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by 유지 posted Sep 17,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시간은 서서히 희망을 갉아먹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계획은 틀어졌고, 여자들은 붙잡혔다. 여자들이 탈출을 하기 바로 직전, 누군가 일본 군인들에게 여자들이 도망을 치려한다는 사실을 밀고한 탓이었다.

 

슬픔으로 물든 비명과 절규가 온 공간을 뒤덮었다. 희망을 품은 여자들이 산속으로 뛰어들기가 무섭게 완전 무장을 한 군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수십 개의 총성이 산속을 울리자, 곳곳에선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피로 물든 낮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시간은 지체되었다. 가네야마상 소대장에게 붙잡히게 된 이후, 쓸데없는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한 탓이었다. 가네야마상 소대장은 위안부 수용소를 관리하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워낙 눈치가 빨랐던 사내였기에 쉽게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혹시라도, 여자들을 도와주려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었기에 약속시간을 늦어버린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나카무라는 품속에 숨겨놓은 수십 개의 수류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다급한 뜀박질을 이어갔다.

 

제발, 제발.”

 

이미 모든 계획은 틀어진 뒤였다. 그 사실을 뻔히 다 알면서도, 나카무라는 미친 사람처럼 다급히 억순을 찾았다. 제발, 산속으로 뛰어들지 않았기를, 제발, 일본 군인들에게 잡히지 않았기를, 빌고 또 빌며 허겁지겁 막사로 뛰어 들어왔을 때, 나카무라의 시야에 들어온 건,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물어뜯고 있던 억순이었다.

 

억순아!”

 

금세 돌아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절망이 가득한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나카무라는 성큼성큼 다가가 억순의 팔목을 낚아챘다. 종잇장처럼 가벼운 몸이 손쉽게 품속으로 끌려왔다. 와락, 안기는 몸이 한없이 여리고 작기만 해서, 나카무라는 울컥 치솟는 눈물을 겨우 참아 넘겼다.

 

억순아.”

 

화들짝 떨린 몸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슴팍에 닿은 얼굴이 축축이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나카무라는 그것을 애써 모른척했다. 쉴 새없이 걱정했을 억순이라는 걸, 나카무라가 모를 리 없었다. 초조한 얼굴하며, 잘게 떨리는 어깨하며, 제 동료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고 이곳에 남아있던 걸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던 일이였으니까.

 

위안부로 잡혀있는 내내, 맘편히 쉬지 못했던 억순이었다. 도망치기로 힘겹게 마음을 먹은 뒤에도, 겨우 도망치게 된 날에도, 편히 자지도, 앉지도, 숨을 쉬지도 못했던 그녀였다. 드디어,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드디어 숨 좀 쉬고 살까했는데, 억순의 탈출은 시도조차 하기도 전에 틀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바로, 같은 조선인의 배신으로 인해서.

 

제 탓이 크다는거 잘 알고 있었다. 약속시간에만 도착해왔어도, 여자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였다. 하지만, 나카무라는 여자들을 도와주겠다는 말과 달리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아무리, 제 의도가 아니였어도, 제 잘못이 큰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카무라는 힘겹게 울음을 참아 넘겼다. 코끝이 찡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잇새로 연신 새어나오는 탄성이 안타까움의 탄성인건지, 아니면 안도의 탄성인지, 나카무라는 좀처럼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행이다, 참 다행이야.”

 

가네야마상 소대장에게 벗어난 뒤로, 곧장 억순을 찾았던 그였다. 혹시나, 그 사이에 억순이 산속으로 뛰어들었을까봐, 혹시나 도망을 치다가 군인들에게 잡혔을까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가슴이 타들어갈 정도로 걱정했었다. 그런데, 바보 같게도 억순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의 숨이 새어나왔다. 아직 억순이 살아있다는 안도의 숨이.

 

내가 산속으로 갈게요.”

 

마음이 겨우 진정이 됐을 쯤에 나카무라는 넌지시 말을 던졌다. 품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든 얼굴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요, 그러지 말아요. 원망하듯 소리치는 외침을 무시한 채, 나카무라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도와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책망하는 듯한 시선이 붉게 물들어갔다. 나카무라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이미 모든 게 틀어져버렸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여자들의 편에 서기엔 늦었다는 것도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무라는 억순을 더 힘껏 당겨 안았다.

 

미안해요.”

 

흠칫 떨리는 몸이 작았다. 차마 등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부유하는 손도, 가슴팍에 닿은 얼굴도, 하염없이 작기만 해서, 이대로 발걸음이 떨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산속으로 뛰어들어간다 해도, 달라질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산속에서 들려오는 수십 발의 총성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저는 이미 여자들을 도와주기로 약조했었고, 한차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뒤였다. 이렇게 죽는다고 해도, 이대로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해도, 나카무라는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건 제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짓이었으니까.

 

밖이 소란스러웠다. 희미한 문틈사이로 내다보니, 피로 범벅이 된 여자들이 커대란 마대자루에 덮인 채, 흙바닥 위를 놔 뒹굴고 있었다. 가슴이 바짝 타들어가듯 미어지고, 쓰라렸지만, 나카무라는 한편으로 억순이 그곳에 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나카무라는 알고 있었다. 제 운명이, 제 목숨이 머지않아 끝나게 될 것이라는 걸. 몹시 처절하고 끔찍하게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여자들을 돕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틀어져버릴 운명이었기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그래서, 나카무라는 끔찍한 선택을 내릴 수밖엔 없었다.

 

내가 갈게요.”

 

품속에서 잘게 떨리는 어깨가 자꾸만 뜨거움을 토해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마음이 아팠다. 억순에게 연정을 품고 난 뒤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꺼내본 적 없던 마음이었다. 그 것을 쉽게 꺼내기엔 그 마음이 너무 소중해서, 너무 애달파서, 손에 쥐지도 놓지도 못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 그러지 말아요.”

걱정 말아요.”

 

억순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건, 당장이라도 나카무라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끔찍한 불안과도 같았다. 싫어, 싫어. 억순은 절규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억순을 억지로 품안에서 떼놓으며, 나카무라는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미안하고, .”

 

나카무라는 말끝을 흐렸다. 좋아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언젠간 꼭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던 나카무라가 결국 입술을 꾹 닫았다. 차마, 닿지 못한 마음이 재가 되어 바스라 졌다.

 

일본 군인으로 살면서, 잘한 짓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억순을 만난 것만으로도 나카무라는 제 할일을 충분히 다 한 것이라고 믿었다. 억순을 만나기 위해 살았노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억순이 남자들에게 범해지는 밤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매일 가슴을 치며 울었음에도, 나카무라는 그 다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나카무라, 제발.”

제 이름은 홍빈이에요.”

 

나카무라는 억순의 말을 자르며, 태연하게 덧붙였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때가 없어 급히 꺼낸 말이기도 했다. 제 이름은 홍빈이라고.

 

실제로, 나카무라의 원래 이름은 홍빈이었다. 그건 조선인이었던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으로, 일본에서 사는 내내 한 번도 불린 적 없던 아주 소중한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따스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조선 사람으로 사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늘 버릇처럼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던, 누구보다도 멋진 여자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사라진 건, 고작 한달전의 일이었다. 그건, 사고였다. 아니, 사고였다고 생각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맞아 죽은 것도, 사고라면 사고였으니까. 어쩌면, 그 불운한 현실을 사고라고 칭하는 게 나을 듯했다. 나카무라를 위해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다 죽은 제 어미를 위해서도.

 

그 날은 끔찍했다. 늦은 밤, 조선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음식재료를 사고 오던 길에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일본 깡패 몇 명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한 뒤,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 망해가는 조국의 여자라는 이유, 그 것 하나만으로,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나카무라는 그 처절한 소식을 들은 뒤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사방에선 매정한 아들이라고 따가운 눈총을 쏟기도 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를 되찾게 되면, 그때 눈물을 흘리라고. 지금 눈물을 흘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던 어머니의 말이 있었으니까.

 

억순아.”

 

시간은 잡을 수 없을 만큼, 이미 멀리 와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많이 좋아한다는 말 꼭 전하고 싶었는데, 이미 때는 지난듯했다. 홍빈은 뒤를 돌았다. 몸을 파르르 떨던 억순이 힘겹게 홍빈의 옷소매를 잡았지만, 홍빈은 그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금방 올게요.”

 

홍빈은 급히 자리를 떠났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을 남긴 채.

 

수풀이 우거진 산속으로 뜨거운 피눈물이 흘렀다. 홍빈은 여자들을 뒤쫓던 군인들을 향해 태연히 손짓을 하며, 매서운 눈빛들 사이로 바짝 몸을 붙였다. 미친 짓일까? 생각했지만, 딱히 나쁘진 않았다. 이렇게 죽는 것도, 다 제 명이였으니까.

 

홍빈은 망설임 없이 품속에 숨겨둔 수십 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수류탄이 터지기까지, 5. 홍빈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채, 양팔을 벌려 군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짜증나는 시선들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의문 가득한 얼굴들이, 온 몸에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5,

 

몇몇의 군인들은 홍빈을 스쳐지나가려했지만, 그럴 때마다 홍빈은 온 몸으로 그들의 발과 손목을 붙잡았다. 끈질기게 이어진 발악이 꽤 짙었다. 곳곳에서 터지는 욕설이 온 몸을 뒤덮자, 뒤통수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누군가가 총구로 홍빈의 뒤통수를 내리친 것이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진짜.”

 

이마에서 뚝뚝 흐른 피가 시야를 막았지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이때다 싶어 달려드는 군인들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커먼 군화가 홍빈의 얼굴과 몸을 쉴 새없이 짓밟았다. 얼룩덜룩한 오물이 짙어진 그 순간, 홍빈은 억순을 떠올렸다.

 

4,

 

억순은 마치 들꽃 같았다. 이름도, 나이도,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워 시선을 사로잡는 예쁜 들꽃을 닮았었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힐 때마다, 아팠고, 슬펐고, 설렜다. 비록, 몇몇 사람들에게 꺾이고 짓밟히지만, 그 아름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홍빈에게 억순은 언제나 아름다운 들꽃이었다.

 

당연하게도, 홍빈은 들꽃을 꺽지 못했다.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제 손에 쥐고 싶어 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꺾어서 제 품속에 넣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미, 들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우니까, 그 자체로도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홍빈은 들꽃을 사랑했고, 그랬기에 꺽지 못했다.

 

3,

 

억순이 그리웠다.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범해지는 밤마다, 몰래 울음을 참아내던 신음소리. 상처투성인 얼굴을 마음에 품고도,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도와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홍빈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비록 잘한 것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널 볼 수 있었으니까.’

 

억순의 얼굴이 시야를 스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나.

 

2,

 

군화가 홍빈의 얼굴을 거세게 짓눌렀다. , 얼굴로 뱉어진 끈적끈적한 침이 턱을 타고 흘러 귓구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홍빈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아니야. 차라리,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1,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내였으니까.

 

아악!”

 

콰쾅, 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온 몸을 휘감았다. 살며시 떠진 눈 사이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살갗을 뒤덮은 열기가 꽤 짙었다. 온 몸에 뜨겁게 타들어가고 있는데도, 아프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아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홍빈은 죽어가는 제 자신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뇌리에 스친 건, 활짝 웃고 있는 억순의 모습이었다.

 

억순아.’

 

이미 늦은 마음이었지만, 이렇게라도 건넬 수 있어서.

 

사랑해.’

 

, 다행이었다.

 

 

Who's 유지

?

유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