것은 모두에게 고역이었다. A4용지 세 장 정도의 분량으로 써야 하는 이 감상문은 감독위원회의 평가에 따라 배점이 부여되었고, 일부는 재작성 명령처분을 받기도 했다. 감상문이라기보다 결의문, 혹은 반성문에 가까울수록 배점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간의 흙수저 타령과 헬조선 자학 모드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쇄신. 일정한 주제에 맞게 변주된 여러 가지 수사의 문장들을, L은 능수능란하게 쓰는 듯 했다.

 

- 형님들만 부탁하는 거 아니에요. 옆방 애들도 와서 그러던데. 거기다 걸리면 어떡해. N형도 무슨 활동 같은 거 많이 했으니까 글 좀 잘 쓰실 거 같은데.

 

L은 은근 자기의 짐을 내게 떠넘기는구나, N은 웹홍보물을 만들거나 선전 문구를 만들던 기억을 떠올려봤다. 몇 가지 키워드들이 정해져있었다. 주체, 연대, 해방, 저항. 추상적인 단어들이 정형화된 수식어 앞에 위치할 뿐이었다. 너무도 빛나던 가치들이, 너무도 빛바랜 언술 속에서 희화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걸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걸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 모두 장내로 입실바랍니다. 잠시 후, 청년의 카운슬러, 박 단 교수님의 강의가 시작되겠습니다.

 

카메라와 생활복과 정장의 군중들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

 

근데 어쩌라고. 어떤 직관에 의해, 나는 이 숨막히는, 상상이 결핍된 세계를 극도로 혐오하기로 한 마당이거든. 그렇다면 행복할 수 있는 건 그 질서와 제도에 대해 딴지를 걸며 숨쉼이 가능한 세계를 꿈꾸다 삶을 마감하는 거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는 건, 분명히 해악이야. 그러나, 네가 한 번 겪어보란 말야. 단 돈 몇 만원이라도 아끼려고 몇 키로미터를 걸어다니며 생활하던 아버지와, 병든 병신으로 남아 여생을 마감해야 하는 어머니와, 월말이면 따박따박 들어오는 대출이자 납부 안내 문자 메시지와 씨름해야 하는 일상을, 겪어보란 말야.

 

너는 신화의 시대에 살았잖아. 네가 수감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보위했을 것 아니냐. 뭐라고? 당장 월 백 만원도 안 되는 인턴 급여 받더라도 지역 결석아동을 위한 복지활동에 나서는 청년의 정신을 따라가라고? 그도 아니면, 그래도 한국 사회는 가족이란 울타리가 없으면 병든 닭마냥 갤갤대다가 골로 가는 곳이니 결혼할 수 있는 힘을 키우라고? 물론, 나도 결혼하고 싶고 고소득 전문직도 되고 싶었고 주말마다 고급리조트에서 유유자적, 강호한정을 즐기는 부르주아가 되고 싶었지. 그 욕망도 허영이라고? 가진 것을 더 내려놓지 못한 자신을 직시하라고?

 

누가 그랬지. 가난은 죄가 아니라 다만 불편할 뿐이라고. 조까지 말라 그래. 가난은 죄야. 왜냐면 인간을 인간다운 고결함을 갖지 못 하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지. 분명히 말하지만, 모든 수치와 모욕에 침묵하는 건, 인간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인간이 아닌 거고. 여기 있는 모두가 인간이 아니기에, 네 말을 가만히 고개 숙이고 듣는 거지. ‘벗이여,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어라.’라고 시인이 일갈해도, 이렇게 고개 쳐 숙이고 있는 거라고.

 

박 단 교수의 연설은 하이라이트에 이르고 있었다. N은 목구멍에까지 차오르는 반항의 외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민주화 운동 세대로서의 자부심과 고통의 청춘을 먼저 에피소드로 늘어놓았다. 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억압에도 맞서던 우리들은 아무 것도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희망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곤 시대의 변화를 선지할 수 있는 능력과 혜안을 강조했다. 모두가 소비에트의 멸망 이후에도 낡은 이념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저는 세계화 시대의 우리나라의 갈 길을 고민했습니다. 그 능력과 혜안을 변절과 야합으로 비판하던 이들에 대한 항변도 이어졌다. 제가 권력과 부조리에 굽혔다고 했지만, 사학재단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청년들을 위한 자기계발 캠페인도 끊임없이 했지요. 결혼 이야기에선 수줍은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사랑은 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제 아내될 이의 영혼에서, 삶의 동반자를 찾는 깨달음을 발견했지요. 사랑을 피하는 것은, 삶을 피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여러 이유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간의 아픔과 고통들을 이루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이 나라의 기둥으로 부활하기 위한 잠깐의 둥지로 이곳이 여러분께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아픔이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되어 결국 그것을 끝장내는 것으로 치유되었다면, 여러분의 아픔은 우리가 만든 사회가 더불어 치유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늘 있는 청춘의 불면과 고통을, 여러분만의 자학으로 그치지 말기 바랍니다.

 

강연이 마지막으로 이어갈 때, 출입구 쪽에서 검은 생활복 차림의 빡빡머리 셋이 감독관과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농땡이를 치다가 걸린 듯싶었다. 몇몇 카메라가 그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박 단이 쏘는 피자와 콜라에서 환호했고, 민주화운동 시대에 겪었던 에피소드에선 무협 활극을 듣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며, 결혼 스토리에선 황홀한 상상을 하는 듯했다. L은 노트에 필사를 하듯 그이의 멘트들을 기록하고 있었고, PD는 졸린 눈을 비비며 저녁 메뉴가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N은 이제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 단의 멱살을 부여잡고 항의하는 것을 상상했다. 감독관들과 안전관리요원들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바닥에 드러눕히겠지. 카메라들이 내 얼굴을 연신 찍어댈거고. 아수라장이 된 강연장의 모습은 다음날 신문 1면에 포토뉴스로 나올 것이다. 이 시대 마지막 저항의 아이콘이 될까, 은혜를 배반한 패륜의 빡빡머리가 될까.

 

- 분명 우리 사회엔 지금도 모순이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쉽게 치유되지 못할 심각한 병폐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아까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러한 현실을 감내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여러분 본인의 몫입니다. 저는 독재 정권이 물러날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어떠한 고문과 탄압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신념이 있을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에 대한 존중과, 이 사회와 민중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믿음. 그런데 헬조선이니 흙수저이생망이니 하는 자학의 신조어를 만들며, 스스로를 인간이길 주저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아무런 변화발전의 가능성을 주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그런 마인드로 세상을 저주하는 분들이 있었다면, 우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처한 현재를 긍정하고 믿어야 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부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갱생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문제를 더 이상 여러분에게만 맡기지 않겠다는 사회적 의지의 표상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야말로 다른 청년들에게 등불이 될 것이라고, , , , , !

 

상상은 거기서 멈췄다. 아니, 멈춰야만 했다. 모두가 일어나서 환호의 박수를 칠 기세였다. 그래, 내가 과연 나를 존중했던가. 민중을 사랑했던가. 우리의 결의와 저항엔 어쩌면 중요한 핵이 결여된 거 아닐까. 정말 변화의 힘을 믿기는 했나. 우리 세대의 운동의 적은 우리라는 말을, 집회를 마친 뒤의 술자리에서 종종 내뱉었다. 모두가 서로를 믿지 않았잖아. 박 단의 저 말들을 꼰대의 궤변으로만 규정할 자격이, 과연 내게 있는가.

 

그때였다. 누군가가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검정 생활복의 빡빡머리. 누구지? 우리 조직의 정의동 조직원인가. 준비했다는 플랭카드를 들고 기습시위라도 벌이는 건가.

 

박 단이 뭐라고 하는 건가요, 라고 물었고, 안전관리요원들이 소리를 지른 이 앞으로 뛰어간다. 끌려왔다고요!

 

카메라들이 앵글 각도를 모두 그에게 돌렸다. 몇몇은 우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다른 몇몇은 겁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여자 입소자들은 경멸 섞인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안전관리요원에 의해 끌려가는 그는 끝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까 늦게 들어온 정의동 사람인데요? L은 이 광경마저도 노트에 기록하며 말하고 있었다.

 

내가 뭘 갱생하냐고. 피자랑 콜라랑 점수 때문에 여기 당신 얘기 듣는 거야. 여기 애들도. 이런 썅.

 

그는 끌려가면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 . . . . !

 

*

 

3기 수료식이 무사히 끝났다. 2년간의 국비 유학 과정을 마치면 곧바로 중국 내 한국어 강사로 취업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고, 대통령은 그곳을 지역 거점별로 추가 설립하고 예산 지원을 확충했다.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다녀오게 되었다. 그분은 여전히 빛나는 카리스마였지만 졸지에 영화배우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에게 시선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찬은 청와대 앞 야외 만찬으로 진행되었다.

 

만찬 도중, 대통령은 수료 청년들에게 자신이 아끼는 충견을 보여줬다. 검은 털에 꼿꼿한 귀를 가진, 우람한 체격의 개였다. 더운 날씨에도 혀를 내밀지 않은 채, 침묵의 표정을 짓는 듯 보였다.

 

N은 그 개가 왠지 낯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