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
그녀는 결혼식은커녕, 결혼 약속을 하기 위한 상견례를 사흘 앞두고 갑자기 사라졌다. 핸드폰은 계속 꺼져 있었다. 찾아간 그녀의 집은 모든 살림들이 다 비워져 있었다. 근처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고, S는 말했다.
- 정희는 아마 나타나지 않을 거에요. 그냥 그렇게만 알고 그만 두세요. 내일 저녁 여섯 시 즈음에 그럼 만나요.
그녀와 일 년여의 연애를 해오면서 두어 차례 만났던, 내가 아는 유일한 그녀의 친구 S는 마지막 통화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얼굴 좀 보고 만나서 얘기 좀 하면, 그만 두겠다고, 간신히 회유 끝에 S를 만나기로 한다.
나나 그녀나 모두 서로의 부모님과는 통화조차 하지 못했던, 의도치 않은 비밀스런 연애를 하던 관계였다. 가끔 회사 동료들이나 대학 동기 모임에 그녀를 데리고 나간 적은 있었지만, 그 역의 경우는 없었다. 요즘 들어 일이 바쁘다는 느낌을 주긴 했지만, 마지막 연락이 되던 날에도 여느 때와 별다를 게 없던 그녀였다.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S는 ‘아마’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의 부사어를 통해 말했을 뿐이다. ‘영원히’라거나 ‘분명히’라는 확정적 진술이 아니었단 말이지. 나는 모든 수컷들이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의심과 불안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펼쳐내다가도, ‘아마’라는 말 한 마디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나는 두피를 왼손 다섯 손가락으로 벅벅 긁어대며, 간신히 잠자리에 들었다.
*
그녀의 이름은 김정희. 한국에서 참으로 흔한 이름이며 성별의 구분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보통명사’같은 이름을 지닌 사람이다. 1남 1녀 중 장녀이며 고향은 경기도 안산시의 서민층 동네였다. 가장 문인을 많이 배출했다는 명문 사립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재수 없이 16학번으로 입학한 그녀는 올해로 서른이 되었다. 이십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한, 청초하면서도 앳된 얼굴에 청량감을 느끼게 하는 미소를 보며, 나는 단번에 사로잡혔다. 메이크업이나 패션에 민감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새였지만, 그 속에 보이는 그녀의 성적 건강함은 나를 설레게 하였다. 다만 그녀의 무표정한 눈빛 속에서 종종 발견되던 회색빛의 심연을, 이지적 매력으로 오독했던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2년간의 준비 끝에 한국전력공사에 들어온 나는 이십대 시절 연애를 유보했다. 대한민국의 흔하디흔한 공돌이 남성의 전형적인 코스를 밟았다. 전공 학점을 착착 채워나갔고 수컷들끼리 어울려 술이나 퍼마시던 기억이 전부였다. 군 전역 후엔 으레 학과 동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토익 점수를 적정 수준까지 따고 이리저리 취업원서를 내거나 도서관에서 인적성검사책을 풀었다. 남자는 ‘자리’에 걸맞은 ‘미녀’를 얻는 거라는, 어릴 적 하품하며 들었던 아버지의 봉건적 가르침을, 서른넷의 인생은 가엾게도 증명해내고 있었다.
연애라고 해봐야 그저 어떻게 하면 여자와 침대 위로 올라가느냐를 최종절차 따위로 이해했던 이십대가 지난 뒤, 처음으로 진지하게 결혼까지 생각한 여자가 정희였다. 일 년 전에 회사 동기의 소개로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그녀. 세 번째 만난 인사동 카페에서 나는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는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화초를 가꾸며 살아가는 주부의 삶 또한 나쁘지 않을 거라는 응답을 했다. 상견례를 하기 전에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했지만 완강히 거절하던 그녀. 자기의 부모님과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엔 별 감흥이 없던 그녀. 무엇보다도, 언제나 잠이 부족하다며 잠자리를 함께 하길 원하면서도, 정작 섹스에는 너무도 무심하던 그녀. 늘 내 왼팔은 그녀의 작은 머리 밑에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나의 포옹 밖을 유영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 국문학과는 뭘 배워? 정말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그런 거야?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끓이며 샐러드를 준비하던 그녀에게 나는 물었다. 그녀의 원룸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 꽂힌 책들에 대해 사실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가끔씩 난 그래도 당신과 코드를 맞춰가려고 노력한다오, 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딴엔 진지한 질문을 한답시고 했었다.
-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아. 일 년에 한 번 정도 답사여행을 가는데 거의 술만 마시고 그런대. 리포트로 학점을 대체하기도 하구, 무슨 비평이라 해서 이상한 말들을 막 배운대.
그녀만의 독특한 말투였다. 본인이 체험한 일에 대해 인용의 서술로 끝맺는.
- 술만 마시고 그런대, 라면, 자기는 가서 술 안 마신 거야?
그녀는 왼쪽 귓불을 매만지며 답했다.
- 아니, 난 거기 간 적이 없어.
- 응? 그거 학과 행사 같은 거 아냐? 안 가도 별 문제는 없나봐? 우리 과는 그런 거 없어서
잘 몰라서.
- 응. 별 문제 없어. 그리고 나, 공부 얘기 별로 안 좋아해. 배운 것도 기억 안 나구.
- 그래도 국문과 하면 뭔가 자기랑 너무 잘 어울려. 학과 선배나 후배들도 다 그렇게 말 안 했어?
- 난, 학과 사람들이랑 잘 몰라. 그 사람들이랑은 좀 다르게 대학을 갔거든.
- 다르게라니? 어떻게?
- 그냥. 다르게...... 나 대학이랑 학과 얘기 별로야.
- 그래도 애들 국어랑 문학 가르치잖아. 공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응. 아니래. 다들 밥 벌어먹으려고 하다 보니 어떻게 가르치구 있는 거지 뭐.
커피나 마시자, 우리. 이렇게 대화는 보통 끝나기 마련이었다. 나는 혹시나 내가 갖지 못한 인문적 교양이, 그녀의 청초함과 지적 세련미에 어울리지 못할까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생각 외로 그녀는 무던했다. 우리는 주말이면 서울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서 커피를 마셨고,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다. 1층 한 코너에서 애완견이나 수족관 관상어를 팔고 있었다. 원룸은 그녀 혼자 살기 다소 넓은 크기였는데, 나는 그녀를 위해 강아지라도 사줄까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때마다 어딘가 다른 세계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부재는 동시에 그녀와의 추억을 모조리 소환한다. 내가 했던 어떤 것이 그녀를 떠나게 한 것인지, 아니라면 그녀가 끝내 봉인한 ‘무엇’이 균열된 것인지. 나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부재의 이유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내가 아는 김정희는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결별을 선언하거나 서운함을 표출할 유형의 여자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나는 결국 머리를 쥐어짜내어 써낸 그녀의 불가해한 이력을 메모지에 적어본다.
......우리는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왜 사진을 찍기 싫어하냐는 질문엔 언제나 ‘그냥’이란 대답뿐이었다. 고향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고, 가끔 불안한 눈빛으로 빨리 집에 가자는 말을 하며 내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가끔은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대학 시절 이야기도 없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얘기는 아예 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면 자신의 학창시절이 자주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학원강사 경력이 육 년째였는데 이직만 네 번이나 했다. 전 직장에서 같이 일한 동료강사들이 있지도 않는 듯싶었다. 그럼 대체 S란 친구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냐고 물어봤을 땐, 대학 문학동아리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맞는 친구라고만 답했을 뿐이었다. 언젠가 이민을 가고 싶다 말한 적이 있었지만 어디로 가고 싶냔 질문엔 답하진 않았다. 수영을 못 하고 등산을 좋아했다. 아니, 이건 불가해한 게 아니잖아......
쓰고 나니 고독하게 살아온 그녀에 대한 애틋함만 생길뿐이었다. 나는 비련의 주인공 따위가 될 리 없다. 낙관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나 같은 남자 옆에서, 그녀는 평온할 것이다. 나는 주문을 외우듯 같은 문장들을 중얼거리며, 세수를 하고 나왔다. 약속시각에 맞춰 나갈 채비를 하고, 악셀을 지그시 밟는다.
*
S를 통해 그 정희의 봉인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긋나버렸다. S는 선문답식 대화만을 이어갈 뿐이었다.
- 정희가 아무런 말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는 건가요? S씨가 가장 절친이잖요?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건지만 말해줘요.
광화문 인근의 카페는 한적했다. 작은 회사에서 사보편집을 보고 있는 S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가려주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살짝 매만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정희랑 저는 같은 문과대학의 동기였죠. 잘 모르실 수 있겠지만, 우리 세대에도 대학에 소규모로나마 학생운동이 존재했어요. 지금은 대학 자체가 그때보다 반이나 사라진데다 졸업하고 대부분 해외로 나가서 일하는 판이니 아예 사라졌지만 말이에요. 전 그때 학생회를 하면서 청년실업 이슈나 이런 걸로 거리에서 데모를 좀 했어요. 세상에 대해 이론이나 지성으로 비판하기 이전에, 그냥 가슴 속에 나도 모르는 어떤 분노의 감성이 있던 거죠. 데모를 하고 밤이 되면 동지들이랑 술을 마시고......불면의 밤에는 노트에 마구 무언가를 쏟아뱉었죠. 문학동아리같이 오글거리는 모임에, 내 발로 들어간 이유는 없었는데. 정희가 교지에 발표한 시를 보고 들어간 거죠. 정희가 그 동아리에 먼저 들어가 있었던 거죠.
그런 걸 이해하실진 모르겠네요. 그 아이의 시에는, 섬뜩한 분노가 읽혀지기도 했는데, 동시에 무채색의 공포가 있었어요. 제목이 <섬>이었죠. 각자의 섬에서 모두 탈출을 포기한 채, 저 가까운 건너편 섬의 또 다른 ‘자기’를 바라보며 그저 조소(嘲笑)를 머금고 있는 광경의 이야기. 문학동아리에서 정희는 합평회 때나, 술자리에서나, 늘 침묵했었죠. 나는 미친 듯이 세상과 권력을 향해 반쯤 혀가 꼬인 채 장광설을 내뱉을 뿐이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한테 조용히 와서 그러더라고요. ‘난 네가 부럽고, 네 절망이 섞인 열망을 사랑해.’라고.
저는 분노의 실체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가슴을 끓일 수도 있었지만. 알고 보니 정희는 분노의 실체를 잃어버렸던 거죠.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문 채. 공포와 분노마저 ‘섬’에 유폐되는 그런 현실에 그냥 초연해졌달까. 아시다시피 정희는 술을 마시면 더 말이 없다가, 가끔은 그냥 울잖아요. 그 이유를, 알고 나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요. 그랬던 거죠.
S는 둘의 우정의 이력을 촘촘히 늘어놓다가 결국 내가 가장 원하는 대답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가고 있었다. 2016년이면 내가 군을 제대한 뒤 복학했을 때였다. 당시에 학생운동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좀 믿기 힘들었지만, 청년노동조합이니 하는 말들이 간간이 떠돌았던 기억은 났다. 계층 고착화, 금수저, 흙수저 따위의 자조 섞인 푸념들이 횡행하던 캠퍼스였다.
무기력과 불합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나는 생각했다.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만나면, 우선 내가 살아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전 세대와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한경쟁의 라운드에 서야 했던 우리였다. 그 라운드에서 패하거나 혹은 벗어나는 순간, 장마 같은 인생만이 무한반복되는 것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아이들은 해외 파견으로, 혹은 직업교육센터의 수강생으로, 아니면 공시생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공기업의 정규사원이란 이름으로 흔들리는 배 밖을 빠져 나왔고, 살아남은 나는 정희와 같은 여인의 인생을 책임질 모든 준비를 다 갖춘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S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러나 그녀와 인생론을 대화하려고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곧바로 재차 물었다.
- S씨의 분노라는 것은, 어렴풋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정희와의 대학 시절에 대해서는, 친한 사이였다는 것 외에는 어떻게 같은 동아리로 활동했는지는 오늘 말씀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요. 정희는 제가 한 여자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존경했던 사람이에요. 정희가 저에 대한 변심만으로 이러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어요. 어떤 나에게 끝내 보여주지 못했던, 봉인된 삶의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며, 그것을 결국 드러내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내 곁에서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정희를 만나서 직접 그 이야기를 듣는 게 최선이지만, 지금 상황에선 S씨에게밖에 대답을 요구할 수밖에요. 자, 대답해주세요. 대체 그 공포와 분노의 이유라는 거, 그게 대체 무엇이었던 거죠?
S는 카페 밖 차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교보문고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의 8차선 도로로는 퇴근길 차들이 가득 했고, 맞은 편 건물의 옥외 전광판으로는 열차 사고로 승객 10여명 사상이라는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 그 아이는 어느 순간 저와의 인연마저도 이렇게 흔적 없이 끊어낼 거에요. 전 정희의 부모님이나 남동생을 만난 적도 없어요. 어느 날, 그애의 집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자다가 몰래 훔쳐 읽었던 일기로만 알게 된 게 있었을 뿐이죠. 아침에 일어나 일기를 훔쳐 읽었다는 걸 고백하고 그 알게 된 ‘기억’에 대해 물어봤을 때, 정희가 어땠는 줄 아세요?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며 이 삶을 지워달라고. 끊어진 마디와도 같은 삶만이 남았다고, 소리를 지르며 벽에 유리컵을 던졌죠. 결국 자기 왼팔에 깨진 유리로 자해까지 하는. 그런 모습 속에서 그애가 반은 정신이 나간듯한 상태에서 했던 말들에서, 비로소 알게 된 거에요. 그리고 약속을 했지요. 그날의 일들과, 그날 내가 읽었던 정희의 삶의 한편은, 비밀로 가져가겠다고.
제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단 하나에요. 정희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에요. 그애는 이렇게 자기 삶의 기억의 한 마디를 도려내는 걸로, 그 상흔을 치유해나가고 있어요. 많이 힘드시고 어처구니없겠지만, 정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희를 용서해주고 이만 보내주세요. 지금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서 또 새로운 삶을 시작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설령 모든 걸 다 밝혀낸다 해도, 정희의 고통의 짐을 함께 짊어질 수 없을 거에요. 세상엔, 그런 게 있더라고요. 그 누구도 함께 질 수 없는, 그런 독한 종류의 고통이란 게. 사람들이 그 고통에 연대하고 공감하며 위로한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 대해, 얼마간의 환멸과 경멸도 갖고 있다는 걸. 정희는 그걸 일찍이 알아버린 애에요.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에요. 정말 죄송해요.
그 후로 기억이 나는 장면은 이렇다. 나는 카페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S에게 무릎을 꿇었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그녀의 핸드백을 가로채고 자리에 앉혔다. 사람 병신 만드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라는 식의 거친 조롱을 퍼부었고, 말을 못 하겠다면 정희가 당신에게 했다는 그 패악질을 내가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끝끝내 팔짱을 끼고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녀 앞에서, 결국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내가 얼마나 정희를 사랑하고 있으며,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그 짐을 같이 지도록 노력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이렇게 사람을 기만할 수는 없는 거라고, 당신이 말할 수 없다면 내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라도 달라고.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직접 말할 수는 없다는 약속을 깨지 않으면서도 나를 도울 방법으로, S는 내게 두 곳의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정희의 고등학교와, 정희의 본가가 있는 동네의 시청 별관 지하1층을.
*
나는 내가 걸어온 인생에서 밟아온 것들을 되짚어본다. 아버지는 내가 건실한 공무원이 되길 바라셨다. 음대를 졸업한 어머니는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나 소질이 없음을 일찍이 간파하고는 입시 공부를 시켰다. 아이는 수학을 좋아했고, 세계는 함수나 방정식과 같은 일정한 원리가 지배할 것이라는 직관을 품었다. 동급생 일부는 일탈 혹은 이탈의 방식으로 학교를 벗어나거나 주변을 배회했지만, 그것은 아이의 인생과는 무관했다.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태극기가 근사하다는 생각을 품었다. 남북통일이나 국가관 따위의 단어는 낯설었지만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썩 훌륭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남들이 들으면 알만한 유명 사립대학의 기계공학과를 들어갔다. 은퇴한 아버지는 때늦게 성경공부에 한창이었고, 어머니는 계모임을 돌아다녔다. 아이는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겼고, 이제는 결혼 문제를 화제로 부모와 대화를 나눴다. 아이는 둘만 낳거라. 아이를 셋 이상 낳으면 유급 출산휴가를 석 달이나 주는데도, 2세 계획엔 중용의 미덕을 지키라는 아버지였다. 아무튼, 나와 내가 사는 세계에는, 분명히 명확한 선분이 그어져있고, 또 하나의 선분이 나의 선분과 접점을 이루는 지점에, 정희가 서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과연 정희에게도 그런 선분이 있었던 것일까.
안산시청 별관 지하1층엔 청사 직원들의 휴게실과 매점이 있었다. ㄷ자형태의 복도를 따라 본관과 이어지는 구석에까지 가서야, S가 알려준 B104호 사무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은 일반 사무실의 모든 집기와 책상이 치워져있었다. 벽 한 편에는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향은 꺼진 지가 오래인 듯 했고 시든 국화꽃 몇 더미만 놓여 있었다. 대체 여기가 뭐지? 누가 죽은 곳인데? 처음엔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곳인 줄 알았다.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고야, 나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 미양호 침몰 서원고등학교 희생자 집단분향소-
정희는 서원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그녀는 고교 시절의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 S는 내게 정희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장소로 이곳을 알려줬다. 그렇다면 이 추측은 개연성을 넘어 확실성을 갖는다. 미양호 침몰? 스마트폰을 꺼내 즉시 구글 검색창에 ‘미양호 침몰’을 입력한다. 2014년 봄에 일어난, 여객선 침몰 사고. 수학여행을 가던 서원고 학생들이 배가 전복되면서 사망한 사건. 당시 나는 군 복무 중이었기에 뉴스로만 보았던 기억이 얼핏 나기도 했다. 침몰된 시각에서부터 20여 분간의 골든타임이 있었으나 선장과 승무원들의 구조 방기로 인해 삼백 명 정도의 학생들이 실종되었다. 희생된 아이들은 하나둘 싸늘한 주검으로 뭍으로 돌아왔고, 전국민적 애도의 기간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고, 관련 뉴스들이 나왔다.
승객을 내던져두고 먼저 탈출한 선장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선박의 소유주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몇몇은 결국 몇 년 뒤에 잇따른 자살을 택했다고 나왔다. 생존 학생들은 사회적 배려의 일환으로 대입 특별전형을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 유가족들은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고, 당시 정부는 절차적으로는 청문회까지 진행하며 나름대로 보상과 진상 파악을 완료했다.
관련 기사에는 다른 이야기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전국민적 애도가 사회 분열적 징후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정부를 향한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거센 분노와 규탄에 반발하는 이른바 ‘애국 시민단체’와 친정부적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었다. 어떤 청년은 인터넷에 미양호 침몰로 바다 밑에 가라앉은 학생들을 ‘어묵’에 비유하기도 했고, 단식농성을 이어가는 유가족 앞에서 조롱의 ‘폭식’ 시위를 하는 청년들이 나타난 사건도 있었다. 도대체 왜 너희만 그토록 아프다고 징징대냐며 서서히 신경질적인 반응들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미양호 사건은 정부가 공식기념일 지정과 희생자 일괄보상이라는 ‘대타협’ 발표로 마무리되었다. 2016년 2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눈에 띄게 관련 뉴스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분향소 앞에서 목을 구부린 채 스마트폰 기사를 읽고 있을 때, 담당 경비직원인 듯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 무슨 일이신가요, 라는 질문에, 추모하러 왔죠, 무슨 일이긴요, 라고 조금은 싸늘하게 답했다. 유가족들도 여긴 안 오시는데, 이런 헛간 같은데다가 분향소를 놓은 걸 되게 억울해하셔서......사내는 너는 유가족도 아니고 무슨 기자도 아닌 것 같으니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씰룩거리는 입가의 움직임으로 대신 말하는 듯했다.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정희는 미양호 침몰 사고 때 살아남은 학생 중 한 명일 것이다. 당시 정희는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갔던 학생들 중 하나였다. 사고 후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것이며, 대입 특별전형을 통해 대학을 갔기에 나에게 대학 입학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마 여행이나 단체행사에 관한 거부반응이 생겼을 것이다. 대학 시절 답사나 M.T에 가지 않았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과 나에 대한 회피는 어떤 상관관계가 성립되는지 까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곧바로 서원고등학교를 향했다. 학교 정문을 통과하자 교정의 싱그러운 봄냄새가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교무실에 들어가 2016년도 졸업앨범을 볼 수 있냐는 요구와 함께, 내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솔직하게 다 교무부장의 직책을 갖고 있는 국어 선생에게 말했다.
- 저희 학교는 공립고등학교라, 선생님들이 순환 근무를 하셔서 당시 재직하신 선생님들은 없습니다. 다만, 추모의 차원에서 원래 네 개의 교실을 사고 당시 그대로 보존해놨는데, 저희 학교가 그 사건 뒤로 여러 가지로 주목을 받고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다보니, 이제 내년에는 옆 동네 다른 학교로 통합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나머지 교실들은 다 철거하고, 딱 한 교실만 남겨놨는데, 그 교실에 가보시면,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듯하군요.
정희는 3학년 때 1반이었고, 2학년 때는 4반이었다. 3층 복도를 걸어가 네 번째 교실 앞문을 열었다.
칠판에는 생존 학생들과 누군가가 남겨놓은 낙서들이 분필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오래 지우지 않아 아예 칠판에 글자들이 박혀 있는 듯했다. 책상에는 꽃들이 모조리 치워져있었고 대신 그 자리에 앉았던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 모양의 액자가 있었다. 창가 쪽 일 분단 앞자리부터 하나하나 그 이름들을 본다. 삼 분단 둘째 줄 오른쪽 자리. 책상 앞에 멈춰 선다.
김정희.
책상을 매만진다. 정희의 숨결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기분이다. 섬이구나. 그래, 그날 이후로 너는 섬에 갇힌 거였겠지.
서원고등학교 2학년 4반의 생존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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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에는 지금도 당시 침몰 직전에 학생들이 셀프 촬영한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배가 직각으로 꺾여가는 상황에서도 선내 안내 방송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멘트만 되풀이되었고,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면서 사태에 대해 안도하고 있었다. 물이 객실에 가득 찰 때, 턱 밑까지 물이 들어찰 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꼈을 공포......정희는 친구들이 객실에서 휴식 중일 때, 아침을 먹고 3층 갑판 쪽으로 나와 있었다. 바다를 보면서 시를 쓰고 싶어했던 소녀. 결국 바다를 보면서 객실 밖에 있었기에, 구조가 가능했었다. 죽음을 방기한 이들에 대한 분노. 처음에는 그녀의 분노도 분명 실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라는 것도, 사람에게 하는 것이었다.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고 운전면허증을 지니고 있다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살기 어린 바다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괴물을, 이곳에서 봤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가 혐오와 조롱으로 이어지는 어느 시점에, 살아남은 다른 친구들이 끝끝내 자신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스로 이파리를 떨어뜨릴 때, 그때 그녀는 기억의 마디를 끊어냈던 것일까.
나는 미양호 사건과 연관된 수백 건의 기사들을 모두 읽어냈고, 수소문 끝에 결국 정희의 부모님을 만나뵐 수 있었다. 정희는 출석일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할 정도로 고3 시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했다. 대학을 가서는 유령처럼 지내면서, 종종 자기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밝히는 이상한 징후를 보였다고 했다. 죽은 친구들의 이름이었다. 대학 동기들은 모두 그녀를 기이한 아이로 여겼다. 평소에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섞여 지냈지만, 한 학기 혹은 일 년을 기점삼아 관계를 지워버렸다고 했다.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그녀만의 나름대로의 소심한 복수였을까.
-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네. 자네를 사귀고 있는지도, 우린 몰랐어. 정희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우리에 대해서도 그애는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걸세. 그냥, 숨만 쉬는 아이였다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애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냥 그 시절의 감성에 멈춰버린 거였지. 서울로 간 뒤로는 자기가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 애였네.
결혼 약속에 대한 나의 입장을 조심스레 물어보는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나는 침묵하고 있다. 정희에 대한 사랑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나는 내게 묻고 있었다.
연인의 풀리지 않던 삶의 어느 부분을, 나는 탐정처럼 찾아냈고 결국 풀어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의문스러웠던 기억의 마디마디를 채워넣고 있다.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것이, 정희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있을까를, 나는 의심한다.
그녀는 내가 이해했던 세계가 허상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내가 그어놓은 선분이 타당한 것인지를 반문하는 듯싶었다. 나는 그녀의 삶의 선분이 나와 접점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삶은 선분이 아니라 마디일 수 있다. 삶이 기억의 마디를 채워내는 것이라면, 그녀는 살아 있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게 그녀를 죽인 괴물들의 논리엔, 내가 믿어 왔던 선분의 원리가 들어있지 않을까. 정희는 자신이 빠져나온 미양호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공포의 시놉시스는, 내가 믿어온 원리들에 의해 완성된 것이었으니까.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간신히 참으며, 밖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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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엽서들은 책상 서랍 구석에 쌓여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나의 ‘섬’에서, 결재 서류와 부서 프로젝트 준비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대적인 팀제 개편이 있을 거라는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내년 즈음엔 누군가는 이곳에서 사라질 것이고, 남아 있는 자들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엑셀 작업을 하고 있겠지. 퇴근길 지나야하는 양화대교 초입에선 오늘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강다리에 사람의 신체가 닿기만 하면 경보가 울리는 자살 예방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있었다. 강 너머로 지는 해의 붉은 빛에서, 갑자기 정희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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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자: 박재혁
연락처: 010-7624-0338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아파트 9단지 거주.
79년 5월, 서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