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의 이야기 (2017) 신규원
혜정은 이번 월요일 밤과 화요일 아침을 인생에서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연남동에 사는 30대 중반의 주부이다. 내조면 내조, 육아면 육아, 심지어 요리실력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짐이 없다. 남편의 회사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 덕에 남편은 상사의 마음에 들었고, 곧 승진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그는 2년 전 오랜 기러기 생활을 끝으로 밴쿠버에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아내와 이혼을 한 자신의 상사가 혜정을 생각하며 그의 욕정을 수십 번 해결한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혜정은 좋은 아내이고 훌륭한 주부이다.
어제, 그러니까 월요일 밤 혜정은 여섯 살 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오랜만의 데이트를 즐겼다. 골목골목 새로 생긴 카페며, 갤러리며, 옷가게를 구경하고 꽃향기가 인상적인 와인 바에서 기분 좋은 음주를 했고, 마지막으로는 기찻길 공원에서 테이크 아웃 수제 생맥주를 홀짝이며 분위기 있는 인디 밴드의 음악을 안주 삼았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남편과 모처럼의 섹스를 나눴다. 완벽한 하루였다.
<제 1 장>
김태정은 연남동에 산다. 그는 자신이 홍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예술가’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예술가라는 단어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어쨌든 그는 연남동 골목길 아담한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집이자 작업실에서 ‘무’를 창조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실 출입문 위에는 ‘악세서리공방’이란 간판이 붙어있다. 물론 바로 밑에는 <화요일 9:00~11:00 주부 취미반 운영 중>이라고 쓰여있다.
그의 아버지는 베란다 난간에서 오리털 이불을 털다 떨어져 죽었다. 10년 살던 반지하 방에서 13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이사한 지 꼭 2주째 되는 날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보험금이 담긴 통장을 들고 웬 예술가 놈과 바람이 나 달아났다. 태정은 아버지가 이불을 털다 죽기 전부터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다. 그리고 이혼한 부모를 두는 것보단 차라리 지금의 상황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개를 털고 아침밥을 준비한다. 밥을, 그러니까 쌀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정치인들은 낯짝이 두꺼우니까 얼굴이 일반 사람에 비해 적어도 세배는 커야 할 거다. 태정은 그의 낡은 찬장에서 라면 한 개를 고른다. 면이 납작하게 생긴 짜장라면이다. 얼마 전부터 그는 이 제품에 들은 참기름 향에 푹 빠져있다. 하지만 그의 입맛을 믿고 이 짜장라면을 먹어보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시금치 향이 나는 맥주에 사업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작업실을 담보로 맥주회사에 투자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적당히 넣은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그는 라면 봉지를 뜯는다. 물이 끓자 면을 냄비에 던져넣고 봉지 안에 남은 부스러기를 확인하기 위해 봉지 속으로 눈을 집어넣는다. 그런데 납작한 면 부스러기들 사이에 둥그런 상아색의 물체가 보인다. 그는 행여 그 물체가 번쩍 튀어 올라 자신을 잡아먹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꺼낸다.
그는 한눈에 둥그런 상아색 물체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나름 연남동 주부들의 악세서리 만들기 능력을 책임지고 있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 물체는 바로 기초반보다 5만 원 더 비싼 심화반의 세 번째 시간에 사용하는 재료이다. 팔찌를 만드는 데 쓰기 위해 특수제작된 코끼리 상아라고 그는 수강생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지만 사실 그건 싸구려 플라스틱에 색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 ‘멍청한 주부들. 진짜 상아가 그렇게 가벼울 리 없잖아.’ 그는 수업으로 벌어들이는 한 달 수입을 계산할 때 곧잘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심화반 사람들에 숫자 오를 곱해 수입에 더하면서도 그들을 욕하는 건 그에게 아주 짜릿한 일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 싸구려 플라스틱 재료를 창문 밖으로 던지고, (적어도 그에게는) 향기로운 참기름 향을 음미하며 즐거운 아침을 맞이했다.
<제 2 장>
오늘은 월요일이다. 그는 어제 동네 미용실을 예약했다. 덥수룩한 그의 머리를 유행에 맞게 정리하면서도 남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그런 스타일을 가지고 싶은 그의 속내에 공감해줄 수 있는 미용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미용사는 동성애자다. 태정은 그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길거리의 곱상하게 생긴 남자들에게 눈길을 뺏기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주변 동성애자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 태정은 샛노란 색 티셔츠와 새빨간 반바지를 입고 미용실로 나선다. <음... 역시 연남동의 아침 공기는 상쾌해. 상수동은 이미 오염됐어.> 공원의 사람들은 그를 보며 간밤의 숙취를 해결한다. (정장을 입은 직장인. 어제 술을 거나하게 마신 것 같다. 자신을 지나치는 태정을 보고 눈을 한 번 찐하게 감았다 뜬다. ‘아, 열심히 살아야지...’) 좋든 나쁘든 태정은 타인에게 삶의 의욕을 가지게 해주는 사람이다.
딸랑. 르자망 미용실의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다. 태정은 언젠가 저 종은 어떤 예술가가 만든 거냐고 미용사에게 물어볼 의향을 가지고 있다. 미용사 또한 태정에게 언젠가 그 질문을 받는다면 저 앞의 생활용품점 2층 창문 쪽 구석에 가보라고 친절히 답해줄 의향을 가지고 있다. 미용사가 그에게 다가와 맡길 코트는 없냐고 농담을 건넨다. 태정은 찰나의 순간 어떻게 이 농담을 재치있게 받아칠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곧 들어올 제 개인 비서가 관리 할 겁니다? 이 추운 날 코트 없이 걸어오느라 추워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면 이 더위에 걸어오느라 조금 축축해진 이 셔츠를 벗는 척이라도 할까? 아니야. 실수로 내 분홍빛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날에는 저 남자가 나에게 호감을 가질지도 몰라. 혹시 알아? 머리를 감을 때 눈을 감는 내 버릇을 알고 그 사이에 몹쓸 짓을 저지를지.’ 하는 수 없이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서둘러 들어올 때 미용실 앞에서 본 강아지 이야기를 꺼낸다.
<저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던데 혹시 키우시는 건가요?>
<아, 우리 야옹이 말씀이신가요?>
<네?>
<제가 키우는 저 강아지의 이름은 ‘야옹이’입니다. 집에 키우고 있는 고양이의 이름은 ‘멍멍이’죠. 저는 제가 키우는 동물들이 멍청하게 먹고 자고 싸는 꼴은 못 본답니다. 항상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려고 노력하죠. 아마 야옹이와 멍멍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최초의 고양이이자 강아지... 아차... 강아지이자 고양이일 겁니다. 가끔은 저도 헷갈려요. 하하하.>
태정은 할 말을 잃는다. 당장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저번 주 수업에서 한 주부가 자신의 머리를 보고 유행에 민감하신 분인 것 같다는 말을 한 것의 손을 들어준다. 아무래도 이 형편없는 머리를 하고는 내일 수업을 진행할 용기도, 5년간의 연애로 이제는 서로의 앞에서 재채기를 할 정도로 발전한 그의 여자친구를 오늘 밤 만날 자신도 없다. 그는 이발용 의자에 앉는다.
이십 분쯤 흘렀을까. 태정은 의자를 다 덮을 정도로 큰 노란색 천을 목에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마치 거대한 가슴을 떠올리고 있다. ‘키킥 그럼 내 머리가 젖꼭지가 되는 건가? 사람 머리만 한 젖꼭지라니 푸하하하.’ 그때 거울 앞에 놓아둔 태정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미용사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어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태정은 지금 손이 없으니 미용사에게 메시지 내용을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미용사는 가위질을 계속하며 휴대폰 화면을 곁눈질 하며 메시지를 읽어준다.
<희정이라는 사람한테 온 거네요. ‘안녕?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우리 관계는 이제 끝이야. 저번 주 토요일에 네가 술에 잔뜩 취해서 내 집에 쳐들어와 발가벗은 채로 애국가에 맞춰 왈츠를 출 때부터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태정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미용사는 말을 이어나간다. <‘난 지금 이 메시지를 보내고 네가 나에게 준 이 싸구려 악세서리들을 모조리 태워버릴 생각이야. 더는 나에게 연락할 생각 마.’ 뒤에는 느낌표가 셋... 넷... 다섯 개 있네요.> 미용사는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이 희정이라는 사람이 누구죠?>
미용사의 말을 듣고 있던 태정은 흥분해 몸을 크게 들썩이고 미용사는 놀라 가위질을 해버린다. 그 가위질은 태정의 왼쪽 이마 윗부분 머리를 썩둑 잘라버린다.
급히 거울로 눈길을 돌린 태정은 고함을 친다. <이게 뭐야 이 호모 자식아!>
르자망 미용실에는 짧은 적막이 흐른다. 씩씩대고 있는 미용사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죠? 저는 단지 당신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