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계절

by 구주 posted Jun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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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계절  



  춘앵 씨는 가림 막을 친 병상에 앉아 분장을 하고 있었다. 주사관이 박힌 손을 달달 떨며 그녀는 하얗게 분칠을 하고, 콧날에 짙은 음영을 그려 넣었다. 합병증으로 온 수전증이 아니었다면 더 완벽한 분장이 가능했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춘앵 씨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이제 나가봐도 좋아요. 

  분첩으로 콧등을 두들기며 춘앵 씨는 내게 말했다. 공들여 남장을 하는 춘앵 씨, 그러니까 나와 같은 암 병동에서 지내는 할머니를 멀거니 바라보다 나는 가림 막을 열고 병상 밖으로 나갔다. 세 명의 노파들은 병실에 조르르 모여 앉아 춘앵 씨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앵 씨를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그들 옆에 나는 어정쩡하게 앉았다. 비좁은 6인실 병동에서 춘앵 씨는 이젠 다 늙어버린 그들을 앞에 두고 마지막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춘앵 씨와 나는 지난 봄 이 병실에서 처음 만났다. 그 해 4월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비참한 달이었다. 번번이 거부당하던 영화의 크랭크업이 또 한 번 수포로 돌아가고, 장편  하나 제작하지 못한 채 스물아홉에 덜컥 암 진단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되었으니 위안을 가지라고 담당의는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미 초라해 질대로 초라해진 인생에 누더기 하나를 더 덧대는 것만 같아 더없이 괴로울 뿐이었다. 

  춘앵 씨는 나보다 먼저 암 센터에 입원한 환자 중 하나였다. 원래 춘앵 씨와 나 말고도 병실엔 두 명의 암환자가 더 있었는데, 벚꽃이 지기도 전에 두 사람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지고 병실엔 나와 춘앵 씨만이 남았다. 부모님이나 언니, 스텝 일을 같이 하던 동료들이 종종 찾아오는 나와 달리 그녀는 늘 홀로 병상을 지켰다. 춘앵 씨는 일일 드라마를 보며 조금 웃거나, 창밖을 내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를 제하고는 거의 무표정으로 누워 있곤 했다. 그녀가 올해 여든을 넘겼고, 이름이 ‘임춘앵’인 것을 알게 된 것도 병상에 붙어 있는 이름표 때문이었지 그녀에게 전해 들어 안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뭇잎이 초록색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색을 바꿔가던 초여름, 문병 온 이들이 들고 온 오렌지 주스나 호두과자 같은 것을 나누어 먹으며 나는 춘앵 씨와 조금씩 낯을 익혔다. 수액바늘을 꽂은 왼손으로 간식을 내미는 나를 보며 춘앵 씨는 수줍게 물었다. 

  아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아, 스물아홉이예요.  

  스물아홉이라…… 좋은 나이군요. 

  춘앵 씨의 병상에서 함께 호두과자를 까먹으며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예상 외로 걸걸한 중저음 톤의 목소리였다. 변성기를 지난 소년의 그것과도 비슷해 나는 조금 놀랐다. 

  할머니, 목소리가 정말 특이하시네요.   

  젊었을 적부터 목을 이렇게 가꿔서 그렇다우. 앞으로는 할머니 말고 춘앵 씨라고 불러 주세요. 

  그 말을 하며 춘앵 씨는 내게 윙크를 했는데 아마 그게 그녀의 버릇인 듯 했다. 늘 무표정으로 시간을 보내던 춘앵 씨에게 그런 표정이 있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으로 윙크를 하는 그녀를 보면 묘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은 아가씨 애인인가요? 보아하니 외국인인 것 같은데.

  춘앵 씨는 내 병상 벽면에 붙은 자비에 돌란의 사진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는 그녀에게 저 남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이곳에 입원하기 전까지 영화판에서 일했던 내 과거사를 춘앵 씨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럼 영화감독이군요. 라고 말하며 반색하는 춘앵 씨 때문에 나는 잠시 부끄러워졌다. 

  식당 섭외부터 교통정리, 시나리오 쓰는 일까지 모조리 도맡았지만 영화를 제작한 적은 없으니 나를 감독이라 칭하긴 어려웠다. 춘앵 씨는 호두과자 껍질을 벗기며 자신도 영화는 아니지만, 비슷한 업종에서 일한 적 있다고 말했다. 

  호시절이었죠. 아마 실없는 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나는 감독 양반이 부러워요.

  왜요? 

  얼떨결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겨울, 세상에 흔하디흔한 암이라는 질병의 고통은 내겐 몹시 버거웠고, 나이가 들수록 누추해지는 삶엔 진력이 났다. 입원 날짜가 길어질수록 퇴원을 하더라도 충무로에는 돌아가지 않기로 다짐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아질 것 없는 촬영 현장의 처우도, 시나리오가 든 가방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시나리오를 설득시키는 일도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춘앵 씨는 날선 내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기분 좋은 눈웃음만 지어보였다. 그녀는 부드러운 과자를 오물오물 씹다 이내 말을 이었다.

  감독 양반 나이 때는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줄 모르고, 소중한 줄 몰랐던 것들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것 같네요.   

  나는 한참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가 호두과자를 삼키며 춘앵 씨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뜨겁고, 무거운 어떤 것이 식도를 타고 서서히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 호두과자는 아니었는데, 내 자리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언지 알 순 없었다.   

   

  그 후부터 나는 자주 춘앵 씨의 병상으로 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결말이 가까워질수록 상황이 극으로 치닫는 일일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은 내 이야기를 춘앵 씨에게 시시콜콜 터놓을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한때 스물아홉의 나는 <파니 핑크>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다 언젠가 그런 남자를 만나 뜨겁게 사랑할 줄만 알았는데, 현실에서 그런 남자는 도통 나타나지 않고 관을 짜서 자신의 방에 두는 주인공처럼 죽음연습만 하며 살고 있다는 울적한 이야기. 춘앵 씨는 그런 투정을 유심히 들어주며 사려 깊은 조언을 덧붙이곤 했다. 낮고 섬세한 춘앵 씨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이상하게 안도가 되었다. 

  춘앵 씨는 왜 항상 듣기만 하세요.

  원래 나이 들면 다 이렇다우. 듣는 게 더 좋아요. 

  수다스럽게 떠드는 나와 달리 춘앵 씨는 늘 말을 아꼈다. 처음에는 원래 과묵한 편일 거라 가볍게 치부했지만, 항암약물 투여실에 부쩍 자주 들락거리는 그녀를 보며 암이 그녀의 생기를 서서히 사그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가 난데없는 부탁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저기, 감독 양반 부탁이 있는데…… 내 팬들 좀 불러줄 수 있나요? 

  일 분에 서른두 번 떨어지는 링거액을 말없이 보고 있던 내게 춘앵 씨는 나지막이 말했다.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그녀는 낡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수첩 두 페이지에 걸쳐 조숙자, 김진진 같은 낯선 이름들과 그 이들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가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게 내 팬들 번혼데, 이 이들한테 전화 좀 해줘요.  

  춘앵 씨가 힘겹게 말을 이어갈 때마다 성대에 삽입한 흡입관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그나저나 팬들이라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당황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눈을 찡긋해보였다. 

  춘앵 씨의 말에 따르면 한때 그녀는 국극 배우였다. 그 중에서도 장군이나 왕자 역을 주로 맡던 남장배우. 화장기 없는 춘앵 씨의 멀건 얼굴과, 환자복 위로 여실히 드러나는 앙상한 몸피로는 잘나가는 국극 배우였다던 그녀의 과거를 좀체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여성 국극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50년대 초 춘앵 씨는 처음 무대에 섰다. 그녀의 데뷔 무대는 <춘향전>을 각색한 창극 <옥중화>였는데, 그 공연에서 그녀는 남자 주인공인 이 도령으로 활약했다. 

  덩치도 우람하고 목소리도 좋아서 남자 역을 하면 잘 어울리겠다 싶은 배우가 있는데, 그게 나였어요. 처음 <옥중화> 주연을 맡을 때도 그랬죠. 연습생들이 하나씩 불려나가고 단장이 맨 마지막에 나를 호명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몽룡을 시키더군요. 도포랑 두루마기 걸치고 첫 대사를 치는데,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익숙했어요. 그 때부터 내내 남자 역할만 맡았죠. 내 목소리가 조금 남성스럽죠? 목소리도 그 때부터 몇십 년간 두껍게 내느라 이렇게 굳어버렸다우.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자신의 팬들이 그 공연부터 그녀가 은퇴할 때까지 내내 따라다녔던 골수팬들이었다고 덧붙였다. 

  공연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하면 나랑 옷도 머리 모양도 꼭 비슷한 이들이 떼를 지어서 따라오는데, 그럴 때면 은근 기세등등해지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기묘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도 많이 겪었어요. 납치라든가. 기습 키스라든가. 

  남자 분한테요?

  아니죠. 내 팬들은 거의 여성이었는데요?  

  그녀의 팬 중 남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어린 학생들이나 혼례를 치르지 않은 처녀 팬이 많았는데,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그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직접 전화를 해야 하는데 지금 내 꼴이 이래서 감독 양반한테 부탁하는 거라우. 오랜만에 거는 전환데 남세스럽기도 하고. 은퇴한지 이십년은 지났으니 그 양반들도 다 어떻게 됐을지 알 수가 없어요. 연락처만 주고받고 그 후로는 나도 그이들도 살기 바뻐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으니 몇 명이나 올지는 모르겠네요.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건네준 춘앵 씨가 병상으로 돌아간 뒤, 나는 구글 검색엔진을 통해 여성 국극에 대해 찾아보았다. 국극에 대한 카테고리는 예상 외로 협소했다. 특히 춘앵 씨에 대한 자료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는데, 오랫동안 검색을 이어가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발견했다. 

  1958년 5월에 발행된『신태양』단행본 283호 연예 면의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여성 국극 배우 임춘앵, 여성 팬과 가짜 혼례식 올려”한자와 한글이 혼재된 이 세로쓰기 기사에 의거하면 춘앵 씨는 그 해 여름, 다섯 명의 하객을 데리고 한 여성 팬과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주례와 사회까지 둔 채 절차대로 진행된 이 결혼식은 팬의 극진한 요구로 성사되었으며, 혼례가 모두 끝난 뒤 두 사람은 ‘국화도’라는 서해의 작은 섬으로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지면의 밑바닥에는 초점이 흐릿한 흑백사진이 두 장 실려 있었다. 한 장은 결혼 기념사진처럼 보였고, 다른 한 장은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의 사진 같았다.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검은 양장을 차려 입은 여자와 그 여자의 팔짱을 낀 또 다른 여자. 지금의 춘앵 씨와는 도무지 매치 되지 않는 남장 배우를 보며 나는 그녀가 말했던 호시절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보았다.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곧 접었다. 

  그녀들의 호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춘앵 씨가 가짜 혼례를 치룬 그 이듬해부터 여성 국극은 유신체제 아래 사이비 예술로 분류되어 국가적 지원과 보호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춘앵 씨는 그 후로도 꽤 오래 단체에서 공연을 한 것 같지만, 그 이후 행적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찌감치 은퇴한 뒤 이후로 생업에 종사한 것 같았다. 

  노트북을 덮고 나는 춘앵 씨의 병상을 넘겨다보았다. 춘앵 씨는 서너 시간동안 병상에 누워 항암제를 투여 받고 있었다. 그녀의 투약 시간은 여름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늘어났다. 얼핏 주워들은 담당의의 말에 따르면 다음 달에 춘앵 씨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항암제가 똑똑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춘앵 씨.

  윙크를 하며 고통을 감추는 춘앵 씨를 향해 설핏 웃어 보이며 나는 천천히 다이얼을 눌렀다.   

  

  춘앵 씨의 마지막 관객으로 온 노파들은 춘앵 씨가 분장을 마칠 때까지 모여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끼리도 오랜만에 만난 모양인지 서로 꼭 부여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시답잖은 과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크게 웃곤 했다. 그런 수런거림이 싫지 않았다.  그들의 높고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춘앵 씨를 기다렸다. 

  전화번호부에는 열 명 남짓 되는 팬들의 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그 중 살아 있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내 전화를 받은 그들은 전화를 끊지도 않고 한참동안 춘앵 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수화기 너머까지 그들의 설렘과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오래간 듣고, 행여 빠뜨린 사람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하며 전화를 이어갔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다이얼이 나올 때면 그 번호는 체크해두었다가 후에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춘앵 씨의 기억을 간직한 오랜 팬들을 전부 불러 모으고 싶었다. 

  그렇게 모인, 한때 춘앵 씨를 열렬히 사모했다던 그들을 나는 찬찬히 훑어보았다. 중국 청두에서 왔다는 노파도 있었고,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춘앵 씨가 그곳에 입원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노파도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오지 못한 다른 이들의 행적을 묻기도 하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 이들의 이야기를 하며 오래간 울기도 했다. 공들여 화장을 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세월의 고단한 흔적이 녹아 있었다. 

  영화감독이라고 했나요? 

  노파들 중 하나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노파는 품 안에서 빛바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장 배우를 가리키며 노파는 수줍게 웃었다. 

  우리 젊었을 땐, 장군님만한 배우는 없었어요. 

  사진 속 춘앵 씨는 액세서리로 치장한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료에서 본 여자와 노파가 내민 사진 속 여자는 닮아 있었다. 

  혹시 이 사진 속 여성분이 할머니세요?

  사진 속 여자를 가리기며 가짜 결혼식과 신혼여행에 대해 묻는 내게 노파는 사진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자료에서 본 가짜 결혼식 사진이었다. 

  진짜 여성 국극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미어터져라 왔어요. 표를 못 구할 정도로. 결혼할 때 배우자한테 ‘내가 좋아하는 이런 언니가 있다. 이해를 해줄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결혼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여자예요. 장군님하고 혼례까지 치렀으니. 기자는 우리가 국화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적어 놨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결혼식을 마치고 배를 타려는데 가는 배편이 없었죠. 장군님이 내 손을 꽉 잡고 다음에 다시 오자고 이야기하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그 이후로 딱 한 번 국화도에 다녀왔어요. 재작년 생일 때였나 그랬죠. 하루에 고작 서너 번 밖에 배가 운항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주변 풍경은 너무 달라져 있더군요. 좋은 펜션도 여럿 생기고. 거기 편백나무가 많은 펜션이 있는데 그곳에서 남편과 묵었어요. 늦여름이었는데 매미가 울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올해는 이 남자랑 왔지만 다음에는 꼭 장군님이랑 와야지, 여러 번 생각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겠네요. 

  노파는 사진 속 춘앵 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인생을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그들은 춘앵 씨를 사모하던 그 때처럼 살아가겠지. 흑백으로 된 결혼사진을 보며 나는 노파들이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다. 

  요새 뭐 오빠 부대 그런 건 댈 게 아녀. 팬레터가 전부 혈서야. 장군님한테 결혼해달라고 그런 걸 보내는 거야. 나도 여성 국극이 너무 좋아서 그때 돈으로 2천을 들여서 아예 극단을 만들었어. 다 날렸지만, 그래도 하나도 후회 안 해.

  성님들 말 들으니 생각나네. 여자가 남장을 하고, 이가 하얘가지고 우리 고전 춤을 추는데 어찌나 환상적이었는지. 이건 감독 양반이 꼭 영화로 만들어야 돼. 

  노파들은 저마다 밀어 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깔깔 웃었다. 춘앵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자료를 통해 확인한 이야기들도 들렸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았다. 여성 배우들과 무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마성의 남장 배우와 패물을 훔치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며 공연을 보러 다녔던 팬들. 요즘 극장에서는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는 공연의 희열을 그들은 곰곰이 되짚어 말했다. 사진 속 하객들의 젊은 얼굴과 노파들을 번갈아보며 나는 숨을 죽였다. 그들의 새된 웃음소리가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병실 안을 떠돌았다.    


  가림 막이 드르륵,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 것은 그 때였다. 춘앵 씨가 가림 막을 열고 나오자 노파들은 말을 멈췄다. 하얗게 분칠을 하고, 휑뎅그렁한 흰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춘앵 씨가 병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짙은 분장으로 병색을 감춘 춘앵 씨를 보며 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춘앵 씨는 그들을 둘러보며 몇 차례 숨을 골랐다. 춘앵 씨의 표정은 담담했다. 세월을 거슬러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앞에 두고서도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녀는 노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살펴보았다. 변해버린 그들의 얼굴을 새로 익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들의 입가나 눈가에 새겨진 늙음의 결들을 바라보며 추억을 회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란스럽던 실내는 이미 숙연해져 있었다. 노파들은 춘앵 씨의 몸짓 하나라도 기억할 것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식 푯말이 달린 병상을 무대 삼아 춘앵 씨는 공연을 시작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코에 호스를 꽂은 채 춘앵 씨는 늠름하게 사철가의 한 대목을 열창했다. 광도 낮은 백열등이 쉴 새 없이 깜박였고, 그 때마다 춘앵 씨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병실이 어두워질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고수도, 너른 무대도 없는 암 병동에서 그녀는 고독한 광대처럼 보였다. 

  얼씨구. 

  가느다란 추임새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춘앵 씨가 창을 할 때마다 노파들은 나지막이 추임새를 넣었다. 얼씨구, 좋다. 그들의 추임새에 맞춰 춘앵 씨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한번 늙어지면 다시 올 줄을 모르는구나.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보소. 인생이 모도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산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1절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춘앵 씨는 노래를 멈추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걱정스런 마음에 엉거주춤 일어나는 노파들을 보며 그녀는 윙크를 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춘앵 씨. 가래와 해수가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 사이사이로 울음 섞인 노파들의 추임새가 들렸다. 높낮이도, 음도 달랐지만 그들의 추임새가 어설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발 된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 잔 더 먹고 덜 먹게 하면서 거드럭거리고 놀아보자. 

  노파들의 추임새에 맞춰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얼씨구, 좋다. 노파들의 추임새를 따라 하기는 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의 목소리만이 온전히 어우러지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다. 돌림노래처럼 춘앵 씨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노래를 부르는 대신 나는 손가락으로 사각의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들을 집어 넣어보았다. 노파들과 춘앵 씨의 얼굴에는 지나간 계절들을 추억하는 것 같은 표정이 서려 있었다. 지금처럼 노래하고, 사랑했을 그들의 젊은 날을 상상하며 그들을 오래간 손가락으로 만든 프레임 안에 담아보았다. 아름다운 컷이었다.  



  김구주/ rjawjdclak9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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