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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ngun posted Sep 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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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소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감은 눈의 시상을 까맣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분명 그 시상은까만 것은 아니다. 여러 색깔의 잔상들이 알록달록한 별빛처럼 산란해 있다. 오늘 해내지 못했던 것들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 바보 같았던 순간들과 그 순간들을 되 바꾸려는 미련과 허상들.

 막 잠에 드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에 훼방을 놓은 것은 단 한 마리의 모기 소리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억들과 감정을 뒤집어놓는 수많은 걱정들이 내 머리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지없이 잠에 들고 있었다. 그 숭고하고 거침없는 잠을 확 달아나 버리게 만드는 것이 사랑도 꿈도 아닌 고작 모기 한 마리의 날개 짓이라니. 이건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모기가 뜸 해지는 가을이면 이따금 찾아오는 일이다.

 정신이 말짱해 질수록 모기 소리를 무시하고 잠에 드는 일은 어려워진다. 더듬더듬 스위치를 켜고 눈부신 형광등이 눈에 익기를 기다린다. 연두색 파리채를 잡는다. 아니, 다시 내려놓는다. 모기는 손으로 잡는 것이 더욱 후련한 법이다. 옆집 이모는 모기를 주먹으로 덥석 잡고는 땅 바닥에 내리쳐 기절시키고는 휴지로 눌러 죽인다. 나의 어머니는 힘껏 박수를 쳐서 피를 보고는 가족 중 누군가 그 모기에 물렸는지 안 물렸는지를 확인한다. 나의 아버지는 날아다니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힘껏 내려쳐서 기절시키고는 죽인다. 나의 방식은 아버지의 것을 본받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아무래도 불쾌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모처럼 주먹으로 모기를 잡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다.

 모기의 색깔은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아주 옅은 색깔로 물들어져 있었다. 모기를 꾹 누르자 휴지에 동그란 단풍이 들었다. 그제 서야 나는 종아리가 몹시 가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옅은 갈색의 모기를 휴지에 싸 버리고는 잠시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잠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고요한 천장. 천장 한가운데 빛나는 전등. 눈이 부시다. 눈을 깜박인다. 그리고 그 아무 생각 없는 상태에서 벗어난다. 몹시 허전하다. 먼지 낀 거울과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전공 서적들과 공책들. 빨래 건조대. 물이 든 페트병들. 무언가 부족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맥주가 생각났다. 동전을 세어 본다. 1950. 1800원 짜리 작은 맥주 캔 하나를 살 수 있다.

 

 지난여름 방학. 이틀에 한 번 이상은 과자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는데, 그때서야 맥주를 마시고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라한 마음이 은근한 즐거움으로 채워지고 지루한 사물들에 정겨운 활기가 넘쳐흘렀다. 12시간 동안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나른한 밤거리의 활보로 천천히 지워나갔다.

관리사님. 잠시 만요.”

 지퍼를 내렸다. 노란 물줄기가 줄기차게 빠져나갔다. 싱그러운 풀들이 온통 취한다. 피어오르는 따뜻한 연기. 추위에 떨던 아무르 강변의 우데헤인들이 사냥을 마치고 오두막에 들어와 불을 때고 있다. 새끼 사슴을 손질하고 뜯어 먹으며 코앞까지 다가왔던 죽음과 두려움을 잊은 채 웃고 떠든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처럼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 좋게 밤거리를 걷고 있다. , 여기서 이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면 안락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이렇게 기분 좋은 죽음이라면 두려움 없이 맞을 만 하다.

관리사과 코치, ‘Төгөс ах(투구스 형)’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란히 지퍼를 내린다. 술을 마시면 오줌이 몹시 마렵다.

 ‘끔찍한 승마장 인생. 이들은 어떻게 여기서 견디는가. 술 없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달 조차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데.’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승마장이 바닷가 근처에 있다는 것은 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정말 다행이다. 끔찍하게 더운 여름이었지만, 서해 궁평항의 여름은 그런대로 견딜 만 하다. 원 없이 노래를 부른 뒤 뒤뚱뒤뚱 걸어가는 궁평항의 밤거리만큼 시원한 여름이 있을까.

 기분 좋게 뻗었다. 숙소는 너무 습하다. 바퀴벌레의 낙원에서 취한 세 명의 이방인이 곯아떨어진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낯설었던 바퀴벌레가 이제는 고향에 내 베개만큼이나 익숙하다. 말들의 뒷발질 소리는 시골의 귀뚜라미 소리 만큼이나 정겹다. 이 얼마나 완벽한 잠자리인가.

"안녕히 주무세요."

"."

"Заа, сайхан амраарай(그래. 잘 자렴)"

 무뚝뚝한 서울대공원 사육사 출신의 마방 관리사와 50살 먹은 몽골인 투구스 형-몽골에서는 할아버지가 아닌 이상 아저씨가 아닌 형이라고 부른다. 보드카를 마시는 몽골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뻗는다. 얼마나 많은 맥주를 마셨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나른한 몸이 보리밭 위로 살랑살랑 떠다닌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며 보았던 보리밭. 왼편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드넓은 농지와 작은 야산들, 마을을 가로지르는 송전탑들이 시간이 멈춘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교할 시간이면 그 마을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다니지 않았다. 논 위로 백로 한두 마리가 아무 소리 없이 유유히 날아다니다가 이따금 작은 물고기를 발견하고는 내려앉을 뿐이었다. 사람이 쫓아할 수 없는 우아함이 그 백로들에게는 있었다. 시끄러운 까치 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우아함.

 논밭 건너편에는 작은 서낭당이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한지로 된 세모난 모자를 뒤집어 쓴 사람 모양의 돌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는 막걸리가 한 병 놓여 있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와 내 친구는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그 모자를 살살 벗겼다.그러고는 괜히 무서워서 놀란 꿩 마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가 빠지도록 서낭당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금은 그것이 마치 꿈속의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악몽일 것이다.

 시골에 살면서도 학교에 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는 누구에게서도 자연을 배울 수 없었다. 다만 초등학교 적 친구들과 함께 시냇가나 산 속을 떠돌며 아무 의미 없이 자연의 겉을 맴돌 뿐이었다. 나의 학생 시절을 극단적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회상에서 벗어난다. 새벽 3 30. 2시간 반 동안 자고는 다시 일어나서 말들에게 물과 건초, 사료를 주어야 한다. 손가락이 몹시 뻑뻑하다. 몹시 습하다. 이놈의 숙소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선풍기를 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실제로 선풍기는 꺼진 적이 없다. 언제는 내가 몹시 추워서 선풍기를 끌려고 할 때 관리사가 말했다.

"선풍기 끄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요?"

"이불이 축축해져. 세탁기에 돌리고 꺼냈을 때 있지? 그런 상태가 된다고."

 그가 우유팩을 흔들었다. 안의 잿더미를 평평하게 만들고는 그 안에 다시 재를 떨었다. 그리고는 다시 흔든다. 마방의 톱밥을 평평하게 만드는 '나라시'를 연상시킨다.

"바퀴벌레 많지? 나 이거 없애려고 별짓 다했다. 그런데 안 없어져.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여기는 습해. 이유는 나도 몰라. 그리고 지금은 내가 적응이 됐지. 용감하게 여기 찾아왔으면 이 정도 환경에 적응할 각오가 있으니까 온 거겠지. 맞아?"

", 그럼요."

 하지만 내게 적응이 안 되는 것은 24시간 가동되는 선풍기 바람이나 들끓는 바퀴벌레들이 아닌 온 방에 쩔어 있는 담배 냄새였다. 관리사와 몽골인은 몹시 골초였다.

 

 하여튼 내가 잠이 오지 않아 맥주 한 캔을 마신 연유는 이러하다. 술을 마시면 잠이 잘 온다. 마구간 2층에서 혼자 잠을 자는 조선족 부장님 역시 얼른 잠에 들기 위해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잠에 들곤 했다. 이런 무료한 밤이면 가끔 그들 생각이 나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 최근 들어 밤마다 자주 비가 내린다. 이와 함께 찾아온 것이 불면증이다. 나는 잠에 들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을 낀 채 잠에 들면 다음 날 아침에 귓구멍이 아프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에 쉽게 들지를 않는다. 음악을 듣지 않고도 곧잘 잠에 들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음악을 들으며 잠에 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나는 영국인들이 만든 ‘Trip hop’이라는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잠에 든다. 마약을 해 본 경험은 없지만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치 귀로 마약을 하는 기분이 든다. ‘Trip'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약을 한 환각 상태의 기분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럼 이 트립합 밴드와 보컬은 틀림없이 마약을 해보았을 것이다. ‘매시브 어택의 여 보컬 엘리자베스 프레이저의 녹음된 목소리와 악기들의 울음소리는 제정신을 가진 밴드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그들의 몽환적인 음악과 함께 잠에 들려는 참에 모기가 내 잠을 깨운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몹시 궁금하다. 목을 구부린다. 시계가 없다. 핸드폰을 켜본다. 1 17분이다.

 승마장에서 일하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가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잠에 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스마트폰은 들여다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피곤한 몸은 스스로 잠들게 되어있다. 나는 지금 그때처럼 피곤하지 않은 것이다. 개학하고서 나는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면 고등학교 때와 달리 무엇이라도 제대로 하게 되리라 믿었다. 원하는 전공과 자유로운 수업. 부모로부터의 독립. 아름다운 캠퍼스 생활. 거리에서의 즐거운 밤.

 대학교의 잘못이 아니다. 나의 잘못이거나 세상의 잘못이다.

 상상과 현실은 항상 다르다. 그리고 몹시 단조롭다. 여기에 이제 맥주 한 잔과 소주 한 잔, 요새 유행하는 과일 소주 한 잔을 부으면단조로운 쾌락과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쾌락과 즐거움은 항상 피곤함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몸을 억지로라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대학생들은 모두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술을 마실수록 음악에 중독될수록 그리고 삶이 단조로워질수록 불면증은 더 심해진다.

 맥주의 밤이 지난 다음 날이었다. 숙취는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일이 더 만만치 않았다. 구루마 두 차에 말똥이 가득 찼다. 아침부터 땀범벅에 톱밥을 뒤집어쓴 만신창이가 되었다. 신발 사이로 톱밥이 끼는 바람에 발이 몹시 찝찝했다. 이 꺼칠꺼칠한 톱밥더미를 구루마에 가득 실어 마방에 공급한다. 그리고 헤집어진 마방의 톱밥을 관리사가 삽으로 나라시를 해주면 말들은 물 만난 듯이 신나가지고는 곧장 누워 버둥버둥 거리는 것이다. 무뚝뚝한 관리사는 잠시 멈춰 말을 귀여운 듯이 흐뭇하게 바라본다. 한 구역의 나라시를 모두 마치고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거나 수마장에 가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물론 물을 마시러 수마장에 갈 때도 담배는 피운다.

 전쟁 같은 승마 시간이 마감 되고, 말을 씻기는 마지막 타임이다. 포항에서 올라온 실습생 누나와 물에 젖은 말의 양쪽 다리에 붙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있다. 코치가 말을 마저 운동시키고는 수마장에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을 받아주어 아대와 굴레를 벗기고는 수마장에 묶어둔 뒤 안장과 양털 패드, 젤 패드, 재킹을 한꺼번에 들어 가져갔다. 맨 아래 깔린 재킹이 말의 땀에 흠뻑 젖어있다. 사람의 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뜨겁다. 말을 씻겨주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도 녀석들의 재킹을 벗길 때면 일초라도 빨리 그들을 찬 물에 씻겨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말을 씻기고는 다시 다리 옆에 쭈그려 앉아 물기를 닦아준다. 이 말들도 사람이 씻겨주는 일에 아주 익숙해졌다. 최근 들어 이들을 묶어두는 것을 깜빡하지만 도망간 적이 없다-그럴 때마다 부장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지만. 물기를 닦으며 말의 얼굴을 쳐다본다. 말이 나를 의식한 듯이 동그랗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뒤를 흘끔흘끔 처다 본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럽다. 다른 말들이 발을 구르고 코를 풀어댄다. 귀를 뒤로 젖히고 몸을 부르르 떤다. 다들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일초라도 빨리 마방에 들어가 새로 공급된 톱밥 위에서 뒹굴고 싶은 것이다. 돈 많고 욕심 많은 사람들을 태워주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비했다. 관리사가 채워 놓은 건초와 사료 냄새가 말의 성질을 건드린다.

 실습생 누나들과 코치들이 마스깡을 꺼내든다. 발굽에 기름을 칠하고 마방 굴레에 마스깡을 걸어 말들을 마방으로 데려간다. 그들은 허겁지겁 사료를 해치운다. 나 역시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해치운다. 일을 하니 식욕이 왕성하다. 승마장 식구들은 아무 말도 없이 TV를 보며 저녁을 먹는다. 물을 마신다. 문득 생각이 든다. 몹시 단조롭다. 승마장 일이 내게 단조로워질 줄은 몰랐다. 항상 긴장과 노동으로 가득했던 일상조차 학교생활만큼이나 단조로워질 수 있다니. 나는 몹시 절망스러웠다.

 내가 승마장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새로움과 역동이었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국내 전역의 목장주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봤지만 단기간 아르바이트를 하기 원하는 풋내기 대학생을 받아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꿩 대신 닭으로 나는 이 승마장에 왔다.승마장에는 40마리 남짓의 말들이 마방에 갇혀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는 대로 먹고 싸고 자는 일 외에 없었다.승마 회원들이나 체험자들이 올 때마다 그들을 승마장 식구들에 의해 끌려간다. 사람에게는 스포츠일지 몰라도 말들에게는 지긋지긋한 노역이다. 승마장에서 말하는 사람과 말의 유대라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과의 유대조차 훈련받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삐걱삐걱 숙소를 향해 걸어간다. 배를 채운 말이 얌전히 톱밥 위에 서 있다. 입이 수 년 동안의 재갈에 헐어 축 처져 있어 그 표정이 마치 울상이다. 그를 바라보는 나를 의식하지도 않은 채 말은 가만히 벽을 보며 서 있다. 그러다가는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다. 그 옆 마방의 말은 톱밥 위에 다소곳이 앉아 쉬고 있다. 이를 보고 관리사가 했던 말이 있다.

나는 처음에 깜짝 놀랐어. 말이 누워 있다니.”

 나는 말이 누워 있는 것이 왜 깜짝 놀랄 만한 일인지 잘 몰랐다.

다큐멘터리 자주 보냐?”

.”

말이 누워 있는 거 본 적 있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이 야생에서 이따금 누워 휴식을 취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유심히 관찰한 적이 없었다.

야생말은 안 누워. 잘 때도 서서 잔다고. 유목민들이 기르는 말들조차 누워서 자지 않아. 항상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지. 그런데 이 녀석들은 동물들에게 마땅히 있어야할 야생 본능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냉정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그리고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마음이 몹시 씁쓸했다. 동물을 볼 때 즐거운 이유는 그들이 사람에게 없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말들에게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보는 말들의 모습은 인간의 삶 이상으로 절망적이었다. 순수한 본능에 따라 도망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다. 동물이 도망갈 준비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목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들은 삶의 의미를 잃었다. 번식에 의해 태어났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번식을 할 기회조차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침마다 열리는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거나 벽을 바라보는 일 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들은 사람처럼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는 불면증을 겪는 것이다!

 노동과 철창.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수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승마장에서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회의감이 느껴졌다.담배를 피움으로써 이 회의감을 달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관리사를 따라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음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들은 갈증에 물을 마시듯 담배를 끊임없이 피우기 때문이다. 잠시 망각의 연기를 피우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변함없는 현실의 벽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고는 단념한 채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철창 속의 말들을 모두 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난 행동할 수 없다. 행동하지 않는다. 나는 이기적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나는 두려움에 굴복한다. 인간은 두려움에 굴복한다. 두려움의 핑계로 이성을 찾는다. 이성적으로 나는 말을 풀어 주어도 그 말들이 그밖에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도로에는 말보다 빠른 차가 다니고 영문도 모른 채 말들은 꼼짝없이 죽을 것이다.나는 안심한다. 말을 풀어주는 것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나는 확인한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세상이 잘못하고 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악한 인간들에 의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인간의 즐거움에 의해 말들의 자유로운 삶이 희생되고 있다.하지만 그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안락과 편리를 위해 수많은 산들이 깎이고 도로가 나며 건물들이 들어선다.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들이 차에 치이고 굶어 죽고 급기야 멸종된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잘못은 아니다. 인간들의 거대한 산업과 구상과 미래를 위한 투자들이 자연과 다른 생물들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세워진다. 양심이랍시고 친환경 정책이다 뭐다 하면서 그들을 배려한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잘못과 욕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들의 원시적 자연으로의 회귀를 두려워한다. 다시 동물처럼 돌아가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들과 구별된다. 영혼을 가진 특별하고 고귀한 생명이다. 따라서 생존과 삶이 일치하는 그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 설령 우리의 삶이 그들의 삶을 모두 잡아먹을 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할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자신이 몹시 한심하게 여겨졌다.

나는 결국 잊는 것을 택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다음 날 밤, 세 이방인은 또 맥주를 마셨다. 두 병을 비우고 나니 몹시 허전했다. 창밖으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적 휴게소에 내릴 때마다 들려오는 트로트 멜로디다. 며칠 전부터 궁평항에서 밤새 축제를 하고 있다. 그 소리가 몹시 시끄러워 여기 승마장에까지 들리는 것이다. 우리는 몽골인의 자가용을 타고 그곳에 갔다. 술에 취한 중년들과 노인들이 낄낄대며 소주를 들이킨다. 어떤 천막에서는 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인도에서 온 두 여인이 이상한 장식품들을 팔고 있다. 몽골인은 잘못 생각했다. 애초에 그의 형편으로 값비싼 해산물과 술값을 치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해산물을 몹시 좋아하지 않았다. 다시 차에 돌아가기로 했다. 오줌이 몹시 마렵다. 세 이방인은 풀숲에 노란 물줄기를 내뿜는다. 풀들이 취한 노인들처럼 비틀비틀 살랑거린다.

너희들도 취하는구나. 인간들처럼. 존귀한 순수함의 무게들을 견디지 못하고 취해 쓰러지는구나.’

 과자 두 봉지와 맥주 두 병을 샀다. 편의점 바깥 파라솔에 앉았다. 다리 주위로 모기들이 극성을 부린다. 숙소에 들어가 먹기로 한다.

 새벽 1시쯤이 되자 몽골인은 꾸벅꾸벅 졸다가는 잠에 들었다. 두 젊은 외국인의 대화에 어울리려고 노력했지만 무뚝뚝한 관리사는 굳이 애를 쓰면서까지 그를 끼워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따금 잠꼬대를 하며 꿈틀거리는 그의 뒷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여자는 있어?”

 잔을 비우고는 관리사가 말했다.

아뇨, 아직.”

 그는 우유팩을 흔든다. 나라시를 한 듯이 잿더미가 평평해진다. 삶을 포기한 말들이 그 잿더미 위에 누워 안락한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스무 살인데 여자가 없다고?”

.”

 나는 잔을 비운다. 내가 지금 마시는 맥주의 맛은 처음 들이킬 때의 그 맛이 아니다. 문득 코맥 매카시 카운슬러에서 보았던 대사들이 떠올랐다.

당신의 실수들을 되돌리려는 그 세계는, 그 실수들을 했던 세계와는 다르오.’

 주인공은 오열한다. 그의 실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말았다.

남자라면 나라를 통째로 바쳐서라도 슬픔을 떼 내려 할 거요. 근데 슬픔으론 아무것도 못 사요. 슬픔은 가치가 없으니까.’

 그의 순수했던 호기심과 아름답고 거대한 구상들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남은 것은 초라한 감정뿐이다.

 관리사가 라이터를 두 번 남짓 켜더니 담배에 불이 붙는다.

스무 살 때 아니면 그거 언제 쓰려고.”

 그가 손으로 내 복부 아래쪽을 가리켰다.

너 하나 깨끗한 척 하지 마. 그건 인간의 당연한 욕구야. 여자들도 마찬가지고. 그 욕구를 채우는 일에 대해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너 혹시 뭐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거나 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안 쓰고 있는 거야.”

나는 단 한 사람만 사랑할 거예요.”

 그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잿더미를 뒹구는 말들을 보며 흐뭇하게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고는 우유팩에 재를 털었다.

그 한 사람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가 우유팩을 흔든다.

몸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들 하지. 몸으로 하는 사랑을 과소평가 하지 마.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으면서 그 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야? 지랄하지 말라 그래. 너는 이곳에 경험을 하러 왔다고 했어. 그래서 승마장 생활이 어떤 것 같아? 아름다워? 새로워? 그런 것은 애초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아름답고 새로우려면 그것이 영원해야 하거든. 그런데 세계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가 잔을 따른다. 나도 잔을 따른다.

그러니까 가려서 경험하지 마. 경험해 봐.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야. 그냥 다 존나 허무하지. 그러면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우리들 삶이 원래 그런 거야. 의미를 찾지 마. 의미는 존재하지 않아. 인간이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할 뿐이야.”

 모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낯설었던 그것들은 결국 익숙해지고,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간다. 어렸을 적부터 우린 우리에게 낯선 모든 것에 두려워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 두려운 것들을 접하게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끝없는 호기심이 있고, 모든 것을 맛 보고는 그 기대와 환상들이 허황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굳이 나중으로 미룰 필요가 있겠는가. 왜 바보같이 이 의미 없는 낯선 세계 주위에서 허둥대고 있는지. 처음부터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그 아무 의미 없는 것들에 의해 바보같이 휘둘리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일찍 알게 되는 것이 아무래도 낮지 않겠는가. 일찌감치 세상의 허무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지막 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세상의 허무는 끝이 없다. 알면 알수록 또 다른, 그리고 더 깊은 허무들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한 평생 동안 모든 허무를 깨달을 수는 없다. 허무는 별의 수만큼 무한하며, 또 하나하나의 허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깨달음 속에서 달아나기 때문이다.우리는 똑같은 허무를 수없이 경험한다. 허무는 오직 하나의 허무로도 끊임이 없다.

 남는 것은 희망뿐이다. 그것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내 믿음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 희망이 없다면 이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

 승마장 생활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다가올 새 학기 동안 나는 그 희망을 찾아야겠다. 난 그 희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른다.


 아직도 나는 희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 모기 한 마리 때문에 깊은 회상에 잠긴 채 도저히 잠을 이루지를 못하고 있다.모기는 왜 내 방에 들어와 처량한 죽음을 맞는지. 말들은 왜 승마장에 붙잡혀 와 감옥 같은 잿더미 마방에 갇혀 야성을 잃어 가는지. 그리고 나는 왜 이 잿더미 문명 속에 태어나 모기나 승마장의 말들과 진배없는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끊임없는 생각들이 나를 잠에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다. 모기의 날개짓이 내 머릿속에 토네이도를 일으키고 있다.

밤낚시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알아?”

뭔데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거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게 좋아요?”

. 그래야 진짜로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어떻게 해야 이 머릿속에 그 어떤 것도 남지 않도록 비워낼 수 있을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모든 생각에는 소용이라는 것이 없다. 이 도시 속에서 나는 소용없는 생각과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생각을 의미 있는 행동으로 모두 불태우고 싶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뛰어보기로 했다.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달린다면 거친 호흡과 고통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몸과 고통은 실재한다. 생각하는 여유를 제거하자. 오직 달리는 거다. 누군가 나를 뒤쫓고 있는 듯이 쉬지 않고 달리는 거다. 어쩌면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끝없이 달리다보면 그 지긋지긋한 네온사인과 헤드라이트, 높은 건물들과 가로수 길을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땅을 밟게 될지도. 나는 그곳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지 않고 서는 알 수 없다. 그 땅을 밟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뻔하다. 나는 방바닥에 땀을 뚝 뚝 흘리며 화장실에 들어갈 것이다. 물기를 닦고 침대에 앉아 몸을 말리며 다시 나의 세계로 천천히 회귀하는 것이다. 애초에 뛰는 동안만이라도 잊고 싶어 뛰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술이나 담배, 마약과 다른 것은 없다. 단지 스포츠나 문화생활, 독서처럼 건전한 방법일 뿐.

 나는 또다시 비겁해졌다. 이성을 핑계 삼아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잠에 들었다


이름 : 이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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