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이럴 거면 차라리 아빠랑 이혼해!”
쾅- 문을 닫고 들어오니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며칠 째 반복되는 전쟁. 답은 없다. 답이 없는 걸 알면서도 답을 찾기 위해 엄마와 나는 또 싸운다.
한 달 전 쯤 이었나, 날이 조금씩 더워질 무렵 엄마는 친구가 소개해준 부업을 해보겠다며 선풍기를 팔기 시작했다. 자신이 먼저 써봐야 팔 수 있지 않겠냐며 사오던 선풍기는 하나 둘씩 늘어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깟 선풍기가 평온했던 우리 집에 몰고 올 파장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야자를 마친 나는 집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늦게 출발한터라 배가 고팠지만 집에서 밥을 먹을 생각으로 나를 위로했다. 예전보다 무더운 날씨에 조금이라도 시원해지기를 바라며 열심히 손부채질을 해봤지만 더위는 식을 줄을 몰랐다.
“다녀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나는 옷을 갈아입고, 빨랫감을 모았다. 밥을 먹기 위해 엄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이란 방은 다 찾아봤지만 엄마는 집에 있지 않았다. ‘전화를 한번 해볼까.’ 고민을 했지만 당장에 밀려오는 배고픔을 참지 못한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시간이 좀 지났는지 살짝 식은 밥과 맛있게 먹으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엄마는 어딜 간 거지?’ 의아하다는 생각도 잠시, 배고픔을 참지 못한 나는 차려진 밥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몰라. 그냥 좀 늦는다더라.” 간식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하던 사이 띠리릭-하는 도어락 소리가 들리며 엄마가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신경을 많이 쓴 듯 한 옷차림과 꽤 큰 키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구두, 오랜만에 한 화장까지. 엄마의 이런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아무 말 없이 나간 행동에 짜증이 먼저 솟구쳤다. “어휴 술 냄새!! 아무 말도 없이 어딜 갔다 온 거야?” 나의 짜증 섞인 물음에 엄마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엄마 동창회 좀 다녀왔지~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얘기하다 보니까 좀 늦었네. ” 빙그레 웃으며 씻으러 들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던 아빠는 혀를 쯧쯧 차셨다. “여자가 집에 일찍 일찍 들어와야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 원…….”
엄마가 씻으러 들어간 후, 아빠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씀하셨다. “지윤아, 자고로 여자는 집에서 남자가 벌어다준 돈으로 먹고사는 게 제일 행복한 거야. 내가 가부장적이니 뭐니 하면서 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밖에 나가면 여자는 아직 무시 받는 존재로 인식돼서 취업 하나 하기도 힘들어. 아무리 남녀평등 외쳐봤자 지하철 의자 색만 바뀌지 실제로 양보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내가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야. 잘 새겨들어.” “하하……네 알겠어요……”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왔고, 자연스레 이야기가 끊겼다. 나는 TV를 보다말고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 여자는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사는 게 좋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아가는 게 더 좋은지 말이다.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취업난이다 어쩐다 해서 암울하기도 한 현실과, 여성의 취업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회사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방송들까지 나온다. ‘어쩌면 여자는 사회생활을 하기보다 집에 있는게 훨씬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할 문제지만 고3인 나에게는 아직 너무 먼 미래일 뿐이었다.
“여보, 나 부업 시작해보는거 어떻게 생각해요? ” 머리를 말리던 엄마가 아빠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갑자기 웬 부업? 애들은 어쩌고? ” “아니 오늘 동창회에 갔었는데 혜선이가 추천을 해주더라고요. 기억나죠? 예전에 나랑 제일 친했던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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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경아! 너 혹시 부업해볼 생각 없어? ”
“응? 갑자기 웬 부업? ”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이번에 선풍기를 새로 만들어서 판매를 해보려고 하는데, 시범적으로 3개월 정도만 하려고 하거든. 이벤트성이라 우리가 하기에는 회사일이 당장 급한 게 있어서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해볼 생각 없나해서.”
“에이..내가 그걸 어떻게 해. 집안일에 애들 뒤치다꺼리에, 남편도 신경써줘야해.”
“이거 그렇게 어려운거 아니고 집안일 하면서 앞집이나 옆집에 가정방문해서 팔아도 되는 거야. 어차피 정식판매도 아니고 시범판매라 실적도 별 상관없어. 곧 있으면 날 많이 더워져서 수입도 꽤 괜찮을 거야. 생각해보고 혹시라도 해 볼 마음이 생기면 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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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여름이라 조금씩 짬날 때 해보면 꽤 괜찮을 거 같지 않아요? 가끔씩 이걸로 번 돈으로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면 좋잖아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내가 버는 돈이 부족해서 그래? 왜 이렇게 돈을 밝혀! 여자는 그냥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생활하는 게 최고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애들이나 잘 봐!”
여자가 일을 하는 게 돈을 밝힌다고 생각이 되는 건지 아빠의 기분이 꽤 불쾌해 보이는 채로 대화가 끝났다. 엄마는 아빠의 호통에 대답이라도 하듯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개교기념일인 나와는 달리 동생은 학교를 갈 준비로 분주했고, 아빠는 출근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분주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여보! 내 USB못 봤어?” “엄마! 나 양말좀 가져다줘!!” “당신 USB 가방에 넣어 놓지 않았어요? 성윤아, 양말 여기다 둘게. 다들 와서 밥 먹어요!” 식탁 위에는 정성스레 차린 아침상이 놓여 있었다. “성윤이 너 오늘 수행평가라며, 빨리 와서 밥 먹어. 당신도 밥 먹어요~” “학교 늦었어! 지금도 택시타고 가야해!” “나도 그냥 갈게 여보!” 아빠와 동생이 급하게 뛰어나간 후에 엄마의 한숨과 함께 주부의 일상이 시작됐다. 가족들이 먹지 않고 남긴 밥을 먹고,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개고, 분리수거를 하는 등 집안일을 하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나에게 밥을 차려주고, 장을 보고, 친구를 만나러 잠시 나가는 일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저녁이 되고 아빠가 집으로 들어오자 엄마는 저녁준비로 다시 분주해졌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주말이 되자, 모두들 피곤했는지 오전 12시가 되도록 늦잠을 잤다. 아빠가 부스스하게 일어나더니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밥도 안차려주고 남편을 푸대접한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급하게 아침밥을 차렸다. 밥을 먹고, 나와 TV를 보며 쉬고 있는 아빠를 뒤로하고 엄마는 집안 청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바닥의 얼룩을 지우느라 열심히 움직였고, 벗겨진 페인트질을 다시 하기도 했다.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저녁시간이 다가왔고, 엄마는 부랴부랴 장을 보러 나갔다. 간만에 보는 고기반찬에 우리들은 기뻐하며 먹었고, 엄마는 아까 미처 다 하지 못한 뒷정리를 시작했다.
“아이고, 힘들다. 여보 이거 불이 나간 거 같은데 전구 좀 갈아줘요.” “어유, 전구 가는 방법도 몰라? 당신은 좋겠네~ 주말에 이렇게 도와주는 남편도 있고. 고마운 줄 알아~” 아빠의 말에 엄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나와 아빠에게는 한가로웠던 주말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모두가 모여 같이 식사를 하는 날이다. 기숙사에 사는 동생도 일주일 만에 볼 수 있었다. “우리 성윤이는 되게 오랜만에 보네. 요즘 학교에서 지내는 건 좀 어때?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지?” “응. 엄마도 그동안 잘 지냈어?” “엄마야 뭐.. 평소처럼 지냈지. 아 맞다. 여보, 오늘 인터넷에서 식기세척기를 저렴하게 팔던데 하나 사는게 어떨까요?” “식기세척기는 왜? 설거지하면 되는거 아냐?” “설거지가 은근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다른 일을 하는게 빠듯하기도 하고, 갖다가 넣어놓으면 씻어주니까 편하잖아요~” “오, 엄마 그거 사자!! 그거 살균도 해주는거 아냐? 친구네 집에 있는거 봤어!” “성윤아 너는 어때?” “나는 딱히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기숙사에서 살잖아. 집에 오는 날도 일주일에 한번뿐인데.” “그냥 당신이 설거지해. 양도 많지도 않구만. 왜이리 게을러졌어?” “여보..나 집에서 빨래에 설거지에 아침에 어지른 물건정리, 청소기, 걸레질.....끊임없이 집안일 하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고작 식기세척기 하나 사려는 건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당신은 그래도 집에 있잖아. 나는 회사에서 윗사람들한테 깨져가면서 쉴 틈 없이 일하고,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열심히 돈벌어다주는데, 남편이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가지고 겨우 설거지하는 데에다가 쓴다고? 이게 말이 돼? 사지 말라면 사지마! 그렇게 사고 싶으면 당신이 돈 벌어서 사.” “아빠..일주일 만에 보는 건데 화내지 마요. 엄마도 그만하면 알아들으셨을거에요.” 냉담한 분위기가 감돌고,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는 시선만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알았어요. 안 살게요.” “그래, 그래야지.”
일주일 만에 옹기종기 모여 나눈 대화는 오래가지 않아 끝났고, 다시 서로의 할일에 집중했다. 다음 주에 돌아올 하루를 기다리면서.
“지윤아, 엄마 부업이나 해볼까?” 공부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방문을 연 엄마의 질문이었다. “엥? 갑자기 웬 부업? 저번에 아빠가 하지 말라고 했던 그거?” “응..그거긴 한데..우리 집 전세 대출금이 조금 남기도 했고, 매일 집안일만 하기도 무료해서. 부업하면서 돈 벌면 그걸로 맛있는 반찬도 해먹고, 가끔씩 영화도 보러가고하면 좋지 않을까?” “무슨 일을 하는 건데?” “선풍기를 판매하는 일인데, 실적이나 이런거에 크게 상관이 없대. 부업으로 하는 거라 주변에 가정방문해서 팔기만 해도 된다 더라. 가격도 싸기도 하고 요새 한창 더워서 선풍기를 팔면 수입이 꽤 괜찮을거 같아서.” “음..괜찮을 거 같긴 하네. 정 하고 싶으면 해보든가. 친구가 소개해준 거니까 이상한 건 아닐 거야냐. 아빠한테 걸리지만 마.”
전업주부였던 엄마의 단조로운 일상은 나와 대화를 나눴던 그 날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며 지었던 무심한 표정이 한층 생기가 도는 얼굴로 바뀌었고, 평소에 잘 느껴지지 않았던 당당함이 그녀의 주변에 맴도는 듯 했다. 분명히 친구가 소개해준 부업이 원인이겠지만, 썩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 일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엄마가 돈을 번다는 사실이 아빠의 부정적인 모습에서의 탈출구이자, 아빠와의 저번 대화에서 가졌던 궁금증의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여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엄마의 선풍기 판매는 꽤 인기가 많았다. 다른 선풍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임에도 그 성능이 뒤쳐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우리 집에도 엄마가 팔고 있는 선풍기 2대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부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엄마는 예전에 비해 좀 더 자주 맛있는 반찬들을 차려줬고,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이벤트성인 판매임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좋아서 보너스를 받았다며 나에게 전자사전을 선물하기도 했다. 부업의 시작이 우리 집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예전보다 집안에 더 신경을 쓰고, 가족에게 열심히인 엄마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빠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받아들였고, 더 헌신하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가끔씩 식탁의 반찬이 왜 이 모양이냐며 화를 내기도 했고, 리모컨이 더럽다며 투덜대기도 했다. 아빠의 잔소리가 점점 늘어가고, 엄마가 집안일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부업은 엄마의 유일한 탈출구로 바뀌어갔다. 집안일을 하고 잔소리를 들으면서 굳었던 표정이 부업을 한 날이면 다시금 미소 짓는 표정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매를 하는 일에 점점 능숙해지고 수입이 계속 늘어가자 엄마는 그 부업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도 되는 듯이 행동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 회사에 정직원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면서 집안일을 뒤로하고 선풍기를 파는 일에 매진했다. 집안일보다 부업이 우선순위가 돼 버린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하는 일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점점 저녁을 차리지 않는 날이 많아지더니 밤이 늦어서야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6시였던 시간이 8시, 9시… 11시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예전에 비해 굉장히 활기차 보였지만 그건 딸로서 환영할 만한 활기참이 아니었다. 사탕의 맛을 모르던 아이가 엄마 몰래 사탕을 훔쳐 먹고는 그 맛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사탕을 손에 넣으려고 할 때의 설렘이 느껴졌다.
학교를 갔다와도 내가 먹을 밥은 더 이상 차려져있지 않았고, 집 안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내가 조금씩 청소하고 정리하는 행동을 제외하고는 집은 변화하지 않았다. 아빠가 요새 집이 왜이리 더럽냐며 화를 낼 때마다, 엄마보다는 내가 더 초초해졌다. ‘아빠한테 걸리면 어쩌지’라는 생각보다 엄마의 활기찬 모습을 지켜주고 싶다는(어쩌면 그때의 궁금증을 풀어야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
결국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엄마가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자 화를 참지 못한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당신, 요새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집에 신경을 안쓰는거야?” “저번에 이야기 했던 부업 시작했어요.” “뭐? 그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말이 말 같지가 않아?” “내가 당신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해야 되고, 하라고 하는 건 해야 되는 강아지에요? 나는 애완동물이 아니에요!” 서로의 언성은 점점 더 높아졌고, 날카로움이 극에 달해있었다.
“그래. 당신은 애완동물이 아니야. 근데 지금 상황을 봐! 이게 정상적인 집안 꼴인가!” “내가 집안일에 신경을 못 쓰면 당신이 애들이랑 같이 하면 되잖아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손 하나 까딱 안하고 내 탓을 할 수가 있죠?” “뭐? 지금 나보고 집안일을 하라는 거야? 당신 미쳤어?” “왜요? 당신은 집안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 조금이라도 도와준다는 말은 하질 않는군요!” “하..정말 말이 안통하는구만. 됐고, 그거 당장 그만둬. 지윤이 너는 거기서서 뭘 쳐다보고 있는 거야! 당장 방에 들어가!”
활기찼던 엄마의 모습은 점차 광기로 차올랐다. 선풍기를 팔아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듯 했고, 가끔씩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엄마는 점점 이상해졌다. 처음에는 작은 부업을 구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회사의 정직원이 되었다며 매우 즐거워했다. 업무라고는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선풍기를 팔려고 하는 행동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응원하는 마음이었지만 더 이상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2대로 시작했던 선풍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양으로 집 안을 가득 채워갔다.
선풍기의 판매는 가정 방문에서 주위 친척들, 아빠의 회사 동료들, 엄마의 친구들, 심지어는 우리 집에 놀러오는 나의 친구들까지도 붙잡으며 계속됐다. 동네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지나가던 어른들이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을 시작할 때 쯤 아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집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면 적당히 하고 집안일이나 해야지 어딜 여자가 가당치도 않게 일을 하고 그래!!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엄마는 아빠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애들은 자기 할일 잘 하고 있고, 당신도 잘 출근하고 있으면서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집안일 빼고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있나요? 당신은 그래도 회사 다니면서 직장 동료들이랑 술도 마시고 스트레스도 풀고 오지만 난 아니라고요! 난 항상 집 안에서 애들 밥 주고, 치우고, 정리하고! 난 식모가 아니에요. 제발 날 좀 내버려두면 안돼요? 그렇게 애들이 걱정되면 당신이 신경을 좀 더 써요.”
엄마는 아빠와의 싸움이 잦아질수록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었다. 이틀에 한번, 일주일에 두 번, 한 달에 세 번꼴로 그 기간이 늘어갔다.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는 나는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부모님이 학교에 방문해서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동생은 어리고 기숙사에 살기 때문에 뭘 모른다고해도, 화만 내는 아빠의 태도는 무책임 그 자체였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점점 더 줄어들어도 아무도 엄마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설득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가족 간의 틈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 상황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모두가 방관자가 되었다.
엄마는 직장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프로젝트의 발표를 맡게 됐다면서 가족들을 초대했다. 이 프로젝트를 들어보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아빠는 무척이나 화를 내며 초대장을 집어 던졌다. 나는 걱정이 되는 마음과 화난 마음을 간직한 채 발표를 들으러 엄마에게 향했다. 엄마의 발표에서는 당당하고, 진지하며, 진심으로 그 일을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만큼은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엄마의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 내용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물건을 쉽게 파는지에 대한 내용의 다단계였다. 자신은 처음에 부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직원이 되었다며 자랑했고, 이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를 설명했다. 집안에서 느꼈던 모멸감과 부끄러움, 우울함을 이 일 덕분에 극복해냈다며, 제 2의 인생을 얻었다고 말했다. 자신감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는 엄마에게 더 이상의 걱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봐도 아빠가 심할 때가 많았고, 동생은 집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도 내가 필요할 때만 엄마를 찾았던 일이 많았기에 더욱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가 하는 그 일이 다단계이기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발표를 기점으로 엄마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엄마. 나는 엄마를 불러 세웠다.
“엄마.. 엄마는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거야?”
“......”
나의 물음에 엄마는 대답을 하지 못했고, 나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나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지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3이야. 지금 나는 엄마가 주는 사랑이 너무 필요해. 근데 지금의 엄마는 선풍기를 파는 일에 대한 열정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 평소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익숙해져서 엄마가 가끔씩 집에 들어올 때면 이 시간에 누가 온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계속 이렇게 된다면, 시간이 더 지나면 엄마 얼굴도 까먹지 않을까?”
엄마는 꽤나 놀란 듯 한 모습이었지만, 이내 다시 차분해졌다. 몇 분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엄마는 힘들게 입을 뗐다.
“지윤아.. 엄마는 너도 소중하고 우리 가족도 소중하단다.. 하지만 난 집에 있으면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어. 마치 새장에 갇혀서 노래를 부르는 새처럼 말이야.. 하지만 나는 이 일을 하면서 행복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된 거 같아. 그러니 나를 조금만 이해해 줄래?”
“엄마.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냥 회사를 다니는 거면 내가 이해를 했겠지. 어쩌면 엄마 행복 찾아서, 하고 싶은 일 찾아서 나아가라고 그렇게 말했을지도 몰라. 근데 이건 하고 싶은 일을 찾기도 전에 어긋나버린거잖아.. 왜 다단계를 시작했어 왜.. 엄마가 다단계를 할 때, 우리 가족들이 받을 피해는 생각해보긴 한 거야? 조금이라도 생각을 해봤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지윤아! 다단계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하는 일은 다단계가 아니야. 내가 판매한 실적만큼 돈을 벌고, 실적이 좋으면 승진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니?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 나는 계속 하고 싶다 지윤아. 나는 거의 평생을 얌전한 딸로, 순종적인 아내로, 가정에 헌신하는 엄마로 살아왔어. 나는 이렇게 사는게 정말 당연한 건줄 알았어.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근데, 얼마 전에 동창회에 갔더니 다들 자기 직업이 있었고,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도 있더라. 어떤 사람들은 남편이 집안일을 한다면서 자기들이 한 요리보다 남편이 한게 더 맛있다고 자랑도 했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듣는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 후회스럽고 불쌍해서 눈물이 나더라. 그래서 친구가 소개해준 일 시작한 거고. 그걸로 나도 위안을 얻었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에 신경을 더 많이 쓰기도 했어. 근데 나한테 돌아온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더 잘하지는 못하겠냐는 볼멘소리뿐이었어. 내가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니. 그동안 내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은 없었고, 취미도 없었어. 나한테 남은 거라고는 오직 그 일밖에 없었단다. 내가 노력한 만큼 인정해주고, 보상을 해주는 유일한 곳이었어. 나는 거기에 의지를 했을 뿐이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 화가 났고,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엄마! 아무리 엄마가 좋고 행복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아무리 좋고 즐거워도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내 인생 찾겠다는게 그렇게 큰 죄니? 나도 좀 행복해지고 싶어 지윤아! 이 집이, 가족들이 너무 지긋지긋해!”
서로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높아지는 언성은 답을 찾을 수 없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지윤아! 난.. 난 지금까지 뭐였니? 그냥 집안 살림 하는 사람? 그런 거면 그냥 도우미 아줌마를 불러! 난 집안 살림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와 너의 아빠가 아침에 나가고 나면 나는 너희들이 어지른 물건들 정리부터 시작해서 온갖 집안일을 나 혼자 해! 수고한다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너희들은 건네주지 않았잖아. 지윤아, 난 너의 엄마이자 아빠의 아내이기 이전에 내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 너는 특별한 일 하나 없는 무료한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겠니? 나는 이 일 이 너무 행복해! 설사 이 일이 너희가 말하는 나쁜 일일지라도 말이야! 그러니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말고, 넌 너 할 일이나 알아서 잘하렴.”
그렇게 엄마는 집을 다시 나갔고, 한동안은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의 말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쁜 일을 하는 거라며 몰아붙이고, 우리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며 화를 내기만 했다. 괜스레 엄마에게 미안해졌다. 한번이라도 엄마를 생각하고, 말을 들어줬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해본다. 나는 지금까지 엄마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찬찬히 생각했다.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엄마의 소중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결국 나는 울음을 터트렸고, 혹시나 엄마가 듣게 될까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흐느꼈다.
새장에 갇혀 노래하는 새처럼 살아왔던 엄마. 아직도 나는 이 일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이 엄마가 원하던 행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몇 달 뒤,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상황 그대로를 모두가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여전히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 엄마이지만, 그 날 이후로는 우리 가정에 조금씩 신경을 쓰고 있다. 이렇게 답이 없는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엄마는 여전히 선풍기를 팔기 위해 집을 나선다.
이름: 박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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