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에스티레의 다리

by 뚱땡이와냐옹칫 posted Oct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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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에스티레의 다리


  J에게는 고민이 있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가로등불이 하나둘씩 켜질 무렵 J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늘은 만나야할 사람이 있다.

“벌써 날이 춥다.”

엊그제가 여름이었던듯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바람이 아직은 어색하다.  평소라면 홀로 걷는 거리가 쓸쓸해서 귀에 MP3를

고 음악을  들으며 정신없이 걸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마음이 조금은 무겁다.  오늘은, 만나야할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해야할 말이 있다.


  K에게는 만나는 애인이 있다.  만난지도 어언 3년이 넘어가고 이제 슬슬 관계가 지루하다.

한때는 그 사람과 결혼을 상상 했던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가 지겹다.  행복하지 않은 관계지만 그에게 나쁜 사람이 될까봐,

본심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내심 그가 먼저 말해주길 바라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아직 내 마음을 모를까. ’ 곧 만나기로 했다.

더 이상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오늘도 연기를 해야 할것같다.


< J >

  항상 길을 걷다보면, 양갈래길이 나온다. 그중에 오른쪽 길로가면 깊은 바다위로 이어진 페리에스티레의 다리를 지나게 된다. 그곳을 걸으면 아주 먼 옛날의 기억에서 어제까지에 이르는,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지나간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추억을 곱씹는건, 행복한일이다.

어머니가 챙겨주시던 도시락의 냄새, 아버지와 하던 공놀이, 어릴적 학원이 끝나고 사먹던 불량식품,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수다, K.

하지만 그 길을 지나고 나면 나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걸 깨닫는다. 그때의 공허함은 끔찍할 만치 나를 외롭게

만든다. 잠시 동안의 달콤함을 주고 곧바로 지옥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그걸 알고 있지만,  나는 오늘도 오른쪽길을 선택한다.


< K >

  어릴적부터 어머니는 항상 내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잘못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누군가 나대신 선택을 해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요즘도 그렇게 살고있다. 남들에게 인기있는 구두, 남들에게 인기있는 책, 남들에게 인기있는 아이돌 가수를 좋아한다. 선택이란건 너무 어려운일이니까 남들이 하는걸 따라한다.

게 내 삶의 방식이다.

  J와 만나게된것도 나의 선택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멀쩡하게 생겼고 남들이 좋은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먼저 고백을 했다.  만나고 당분간은 좋았다. 지겨워졌을 뿐이다.  그는, 아직도 좋은 사람이긴 하다.

  J는 페리에스티레의 다리를 걷는걸 좋아한다.  그 길을 걷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오늘 한번도 간적없던 그 다리를

처음으로 건넜다.  J와의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다시 예전처럼 J가 좋아질 수 있을까." 사실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다.


<J>

  길의 끝에 다다라서 페리에스티레의 다리가 보인다.  왠일인지, 오늘은 K가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사실 K는 나에게 마음이 없다.  알면서도 그녀를 놓치 못하는건 외로움 때문이다. 그렇지만 K를 만나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잠깐 잊혀질 뿐이다. K는 나에게 헤어지자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오늘 그녀를 대신해서 선택을 해야 할 것같다.


<K>

  J를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은 들었다.  친구로만 지내면 좋을것 같지만 불가능 하다는걸 알고 있다. 손을 잡고 혼자 걸어왔던 페리에스티레의 다리를 둘이서 다시 건넌다. 떠오르는 기억들 사이를 비집고 J가 말을 걸어온다.  과장을 보태서 열심히

대답을 한다.  다시 아무말 없이 걷다 다리 끝이 보이자, J는 내게 이별을 말한다.  웬걸. 그가 해줬으면 하는 말이었다.

살짝 마음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내심 기뻣다. 관심도 없지만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행복하게 살라느니 좋은사람이었다느니 마지막까지 그에게 좋은사람이고 싶어 그의 앞길에 축복을 빌어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것 같다.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나는 행복하다.


<J>

  K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정신이 없다.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페리에스티레 다리 위라 그런지 뒤죽박죽이다.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 힘들다.  외로움을 채우려 K를 만났지만 외로움은

곱절이되어 나를 괴롭힌다. 다리옆 펼쳐놓인 평온한 바다를 보고 주저앉아 숨죽여 울었다. 이 다리를 건너고 나서 다가올 공허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또다시 선택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웠던 기억들과 행복했던 순간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영원히 저 기억들 속에 갇혀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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