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header134 posted Aug 0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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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불


수면 위의 파도가 고동친다. 빛이 튀어 오르고, 끝없는 폐허가 심해에 뒤섞였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희끄무레한 생명체들이 대지의 위장에서 신음을 내며 게으르게 기어들어갔다. 눈이 먼 늙은 고래가 스스로를 뒤덮은 검은 침묵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나라를 노래했다. 벌거벗은 인어가 길고 하얀 머리를 긴 동물의 뼈로 다듬은 뒤, 고래의 등에 난 커다란 혹에 자리 잡고 누웠다. 그에겐 푸른빛의 시간만이 보였으며, 썩고 변색된 쇠 냄새만이 진동했다. 인어는 고래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흐릿한 빛의 입김이 수면을 데우더니, 모든 것을 뒤덮었다. 고래는 노래를 마쳤다. 동이 텄다.

 

인어는 살며시 고래에게서 손길을 거두고 부식된 수정같이 거무튀튀한 도시로 유영했다. 가장 높이 선 도시의 첨탑들이 줄지어 잘린 목을 걸어두는 창처럼 흔들리는 수면을 찌르듯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인어는 그 둥그런 기이한 철심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잡기도 하고, 끌어안고 흔들어보기도 했다. 첨탑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늙은 장승처럼 서서 그것을 어두운 눈살로 지켜보았다. 다섯 개 너머부터는 물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인어는 곧 흥미를 잃고 더 깊은 곳으로 꼬리를 흔들어 헤엄쳤다. 각지고 둥근 건물들이 탈선한 비행선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요동치며 튀어나왔다. 옥상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의 언어가 벗겨진 비늘로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기하학적인 상징물들에 내장이 쏟아지고 관절이 뒤틀린 건물들과 가로등, 전신주들이 온통 기묘한 규칙성을 띄고 먼지처럼 쓰러져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거리는 물풀들이 점령했고, 나머지는 죽음 이후의 진공의 몫이었다. 인어는 길을 따라 가다가 어느 깨어진 유리창 너머의 좁은 방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들어가더니, 미끄러운 오징어라도 본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얼른 나왔다. 표지판과 간판엔 한때 의미를 가졌었던 지고의 존재들이 새겨져 있었고, 어떤 것 하나는 불처럼 생생하게 여성의 상반신을 묘사해내었다. 인어는 그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좁은 골목은 키가 큰 수초들이 마지막 절규로 끝까지 손을 뻗고 느리게 휘젓고 있었다. 큰 길 끝의 광장은 열수구들의 음울하고 소리 없는 담배연기에 스러져가고 있었다. 하얗고 희미한 바이올린 현 빛줄기는 새까만 금속의 표면에 굴절되어 조용히 삼켜졌다. 인어는 가는 빛줄기를 손으로 매만졌다.

 

전차는 지금껏 인어가 본 그 어떤 소라게보다 더 거대하고 견고한, 그리고 음침한 껍질을 가지고 지붕이 통째로 무너진 황폐한 정비소에 웅크리고 있었다. 전차의 꼭대기는 망둥어의 입처럼 길고 뭉툭한 포신 네 개가 자리 잡고 있었고, 네 개의 거미 같은 다리가 죽은 벌레처럼 아무렇게나 접혀져 뉘어있었다. 빛은 아주 잠시 동안 그 정비소 내부를 비추었고 빛을 삼킨 전차의 검은 껍질은 이내 완전한 심해의 어둠에 빠졌다. 인어는 아름다운 꼬리를 휘저어 그곳으로 향했다. 전차의 투명한 껍질에 인어의 호기심 어린 동그란 얼굴이 반사되었다. 인어는 자신보다 다섯 배는 큰 거대한 소라게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머리끝에 달린 안테나와 그 안의 물렁한 부분을 입으로 씹어보고, 포신과 다리를 잇는 관절 부분을 더듬고, 비비고, 때리고, 핥아보았다. 포신과 다리를 잇는 허리의 가운데 부분에서 갑자기 붉은 인공적인 빛이 감돌고 둔중한 다리들이 한꺼번에 움찔대자, 인어는 소스라치게 놀라 팔과 꼬리를 휘젓다가 벽에 세게 부딪혔다. 전차는 미약한 온기를 발산하며 갈피를 못 잡는 개미처럼 다리들을 버둥대고, 머리를 흔들어댔다. 전차가 그러하자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부식된 건물은 예견된 끝이라는 듯이 조용히 물속에서 붕괴해갔다. 그 매캐한 먼지 구름이 인어를 뒤덮자, 인어는 울상을 짓고 전차의 몸통을 부둥켜안았다.

 

넌 누구지?

 

모든 것이 다시 무질서한 상태로 안정을 되찾았을 때, 전차가 다섯 개의 붉은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속삭였다. 전차는 목소리가 기이하게도 몸 전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인어는 얼른 전차를 놓아주었다.

 

나는 인간이에요.

 

전차는 한꺼번에 다섯 개의 눈알을 굴리며 번쩍였다. 그에게 수압에 깔리고 세월이 도려낸 뼈만 남고 해체된 트럭이 침묵하는, 사라진 폐허가 드러났다. 전차의 레이더에는 어떤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았고, 그의 다리는 불길하게 절컥댔다. 도형을 이루며 서로 겹쳐 쓰러진 표지판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그의 생산지와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었고, 그 외에 쓸려 내려간 모든 것에 수백 년의 암흑이 새겨져 있었다. 전차가 문득 수면을 향해 포신을 들추고 장전했다. 네 개의 포신이 제각기 궤도로 덜컹대며 고정됐다. 인어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어린 표정으로 거대한 장갑의 운동을 지켜보았다.

무얼 하는 건가요?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도망쳐라.

여기가요?

이곳은 심하게 공격받았다. 적의 공격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몰라. 어서 썩 도망가라.

상어라도 오나요? 인어가 겁에 질려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차는 고개를 돌려 인어를 보았다. 가장 첫 불꽃을 관찰한 인류의 선조처럼, 전차는 인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전차는 신중하게 말했다.

너는 아주 독특하게 생겼구나. 너 같은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도 당신 같은 소라게는 처음 봤어요.

나는 소라게가 아니다. 나는 전차다.

 

인어는 물에서 빙글 돌았다. 그의 긴 은빛의 머리칼이 맨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렇게 말하는 소라게도 처음 봤어요.

 

 

전차는 거리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의 발밑에서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서 바스러졌다. 흰 물풀이 그의 발끝을 휘감았고, 오싹한 추위가 기계를 얼어 붙였다. 팽창을 자랑하던 거대한 건물들은 암에 걸린 뚱뚱한 노인처럼 바닥에 엎어져 비틀려있었고, 그 사이사이에서 강인한 철골들이 붉게 비집고 나왔다. 불안한 속삭임과 불쾌한 웃음소리, 시끄럽게 긁는 마찰음과 선동가들의 웅장한 저음들은 깨어진 수 만개의 유리창과 함께 바닥에 묻히고 물살에 떠내려갔다. 일찍이 전차는 이토록 이 도시가 조용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거리는 파괴됐고, 수백 미터의 바닷물에 수장됐다. 절망과 공포는 그 흔적조차 삶처럼 흩어져 버렸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를 집어삼킨 것은 공허였다. 전차는 이따금 멈춰 서서 도시의 묘비명을 적은 거대하고 부패한 콘크리트 비석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도시의 썩어가는 뼈대를 지탱하고 점차 부풀고 일어나며 부서지고 있었다. 적막의 햇빛이 쓸쓸히 일렁였다. 전차에 앞장선 인어는 도시의 왕처럼 망설임 없이 누비며 재잘댔다.

 

당신의 그 길쭉한 돌출부들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건가요? 이것들은 내 무기이다. 무기가 어째서 필요한가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선 무기가 필요하다. 나라라는 것은 참 무섭군요. 나라가 없는 것은 더 무섭다.

 

인어는 입술을 오므리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전차는 자신이 깨어났던 정비소의 방위를 중심으로 이곳이 어디쯤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저는 나라라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그다지 무섭지 않은걸요. 지금이 서기 몇 년인가? 제가 태어 난지는 이십 년이 조금 안돼요. 네가 살아온 햇수를 물은 것이 아니다. 고래는 아주 오래 살죠. 어쩌면 백 살도 넘게 살았을 지도 몰라요. 지금 적국의 영토는 어느 정도지?

인어는 전차를 한 바퀴 돌고 즐겁게 소리쳤다.

여긴 전부 제 영토에요.

 

그들은 광장에 달았다. 광장은 둥근 벽돌들이 빠지고 짓이겨져 인형처럼 제멋대로 굴러다녔고, 전차와 같은 기종의 전차들이 줄지어서 서로 엉키고 쓰러져 밟힌 벌레 시체같이 널브러져있었다. 오만한 지혜가 잠긴 기계들은 하나같이 부풀고 부패했고, 정장을 입은 마네킹처럼 헛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광장의 바닥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지폐 다발같이 무겁고 잔인한 수풀이 그들을 요람처럼 감싸 안았다. 전차는 말없이 네 다리를 휘젓고 나아가 그들 중 하나를 붙잡고 뒤집었다. 마지막까지 포신을 겨누던 동료는 증오와 원한에 사무친 검은 눈동자로 전차를 쏘아보았고, 전차의 허리 부분에서 긴 작은 팔들이 솟아나 몇 가지 조작을 하였지만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그의 다리는 장식용 청동 시계추처럼 멈추었고, 이미 땅의 일부인 것 마냥 신체의 일부분은 들춰지지 않았다. 전차는 그의 배터리가 완전히 절명하고도 셀 수 없는 세월이 지난 것을 검토한 뒤 깡통처럼 그것을 굴렸다. 철과 바닥의 날카로운 키스가 소름끼치는 반향음을 광장에 울렸다. 인어는 질겁하며 두 귀를 막았다. 전차는 광장에 엎드린 실패한 가건물같이 을씨년스러운 전차 무더기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인어가 조심스레 전차의 포신에 손을 얹었다. 전차는 답하지 않고 걸었다. 인어는 말없이 차분하게 꼬리를 흔들어 그를 따랐다. 광장의 빛나던 광기는 고요한 수상식물과 부식된 돌담들의 부스러기가 무겁게 눌렀다. 그들은 광장에 누운 머리와 팔뚝이 사라진 동상 앞에서 멈춰 섰다. 뒤집히고 갈라진 오래된 암회색 흰자위에서 뜻 모를 철학적인 물음이 묻어나왔다.

 

전차가 말했다.

너에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구나.

인어가 시무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차가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멈춰서 청저녁에 깃든 버려진 광장을 내려 보았다. 오후의 시간임에도 음울한 달빛에 잠긴 듯이 푸르렀다. 그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

인어가 물었다. 전차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전차가 한참 만에 다리를 움직여 폈다.

가볼 곳이 있다.

 

전차는 고개를 들고 네 다리를 비틀비틀 내딛었다. 그의 백 톤이 넘는 체중이 무참하게 남은 형태를 부수고 별빛처럼 흩어냈다.

타오르는 황혼 속 머리맡에서 흘러나온 향기가 사라진 도시를 감쌌다. 그것은 이내 빛의 커튼처럼, 장엄한 연회에서 쓰이는 다양한 붉고 자주색의 장막을 쳐내고, 모든 사물을 기이하게 왜곡시켰다. 어딘가에서 태고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길을 잃은 대왕 오징어 하나가 물끄러미 기괴한 인공적인 진동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광장에서 나와 점점 어둠이 솟는 시간의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고, 조금 더 불안한 공간의 불쾌한 환영이 격정적인 시처럼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전차는 전보다 더 거침없이 다리를 내딛었고, 영원히 세상에 목소리를 다시 낼 수 없는 거리와 벤치, 지하도들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전차는 수백 년 전에 흘러나간 흐릿한 직감을 믿고 땅 밑이 꺼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걸어갔다. 인어는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전차의 몸통에 달라붙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살폈다. 침묵 속에서 삐걱대는 거대한 태초의 신이 보이지 않는 눈을 번뜩였고, 그의 사악한 숨소리가 물방울을 타고 증폭되었다. 전차는 이곳에서 먼 다른 길에서 사람들을 겨누던 일을 떠올렸다.

 

그들은 지저분한 옷을 입고 정말 멀리서부터 걸어온 듯이 고개를 숙이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느릿느릿 행진했다. 대부분이 몇 주 동안 머리도 감지 않아 상반신을 알아볼 수가 없었으며, 상당수가 머리를 말끔히 밀었다. 그들의 검은 맨발은 잿더미를 딛고 쓸어왔으며, 파리한 팔다리는 칼처럼 심장을 앗아간 초겨울의 낯선 북풍의 먹잇감이었다. 그들의 눈은 얼어붙은 시계처럼 진실 되었으며, 입은 메마르고 굳어서 굶주림의 강간을 저항할 여지조차 없어보였다. 창백한 빈곤은 오로지 삶에 대한 두려움만이 그들을 채찍으로 후려치는 마지막 힘임을 보였다. 수는 수백에서 일천까지 될 것 같았고, 배설물처럼 한 시간마다 제자리에 쓰러지는 시신들 혹은 그에 가까운 자들을 버리면서 대치한 전차들 쪽으로 점점 다가왔다. 옆에 선 그의 동료가 말했다.

 

우리는 이곳을 지켜야 하네.

저들은 한 시간 뒤 면 이곳에 다다를 거야.

저들은 적국의 자들이야. 저들이 이곳을 통과해선 안 돼.

 

저들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네.

우린 저들을 쏴야 하네.

그는 다리를 고쳐 섰다. 동료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참혹하게 빛났다.

우리가 막지 않으면 이곳을 통과할 것이네.

우리가 가진 무기가 어떤 것인지 아나?

적재할 때 몰래 확인했지.

나도 그랬다네.

염병할.

한참동안 바람이 불었다. 관절 부근에 작디작은 눈송이들이 송이송이 맺혔다.

저 길이 얼마나 차가울지 상상해봤나.

우리가 가진 불은 죽음의 불 뿐이라네. 저들에게.

우리가 죽음을 가졌으니, 우린 죽음의 편인 것일까?

 

그들은 불타는 화염 속에서 기묘한 웃음소리와 비슷한 비명을 지르는 일체의 나무들이 되어 산채로 꼼짝도 못한 채 타죽었다. 몇몇이 등에 말의 갈기처럼 길게 불을 달고서 눈을 구르고 길 밖으로 달아나려 하였지만 모두 신중하게 저격당해 머리가 종이처럼 갈라졌다. 임신한 여인, 그들을 초연하게 가리키는 노인, 머리가 공작처럼 커다랗고 우둔한 불꽃의 깃털을 만들어내는 여자애, 개처럼 네 발로 날뛰는 남자들, 아이를 그러안은 부모, 엎어지고 꿈틀대며 기더니 믿을 수 없이 순식간에 재 조각으로 낱낱이 산화하는 모든 매캐한 이야기들이 하늘에 스러지는 단말마로 족적을 남기고 이내 모두 꺼졌다. 불길은 산발적으로 점점이 길에 남았고 이내 아무것도 먹어치울 것이 없자 스스로 굶어죽었다. 전차들은 신중하게 고려된 각도로 고폭탄을 두어 발 쏘았고, 마침내 길에는 어떤 흔적도 먼지 크기 이상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소각된 역사의 종이들처럼 하염없이 공기로 퍼져나갔다.

 

동료는 한마디도 않고 뒤돌아서서 정비소로 돌아갔다. 전차는 아주 오랫동안 그 앞에 펼쳐진 세상에 난 모든 길을 압축한 구겨진 공간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전차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순전히 감각에 의지해서 도시 서쪽의 정비소를 들추었다. 그가 있던 곳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보였다. 조각난 기둥들과 벽면이 물의 저항에 천천히 지연된 세월처럼 내려앉았다. 전차는 인어에게 다치지 않게 꼭 붙어있으라고 당부했다. 마침내 무너진 정비소 안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전차가 생매장된 시신처럼 불쑥 나타났다. 전차는 몸통에서 작은 손들을 뻗어 그것의 계기판을 두드렸다. 한참을 이리저리 조작한 끝에, 동료 전차가 불현 듯 깨어나 번쩍 눈을 떴다.

 

정신이 드는가?

나를 어째서 깨웠나?

자네를 구해주기 위해서.

배터리. 자네 얼마나 남았나?

전차는 자신의 배터리를 계산하고 말했다. 12%. 나는 5% 남았네. 그것을 깨어나자마자 계산한 것인가? 나는 전에도 깨어났었네. 혼자서.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네. 언제 혼자서 깨어났었는가?

아마 추정컨대 백년도 더 전일 걸세. 그때도 지금처럼 세상이 이러하였는가? 그땐 지금보단 수위가 낮았네. 내 포신 끝이 수면 위에 닿았지. 그런데 다시 잠들었단 말인가?

 

그렇다네.

일어나게.

무엇하러? 움직이면 배터리가 더 빨리 닳지 않나.

남은 힘을 다해서 걷게.

자네 아직 이해를 못했군. 이미 이 나라는 사라졌네. 우리의 인지 한계를 벗어난 오래전 일이야.

나라를 위해서 그러라는 것이 아니네.

그럼 무엇을 위해서? 죽음을 위해서?

그는 나지막이 점점 작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석상처럼 고요히 잠들었다. 전차는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장례를 치르듯이, 사냥한 사슴을 내려다보는 원시의 사냥꾼들의 눈처럼. 인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사라지면서 다시 세상은 한줄기 붉은 빛을 제외하곤 암흑이 눌러앉았다. 벽돌 속의 평온. 어둠은 다시 그를 감싸 안았다. 전차는 전보다 훨씬 느리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아서, 동료의 몸을 신중하게 네 다리로 넘어서 더욱 깊은 세상의 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어는 전차 머리에 달린 네 개의 포신 사이에 몸을 뉘고 잠들었다. 그 자그마한 숨소리가 텅 빈 도시를 메웠다. 전차는 외곽 간선도로를 진입하여 퇴색된 신전 아래 갈라진 익사한 길 위를 은밀하게 미끄러졌다. 만 개의 얼굴을 가졌던 오래된 건널목과 표지판이 그만큼의 무상한 주름을 가지고 갈라지고 부식되어 쓰러져있었다. 배터리는 빠르게 닳아갔고, 전차는 자신의 눈에서 천연적으로 빛나는 전등 빛에만 의존해서 이따금 혹처럼 솟은 지반의 굴곡과 시신의 벌린 입같이 뚫린 균열들을 건너뛰었다. 백 톤이 넘는 그가 걸을 때마다 땅바닥은 함박눈위의 또렷한 발자국과 함께 운명된 붕괴를 재촉했고 자욱한 모래연기가 일었다. 전차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뒤에 악마 혹은 어머니의 얼굴처럼 온화한 검고 부푼 모래 구름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따금 전차는 심하게 비틀거렸고 항상 걸음마다 대지가 신음하는 둔중한 충격음이 물결을 타고 소문처럼 퍼져나갔다. 인어는 한숨도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전차는 이따금 인어가 숨을 쉬는지 가만히 그 소리에 집중했다. 암흑을 유일하게 적시는 역사적인 역병의 예언자. 이 모든 것의 자손, 모든 것의 증거. 넌 대체 누구지? 먹먹한 몽환 허공이 그 오래된 질문을 삼켰다. 전차는 그가 난 도시를 조금씩 파괴하며 자박자박 걸어 나갔다.

 

나는 방랑자야.

그런 직업은 들어본 적 없다.

직업이 뭔데?

사람들이 매일 반복적으로 행하는 혹은 하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끼는 일정한 일상적 업무.

내 직업은 방랑자야.

방랑자는 직업이 아냐. 그것은 직업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명칭이다.

그렇구나.

 

인어는 숨 가쁜 햇살을 받고 노란 눈으로 상공에 둥둥 뜬 물고기 하나를 노려보다가 순식간에 꼬리를 펴면서 가속하여 낚아챘다. 인어의 몸통 크기와 거의 다름없는 은빛의 물고기는 소리 없이 단말마를 내며 몸을 강하게 비틀어댔다. 인어는 두 팔과 꼬리를 이용해 든든히 붙잡은 이후 날카로운 송곳니를 물고기의 배에 찔러 넣었다. 그리곤 곰처럼 두 손에 붙들고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희뿌연 피가 인어의 은빛 머리칼을 일식처럼 물들이고 이내 순식간에 스러졌다. 작은 뱃속에 놀랍도록 빠르게 물고기의 맨살이 모두 드러나고 별자리처럼 얇고 굴곡진 뼈만 남아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전차는 머리만 남은 물고기가 유언을 말하려는 전쟁터의 군사처럼 입을 뻐끔대는 것을 보았다.

 

네 직업은 뭔데?

난 군인이다.

넌 군인이야?

인어가 그 단어가 재미있다는 듯이 우스꽝스럽게 굴려서 발음했다. 전차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난 방랑자다.

맞아, 우린 방랑자야.

인어가 깔깔댔다. 잔인한 이빨이 대리석처럼 희었다.

말해다오. 방랑자는 무얼 해야 하지?

우린 아침엔 노래를 들어야 해.

그 다음엔.

그 노래를 쫓는 거지.

그 다음엔.

노래가 끝나. 하지만 그건 잠시 쉬는 거야. 그땐 우리도 한숨 자면 돼.

전차가 뚫어지게 인어를 바라보았다. 인어는 가득 미소를 짓고 전차를 보았다.

넌 이름이 있는가? 이름이 뭐야? 네가 어렸을 때, 누가 널 키워주었는가? 고래가. 고래가? . 고래는 널 무어라고 부르던? . 고래가 너를 불이라고 불렀다. , 맞아.

인어가 두 팔을 뻗고 유연한 공중제비를 돌았다. 전차는 이제 완전히 도시의 변두리에서 멸망한 시골길을 걸었다. 사막처럼 투명한 모래들만이 깊이 싸여서 모든 지붕들 위에 단풍처럼 붉고 장엄하게 눌러앉았다. 전차는 발끝이 모래 깊숙이 빠지지 않기 위해 기듯이 걸었다.

 

, 너는 어디론가 돌아갈 곳이 있는가? 돌아가? 인어가 전차의 포신을 잡고 늘어지고 당겼다. 그러더니 포신 사이의 안테나에 머리를 박고 울상을 지었다. 전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도시는 이따금 겨울의 앙상한 미개발 철거지역처럼 벌거벗은 높은 전신주가 모래를 뚫고 선인장처럼 튀어나온 것 빼고는 거의 흔적이 사라졌다. 인어는 지치지 않고 전차의 몸 구석구석을 건드리며 돌고 꼬집고 재잘댔다. 전차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눈으로만 인어를 좇았다. 모래로 된 무덤과 암석으로 된 묘비들이 바다를 막는 성처럼 초현실적으로 거대하게 그들 옆에 섰고, 그 골짜기는 절개된 뇌와 뱀의 혀 같은 흰 말미잘들, 검고 비열한 미역들과 그의 발밑에서 맥없이 부서지는 조개의 양철 껍질이 버려진 시장터처럼 소리 없이 익사체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수면 위에서 독가스처럼 일렁이는 희미한 햇빛을 이용해 아주 조금 배터리가 충전되었다. 전차의 장대한 긴 포신에 미끄러운 미역과 음울한 이야기들이 말없이 얽혀갔다. 전차는 처음엔 그것을 떼어냈으나 결국 그대로 놔두었다. 인어는 이따금 예쁜 분홍의 긴 산호 비스무리한 생물체를 바위에서 입으로 떼어내어 흐트러진 정장을 입은 멍청한 샐러리맨처럼 입에 대고 뻑뻑 피어댔다. 그것에선 희끄무레한 젤리가 나왔다.

 

긴 골짜기가 끝나자 그들 앞에 다시 인공적인 콘크리트가 펼쳐졌다. 항구는 긴 팔을 벌리고 비현실적인 수위의 바다를 아직도 감싸고 있었다. 밑동만 남아서 뽑혀나간 등대는 참혹한 철골만이 남았고, 놀랍게도 컨테이너 몇 개와 크레인이 거의 형태를 유지한 채 단단히 땅을 붙잡고 서있었다. 그 세월의 모래가 파도처럼 굴곡진 앞바다에 거대한 유조선이 옆으로 누워있었고, 그 뒤로 수백 개의 여객선, 화물선, 어선, 숲속에 박힌 작은 미물 같은 흰 요트들이 온통 같은 방향으로 정수리를 드러내고 기대 누워있었다. 배들의 일부는 달과 별들이 한참 뜯어먹고 난동을 부려 기괴하게 뜯겨 나가있었고, 그들 머리위로 하늘을 헤아리는 날카로운 물고기 떼들이 공연을 온 것처럼 배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갔다. 배들의 비참한 행렬은 지표의 끝까지 팽창된 것으로 보였고, 뒤집힌 수평면과 지표면 끝이 희고 어두웠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이 배로 탈출하다 물에서 수장 당했고, 세상의 선장은 배와 함께 잠들었다. 꽃처럼 흐드러진 구멍이 난 갑판에는 해골같이 울룩불룩한 흰 생물체가 내장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피부로 눈알을 뒤룩댔다. 그들이 항구를 따라 걷는 하루의 시간동안 그 시체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어둠이 그들을 덮쳤다. 전차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노래가 끝나면. 인어는 애저녁에 계기판 위에 올라 곤히 잠이 들었다. 전차는 휴면 시간을 기록했다. 검은 산들이 희고 긴 수염을 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동공에서 의미 없는 모래를 내뱉는 해골이 너른 사구에 누워있었다. 모두 어디로 간 거지? 전차가 중얼거렸다. 인어가 얼굴을 찡그렸다. 우린 어디로 가지?

 

 

어느 건물이 총알받이가 된 가죽처럼 너덜너덜해져서 긴 족적을 남기고 무너져있었다. 그것의 한가운데엔 포탄이 박혀 있었다. 불발이지만 그 충격량만으로 건물을 망치처럼 박살내고 밀어낸 것이었다. 흰 벽돌들과 종교적인 구조물들, 깨진 종이 이끼가 껴서 넘실대었다. 인어는 거의 형체가 물러진 석상을 타고 놀았다. 장어 두 마리가 몸을 엉키고 그 안에서 새어나왔고, 인어는 그들을 잡을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벽돌들을 치우고 포탄을 확인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년은 전에 발사된 것이었다. 전차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인도하는 무너진 벽면의 문과, 푸른 지붕들, 꽃처럼 만개한 암석으로 눌러앉은 건물들, 연꽃처럼 납작해진 철들. 물속에서 폭발할 때 특유의 탄도가 새겨진 바위들과 벽돌들, 그리고 이 같은 불발로 점처럼 박힌 서너 개의 포탄들이 단조로운 중얼거림. 역사가 끝난 이후에도 남은 증오가 잔상이 되어 역병처럼 내려앉았었다. 전차가 포탄이 어느 나라의 것인지 확인하러 걸어가던 중에 인어가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전차가 뒤돌아보자 인어가 하얗게 질려서 그에게 달려왔다.

 

그 부연 너머로 거대한 범고래가 장막을 통과하듯이 입 끝부터 천천히 등장했다. 배만한 그 육식 동물은 검은 눈동자로 사납게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폐허가 본인의 뜻이라는 듯이 거만하게 쌓인 벽돌들을 배로 쓸면서 다가왔으며,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으나 정확히 똑바로 그들을 향해 왔고, 입 끝을 개처럼 킁킁댔다. 섬뜩하고 원시적인 노래를 부르며 사냥을 자축하는 음절을 내뱉었고, 길게 난 작은 이빨들이 미지의 사형수처럼 또렷했다.

 

전차는 침착하게 긴 포신을 들어 정면으로 다가오는 범고래를 겨냥했다. 많은 것들이 망가져 불안정한 각도를 계산해야했다. 전차의 주축에서 포탄 한 개가 미세한 톱니바퀴들을 타고 올라와 포신에 걸렸고, 전차는 빨간 눈으로 범고래의 두개골을 바라보았다. 수없이 반복된 전쟁의 유산으로, 그의 호흡은 완벽했고, 궤적은 정밀했다. 범고래는 어떠한 망설임의 기색 없이 검은 기차처럼 꿈틀거리며 속도를 높였고, 물결은 투명하게 옷자락처럼 그와 폐허를 부드럽게 쓸었다. 전차가 방아쇠를 당기자 엄청난 양의 모래와 연기가 포신 뒤로 뿜어져 나왔고, 충격이 물을 타고 벽들을 무너뜨렸다. 인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시간 소금물에 절여진 포탄은 불발이었지만, 음속으로 날아간 머리 크기의 말없는 쇳덩이는 고래의 몸통의 절반을 꿰뚫고 튀어나와 그 멀리의 포물선을 그리고 사라졌다. 범고래는 광인처럼 입을 벌리고 긴 혀를 베어 물었다. 툭 튀어나온 눈은 근육의 수축에 의해 저 혼자 오르내렸고, 숨통이 끊어진 이후에도 한참이나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비단같이 고운 피를 사방에 흩어 내었다. 멀리 떨어진 이곳 까지 피 냄새가 풍겼고, 곧장 피라냐 떼들이 달려들었다. 물에 떨어진 관처럼, 뻣뻣하게 굳은 흉측한 몰골의 고래 시체는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얼굴은 끝까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차가 돌아서 인어를 찾았다. 인어는 잔뜩 웅크리고 전차 다리 사이에 숨어있었다. 이제 나와도 된다.

 

그런 대단한 독침은 처음 봤어. 저주받은 것이다. 그것덕분에 우리가 방금 살았는걸.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이다. 나는 호랑이가 오면 죽어라고 도망만 쳐야해. 나도 그런 독침 하나 있었다면 참 좋겠는걸. 정말 부럽다. 전차는 멈춰 섰다. 그의 발밑에서 커다란 물고기 뼈가 부스러졌다.

, 그건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난 인간 맞잖아.

넌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러길 바란다.

인어가 토라져서 조그만 입으로 무어라 투덜대었다. 전차가 다시 앞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모래도 산호도 없는 캄캄한 가죽을 둘러싼 검은 바위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전차는 특별히 주의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인어는 여전히 경외의 눈으로 전차의 긴 포신을 올려보았다.

 

어둠이 습격했고 찰나의 순간 물러났다. 꿈은 음성들의 마약 같은 광란의 악몽이었고, 전차는 그러한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를 깨어나자마자 잊었다. 전차는 첫 발걸음을 옮기면서 몹시 힘겨운 것을 느꼈다. 포탄을 쏘는 것은 배터리를 무섭게 소모할 뿐 아니라 그 충격은 수백 년 간 녹슬고 지친 관절들을 꼼꼼히 짓이겼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배터리가 빠르게 소모됐다. 전차는 전날보다 미약해진 붉은 빛으로 앞을 밝히며 나아갔다. 인어가 계기판 위에 걸터앉아 멋대로 노래했다. 물에 먹먹해진 그 파동은 몇 십리 밖에서도 들리도록 기묘한 힘이 있었다. 전차는 잠자코 그것을 들으며 흔들리는 발을 내딛었다.

 

그들은 화산 분화구를 건너갔다. 오르막은 해골처럼 삐꺽거렸고, 내리막은 검은 눈을 가진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러웠다. 움푹 팬 분지는 키가 큰 수초와 다시마들의 왕국이었다. 발톱처럼 길고 낡은 뼈들은 인간의 대퇴골과 갈비였다. 바다 숲에 더러 버려져 있어서 인어가 몸서리쳤다. 수초의 끝은 포신을 간지럽힐 정도로 키가 크고 억센 식물들의 머리칼이 퀭하게 그들을 옥죄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인어가 머리 위에 올라 방향을 일러주었다. 해가 전차의 시야에 거의 비치지 않았다.

 

그와 그가 이끄는 소대원들이 폭격한 도시는 유서 깊은 문화재와 정부 청사가 겹쳐있었고, 아이들과 유곽, 전쟁 공장과 학교가 어깨를 맞대고 서있었다. 그가 폭탄을 떨어뜨릴 방위에는 신들의 노여움을 살 높은 거주지가 세포처럼 붙어있는 곳이었고, 소대원들 모두 각자의 폭격지가 정해졌다. 명령이 위성을 타고 허공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한없이 농축된 시간동안, 그와 소대원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최대한 바닥에 붙어서 웅크리고 산 위에 걸터앉았고, 봄의 생명이 실제로 냄새로 느껴졌다. 새들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진작 멀리 달아났고, 우둔한 곰 하나가 나타나 그들을 바라본 것을 빼곤 어떤 것도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그들은 비현실적인 진공에서 상대를 겨눈 것처럼 차분했다. 초고성능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도시에선 적국의 옷을 입은 자들이 뒹굴고 껴안고 한데 걸었다. 조망으로 세워놓은 나무들은 초록색의 촌스러운 표지판들과 함께 공기의 불길함을 직감하고 앞뒤로 흔들렸다. 소대원들이 동시에 발사한 포탄들은 오차 범위 일 미터 안팎으로 벽면과 대지에 깊게 파고들었고 2초 뒤에 폭발했다. 만개의 쇳조각들이 공중에 팽배하여 사람들을 조각냈고 건물들을 찢었다. 열기가 하늘을 녹였고 둥근 철퇴가 별안간 내려친 듯 포탄이 있던 자리에는 큰 분화구 외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적국의 포탄은 맥없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제 영토로 떨어져 사라졌고 그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도 도달하지 못했다. 발사된 백 팔십 발의 포탄이 모두 폭발하기 까지 12분이 걸렸다.

 

모두 어디로 간 거지.

그들은 지옥에 갔어.

아니 그들은 집으로 갔어. ? 그래. 누가 저 자식 아가리를 한 대 쳐봐.

비켜봐, 내가 기꺼이 해주지, 이봐, . 좋아, 가서 몇 발 더 박아주자고.

나는 책을 봤어. 그들 중 일부는 천국에 갔을 거야. 입 닥치지 못해. 우린 어디로 가지? 맞아, 개 같은 지옥으로 모두 처박히지. 저기서 나온 전차들이 일 년에 쳐부순 우리 편을 떠올려봐.

이건 옳지 못한 일이었어. 우리 일이지. 제정신이 아니군. 너희 모두 재판에 회부될 거야. 배터리가 빠져서 용광로에 버려질 거라고. 정확히 저들의 신세군.

모두 저곳이 보이나.

소대원들은 소란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누군가 우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지.

, 제가 그 우라질 질문을 했습니다.

우린 저기로 간다.

그가 포신으로 먼 대지에 불현듯 생긴 용광로를 가리켰다. 그들이 방금 만든 불기둥들. 아주 멀리서 들릴 수 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대원들은 모두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우린 저기서 만난다.

하늘에서 전파가 다시 내려왔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차는 소대원 모두의 붉게 빛나는 눈동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것엔 단 하나의 말이 온통 비치었다. 봄의 절정의 열기가 짐승처럼 들큼하게 온 산에 만연했다.

 

그는 약속을 믿은 적이 없었다. 어떤 종이에 적혔든, 어떤 혀 위의 약속이든. 그러나 그는 어쨌든 폭격한 도시로 향했고, 그는 반쯤 미친 방랑자였다. 인어는 새처럼 침침한 눈을 대신해주었다. 두터운 네 다리는 눈에 띄게 곱아졌다. 다섯 개의 눈 중 단 한 개만을 키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다섯 가지 방향으로 굴절된 물방울들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검게 부식된 놀이터의 울타리들에서 희미한 페인트가 묻어나왔다. 전차는 그것을 넘어서 새롭게 펼쳐진 광야를 보았다. 먼 실루엣은 물방울로 이루어진 이름 없는 안개처럼 부옇게 서있더니 그들이 다가가자 재빨리 흩어졌다. 미망인처럼 검게 옷자락을 들이친 우묵가사리들이 뒤돌아서 그들을 외면했다. 한참을 걷자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이따금 한참 머리 위에서 은빛 배를 가진 수천 마리의 물고기들이 은하수처럼 흘러갔다. 인어는 감탄하며 그것을 가리켰다.

 

아주 높은 전신주가 머리만 남고 땅에 파묻혀 죽어있었다. 전차는 그것에 매달린 전기 기구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지대가 점점 무르고 낮아지는가 싶더니 단단한 암석이 펼쳐졌다. 그것은 날카로운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작열하는 폭발이 아로새겨진 건물들과 벽들의 옆구리가 도려내 물은 듯이 움푹 파여 있었다. 가오리 여럿이 부락민처럼 건물과 기둥 사이를 뛰어놀며 장난치고 있었고, 그곳이 고향인 양 푸른 불가사리들과 산호들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플랫폼에는 머리를 수그린 채 엎드린 길고 무거운 기차가 있었다. 한때 수많은 운명을 모호한 암흑으로 밤새 나르고 텅 빈 손아귀를 내 편 채로 돌아온 철로는 화석처럼 등이 굽고 비틀어져 꺾여 있었다. 인어가 기차의 불투명한 플라스틱 창문에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전에도 이런 걸 본 적이 있어.

전차가 인어를 보았다.

 

그건 기차라는 거다. 과거에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있으면 멀리까지 떠날 수 있었다.

인어의 은빛 머릿결이 천천히 흩날렸다.

이것도 노래를 쫓는 거야?

아니, 아니다. 저 철로 된 선이 보이지. 저것을 따라 왔다 갔다 한다.

인어가 기차를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별로 멀리 가지 못하겠구나.

그렇다.

게다가 힘들어 보여.

이제 그만 가자꾸나.

기차도 노래를 쫓고 싶었을까?

기차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 정말로 가자.

전차가 구겨진 기차를 넘어서 걸어갔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이 몹시 힘겨웠다. 잠자던 복어 한 마리가 객실 속에서 영문 모를 그림자에 놀라 튀어나왔다. 다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객실 몇 개가 걸려 쓰러졌다. 그것은 오래된 시계추처럼 물의 저항을 받으며 천천히 기울어져 누웠다. 인어가 자꾸만 뒤돌아보며 울먹였다. 전차는 한참을 걷고서 내뱉었다.

미안하다.

전차는 건물들을 둘러싼 따개비들을 온몸으로 비비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어디선가 세기를 건너서 비탄의 흐느낌이 맴도는 것 같았다. 잠든 승객들, 타지의 빗방울을 맞는 두꺼운 여행용 코트가 걸린 불 꺼진 객실들, 그곳에 깃든 꿈들. 아름다운 불꽃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물었다. 너는 노래가 들려?

 

전차는 자주 지쳐 쉬었다. 인어는 그가 보았던 멸망한 다른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같이 고요하게 시간의 팔이 조금씩 쓰다듬는 표면의 작은 껍질들. 말살된 잎사귀들이 떨어져나간 고목들, 파도에 침범당한 고대의 도서관들. 줄지은 첨탑들과, 죽은 대지의 화신의 머리칼같이 두껍고 무거운 관들이 반쯤 잠든 채 흔들어대고, 지하가 아직도 불타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인간의 마음처럼 붉고 뜨겁게 달아오르던 일. 그들은 바다 속 황야를 넘었고, 오래전에 살던 미개인들이 걸어놓은 토템들 같이 표지판에 울퉁불퉁 바위와 조개가 들러붙어있었다. 돌고래들이 단조로운 음색으로 끽끽대며 코를 들이밀고 인어와 전차에게 장난쳤다. 그들은 큰 능선에 달았다. 한 결로 누운 보리밭 같은 수초가 빽빽하게 털처럼 돋아난 웅크린 등 같았다. 그 위엔 검게 빛나는 패배한 투구가 고개 숙여 있었다.

 

저기 보이는 구조물을 보아 다오.

인어가 말을 듣고 나아가 머리를 쭉 뻗고 육면체 모양의 긴 포탑을 훑었다. 그에겐 전차가 가진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얇은 원형 막대 수십 개가 달린 철로 된 고래의 성기로 보였고, 그것을 전차에게 전했다. 전차는 대답 없이 나아가 능선을 올랐다. 미끄러운 수초에 여러 번 발이 미끄러졌다. 반나절 후에 언덕에 걸친 포탑 앞에 섰다. 그의 네 개의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인어는 전차와 포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포탑은 전차에서 머리만 떼어놓고 포신만 바꿔 끼운 쌍둥이였다. 포탑은 아주 오래전에 작동이 멈춰서 석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모래의 침범은 위압적인 자태를 처녀의 드레스처럼 가냘프게 덮었다. 전차는 포탑이 겨냥한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 나는 여기서 멈출 것 같다.

인어가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친구의 눈앞에 섰다. 그는 눈 먼 예언자처럼 불확실하게 그러나 꿰뚫는 시선을 던졌다. 나에게 주어진 수명이 다했다. 앞으로 아주 조금밖에 더 걷지 못한다. 이 친구 옆에서 멈추고 싶다. 전차가 몸통에서 작은 손을 뻗어 그의 몸을 쓸었다.

방랑이란 게 이런 것 아니겠니.

너는 방랑자가 아니야.

인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차가 붉은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너는 가야만 할 곳이 있어.

전차는 다리를 편안한 자세로 굽혔다. 앞으로 오랜 세월 그 자세로 있을 것이다. 전차는 유지에 필요한 동력을 끊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신이 한데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인어가 속삭였다. 나는 친구가 많아.

날 도울 수는 없을 게다.

 

혹등고래는 온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래가 무턱대고 밀어대는 턱에 전차는 넘어지듯이 육중한 무게를 고래의 등에 실었다. 인어가 우스워서 깔깔 손뼉을 치고 웃었다. 전차와 인어를 태운 혹등고래는 짙푸른 골짜기사이를 오래된 열차처럼 느리게 통과했다. 전차는 이따금 나타난 아치 다리들을 고개 숙여 피하는 것 외에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인어는 전차의 눈앞에 앉아 조용히 꿈같이 흘러가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았고, 전차 역시 그리하였다. 인간보다 오래된 그 바위 성당은 극도로 조용했고, 숙연한 숭고함이 거친 표면에서 묻어나왔다. 시간의 목격자인 따개비들은 입을 다물고 늙고 변색됐고, 수초는 느긋하게 신성한 바닥을 쓸었다. 그들은 기암절벽을 지나 산을 지났고, 또 다른 산을 지났다. 눈이 쌓인 것처럼 희고 앙상한 모래 산들은 윤곽조차 희미한 작은 고물대는 생명체들이 점령했다. 인어는 이따금 고래와 대화했다. 전차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 않았다. 인어는 전차에게 몸을 기대고 때때로 다 왔다고 속삭였다. 전차는 눈을 감고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아득한, 길게 찌르는 , 첨예한 흐름, 막절벽에 선 원인의. 동물의 피로 잉크를 한 펜촉이 다듬은 가장 오래된 시.

 

한나절을 그들을 태운 혹등고래는 지친 기색도 없이 밤에도 계속 헤엄쳤다. 혹등고래는 별안간 수면에 떠서 물을 뿜어댔다. 전차는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잊힌 말들처럼 별들은 대기에 대고 모호하게 중얼거렸고 인어는 그들의 이야기를 제멋대로 지어내어 전차에게 들려주었다. 전차는 낮은 음성으로 맞장구치며 서늘한 바람과 별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어떤 육지도 생명체도 흔적을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검은 물로 된 사막은 눈동자처럼 별들을 비추었다. 소금기의 냄새가 온몸에서 났고, 이윽고 고래는 다시 천천히 잠수했다.

 

혹등고래는 폭격당한 도시에서 멈추었다. 전차는 단 한 번도 그의 목적지를 말한 적이 없었다. 인어가 여린 팔로 그를 밀어서 땅에 도달했다. 고래는 굴뚝의 연기처럼 나른하게 그를 좇으며 인사했다. 인어가 마구 손을 흔드는 동안 고래는 돌아서서 다시 먼 방랑을 떠났다. 그들을 둘러싸고 폭격당한 도시로서 그 위치를 주장하듯이 확고한 붕괴와 파멸의 근거가 증오의 상징으로 새겨져 남아있었다. 대지의 갈퀴 끝이 온통 부서지고 흩어진 모래와 멸망의 증언들을 그림자로 드리웠고, 직격을 맞은 빌딩들은 가슴을 헐벗고 있는 대로 들리지 않는 악을 쓰듯이 벌어져 있었다. 세상이 게워낸 토사물처럼 시체를 닦아낸 마그마는 그 경로를 강철에 남긴 굴곡진 글씨로 흐트러짐 없이 정확하게 기록했다. 불타버린 철의 숲은 아직도 가장 깊숙한 곳에 격정의 광분과 공포를 태우듯 붉게 달아올랐다. 인어마저 입을 다물고 헤아릴 수 없는 부피의 증오에 몸서리치며 몸을 움츠렸다. 전차는 피곤한 다리를 다시 피었다. 극히 적은 수명이 그가 오기를 유혹했다. 전차는 몇 초마다 한 번씩 겨우 걸음을 띄며 긴 불타는 도마뱀이 기어간 자국을 걸었다.

 

첫 번째 소대원은 길 한가운데 서있었다. 그는 불상처럼 다리를 모으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없이 바다와 도시를 명상하고 있었다. 전차는 그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 덜덜 떨리는 온몸으로 그를 피해 돌아갔다. 인어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 말없이 보았다.

 

전차가 걸음을 내딛다가 괴로운 신음을 내뱉으며 헐떡였다.

네가 옳았어. 우린 방랑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어.

인어는 잠자코 그의 눈을 쓰다듬었다. 붉은 꺼져가는 늙은 빛이 그 손 틈 사이로 새어나왔다.

 

전차가 앞뒤로 기우뚱거리며 무덤에서 일어난 자처럼 위태롭게 걸었다. 다리 끝은 아무 감각이 없었고, 아무 힘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점차 가뿐해졌지만, 움직이기는 더욱 힘들었다. 인어는 소대원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거나 인형처럼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에게 일러주었다. 감정은 뼈로 남은 꿈 속 기억과 같이 칼날처럼 신경을 베어내고 히스테리 속으로 빠르게 물러나 사라졌다. 도대체 그들이 알겠는가? 신이 죽음조차 사라진 이곳에 어떤 말을 하겠는가? 어떤 소대원은 포신을 열지 않고 포를 발사한 듯 머리 부분이 형체도 드러나지 않게 일그러졌고, 어떤 자는 두더지처럼 흙에 몸을 담고 있었으며, 그처럼 힘이 다해 강박적인 자세로 고꾸라진 자들이 있었다. 전차는 그 누구에게도 한 순간만을 스쳐볼 뿐이었고, 신의 죄악의 목격자들은 개처럼 입이 막혀 바다에 잠겨있는 것이었다. 전차는 충전을 위한 마중물 전기까지 모두 사용해 자신이 죽인 도시의 길을 걸었다. 열기로 녹아내린 중앙 도로가 큰 사거리를 맞이하고 자리를 비켰다. 흰 해파리 두어 마리가 섬뜩한 눈덩이로 모든 거리와 암흑에 싸인 영광의 골목들을 지켜보며 유영했고, 도로의 통행료 부과원처럼 버티어선 수초가 몸을 느리게 흔들었다. 인어가 그것을 손으로 헤치자, 전차 다섯 대가 줄지어서 썩어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자들. 그들은 포대를 거두고 그를 기다리며 가지런히 정좌해 있었다. 전차는 멈춰서 눈을 껌뻑이며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백 톤의 충격음이 수초와 물고기들을 놀래 켰다. 인어는 껌뻑이는 전차의 눈앞에 서서 두 팔로 붙잡았다.

 

, 부탁이 있다.

인어는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죽으면 다리 사이의 해치가 풀릴 것이다. 그곳에 큰 독침이 두 개가 더 있는데, 그것을 뱃속에 안고 이곳에 눕고 싶지 않다. 모두 꺼내주겠니.

 

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빛 머리칼이 물결쳤다. 그래.

인어가 하늘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지금 노래가 너에게도 들리니?

 

전차가 속삭였다. 나는 한평생 그것에서 도망쳤다. 어쩌면 언제나 들려왔을지도 모르겠다. 소대원들이 저만치에서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인어의 눈물이 바닷물에 흩어졌다. 인어가, 전차에게, 말했다.

나는 너의 노래도 들을 수 있어, . 너희의 노래.

 

전차가 가만히 눈을 떠서 불을 보았다. 수천 년 동안 쉬지 않고 도시들을 살라먹은 붉고 흰 불이 일렁였다. 지울 수 없는 나무를 휘감은 붉은 휘장이 대기를 가득 채웠다. 세상의 모든 인간을 거둔 바다처럼, 수면에 말없이 떠오르는 파문처럼,

불꽃.

전차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지 않았다.

 

푸르거나, 혹은 한없이 좁은 자폐적인 편안한 물에 잠긴 나무 옷장의 쇠 냄새가 느껴졌다. 희미한 비명소리 노래가 나타나 행진하면서 목에 난 상처의 아름다운 피를 거리마다 흩뿌리고 다녔다. 인어가 나타나 사라졌고, 농밀한 공기 중의 잿더미가 된 검게 그을린 피부의 사람들이 노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전차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노래를 들으려 집중했다. 그리곤 이윽고 비늘을 가진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도시는 마지막 방문자를 받아들이고 영원히 어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든 다리달린 심장의 운반자들과 함께.

 

 

벼락이 바다에 치고 물이 하늘을 갈구하듯 용솟음쳤다. 비가 세상의 모든 어둠을 덧칠하려는 듯 고압적인 손발을 구름에서 뻗어 내렸고, 검은 깃털을 가진 새가 놀라 휘둥그레 달아났다. 눈을 부릅뜨고 절대 잠을 자지 않는 야생화가 철과 소금 냄새가 진동하는 바다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으며, 그 위로 아이 하나가 나타나 죽은 짐승의 가죽을 입에 물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부연 눈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그는 냄새를 맡더니 가죽을 쥐고 모래사장에 네 발로 기어가 코를 킁킁댔다. 끝없는 검고 쉬지 않고 물결치는 아수라의 들판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점이 나타나 둥실댔다. 인어는 내리꽂는 빗줄기가 부름이라도 되는 듯이 양 팔을 벌리고 격앙된 표정을 지었다. 야만적인 제사장의 노래를 부르듯 수면을 팔다리로 내리치며 노래를 내뱉고 눈물에 묻힌 뺨을 씻었다. 아이는 먼 태고에서 다가온 인간과 인간을 태운 배들의 운명에 대한 노래가 진절머리 난 다는 듯이 바다에 대고 으르렁 짖어대었고, 천둥 벼락 소리와 배들을 집어삼킨 거대한 물소리가 그것을 거칠게 안았다. 아이는 이내 빛나는 눈으로 가만히 앉아 모든 희뿌연 연기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폭풍우는 여전했으나 점차 빗소리가 아득한 밤하늘로 멀어졌다. 이내 아이조차 검은 털이 난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아이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숲의 어두운 속으로 어깨를 흔들며 느릿느릿 아득히 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