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그레이스

by 아주늦은밤 posted Jun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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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레이스

 

윤소야

 

현욱이 토머스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새벽 네 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토머스는 그레이스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때 현욱의 장인이었다. 토머스는 몇 가지 놀라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 현욱이 가장 놀랐던 건 그레이스가 지금 한국에 있다는 말이었다.


그레이스와 현욱이 이혼한 건 일 년 전쯤이었다. 그녀는 구치소를 거쳐 수감되는 와중에도 변호사를 보내 줄기차게 이혼을 요구했다. 현욱은 아내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면회를 갔지만, 그레이스가 응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혼해줘.” 모범수로 형기를 2년 남겨두고 출소하던 날, 마중 나갔던 현욱에게 7년 만에 그레이스가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녀의 말도 시선도 어디 하나 구부러지지 않고 그를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결국 현욱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내는 울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그레이스는 결코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점은 그녀의 아버지, 토머스를 닮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움직이기는 어려워서 말일세.


감기라도 걸린 듯 장인의 목소리는 껄끄러웠다. 장모는 꽤 오랫동안 치매를 앓아 온데다 토머스는 다리가 불편했다. 게다가 현욱은 사건이 있던 후부터 아내와 장인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음을 상기해냈다. 설령 토머스의 다리가 멀쩡했다 하더라도 그레이스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국에는 제가 가 보지요.


바쁠 텐데 미안하네.


아닙니다, 걱정 마시고 마저 주무세요. 한국에 들어가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현욱, 정말로…… 고맙네.


현욱은 끊긴 휴대폰을 든 채 침대 맞은편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도 술을 마을 마시고 들어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신발도 신은 그대로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면도는 언제 했는지 같은 셔츠를 며칠 동안 입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이혼 후에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낮도 밤도 그냥저냥 비슷하게 흘러갔다.


꾸미는 데에 관심은 없었을망정, 그레이스에게 흐트러진 모습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토머스로부터 물려받고, 또 훈련받은 성격이었다. 연애 때부터 그녀는 현욱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이며 또 그것을 가족들에게 강요해왔는지를 세세하기 설명해 주었었다. 아버지가 정말 싫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때때로 그레이스는 토머스 그 자신처럼 보이는 행동을 했다. 그런 토머스가 전과자가 된 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또 그레이스는 전과자가 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두 사람은 부딪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현욱에게는 장인이 자신에게 연락을 해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현욱이 한국행 비행편을 알아보려고 검색 어플을 켜자, 토머스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경기도의 경찰서로부터 팩스로 받았다는 약도와 전화번호를 찍은 사진이었다. 화면의 푸른빛 때문에 현욱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처럼 보였다.


 

*


 

냉장고. 나는 냉장고가 마음에 들어서 이 방을 계약하겠다고 했다. 아니, 여기보다 더 싸고 옵션도 좋은 방이 많은데…… 여긴 방만 넓지 냉장고밖엔 없다니까…… 부동산 중개인은 아마 내가 부유해보이는 서양인이니까 비싸고 좋은 방을 구할 거란 기대를 했던 모양이었다. 처음엔 나도 그러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방을 본 순간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냉장고, 냉장고가 있었으니까.


한 걸음 정도 되는 현관과 붙어 있는 방의 부엌에는 냉장고를 둘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섯 평 정도 되는 넓은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거다. 살짝 누렇게 변한 핑크색 벽지 위에 동동 떠 있는, 과거에는 분명 순백색이었을 누런 크림색 냉장고가. 운명처럼. 채찍처럼.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서명하고 일 년 치 방 대금을 치렀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중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통역을 하던 청년도 내가 한국어를 알아듣는지는 몰랐을 것이다. 나는 모르는 척 하는 것에 익숙하다. 굳이 숨겨야겠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잠자코 있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게로 향하는 모든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람들에게 등 뒤에서 마음껏 속삭이도록, 아니 고함치도록 모든 상황을 연출할 의무 또한 지고 있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은 속마음을 감추는 것에 능하지 않던가. 곧게 계획된 직선도로가 겹겹이 이어지는 뉴욕에서 태어나 줄곧 자란 나는 한국인들처럼 돌려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누군가 어서 나의 정체를 폭로해 주었으면, 그리고 한국어를 모르는 나에게 마음껏 손가락질 하고 욕을 퍼부어 주었으면. 간절한 바람이다.


다들 돌아가고 한참 동안 크림색 냉장고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보니 냉장고에서 어떤 인격이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다. 조만간 어떤 이가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나는 초조하게 점점 인간 같아지는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냉장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오고 하루 종일 먹지 못해서 어지러웠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 그러다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깨달았다.


너도 배가 고프구나.”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밥을 주는 게 먼저였다. 회색 플러그가 노란 장판 위에 탯줄처럼 늘어져 있었다. 콘센트에 꽂자 위잉,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냉장고를 한 번 쓰다듬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왔다. 젓가락을 받아오는 것을 깜빡해서 바닥에 앉아 맨 손으로 데우지 않은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었다. 토종 한국인이 된 마냥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이런 나를, 똑똑히 보렴. 다시 한 번 냉장고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


 

그레이스가 복역한 기간은 총 7년이었다. 미전역이 그녀의 사건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괴물이라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현욱은 가정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었다.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과 감탄이 그에게 쏟아졌다. 물론 그에게 화를 내면서 호구짓하지 말고 당장 이혼하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욱의 부모님도 그랬다.


커다란 돋보기 안경에다 후드 티셔츠를 뒤집어 쓴 너드 여자애. 대학시절 그레이스에 대한 현욱의 첫인상이었다. 보통은 아시아인들의 학구열이 더 높다고 하지만 현욱과 그레이스의 경우는 반대였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온 현욱은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파티를 즐기러 다니던 그의 친구들 중 아시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주로 학구파인 아시아인들 틈에 있었다. 그런 그녀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고 눈길이 가는 건 현욱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첫 데이트 때에는 그녀보다도 그가 더 긴장했었다. 그녀는 여느 여자들과는 달랐다. 밤늦게까지 연습한 농담을 던져보았지만 무덤덤했다. 사귀어 보니, 잘 웃지 않는 만큼 울지도 않았다. 남자들 중에는 그런 그녀를 두고 다스베이더라며 낄낄댔지만 현욱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공부는 뒷전이었던 그가 열심히 공부하게 된 것은 둘 사이의 화학작용이 긍정적이라는 증거였다. 까불거리던 현욱의 성격도 한결 차분해졌다. 결혼까지 이어지던 수순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프러포즈를 받을 때조차 그레이스는 덤덤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야 그레이스지.’ 현욱은 그 때 자신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복역한 기간을 제외하면 결혼 생활은 만 4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 중의 3년 가까이를 한국에서 지냈으니, 부부로서의 기억은 모두 한국에 있는 셈이었다.


현욱은 건축 디자이너였다. 서울시에서 신축하는 미술관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그에게 과한 행운이었다. 신출내기 특유의 무모함을 증명하듯 에코라는 말로 범벅되어 있던 제안서를 선뜻 받아들인 서울시 역시 도박을 한 셈이었다. 물론 한국계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의도치 않게 담당 공무원의 마음을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마침 유통회사에서 3년 째 근무하던 그레이스는 정신과 육체 양면에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던 차였다. 한국행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미술관은 대리석이 아니라 한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이용해 마감하기로 했다. 적당한 물건을 찾기 위해 그는 돌부스러기를 맞으며 전국을 누볐다.


암석 채취는 적어도 기본원리에 있어서만큼은 피라미드를 만들던 고대 이집트 시절과 달라진 게 없었다.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바위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는다. 이 구멍에 쐐기든 폭약이든 약간의 충격을 더해주면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쪼개지기 마련이었다. 바스러지는 낙석들을 볼 때마다 현욱은 그레이스를 떠올렸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자신과는 반대로 무슨 일에도 덤덤한 그레이스. 아직은 아무도 그녀의 마음에 흠집을 내지 못했지만, 어떤 일로 인해 작은 구멍이라도 난다면 저렇게 부서져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것은 예측한다고 해서 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발파장면을 보면서 현욱은 매번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건 예감이기도 했고 다짐이기도 했다.


불길한 예감과는 달리 한국 생활 첫 일 년은 현욱에게 있어서 꿈같은 시간이었다. 빠지지 않고 어학당에 나가던 그레이스는 어느 순간부터 그도 모르는 한국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낯선 음식이나 예절, 인간관계에도 예상보다 빨리 적응하며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그녀의 우울증이 시작된 것은 정신없어서 행복했던 그 일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누구였는지, 아무튼 누군가의 생일 파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로 오픈한 깔끔한 다이닝 바를 빌려서, 한국인들과 미국인 몇몇이 섞여 음식과 담소를 나누던 자리였다. 맥주를 마시던 그레이스가 갑자기, 현욱의 팔을 붙잡으며 저게 뭐냐고 물었다. 무슨 영화를 제작한다면서 주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고사를 지내는 장면이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미국 생활이 길었던 현욱에게도 낯선 광경이었다. 여정이라고 하는, 그레이스와 가장 친했던 한국 여자가 현욱을 대신해 대답했다.


, 자기는 모르겠구나. 저런 걸 고. . 고사라고 해요. 일이 잘 풀리라고 제사를, 그러니까, 기도 비슷한 건데 옛날 미신이 남은 거야. 그래, 샤머니즘!”


샤머니즘? 한국의 샤머니즘은 칼을 타고 올라가는 그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있긴 하지. 근데 그거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자기?”


그 때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것으로 현욱은 기억한다. 뒤이은 여정의 말을 궁금하면 요번에 나랑 같이 가볼래, 자기? 내가 저번에 용한……여기까지밖에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사 장면이 어떤 방아쇠가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다.


여정을 따라 점집에 갔던 그레이스는 곧 교회라도 나가듯이 그곳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미신에 휘둘릴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현욱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옛날에, 친척 중 한 명이 미신 마니아였어. 매일 타로 점을 치거나, 탈리스만을 모으거나, 흑마법을 익혔다고 허풍을 떨거나. 그래서 반갑기도 하고, 또 흥미롭잖아. 동양의 미신이라니. 존이 참 좋아했을 텐데.”


말을 꺼낼 때마다 그레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던 현욱도 존이라는 친척이랑 친했나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점점 사소한 일에까지 애기보살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우울해, 가지 않으면 우울해. 내 마음을 이해하는 건 애기보살님밖에 없어.”


나중에서야 현욱은 그 존이라는 친구가 그레이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영혼이 그녀를 조종한 것이다. 그레이스가 아니었다. 원흉은 바로 존이었다. 현욱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매년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 가족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까이에 숲과 또 커다란 호수가 있는 그 집에는 할머니와 제이슨 삼촌, 그리고 존 세 사람이 살았다. 제이슨 삼촌은 아빠의 동복동생이었고, 존은 삼촌의 아들이었다.


사촌 오빠 존은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았지만 여름 내 우리는 단짝 친구처럼 지냈다. 마을사람들, 심지어는 할머니까지도 존을 말더듬이나 언청이, 겁쟁이라고 불렀다. 어린 나의 눈에도 유달리 겁이 많은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우리는 만나지 못하는 때에도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서로의 보물이나 비밀을 공유하기도 했다. 아빠는 존과 내가 사이좋게 지내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물론 아빠의 칭찬이 달콤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내가 그 때문에 그와 놀아 주었던것은 아니다. 나는 말더듬이 사촌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존은 온갖 미신을 믿었다. 그의 보물창고인 다락방에는 오래된 성경책이나 온갖 십자가부터 코란, 수상한 글자들이 적힌 양피지 두루마리, 부두교의 상징물, 동양의 무슨 신의 모형이라든지가 가득 차 있었다. 존은 그런 온갖 상징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 그치만 저저저저 저번, 에 십자가를 세세 개나 가져갔을 때는, 안마마맞았었…… 크리,스 가 안 때려었……


왜소한 체구에 말더듬이인 존은 어딜 가나 동네북이었다. 당시에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한참 사춘기였을 그의 동급생들이 그를 얼마나 멸시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당시 남부의 시골 아이들이 가진 폐쇄성과 잔인성. 존은 가끔씩 럭비부 주장이라는 크리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보복수, 할 거야……

 

아홉 살 여름방학 때, 존은 드디어 일을 냈다며 내 품에 안겼다. 이이이건, 비비비, 비밀…… 비밀이야……


사사사사사람을 주죽, 내내내가 사람, 죽였어……


존은 여느 때보다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설명했다. 숲 속에는 오랜 기간 방치된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의 빈 집이 흔히 그랬듯 그곳 역시 심령 스팟이었다. 존은 그곳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고 했다. 표지는 다 닳아 사라져버렸지만 전설 속에 나오는 솔로몬의 마법서가 틀림없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거기엔 온갖 저주방법들이 소상히 적혀 있었다. 존은 책에 적힌 대로 개구리의 눈알을 모으거나 아미달라의 즙을 짜거나 보름달을 기다리면서 저주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 즈음 크리스는 부상에 시달렸다. 존은 그게 저주 덕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존의 바람은 더 큰 것이었다.


어느 날 정말로 크리스가 죽었다. 지나가는 행인도 마주보고 오던 차도 없는 상황에서 크리스는 자신이 몰던 자동차를 나무에 들이받았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한동안 말이 많았다. 커브도 교차로도 없이 계속 곧게 이어지는 도로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멜라니의 증언으로 밝혀진 원인은 커다란 벌이었다. 실제로 크리스의 시신 왼쪽 팔뚝은 벌에 쏘여 크게 부풀어 있었다. 놀란 크리스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고 차는 그대로 나무에 부딪히며 구겨졌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크리스의 여자친구 멜라니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메메메멜라니……


존이 크리스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멜라니는 학교의 여왕님이었다.


다음 해 존과 함께 보냈던 마지막 여름방학은 최악이었다. 그는 다락방이나 호숫가 마녀의 집에 틀어박혀 있기가 일쑤였고, 이따금씩 함께 있게 되었을 때에도 바쁘거나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불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책에 빠져 있기도 했다. 양피지에 뭔가를 그리거나 적거나, 과도로 손가락을 찔러서 피를 모아 잉크병에 담거나.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계속 따라다니며 물었지만 그는 내가 옆에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메메메멜…… 가끔씩 멍한 눈으로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게 하루종일 하는 말의 전부였다.


그 해 가을 존은 죽었다. 내 앞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남긴 채로 말이다.


무언가를 되찾고 싶으면 되찾고 싶은 무언가와 동등하거나, 아니 그 이상의 대가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세월이 지날수록 이자가 붙는 법. 지혜를 좇는 자에게는……


솔로몬의 마법서를 발견한 이후부터 존의 편지는 전부 그런 식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존은 호숫가에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땅바닥에는 오각별, 원들이 조합된 현란한 도형이 그려져 있었고 별들의 꼭짓점마다 양초를 켜든 채였다. 스스로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이는 휘발유 통이 그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존이 멜라니를 되살리는 의식을 했다는 것은, 그와 비밀을 공유하던 나만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멜라니라는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하반신 마비라는 그녀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존의 사랑을 받을 만큼 여전히 예뻤다.


아빠는 존의 엉뚱한 죽음을 핑계로 할머니 집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어른들의 모든 거짓말을 읽어냈다. 아빠와 할머니는 언제나 다정했으며 또 부모님은 제이슨 삼촌과 존에게 미소지어주었다. 내 앞에서만. 나는 엄마가 존을 버러지처럼 경멸했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에 장례식에 참석한 것도 나 혼자뿐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며 나는 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존을 위한 장례식이 치러졌는지도 의문이다. 무덤을 찾아보려 했지만 제이슨 삼촌은 끝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촌을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감추고 싶어 했던 아빠를 이해하는 아이였다. 그렇게 조숙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면 역시나 슬퍼진다.


 

*


 

냉장고에서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든 그것을 꺼냈을 때, 현욱이 처음 떠올린 것은 오징어였다. 그는 오징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징어, 문어, 낙지. 이런 것들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꽁꽁 얼어있는 그것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오징어의 냄새는 아니었다. 상한 것 같지도 않았다. 배가 고팠던 현욱은 별 생각 없이 얼어붙은 그것에 붙어 있는 비닐봉지를 완전히 떼어냈다. 그리고 싱크대 앞에서 잠시 그것을 관찰한 다음 개수대에 그대로 처박았다. 헛구역질을 하면서 거실을 잠시 서성였다. 자꾸 부엌에 시선이 갔다. 친정에 가 있는 그레이스에게 전화해야하는지를 고민하며 턱을 문질렀다. 한참을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서서 집안 곳곳으로 달려가 커튼을 모조리 내리고 현관문이 잘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퇴근 후 식탁에 놓아두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개수대에는 여전히 그것이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저어, 저희 집에서 이상한 물건이 발견이 돼서 전화 드렸는데요…… 바로 출동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물건이냐면요…… 그게…… 지금 제가 장난전화를 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 아기…… 갓난아기의 시신이 들어있었어요…… 네에…… 냉장고에, 냉동실 안에 꽝꽝 얼어서요…… 아기에요, , 갓난아기요…… 출동을 좀 빨리 오시도록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때까지도 현욱은 개수대 안의 그것이 자신의 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계속 우울해하는 그레이스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모든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고사를 지내기로 했다. 냉장고를 바라보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다. 어쩌면 냉장고가 내게 명령한 건지도 모른다. 그게 죄인이자 순례자인 너에게 어울리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우리의 의사소통이 시작되는구나.


과일 몇 가지, 현욱이 좋아하던 잡채, 내가 좋아하는 불고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웃고 있는 돼지 머리. 깨끗한 종이를 냉장고 앞에 깔고 음식들을 늘어놓았다. 웃고 있는 돼지에게 백 달러며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가로 끼웠다. 절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다짜고짜 방바닥에 연거푸 엎드렸다. 모든 행동들이 실체가 되지 못하고 시간 속에 스르륵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잘 안 웃는 게 또 당신 매력이기도 하니까.”


현욱은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고 곱씹는다. 웃지 않는 여자. 거기다 나는 울지도 않는 여자였다. 저런 말을 할 때의 현욱은 나를 칭찬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의 비인간적인 성격을 비난하고 있었던 걸까. 더 많이 표현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걸까. 변호사는 나의 성격적 결함에 대해 말했었다.


피고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주입 당해…… 간섭을 넘어 감시까지…… 부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임신거부증은 당연한…… 피고를 가엾게 여기어……


몰랐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인지. 나는 변호사가 한 질문들에 대답했고 곧 그가 정신감정을 신청했다. 감정의라는 사람에게 변호사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되풀이해야 했다. 감정의는 직접 증언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감정서를 읽을 수 있었다. 변호사의 변론과 비슷한 몇 가지 단어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말이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너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내가 다, 내가 다 잘못한 거야.”


현욱의 말들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그에게 의지했었다.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던 탓이다. 현욱은 신문이건 인터넷이건 텔레비전이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했다. 반성은커녕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정신이 돌아온 건 사건이 지역방송 너머 공영방송을 타고 미전역에 보도된 이후였다. 조사를 받기 위해 이동하던 내게 누군가가 계란을 던졌다. “악마같은 계집!” 채 생명이 되지 못한 끈적거리는 액체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변호사며 검사, 감정의, 판사들이 한결같이 묻고 묻고 또 물었던 그 사건, 그날의 일을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또렷한 한편으로 그 기억에는 투명한 무언가가 끼어 있는 것처럼 지금도 손이 닿지 않는다. 아주 사실적인 홀로그램 같다고나 할까. 끄집어내려고 할수록 위화감이 든다. 똑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두꺼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가 사방에서 빛을 굴절시키며 상황을 흐트러뜨려 판단을 놓치게 만든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물건. 그때의 그것은 물건이었다.


유난히 생리통이 심했다. 현욱이 출근하고 홀로 남은 집에서 나는 타이레놀 두 알을 먹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거실을 서성이기도 하고 기껏 정리한 침대커버를 흐트러뜨리기도 하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배변감이 일었다. 본능적으로 몸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변기가 아닌 욕조에 주저앉았으니까. 피투성이 점액질. “평소보다 크네.” 욕실에 울려 퍼진 나의 침착한 중얼거림을 똑똑히 기억한다. 뒤이어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면 오랫동안 생리를 안 했으니까, 쌓인 그 분량만큼 커진 걸까. 그래도 너무 큰데. 배수구가 막히면 어쩌지.’


모르는 척 하고 샤워를 먼저 하기에는 그 물건의 부피감이 거슬렸다. 지친 몸을 이끌고 부엌에 가서 비닐봉지를 가지고 나왔다. ‘여정의 말대로 비닐봉지를 보관해두니 이렇게 쓸모가 많네. 미국에선 다들 왜 이걸 안 할까?’ 태연한 척 하느라고 일부러 그런 생각들을 떠올린 게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 내 행동과 생각이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잘 안다. 적어도 나의 행동은 그 물건을 아기라고 인식했음이 분명하다. 그랬으니까 비닐봉지에라도 싸서 냉동실 안에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나의 생각, 정신의 경우, 정신감정의의 판단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그때 제정신이었다면 생리가 없던 그 몇 달 동안 뱃속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살찌지 않았어도, 몸무게가 변하지 않았어도, 구역 증세가 없었어도. 그러니까 그게 여자고 엄마니까. 상식이니까.


칠 개월 동안 생리가 없었던 것으로 피고인은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상식적으로요.”


몰랐다. 내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사람이었는지. 뭐가 문제였을까.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던 걸까. 왜 나는 칠 개월 동안 아기를 품고 다녔으면서 몰랐을까. 왜 미끄러지듯 태어난 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었을까, 나는. 어쩌면 정말로 나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인걸까. 엄마 아빠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을까. 나는 어쩌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태어난 거지.


배심원들의 판단 결과…… 유죄…… 모정으로 보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냉장고에 유기…… 잔인한…… 징역 9년에……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다. 나의 정신은 미쳤으며, 나의 손발은 의식도 없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결론은 복역하던 7년에 걸쳐 거듭된 생각 끝에 간신히 이해한 것이다.


나 스스로 생리혈 덩어리라고 인식했던 그 물건을 비닐봉지에 싸서 냉동실에 넣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법은 명령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생리혈 덩어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눈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게 법이었고 나는 법을 어긴 범죄자였으며 따라서 징역 생활을 해야 했다. 법이 허용하는 엄마가 되기 위해, 여자가 되기 위해, 사람이 되기 위해.


감옥 안에서도 나는 법원의 명령에 순응하려 노력했다. 물건. 어떤 물건이 좋을까. 어떤 물건이었다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러다 형무소로 옮겨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 동안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껏 네가 사랑한 사람이 있기는 해?’


어쩌면 지금껏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애착을 느낀 적이 없는지도 몰랐다. 무서운 가능성 앞에서 존을 떠올렸다. , 나의 존. 너를 향한 마음은 정말 동정심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네가 죽었기 때문에 나는 억지로 사랑하고 있다 스스로를 세뇌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껏 네가 사랑한 사람이 있기는 해?’


우우웅. 냉장고 우는 소리가 나를 깨운다. 꿈을 꾸었던 건가. , 웃는 돼지머리. 어느 쪽이 현실인지 헷갈린다. ‘지금껏 네가 사랑한 사람이 있기는 해?’ 낯설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양쪽 귓가를 시계추처럼 왕복한다. 어쩌면 아가, 너일까. 네 목소리인 거니. 저 냉장고 안에서 너는 여전히 꽁꽁 얼어붙은 채 살고 있는 거니? 여전히 나를 원망하면서, 얼어붙은 나의 핏덩이. 너는 그런 낯선 목소리로 나를 고발하는 거니? 우우웅. 우우웅.


그래, 벌을 받으려고 나는 한국에 온 거야. 나는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했으니, 여자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지. 온전히 벌을 받아야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고사를 지내는 중이었지. 우우웅. 우우웅.


냉장고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머리를 들이받았다. 쿵쿵거릴 때마다 냉장고가 우우웅 울었다. 아니, 우는 게 아니라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쿵쿵. 그런데 이런 걸로 될까. 이런 걸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여자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엄마 아빠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절, 절을 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지. 제대로 고사를 지내자. 그러면 아가, 너는 냉장고에서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때 너와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줄게. 그때까지는 그렇게 나를 노려보렴. 나를 질책해주렴. 나를 더 때려주렴. 너는 물건, 물건이야. 하지만 사랑한다, 아가.


 

*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현욱은 스마트폰을 켰다. 제대로 된 짐 하나 챙기지 못한 어수선한 상태였지만 간신히 로밍만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머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지난 새벽의 통화기록을 찾아 그의 이름을 눌렀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레이스가 끔찍이도 싫어했던 노래가, 여전히 토머스의 통화연결음이었다. 현욱은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쩌면 토머스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연락을 기다리더라도 그 노래는 그레이스에 대한 모욕이었다.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택시에 올라탄 그는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전화번호 밑에 적힌 담당형사 장태은이라는 일곱 글자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


 

감옥에서 나와 한 방을 쓴 것은 멜라니라는 이름의 덩치 큰 여자였다. 당연히 존의 마돈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녀의 존재가, 또 멜라니라는 이름이 반가웠었다.


그녀는 살인범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강간한 남자를 찾아가 그야말로 잔인하게 살해한. 모성애 넘치는 살인범. 나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녀의 미소가 천천히 식었다. 널 죽여버릴 거야,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널 죽여버릴 거야, 너 같은 년 때문에 우리 애가…… 화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멜라니는 나의 뺨을 때리며 분풀이를 했다. 살인까지 불사하는 모성 앞에 나는 그저 벌레일 뿐이었다. 벌레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일부러 멜라니와 나를 한방에 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징역이라는 것보다 그녀의 구타 쪽이 천벌에는 더 어울렸다.


따라서 나는 절을 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출소해서 한국까지 온 마당에, 여전히 벌레의 삶을 살 수는 없었으니까. 멜라니에게 벌레 취급을 받아서는, 죽은 존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으니까. 무작정 택시에 올라타서 가까운 스님…… 절로 가주세요.”라고 말했다. “한국 말 잘 하네요. 어디서 왔어요?”라고 택시기사는 되물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인들은 확실히 미국인들보다 비효율적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절하는 법을 배울 거예요.” 그제야 택시기사는 맨발에다 이마에서는 피를 흘리는 내 모습에 눈치 챈 모양이었다. “저 손님, 미안하지만……미소를 지운 그가 머뭇거렸다. 지갑에 든 만 원짜리 지폐를 보여준 다음에야 택시는 출발했다.


절을 하는 법을 배우러 왔어요.” 스님들은 놀라면서도 산발머리의 외국인 여자에게 잘 오셨다고 말했다. 나는 결코 환영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반복해서 말했다. “절하는 법을 배우러 왔어요.” 스님들이 내게 차를 권했기 때문에 나는 또 다시 말해야 했다. “절하는 법을 알려주세요.”


그 날부터 백팔 배를 하기 위해 매일 아침 절에 나가기 시작했다. 비구니들만이 사는 작은 절이 나로 인해 술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님들은 매번 떡이며 차, 국수 따위를 권했지만 나는 언제나 거절했다. 내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냉장고의 말을 듣게 해주세요. 냉장고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며칠이 지났을까, 유독 많은 신자들이 절 마당에 모인 게 보였다. 주로 중년 여성이었지만, 간혹 비슷한 또래인 남자들도 눈에 띄었다. 다들 한 방향으로 탑 주위를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들 위로 낯선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지만 한자라 읽을 수가 없었다.


탑돌이라고 하지요. 자녀의 대학 입학을 기원하는 행사랍니다. 수능시험이 앞으로 백 일 남았거든요.”


스님 한 분이 설명했다. 그 친절이 무색하게도 내가 궁금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탑을 돌면서 그들은 절을 하고 있었다. 몇 발짝 걷다가 말고 주저앉아 절을 올리고 다시 일어서서 탑 주위를 돌다가 다시 절을 올리고…… 이런 반복이었다. 흡사 어떤 방향성을 가진 좀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스님은 다시 설명했다.


저건 삼보일배라고 한답니다. 세 발자국 걸을 때마다 절을 한 번씩 하는 거지요. 절을 하면서 간절히 기원하는 거예요.”


꼭 살아 돌아온 존을 본 것만 같았다. 중년의 그들 모두가 나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낸 존, 아니 여럿의 존들이었다. 나는 그 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 발자국 걷고 절 한 번. 또 세 발자국 걷고나서 절 한 번. 저마다의 박자에 서로의 걸음이 엉켰다. 그러나 맨발에 닿는 화강암은 따뜻했다. 나는 존이 되었다.


 

*


 

피곤해 보이는 장 형사는 의자에 늘어져 있던 자세 그대로 현욱을 맞았다. 의례적인 인사는 없었다. 다짜고짜 무슨 사이요?”하고 물었다.


남편입니다. 일 년 전까지.”


현욱은 장 형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을 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기정사실을 일부러 거부하려는 듯이.


그레이스는, 살아 있는 겁니까.”


아주머니 얘기가 미쳤었다 하대. 부인, 아니 그러니까 그레이스 씨가 세 들어 살던 방주인이 있잖소? 근데 그 방주인 친구 분이 말요, 그 아주머니가 고 앞에서 편의점을 한다더군. 외국인이고 눈에 띄고 아무튼 이것저것 특이해서 지켜봤다고 하더라고.”


앳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현욱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자리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부인, 아니 그러니까 그레이스 씨가 삼보일배…… 뭔지 아시는지 모르겠소만. 얼마 전부터 똑바로 걷질 않고 그 삼보일배만 하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는 거야. 그래서 다들 미쳤다고 동네에서 수군거렸다고 하더군.”


현욱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지만 분명 답을 구하는 과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거야말로 아주 확실한 답일지도 몰라. 현욱은 마음을 다잡으며 선고를 기다렸다. 모두, 그레이스가 거쳐 갔을 과정이다.


덕분에 눈에 안 띄게 되자마자 신고가 금방 들어오긴 했는데……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나올 생각을, 안 합디다.”


어디에서 말입니까?”


딱딱한 물음에 장 형사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현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단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따라오슈.”


경찰서 지하에 덩그러니 놓인 냉장고를 본 순간 현욱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냉장고가 등장하리라고 예상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시작은 냉장고였다. 그러므로 끝도 냉장고임이 타당하리라.


하얀색 냉장고가 현욱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절대자처럼 여겨졌다. 다스베이더 생각이 났다. 대학 동기들이 그레이스를 볼 때마다 놀리듯 웅얼거리듯 스타워즈의 테마곡. 그 멜로디에 맞추어 지옥을 향해 걸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쉬이이익, 거친 숨소리마저 냉장고는 다스베이더를 닮아 있었다.


세상에는 별별일들이 다 많으니까 말요. 과학이니 상식이니 이런 걸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경찰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 둘쯤은 겪는다 이 말이오.”


장 형사가 천천히 냉장실 문을 열었다. 쉬이이익, 냉장고가 다시 거친 숨을 토해냈다. 문 안쪽에서 그레이스가 현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장고 모양 그대로, 네모나게 굳어버린 그레이스가.


장정들이 나서서 꺼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올 생각을 안 하니 뭔가 사연이 있으려니 했지. 그래서 기다린 거요.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말하고 장 형사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현욱은 냉장고 문을 활짝 연 채 우두커니 서서 냉장고 안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평안해 보이는 표정. 그녀가 이런 얼굴을 하는 사람이었나. 이런 표정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비로소 그레이스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구나. 균열을 멈추기 위해 화강암은 똘똘 뭉쳐 더욱 단단해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구나. 오랜 시간 나의 화강암은 이렇게 단단해지는 방법에만 익숙해져 있었구나.


시작이 뭐였을까? 애기보살? 아기? ? ? 아니면 토머스?”


속박에 맞추듯 각이 진 그녀의 시신 앞에 쪼그려 앉으며 현욱이 중얼거렸다. 오래된 냉장고 냄새가 났다. 가만히 끌어안았다.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륵 풀리며 미끄러져 내려왔다. 현욱은 그런 그녀를 토닥였다. 이제 괜찮아. 삐리릭. 냉장고가 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