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차 창작콘테스트 [X와의 합주]

by 무즈엔무즈엔 posted Aug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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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와의 합주

 

 

 

 

 

 

1

 

 

 

  화창한 봄날이다!


  엄마가 사라졌다.


  나는 거실 발코니 앞, 엄마의 흔들의자에 앉아 옆집에서 들려오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있다. 건반 위에서 뛰노는 손가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나는 박자에 맞춰 의자를 흔든다. 새로운 오후, 평화로운 오후, 그러나 텅 비어버린, 슬픈 오후다. 엄마가 사라졌다. 나는 자유다......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학교를 나가고 학원수강을 빼먹지 않는다. 다음 달에는 기말고사를 볼 것이다. 변한 것이라 봤자 이렇게 한두 시간씩 봄볕을 쬐고 앉아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게 고작이다. 거실 벽에는 여전히 서울대 법대생이 된다!’, ‘대법원장 파이팅!’, ‘가난하고 학대 받는 자들의 구원자!’ 등등이 붙어 있다. 엄마가 사라진 후 다시 읽어보니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을 꿈꾸는 꼬마아이의 유치한 포부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을 꿈꾸고 있다. 전과 다름없이 압박감을 느끼며 공부한다. 일종에 관성에 법칙이랄까? 엄마의 작용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 나의 꾸준한 태도 때문에 아무도 엄마의 실종사실을 모르고 있다. 맞다! 나는 숨기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외롭고 슬픈 날을 한가롭게 만끽하는 게 낫겠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보고 싶지 않다. , 내가 일부러 시험지에 오답을 적어 넣어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법관이 아니라 범죄자가 된다 해도, 가슴아파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개운한 해방감! 비록 퇴폐적인 삶을 살 생각은 없지만...... 형체도 없는 자유를 위해 피를 감수했던 사람들을 나는 이해 할 수 있다.

옆집 피아노는 몇 번씩이고 같은 곡을 연주했다. 음반을 틀어놓은 것처럼 솜씨가 좋았지만, 능숙하게 건반 위를 뛰어다니다가도 맥없이 엉뚱한 건반을 눌렀다. 어려운 곡도 아닌데 다리가 꼬여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일단 멈추고 나서는 푸념이라도 늘어놓듯 한참 동안 음도 맞지 않는 분산화음을 두드려 댔다.

  나는 거실 피아노 앞에 앉아 먼지 쌓인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풀고 옆집에서 도중에 포기한 곡을 연주한다. 전축 바늘이 트랙을 긁으며 돌듯 내 손가락은 깊이 새겨진 추억속의 먼지를 긁으며 움직인다. 저장되어있던 음들을 현재로 불러낸다. 아주 어렸을 때 익혔던 건데도 생생하다. 당시 악보 옆에 씌어있던 손글씨까지도 또렷하다.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된다.’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또박또박 적어 넣은 글자들...... 재능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온 천재 피아니스트 소년을 보다가 엄마는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절망과 증오가 심장을 찢어놓는 울음이었다. 나보다 훨씬 어린 그 아이는 마약에 취한사람처럼 머리를 흔들며 베토벤 속에서 흐느꼈다. 엄마는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거실 피아노 앞에 세 시간째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쓸데없는 짓 그만둬! 밥만 축내는 딴따라 따위는 꿈도 꾸지 마! 그런 거 뚱땅 거리는 게 인류에 무슨 보탬이 되겠어? 너는 세상에다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해! 당장 집어 치우자 그런 날건달 같은 짓은......”

엄마는 원수의 관 뚜껑이라도 덮듯 거칠게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천둥소리를 내며 닫히는 관 속에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영영 갇혀버렸다. 이후로 내가 간혹 심심풀이 삼아 피아노 앞에 앉기라도 하면 엄마는 역겹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한 번의 실수나 머뭇거림도 없이 나는 곡을 완주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손목에 찍을 만 했다. 레슨 강사는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고 엄마는 너는 이 상막한 시대에 유일한 보물이야라고 칭찬하며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을 것이다.

  “나 잘했지요?”

  나는 벽을 향해 물었다.

  “, , , ,

  이런 대답이 돌아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제 말 들려요?”

  “, , , ,

  “들린다고요?”

  “! ! ! ! !”

  그는 칼로 파내듯 건반을 날카롭게 찍어 눌렀다. 나는 반대로 물어보았다.

  “내 말 안 들리지요? 우연히 그런 거지요?”

  “! ! ! ! !”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존재가 있다! 숨이 막히게 웃음이 나왔지만 눈물이 흘렀다.

옆집의 누군가는 방금 내가 완주한 곡에 다시 도전했다. 그러나 또 중간에 손가락이 꼬이며 멈춰 선다. 화음도 멜로디도 없는 자작곡을 퉁탕댄다. 슬프고 외로운 퉁탕거림, 이런 화창한 날씨에 어쩐지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이 곡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를 위로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이모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미리 바꿔 놓았어야 했는데 아차 싶었다. 이모는 나를 보자마자 쏘아붙였다.

  “전화기 꺼져있고! 넌 전화를 안 받고! 이 염병할 모자끼리 나를 따돌리는 거야 뭐야!”

  “엄마 여행 갔어.”

  이모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다소 누그러져 물었다.

  “무슨 여행? ?”

  “시험을 망쳤어

  “왜 또 시험을 망쳐! 열심히 했어야지. 네 엄마가 너만 바라보고 있는 거 몰라?”

  자식 없는 이혼녀인 이모는 이런 식으로 나에게 충고할 기회가 생기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 기저귀를 몇 번 갈아준 걸 이유로 자신 또한 나에 대한 지분을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듯 했다.

  “얼른 들어가서 공부해. 다른 건 신경 끄고. 어째 집이 엉망이 됐냐? 네 엄마도 참, 그렇다고 애 팽개치고 가긴 어딜 가 제가? 에이!”

  엄마와 이모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이혼녀였고, 정서적으로 불안정 했으며, 역청처럼 끈적거렸고, 타인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았다. 어릴 때는 엄마를 버린 아버지를 증오 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한다. 아버지도 엄마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를 때렸고, 재산에 상당부분을 엄마에게 빼앗겼고, 이혼했다. 엄마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여자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이모는 엄마 역할을 연기하는 게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주방에서 식기들을 달그락 거리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싱크대에 뭐가 이렇게 말라붙은 거야? 으이고! 아유 진짜!”

수세미로 싱크대를 억세게 문질러 대는 소리가 났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그날 밤의 분위가 떠올랐다. 한숨이 나왔다.

 

  그날, 엄마는 가채점한 내 시험지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려움과 수치심이 뒤섞이며 벼락이 내리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게...... 확실한 거야?”

  엄마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시험지에 적힌 결과를 재차 확인하더니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 턱 막힌 듯 숨을 멈추고 손아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시험지를 움켜쥐었다. 곧이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공부시간을 늘리는데 성적이 점점 곤두박질 쳐? ! 네가 이럴 수 있어?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그건....... 그 문, , 문제들이......”

  말보다 앞서 치고 올라오는 기이한 감정 때문에 목이 멨다. 눈앞이 어질어질 했다. 엄마는 내 머리끄덩이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핑계! 변명! 나는 너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했어! 그깟 방구석에 앉아 공부 좀 하라는데 그걸 못해줘? 네가 나한테 이래도 돼! 거짓말! 허튼소리! 네 애비한테로 가버려 이 새끼야!”

  끔찍한 힐난들! 내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날아오는 불붙은 화살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어느새 내 사랑의 힘은 비난의 힘보다 더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엄마의 손목을 비틀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엄마는 실핏줄이 돋아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한기를 느끼는 것처럼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 지금...... 네 애비랑 똑 닮았구나? ?”

  나는 울면서 엄마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뺨을 갈기고 뒤로 물러섰다.

  “악마새끼를 키웠어! 다 끝났어! 악마새끼를 내 새끼라고 키워놨어!”

  내 목구멍에서 괴물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거실장 위에 놓인 텔레비전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거실 바닥에 내리 꽂았다. 플라스틱 잔해들이 몇 개 튀어 올랐고, 액정화면은 거미집 모양으로 주저앉았다. 나는 울부짖으며 방으로 도망가 침대 위로 엎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절대로 방금 벌어진 일을 잊지 않을 것이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밖에서 식기들이 딸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쉴 새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중얼대고 있었다. 금속성의 마찰음이 번쩍 하더니, 엄마가 발을 쿵쿵 구르며 내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물건이 방문을 쪼아댔다. 합판이 찢기며 은빛 칼날이 방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엄마는 상처 입은 까마귀처럼 울부짖었다. 칼날 이전에 날선 감정이 먼저 내 방을 침범하고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칼끝으로 자신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에 대한 애정도 찢고 있었다. 그리고 집을 나갔다.

  다음날 아침, 햇살 가득한 엄마의 침실을 보며 나는 울었다. 아니면...... 웃었을 것이다......

 

  “칼은 또 왜 이래? 날이 다 나갔잖아. 네 엄마 또 칼 들고 설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는 책상 위에 과일접시를 놓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휴, 내 새끼, 너는 내 보물이야이모를 보자 엄마가 떠올랐다. 눈물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다시는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모자의 관계란 게 나에게는 너무 두렵게 느껴졌다.

밖에서 도어락이 삑 소리를 내며 잠겼다. 이모가 나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멜로디도 리듬도 없는 처량한 곡......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턱 끝에 짠물이 맺혔다. 손으로 눈을 틀어막아도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나와 책상 위로 뚝뚝 떨어졌다.

 

 

3

 

  나는 일부러 현관문을 큰 소리가 나게 연다. 책가방을 던져놓고 편안한 차림으로 갈아입는다. 피아노 앞에 앉는다. 문소리를 들은 옆집의 누군가는 어김없이 연주를 시작한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악보대신 노트를 펼쳐놓고 있다. 오늘 그의 언어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지한 자세로 그의 멜로디를 기록하고 내가 발견한 문법에 맞춰 한글로 옮긴다. 더디고 힘들지만 흥미로운 작업이다. 이렇게 즐겁게 나의 지성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마구잡이로 두드리는 듯한 그의 자작곡 속에서 일정한 패턴을 감지했을 때의 그 희열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늘 같은 곡만을 연주했던 것이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노트를 펼쳐 그의 곡을 해석하는 일에 착수했다. 곡의 첫머리에서 그는 를 누른 후에 낮은 음을 연달아 눌렀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노트에 세로획을 그었다. 그는 곧장 라와 한 옥타브 높은 라를 동시에 눌렀다. 내 손은 저절로 세로획 끝에 가로획을 덧붙였다. 노트에는 이 씌어져 있었다.

! 곡이 아니라 시를 쓰고 있었어요?”

도 레 미 파 솔

그가 대답했다.

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내가 원하는 만큼 같은 부분을 반복해주었다. ‘을 손쉽게 건져내긴 했지만 이후로는 어둠속을 더듬어 하나하나 맞춰나가야 했다. 모음과 자음이 어떻게 하나의 완성된 글자를 이루게 되는지, 한 글자에서 다른 글자로의 이행, 띄어쓰기, 쌍받침, 줄 바꿈, 의문문의 구분 등등 해결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나는 그의 곡에서 자음만을 모두 찾아냈다. 그리고 자음에다 모음들을 하나하나 대입해 하나의 문장을 추정해내야 했다. 다음에는 반대로 알 수 없는 음의 조합들을 내가 상정한 글자들에 대입해 패턴을 알아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도 레 미 파 솔

노트에 완성된 첫 문장을 읊자 그가 화답했다. 명백했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의 언어를 터득했다. 시간이 지나고 숙련이 되면 자판을 두드려 채팅을 하듯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었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 전에 그는 마이너 화음을 동시에 눌렀는데, 키보드 상에서의 엔터키에 해당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다음 문장부터는 알아낸 질서에 따라 손쉽게 번역되었다. 나는 행갈이를 하고 다음 문장을 적었다.

그녀는 나의 사랑, 나의 공포

행갈이.

나는 자유다. 그리고 울고 있네.”

행갈이.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지?”

나는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눌렀다. ‘도 레 미 파 솔

침묵이 감돌았다. 벽 뒤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 내 아내.

제 꿈 버리고 나를 택한 그녀.

자신의 짐 내 등에 지워준 그녀.

나는 노새, 그녀의 짐 등에 지고 달콤한 채찍을 맞았지.

그녀의 손길이 부어오른 내 등 어루만져주면

더 무거운 짐과 쓰라린 채찍을 요구하고 싶었어.

끝내 나는 노새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것을 알았다면 좋았을 걸,

내가 노새였다면 좋았을 걸,

번뜩이는 이빨이 내 눈에도 보였다.

찢어진 모가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보았다.

그녀는 어디 있는가.

내 사랑은 집을 잃었다.

등에는 그녀가 새겨놓은 채찍 자국 불타고 있고

무거운 짐 줄지 않고 그대로인데

나는 목적지도 모르면서 주인 없는 짐을 지고

꿈의 언덕을 기어오른다.

잠도 휴식도,

한 방울의 물도 없는 갈증의 가시밭길을......

 

나는 모두 해석했다. 모두 낭송했다. 정적이 감돌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 시를 똑같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땀에 젖은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파르르 떨렸다. 벽 반대편에서 수줍은 피아노소리가 들려왔다.

이 불쌍한 살인자를 친구로 받아 줄 수 있겠니?”

나는 내키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건반을 눌렀다.

우리는 이미 피를 나눈 사이인 걸 어쩌겠어요.”

그가 말했다.

너는 서울대 법대생이 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았죠?”

소리가 들렸지. 네가 나에 대해 아는 만큼 나도 다 알고 있단다.......”

 

 

 

4

 

 

섬뜩하다. 하지만 그의 언어를 배우고 대화를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와 세계와의 일체감을 느낀다. 모든 감정들이 긴밀히 결합되어 함께 물결친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참새들의 지저귐...... 소리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그들에게 공명한다. 한 행과 작별하고 다음 행으로 자리를 옮길 때 단조 화음을 누른다는 것은 얼마나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규칙인가.

저기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나를 향해 질주해 온다. 울부짖는 엔진으로 열망으로 요동치는 메이저 코드를 연주하며, 나를 들이 받을 듯이...... 하지만 스쳐가는 짧은 순간을 기점으로 저 멀리 떠나갈 때는 서글픈 마이너 음계를 뿌려놓을 뿐이다.

열망은 절망에 징조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도플러 효과라는 과학용어로는 껍데기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언어체계만이 현상의 알맹이를 제대로 나타내고 활용한다.

, 내 엄마! 엄마는 너무 시끄럽고 빨리 달리는 오토바이였다. 다가오던 때의 조급한 하이톤의 메이저 음만큼이나. 뒤에는 처절하고 괴기스런 마이너 음을 남겼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 나는 몇 번씩이나 열망과 절망의 문장을 읽는다. 이 세상 전체가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 또한 그것이다! 소리들이 내 머릿속에 글씨를 쓴다. 모든 소리들의 속내를 나는 느낄 수 있다.

 

기말고사를 봤다. 점수가 많이 올랐다. 등수도 틀림없이 올랐을 것이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나는 잠시 의기소침해졌지만 곧 자긍심을 되찾았다. 상대가 바퀴벌레나 쥐새끼라도, 더 많은 숫자를 이길수록 더 많은 자부심이 찾아온다. 나는 아직도 시험점수를 자랑할 사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50대의 이혼남으로 법대를 나왔고 사법고시에 끈질기게 도전해 여러 번, 거의 합격하기까지 했었다. 그의 아내는 그를 헌신적으로 보필했으며 그를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문제는 단지 그가 영웅이 아니었던 것에 있었다. 아내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고, 실망의 강도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가엾은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사랑하는 아내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법관을 꿈꾸던 그는 법에 처벌을 다 받고 나와 일생을 고독 속에서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건반을 눌러 나에게 말했다.

너를 응원한다. 네가 꼭 내 아들처럼 느껴지는구나. 내 꿈을 대신 이루어 주겠지? 너는 될 수 있을 거야

물론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할 것이다. 나는 그의 분신이 될 것이다. 나의 명예는 곧 그의 명예가 될 것이다. 만약 그에게 내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면, 성공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저절로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으며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한 손에는 깨끗하게 접은 시험지를 든 채였다. 한 남자가 내 옆에 와서 섰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를 알아보았다. 그의 허연 낯빛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음을 말해주었다. 어깨까지 닿는 헝클어진 머리칼, 덥수룩한 수염, 생각보다 키도 크고 뚱뚱했다. 내 키는 178센티미터로 작지 않았는데 그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쳐들어야했다. 하지만 삐뚤어진 체형 때문인지 건장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가 왼쪽 어깨보다 심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는데 책상에 오른쪽 팔꿈치를 기대고 장시간 앉아 있는 생활을 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곁눈질로 나를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만이 그 미소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장에 시험지를 펼쳐 그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역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모든 게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는 듯 말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몇 층 가세요?”

그가 물었다.

“12층이요.”

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12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18층을 눌렀다. 단 둘만 있을 때까지도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는 나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대법원장을 꿈꾸는 나에게 살인 전과자와의 친분이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12층에서 내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애정 넘치면서도 엄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그는 18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그를 기다렸다. 그는 18층까지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다 내려올 것이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빨리와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빨리요!’ 라고 반복해서 쳤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 내가 피아노 뚜껑을 열어놓고 집을 나갔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의 풍경이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현관에 놓인 신발들은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는 듯 했고, 화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엄마의 교육 덕에 습관적으로 화장실 문을 닫고 다닌다.

나는 도둑처럼 까치발을 들고 슬금슬금 걸어가 화장실문을 닫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엄마 방 문 역시 빼꼼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가 돌아왔다!’

은빛 섬광이 눈앞을 치고 지나가는듯하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엄마?”

대답은 없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방문을 슬쩍 밀었다. 그새 녹이 슬은 듯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얇은 커튼 위에 번진 햇볕이 주인 없는 침대를 살색으로 물들였다. 그동안 쌓인 먼지 냄새가 코밑에 끼쳐왔다. 방문이 열리는 파장에 의해 들고 일어난 먼지입자들이 날벌레떼처럼 빛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렇다면, 이모가 왔었던 것일까? 제기랄! 진작 비밀번호를 바꿨어야 했는데...... 나는 내 방으로 달려갔다. 책상 서랍이 열려 있었다.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이모가 손버릇이 좋지 않다는 건 엄마도 나도 알고 있었다. 슬쩍 집어갔다가 나중에 추궁당하면 되레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두 여자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엄마가 집을 비우자 이제 대놓고 도둑행세를 하는 것이다.

서랍 속 물품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쓰지 않는 휴대폰이 없어졌고, 또 노트 한 권이 없어졌다. 나는 다시 엄마 방으로 달려가 장롱문을 열었다. 엄마의 채취가 폐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켜켜이 걸려있는 털외투에서 묵은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콧속이 간질거리며 재채기가 나는 걸 참으며 서랍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았다. 사라진 건 없었다. 아니,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도둑년을 경찰에 신고해 버릴까!”

나도 모르게 평소 엄마가 내뱉던 대사가 튀어나왔다. 백 미터를 전력질주 한 것처럼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나는 거실로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이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혹시, 아버지가 다녀간 게 아니라면......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장이 왔다.

꼴좋구나!”

왔다가셨어요?”

, , , ,

그럼 도둑이 들었군요?”

아들아. 이 실패자야! 다 끝났다. 네 엄마가 네 꼴을 보면 뭐라고 하시겠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낳아놨다고 하시지 않겠니?”

뭐라고! 개색기야!”

다 끝났다. 네 애미가 불쌍하다. 그런 몰상식한 말을 쓰다니 혼나야겠구나!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 너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네 엄마도 실패한 여편네지! 부질없는 것을 낳아놨으니. 헤헤헤!”

이 살인자 새끼! 날 속였어! 경찰에 신고해버리겠어! 살인자! 혼자 사는 놈팡이! 인간쓰레기!”

다 끝났다. 이 패륜아야! 패륜아야! 난 다 알고 있지! 패륜아야!”

나는 주먹으로 피아노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손목이 잘려나간 것처럼 퉁퉁 부은 손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5

 

초인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건반 위에 엎드린 채 의식이 끊어졌었다. 악몽 속에서 버둥대며 깨어나보니 얼떨떨했다. 피아노 건반은 폭행당한 치아처럼 들쭉날쭉 튀어나와 있었다. 양 주먹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두통이 심했다. 나는 아픈 이마에 아픈 손을 얹은 채 비틀비틀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버튼을 누르자 화면 속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오동통한 얼굴에 중년 남자였다.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화면 밖에 있을 누군가와 나지막이 수군거리더니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가 그냥 가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계십니까!”

그는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엄포를 놓듯 초인종을 두 세 차례에 더 눌렀다. 그들이 좋은 소식을 전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귀찮게 구는 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대며 현관문으로 갔다. 문에 방범용 체인을 걸어둘 참이었다. 그러나 한발 앞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재빠르게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두 명의 덩치 큰 남자들이 내 양 옆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뒤쪽을 벽처럼 막아섰다. 화면으로 본 통통한 남자는 문틀에 팔을 대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 아저씨들이 왜 왔는지 혹시 아나?”

쉼 호흡을 한 번 하고 내가 대답했다.

엄마를 찾았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안 좋은 소식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꺽꺽 목이 멨다. 불쌍한 엄마! 희망하던 것 중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가엾은 여자!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다 제 탓이에요. 엄마가 집을 나간 것도....... .......”

애석한 일이구나....... 그런데 어머니랑 크게 다퉜었지 왜? 이웃집에서 경비실에 항의를 할 정도로 큰 소리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로 그랬는지 들을 수 있을까?”

성적 때문에....... 엄마한테는 저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 탓이에요. 전부......”

나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다. 그날 나의 버릇없는 행동과 언행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나에게 상처 받은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살해되셨어.”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범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기야 그가 범인이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몰랐나 보구나?”

누가! 누가 우리엄마를 죽였어! 누가!”

그는 침착했다. 모친의 사망소식을 아들에게 전하며 미소를 지을 만큼 침착했다.

그날 다투는 소리가 크게 났고,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하던데 말이야......”

그는 유감이라는 듯 깊은 숨을 내뱉었지만, 그 뻔뻔한 미소 때문에 코웃음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집 증언에 따르면......”

옆집! 그 개색끼!”

내가 소리쳤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모두 다 그가 꾸민 짓이다!

아저씨 지금 번지를 잘못 찾았어요! 옆집 그 남자예요! 맞아. 그 새끼야!”

그 남자라니?”

그 놈이요! 살인 전과도 있는 놈인데 조사도 안 해 봤어요? 쥐새끼처럼 전부 엿듣고 있었다고요! 자기 아내를 죽인 놈! 여성혐오자! 싸이코패스라고! 속았어! 나도 아저씨들도 속아 넘어갔다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노트도 있어요. 그 사람하고 대화를 나눴는데, 피아노로....... 모르스 부호 같은 건데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지금 이것도 다 엿듣고 있다고요! 빨리 잡아요! 그 놈을 잡으라고!”

옆집엔 신혼부부가 살지? 알고 있잖아 너도

신혼부부가 아니라고! 키가 크고 어깨가 심하게 삐뚤어졌는데, 아까 내가......”

저 남자 말이구나?”

그는 웃으며 한쪽으로 비켜서 시야를 터주었다. 바로 그 살인자가 비상구 입구를 막고 서서 웃고 있었다.

노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 말고는 아무도 알아먹을 수가 없겠더라. 거기에 대해서도 설명을 좀 해줘야겠는데?”

기가 막혔다. 모두가 한 통속이다. 이유는 모른다. 그들이 나를 속이고 있다.

이모님이 신고를 하셨어. 네 어머니가 실종되었는데, 네 행동이 수상하다고. 이미 다 철저히 조사를 해봤어. CCTV, 옆집 증언, 주방에 이 빠진 칼, 지문, 욕실 타일 바닥 틈에 남은 혈흔, 또 어머니 핸드폰이 네 책상서랍에서 발견되었는데, 너는 모른 체하고 있었지? 결정적으로 돌아가신 네 어머니가....... 그러니까 토막 난 사체가 말이야. 어머니 방 장롱에서 발견되었거든? 피가 말라붙은 네 교복 상의하고 같이 말이야. 목 뒤에 칼자국이 세 개가 나있었는데, 주방에 있는 그 칼로 당하신 게 분명해. 말해봐라. 범인이 누구겠니?”

여백에 식을 써볼 필요도 없는 쉬운 일차 방정식 문제였다. 웃음이 나왔다. 이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방정식으로 설명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내가 범인이네?”

나는 낄낄대며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래....... 그런데......”

그는 꼼꼼한 의사처럼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예상을 못한 것도 아니지만, 조사보다는 검사를 먼저 받아야겠구나?”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다 끝났다. 네 엄마는 쓸모없는 놈을 낳았어. 실패야! 망했어!“

안 끝났어!”

나는 미소 짓는 통통한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는 미소 지은 상태로 머리를 살짝 뒤로 뺐다. 썩은 두부처럼 파랗게 부어오른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나는 붕 떠서 뒤로 넘어졌다. 눈앞이 노래졌다. 두 덩치는 내 몸을 부침개처럼 간단히 뒤집어 팔을 뒤로 꺾었다. 철컥! 하고 마이너 음계를 흘리며 수갑이 채워졌다. 나는 순식간에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덩치들이 팔짱을 끼고 나를 끌고 갔다.

! 아퍼! 엄마한테 이를 거야! 기말고사 잘 봤단 말이야! 이 쫄따구 실패자들아! 나는 대법원장이 될 몸이야! 이거 놔! , 난 불쌍한 고아예요! 제발 내버려둬요! 엄마!”

미안

덩치가 속삭이더니 내 명치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숨이 턱 막히는가 싶더니 곧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6

화장한 오후다!

나는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본다.

왜 계속 해가 비추는 것일까? 끝장이 났는데도 모든 것들이 시치미를 떼고 진행된다. 기묘한 느낌이다. 나는 옆에 앉은 통통한 중년 남성에게 묻는다.

아저씨. 내가 누구죠?”

그는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려줄 뿐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왜 나는 아저씨가 아니라 나죠? 왜 저기 있는 저 사람은 내가 아니죠? 피아노를 친 사람은 누구죠? 이상하지 않아요? 왜 나는 저기 전봇대에 매달린 고압전선이 아니죠? 죽었다는 건 뭐고 살았다는 건 뭔가요? 고압전선은 왜 살아있다고 하지 않아요? 저 고압전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왜 체포하지 않죠? 유용함 때문에? 나를 풀어줘요. 고압전선만큼 유용하고 위험한 사람이 될 테니까!

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기도 하고 저런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하고. 사실은 착각이 아닐까요? 내가 엄마를 죽였다고요? 아니! 엄마는 있지도 않았지요! 형상이 있었죠. 엄마와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의 형상을 내가 찔렀어요. 그것도 틀렸어요. 엄마는 죽지 않았었어요. 방금 전에야 죽었을 뿐이에요. 내가 체포된다고? 나는 있지도 않았는걸! 안 그래요?

사실은 모두 동일인물이 아닐까요? 이런 저런 명사들이 늘어서 있지만 결국 그 무언가가 혼자서 쓰고 지우는 글자들이 아닐까요? 내가 지금 아저씨에게 묻고 있죠. 그런데 사실은 아저씨가 나한테 묻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아니죠! 이건 그냥 그 무언가에 혼잣말일 뿐예요!”

철학자가 되려나 보구나?”

어차피 다 끝났죠. 다 끝났지! 젠장 할, 그런데 왜 안 끝나냐고! 빨리 날 좀 죽여줘요!”

나는 옆머리로 차 유리를 가볍게 들이받았다.

아직 스무 살도 못 되었잖아? 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해?” 감옥에 갔다 와도 대법원장이 될 수 있어요?”

그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웃음을 치는 게 그의 버릇인 듯 했다. 아니면 직업병이거나.......

그래도 철학자는 될 수 있겠지......”

그가 말했다.

세계 최고의 철학자가 된다?”

나는 습관적으로 복명복창했다. 아직 죽지 않은 엄마와 함께, 나는 감옥에 간다.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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