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by yeorim posted Sep 14,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달동네                                                                           

     

 검게 탄 채 식어빠진 고기 몇 점이 불판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우린 졸렸다. 어서 이 술자리가 끝나길 원했다. 문제는 철이었다. 철이의 쓸데없는 열변이 우리의 헤어짐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성?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 네가 하루 종일 하는 행동 중에 이성적인 게 몇 개나 돼? 밥 먹으면 똥 싸고, 똥 쌌으니까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연예인 기사 좀 보다가, 상사 눈치 보다 퇴근하고. 이성적이라고 할 만한 행동은? 뭐가 있지? 우리가 딱히 개보다 낫다고 할 순 있을까? 굳이 개보다 우쭐할 수 있다는 건 개를 평가할 수 있다 뿐 아니겠어? 아니지, 개들도 우릴 평가할 거야. 그러니 우린 그걸 말로 공유하고 있다 뿐 아니겠어? 개나 사람이나. 이성은 개뿔.” 

 

 오래간만에 우린 학교 앞 부산집에 모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처음인 듯하다. 그러면 거의 1년 만이었다. 우리 셋 누구도 고향이 부산은 아니지만 우린 늘 부산집에 왔다. 그냥 오다 보니 계속 오게 되었다. 닭똥집을 먹다, 질리면 닭 곱창을 먹고 닭 곱창이 질리면, 닭갈비를 먹고 누가 돈이라도 좀 생겼다 싶으면 감자탕을 먹기도 했다. 나랑 혁이는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감자탕을 먹을 여유 정도는 있었지만 그냥 추억 삼아 닭똥집과 닭 곱창을 시켜놓았다. 철이는 특히 닭 곱창을 좋아했는데 맛이 있기도 했지만 닭도 곱창이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재미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하긴 닭의 똥집도 먹는데 곱창을 못 먹을 이유는 없지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사실, 우리 중 누군가의 의지가 아닌 박형의 의지 덕분이었다. 박형은 우리 과의 두 학번 선배 형인데 자기에게 술값이 조금 생겨서 너희에게 술을 사주고 싶다며 불러 모은 것이다. 대학생활 내내 가난했던 우리보다 더욱 가난했던 박형이었기에 나름 신선한 부름이었다

 철이가 저런 소리를 떠들어대는 것은 조금 전 박형이 떠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러니까 박형이 있을 때 까지는 묵묵히 소주잔만 비워대던 놈이 갑자기 터져버렸다.      

 

 “아니이. 내 말은 그런 말이 아니잖아. 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현실적으로.”     

 

 혁이가 대화를 얼버무려 보려 하지만 사실 이럴 땐 그냥 떠들게 둬야 한다. 그래야 우린 집에 갈 수 있어.     

 

 “현실적...이라고? 하고 싶은 말을 막고 사는 게 현실적인 거냐? 그러니까 이곤희 회장님께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현실은 현실이고 주면 안 된다고 떠드는 건 이상적인 거다? 넌 씨바. 직장생활 잘해라. ? 그렇게 현실적으로 묵묵히 성실히 일만 해. 알았지? 넌 떠들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나는 혁이에게 손짓 눈짓을 동원하며 더 이상의 말을 막았다. 집에 좀 가자는 심보가 강했지만,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철이 말이 맞다. 그런데. 그래서? 이렇게도 떠들고 저렇게도 떠들고, 떠들 자신이 없어 침묵하고. 이 모든 것이 다 현실일 뿐이니까. 침묵이 죄냐?라고 하려다 그냥 침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것을 재빠르게 간파한 나는 냉큼 야. 가자. 우리 내일 출근해야 해. 라며 일어섰다. 혁이도 옷을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철이는 미동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가자고 어깨를 흔들어 대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 우리 한 잔만 더하자. 사실 나 할 얘기가 좀 있어.”     

 

 . 할 얘기라니. 혁이를 쳐다보니 혁이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젓는다. 어쩔까. 혁이는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쌩하니 가버렸다. 철이의 눈빛이 넌 가지마라고 붙잡는다. 그래. 붙잡히지 머.     

 

어머니. 여기 감자탕 하나 주세요. 저희 더 먹고 갈게요. 너 별 얘기 아니면 죽을 줄 알아.”               

 

*          

 

 박형은 한동안 무직으로 지내다가 최근에야 작은 시민사회단체에 취직을 했다. 아마 돈은 얼마 받지 못할 터였다. 그랬다. 처음에 돈이 좀 생겨서 술을 사주고 싶다고 연락이 왔을 땐, 와 우리가 이 형한테 술을 다 얻어먹네 하며 설렜었다. 회를 사달라고 할까 고기 좀 뜯을까 하며 나와 혁이가 카톡방에서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박형이 말했다. 나 전재산 5만 원 있으니까 그 선에서 알아서 골라

 

 하하. 그럼 부산집 고고.

 

 오늘 술자리를 주최한 박형이 우릴 부른 이유는 그냥 술이나 한 번 먹자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이곤희 회장의 철학박사학위 수여를 반대한 학교 후배들 이야기를 좀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 술이 좀 땅기셨겠지.  

 이곤희라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회장님께 개개던 학생들에게는 마땅히 징계가 내려졌다. 출교라는 것이었다. 출교. 이 낯설고도 낯선 단어가 온 세상 언론을 뒤덮었다. 학생들은 학교 본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여러모로 웃긴 사건이었다. 대기업 회장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주는 학교도 웃기고 그걸 반대한다고 학생들을 내쫓는 학교도 웃기고. 하하.

 이 웃긴 이야기를 안주 삼는 걸 좋아하는 박형이 사실 졸업 후에는 만나기 힘들다가 오래간 만에 우리를 소집한 터였다. 박형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본격적으로 눈빛을 번뜩이며 이야기를 꺼냈다

 

 담배를 한 대 물고는,

 “. 졸업 한 우리들도 힘을 좀 보태야 하지 않겠냐? 난 요즘 맘이 걸려서 일이 손에 잘 안 잡힌다. 투쟁하는 후배들 돈이라도 좀 보태줘야 맘이 편하겠어. 조금씩이더라도 모으면 좀 나을 테니까. 사실 내가 너희 술 한 번 사주려고 열심히 10만 원 정도 모았거든. 근데 술이야 좀 덜 먹으면 그만인 거고. 그래서 내가 오늘 5만 원 있다고 한 거야.”     

 

 5만 원을 쾌척하시겠다는 이야기다. 놀라운 액 수지. 정말 지지리 가난했던 형이거든. 그래.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야죠 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혁이가 굳이, 말을 꺼냈다.     

 

 “. . 근데 제가. …….”     

 

 혁이는 학교 선생이었다.  

 

 “저희 학교 완전 꼴통인 거 아시잖아요. 그 두사부일체 영화, 그 영화가 저희 학교 이야기예요. 영화도 나오고 사람들도 많이 봤는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그래서 저 이런 짓 한 거 학교에서 알기라도 하면 당장 모가지예요. 당장.”     

 

 그렇다. 혁이는 학교 선생이었다.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 게다가 사립학교 선생. 선생이 이런 일 가담하면 안 되지. . 근데 왜 저리 쪼다 같이 느껴지는지.     

 

 “아니. 학교 선생이 애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지. 이게 왜 못할 짓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너희 반 애가 선생님 학교에서 이런 일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머라고 대답할래? 이게 눈 감는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잖아.”

 

 박형은 약간 흥분했다.        

 

 “. 그럼. 관심 끄고 공부나 하라고 하고 쉬는 시간에 담배나 한 대 펴야죠. 별 수 있나요.”     

 쪼다 같았다. 혁이가. 철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바라보는 철이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 저는 낼래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제가 길바닥에 앉아서 구호 외치는 것도 아니고. 돈 조금 보태는 건데요 머. 근데 어떻게 전해 줄 거예요? 아는 후배 있어요?”     

 

 그때였다. 철이가 입을 뗀 것은.

 

 “나 있어. 아는 후배.”     

 “그래. 잘됐네. 철아. 네가 돈 좀 전해줘. 힘내라고 해주고. 명의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아는 학교 선배들이라고만 해주고.”

 “.”

 “모처럼 만나서 좀 기분 좋게 술만 마셨으면 좋았을 텐데. 별로 그럴만한 세상이 아닌 것 같다. 그것도 학교 앞에서 술 마시려니 농성하는 후배들 생각도 나고 좀 그러네. 그리고 혁이 너 졸업하자마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냐. 같이 대가리 깨지게 싸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곧이어 한때, 아주 잠시 과를 주름잡던 우리의 회고담이 쏟아져 나올 타이밍이었지만 박형은 다른 약속이 있다며 떠나버렸다. 사실 이미 돈 5만 원어치의 술값은 소진한 상태이기도 했고. 어릴 땐 돈 5만 원이면 엄청난 술값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입술을 적시는 비용 정도였다. 도대체 그 많은 술을 무슨 돈으로 먹었었던 건지. 암튼 박형은 떠났고, 혁이는 시대가 변했다느니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느니 하며 꼰대 같은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내뱉었고 나는 침묵했고 철이는, 철이는 묵혔던 감정을 뒤늦게야 폭발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대학 1, 2학년 때만 해도 철이가 말이 없거나 내성적인 기색이 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실상 날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싹싹하고 활동적이며 심장이 저토록 뜨거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런 아이.                

 

*               

 

  우리는 대학 동기였다. 아니, 동기다. 같은 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을 했다. 당연하겠지만 처음부터 우리 셋이 붙어 다닌 것은 아니었다. 1학년 초에는 어마 무시한 과행사들이 즐비했고 난 체력이 달렸고 혁이는 버틸만한 듯했고, 철이는 넘치는 에너지를 늘 흘리고 다녔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매력이 있게 마련이다. 철이 주변에 동기들, 선배들이 늘 넘쳐났다. 아니, 정확히는 철이가 사람들이 있는 곳에 늘 달려갔다. 언제든. “난 우리 과 사람들이 너무 좋아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어마 무시한 과행사, 쉼 없는 술자리. 낮과 밤을 가르지 않는, 아니 24시간 중 어느 타이밍도 방심할 수 없는 그런 쉼 없는 술자리가 즐비했다. 교정 어딘가, 누군가의 자취방, 허름한 술집, 특히 부산집 같은 곳은 하루의 시작이거나 끝인 곳이었고 그곳엔 항상 철이가 있었다. 나도 철이가 좋았고 모두가 철이를 좋아했다

 1학년 시절을 떠올리면 화창하다 못해 화려한 햇살, 그 햇살 아래 넓은 그림자를 마련해주고 있는 어떤 나무, 그 나무 아래 잔디밭, 그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입이 귀에 걸려있는 철이의 웃음.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 철이의 옛날 얘기는 그만하고.     

 철이의 옛날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 건 내가 집에 가길 포기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내뱉은 철이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 보람이 만났다.”     

 

보람이? , 철대위의 그 보람이?라고 나는 내뱉었다. 그러고선 우리 둘은 잠시 침묵했다. 나는 옛 생각을 했고. 철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 보람이 어떻게 지내냐? 소식을 통 듣지를 못했네.”

 “관심은 있었고? . 충청도 쪽 대학에 들어가서 다니고 있어.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 무슨 일 있어?”     

 

 철이는 아무 말 없이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버지, 보람이 아버지. 돌아가셨대

 “? 언제? ?”

 “. 시름시름 앓다가. 몸이 안 좋으셨잖아. 좋으실 수가 없겠지만.”       

 

 . 그래? 나도 말없이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보람이 아버지, 보람이, 철대위. 이 단어들은, 아니 이 사람들은 아픈 단어들이다. 가라앉았던 생채기들이 훅훅 떠올라 술기운을 더했다. 돌아가신지는 이미 석 달 정도 지났다고 했다. 1학년 여름방학 끝날 때쯤이 마지막 기억이고 보면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무언가 비극적인 결말이 예상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예상되는 비극도 접하고 나면 슬플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그렇지만 비집어 내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세력과의 싸움, 내가, 아니 나와 철이와 혁이와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세상과의 싸움. 그것이 철대위 싸움이었다.          

 

*          

 

 그러니까 그 화창하다 못해 화려한 햇살 아래서 술을 퍼질러 마시며 하하 호호하던 대학 새내기라는 시절.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운다는 그 새내기 시절. 새로운 어떤 것은 강의실이 아닌 술자리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그 시절. 5월의 어느 날

 술을 퍼마시고 누구의 집인지도 모른 채 널브러져 있던 그 어느 날. 분명 함께 술을 마시고 함께 널브러져 있었던 박형이 멀쩡한 눈빛, 아니 무언가 긴밀한 눈빛으로 우리를 깨우며 말했다. 자신과 갈 데가 있다고.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그날따라 누군가의 집에 널브러져 있던 사람이 박형과 나, 철이, 혁이였다. 그 날 이후 우리는 꽤 끈끈한 인연이 되었다. 술이 맺어준 것일 수도 있고 박형이 맺어준 것일 수도 있고. 아님, 철대위 그분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굴지의 대기업 덕분일지도.

 암튼 박형은 우리를 데리고 학교 뒷길을 걸어 올라갔다. 학교 뒤에는 산이 있었고 학교와 산 사이에는 도로가 있었다. 그러니 학교와 산을 끼고 올라가는 도로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학교 기숙사가 나온다는 정보 외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 모를 시절이었다. 박형은 묵묵히 앞장서 올라갔고 우리는 헐떡이며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기어이, 도착했다. 그곳에.

 학교에서 불과 10분 정도의 오르막길을 올라갔을 뿐이었다. 오른편에는 10분 내내 산이 나왔고 계속 갔어도 산이 나왔을 것이다. 그 산자락 밑에 나부끼는 플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무언가 괴기스러운, 그때가 화창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괴기스러운 그 플랑을 보고 느꼈던 나의 마음은 형용이 잘 되지 않는다. 다만 내 엄지발가락에 근육이 있음을 태어나 처음 느낀 순간이긴 했다. 말려들어갔으니까. 두려움 혹은 거부반응, 아님 둘 다였겠지

 우리는 살고 싶다!같은 말이었다. 하얀 천에 빨간 글씨, 그것도 흘러내릴 듯한 빨간 글씨. 그런데 바람이 불고 있었던 듯 플랑이 나풀나풀거렸다. 어서 오라고 몸짓하는 듯. 아니 제발 와 달라고 절규하는 듯. 살고 싶다니?! 그때 박형이 얘기했다. 이곳이 서울에 마지막 남은 달동네라고. 이곳이 철거되려고 한다고. 진짜 존재한다니. 달동네가! 철거가! 티브이 속 흑백 영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기분이었다.

 암튼 멍했다. 멍한 채로 그 마을에, 달동네라는 그 동네에 발을 집어넣었다. 우리 셋 모두. 우리만 온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학교로 보이는 다른 과 친구들도 보였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그런데 하필, 아니 하필이랄 거 까진 없지만, 도착하자마자 보았던 광경은 다시 한번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비명소리, 욕지거리 같은 것이 저 편에서 들려왔고 민머리에 배불뚝이 아저씨, 웃통을 까고 있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여남은 명의 아저씨들에게 끌려오다시피 붙잡혀 오고 있는 광경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머리 어딘가 피가 흐르고 있는, 그 배불뚝이 아저씨는 용역깡패였다. 그렇게 불렸다. 깡패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깡패보다는 용역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심부름꾼이니까. 어디선가 드라마 감독이 !’을 외쳐줄 것만 같은 그런 상황이 컷 없이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용역깡패를 무찌른 후 철거 대책 위원회 분들과의 간담회가 이어졌다. 어설프게 버티고 서있는 슬레이트집들 앞 작은 마당에서 아줌마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를 나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둘러쌓고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굴지의 대기업에서 고층아파트를 세우려고 우리를 내쫓으려고 하고 있고, 용역깡패들을 시켜 늘 침탈의 위험을 받고 있으며, 망루를 세우고 보초를 서가며 침탈에 대비하는 중이다. 는 이야기. , 마을 입구에 있던 것이 망루였구나.라고 깨달을 때쯤 굴지의 대기업이 용역깡패들을 시켜서 벌이고 있는 만행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셨다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숨겨놓고는 등짝을 그어대고 도망간다든지, 벌건 대낮에 빈집에 들어와 부녀자를 겁탈한다던지, 시시때때로 쇠파이프 같은 것들을 들고 우르르 몰려와 시위를 한다든지. 머 그런 이야기. 겁탈, 면도날 같은 단어들이 뇌리를 때렸다. 심장은 두려움, 분노 거기에 알 수 없는 어떤 감정까지 더해져 콩닥콩닥 거렸다.  

 분노와 당황함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던 중에 무언가 찜찜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나의 찜찜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장면이 지나갔다. 경찰차가 지나갔으니까. 경찰차가 순찰 중이라는 팻말을 앞 유리에 버젓이 붙여놓고는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너무 놀라서 박형과 철이, 혁이를 재차 부르며 얘기했다. 저기 저기 경찰차가 지나가네. 신고하면 되지 않아?

 돌이켜 보면 난 참 순진했던 것 같아.

 박형은 그렇다 치고 의외로 철이나 혁이도 별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아니 별 대꾸조차 안 해줬던 것 같다. 그리고 그냥 내가 알아서 이해했다. 아니, 이해해야만 했다. 이게 세상이라고.

 얼추 간담회가 끝나자 부녀회장님께서 대학생들이 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밥은 먹고 가라고 하셨고, 그렇게 육개장 사발 면과 김치 몇 접시가 오른 푸짐한 상을 받았다. 맛있었다. 슬프도록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옛날 초등학교의 교실에서나 보던 의자 두어 개가 올려져 있는 망루라는 것을 힐끗 보고는 우리는 다시 산을 끼고 내려가는 그 도로를 바라보고 섰다. 까치발을 들면, 아니 들지 않아도 저 아래편에는 우리의 학교가 내려다 보였다. 해가 져서 어느덧 깜깜해졌지만 학교는 빛나고 있었다. 환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들리진 않지만 왁작 지껄한 웃음소리도 들려오는 듯한 그곳. 학교는 스스로 빛날 줄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불과 조금 전까지 신나 있었다. 10분 남짓한 간격을 두고 이렇게 다른 세상이 펼쳐져있다는 것이 무섭고 조금은 웃겼던 것 같다. 살려주세요! 라니

 나와 혁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내려갔고 철이는, 철이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박형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얘기하며 우리의 앞에서 걸어 내려갔다. 하늘에 달이 떠있었는데 달이 참 가까이 있었다.               

 

*     

 

  돈은 잘 건네줬어?

  응응

  수고했다. 분위기는 어때?

  , 너 지금 통화되냐?

  ……. 지금은 좀 그렇고 이따 분위기 봐서 전화할게

  ㅇㅋ

 철이랑 메시지를 주고받고 상사 눈치를 보며 인터넷을 켰다. 어떤 아이가 울고 있는 얼굴, 그 얼굴이 가득 찬 사진이 메인에 떠있는 기사를 클릭했다

 출교를 지명받은 아이들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친구의 이발기에 머리를 맡기고 있었고 그 앞에는 친구의 이발기를 바라보며 흐느끼는 친구들이 앉아있었고, 그 흐느끼는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슬픈 얼굴이 카메라에 담겨 나의 눈 속으로 들어왔다. 잠깐 숨을 내뱉고는 댓글을 살피기 시작했다. 곧 댓글을 살피기 위해 내린 스크롤을 움켜쥔 나의 손이 움찔했다.

 이제 더 이상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아마 나의 학교 후배들일 가능성이 농후한 아이들의 성토가 가득했다. 마찬가지로 나의 학교 후배들인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좌빨, 빨갱이 같은 단어들이 마치 상표처럼 덕지덕지 붙어졌고 고등학교 친구, 중학교, 초등학교 친구라는 아이들의 경험담도 쏟아졌다. 저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와는 다르게 태어난 아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우리는 저들과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몸부림.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댓글들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사가 의자를 툭 치고 지나가지 않았으면 몰랐을 뻔했다. 철이가 보고 싶어 졌다. 화장실을 가는 척 전화를 걸었다.     

 

 “그 날 잘 들어갔냐?”

 “. 그건 됐고. 너 목요일에 나랑 같이 자자.”

 “이런, 변태 같은 새끼. 내가 너랑 왜자?”

 “븅신. 그 애들 본관 앞에 천막 쳐놓고 농성하잖아. 근데 학교가 천막 철거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거든. 그래서 애들이 밤마다 순번 정해놓고 거기서 자기로 했는데 우리도 하루 정도 자는 거 어때?”

 “. 그래? . 참나. 나 직장인이야 인마.”

 “됐고. 목요일이다. 그 날 봐.”     

 

 . 무언가 할 말은 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듣기만 하고 끊어버렸네. 철이의 말은 늘 이랬다. 친근한 명령조. 거부하기 힘든 그 어떤 힘을 가진. 철이가 하자고 하면 우린 늘 함께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1학년 때 이야기일 뿐.

 철이는 2학년 때부터 휴학을 하더니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계속되는 휴학 끝에 기어이 제적이 되었다. 철이가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나였지만, 아니 우리였지만, 아니 우리 과였지만 사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모두 다 일상으로 돌아갔다. 새내기, 잔치는 끝난 뒤였으니까

 그러다 몇 년이 흘렀을까. 내가 졸업준비에 정신이 없기 시작한 후부터니 꽤 오랜만에, 아니 아주 오랜만에, 하지만 왠지 계속 만나왔던 기분의, 철이가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나타난 철이는 말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었던 것 같다. 묵묵히 도서관에서 책만 봤고 책만 봤다

 아무 말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린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고 안부도 물었으며 가끔 밥도 먹었다. 그런데 그에겐 영혼이 없는 듯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렇게 지내왔다. 나도 취직을 하고 혁이도 선생이 되고, 우리의 선후배들이 사회로 떠나가며 심심풀이 대화로 철이의 안부를 걱정하곤 했다. 철이 언제까지 저렇게 살까. 머 그런 얘기.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든다. 철이가 학교 밖을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이유는 모르겠지만.               

*               

 

 달동네. 달 외에는 누구도 비춰주지 않는 그런 동네

 달이 떠있던 밤에 나와 혁이와 철이는 망루를 지키기 위해 산과 학교를 끼고 있는 그 길을 걸어 올라갔다. 학생들도 같이 망루를 지키기로 했고 오늘이 우리 차례였다. 삐거덕거리는 망루 위 의자에 앉았다

 아카시아와 녹음이 우거진 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산을 스쳐 콧속으로 들어오는 산바람과 가까이 떠있는 달과 적당한 조명까지. 모든 것이 봄 그 자체였던 그 날. 옆에 앉아있는 철이가 여자였다면 예고에 없던 고백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날. 우린 망루 위에 있었다.      

 우리가 망루에서 침탈을 대비하며, 그렇지만 사실은 수다를 보다 더 떨며 앉아있을 때, 박씨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우리는 망루 위를 지키고 철대위에서 나오신 아저씨들은 망루 밑에서 돌아다니시며 망을 보셨는데 오늘이 마침 박씨 아저씨가 당번이셨다

 박씨 아저씨는 이 곳 철대위 위원장님의 불알친구이자 철대위 총무를 맡고 계신 분이었다. 철대위 위원장님이 포근하고 푸근한 얼굴과 몸매를 가지셨다면 박씨 아저씨는 한마디로 깡다구 있게 생기셨다. 아니, 실제로 깡다구가 넘쳐나는 분이셨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셔서 위원장님과는 둘 도 없는 친구셨고 싸움도 두 분이서 가장 앞장서 진두지휘하셨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고생 많다며 음료수를 주시고는 한 손에는 쇠파이프를 들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셨다

 조금 있으니 보람이가 쪼르르 나타났다. 보람이와 우리는 이미 일면식이 있은 터였다. 보람이는 철대위 위원장님의 딸이었다. 나이는 우리보다 한 살 어려 당시 고삼.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집에 살고 있으니 극기에는 최고의 조건을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보람이처럼 학업에 집중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나름 우리가 명문대 대학생 아닌가. 그래서 대학생들이 학과 별로 나눠서 아이들을 맡아 과외를 해주기로 했었다. 나와 철이와 혁이가 맡은 학생이 보람이었다. 사실 말이 과외 선생이지 한 살 밖에 차이가 안 나고, 우리도 고삼을 벗어 난지 얼마 안 되었으니, 무엇을 가르치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사이이긴 했다. 간단한 인사 정도만 했고 상대는 여자라 조금 뻘쭘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철이가 있었다. 첫 만남에서도 철이가 주도했다. 물론 공부 얘기는 하지 않았다. 보람이의 눈빛에 학업에 대한 의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앞으로 자주 만나서 얘기 나누자는 정도.

 보람이가 빵과 음료를 챙긴 쟁반을 들고 웃으며 나타났다. 박씨 아저씨 쪽을 바라보며 담배 좀 그만 피우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씩씩한 녀석. 괜히 씩씩한 보람이 앞에서 주눅들은 눈빛으로 바라본 우리가 웃겼지. 당당한 눈빛의 보람이를 보며 내심 놀랐었는데 그런 눈빛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보람이에게 멋진 아버지가 있어서였을 것이다.라고 상상해봤다. 빵과 음료를 먹으며 보람이와 수다를 떨며 그렇게, 그렇게 예쁜 밤을 지새웠다.

 물론 그곳의 기억이 그렇게 예쁜 밤의 단란한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용역 깡패들과 쇠파이프를 들고 대치하기도 했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더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하기를 호소하기도 했고, 굴지의 대기업 앞에서 데모도 했고, 철대위 사람들이 모인 회의장에서 뜨겁게 토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철대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꼭 그런 날의 밤 풍경만 떠오른다

 

*               

 

 목요일이 되었다. 전혀 반가울 것 없는 오늘 밤의 일정이 내색할 수 없는 설렘을 부여했다. 철이와 밤을 보내게 돼서 그런지 아님 오랜만에 투쟁이라는 것에 나서서 그런지. 겨우 하룻밤 잠자러 가면서 투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니. 내가 조금 웃겼다.     

 철이는 먼저 와있었다. 나는 소주 두어 병과 과자 몇 봉지를 담은 검은 봉지를 씩 웃으며 내밀었다. 철이도 씩 웃었다. 조그만 천막의 바닥에 스티로폼이 깔려있었고 그 위에는 은박 돗자리가 몇 개 놓여 있었다. 바닥 위에는 학교 본관(아마 화장실일 것이다)에서 끄집어낸 것으로 보이는 돌돌이 전선에 난로가 꽂힌 채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겨울이 아니었으므로 별로 춥지 않았고 소주가 맛있을 만한 적당한 날씨였다

 천막 안에는 천막을 방문해주는 사람들이 적고 간 대자보의 응원 글, 피켓, 잡기장, 유인물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옛 추억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오늘을 느껴보기도 했다. 내일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정도

 혁이한테는 연락 안 했다. 는 철이의 말에 별 대꾸하지 않았다. 철이도 말을 던져놓고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소주를 별 말없이 주고받았을 뿐이다

 오늘은 물어봐야지. 오늘은 왠지 철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사실 나의 발길을 이곳으로 끌고 왔는지도 모른다.      

 

 “. 이제 얘기 좀 해봐. 너 도대체 어떻게 지낸 거야?        

 

 텐트 앞 잔디 위에 드러누워 있는 철이의 옆에 나도 따라 누우며 물었다. 그런데 철이는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 난 모든 기억이 이런 밤하늘에 멈춰있는 것 같아. 별이 비추는 이런 밤하늘. 다른 그림들은 도통 떠오르지가 않네.”     

 

 나도 말없이 하늘을 봤다. 나도 안다. 이런 하늘. 슬프게 예쁜 하늘.     

 

 “그곳이 모조리 철거되고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야. 보람이한테 연락이 왔어. 애가 어찌나 슬프게 우는지”     

 

 궁금했다. 철거가 되고 난 이후의 일들이. 그 속에 너의 이야기가 있었구나.  

 그런데 철이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철이를 바라보는데 철이가, 울고 있었다. 그래서 또, 기다렸다. 철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순간이 다는 아니니까.

 한참을 기다려 듣게 된 철이의 이야기, 아니 보람이 이야기, 아니 어쨌든 달동네가 철거된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곳이 침탈 후 철거가 되면서 자연스레, 아니 부자연스럽지만 자연스레, 보람이 아버지는 수배가 되었다. 투쟁을 이끈 주동자였으니까. 그래서 보람이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보람이 아버지는 이 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수배생활을 해야 했으니까. 보람이는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서 기별이 왔다. 모처에서 만나자고. 눈물 나게 기뻤다. 그래서 보람이는 너무나 설레는 마음으로 모처로 나갔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아버지를 못 만나니까

 만나기로 한 곳에 만나기로 한 시간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먼발치에서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 했다. 하지만 참았다. 몰래 봐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때, 아버지의 뒤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곧이어 나타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 무리에 박씨 아저씨가 있었다고 했다. 그 불알친구 박씨 아저씨. 보람이를 딸처럼 아껴주셨다던 박씨 아저씨. 박씨 아저씨를 필두로 한 그 남정네 무리는 보람이의 눈앞에서 보람이 아버지를 잡아갔다. 이번엔 소리를 쳐도 되는 상황이지만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소리를 내려할수록 더욱

 안개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소리뿐이라지만 그 소리를 크고도 멀리 내는 것이 사실 어디 쉽냐?라고 철이가 물었다. 딱히 대답을 들으려는 질문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박씨 아저씨가 보람이 아버지를 경찰에 넘겨버린, 씨바 머 그랬단 얘기야?라고 나도 딱히 대답을 들으려는 의도가 없는 질문을, 아니 그냥 비명을 질렀던 것 같다

 이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날 이야기가 왜 드라마가 되지 못하고 현실이 되어버린 걸까. 카메라가 없어서 일까. 유명 배우가 없어서일지도. 아니. 그냥, 힘이 없어서잖아. 븅신.     

 

 “아프더라고. 많이. 근데 아프면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그때 알았어.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거. 그리고는 멍해지더라. 원래 우리 열심히 싸우려고 했잖아. 아니, 열심히 싸웠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 바꿔버리자고. 그런데 그런 거 있잖아. 세상은 바꾸려야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 아니 그게 아닌데. . 그래. 세상은 늘 상상초월이라는 거야. 바꿀 지점이 도대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난 두려웠던 거 같아. 맞아. 나 졸았어. 씨발. 병신같이.”

 철이와 내가 달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굳이 달랐던 것을 찾을 필요는 없지만. 사실, 다른 점은 분명했다. 철이는 보다 절박했을 뿐이다. 그러니 낭떠러지도 깊었을 수밖에.               

 

*          

 

 철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그러니까 철이가 떠나기 전의 마지막 모습

 잊었던 기억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용역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강의실을 박차고 미친 듯이 달동네로 뛰어올라갔던 기억, 얼굴이며 몸이며 피범벅이 된 달동네 사람들 속으로 몸을 던져 비집고 들어갔던 기억, 깡패들에게 쌍욕을 해가며 버티고 맞았던 기억, 경찰차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용역들을 지켜주며 피범벅 된 우리를 봉고차 같은 곳에 쑤셔 넣던 기억, 달동네 아이들이 울고불고 오열하는 가운데에서도 경찰에게 또랑또랑 따지던 보람이에 대한 기억, 유치장에서 계속 구호를 외치고 욕지거리를 해대며 경찰들을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철이의 모습, 덩달아 따라 하던 나의 모습, 어정쩡해하던 혁이의 모습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철이의 마지막 기억은 유치장을 나와 며칠을 하숙방에서 죽치고 있다가 어떤 티브이 광고를 보았을 때, 그때의 철이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맞아. 그때 철이가 뛰쳐나갔어.

 유치장을 나와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며칠을 누워 지냈다. 그러다 티브이에서 광고가 나왔는데, 그게, 하필이면 아파트 광고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한영애 씨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들고 씩 웃었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당신의 미래를 설계하시라고 했던가? 머 그런 멘트를 했던 것 같다. 그 아파트가 바로 달동네를 대신할, 우리가 피범벅으로 내쫓긴 그곳을 채워줄 그 아파트였다. 난 잠시 멍해졌는데 그때, 유리컵 하나가 물을 내뿜으며 티브이를 향해 돌진을 했고, 컵은 박살이 났고, 물방울이 한영애 씨를 덮었고, 철이는 뛰쳐나갔다

 맞아. 그게 철이의 마지막이었어.

 

*               

 

  철이는 매일 천막에서 잔다고 했다. 나 보고도 또 놀러 오라며 농을 했지만 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난 투쟁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너를 보고 싶어서 갔던 거라고 혼잣말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이에게 놀러 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출교 학생들이 천막농성을 그만두지 않자 학교에서는 고소를 해버렸고, 학생들은 어느 날 찾아온 심부름꾼들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철이는 오래간만에 유치장을 다녀왔다며 넉살 좋게 웃었지만 눈빛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을까. 굴지의 대기업 앞에서 모 대학생이 웃통을 까고 한 손에는 기름을, 한 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나타났다는 기사를 난 또 상사의 눈치를 보며 클릭을 했고, 거기서 철이의 벗은 몸을 감상할 수 있었다. 기름은 부었지만 불은 붙이지 못한 채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사지를 제압당해 길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철이의 얼굴을 잠시 감상한 후 인터넷을 껐다.  철이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방을 싸고는 그냥. 회사를 나왔다. 이번에는 상사가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밤에도 철이와 달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