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

by 윤연주영어샘 posted Apr 1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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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

 

 

 

 

만남

 

오독 오독-

그녀가 입 속에 무엇을 털어 넣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가 귓가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장애인 복지관이 문을 열자마자 들어왔던 나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을 그녀가 고등학생이라는 말에 조금 놀랐다. 사실 날 위해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어린 학생이 걸리는 경우는 더욱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 속에 넣은 것이 다 녹기 전까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를 살펴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숨소리가 선명한데 건너오는 말이 없다. 그러니 나도 묵묵히 자리를 지킬 수밖에.

이렇게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복지관 직원들도 제법 빠른 시일 내에 사람들을 구해주곤 했었다. 이번에도 역시 부탁을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물론 그 전화를 받고 이번에는 제발 난독증이라던가 시력이 좋지 않아 장시간 책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걸리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내 작은 소망이 이뤄진 것인지 한창 학업에 열중할 고등학생이 자원봉사를 온 것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사회봉사 시간을 채우려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아직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복지관 직원이 서류뭉치를 책상 위에 놓고 탁탁 줄을 맞추는 소리가 들린다. 곧 일어난다는 얘기다. 잠시 후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직원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자원봉사 시간은 총 3시간 썼어요. 그러니까 12시 쯤 돌아가면 돼요.”

그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나 역시 엉거주춤 일어나 지팡이를 폈다. 그러자 그녀가 얼른 내 팔을 잡아준다. 시각장애인들을 처음 겪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흔한 반응이었다. 나는 최대한 그녀가 무안해하지 않을 정도로 팔을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잡아주면 오히려 방해가 돼요.”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내 걸음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난 항상 다니던 이곳을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내 뒤를 따라 함께 나온 그녀의 발걸음이 소리가 가볍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걸어요? 안 보이는 거 맞아요?”

이것 역시 평범한 호기심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속으로 굴리기만 하는 질문들을 망설이지 않고 뱉어냈다.

늘 다니던 길이니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고개를 틀고 답을 준다. 나에겐 늘 같은 대답이지만 듣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 분명하다.

이제 뭘 도우면 돼요?”

내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그녀가 뒤따라 걸으며 궁금한 것을 토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늘 하는 질문을 하던 그녀의 말투에서 호기심으로 자원봉사를 신청했다는 느낌이 묻어나지 않는다.

학생, 책 좋아해요?”

자원봉사자들을 만나면 늘 묻던 첫 질문을 그녀에게도 던진다.

 

 

기다림

 

지하철에서 내리는 그녀의 발걸음이 복지관을 나왔을 때보다 가볍지 않았다. 자원봉사를 하려고 왔다가 졸지에 차비까지 쓰고 나를 따라왔으니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묵묵히 걸었다. 내가 항상 찾던 장소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 그런 질문들이 오가기 마련인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는 것을 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어색한 분위기는 아직 아니다. 그저 처음 만난 사람들이 느끼는 약간의 낯설음과 그 누구도 먼저 깨려고 하지 않는 고요함이 전부였다.

슬슬 바람 냄새가 달라지는 것을 보니 거의 다 온 것 같다. 지하철 시간도 제법 맞췄고 복잡한 시간을 피해서 그런지 오늘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난 자연스럽게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지팡이를 접어 넣었다. 그런데 내 앞을 비추던 햇볕의 따스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가방으로 가져간 손을 순간 멈췄다.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고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분명했다.

여기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멈칫했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조용한 곳이라 일부러 왔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왜요? 조용한 거 싫어요?”

내가 도로 되묻자 그녀는 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 역시 대답이 필요한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으니 다시 입을 닫았다.

가방을 열어 가져온 책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가 나와 빛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는 방향으로 책을 내밀었다. 잠시 후,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힘이 내 손에서 책을 꺼내간다. 그녀가 손에 책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난 옅은 한숨을 몰아쉬고 조용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냥 여기서 나한테 그 책을 읽어주면 돼요. 책갈피 보이죠?”

잠시 후 그녀가 책을 한줌 쥐고 드르륵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책장 소리. 사실 그동안 책 읽는 자원봉사를 해준 사람들 중에 가장 가볍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그녀다.

근데요…….”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토를 달지 않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목이 답답해서 그런데 물 좀 마시고 하면 안돼요?”

정당한 요구였고 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나는 자리에 앉아 그녀가 방금 전 막아섰던 빛의 따스함을 즐기기로 했다.

 

 

분실

 

그녀가 음료수를 사러간다고 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해가 점점 따가워 지는 것을 보니 슬슬 오후가 되려는 모양인데 기다리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쉬웠다. 난 조금 걸어볼까 싶어 가방에 넣어 두었던 지팡이를 더듬어 찾았다.

……?”

지팡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방 안이 텅 비어있다. 지갑과 핸드폰도 없어졌지만 난 그런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나에게 노트나 다름없는 녹음기도 함께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쩔 줄을 몰라 벤치에서 일어섰다. 한적한 곳으로 온 만큼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오늘 하루는 맑은 목소리로 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기분이다. 우선 빈 가방을 집어 들고 걸음을 옮겨 본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여기 근처에 화장실도 없는 것 같아요. 길 건너 상가 건물까지 갔다 왔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녀를 의심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믿을 수도 없게 되었다.

혹시, 내 가방에 있는 물건들 못 봤어요?”

내 말은 곧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는 차분했다.

가방이요? 난 아저씨가 준 책 밖에 없는데…….”

목소리에서 조금의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모를 안도감이 밀려온다. 우선 날 도울 사람이 돌아왔고 그녀는 내 책을 가지고 있었다. 난 천천히 벤치에 다시 앉았다.

가방에 있는 소지품들이 사라졌어요.”

?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가방을 바로 옆에 두고.”

그녀는 내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잠시 잊은 모양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를 잘 굴렸다. 가방을 들고 가면 인기척이 느껴질 것을 염려해 열려 있는 가방 안의 물건만 슬그머니 집어간 것이다. 가방을 열어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는 정말 그런가 싶어 내 가방을 들어보는 듯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딱 내 가방에서 나는 소리다.

진짜네? 그럼 이제 어째요? 아저씨 집까지 가려면 차비는 있어야 하잖아요.”

차라리 나이가 좀 있는 자원봉사자였다면 머뭇거리지 않고 차비 정도는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생에게 그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질문을 쏟아냈다.

그럼 우선 책부터 읽을 까요? 아니면 집에 연락이라도 먼저 해야 되나요?”

집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린다면 당장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시겠지만 난 여기서 해가 지도록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락할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현실이 내 몸을 찌릿하게 감쌌다.

그냥 돌아갈 차비 정도만 빌릴 수 있을 까요?”

그러자 그녀가 잠시 망설인다. 차비가 없어서 저러는 것은 아니니라.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일까. 순간의 정적이 나에겐 꽤나 불편했다.

아저씨 오늘 뭐하세요?”

돌아오는 질문에 난 다시 당황했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으니 여기서 솔직해지면 차비정도는 나올 듯싶다.

오늘은 책만 읽으려고 했는데요.”

그럼 저랑 점심 먹고 책 읽으면 어때요?”

기다렸다는 듯이 연이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을 보니 자기가 낼 심산인가보다. 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옮겨지는 즉시 그녀가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는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뭐했다. 그녀가 아니면 나를 도울 사람도 없었고 여기서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도 우습게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단지 이런 상황에서 밥을 먹자고 말하는 그녀의 여유가 부러울 따름이고 어떻게 보면 그녀가 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여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우선 지금의 약자로서 그녀의 제의를 승낙했다.

집까지는 갈 수 있는 거죠?”

확답을 들어야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 대신 내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이제는 잡아줘도 방해가 되진 않겠죠?”

학습이 빠른 그녀다. 지팡이가 없으니 이제 그녀의 손길은 내게 눈이 될 것이다. 난 그녀가 가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나에게 박자를 맞추려고 애쓰는 그녀가 느껴진다.

 

 

점심

 

어디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버스를 타고 두어 정거장 정도를 갔다. 그러니 이제 내가 아는 세상은 없다. 늘 다니던 곳에서 벗어나면 난 진정한 장님이 되어버린다. 낯선 바람 냄새가 코끝을 스쳐간다. 길을 잃은 아이들이 이런 기분일까. 옆에 그녀가 있었지만 물에 기름이 뜬 냥 겉돌고 있는 나를 느낀다. 하지만 이것을 불안함으로 받아들이기엔 뭔가 부족했다. 단지 누군가와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낯선 경험쯤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잡았던 내 팔을 놓더니 이내 팔짱을 낀다. 순간 움찔 했지만 내 팔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온기가 곧 위안으로 다가온다.

여기예요.”

그녀가 원하는 곳을 찾은 모양이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길에 밀려들어갔다.

냄새를 맡아보니 피자집이었다. 지천에 깔린 것이 피자가게일 텐데 일부러 여길 온 것을 보면 할인 쿠폰이 있거나 할인 카드가 있는 모양이다.

아저씨 피자 좋아해요?”

난 아무거나 잘 먹어요.”

무미건조한 대답이 오갔다. 자리에 앉아 피자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잔뜩 기대에 찬 숨을 내쉰다.

여기 피자 맛있어요. 수제 피자를 하는 곳인데 서울에서도 몇 군데 없어요. 사실 아저씨가 앞을 못 보니까 간단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맛있는 게 뭘까 생각 많이 했어요.”

이제야 이곳이 지천에 깔린 피자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피자라는 메뉴는 그녀가 요즘 학생들이 좋아하는 입맛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손으로 먹기 좋도록 배려한 것임을 알았다. 게다가 여기를 오려면 두 사람의 차비를 감당해야 하고 수제 피자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적지 않는 밥값을 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의문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되었다. 도대체 언제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일까.

피자는 정말 예상외로 맛이 좋았다. 배달하는 피자나 먹어본 나에게 그 맛은 고급스러움의 극치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먹기 편한 음식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 이유로 나 역시 배달음식은 주로 피자를 선택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쩝쩝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서로가 만족한 식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와 내가 몇 조각의 피자 조각을 먹어 치웠는지 세고 있었다. 소리에 민감하다보니 별 우스운 습관이 생겼다.

계산대을 한다며 먼저 일어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내 팔을 잡기 전에는 여기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벌써 익숙해진 것일까. 느닷없는 손길에 놀라기 마련인데 이제 그런 것은 사라진지 오래다.

 

 

쟁점

밖으로 나온 그녀는 마치 정해놓기라도 한 듯이 걸음을 옮겼다. 물론 난 그냥 따라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여기 근처에 좋은 커피숍이 있어요. 거기 다 맛있거든요. 우리 뭐라도 마시면서 책 읽어요.”

우리. 난 그 단어에 순간 숨이 멈춰졌다. 우리라는 울타리에 언제 들어가 봤었는지 까마득하다.

그녀가 데리고 간 커피숍은 향이 참 좋았다. 생견 가보지 않은 별천지에 들어온 것처럼 난 보지도 못 하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나를 의자에 앉혀주었다. 부드러운 느낌의 의자는 마치 날 위해 만든 것처럼 편안했다. 그녀가 주문을 하러 간 사이 난 주위에 손을 뻗어 이것저것 느껴보았다. 테이블은 나무였다. 부드럽게 마감이 잘 된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놓고 간 내 책이 있었다. 오늘 읽어야 할 책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본다.

여기요.”

그녀가 돌아왔다. 얼음이 컵 속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입안까지 시원해진다. 내가 고작 주문한 것은 아이스커피였다. 입맛이 거기서 거기다 보니 새로운 것을 먹어보고 싶어도 그녀에게 메뉴를 읊어 달라 요구할 뻔뻔함이 내겐 없었다. 내가 커피를 한입 마시는 동안 그녀가 책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왜 이 책을 읽으세요?”

처음 받는 질문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내밀 때마다 비슷한 질문들이 돌아오곤 했었다. 나는 평소처럼 같은 대답을 할까 생각 했다가 날도 날이니 그녀에게는 조금 다른 대답을 들려주기로 했다.

아는 사람이 쓴 책이에요.”

아는 사람. 그 아는 사람이란 작자가 바로 나였다. 물론 그녀가 모든 것을 추리해서 내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알아내길 바라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얼굴 없는 작가로 겨우 밥이나 먹을 정도면 만족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독자와의 만남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과 교류하는 작가도 아니었다. 나만의 틀 안에 살면서 내 틀을 세상에 보여주는 나로선 그들이 나를 몰라주는 것이 훨씬 편했다.

아저씨는 글이 뭐라고 생각해요?”

이번엔 흔치 않은 질문이 돌아왔다. 어지간한 질문에는 망설이는 법이 없는 나도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글이라……글쎄요. 쓰는 사람이 날숨을 쉬듯 쓰고 읽는 사람이 들숨을 마시듯 읽으면 그게 글 아닐까요?”

내 대답이 나가고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것이 원하는 대답이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또다시 뭔가를 물어올 것이다. 난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작가의 의도를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독자 중 한 사람으로 그녀에게 답을 주었지만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자연스럽게 들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 관심이 많나 봐요?”

넌지시 물은 나의 질문에 그녀가 컵을 만지작거리는지 얼음이 유리에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책 보다는 작가한테 관심이 많아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아무리 알아보려고 애를 써도 나에 대한 정보는 찾기 힘들 것이었다. 그 흔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나에 대한 것은 얻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혹여 그 이유 때문에 저자에 대해 더 궁금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하지만 난 흔해 빠진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지 않아서 왜 관심이 있냐고 되묻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녀의 질문과 나의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사적인 질문도 오갔지만 그것은 그저 나이나 고향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많고 집요한 질문들 중에 내가 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것은 없었다. 꺼려지는 질문이면서도 왜 기다려지는 것일까.

오독 오독-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소리가 다시 들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녀가 입에 무엇을 털어 넣었는지 궁금해졌다.

뭘 먹고 있는 거예요?”

그녀에게는 이 질문이 내가 받았던 색다른 질문들처럼 낯설었던 모양이다. 그냥 뭘 먹는다 대답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예상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뜸을 들인다.

원래는 아플 때만 먹는데 이제는 습관이 돼서 그런지 자꾸 먹게 되네요.”

아플 때 먹는 약을 습관처럼 먹는다. 뭔가 위험하면서도 애처롭게 들렸다. 게다가 뭘 먹냐는 질문에 왜 먹게 되었는지 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왜 눈이 멀었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나도 그녀가 무엇을 먹는지 묻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난 정말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학생, 지금 몇 시죠?”

“5시 좀 넘었어요.”

순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에서 느껴지는 햇살의 따뜻함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난 모른 척 했다. 적어도 그녀의 의도가 악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그렇게 된 거 원망해 본 적 없어요?”

왜 앞을 못 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고 세상에 원망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지 묻고 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내었으리라. 질문처럼 그녀 역시 세상을 원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게 돌릴 원망을 세상으로 토해내는 경우가 있어요.”

이 책에 있는 내용이네요.”

그녀의 말에 순간 입을 닫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우리가 나누고 있던 내용의 대부분이 책과 관련된 것임을 지금 알아차렸다. 계속 내 책에 관한 것을 물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난 조금 조심스러워 진다.

작가한테 관심이 많으니 이 책도 다 읽었겠어요?”

자주 읽어요.”

그 말에 난 다시 말을 멈춘다. 자주 읽혀질 정도로 공감이 가는 얘기를 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혼자 곱씹을 만큼 내 세상은 깊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요? 이 책의 어떤 면이 계속 읽게 만드는 지 궁금하네요.”

그러자 그녀는 다른 질문들과는 다르게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이 책은 나한테 원망하는 법을 가르쳐줬거든요.”

그 대답을 듣고 순간 그녀가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말투에서 묻어나는 찐득한 상처들이 내 귀에 닿자마자 저릿하게 울렸다. 뭐라고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잠시 이유 있는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말을 잇는다.

세상으로 원망을 토해내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원망하는 법을 배웠죠. 아픈 순간은 늘 그렇게 찾아왔어요. 나를 원망할 때마다.”

오독 오독-

그녀가 또 그것을 꺼내 먹는가 보다. 내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나지막이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책을 읽어 주려고 나를 만났다가 그 책에 대해 그리고 그 작가에 대해 말하고 듣고 질문하고 궁금증을 푸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이로써 나는 아침부터 그녀를 만났던 목적을 잃고 그녀는 책을 펴보지도 못했다.

 

 

귀가

 

그녀는 약속대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내 손엔 가방과 그녀가 남겨준 작은 통이 있었다. 문 앞에서 헤어질 때 그녀가 내 손에 끼워 넣은 것이다. 난 이것을 왜 내게 남기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나도 이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남긴다는 말뿐이었다. 사실 그녀의 말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플 때마다 먹는다는 이것이 왜 나에게 필요할까.

그녀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나는 그 작은 통에 무엇이 들었나 싶어 흔들어 보았다. 순간 그녀가 그것을 꺼내먹던 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빈 가방 안에는 그녀가 넣어 준 납작한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냄새를 보아하니 피자 상자였다.

난 다시 내가 아는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녀와의 묘한 만남을 뒤로하고 소파 위에 편하게 앉았는데 경비실 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어 수화기를 들었다. 집에 퀵서비스로 배달된 것이 있는데 교대하기 전에 전해주려고 한다는 경비 아저씨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린다. 내 사정을 다 아는 터라 경비 아저씨는 배달된 것들을 늘 집으로 직접 가져다주시곤 하셨다. 잠시 후 아저씨가 올라와 나에게 상자 하나를 건네고 가셨다. 난 식탁에 앉아 주섬주섬 상자를 뜯어보았다. 천천히 안으로 손을 넣어 만지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내가 아침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핸드폰과 지갑 그리고 녹음기를 꺼내자 나머지 물건이 만져졌다. 그런데 그것은 뜻밖에도 수십 개의 테이프들이었다. 무엇일지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난 그 자리에서 내 녹음기에 있는 테이프를 꺼내고 상자에 들어있던 테이프 하나를 꺼내 넣고 돌렸다. 잠시 후 내 책의 어느 부분이 흘러나온다. 책을 읽는 목소리는 분명 그녀였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그녀가 배달한 것이었다. 나에게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많은 테이프들은 내 책을 녹음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내가 녹음기를 사용하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마치 나와 내 책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만난 사람처럼 느껴졌던 질문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왜 나에게 그녀의 약통을 준 것일까.

 

 

작별

 

복지관 문이 열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갔다. 직원은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온 나를 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내 질문에 친절하게 반응했다. 난 직원에게 궁금한 것을 바로 토했다. 그러자 직원은 서류뭉치를 넘기는 듯 분잡하게 인기척을 냈다. 어둠 속에서 직원의 숨소리가 퍼졌다.

경기도에 있는 한빛 고아원에서 온 학생이네요. 이번에 만 19세가 돼서 고아원을 나온 학생인가 봐요.”

직원의 짧은 대답을 듣고 복지관을 나왔다. 그 서류에는 딱히 연락처도 없었고 그녀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왜 한숨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남긴 테이프를 모두 들었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 책이 진정 내가 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다가 고조됐고 다시 가라앉나 싶을 때 더 흥분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 귀에 들어온다.

-나그네는 길을 잃지 않는다. 만약 그가 길을 잃었다면 그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라 목적을 잃은 방랑자일 뿐이다.-

보지 못해도 나아갈 수 있다는 내 모든 삶의 지표가 그 마지막에 있었다. 주어진 삶을 묵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난 이렇게 나를 길들여 나갔고 그 길들여진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낭독은 여태껏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자원봉사자들 보다 내 글을 나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책이 모두 끝난 후에도 테이프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아저씨가 이 책을 쓸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많이 상상했어요. 세상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느닷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난 잠시 일시정지를 눌렀다. 고의로 나의 발을 묶고 하루를 함께 보낸 의도가 그 다음 흘러나오리라. 옅은 한숨을 토한 나는 조심스럽게 일지정지를 푼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아저씨가 너무 참는 것 같아서 답답했어요. 물론 그 덕분에 전 제가 느끼는 통증의 화살을 나한테 돌리게 됐지만요. 세상을 원망하고 자살의 문턱까지 갔었는데 아저씨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 궁금해서 죽지도 못했어요. 그렇지만 아저씨를 만난다고 그 궁금증이 해결 된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래도 아저씨가 이 테이프를 들을 때쯤이면 난 내가 원망하던 이 세상 어디에 쯤에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테이프 속에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춘다.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어요. 아저씨 책을 읽고 저는 더 이상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아저씨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실 테지만 말하지 않을래요. 나한테 궁금한 것이 있어야 언제든 다시 만나면 저를 반가워 해 줄 수 있잖아요.-

그녀가 나에게 넘긴 것이 진통제라고 말하고 있다. 옆에 두었던 그 약통을 다시 한 번 흔들어 본다.

-그리고 이 말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책에 쓴 것처럼 자신에 대해 너무 솔직하게 돌아보는 건 생각보다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왜냐면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질수록 힘든 사람들도 있거든요. 적당히 스스로를 부풀려 보기도 하고 치장하면서 살아가는 건 어때요? 사실 아저씨도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잖아요.-

그리고 그녀의 숨소리가 사라졌다. 더 이상 녹음한 내용이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난 한동안 정지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깊은 여운이 남아서일까. 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왜 내게 그녀의 진통제를 남긴 것일까.

 

 

 

통증

테이프가 끝으로 돌아가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정지 버튼이 올라왔다. 그 소리에 조금 놀라 멍한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데 순간 불을 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치가 있는 곳을 더듬었다.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 익숙한 곳에서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불이 켜진 것을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햇빛을 받을 때의 안도감이 조금은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무섭게 다가오는 낯선 어둠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살았던 나는 처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생 무엇을 참고 살았던 것일까. 그녀가 내게 남긴 말들과 내 책에 뿌려진 나의 포장된 진실을 다시 되새김질 했다.

자신에게 너무 솔직해서 힘든 사람들. 그녀가 말한 그 사람들 속에 바로 내가 있었다. 나에게 솔직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그것이 불편함을 넘어선 두려움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난 나만의 틀에서 솔직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난 그녀가 나를 만나기 위해 했던 노력만큼도 나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그녀가 숨죽이며 내 가방에서 물건들을 집어 가는 순간에도, 그것들을 녹음한 테이프와 함께 택배로 보내놓고 돌아와서 화장실을 찾아 건너 상가까지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할 때에도 그리고 그녀가 나와 마주 앉아 기다렸던 오늘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 되짚어 보는 동안에도 난 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던 만남을 준비할 정도로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고 했지만 난 그녀와의 대화를 돌이켜 보면서 정작 그녀가 나에게 무엇을 묻고 싶어 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엇이었을까. 작가의 의도 따위를 궁금해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녀는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의 의도보다는 내가 쓴 책에 나온 것처럼 나 스스로가 얼마나 솔직한지 관찰했으리라. 그것은 의도된 시험처럼 느껴졌다. 내 집 주소까지 알아낸 그녀에게 난 무엇을 숨길 수 있었을까. 온통 까뒤집어진 느낌이 몰려왔고 그것은 묘한 수치심까지 일으켰다.

순간 그녀가 내게 남긴 진통제가 떠올랐다. 그리고 녹음기 옆에 두었던 약통을 더듬어 뚜껑을 열었다.

오독 오독-

달달한 과립 사탕 하나가 내 입에서 녹고 있었다. 진통제. 나의 통증은 지금 가라앉고 있는 것일까.

 

 

재회

 

그녀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우리가 갔던 커피숍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늘 가던 공원에서 버스로 두어 정거장 안에 있는 수제 피자집을 찾고 그곳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커피숍 중에 내 기억에 박혀 있는 그 향을 찾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엔 뭔가를 주문한다는 것이 껄끄러웠다. 그리고 그녀와의 만남을 잊지 못하고 이곳을 찾아 왔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련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커피숍 앞에서 서성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난 그날 이후로 늘 진통제를 가지고 다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 달달한 진통제를 어디서 다시 채워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현실이 느껴질 때마다 한 알씩 입에 털어 넣었다.

오독 오독-

커피숍 유리벽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입 속에서 진통제가 다 녹을 때쯤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 앞에 섰다.

어서 오세요.”

잘못 들은 것일까.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다.

아이스커피 하나 주세요.”

삼천오백 원입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두 번째 칸에 있는 첫 번째 지폐는 항상 만 원짜리다. 잠시 후 잔돈이 내 손에 들어오고 나는 카운터를 더듬어 옆으로 비켜섰다.

주문하신 아이스커피 나왔습니다.”

다시 더듬어 그녀가 내민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억지로 입을 쥐여 짠다.

, 오랜만이네요.”

?”

돌아오는 대답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지 않고 돌아서다가 내 앞을 막아선 무언가에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다. 쏟아진 커피는 내 무릎을 적셨다. 당황한 것도 잠시, 누군가가 나를 부축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동정하는 눈길도 분명 섞여 있을 것이다. 난 무엇을 기대하고 그녀의 목소리로 착각한 것일까. 어렵사리 주문한 커피도 마셔보지도 못한 채 그곳을 나오면서 알아차렸다. 난 지금 그녀가 그리고 내가 원망했던 세상, 하지만 묵묵히 살아가야하는 바로 그 세상에 서 있다는 것을. 마치 그녀도 이 세상 어딘가에 서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