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상자

by 미궁 posted Oct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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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상자




담배를 끊어야 합니다                                              


술을 줄이셔야 합니다.


체중을 감량해야 합니다.


식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매번 건강검진 때마다 듣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에는 찰나의 경각심이 일어 며칠 동안은 생활 습관을 바꿔 보려고 노력했던 게 여러 번 이었다. 담배도 줄이고, 술은 안 먹고. 저염분 위주의 야채가 풍성한 식단까지- 그러나 그 수고로움은 매번 며칠 내에서 끝나곤 했다. 끈기가 부족한 인간의 당연한 행보이기도 했다.  더할 데 없는 공허함에 빠져 어느 사이 정신차리고 보면 단골집의 치킨을 시켜 먹은 후였다. 그 기분 나쁜 더부룩함이란! 후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매번 다음을 기약하던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이래 될 줄 알았나.


아니, 언젠가는 올 일이었다고 해도 상황은 정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


눈을 떴는데 사태 파악이 단번에 되지 않았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눈꺼풀은 계속 내려앉아 힘차게 떠질 줄을 몰랐다. 의식은 이 편에 있는 듯 저 편에 있는 듯 신체와 영혼의 사이를 유랑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몸을 움찔했다. 팔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들이 성난 듯 흔들거렸다.


-환자분! 깨어나셨어요?


이마에서 땀방울을 훔쳐내던 간호사가 신경질적으로 물어 왔다. 나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언어의 형태로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신음소리 비슷한 걸 흘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그 상태에 아랑곳없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세상에! 아까 환자분이 얼마나 난동을 피웠는지 아세요? 여기 주사라인 다 빠지고, 팔다리를 다 휘둘러 대는 통에 여기 간호학생까지 다 달려들어서 환자분 붙잡고……..’


나는 그제서야 다리 쪽에 선연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인지할 수 있었다. 감각을 인지하고 나서야 겁에 질린 앳되어 보이는 학생이 내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얀 얼굴에 깔끔하게 넘긴 앞머리,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면서 나는 이 장소가 병원 응급실이라는 것과, 그 전에 여기에 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기억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제가…….왜 여기 있죠?


간신히 말 한마디를 꺼내 물어볼 수 있었다. 간호사는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도 모기같이 꺼낸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여전히 손은 바쁘게 놀리면서 그녀가 대답했다.


-환자분 출근하던 길에 갑작스럽게 심정지 와서 내원하셨어요. 다행히 구조자가 빠르게 발견해서 심폐소생술 받고 심장리듬 돌아오셨고요. 지금까지 섬망 상태 였다가 이제 의식 돌아오신 거구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세요?


*섬망: 의식장애와 인지 변화가 특징이며 짧은 기간에 빠르게 진행한다. 주 증상은 의식혼탁이다.


 


기억날 리가 없다. 심정지라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 예상조차 한 적 없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다리 부근을 부들거리며 잡고 있는 간호학생의 토끼 같은 눈은 이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듯 했다. 내 키는 180cm, 체중은 마지막으로 쟀을 때가 121kg, 의식이 없을 때 몸부림을 쳤다면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 뻔했다. 이윽고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학생에게 이제 괜찮으니 손을 놔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꾸벅 인사하며 손을 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학생의 뒷모습은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하루 정도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 보고 퇴원할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심정지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인을 다 갖췄다고 말하며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비만, 고혈압, 당뇨 다 있으시고, 이번은 운이 좋은 케이스지만 다음 번에 또 심정지가 온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우선적으로 살을 빼고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예전과 달리 목숨을 잃을 뻔하고 나니, 이제서야 나는 정말 살기 위해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아찔한 경험이었다.


 -


-이번에 큰일 날 뻔 했다며, 이제 괜찮아?


 


퇴원하고 나서 일주일쯤 지나고 친구를 만났다. 나는 정말 살기 위한 식단과 운동, 금주와 금연에 돌입한 상태였다. 친구는 대학 동기로 활발하고 사교성이 좋아 과대를 도맡던 여자 동기였다. 대학 친구들과는 그들의 결혼 소식이나 돌잔치 때 친한 척 연락 오는 것 외에는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졸업하고도 유일하게 만나는 동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네 카톡 보고 엄청 놀랐었다며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당류가 든 음료 대신 아메리카노를 쭉 빨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은 게 문제가 아니고, 이제 진짜 살 안 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니까.


-그러게, 정말 큰일날 뻔 했네. 요즘 그래서 계속 관리 중이야?


-그렇지 뭐, 죽을 맛이다 요즘.


그녀가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 하던 짓 하려면 힘들지, 그나저나 너 대학 때는 완전 모델 체형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너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인 줄 알았거든. 그래서 너 살 찐 모습 보고 엄청 놀라긴 했다니까.


-그러게, 다 과거의 영광이지 뭐. 그래도 나 대학 다닐 때는 꽤 인기도 있고 그랬는데.


-말도 마라. 너한테 목 매는 여자애들 많았지.


살이 찌기 시작한 건 직장에 다니고서부터였다. 사수가 일 못한다고 엄청 갈궈 대는 통에 스트레스를 적잖이 받았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먹는 걸로 풀게 되었다. 시작은 그랬으나,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체형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먹고 있어도 공허했다. 홀로 상경하여 직장 생활을 시작한 외로움에서 기인했던 걸까-나름 마당발이라고 불리던 나였지만 각자의 삶에 돌입한 뒤로 퇴근 후 마땅히 부를 친구도 없었고 혼자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좁은 원룸과 비대해진 나. 나는 외로움의 껍질을 쓰고 그렇게 몸을 착실하게 불려 나갔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면서 빼면 안돼. 나도 옛날에 다이어트 하다가 폭식증이 오는 바람에 건강 망친 적 있었거든.


-너는 날씬한데 그렇게 무리하면서 다이어트를 했다고?


-일종의 지나친 타인 의식과 자의식 과잉이지. 20대때는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생각에 빠져 살잖아?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나는 주인공이여야 하고.


-네가 완벽주의자인 탓도 조금 있다고 봐, 나는.


-맞아, 얼굴도 예뻐야 하고, 몸매도 완벽해야 하고, 일도 빈틈 없이 잘 해내는 여자. 허울뿐인 타이틀에 불과할 뿐인데 이상하게 집착하게 되지. 나는 사회성이라는 명분 아래 내적이나 외적으로 나의 탁월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아. 정말 웃기지-


-지금은 그런 게 많이 줄어 들었나?


-줄어드는게 아니라 깨닫게 되는 것 같아. 나이가 들어갈수록 느끼게 되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거지. 그걸 인정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런 집착에서 손을 떼게 되고.


-어떻게 보면 시야가 넓어지는 게 아닐까?


-어느 정도는 맞아, ‘죄수의 동굴같은 거랄까.


그래서 젊음은 어리석고 빛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우물 안 개구리일지라도. 나는 자신감으로 넘치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자극으로 다가오던 그 때-모르는 게 없어서 두려울 게 없던 때이기도 했다. 밤을 새도 지치지 않던 체력과 불량한 식습관으로 몸을 무장해도 끄덕 없던 나날들. 그게 언제까지나 지속될 거라는 믿음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에는 놀라울 만큼 무심하다. 청춘의 장막이 걷히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사소한 부분이었다. 더 이상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을 때. 같은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건강 검진 결과는 점점 나빠질 때. 어느 새 내가 관전자의 입장에서 청춘의 단상을 분석하고 있을 때 등등-


-


내 평생 이런 곳을 돈 주고 와 보긴 처음 일이다. 음악은 귀가 울리도록 크게 쿵쿵거렸고 밝은 조명 아래 마주한 내 몸은 눈뜨고 봐 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축 쳐진 뱃살과 여자처럼 튀어나온 가슴, 방금 인바디라는 것을 해 본 참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일 대 일로 퍼스널 트레이닝이라는 것을 받기로 했다. 트레이너는 직업에 걸맞게 훌륭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남자가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는 내가 이 헬스장에서 제일 뚱뚱한 사람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트레이너는 생각보다 친절하게 인바디 결과를 알려 주었다.


-…….일단 체지방을 많이 빼야 할 것 같네요. 근력운동은 하중이 많이 실리면 다칠 수도 있거든요. 첫날이니까 제 지도 하에 무리하지 말고 시작해 봐요, 회원님.


근력운동을 하고 런닝 머신에서 유산소 운동을 30분 정도 하라고 했다. 나아가도 나아가도 제자리인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발을 누가 잡아 끄는 것처럼 무겁기 짝이 없다. 기시감이 든다. 취업에 5번째 실패하고 원룸에 죽은 듯 누워있을 때 느꼈던 공허감 비슷하기도 하고, 바람 핀 여자친구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집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을 때와 비슷하기도 했다. 질척거리는 기운이 몸을 휘감고, 진창에 몸을 맡긴 채 정신만 아득히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나-뭘 해도 안 될 것 같고, 인생은 이미 다 읽어버린 소설의 결말이라는 생각만 주구장창 들고. 그래도 용케 살아는 있나 싶었는데 얼마 전 그 사단이 터졌다.


죽음은 의식하면 멀어지고, 그렇지 않을 땐 가까이 오는 모양이다. 


옆 런닝머신에 딱 보기에도 건강하고 생기 넘쳐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자리를 잡고 뛰기 시작했다. 딴 데를 보는 척 고개를 슬쩍 돌려 본 옆모습이 예술이다. 날씬하고 젊은 여자와 비대해진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나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불현듯 대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여자애들은 내가 술 먹으러 간다고 하면 우르르 따라왔고 술자리에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웃음을 터뜨려 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재미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정말로-


한 번은 여자애들끼리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싸움이 났다. 주먹이 오고 가는 살벌한 싸움에 놀라서 끼어들어 몸으로 막았다. 씩씩거리며 빨개진 눈으로 서로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 났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원인은 나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중간에서 꼬리치며 알랑댄 게 누군데! 다른 여자애도 지지 않고 받아 쳤다. 누가 보면 사귀는 사이에서 내가 꼬리친 줄 알겠네!


과대였던 내 친구가 나섰다. 둘 다 소란 피우지 마, 강의실 앞에서 사람들 다 있는데 드라마를 찍고 있네. 싸우려면 너희들끼리 사람 없는 데서 싸우던가.


지금 와선 부질 없지만 정말 예전엔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나는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회상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정말 동일인물이 맞는 걸까. 결락감이 허무하게 밀려왔다. 옆자리의 젊은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말을 걸어 온다. 저기요, 너무 제 스타일이어서 그런데 전화번호 좀…….


나도 운동을 멈추고 울렁거리는 땅에 발을 디뎠다. 극심한 허기감이 밀려 온다.


-


헬스를 다닌 지 한달이 넘었다. 식단도 같이 조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15kg정도를 감량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100kg을 넘는 거구였지만, 걸을 때마다 숨이 차고 호흡 곤란처럼 느껴지던 증상이 많이 완화되었다.


-원래 체중이 많이 나갔었기 때문에 초기 감량은 빠른 편이에요, 이 페이스 계속 유지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프 보시면 체지방이 착실하게 빠지고 있거든요.


20대 초반의 트레이너는 여전히 친절하게 감량 결과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의 특이한 헤어 스타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대 초반과 나는 환경도 생각의 유연성도 다르다. 트레이너 님은 주말에 보통 뭐하세요? 라고 묻자 술을 좋아하지만 직업 특성상 많이 마실 수는 없어서 스트레스도 풀 겸 클럽에 자주 간다고 답했다. 그렇군, 뻔한데-괜히 물어봤어.


마침 카톡 알림음이 울렸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종결되었다. 수신인은 저번에 만났던 여자 동기였다. 오늘 시간 되냐는 내용이다.


 


나는 당혹감에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간판을 재차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술집인데? 알다시피 금연, 금주 중인데다 식단 조절까지 하고 있는 걸 친구가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왜 이런 곳으로 불러냈을까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었다. 평소에 배려심이 있던 친구가 다이어트 중인 나를 술집으로 불러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왔어? 미안하다, 너 다이어트 중일 텐데 이런 곳으로 부르고.


한눈에 보기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술집은 룸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약간의 소음은 있었지만 대화하는데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겉옷을 벗어 옆 의자에 걸었다. –


-뭐야, 너 무슨 일 있어?


-너 살 많이 빠졌네.


친구가 쿡쿡 웃었다. 쿡쿡 웃는 건 그녀의 버릇이었지만 평소랑은 너무 다른 어조였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많이 취해 있다는 걸 알았다. 테이블에는 빈 맥주병과 소주병이 즐비했다. 나는 말없이 빈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있잖아, 나 이혼할 것 같아.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편이란 작자가 신입 사원이랑 바람났더라.


평소에 안마방이니 대딸방 그런 곳 다니고 그런 거 다 모른 척 했는데. 기가 막히지, 그 신입 사원이라는 여자애, 임신이란다.


-그 여자는 몇 살인데?


-26.


-이혼하자고 말했어? 남편한테?


-순순히 그러자고 하더라. 개새끼가-


그녀에게는 남편의 추접한 염문보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했다는 분노가 더 컸다. 20대 후반에 다낭성 난소 증후군으로 인해 임신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자궁근종이 심해서 자궁절제술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임신을 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받고 산부인과를 밥 먹듯 다니며 임신을 위한 노력을 했다.


-맘 같아서는……남편도 죽이고 그 여자애 자궁도 찢어버리고 싶어.


자궁근종 수술 받으러 갔을 때 의사가 떼어낸 용종을 보여줬었어. 엄청 많고 징그러웠지. 저런

게 내 몸에 있다는 것도 혐오스럽고,


그 때 내가 느낀 그런 감정들, 그 새끼는 발톱의 때만큼도 생각해 본 적 없겠지.


- 


술에 잔뜩 취한 그녀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언제나 완벽하고 멋진 모습의 그녀이기에 상심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주변에도 비슷한 사례로 이혼한 케이스가 있다. 많지는 않아도 결혼한 친구 중에 이혼한 친구들


이 간혹 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같이 드라마요, 막장이다. 그렇다고 결혼한 친구들이 행복


해 하냐고 묻는다면 넌센스다.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구질구질 하다.


이제는 멋지고 행복하고 찬란한 순간만을 보여 줄 시기는 지났다. 남은 건 신파극이었다. 다들 각


자의 치부와 상처를 적당히 드러내면서 살아갈 뿐이다.


친구를 배웅하고 집에 오는 길에 나는 또 극심한 허기를 느꼈다. 뭐에 홀린 듯이 튀김과 떡볶이


2인분씩 사고, 빵집에 들러 빵을 4만원어치나 구입했다. 그리고 마트에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내 정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사온 먹


을거리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주섬주섬 먹기 시작했다. 배부른 줄도 몰랐다. 허기만이 느껴지고 어


떤 공허함이 전신을 꽉 채워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고


통제도 불가능했다. 앉은 자리에서 사온 것들을 다 먹고 나서 토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잠이 들


고 말았다.


-

 


내 심정과는 상관 없이 아침은 어김없이 밝았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갑자기 폭식한 탓에


위장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져서 출근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지만, 꾸역꾸역


준비를 하고 전철에 평소보다 2배는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실었다.  


머릿속에는 어제 먹은 음식에 대한 후회로 가득했다. 내가 정말 왜 그랬지, 오늘은 하루 종일 굶


어야 할까, 그 동안 잘 해오고 있었는데, 난 역시 한심한 놈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어졌고 내릴 역에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킬 때도 주변 의식은 못하고 온통 나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


굉음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과연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라도 주위를 둘러볼 수 밖에 없는 엄청난 소리였다.

 폭발 사고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연기도, 불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쓰러져 있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고 있는게 보였다. 나 역시 그쪽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어요!


-119를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 사람, 숨을 안 쉬는데요!


나는 숨을 크게 삼켰다. 정황을 봤을 때 심정지가 와서 쓰러진 사람인 것 같았다. 정신이 아찔하


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모로 누워 있는 저 사람의 얼굴이 내 얼굴로 보였다. 갑자기 어제 먹었던


음식들이 떠올랐다. 식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식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식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고 사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은 정말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


저 들 정도로 나는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쓰러진 사람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머리도 움직여 주지 않는 상태였다.


-거기 양복입고 안경 끼신 회사원분, 제세동기 좀 가져다 주세요!


그떄였다.

낮지만 전달력 있고 또렷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양복입고, 안경을 낀-나를 말하는 것이다. 학생 하나가 쓰러

진 사람의 의식을 확인하더니 이어 맥이 뛰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쓰러진 사람의 셔츠를 빠른 속도로 툭 툭 벗겨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 흰 얼굴에 동그란 안경과 동그란 눈.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 학생이 응급실


에서 내 다리를 잡고 있던 학생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풀린 듯 다리가 움직


, 나는 그 학생이 말한대로 서둘러 제세동기를 가지고 왔다.


학생은 침착하지만 신속하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었다. 가슴뼈에 체중을 실어 압박을 가하


면서 환자의 의식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제세동기를 건내 주자 신속하게 켜서 패드를 옆구리와


가슴 위에 부착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전기충격이 오니까 환자로부터 떨어지라고 외치는 그 작은 등에서 묘한 동


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작고 강인한 학생의 미래가 얼핏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을 못한다고 구박받는 신입 간호


사에서, 어느 새 후배 간호사를 지도하는 간호사가 되고, 환자를 능숙하게 다루고 동료 간호사를


토닥거리는 고참 간호사가 되는 모습까지.


그래, 그렇구나.


현재의 그녀는 미래의 그녀가 된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그게 세대의 전이를 타고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안도감마저 느껴


졌다.


멀리서 119 구조대원들이 뛰어와서 상황을 인계 받고 환자를 옮겼다. 일이 일단락되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제 갈 길을 가고, 어떤 소란이 있었냐는 듯 지하철 내는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상황이 끝나자 학생은 참아 왔던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자기를 바라


보고 있는 나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 인파 속으로 조용히 섞여 들어갔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상한 안도감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확신처럼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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