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마네킹 하우스

by 신우 posted Aug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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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마네킹 하우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오늘 하루 1층 화장품 판매직 안내를 맡은 36기 마네킹입니다. 고객님이 궁금해 하시는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설명할 것을 약속 드리면서 안내 시작하겠습니다.

   직원들의 하루는 이곳, 탈의실에서 시작합니다. 좁아 터지는 탈의실에서 각 매장의 직원들이 모여 옷을 갈아입고 쉬기도 합니다. 왜 휴게실이 아닌 탈의실에서 쉬냐고요? 방금 전 여기로 오면서 창고처럼 보이는 방 보셨지요? 거기가 본사에서 자기네들끼리 부르는 직원 휴게실입니다. 먼지가 많고 좁아서 거기에서 쉬느니 차라리 직원용 엘리베이터 앞에 상자 깔아놓고 쉬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었으면 각자 매장으로 이동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야합니다. 지각하면 샵마스터가 체크를 하거든요. 고객님들을 대하는 태도, 복장, 매장의 청결 등 샵마스터가 체크하는 항목은 다양합니다. 체크가 한 개라도 생기면 그 달은 샵마스터가 하는 욕 다 먹을 각오하고 닥치고 살아야 합니다.

   다행히 매장에 늦지 않게 도착했습니다. 샵마스터가 팔짱을 끼고 서 있네요. 막내 마네킹은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군요. 고객님, 아침 조회 하는 거 구경하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아침 조회는 간단합니다. 샵마스터가 복장 검사를 하고 본사에서 내려온 전달 사항을 말하고 다 같이 매뉴얼을 읽습니다. 매뉴얼은 이제 입에서 저절로 쏟아질 정도입니다. 막내 마네킹은 아직도 못 외웠는지 버벅거리는군요. 샵마스터가 노려보자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샵마스터의 얼굴이 어둡습니다. 고객님의 눈에는 저게 웃고 있는 걸로 보이십니까? 고객님은 마네킹이 아닌 사람이라서 잘 안 보이시는 겁니다. 지금 샵마스터의 기분은 최악입니다. 평소보다 입꼬리가 조금 내려가 있으니까요.

   “매출이 거지같네. 이러다가 본사에서 매장 빼라고 호출 오겠어.”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지요. 고객님께 말할 때와 같은 톤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걸 상상해보신 적 있습니까? 샵마스터가 들고다니는 노란 파일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는군요. 생각해보니 오늘이 월말이네요. 생돈이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목표 매출 2000. 모자란 매출 300.”

   샵마스터가 종이를 보면서 그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네요. 300. 그게 이번에 저와 막내 마네킹이 내야 할 돈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고객님. 저도 왜 제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다 모가지 안 잘릴려고 하는 짓이지요. 매출이 모자라면 본사에서 연락이 오고 매장의 마네킹을 바꿔야 합니다. 원래 있었던 마네킹이 해고되면 샵마스터는 새로 들어온 마네킹을 다시 교육 시켜야 하고 마네킹의 손에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매출이 늘어나지 때문에 이 방법밖에 없지요.

   ‘샵마스터님, 12개월 할부 부탁드립니다.’

   가매출이라고 합니다. 모자란 매출을 직원들의 돈으로 채우는 것이지요. 원래는 이번 달에 모자란 매출만큼 돈이 들어오면 직원들이 채웠던 돈은 다시 돌려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지요. 막내 마네킹이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박 언니는 가매출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회사에서 쫓겨났으니까요. 고객님도 박 언니를 알고 계십니까? , 맞습니다. 박 언니가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내린 그 마네킹입니다. 머리가 깨졌는데도 웃고있던 박 언니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고객님이 알고 계신 박 언니와 죽은 박 언니가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늘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고객님, 그렇게 어두운 표정 짓지 마십시오. 저희는 고객님의 사랑만 있다면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행복하니까요.

   밝은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고객님의 기분을 쉽게 좋아지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할인 행사이지요. 백화점만큼 돈 가지고 장난하는 곳은 없습니다. 할인 행사는 크게 두 개로 나뉩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도 일정 기간 동안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세일과 상품이 모두 팔릴 때까지 일정 기간 없이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는 가격인하입니다. 특히 세일은 세 달마다 하는 정기 세일과 주로 인기가 없는 브랜드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고객을 끌어 모으는 행사인 브랜드 세일로 나뉩니다. 고객님께서는 왜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에서 할인행사를 제일 많이 하는 지 알고 계십니까? 화장품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백화점 1층에만 해도 오십 개가 넘는 매장이 수백 가지의 제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사에서 화장품이 오면 그 제품을 다 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반 이상이 창고로 들어갑니다. 이런 제품들을 재고 처리하기 위해 하는 행사가 바로 할인 행사입니다. 식품의 유통기한에만 신경을 쓰고 화장품의 유통기한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손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할인 행사 때 그렇게 화장품이 미친 듯이 팔려나가는 것입니다.

   고객님께서는 할인 행사 때 쓰는 비용을 누가 낸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백화점에서 지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아닙니다. 행사 때 세우는 메이크업을 받는 모델과 마사지사를 한 번 부를 때마다 드는 판촉비는 모두 마네킹들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갑니다. 매장이 백화점에 속해 있지만 백화점에서는 매장에서 벌어지는 매장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게 가매출과 뭐가 다를까요? 오늘 새로 입점한 매장에서 행사가 열린다고 했는데마네킹들의 돈으로 열린 행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벤트 행사가 한창이군요. 원래 민낯이 예쁜 모델을 데려다 놓고 메이크업을 시켜주고 있네요. 저게 다 작전이지요. 멍청한 고객들은 메이크업을 받고 더 예뻐진 모델을 보며 저절로 나도 저 매장 화장품을 쓰면 저렇게 예뻐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 매장 메이크업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메이크업은 여기서 받으시고 화장품은 저희 매장 화장품 구입 하시기를 바랍니다.

   펄이 들어간 아이라인을 싫어하셨군요. 그러면 화를 내십시오. 화장품을 하나 내놓으라고 하셔도 괜찮고 본사에 항의 전화를 하시거나 SNS에 올리셔도 좋습니다. 혹시 한 번도 마네킹에게 화를 내 신적이 없습니까? 그러면 제가 화내시기 좋게 예를 들겠습니다. , 예를 들기 전에 블랙리스트에 대해 설명 해야겠군요. 백화점에서는 각 매장 마다 고객 블랙리스트가 있습니다. 매장에 자주 찾아오는 진상들을 모아다가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지요. 예전에 블랙리스트 중 제일 위에 적혀 있던 손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블랙리스트 1위 라는 것은 그만큼 성격이 지랄 맞다는 것이지요. 그 손님은 20대 초반의 여자 분이셨는데 마네킹을 가지고 노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잔뜩 사갔던 화장품을 한 번씩 써보고 다시 가져와서 환불해달라고도 하셨고 피부 트러블이 생겼다면서 고소를 하겠다고 난리 치기도 하셨지요. 제 눈 밑에 손톱으로 찍은 것 같은 흉터가 보이십니까? 이 흉터도 그 손님의 작품입니다. 요즘 그 손님을 이 백화점에서 보지 못했지만 다른 백화점에서 날뛰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다행이라고요? 아직까지 그 손님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직원들을 셀 수 없을 정도인데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손님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손님은 늘 있는데 다행일까요?

   질문 감사합니다, 고객님. 실은 저도 왜 블랙리스트를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블랙리스트는 진상 손님들에게서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회사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일본은 백화점에서 진상 고객에게 직원을 함부로 대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한국 백화점이 하는 일은 직원들 등 뒤에 숨어있는 것뿐입니다. 차라리 그 블랙리스트가 데스노트라면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말이지요.

   보안 요원 말씀이십니까, 고객님? 보안 요원도 백화점 직원입니다. 백화점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손님이 줄어드는 건데 직원인 보안 요원이 백화점이 싫어하는 일을 할까요? 쉽게 보안 요원을 마네킹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메이크업 때문에 화가 나셨다면 제가 대신 본사에 불만을 접수해 드릴까요? 접수가 들어가면 저를 이제 이 백화점에서 볼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네킹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러면 다른 매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고객님, 저기 보이십니까? 매장에 새 마네킹이 들어왔나 봅니다. 큰 눈을 깜빡이며 눈치 보고 있는 저 마네킹이 새로 들어온 마네킹입니다. 아직은 마네킹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네요. 저 정도는 아직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신입 마네킹과 저희 마네킹들의 차이가 바로 저것입니다. 신입 마네킹의 얼굴에는 표정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지요. 저 신입 마네킹 당분간은 피똥 좀 쌀 겁니다. 그리고 점점 이 생활에 아무렇지 않게 될 때 즈음 자기도 모르게 마네킹이 되어 있을 겁니다. 저도 저런 때가 있었냐고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고객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 맞습니다. 저 마네킹은 남자 마네킹입니다. 고객님, 그루밍 족을 아십니까? 여자처럼 자신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를 부르는 말입니다. 고객님 주위에서도 여자처럼, 여자보다 더 외모에 신경 쓰는 남자를 보신 적이 많이 있으시지요? 그런 남자 고객님을 위해 요즘 백화점에서는 남자 마네킹을 많이 채용하고 있습니다. 남자 고객님이 더 편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고 편하게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남자 마네킹이 요즘 대세인 것이지요. 마네킹이 남자라고 해서 그 매장에 남자 고객님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 마네킹이 있는 매장에 남자 고객님보다 여자 고객님이 더 많이 가십니다. 여자던, 남자던 마네킹을 뽑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외모입니다. 매장에 들어오시는 고객님이 보고 내가 이 화장품을 쓰면 저 직원처럼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쁘고, 잘생겨야 된다는 말이지요. 솔직히 마네킹이 각자 매장의 화장품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마네킹은 자기가 맡은 매장의 화장품을 30%정도 할인 받을 수 있지만 매일 지겹게 보는, 보기만 해도 던져 버리고 싶은 화장품을 고객님이라면 쓰시겠습니까? 무리한 다이어트와 철저한 피부 관리로 마네킹이 되었다는 걸 고객님들은 모르십니다. 피부 트러블이 나거나 살이 조금이라도 찌면 샵마스터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면박을 준다는 것도 고객님들은 모르시지요.

   어쨌거나 여자 마네킹이 예쁜 만큼 남자 마네킹도 잘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고객님들이 뭘 사지도 않으면서 남자 마네킹이 있는 매장에 그렇게 열심히 들락날락 하는 것이지요. 여자들이 뭘 하려고 남자 화장품 매장에 들어가는 걸까요? 재밌는 건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 남동생, 아는 친구의 선물을 사려고 왔다는 거짓말이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빠는 생전 스킨, 로션 발라본적이 없을 텐데자기 딸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걸 부모님이 아신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요? 다 남자 마네킹들에게만 좋은 일입니다. 백화점 고객들 대부분이 여자 고객이라는 것도, 성질 더러운 여자 고객들이 지랄을 하는 대신 정신 못 차리고 실실거리면서 제품을 사가는 것도 웃어주기만 해도 지나가던 여자들이 무슨 좀비마냥 매장에 들어오는 것도 여자로 태어난 거 서러워서 살겠나요. 물론 남자 마네킹들 말을 들어보면 힘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수작을 부리는 여자 고객님들도 있고 거북 할 정도로 스킨십을 한다거나 고객의 남자친구에게 욕을 들었다거나남자 마네킹들에게는 그게 힘들 수도 있겠지만배가 부른 것이지요. 적어도 여자 마네킹들처럼 고객님에게 뺨 맞고 무릎 꿇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고객님. 백화점에서는 이 점을 이용해서 여성 화장품 매장에 남자 마네킹을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백화점에 들어오려고 하는 남자 마네킹의 수가 적기도 하고 들어와봤자 모두 남성복 매장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여성 화장품 매장에 세울 남자 마네킹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고객님이 남자라면 남자 화장품 매장, 남성복 매장이 아닌 여성 화장품 매장에서 일하고 싶겠습니까? 아무리 그루밍 족이 뜬다고 하지만 그런 마네킹을 찾기는 어렵지요.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만 평소대로 개처럼 일하면 되는 것이지요.

   벌써 점심시간이군요. VIP 라운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0VIP 라운지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11회 사용 가능하십니다. VIP 카드 가지고 오셨지요? 괜찮습니다.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우기십시오. 마네킹들이 알아서 해드릴 겁니다. 라운지 앞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걸까요. 왠 남자 고객님을 막으려고 마네킹들이 애쓰네요. 저런 진상들 하루에 한 번은 꼭 있습니다. VIP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일까요. VIP 라운지에 들어가고 싶으면 저렇게 난동 부릴 시간에 매장에서 뭐라도 사는 게 더 나을 텐데……. 신경 쓰지 말고 라운지로 들어가시죠.

   VIP 라운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객님. 전망이 마음에 드십니까? 조명이 너무 밝은가요? 음료는 어떠십니까? 음악을 더 크게 틀어드릴까요? 읽고 싶은 책 제목을 말씀해 주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오른쪽을 보시면 안마 의자가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이용해 주십시오. 잠깐만 조용히 해달라고요? 알겠습니다, 고객님.

   …질문을 하셨으니 대답해도 될까요? 고객님의 말씀처럼 VIP라운지라고 해서 들어오는 고객님들이 다 드레스나 턱시도를 입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름만 VIP 라운지이지 여기에 진짜 VIP는 없습니다. 일반 고객보다 돈을 조금 더 쓰는 고객들을 VIP라고 불러주는 거뿐이지요. 진짜 VIP들은 이런 곳에 오지 않습니다. 이런 백화점 라운지보다 더 좋은 자기 집에 계시겠지요. VIP 라운지는 역할 놀이의 무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대에서 가짜 VIP들은 진짜 VIP를 연기합니다. 왕처럼 우쭐대는 사람들, 왕 맞지요. 고객은 왕이지요. 그놈의 왕들 다 단두대로 끌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마네킹에게 VIP와 일반 고객이 무슨 상관인가요. 어쨌거나 우린 마네킹인데.

   죄송합니다, 고객님. 아기 우는 소리가 신경 쓰이십니까? 지금쯤 마네킹들은 공사중인 엘리베이터 옆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텐데 아기 울음소리가 시끄러우시지요? 조용한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아무리 고객이라지만 이런 곳에 아기는 왜 데리고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객 중에서 제일 짜증나는 고객이 아기와 어린아이입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일반 고객님들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마네킹에게 상처 주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와 어린아이는 모르지요. 어린애를 보안 요원에게 보낼 수도 없고……. 손님의 아기에게 기저귀를 대신 갈아준 적도 있고 신제품을 마음대로 꺼내서 자기 얼굴에 바른 어린아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고 손님에게 욕을 먹은 적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죠. 저 애들이 자라서 이 백화점에 또 다른 진상 고객으로 온다면가끔씩 백화점에 나이 제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듣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 주위에는 아이가 없습니다. 애초에 백화점에 이력서를 낼 때 기혼이라면 뽑지 않고 미혼이라고 해도 면접 때 결혼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봅니다. 제가 앞으로 결혼을 하거나 임신을 할 거라고 대답을 했다면 여기 있을 수 없었겠지요.

   임부복을 입은 샵마스터를 보셨다구요? 샵마스터를 저희와 같은 마네킹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샵마스터는 정말 마스터같은 존재입니다. 감옥같은 이곳에서 버텼으니 임신 정도는 허락해줘야지요. 샵마스터가 아닌 일개 마네킹에게 결혼과 임신은 정말 꿈입니다. 몰래 결혼을 하는 마네킹도 있지만 청첩장을 돌리지 못하지요. 임신을 했다면 끝까지 숨기다가 쫓겨나다시피 백화점을 나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결혼과 임신. 그것은 저 일 그만하겠습니다와 같은 말이지요. 백화점의 입장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백화점 관리자였다면 애초에 기혼인 애가 있는 마네킹들을 뽑지 않았겠지요. 애가 아프다, 방학이다, 집에 돌봐줄 사람이 없다그러면 일은 누가하라고. 임신을 한 마네킹들에게 축하한다는 말 대신 인상을 찌푸리겠지요. 배 불러 있는 상태로 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고 퉁퉁한 겉모습을 고객님들이 보기 불편할 거고 그렇다고 새로운 마네킹을 뽑고 일을 가르치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규칙 상 애 낳으러 나간 마네킹에게 월급은 줘야 하고백화점만 손해니까요. 하지만 원래 임신을 했던, 결혼을 했던, 처녀인 미혼이던 간에 원래 손해를 더 많이 보는 것은 마네킹 아닌가요?

   아닙니다, 고객님. 괜찮습니다. 어떻게 손님 앞에서 구두를 벗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발밑에 불을 피운 것처럼 발바닥이 뜨겁지만 괜찮습니다. 이 고통으로 밥줄이 끊어지면 정말 아프게 될 테니까요.

관심 감사합니다, 고객님. 보통 아홉 시간정도 구두를 신고 있습니다. 그 중 구두를 벗고 바닥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휴식시간인 40분 정도입니다. 시간을 그거밖에 안 줄거면 아예 구두를 계속 신고 있는 편이 낫지요. 벗다가 다시 신으면 더 아프니까요.

   고객님, 친구분들이랑 잔뜩 멋 내고 하루 종일 시내 돌아다녀보신 적 있으시지요? 한 걸음 내 딛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쓸리고 발가락이 짓눌려서 식은땀까지 나던 그 아픔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다음 날 다리만 아프셨습니까? 발가락, 발바닥은 물론 종아리, 허벅지, 허리까지 욱신거려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고객님이 이런 상황이라면 정말 침대에 가만히 누워 찜질을 하면서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겠지요. 하지만 저와 같은 마네킹은 다릅니다. 침대에 있을 시간에 씻고 화장하고 옷 갈아 입고 출근을 해야 합니다. 퉁퉁 부은 발을 또 구두로 조여야 합니다. 구두를 신고 등산하는 기분이라고 하면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습니까?

   병원이요? 백화점에서 아픈 마네킹이 한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파봤자 다리정도겠지, 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네킹들끼리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갔다 오자, 라고 서로 약속 했다면 몇 명이나 출근을 할까요? 병원을 갔다가 돌아올 수 있는 마네킹이 있을까요? 입원을 한 마네킹의 수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렇게 꾹꾹 참고 일을 하니까 입원 정도는 양호한 것이겠지요.

   네, 고객님. 고객님에게 메이크업을 해드리기 위해 매장에는 의자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매장을 돌아다닐 때 의자에 앉아 있는 마네킹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으실 겁니다. 매장 안에 있는 의자에 앉는 마네킹은 백화점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의자가 앉아서 쉴 수 있는 것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할 때 쓰는 도구이지요. 2년 전,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계단에서 넘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발목을 삐끗해서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샵마스터에게 잠깐만 앉아 있으면 안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샵마스터가 제게 뭐라고 말 했는 줄 아십니까?

   ‘앉고 싶으면 손님 데려와.’

   여기서 의자는 앉아서 쉬는 물건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라운지에서 푹 쉬셨습니까? 커피 테이크아웃 해 드릴까요? ,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1층 매장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은 매장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고객님. 저희 매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B 매장은 엘리베이터 바로 옆쪽에 있습니다.

   네, 원래 B 매장의 위치는 1층 중앙이었습니다. 백화점에서는 매출이 좋은 매장만 가장 좋은 자리인 중앙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B 매장은 지난 봄, 매장 위치를 옮겼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객님. 고객님의 말씀대로 백화점에서는 모든 게 매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있습니다. 매출이 인격이다. 그만큼 매출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손님들에게서 많은 돈을 뜯어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매장에서 왜 할인 행사를 하고 증정품을 더 챙겨주고 VIP 라운지에 초대하고 메이크업을 해주는 줄 아십니까? 모두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손님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단골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1층에만 해도 화장품 매장이 수십 개가 넘습니다. 한 손님이 계속 같은 매장을 가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단골을 만드는 겁니다. 일종의 보험이지요. 매출은 인격입니다, 고객님. 본사에서는 일하는 마네킹들의 성실함이나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샵마스터의 일이지요. 본사의 일은 얼마나 많은 매출을 끌고 오느냐, 이것뿐입니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니고객님, 그 말씀이 얼마나 잔인한지 아십니까? 저는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배가 아픕니다. 전날 고객님에게 들었던 욕설이 귓가에 맴돌고 속이 울렁거리지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출근해서 웃으며 고객님을 맞이하는 것뿐입니다. 만약에 제가 이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결국 다시 하게 되는 일은 화장품 판매직이겠지요. 한 일을 오랫동안 하면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요. 저는 마네킹입니다. 마네킹이 백화점에서, 매장 밖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고객님께서는 버려진 마네킹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팔 다리가 떨어지고 얼굴이 일그러진그렇게 망가졌는데 웃는 얼굴인 마네킹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매일 봅니다. 살아서 돌아다니는 마네킹도, 의류 매장에서 더 이상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린 마네킹도 그리고 거울 속에 저도. 모두 웃고 있지만 그 속에서 아픔이 느껴지지요. 얼굴에 찍힌 웃는 표정을 한 채 포즈를 취하고 여기저기 매장에 세워진 마네킹에게 수고했다라는 말을 건네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연히 이런 게 마네킹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지요. 고객님도 제가 정말 마네킹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우영

010-4128-9667

wyoung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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