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

by 소소한끄적임 posted Aug 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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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하루를 선물한 J와 M에게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친구와 그녀의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어느 한 고깃집에서 나눈 그들과의 대화를 나는 잊지 못한다.


내 친구 M은 아르바이트가 끝난 나를 고깃집으로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친구 J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이라는 어색함은 금방 가지 못했다. 그녀도 나와 같이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나는 그녀와 달리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려하지만―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그녀가 써온 글들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블로그에 써놓은 그 글들을.

처음 읽었던 글은 구토와 관련한 글이었다. 그녀는 글에서 사르트르의 구토증을 읽고 있었다고 했으며, 자신도 구토증을 가지고 있다고 서술해놓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주인공과 달랐다나 뭐라나. 

그 글을 읽은 나는 그녀의 상당한 지적 수준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아는 것이 참 많았고, 그것을 아름답게 글 속에 녹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글은 나의 뇌리를 때리고 그곳에 자리 잡아 나를 괴롭혔다. 왜 난 이런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 세상에는 왜 이리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나는 자괴감의 늪에, 나의 글에 대한 회의감의 심연 속에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우연히 보게 되었던 Y라는 소녀의 글도 날 그렇게 만들었었지.

술잔과 함께 대화가 오고갔다. 그녀는 내게 수많은 책들을 추천해주었다. 예를 들면, 양철북이라든가, 양철북이라든가, 양철북이라든가…. 다른 책 이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녀의 글이 주었던 충격이, 그리고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 내 정신을 좀먹고 있었던 알코올이 그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어버린 때문일 테지.

그리고 M은 J에게 나의 소설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현재 열심히 집필 중인 그 소설, 너의 의미에 관해서. 중간에 엄청 야한 장면이 나온다고, 야설을 쓰고 있다고 놀림조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J에게,

‘너도 그런 소설 쓴 적 있지 않았냐.’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J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일을 투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해준 이야기는 그날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때였다. 아침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아주 고요한, 정적의 교실에서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사각사각하는, 종이 위로 볼펜이든 샤프든 어떠한 필기구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가며 하얀 종이 위를 더럽히고 있는 그 소리들 속에, 사악, 사악 하며 책 넘어가는 소리가 불협화음으로 간간이 얹혀있었다. 그녀가 읽고 있었던 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초판본이었다. 초판본. 그녀는 초판본이라고 두 번 강조해 말했는데, 오역이 너무 심했고 외래어들이 잘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잘 읽어놓고.

그녀가 별다른 막힘없이 책을 읽어나가던 그때, 그녀의 눈이 검은 활자들을 쫓아가다 멈칫한 그곳에, 알 수 없는 어느 단어가 있었다. 바기나. 바기나…. 그녀는 영어가 오 등급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유추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영어 일 등급의 친구가 있었다. 이것을 재현하며 그녀는 추임새를 넣었다.

‘옳거니.’

그녀는 친구에게 바기나에 대하여 물었다.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것을 방해한 그 단어, 바기나. 그 때 그녀의 친구는―글을 쓰다 문득 든 생각인데, 그녀의 친구는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문맥을 살펴 그 단어를 추측해 나갔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입 모양을 보였다. 입을 오므렸다가 길게 찢는다.

‘보오-지이-’

보지. 그것은 보지였다. 천박하고 상스러운 그 단어. 그녀는 그때, 몸 속 깊이 솟구쳐 오르는 알 수 없는 희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고요하고 엄숙한 그 고등학교 삼학년 교실에서 그 침묵의 울림은 그 어떠한 것보다 강렬했다. 성당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나, 사찰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같은 느낌이었을까. 그 단어가 질이나 생식기 따위로 경건하게 포장되어 말해졌다면 그것은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익숙함에 대한 반항과 당위의 파괴가 가져다주는 그 짜릿함. 그녀는 그때 비로소 자유를 느꼈을지 모르겠다. 내게 이 이야기를 전하며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 이유를 미술과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카타르시스Catharsis. 비극을 감상함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감정이 해소되는 일이다. 나 또한 때때로 이와 같은 부류의 카타르시스를 느껴온다. 그것은 일상을 무너뜨리고, 남을 파괴하며, 나 자신마저 파멸로 이끄는 데에서 오는 희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행해지지 않기에 나를 더 아찔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행해질 수 없다. 행해져선 안 된다. 그래서 더욱 인간 내면의 본성을 건드릴 수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나간다. 유니폼 조끼를 입고 계산대 앞에 선다. 뒤로는 담배들이 줄과 열을 맞춰 꽂혀있다. 던힐, 메비우스, 레종, 에쎄, 보헴 시가, 디스, 말보로, 팔리아멘트 등등. 이름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진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담배들이 나오고, 사라진다.


백발의 노인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담배 줘. 뭘로 드릴까요. 저기 저걸로. 이거요? 고개를 끄덕인다. 사천 오백 원입니다. 라이터도. 저 쪽에 있으세요. 사천 구백 원입니다. 노인은 오천 원을 바닥에 내던진다. 오천 원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백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린 아이가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이거요. 이천 백 원입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고개를 끄덕인다. 할인, 적립 카드 없으세요? 고개를 끄덕인다. 꼬깃꼬깃 접혀 있는 갈색 지폐를 건넨다. 오천 원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이천 구백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팔에 문신이 가득한 중년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남성은 커피를 사들고 온다. 던힐 라이트 주세요. 육천 삼백 원입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할인, 적립 카드 없으세요? 잠시만요. 백팔십 원 할인 되셨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이십대 여성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물건을 잔뜩 사서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이만 구천 팔백 원입니다. 봉투에 담아주세요. 네. 여기 할인이요. 네, 이천 구백 팔십 원 할인 되셨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할인, 적립카드 있으세요? 봉투 필요하세요? 영수증 필요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할인, 적립카드 있으세요? 봉투 필요하세요? 영수증 필요하세요? 안녕합니다. 감사히 가세요.


어서 하세요. 봉투 있으세요? 할인, 적립카드 필요하세요? 영수증 오세요? 안녕합니다. 감사히 가세요.


혀가 꼬이고, 단어가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문장이 재배열된다. 그들은 웃는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서 오세요? 난 그들이 어서 오기를 정말로 바라는가. 감사합니다? 난 그들의 무엇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가. 안녕히 가세요? 난 그들의 안녕을 바란 적이 없다. 진심은 온데간데없고 가식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아, 물론, 모든 것이 가식은 아니겠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음성메시지를 녹음해 하루 온종일 틀어놓는 것이 더 효율적이리라.

나는 바코드를 리더기로 찍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가는 저 손님의 뒤통수를 리더기로 내리찍는 그 생각을. 그의 두개골이 부서진다. 피가 튄다. 하얀 대리석 바닥이 빨갛게 물들어간다. 문을 걸어 잠근다. 손님은 들어올 수 없다. 나는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부터 도피한다.

누군가 유리문 안으로 쓰러져있는 그 사람을 바로 옆에 있는 경찰서에 신고하겠지. 그들은 내게 들이닥쳐 수갑을 채운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지금 하는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미란다의 원칙을 고지하지 않으면 위법이니까. 그들은 나를 끌고 가 유치장에 가둔다. 진술서를 쓰게 하고, 정신감정을 받게 하며, 변호사와 대담하게 하고, 법정에 서게 하고, 감옥에서 생활하게 한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구속을 통해 날 옭아매던 이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J가 바기나Vagina에서 느꼈던 그 카타르시스를, 그리고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생각한다.

이것은 내게 카타르시스이자, 당위의 파괴이자, 자멸이다.


그저 그뿐이다.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씨발.



[카타르시스]

이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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