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移徙)
잠시, 잠시만 기다려요. 문 좀 닫고 올게요. 잘 안 들려서. …됐어요. 거기선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살았어요. 엄마랑 아빠랑 셋이 들어간 건 아니고 엄마랑 단 둘이만 들어갔죠. 나한테 아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내가 다섯 살 때까지는 분명 있었는데 그게 여섯 살이 될 때쯤 아빠랑 같이 사라졌어요. 두 분이 헤어지셨거든요. 정확히는 별거였지만.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외갓집은 마당이 있는 단층 주택이었고 방은 두 개였는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 그리고 당시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모가 함께 살았던 데다가 엄마와 나까지 여섯 식구가 잠은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어요. 거실은 커다랬으니 거실에서 잤던가? 기억도 안 나요. 기억하기 싫어서 그런 걸까요?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런 외가댁이 이사를 온대요. 바로 요 앞 동으로요. 그래서 괜히 기분이 울적해요.
가족들이요? 엄마 말로는 저를 엄청 예뻐했대요. 그 집에선 처음으로 생긴 손주였고 조카였으니까. 그중에도 할아버지가 제일 절 아끼셨죠. 그렇다고 마냥 상냥하고 부드러웠던 건 아니에요. 오히려 엄하셨던 기억이 더 많았으니까요. 엄마한테는 더 그랬죠. 아무 것도 모르던 그 나이에도 엄마를 향한 할아버지의 한탄을 보는 게 힘들었어요. 심지어는 가끔씩 동네에서 엄마랑 마주치면 시선을 피하셨대요. 엄만 집에 붙어있을 생각을 못할 정도로 바빴어요. 집밖에서는 만날 야근이며 회식이며 치여 살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아요. 엄마가 할아버지를 피해 늦게 들어오고 했다는 걸. 엄마가 술 마시고 나한테 털어놓았거든요. 할아버지 눈치가 보여서 바쁘다는 핑계로 일부러 늦게 들어온 거라고요. 나는 엄마가 늦게 오는 게 참 싫었어요. 엄마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애를 낳고, 또 팔자에 없는 눈치를 보며 살아야만 했고, 항상 피곤에 절어 살았던 게 남자 하나 잘못 만났기 때문인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 엄마를 몰아낸 건 할아버지였어요. 엄마야 그렇게 생각을 했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부녀 사이가 점점 멀어졌던 까닭에, 엄마 밖에 모르는 코흘리개였던 나도 할아버지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거예요.
엄마가 그렇게 바삐 살아가는 사이, 마당이 있던 그 집을 떠나 지금 할머니가 계신 빌라로 집을 옮기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할아버지는 아빠 없는 빈자리를 가정교육으로, 당신 손으로 직접 채워주려 하셨나 봐요. 그때부터 엄해지셨던 것 같아요. 더러는 손찌검도 하셨죠. 그래도 내가 잘못했을 때만 혼낸 거고 그게 사랑의 매라고 생각을 하니 맞은 건 괜찮다 싶었어요. 언제였더라? 아무튼 어렸을 때였는데, 나는 학원에 가야했고 그보다 조금 일찍 외출을 해야 했던 할아버지는 나한테 열쇠를 주면서 문 앞 화분 밑에 열쇠를 넣어놓으라고 하셨어요. 저보다는 할아버지가 더 먼저 들어올 예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만 까맣게 잊은 거예요. 더 큰 문제는 그날 비가 몹시 많이 온 날인데다가 나는 학원에 안 갔다는 사실이었어요. 친구랑 놀고 싶어서요. 할아버지는 내가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면서 추적추적 집 앞을 서성이고 계셨고, 학원이 끝날 시간에 맞춰 집에 온 나는 할아버지를 마주하자마자 열쇠가 나한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죠. 이미 늦었지만.
그날 얼얼하게 머리를 한 대 맞은 이후부터 내가 열쇠에 대해 강박관념 같은 걸 가지게 된 거 알아요? 그게 아직도 내가 번호 키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열쇠로 문을 잠가야만 안심이 되고, 열쇠가 없으면 집에 영영 못 들어갈 것만 같아요. 얘기 안 했어요? 친구 작은아버님이 잠금장치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시는데 선물로 번호 잠금장치랑 지문인식 되는 잠금장치를 줬다는 거? 그거 아직도 집에 있어요. 저번에 보지 않았어요? 그래요? 하나 가져가요. 난 안 쓰니까. 어디까지 얘기했죠? 그래, 열쇠! 아무튼 그게 내 기억에 가장 크게 혼났던 날이에요. 또 있어요. 이건 맞은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마 열쇠 사건과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아요. 어렸을 적에는 지금하고 달리 순하고 인사성도 바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게 다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 같아요. 엄하다면 엄하게 훈육하셨지만 나 어릴 적에는 그런 예절이야 보기에 좋은 거고 공부보다도 우선되는 그런 때여서 아무 부담 없이 받아들였는데, 그날은 조금 머리가 커서 그게 답답했던 건지, 유독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었는지 몰라도, 학교를 마치고 ‘다녀왔습니다.’ 하는 인사를 안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 자리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죠. 할아버지가 내린 벌은 일주일간의 외출금지와 친구방문금지였어요. 그걸 그냥 헤헤거리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억울해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서운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긴 했지만 내가 잘못한 거였으니까요. 일주일이 지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며 친구들이랑 놀러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친구방문금지는 끝내 풀어내지 못했어요. 다시 허락 맡을 생각 같은 것도 없이 말을 꺼내기도 무섭고 그냥 할아버지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서 친구들을 아예 안 데리고 왔으니까요. 그 후로도 친구들하고 집에서 노는 건 꿈도 못 꿨어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가 다되어 엄마랑 독립을 하면서 유년기의 답답함이 끝났죠. 독립 후 처음 맞이하는 생일에 엄마가 해준 게 뭔지 알아요? 엄마가 직접 만든 생일상 차려서 잔치 벌여준 거였어요. 엄마도 친구들 못 데려오는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에요. 딱 한 번 그렇게 하고나니까 엄마도 지치고 나도 정신없고 해서 1회성으로 끝이 났지만.
왜 그렇게 기침을 해요? 감기에요? 아니면 다행이고요. 졸리면 말해요. 내 얘기야 뭐 끝난 거 같으니. 할머니요? 오늘따라 궁금한 것도 많은가보네. 할머니야 뭐, 아뇨. 할머니는 예절 같은 건 그리 강요하지 않았어요. 엄하지도 않으셨고. 대신 음식으로 나를 괴롭히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한테는 죄송한 말이지만 음식을 참 못하세요. 전라도 출신이신데도 말이에요. 내가 워낙 인간관계도 좁고 여기저기 다녀보질 않아서 전라도 근처에도 못 가보고 전라도 사람 손으로 만든 음식 한번 먹어본 적도 없지만…, 물론 음식점에서야 먹어봤을 수도 있죠. 전라도 사람이 맡고 있는 주방이야 서울에도 있을 테니까. 할머니요? 합덕이에요. 예? 합덕이 충청도에 있어요? 당진? 세상에. 몰랐어요. 난 그저 막연히 할머니가 전라도 출신인줄로만 알았는데…. 참 손주 자격 없네. 죄송스럽네요. 네, 그래야겠어요. 얘기 계속해도 되죠?
할머니 음식은 죄다 자극적이었어요. 간이 셌죠. 고추장은 맵고 쓰기 그지없는데다가 된장도 쌈장도 전부 입에 안 맞았어요. 다른 식구들한테는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학교 급식보다도 맛없었어요. 지금도 외가에서 밥 먹는 일은 정말 드물어요. 명절이나 생신 같은 큰 일이 있을 때면 모를까, 그럴 때는 아예 소화제를 먹고 간다니까요. 얹힐까봐서. 웃겨요? 나한테는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었는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대신 예전 일은 없던 걸로 해요. 왜 있잖아요. 조카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얘기 듣고 웃었던 거. 약속하는 거죠? 좋아요.
할머니가 나를 괴롭히던 수단은 음식 말고도 또 있어요. 중고품이죠. 한 20년 넘게 일하셨던 걸로 아는데, 할아버지의 벌이가 수월찮았던 탓에 회갑이 넘어서도 일하셨어요. 청소부로 일하시던 학교에 학생들이 쓰다가 버리거나 잃어버린 가방, 학용품 같은 게 많았나 봐요. 가끔 그걸 가져다가 나더러 쓰지 않겠냐고 할 때에는 됐으니까 갖다 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는데, 더 짜증이 나는 건 쓰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쌓아놓으신다는 거예요. 엄마 말로는 이번에 이사 갈 때 버리고 갈 물건이 산더미 같다고 했는데 산더미에는 예전의 그 중고품들도 상당할 거예요. 처음에는 할머니가 주는 걸 거절 못 해서 내놓으시는 것들 중에 상태 좋은 물건 들 하나 둘 가져오긴 했어요. 물론 안 썼죠. 그게 화근이었어요. 가져오시는 물건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요즘엔 무조건 됐다고 해요. 할머니한테 중고품이면 나한테는 아예 버리는 것들이니…. 만에 하나 정말 새 물건인데다가 내가 마음에 드는 게 보이면 눈앞에 보이는 것들 전부 못 쓰는 것들이라 버려야한다고 가져와서는 그 물건만 쓰죠. 그런 일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할머니가 챙겨주는 거 하면 먹을 걸 또 빼놓을 수 없죠. 예전엔 거절을 못 해서 받아와놓고 썩히는 음식도 많았는데, 요즘은 아예 안 받아와요. 중고품이야 버리면 그만이지만 음식은 못 그러잖아요. 그래도 정성인데…. 할머니가 가장 안쓰러워 보일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내가 할머니네 가서 빈손으로 돌아갈 때에요. 할머니가 주는 건 뭐라도 쥐어들고 와야 할머니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잘 안 돼요. 할아버지 말마따나 예의를 차리는 게 그만큼 힘든 건가 봐요.
할머니는 웬만하면 달라는 건 다 주셨어요. 하긴, 안 그러셨던 적이 한 번 있긴 했네요. 한번은, 왜 있잖아요. 그 포도 알갱이 들어간 음료수. 그걸 냉장고에 한 캔만 넣어놓고 삼촌 마실 거라고 손대지 말라고 하셨던 적이 있어요. 예전에 할아버지랑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남대문시장인지 어디인지를 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군소리 없이 잘 따라다니니까 마실 걸 사주셨어요.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마셨으니 얼마나 맛있었겠어요. 안 그래요? 그게 바로 그 음료였어요. 나한테는 딱 한 번 맛본 음료수였는데, 딴에는 냉장고에 그 음료수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쳐다만 봤어요. 그걸 유독 마시고 싶었던 건 근처에서는 팔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죠. 그 흔한 음료수 하나를 왜 동네에서 안 팔까 미련하게 원망하면서도 탄산 아니면 입도 안 대던 어린애가 눈앞에 있는 음료수 하나 못 먹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걸 돌이켜보면 우스꽝스러워요. 할머니는 자꾸 그러면 냉장고 전기세 많이 나간다면서 질겁하셨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음료수를 마셔도 되겠냐고 여쭤봤어요. 삼촌이 마실 거라고 또 한 번 못을 박으시더라고요. 나는 냉장고 문을 꽝 소리가 나게 닫고, 방문도 매몰차게 닫아버리고 그대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렇잖아요. 음료수 하나 나 같으면 손주한테 주고 말겠어요. 나만 그런가? 여하튼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할아버지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게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가슴은 쿵쾅거렸어요. 할아버지 아니더라도 누구한테든 혼이 나고도 남을 잘못이었으니까요. 내가 생각해도 아홉 살짜리 꼬마가 한 짓 치고는 좀 커다란 반항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한테 그렇게 반항해본 적이 없어서 할머니도 많이 당황하셨을 것 같아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크게 혼날 게 빤하니 말씀을 안 하셨겠죠. 대신 할머니는 엄마한테 전화를 했던 걸로 아는데 엄마도 나처럼 그거 하나 그냥 애한테 주고 말지 하는 생각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나를 혼내지는 않았어요. 다만 그게 청소부들 마시라고 나누어준 음료수였고, 그걸 삼촌한테 준다고 고이고이 싸가지고 오신 거라는 걸 알았을 때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어요. 며칠 안 있어 할머니한테 사과를 한 것 같기는 한데 그게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마 그때 내가 화를 냈던 건 할머니가 나부터 챙기지 않는다는 그런 어색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까부터 뭘 그렇게 마셔요? 식혜요? 식혜라…. 우리 할머니가 가장 잘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요? 그럼요. 너무하네. 할머니도 잘하는 음식이 몇 개는 있는 걸요. 그 중 제일이 식혜인데 다음에 한번 대접할게요. 엄청 달아요. 어렸을 적에도 항상 냉장고에 가득 차있는 식혜를 밤낮없이 홀짝홀짝 마셔댔는데, 너무 맛있어서 그 좋아하는 청량음료도 뒤로 했을 정도였다니까요.
잠깐만요. 엄마한테 문자가 왔네요. 이삿짐센터 좀 알아보래요. 하… 이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나 싶네. 아뇨. 가까워요. 걸어가면 한 20분 정도 걸리니까. 앞으로는 5분이 되겠지만. 지금은 삼촌하고 이모하고 이렇게 셋이서 살죠. 아뇨. 삼촌은 아이는커녕 결혼도 안 했어요. 사실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삼촌은 집밖을 거의 나가지 못해요. 바깥 생활은 한 지가 오래 되어서 친구들도 연락이 다 끊긴 모양이에요. 종종 집에 찾아오던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있긴 했는데 지금은 왕래를 안 해요. 예전에 신용카드로 사고 친 뒤에는 별 연락이 없나 봐요. 술 마시자고 불러 놓고는 돈이 없다고 일단 카드로 결제하면 자기가 나중에 돈을 준다고 했던 모양인데 당연히….
뭐, 그렇게 두어 번 뜯기고 나서 연락을 안 한 대요. 그래도 삼촌 휴대전화에는 아직도 그 아저씨 연락처가 저장돼있어요. 그게 짠하고 안쓰러우면서도 미련하고 아둔해보여서 답답해요. 삼촌이 집에 눌러 앉은 건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까, 이제 20년 되어갈 거예요. 어쩌다가 갑자기 그렇게 틀어박혀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몰라요. 분명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삼촌은 전기기사 자격증도 따서 회사도 잘 나가고 그랬거든요. 회사가 멀어서 할머니가 출근하라고 차도 사주고 새벽마다 못 일어나는 삼촌한테 매일같이 마를 갈아다가 꿀을 타서 줬어요. 한번은 삼촌이 새벽에 하도 일어나지를 않아서 할머니도 두 손 다 들고 방을 나오신 적이 있는데, 그때 슬쩍 삼촌 방으로 기어들어가 머리맡에 있던 마즙을 들이키니까 엄청 맛있는 거예요. 네, 맞아요. 그래서 아침마다 마시잖아요. 웃겨요? 어쩜 좋아. 상윤씨 오늘따라 별 게 다 웃기나봐.
그러고 보니 저번 달까지만 해도 일자리 알아본다더니 아무 말 없는 걸 보니까 또 흐지부지 되었나 봐요. 삼촌 말하길 길에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고 침을 뱉는대요. 자기한테 직접 뱉는 건 아니고 땅바닥 같은 곳에 뱉는 거죠. 가족 아닌 사람한테는 말도 제대로 못 걸어요. 심지어 은행업무도 볼 줄 몰라서 다짜고짜 저를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니까요. 정신과 치료를 주기적으로 받긴 하는데 낫지는 않는가 봐요. 엄마 말로는 삼촌이 군대에 다녀오면서부터 우울한 모습을 보였대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엄마가 아빠랑 별거중일 때 만나던 남자가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면서 집에 찾아오고 그랬을 때부터였던 것 같거든요. 삼촌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보았던 게 그때부터였으니까요. 종종 나한테 와서는 손을 잡고 수야, 수야 삼촌 만나는 사람도 있고 같이 저 멀리 가기로 했어 하면서 멍하니 중얼거렸는데….
삼촌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어요. 엄마 애인이 집으로 찾아와서 엄마 어디 있냐고 삼촌을 들들 볶아대니까 막 물건을 다 때려 부술 것처럼 집안을 서성였거든요. 당시 집에서 그걸 지켜보던 건 나 혼자 뿐이어서 무서울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러지 않았어요. 난 삼촌을 무서워했던 적이 없어요. 삼촌은 언제나 나한테 잘해줬거든요. 이모는 무서워도 삼촌은 안 무서웠단 말이죠. 항상 나한테 상냥했으니까. 심심할 때 방에 들어가면 내가 좋아하는 채널 틀어주고 이 책, 저 책 재미있는 거 골라서 보여주고 그랬어요. 기타 연주도 해주곤 했는데 실력은 별로였어요. 딱 한 곡만 연주하는 게 목표라고 했어요. 무슨 성인가 궁전인가 하는 곡이었어요. 만나는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연주한다는 이야기까지 해줄 정도였죠. 그런 얘기 삼촌은 다른 사람한테는 안 했거든요. 정말 나한테만 이야기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의 비밀이라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던 걸 보면 성격 좋은 거 하나는 인정해요. 우리 사이 꽤 좋았죠? 그래도 그건 삼촌이 네모난 세상에 갇혔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였지, 엄마랑 단둘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이도 멀어진 것 같아요. 하필 내 사춘기랑 맞물려서 뭐든 다 싫었을 시기였으니까. 여자저차해서 내가 직장에 다니고 돈을 벌어 자립이라는 게 되고 나서 제일 미워한 사람이 삼촌이었어요. 아무리 사람이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칠십 다 된 노모가 아들 대신 일을 한다는 게 말이 돼요?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삼촌을 타박했어요. 그렇다고 면전에서 타박을 준 게 아니라 아들이 듣지 못하면서도 다른 가족들은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했죠. 그러다가 속이 안 풀리시면 새벽 같이 나가서 해가 질 적에야 들어오시곤 했는데 뭘 하셨냐고 물으면 항상 등산 다녀왔다고 그러셨어요.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오셨는지.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까지 목소리도 쩌렁쩌렁하니 기운이 넘치셔서 항상 가족들이 무서워했어요. 생활비 꼬박꼬박 넣어준 우리 엄마만 빼고요. 엄마는 아직도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불쌍하다며 하며 눈물을 글썽거려요. 그때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안 하긴 하지만 삼촌이 가족의 불행을 키우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도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랑 이모랑 불편한 몸 이끌어가며 살 수 있는 것도 삼촌 덕이긴 해요. 간병인도 있긴 하지만 삼촌이 둘 뒤치다꺼리 다 해주니까요. 요즘 들어 거동이 힘든 할머니한테는 효자고, 집안의 효자 덕에 엄마의 할 일은 점점 줄어들었어요. 할아버지 계실 때나 할머니 일하러 다니실 때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던 삼촌이 돌아가신 할아버지 연금하고 할머니 앞으로 나오는 보조금으로 그럭저럭 굶어죽지 않을 정도가 되니까 조금, 뭐랄까… 예! 맞아요. 불쌍해요. 안쓰럽기도 하고….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가보면 할머니는 무릎 부여잡고 앉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진두지휘를 하세요. 삼촌이 여기저기 집안에서 움직이는 걸 보면 집밖에서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답답하기도 한데 또 그 답답함이 본인이 느끼는 거만 할까 싶을 때는 괜히 짠한 거 있죠? 눈이 촉촉하니 지쳐 보이는 모습도 내 눈에는 불쌍해요. 눈이 촉촉해서 불쌍하다는 건 아니에요. 이모는 항상 눈이 초롱초롱하고 촉촉해서 사람 마음 누그러뜨리는 데 그거만한 게 없다 싶을 정도여도 불쌍하다는 생각 한번 안 해봤으니까. 이모부도 이모의 눈에 반해서 결혼했다고 했어요. 이모가 결혼을 했던 게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을 거예요. 신혼집이 강북구인가 성북구인가 어디였는데 집이 잘 살았던 건 아니지만 이모부가 뭘 고치고 돈을 벌고 하는 데는 미립이 튼 사람이라 조그마한 철물점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보일러도 고쳐주고 그 뭐야, 녹물 안 나오게 수도관 공사도 해주는 업체를 차려서 처음 살던 반지하방에서 한 층씩 올라가더니 결국엔 그 건물을 사버렸어요. 진짜 이모부 돈 참 많이 벌었어요. 내가 알기로도 그렇고 할머니나 엄마가 말하기로도 그래요. 그래서 참 이해가 안 가요. 내가 엿들은 건지 아니면 누가 얘기해준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모가 이혼한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이유였거든요. 당시에 이모네는 빚 하나 없이 방 4개짜리 빌라 살면서 벌이가 넉넉했는데도 이모부가 이모한테 준 돈이 기대에 못 미쳤나 봐요. 내가 알기로 그 돈이면 지금의 2인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었고, 심지어 15년 전 이야기니까 적은 돈은 아니었죠. 외가댁 사람들 생각에 돈은 여자들이 쥐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모는 그게 안 되니까 이모부랑 계속 마찰을 일으킨 거 같아요. 아무튼, 돈의 흐름에 불만을 가졌던 건 이모만이 아니었어요. 바로 준이랑 환이었죠.
이모는 아이들한테 항상 용돈을 박하게 줬어요. 용돈이야 돈 아끼느라 적게 줄 수도 있죠. 지금이야 애들 주머니 비어있으면 못 놀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그런데 지나치게 박했어요. 심지어 어디 놀러간다고 애들이 용돈이라도 받아오면 그걸 고스란히 가져갔어요. 한번은 준이랑 같이 여름 맞이 어린이 캠프라는 데를 갔어요. 우리 둘 다 초등학생이었을 때인데, 나는 3만원을 용돈으로 받았고 준이는 2천원을 용돈으로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걸 본 우리 엄마가 2만원을 더 꺼내서 준이한테 줬지만 캠프에 도착한 준이의 손에는 여전히 2천원뿐이었어요. 애는 울상이 됐지만 뭐 어쩌겠어요. 그래도 제 돈이랑 합쳐서 반을 갈라 남김없이 다 쓰고 나니 기분 좋다 싶기도 하고 좀 흥청망청 썼다 싶을 만큼 썼어요. 고작 1박 2일 다녀온 거니까요. 용돈을 잘 주는 엄마를 둔 게 뿌듯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웬걸, 집에 가기 전에 잠깐 이모네 집에 들렀는데 준이 방에 새하얗고 기다란 망원경이 있는 거예요. 별 볼 때 쓰는 거요. 한눈에 봐도 엄청 좋아보였는데도, 그게 하나도 부럽지 않고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어요. 준이가 나를 보며 결핍 같은 걸 느끼지 않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준이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또 별로에요. 성격이 워낙 모나거든요. 자기 가진 걸 누구랑 나누는 법도 모르고요. 나쁜 애는 아닌데 그렇다고 착하지도 바르지도 않은 거 같아요. 못됐다고 해야 하나. 그게 나쁜 거구나. 아무튼, 저번에 지가 필요하다고 환이가 성년의 날에 받은 돈을 홀랑 가져가버린 것만 생각하면 예전처럼 쥐어박아주고 싶어요. 환이는 또 그걸 넙죽 내줬어요, 걔는 자기 엄마처럼 예민하고 쉽게 상처를 받는데도 그걸 드러내는 법이 없어요. 예전인데… 애가 학교도 잘 안 나가고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해서 병원에 한번 데려간 적이 있어요. 그때 우울증하고 스트레스 과다 진단을 받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죠.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아요. 환이가 삼촌처럼 될까봐 걱정했으니까. 이모 내외의 잦은 다툼도 환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형이었던 준이는 말썽이 생길라 치면 자리를 피하는 데 도가 텄으면서도 동생 하나 챙기지를 못했고, 환이는 부부싸움 후에 채 식지 못한 부부의 짜증과 그 짜증이 생겨난 과정까지 전부 마주해야만 했으니 나 같아도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가끔 이모가 시퍼런 멍이 든 채로 애들 데리고 외갓집으로 피난 왔던 게 기억이 나요. 환이 성격에 그걸 막지 못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해보였을지 생각을 하면 슬퍼요.
모두가 걱정했던 거와는 달리 일은 이모한테 먼저 일어났어요. 이모가 이혼을 하고 정확히 3년 후에 첫 자살기도를 했거든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랬던 까닭에 이모의 탈출기가 감행되었죠. 처음 그 일이 있고 나서 가족들은 이모를 서둘러 외가로 데리고 와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렇게 셋이 돌아가며 이모의 요양을 도왔어요. 말이 요양이었지 집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잘못이었으리라 생각을 하는 건 이모가 그 네모난 세상 안에서 네모난 모니터를 통해 세상과 소통을 하기 시작한 이유가 감금 아닌 감금에서 비롯되었고, 악플과 욕설이 넘쳐흐르던 초기 인터넷 세상의 이모는 왜 그런 언어적 폭력이 악의적이든 아니든 습관적으로 일어나는지 이해하지도 그러려니 하며 넘기지도 못했어요. 이모가 접했던 그 세상은 이모가 숨 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 역시 인식할 수 없었던 게 안타까울 따름이죠. 그래서….
……
이모가 단애에 섰던 날은 참 우중충했어요.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내렸을 거예요.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신고를 해서 이모가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어차피 지금처럼 그저 네모난 침대에 갇힐 거였으면 그냥 네모난 사진으로 돌아오는 게 사람들을 더 위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이모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래요. 이모가 깨어나서 했던 처음 입 밖으로 꺼낸 게 사람들이 자기한테 욕을 하고 침을 뱉어서 버틸 수가 없었다는 항변이었어요. 음식을 씹어 삼킬 수가 없어서 목에 구멍을 뚫어놓는 바람에 발음도 새고 하니까 그 말을 내뱉고 또 알아듣는 데만 몇 분이 걸렸는지 몰라요. 깨어나자마자 뻐끔뻐끔 힘겹게 뱉은 말이 고작 그런 말이었다는 사실은 이모의 화장대 서랍 깊숙이 숨겨진 우울증 치료약 보름치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어요. 이모가 복용해야할 약이 뱃속에 있지 않다는 걸 안 엄마는 화가 치밀어서 다시는 이모를 안 보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모가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외갓집에 들어오게 되어버리니까 자연스레 다시 가족이 되었어요.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모는 간병인이 있어야만 생활이 가능했어요. 문제는 간병인이 오후 5시가 되면 퇴근을 한다는 사실이었죠.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막막했는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인지 아니면 적응을 잘 하는 존재여서인지는 몰라도 삼촌이 있으니까 그럭저럭 살게 되더라고요. 아까 말했죠? 요즘 우리 삼촌 효자라고. 애초에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아예 이런 고생도 안 했을 텐데 하는 원망이 끝이 나니까 내 눈에도 우리 삼촌이 효자로 보이는 거 있죠? 삼촌이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만큼 이모는 나한테 더없이 나쁜 사람이 되어갔어요. 이모는 참 말이 많아서 할머니가 삼촌한테 뭘 시킬라치면 휠체어에 앉아 이거는 저렇고 저거는 그렇고 훈수를 둬요. 그러면 삼촌은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모르고 할머니는 이모를 방구석으로 보내버리는데 어느새 또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다시 입을 열고 구시렁거리면 나는 속이 터질 것만 같은데도, 그런 이모를 보며 할머니하고 삼촌은 뭐가 좋은지 배꼽을 잡고 웃어요. 그러면 이모도 웃고, 엄마가 있을 때면 엄마한테도 웃음이 옮겨가요.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피식 하고 웃기는 하지만 돌아서면 화를 내죠. 그리고는 준이를 원망해요. 준이는 대체 뭘 하기에 만날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나만 여기서 이러고 있나 욕지기도 하고 한탄을 하기도 해요.
이모는 아직 환이가 그렇게 된 거 몰라요. 다들 이모가 충격을 받을까봐 말을 못하고 있죠. 이럴 땐 준이가 제 엄마랑 연락을 끊고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환이는 연락을 안 하는데 준이만 주구장창 연락을 하면 이상하잖아요. 이모는 정말 가끔씩, 준이가 외가에 연락을 하는 것만큼이나 가끔 환이는 뭘 하고 지내냐고 물어보는데 그럴 때면 다른 가족들은 다들 벙어리가 돼요. 시선을 피하거나 딴청들을 부리면서 네가 대답해야지 하는 무언의 표시를 나한테 주는 바람에 연락을 안 해봐서 모르겠다고 하고 말아요. 사실 학교에 다닌다거나 뭐 취업을 했다거나 아니면 저 멀리 여행을 갔다던가 하고 둘러댈 수는 있어요. 알잖아요. 나 거짓말 잘하는 거. 그런데도 그럴싸하게 둘러대지 않는 건 이모가 강물에 뛰어든 바로 다음날 환이도 곧장 할아버지 품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기도 하고 이제 환이에 대한 질문을 받고 싶지 않다는 내색이기도, 더 이상은 나에게 대답을 떠넘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불성실함이기도 해요. 어쩌면 말이에요, 어쩌면 이모가 환이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늘 앉아있어야 하는 이모는 재활치료 때를 빼고는 항상 뜨개질을 하거든요. 날이 쌀쌀해질 때면 준이랑 환이 준다고 겨울용품을 항상 쌍으로 짜곤 했는데 작년부터 하나만 짜는 걸 보면 혹시나 싶어요. 그 하나가 누구한테 줄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모는 어찌나 뜨개질을 잘하는지, 오죽하면 이모 이혼하고 나서 그거 만들어다가 팔 생각을 했다니까요. 지금은 손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서 예전만 못하지만, 만들어놓은 걸 보면 당장 돈 주고 사다가 쓰라고 해도 살 것 같아요. 이모 결혼 전에 나한테 짜주던 스웨터랑 목도리도 아직 서랍에 있어요. 꼭 너무 잘 만들어서 그랬다기보다, 나중에 보고 똑같이 만들어보려고 놓아둔 건데 똑같이 만들기는커녕 시작도 못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예전에 나 어렸을 때 사진 보여준 적 있죠? 그 감색 목도리. 아뇨, 푸른 감색 말고 말 그대로 먹는 감색. 담황색이요. 예, 예! 그거. 그걸 둘둘 목에 두른 나를 업고는 이모가 엄마한테 그랬대요. 날 달라고. 자기가 키우겠다고. 마침 가족들이 전부 한자리에 있었는데 그걸 듣고 터뜨린 웃음에 액자까지 떨어졌대요. 나도 까르륵 웃었다는데 모르죠. 걸음마도 못했을 때니까. 잠시만 기다려요. 문자가 와서…. 엄마네요. 내일 온대요. 어떡하긴요. 나도 가봐야죠. 간만에 주말이라 쉬려고 했건만 안 되겠어요. 기름이 있을지 모르겠네. 들고 갈 물건이 좀 있어서 차를 끌고 가야해요. 네. 당연히 힘들겠죠. 그 집 가족들 25년 만에 처음으로 이사하는 걸요. 보나마나 또 다들 이사 준비한답시고 벌써부터 맥이 빠져 있을 거예요. 닭 같은 거라도 사갈까 봐요. 다들 워낙 잘 먹으니까. 그냥 과일이 나으려나? 아, 나요? 나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본 거였어요? 나야 뭐 힘들죠. 그래서 안 가고 싶은데, 휴…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뭘. 내가 눈 감는다고 없어지는 흔적은 아니니까.
잠시, 잠시만 기다려요. 됐다. 혹시 집에 쌀 떨어지지 않았어요? 집에 쌀이 한 포대 있는데 뜯지도 않았거든요. 지금 쌀독도 가득 차서… 아! 그래, 맞아요, 맞아! 이제 생각났어요. 어렸을 적 할아버지 댁이요. 그 마당이 있었다던 집은 방이 3개였어요. 방 하나는 삼촌 악기나 다른 짐들 놓는 창고 같은 방이었는데, 그 방에 쌀독이 있어서 심심할 때 막 집어서 오물오물 씹어 먹기도 했어요. 내가 아까 방이 2개였다고 했잖아요.. 어쩌면 가족들하고 함께했던 좋은 기억들도 더 있는데 내가 잊고 사는 걸지도, 할머니의 고향처럼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게 더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랬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이모가 나 업었을 때처럼 다 같이 웃던 그런 좋은 날 한번 만들어볼까 봐요. 동정도 미움도 이 사람한테서 저 사람한테로 옮겨가는데 애정이야 안 그렇겠어요?
응모자 : 어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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