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자

by 마이오니 posted Nov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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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준영
남자가 웃고 있다.

행복에 겨운 듯한 웃음소리에 소름 끼치는 유리조각이 끼여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증오와 경멸, 회의감과 공허함이 한데 뒤섞인 남자의 눈은 미쳐서 날뛰는 광인을 연상케 한다.

찌르는 듯한 끔찍한 두통이 절정에 이를 때까지 남자는 악을 쓰듯 웃는다.

그가 바라는 건, 조금이라도 빨리 죽는 것뿐이다.

그의 머릿속엔 지난날들이 남자를 조롱하듯 보일 듯 말 듯 아스라이 스쳐 지나간다.

수줍게 웃는 앳된 얼굴의 소녀가 나타나 남자에게 속삭인다.

“좋아해.”

남자의 웃음이 뚝 멈췄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며 눈에는 공포가 들이찬다.

소녀가 사라지고 소년이 모습을 보인다. 소년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남자에게 손을 흔든다.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소년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별안간 소년이 급작스럽게 성장한다.

어린 티를 벗은 성인이 된 소년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남자에게 경멸적인 말을 뱉는다.

 “네가 하는 짓거리들 이젠 우습지도 않아.”

남자가 크게 동요한다. 변명이라도 하듯, 용서라도 구하는 듯 필사적으로 소년에게 손을 뻗지만 닿지 못하고 소년은 사라진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남자가 바닥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중얼거린다.

모든 것이 그의 탓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망쳤다. 남자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남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문다. 아릿하게 가슴이 아프다. 머리의 두통보다 심장이 너무 아프다. 그의 눈에는 힘없이 눈물이 흐른다.

허공을 응시하며, 그가 저지를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그는 죽음을 기다렸다.
이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던, 그럼에도 불행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1-준영
그날 날씨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당시 나는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돌이켜 보면 나의 심리상태는 꽤 불안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처음으로 한 것은 외투를 벗어두고 차를 달일 물을 끓인 것이었다. 그리고 흰 벽 위에 크게 붙어져 있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달력을 두 장 넘겼다.

 4월 15일 칸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고 그 밑에 적어 넣었다.

“장례식.”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 그레이를 홀짝이며 달력을 다시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다음 날이 내 생일이다. 저 날짜보다 하루만 더 살 수 있다면. 생일에 사망이라니. 굉장히 극적이고 운명적인걸.


1시간쯤 전 단조로운 목소리와 탈모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는 머리칼이 특징이었던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몇 가지 의례적인 검사를 끝내고 병원에 비치된 신문을 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간호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심도 없는 분야의 칼럼만 주야장천 읽고 있었기에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그 목소리가 죽음의 부름인지는 몰랐다.

따뜻한 내 방이 간절했고 병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몰린 사람들 때문에 슬슬 한계가 오던 참이었다.

저명해 보이는 의사는 나를 슬쩍 보더니 질문을 시작했다.

“평소에 두통은 없었나요?”

두통이라니. 그건 현대인들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병이 아닌가.

“가끔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어요.”

 “몸을 가누기 어렵다던가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지거나 하는 건요?”

“아니요.”

 몇 가지 이어진 질문에 나는 평소 내가 자각하고 있던 몸의 문제를 최대한 저하해서 답변했다. 나는 빨리 이 빌어먹을 검사를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의사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덮쳐왔다.

“제 몸에 무슨 이상이 있나요?”

 “그게…… 뇌종양인 것 같습니다.”

뇌종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었다. 대학 시절에 낙제를 면하기 위해 절박하게 들은 강의의 주제가 뇌종양이었다. 뇌종양도 치료법이 있다. 수술이 번거롭긴 하겠지만, 의사가 너무 무게를 잡는 바람에 뭔가 더 큰 상황을 예상하던 나는 작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럼 수술이 필요하겠네요.”

 “예. 제가 부탁하는 대로 잘 따라와 주신다면 아마 8개월까지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조금 일렀던 걸까.

“8개월이라고요?”

“그게…….…”

“뇌종양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여기 사진이 보이시죠? 이 경우, 종양이 너무 깊숙한 위치에 생겨나 제거는 불가능합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아니, 정말로 잠깐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그렇게 느꼈다.

 “제가 곧 죽나요?”

의사는 의지를 확고히 했는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침착하게 되묻자 그가 대답했다.

 “수술을 받고 지속적인 치료를 받는다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8개월까지 가능하겠지만, 수술을 받지 않으신다면……. 글쎄요, 2개월 정도일까요.”


집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병원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내 방이었지만 어질러진 방의 모습에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2개월 뒤에 죽을 목숨을 좁은 단칸방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다시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의도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코트의 단추를 끝까지 채우며 빠르게 걸었을 뿐이었다. 바깥의 찬바람을 맞으니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머릿속으로 익숙한 동네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그래 근처에 공원이 있었지. 예전에 자주 산책했었는데 요즘엔 잘 가질 않았어. 거기에 가야겠어. 잠시 앉아서 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거야.

정신없는 와중 내가 고른 장소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시에서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된 공원은 규모가 거대했고 지리적으로도 완벽했다. 내가 도착하니, 데이트하는 연인들과 늦게까지 놀고 있는 아이들은 해 질 녘의 공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한때는 온종일 시간을 보내곤 했던 익숙한 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죽음이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죽음으로서 도망치는 것처럼.

아니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음은 나를 쫓아올 거야. 제트기를 타고 달나라도 가더라도 나를 따라올 거라고.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나의 걷는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졌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점차 숨이 가빠오고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음속의 응어리가 버거웠다. 거대한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호흡이 편치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죽는 건가? 그러나 호흡곤란은 달리다시피 한 내 걸음과 평소 운동과는 담을 쌓은 내 평소 습관이 더해진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였다.

한참을 걷던 나는 지쳐서 가까이 있던 벤치에 앉았다.

확실히 기분은 나아졌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평소의 침착함으로 돌아온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로 끊임없이 걸리며 나를 괴롭히던 문제를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하였다.

우진이는 어떻게 하지? 그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게다가 그는 지금 한국에 없어. 미국에서 별안간 16년 지기 친구의 사망 예정 소식을 듣는 거라고. 내가 우진이 에게 내가 2개월 뒤면 죽을 사람이고, 또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남은 생을 병원에 바칠 생각은 없다는 걸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처음부터 그를 가까이하지 말았어야 했어. 우진과 가까이 지냈으면 안 되었던 거야.’

아, 아. 이런 생각 하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습관처럼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그는 2개월 안에 돌아올 것 같지 않다. 그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겨두고 죽으면? 그는 적어도 남은 2개월 동안은 평안히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민 끝에 휴대전화를 켜고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주위를 보니 사람들 수도 확연히 줄었다. 그림자의 길이도 점점 길어지다. 이제는 희미하게 없어져 간다.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소란스럽던 소음은 점차 멀어져 간다. 벤치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차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2-우진
그날은 유난히 잘 풀리지 않았다.

사실 이 표현이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 잘 풀릴 일조차 없었던 탓이다. 아침부터 원인 모를 공허함을 느꼈고 이유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온종일 빈둥거리기로 하였다. 냉장고에 있던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코미디 영화를 두 편 연속해서 보았다.

그리고 낮잠을 두 시간이나 잤고 준영이 준 [달과 6펜스]를 읽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내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막연한 감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사춘기 소년 같은 강렬한 감정에 또다시 화가 났다.

 뭐가 문제일까? 마크와 샐리의 싸움 때문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오스트리아에서 산 책갈피? 아니면 단순히 안 좋은 날씨 탓인가?

나는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에 휴대전화를 꺼 두었고 더군다나 한국과 미국의 큰 시차 때문에 나는 그의 문자를 13시간이나 늦게 확인했다. 휴대폰을 켠 것은 저녁으로 먹을 배달음식을 배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준영에게서의 오래간만의 소식을 발견했고 반가운 마음에 별다른 생각 없이 내용을 확인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놀랄 정도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으로 침착했던 내 모습에는 너무나 커서 차마 이해하지 못한 모순된 충격이 깔렸었다.

나는 즉시 모바일로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고 텅 빈 머리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메시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오늘 건강검진을 받았어. 뇌종양이라는데 완쾌될 수 없는 케이스래. 지속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2개월쯤 뒤에는 살기 힘들 것 같아.]


준영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한 지 머지않아 나는 그가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이따금 비슷한 부류의 농담을 하는 것으로 보아 나와 비슷하게 느끼는 듯하였다.

나는 선천적으로 활달하고 명량 하며 낙관적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익숙하고 나 또한 그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준영은 뼛속까지 개인주의자인데다가 자신과 직접적인 연결된 큰일이 아닌 이상 모든 가십거리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호감을 느끼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눈앞에서 침을 뱉고 욕설을 지껄여도 분노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두 눈.

무표정으로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그의 눈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분노도, 비웃음도, 오만함도, 경멸도 담겨 있지 않다.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반을 배정받았을 때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엄연히 말하자면 그때가 첫 만남이라고 해야겠지만 정확히 어느 상황에 첫 대화를 했는지 둘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1학년 때는 서로에게 큰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교실의 골칫덩어리였고 바람처럼 교실을 휘어 다녔지만 준영은 존재를 알아차리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당시 난 그를 단순한 모범생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내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였다. 1년 만에 다시 한 교실을 쓰면서 준영에 대해서 의도치 않게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우선 그를 모범생이라고 여긴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는 나만큼이나 성적이 좋지 않았고 쉬는 시간마다 들고 있는 책이 교과서나 참고서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수업시간에도 엎드려 자기 일쑤였다.

 또한, 그가 뭔가 적어 대던 두툼한 공책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필기 노트는 아니었다.

그날은 유난히 매서운 여름날이었다. 뉴스 아나운서 앵커 누나들도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사상 최악의 날씨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반 선생님은 다른 평범한 반이 그러듯 한 달에 한 번씩 짝을 바꿔 주었고 우연하게도 준영과 나는 짝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특별 대접은 아니었고 그도 유난히 나를 거부하거나 특별히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는 무슨 장르인진 모르겠지만, 독서를 하거나 엎드려 잤다.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았고 준영 또한 다른 친구들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고 만 것이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쉬는 시간에 복도를 쏘아 다니지 않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준영은 화장실에 간 것 같았는데 그의 책상 위에는 그가 가끔 꺼내는 초록색 표지의 공책이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쓴 듯 하드 표지는 끝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아무런 줄이 없는 무선 스타일이었다. 크기는 손바닥 두 개를 나란히 붙인 것보다 조금 더 컸고 두께는 내가 썼던 반성문과 당시 기준으로 앞으로 쓰게 될 빽빽이를 모두 합친 것보다 두꺼웠다.

저 재미없는 샌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뭔가에 홀린 듯 슬쩍 노트를 넘겼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뭔가가 휘갈겨 쓰여 있는데 나 또한 비슷한 글씨체였기에 읽는데 크게 힘들진 않았다.

 “…….”

나는 책을 좋아했다.

 그 사실이 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기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문학을 좋아했고 특히 시를 사랑했다.

 그래서 잘못된 일이라는 거리낌이 내 속에서 냉장고에 넣어둔 눈사람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양 사라졌다.

소극적인 사람이 꼼꼼할 거라는 편견을 무참히 깨듯 아무런 양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준영이 써 둔 것은 ‘시’ 였다.

그리고 두 줄을 쭉쭉 긋고 다른 단어로 바꿔 두거나 단락의 위치를 바꾸는 등 여러 변경 표시를 해 둔 것을 보아 틀림없는 그의 자작시였다.

그때, 나는 운명처럼 내 마음에 꼭 달라붙는 시를 발견했다. 이런 시를 만난 것이, 더군다나 그 작가가 내 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거의 감격하고 있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오, 신이시여. 제발 내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기를.

그러나 감상에 젖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에도 내 주위의 시간은 착실하게 돌아갔나 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교실에 들어오는 준영이랑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혼이 나가 있던 나는 그제야 내가 어쩌면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볼썽사납게 서둘러 노트를 덥고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하지는 않았다.

 준영은 당황한 것 같지 않았고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평소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자리로 걸어왔을 뿐이었다.

“미안해.”

 내가 먼저 담백하게 사과했다. 준영은 한쪽 눈썹을 치켜 새우며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한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아, 아. 걱정하지 마. 괜찮아.”

잠깐의 침묵.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 “근데…….”

“엉?”

 “그거 네가 쓴 거 맞지?”

 내가 그가 막 가방에 집어넣으려 하던 공책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그는 의아한 듯 나에게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 나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라. 얘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너 시크가 콘셉트 아니었니.

 “왜? 무슨 문제라도?”

“아니, 나 지금 네 시랑 사랑에 빠지고 말았거든.”

 그가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시를 좋아하나 보네.”

“응. 어울리지 않지? 여하튼 너는? 언제부터 시 쓰기 시작했어?”

“오래 안됐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맙소사. 겨우 2년 만에? 이게 인간이야?

 “어쩌다가?”

그는 캐묻는 내가 의아한 듯하였지만, 성실히 답해 주었다.

“어쩌다가 ‘진달래꽃’을 보게 됐는데 아주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고 좋아했었어. 근데 내 해석이랑 정 반대더라고. 뭐랄까, 그런 돌려 까기 기술에서 끌렸달까.”

야속한 종은 그 타이밍에 울렸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교무실에 끌려갔고 그다음 시간에는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준영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밥을 먹고 곧바로 교실에 갔지만 준영은 또 엎드려 꿈나라로 가 있었다.

친구들은 황당해 있는 나를 가볍게 한 대 치며 농담을 던졌지만 재치있게 받아치지 못하였다.

 나를 거부하는 우연한 연속에 오기가 생겼다. 확신이 들었다. 내 마음속은 이건 다시 없을 기회라고 나를 촉구했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나는 준영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자지 않고 있을 때는 별 의미 없는 말을 걸었고 혼자 점심 먹고 있는 그의 곁에서 밥을 먹었다.

 오렌지 주스를 사다 바쳤고 하교할 때도 그를 쫓아갔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그와 나는 같은 방향이었다.

그는 겉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쾌하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다소 친절했던 말투도 무뚝뚝하게 바뀌었다.

“야,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뒤지겠네. 4교시에 체육이라니 누구 아이디어인 거야?”

“너랑 밥 먹을 생각 없는데.”

“맙소사, 자기야. 어떻게 나를!”

“그쯤하고 내 눈앞에서 꺼져줄래.”

 “아아~”

내가 말을 늘이며 고집을 부리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중에 말하길 그는 내가 그쯤 하다가 곧 흥미를 잃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완전히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지. 마음 같아서는 작작 종알거리고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니까.”

 내가 웃음을 찾으며 되물었다.

“그럼 왜 안 그랬어?”

물론 그런 것에 끄떡할 내가 아니지만.

“내 콘셉트랑 안 맞으니까. 넌 친구도 많았고 엮이고 싶지 않았지.”

 준영은 예상보다 나의 행동이 오래가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직접적인 거부의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건 내게는 굉장히 다행인 일이었다.

그가 완강한 태도로 나오면 매달리는 처지인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은 곧 지나갔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난 너한테 내 전화번호를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다 방법이 있지. 놀자. 새로 생긴 카페 앞으로.”

 “바빠.”

“네가 무슨 공부를 하겠니 운동을 하겠니. 방에 처박혀서 빈둥거리고 있겠지. 너 그러다 체력이 바닥나서 열사병으로 죽는다.”

“첫째. 난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집에 있고, 둘째, 아까 말했다시피 난 나갈 생각 없어. 셋째, 난 남자랑 둘이서 카페에 가지 않아.”

“누가 카페 간다더니? 그리로 나오랬지. 서점 가자. 좋아하잖아. 응?”

전화기 안에서 준영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앗싸. 성공이다.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콜택시로 전화를 걸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지갑을 챙기고 옷장에서 챙모자를 꺼냈다.

 “근데 너 이렇게 돈 써도 돼?”

준영이가 나를 따라 택시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택시를 타고 온 나를 보고 그는 그렇게 돈을 낭비할 순 없다고 했고 난 내가 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있는 게 돈뿐인걸.”

 “재벌 2세라고 돼?”

 “그 정도까진 아니고. 우리 집이 부자인 건 맞지.”

“아버지가 대기업이라도 다니셔?”

“아니. 엄마가 **회사 사장님.”

침묵이 이어졌다. 말하지 말걸 그랬나? 우리 집이 꽤 알려진 부잣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었다.

질척거리며 달라붙거나 눈에 띄게 피하거나. 전자는 일반적인 경우였고 후자는 아마 부담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은근히 초조해하는 내 걱정과 달리 그는 내 집안에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서점에서 나름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준영과 아주 친해지는 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지않아 접착제처럼 그의 곁에 계속 붙어있는 것을 그가 극도로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개학을 하고 난 이후로는 그런 준영의 성격을 배려해 최대한 모르는 척 지내주려고 했다. 하교할 때는 가끔 마주쳐서 동행했는데 그도 그렇게 질색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생일 선물을 사 달라고 졸랐을 때는 ‘달과 6펜스’를 사 주기도 했다. 그때까지 내가 왜 그 유명한 책을 읽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다.

준영을 보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마음이 불안하다. 마치 어느 순간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질 것 같다. 나를 멀리하려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초조해진다. 스트릭랜드처럼 어느 순간 미련 없이 내게 고개를 돌릴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는 성숙하고 생각이 깊으며 그의 글은 울림이 있다. 그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좋아한다. 그와의 대화가 즐겁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런데 죽는다니. 천재는 일찍 죽는다. 이런 거야? 심호흡했다. 머리를 비우려고 창문 밖의 내 뒤를 지나치는 구름에 집중했다. 지금 울면 멈추지 못할 것이고 곧 있으면 한국 도착이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준영을 만날 순 없다. 준영 앞에서는 무조건 웃어야 하니까.
#3-준영
다음 날에도 공원에 갔다. 이번에는 책장에 있는 시집 하나를 아무거나 하나 뽑아들고 서였다.

마치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몸이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우진에게는 아직 답장이 없었다. 못 본 건가.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아침 7시 반. 주말 아침임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저 사람들은 일찍 죽지 않겠지.

커다란 나무 아래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는 2개월 뒤에 죽겠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한 소리였다. 명색이 시인이면서 새소리도 못 듣고 살았다니. 웃음이 피식 피식 새어 나왔다. 헛살았나.

회의감이 파도처럼 밀려 오르는 찰나 햇살이 춤을 추는 발레리노처럼 너실히 마을을 비췄다. 드러나는 그림자가 점점 고개를 돌리자 평안했던 분위기가 가시고 슬슬 활발한 도시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맑은 날이었고 구름은 예쁘게 떠 있었다. 어릴 적 그림책에서 보이던 그런 완벽한 뭉게구름. 한참 동안 단조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주변을 스쳐 갔던 작은 점 하나하나가 소중해 보였다. 다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니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눈을 감고 풍경을 인식하려고 애를 썼다. 내 머릿속에 가로등, 산책로, 산을 그려보았다. 드물게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느껴보려고 집중해 모았다. 바람 한 줄기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다.

 “여어!”

 번쩍 눈이 떠진다. 눈을 뜨기 직전, 찰나의 순간에 우진의 형상이 그려졌다가 눈에 빛이 들어오며 사라진다.

 조금 멀리서 격식 없는 차림의 그가 보였다. 특유의 장난기 머금은 눈빛. 절대로 고치지 않는 불량하기 짝이 없는 자세.

 빵을 훔치다 걸린 장발장이 된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안녕, 고독을 즐기는 남자.”

 그가 어떻게 보면 오만해 보이는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슬로우 모션처럼 그의 몸짓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강우진.

그가 왔다.


작년 이맘때쯤, 그는 급작스럽게 ‘머리를 식히러’ 미국에 갔다. 우진은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했다.

“이봐, 지금이 딱 좋다니까! 아메리카의 뜨거운 햇살! 푸른 바다! 장담하건대 도착하자마자 온갖 영감들이 쏟아질 거야. 그리고…….”

“말은 고맙지만 됐어. 갑자기 무슨 미국이야.”

그 뒤로는 몇 번의 설득이 이어졌지만 나는 끝까지 거절했다. 그가 단순한 유흥이나 변덕으로 한국을 떠나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쳐 둔 울타리를 깨부수고 들어온 하나뿐인 친구가 내가 필요할 때, 나는 또다시 병이 도져 달아나 버렸다.

우진이 자신의 고민을 홧김에 말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우리 둘의 사이가 이보다 더 가까워질까 봐 무서웠다.

그와 이렇게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암묵적인 선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선을 벗어나지 안아주었다.

무려 16년 동안이나 나를 참아 주었다.
그가 미국 여행을 선포하기 2주일쯤 전이었다.

나는 새벽 3시에 별안간 울린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안 그래도 가벼운 불면증이 있던 나였기에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벨 소리는 계속 울렸지만, 휴대전화를 찾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공책들 사이에 끼여 불빛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 시간에 어떤 미친 새끼야.”

불만스럽게 투덜거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우진이었다.

 “여보세요?”

처음에는 술을 마시고 개가 된 우진을 처리하기 위해 옆에 있던 지인이 가장 최근 통화했던 사람에게 연락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조금 이상했다. 바람 같은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여보세요 라고 말하려는 찰나 전화기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

우스워 죽겠다는 활기찬 웃음소리.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틀림없는 우진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전화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은 달아났고 짜증도 사라지고 순수한 공포만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이건 우진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웃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비참하게 웃지 않았다.

“여보세요? 야, 너 어디야.”

그가 웅얼거리는 듯이 위치를 설명하자 서둘러 전화를 그대로 윗옷을 걸치고 허둥대며 밖으로 나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일이지? 뭐가 문제지? 뭔가가 크게 잘못됐다.

설사 가상으로 밖에는 소나기까지 퍼붓고 있었다. 비가 차의 창문을 세차게 두드릴수록 내 불안감은 고조되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나는 한참 헤맨 끝에 동네의 뒷골목 사이에서 그를 찾아냈다.

 우진을 발견하거든 안도감은 잠시 나는 곧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우진은 다른 남자와 있는데 나는 그들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우진과 마주 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우진의 멱살을 틀어잡고 거칠게 벽으로 찧었다. 나는 우진이 반항도 하지 않은 채 남자에게 얻어맞는 모습을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은 채 넋이 빠진 상태로 지켜보았다.

 남자는 틀림없이 우진의 형이었다. 몇 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둘 다 술에 취해 있었고 우진은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말려야 하나? 하지만…….

 저건 두 사람의 일이야.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면? 등 뒤로 흐르는 식은 짬이 티셔츠를 흥건히 적셨다. 이제 우진은 완전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발로 그를 차는 우진의 형의 행동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거친 빗줄기 사이에서 유난히 그 둘만 크게 보였다.

‘당장 내려서 말려야 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다급히 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신발창에 박힌 돌멩이처럼 걸리는 것이 있다.

우진은 언제나 미소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도 명량하고 태연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전부라고 믿을 만큼 얼간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넌 언제나 내 앞에서 웃어야 해.’

 억지스러운 반항이 눈치 없게 나를 제지했다. 그의 어두운 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라나 애써 외면해 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는 이 이상으로 가까워지면 안되니까. 지금 이 거리는 흠잡을 것 없으니까.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도 않는.

 이번 일로 그와 의도치 않게 더 가까워진다면?

 ‘못해.’

 나는 얄팍하고 나약한 인간이라 분명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 것이다. 그와 멀어지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결국, 우진의 형이 마지막으로 우진의 머리를 걷어차고 더 뭐라고 말하고는 분노를 억누르듯 양 주먹을 움켜쥐고 내 시야에서 퇴장할 때까지, 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그를 지붕이 있는 차로 옮겼다. 119에 전화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내자 그가 말렸다.

“심각한 건 아니야. 오, 신이시여. 구급차라니. 너무 모양 빠지잖아.”

바보같이 심각하지 않다는 그의 한마디에 평소 같은 과장스런 말에 안심해 버렸다. 부상당한 곳에 손을 떼지 못하는 주제에 끝까지 병원을 싫다고 버티는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후로의 만남에도 우리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고 멍청하게도, 또다시 안심해 버렸다.


“아, 맞다.”

 우진이 한참 동안 미국에서의 모험담을 풀어놓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운을 띄었다. “2개월 뒤에 네 생일이지 않나?” 내 죽음이 가볍게 말하는 그를 뭐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 그때 죽는 게 내 소원이야.”


#4-준영
14살 때 처음 만나 현재 30살.

 16년 동안 우진과 나는 딱 3번 싸웠다.

3번의 싸움 모두 어느 한 쪽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시각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어렸을 때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선천적이 성격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데 내가 뭘 어떻게 바꾸겠는가.

우진과 나의 말도 안 되는 케미가 자그마치 16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의 인내심 탓이었다. 내가 불안함에 거리를 둘랍시면 그가 알아서 뒷걸음쳐 나를 안심시켰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고마움은 커졌지만, 나에 대한 신뢰는 점점 추락했다.

나는 왜. 썩어빠진 놈.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짝사랑해 온 여학생이 있었다.

 1학년때 까지는 다소 딱딱해 보이는 안경을 쓰다가 2학년 때부터 렌즈를 쓰기 시작한 애였다.

우진은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난 그때 진심으로 그에게 안과 진료를 권장했다. 그녀의 정확히 어느 지점에 끌린 지 모르겠다.

웃을 때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웃음일까, 아니면 미약하지만 자지러질 때마다 보이는 보조개일까.

그것도 아니면 활달하고 당당한 태도? 모든 인간관계를 거부했던 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끌림이었다. 그런 그녀가 3학년 때,

“음……. 그게…….”

 볼에 살포시 핀 홍조가 유독 예뻤다.

 “좋아해.”

비참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왤까. 나 같은 건 눈에 띄지도 않았을 텐데.

 “미안해.”

이 세 글자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지.

그냥 그저 그녀가 좋았다. 기사들 앞의 오만한 여왕처럼 짓는 자신만만한 웃음이, 그냥 좋았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마다 나는 광월한 정원에서의 풀 냄새를 느꼈다. 그녀가 누구에게 웃음 짓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그녀의 미소가 좋았을 뿐이다.

그녀가 나에게 웃음 짓길 바라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더 많이 웃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녀와 함께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 주머니 속에서 꺼내 볼 풋풋한 추억이길 바랐다.

때문에, 그녀가 답지 않게 수줍은 태도로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짓이기는 것처럼 아팠다.

지금이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에는 절실하고 절박했다.

“설마 튕기는 건 아니지? 미쳤어?”

우진은 내게 진지하게 화를 났다.

“너 걔 좋아했잖아. 근데 왜?”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 집에 다짜고짜 찾아와 “왜?”를 연발했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젠장 넌 이미 걜 힘들게 했어.”

 “내가 걔한테 상처라도 주면? 흠이라도 되면? 난 나 말고 다른 사람 책임 잘 자신 없어.”

 우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울타리 쳐 두고 질질 짜면서 ‘상처 줄까 봐’ 이러고 있을 건가?”

그의 목소리엔 흥분은 가셨지만,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아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를 이 록 짓이기듯 뱉어냈다.

 “울타리는 나를 지키기도 하지만 상대도 지켜.”

나 또한 예민한 상태였고 변명 같지만, 우리 둘 다 어렸다.

 “그것도 오만 아니야? 그 애가 상처받을 만큼 널 좋아할 거라는? 네가 왜 흠이 되는데? 네가 그 정도 가치가 된다는 자만이잖아?”

나는 왜 우진이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네가 무슨 상관인데? 갑자기 웬 참견이야?

지금 생각하면, 그 생각들을 말로 뱉어버리지 않은 것도, 그의 의도를 몰랐던 것도 다행히다. 아니, 다행히 아닌 걸까.

그가 화를 낸 이유를 알았더라면 늦기 전 그를 밀어냈을까. 그때는 이미 늦었던 걸까.

이제 나는 안다. 우진이 화를 낸 건, 친구의 당당하지 못한,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심을 보아서이다.

항상 태연하고 고고했던 친구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스러워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싫어서이다.

그 자신도 언젠가, 그녀처럼 밀려날까 봐 두려워서이다.

 ‘틀렸어.’

나는 과거의 우진에게 속으로 말했다.

처음엔 그를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우진의 기억 속에 나는 학창시절의 친구1로 남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 우진은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랑비에 서서히 옷자락이 젖어가는 것처럼, 시나브로, 내 영역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두 번째 싸움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그에게 쓴소리를 한 것은, 그에게 너무 익숙해 졌고 또 그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답지 않게 내 말에 굉장히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린 야자를 째고 동네 놀이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유난히 반짝이던 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우진은 녹이 슬어 삐거덕거리는 그네에 앉아 괜히 왔다 갔다 하며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햩는 동안 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우진이 말했다.

 “나 선덕이랑 헤어졌어.”

“또? 누가 찼는데?”

내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성의 없이 대꾸하자 그가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도 똑같았잖아. 진덕이가 고백하고 조금 사귀다가 헤어지고. 너 그러다 천벌 받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우진은 평소와 조금의 다름도 없었다.

“모두 처음에는 나랑 사귀기만 해 주면 바랄 게 없는 것처럼 굴더니만 나중엔 나한테 참견하고 싶어 안달하잖아.”

“그럼 사귀는데 이름이랑 생일만 알고 싶겠어? 너 선덕 이를 좋아하기는 했어?”

내 물음에 우진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 난 그때 그 정도껏 하고 멈췄어야 했다.

“네가 백 번 잘못한 거야. 용기 내서 고백했고 조금 걱정돼서 몇 마디 하려다가 한 달 만에 차인 거잖아. 너는 인기가 많아서 그 여자애들이 하찮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걔들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딱 다물었다. 어둠에 가려 우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어색하게 틀어진 그의 고개를 눈치챘다.

 교묘하게 표정을 감추려는 듯한 모습. 그리고 꼭 다물어진 입술.

 “아, 그래. 내가 죽일 놈이지.”

 그가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을 때 나에게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너는 약해빠진 기인대피증 병신이어서 모르나 본데, 걔들이 날 진짜로 좋아한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안 생겼다면? 내가 돈이 없었다면? 그래도 걔들이 날 좋아했을까? 그리고 내가 그 애들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걘 끊임없이 나한테 집착하고 관심을 갈구했어. 다른 여자애들을 험담하고 날 감시하려 했다고. 넌 뭘 알고 지껄이는 건데? 아, 아. 너의 그 잘난 배려심 말씀하시는 건가? 상처 줄까봐, 받을까 봐 이러면서 비련의 주인공 흉내 내는 이기심?”

 우진이 나를 답답하게 여기는 면은 있겠지만,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주제넘게 상처받았다.

그때 나는 달을 모았다. 한 귀퉁이를 누군가가 갉아 먹은 듯 칼로 벤 듯 잘려 빛나고 있는 달을. 보름이 며칠 전이었고 언뜻 보면 완벽한 보름달이었지만 나는 조금 잘려나간 모퉁이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비가 내리다가 뚝 그친 느낌. 신발 속에 작은 돌멩이가 거치적거리는 듯한 느낌. 온종일 침대 위에서 허옇게 새인 천정을 바라보는 느낌. 달이 흘린 피가 별이 되어 부서웁졌다.

“미안해. 정말이지 생각 없이 한 말이었어.”

그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아까보단 차분하지만, 여전히 가시 돋친 말투로 내뱉었다.

 “뭐가 미안한데? 네가 뭘 잘못했다고?”

 아팠다.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가 절망스러운 눈으로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명량 하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가자.”

쓰레기 같은 날이었다.


“아, 그래? 미친 새끼야. 네가 하는 짓거리들 이젠 우습지도 않아. 언제까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서 동정 구걸할 건데 어릴 때 버림받았어? 아니잖아!”

가볍게 술 한잔하려고 근처 술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우진은 힘든 일이 있는 듯 술잔을 들이키다 결국 취하고 말았다.

그는 지난 16년간 인내심 있게 나를 참아주었고 나는 고마웠다. 우리 둘 사이는 완벽했는데. 편안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미안하다 강우진. 이건 내 한계야. 이미 넌 지나치게 가까이 와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상처받은 눈으로 날 보지 마.

나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자주 깜빡했던 두꺼운 가면을 착용했다. 그는 유능하고 뛰어났지만 나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이러다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나에게 질린 네가 결국 돌아서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에서, 넌 한 발자국도 내게 다가올 수 없어.

 나른한 미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자세를 바꾸었다. 그가 막 따른 술잔을 부드럽게 가로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 시인 협회에도 꼬박꼬박 출근 도장 찍는다고? 단지 복잡한 관계가 좀 귀찮은 것뿐이지. 그건 모두 그렇잖아? 맙소사 진정해. 넌 뭔가 오해하고 있어.”

 아, 또. 그런 눈 하지 마라니까.

 “나 너랑 15년 넘게 알아오면서 한 번도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어.”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사람이 다가오면 무조건 밀어내고, 한 번도 연애한 적도 없지.”

그의 지적이 나를 찔렀다.

 “우는 걸 물론이고 심지어 짜증 낸 적도 없어. 누군가를 미친 듯이 욕한 적도 없고.”

난 흔들렸다

. “그런데 난 보이거든.”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소나기가 내 머리를 때렸다.

“불안정한 네 모습이.”

 내 머릿속에 다급한 경보가 울렸다. 더 이상은 안 돼. 물러서.

 “아, 정말. 이 새끼 또 취했네. 내 주량은 언제 따라올래?”

태연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탁이야. 그만해. 위험해. 다가오지 마. 멈춰. 제발.

그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습게도, 나는, 썰물처럼 밀려오는 안도를 느꼈다.


#5-우진
“사랑했어. 너를 사랑했다고!”

 여자가 울면서 악을 썼다.

쉴새 없이 뺨을 적시는 그녀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이 우스웠다.

아니. 넌 날 사랑하지 않아. 너는 다시 딴 사람 만날 걸잖아.

나를 잊을 거잖아.

또다시 행복할 거잖아.

나를 회상하며 쓸쓸히 웃을 거잖아.

.마치 날 사랑했던 것처럼.

마치 내가 널 버린 것처럼.

마치 네가 피해자인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너는 감히 내게 고마워하겠지.

너 자신이 성숙해 졌다고 착각하면서.

날 용서하겠지.

그리고 넌 행복하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네가 날 버렸다는 걸 모른 채.

넌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모른 채.

넌 네가 믿고 싶은 것만 믿겠지.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 생각하겠지.

 우습게도.


집으로 돌아와 맨 처음 본 것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칭찬해 주었던 사람 좋은 미소였다. 역겨움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거울을 깨부수고 싶은 충동으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뒤틀린 마음으로 속이 꼬였고 무의식적으로 입은 계속해서 욕설을 지껄이고 있었다.

‘왜?’

머릿속에 대답 없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물음표들이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사정없이 내 가슴을 찔렀다. 왜? 왜 그여야만 했는가. 그는 평생 남에게 해 한 번 끼친 적 없어. 그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어.

‘이건 불공평해.'

그때까지도 나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감당할 수 없었다. 단순한 절박한 부정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멍하니, 다리가 저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거울 속의 나만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믿을 수 없는 통증이 내 심장을 관통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뺨을 쉴새 없이 적시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부여잡고 질식할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세상이 멸망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지기를 원했다.

 지금 이 고통만 멈출 수 있다면 다리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통곡하고 있자니 원망은 엉뚱하게도 준영에게 향해졌다.

너는 왜 죽는 거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러나 사탕 앞의 어린아이처럼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혹시라도 내가 먼저 떠났을 때 홀로 가당하여질 고통이 싫어 먼저 가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나에게 도망치고 싶었어? 그렇게 내가 싫었어?

한번 그의 원망을 시작하자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억지로 묵혀 두었던 시커먼 것이 슬금슬금 몸 전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너는 언제나 내게서 도망치려고만 했지.’

 시커먼 놈이 내 귓가에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널 배려해서 난 너의 그 잘난 원 밖에서 너를 기대려 주었어.’

놈이 나를 세뇌시키듯 나를 유혹했다.

 ‘무려 16년 동안.’

놈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런데 죽는다고? 날 내버려 두고?’

믿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낙담한 채 주저앉아 있는 나를 끄집어낸 건 전화벨 소리였다.

 하필 설정해 둔 벨 소리가 좋아하는 가수의 슬픈 음악이었다.

배경음악처럼 전주가 끝나고 가수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날 기다리지 마. 날 떠나가.’

노래 가사에 준영이 형상이 덧씌워져 나도 모르게 주먹을 말이 쥐였다.

‘난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 아니야. 넌 날 감당할 수 없어.’

그걸 왜 네가 판단하지? 그건 또 무슨 자만심이야?

 ‘난 널 책임 못 지겠어. 더는은 못 가. 다가오지 마, 제발.’

무슨 책임? 내가 너에게 그렇게 크라고 요구했나?

 단지 마음 좀 열어 달라고. 날 받아 달라고. 그 가식적인 미고 치우고 나한테 조금만 의지해 달라고.

‘거기서 멈춰. 미안해. 우린 여기까지야. 서로의 피로 얼룩진 마음이 너무 아파서. 네가 아파하는 모습이 괴로워서. 널 위해서야. 우릴 위해서야.’

우리를 위한? 누구 먹대로 우리가 여기까지며 우릴 위한 거라는 거지? 내가 아니라 널 위해서겠지. 그 빌어먹을 지긋지긋한 망상에 빠졌있기 때문이겠지.

‘날 이해 못 하겠지. 날 붙잡겠지. 정말 미안해. 미안해. 부디 내가 너의 큰 흠이 아니었길.’

그래 난 널 이해 못 해.

그러나 넌 내 흠이 아니었어. 난 너의 시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고 자연을 깨달았고 우주를 인식했다.

네 시가 좋았고 네 말투가 좋았고 네가 좋았다. 나도 널 미워하고 싶지만, 못할 것 같다. 네가 좋아질수록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어.

 ‘안녕. 웃으면서 이별할게. 네가 날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안녕. 널 만나서 즐거웠어.’

마지막까지 웃겠다고. 물론 넌 그렇겠지. 그게 너니까.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인지 알면 넌 절망하겠지. 더 거리를 두려 하겠지. 그 고집스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이기적인 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 뻐근해진 몸을 움직이며 증오에 차 나 자신에게 차갑게 뇌까렸다.

내가 16년 동안 그를 떠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해도 나는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가 나를 밀어내는 것도, 그 나름대로 나를 좋아해 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찌 이렇게 이기적으로 구는가.

내가 그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불평하는가?

어디서 주제 모르고 상처받는가?

나는 웃어야 한다.

준영은 내가 웃기를 바라니까. 그의 죽음을 개그 프로그램의 주제처럼 가벼운 마냥 굴어야 한다. 그가 그러길 원하니까.

 16년 동안 단지 준영이 원했다는 이유로 나 자신을 가면 안으로 숨긴 나이다. 그러니 그게 너의 선택이라면. 그게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면. 그래야 내 곁에 머물 수 있겠다면.

마지막이니까.

너의 방식을 따를게. 네가 죽고, 나 혼자 아플 게.

 마지막까지 네가 원하는 데로 웃어줄게.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설렘 가득했던 그 순간으로.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열띤 토론을 하며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던. 그때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6-준영
머리의 두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내 뇌 속에 생긴 종양이 점점 커져 호두를 가르듯 내 뇌를 동강 낼 것 같다. 가끔은 제멋대로 날뛰어 대어서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도 찬 바람을 쐬면 조금은 나아진다. 피부를 차갑게 찌르는 감각이 두통에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진은 내가 머리를 부여잡을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고 있었다. 나의 ‘죽는 날’ 은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가. 나는 미련 없이 초연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겠다. 깊은 관계를 두려워했다. 자존감 있는 당당한 사람들을 선망했다. 행복하게 어올 리는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굳이 내가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도, 아무리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있어도 나는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그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쾌활함을 동경했지만, 그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될 수 없으리라 단정하고 이른 포기라 해야 할 듯하다. 오늘은 그가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그가 즐겁게 인사하자 내가 방긋 웃어주었다. 나는 곧 그 다 나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평소의 나처럼 다리를 꼬고 벤치에 기대앉아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있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톡톡 치는 것까지. “안녕 자기.”나도 그에게 장단을 맞춰 그의 장난스러운 삐딱한 웃음을 따라 하며 그의 농담을 흉내 냈다. 그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진짜 안 올려. 다시 바꾸자.” 웃는 그를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내가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어, 그 책 나도 읽었는데. 근데 네가 이런 것도 읽어?”그가 가지고 있는 것 한 여자의 슬픈 짝사랑이 담긴 비극적인 로맨스 소설이었다. “그러는 너는?” “아, 그 작가가 워낙 글 퀄리티가 좋잖아. 시인 협회에서 한 사람이 내게 권하더라고.” “그래서 감상은?” “음, 이번 건 좀 별로였던 것 같아. “ “응? 묘사는 훌륭한데?” “아, 아. 스토리가 완전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남자는 지나치게 비호감이고. 여자는 나약하기 짝이 없고.”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냉정히 내쳐내고 포기한 지 못하는 그녀에게 잔혹한 말을 서슴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 우진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질문했다. “남자가 잘못한 건가?” “글쎄, 잘못까진 아니더라도 좀 심했다?” 내 대답에 그가 소름 끼치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난 100% 여자가 잘못했다고 보거든.”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희망을 준 적도 없고 여자의 감정을 이용한 적도 없어. 남자 처지에서는 관심 없는 여자가 사랑이라는 말을 무기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 거지. 여자가 정말로 남자를 사랑했더라면, 그가 행복하길 빌고 물러났어야 해.”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내가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고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짝사랑은 괴롭다고 말하지. 그러나 가장 끔찍한 건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받는 집착이야. 그들은 자신의 민폐를 ‘사랑’으로 변명하고 덮어버리고 합리화시키지. 상대를 부담스럽고 힘들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것 아닌가?” 그의 경멸 묻은 말투에 드물게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근데 왜 사랑받는 쪽이 괴로운 거야? 관심 끄면 되지 않아?” 그의 굳었던 표정이 탁하고 풀리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넌 이해 못 하겠지. 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널 미워하든 좋아하든 관심 없으니까. 그런데 보통사람은 안 그러거든.” 아,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보통 사람’ 에는 우진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지금껏 그는 원치 않은 사랑으로 홀로 힘겨워 했다는 것을. 그의 감정에 동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설명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를 기쁘게 하려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 알 것 같아. 정말 그러네. 음, 좀 어렵긴 한데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가 내 거짓말에 속았는지, 아니면 속는 척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내 마음은 전달되었으리라. 나는 내가 챙겨 온 시집을 펼쳐 들었다.
공존의 이유- 조병화.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 헤어짐이 잦은 우리의 세대. / 가벼운 눈웃음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 그땐 헤어집시다. /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맙시다. (생략) 우리 앞에 서글픈 그날이 오면 / 가벼운 눈웃음과 /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6-우진
사실, 마지막까지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끝까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곧 그 바램은 모레가 바람에 실려 가는 것처럼 지워졌다. 거부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수험생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해진다. 더는 그의 거절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힘들게 할 수도 없었다. 홍차 티백을 찢어 끓인 물을 부은 머그잔에 담갔다. 싸구려 차의 강한 맛이 입안에 쌉싸름하게 번졌다. 한지 위에 푸른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온기가 온몸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여행 같은 건 안가?” 그는 재회 후부터 매일매일 성실히 공원으로 출근했다.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되게 세계여행 같은 것을 떠올리던데. 생각해 보니 준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단조로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제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의 벤치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준영이 고개를 들어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글쎄, 굳이? 원래 움직이는 걸 안 좋아하고 글 소재야 주위에 널렸는걸. 그리고 비행기에서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면 어쩌겠어.” “그러면 뭔가 특별하게 하고 싶은 건?” 뭐라도 좋으니 그가 뭔가를 말하길 바랐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면 더 좋고. 그가 나에게 작은 거라도 좋으니 뭔가를 바라주기를 바랬다. 그가 드물게 보여주는 장난기 고인 미소를 지었다. “아~ 갑자기 커피 한 잔 당기네.” 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사와.” “곧 죽을 사람 소원도 못 들어줘?” 자기 죽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말하는 그를 보니 울컥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걸 무기로 날 부려 먹을 생각은 저승에나 가서 해.”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차 하는 마음에 그의 눈치를 살피는데 표정 변화가 없다. “안되지. 주위에 전부 나랑 똑같은 귀신들뿐일 텐데 그럼 특별대우 못 받잖아.”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바보야? 괜찮을 리가 없잖아.
얼마 남지 않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준영은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약해지는 것은 극히 소수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꽤 친한 사람의 급작스러운 이별 선언에도 웃으며 “그래, 안녕.” 하고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는 것이 그였다. 그의 거리 유지는 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사사로운 일에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것. 내가 그의 예외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정작 내가 마주한 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유리창이었다. 안에 있는 그가 다칠까 봐 함부로 돌을 던지지도 못했다. 소심하게 노트 몇 번 하고 서둘러 뒷글을 질 쳤을 뿐이다. “띠링.” 고요함을 깨고 문제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효과음이 울렸다. 한국에 돌아와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전화부의 준영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스팸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울린 메시지 소리는 틀림없이 준영의 것이리라. 놀람도 염려도 불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메시지를 확인했다. [창작의 고통 중. 오늘은 오지마.] 왜 언제나 최악의 소식은 문자로만 오는 걸까. “하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정을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얼간이는 아니었다. 오늘은 그가 ‘죽는 날’ 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아무리 의사여도 날짜를 정확히 맞출 순 없어.’ 그러나 막연한 감은 무서운 것이어서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동시에, 나는 모순된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지막 모습을 내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하는, 죽음을 눈앞에 둔 겁먹은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평생 내 기억에 남을 장면을 보이게 하기 싫어서. 넌 정말 바보 멍청이야. 나갈 때 입으려고 꺼내 둔 옷을 다시 옷장에 집어넣었다. 정 네가 그러겠다면. 네가 원한다면.
#7-준영
그의 웃음이 가면인 줄 알면서, 그에게 나는 암묵적으로 미소를 강요했다. 다가오면 기를 쓰고 밀어내려 했고, 강인하지 못했다. 나약했고, 어리석었고, 유약했으며, 이기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좋아했다. 단지 그 방식이 달랐을 뿐이었다. 서로 때문에 괴로워했고 절망했지만 우리는 서로 알게 된 걸 후회하지 못한다. 서로 때문에 미칠 뻔했지만 서로 덕분에 정신병자가 되지 않은 것이 까닭이다. 그는 삐뚤어진 내 성격을 바로 세우진 못했지만 더는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고 나는 그의 비극적인 상황에서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나는 안다. 수도 없이 그를 멀리하려 시도했지만 설사 내가 영원히 산다 할지라도 나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정상이 아니니까. 그가 없으면 난 돌아버릴 테니까. 난 나밖에 모르는 머저리니까. 나는 이기주의자니까.
#8-우진
그의 장례식은 조용하고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그와 같은 협회에 속해있던 시인 몇 명이 왔고 유난히 통곡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식장이 언론에 알려지지는 않아서 준영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 그가 생일 죽기를 원했다는 것이 기억났다. 거짓말처럼, 그는 생일이 되기 10분 전에 죽었다. 그는 마치, 그가 살아온 방식처럼 죽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많이 괴로웠을까. 의사는 놀라운 만큼 보통의 경우보다 편안히 죽었다고 말했다. 식이 끝나고 나는 복도의 작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믿기지 안지는 않았다. 언젠가 오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오늘인지 몰랐을 뿐이다. 입술을 온 힘을 다해서 세게 깨물면 어느 정도 힘을 가할 때보다 마비가 되어서 아프지 않다. 내 심정이 그랬다. 너무 아파서,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죽었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가만히 바닥을 응시하며, 나는 내가 사라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공허함이 들 리가 없다. 손을 뻗어 다리에 손을 대었다. 멀쩡하다. 얼굴을 만져보았다. 여전하다. 내 몸속에 심장이 있다는 걸 자각하자, 쓰나미가 한순간에 나를 덮쳤다. 죽을 것 같아.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으아아아악!”절규했다.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견디질 못하고 폭발했다. 인정사정없이 몰려오는 절망이 나를 강타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이 멈추는가. 어떻게 해야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가. 그가 죽었어. 더는 없어. 그는 죽었어. 죽었어. 죽었어. 나를 담겨두고, 나의 유일한 안식이 주었다.무서웠다. 그 없이 어떻게 살지? 이럴 순 없는 거야.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눈물이 턱을 타고 내려가 뚝뚝 바닥으로 추락했다. 제발 이러지 마. 그만해.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영원히 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리라. 다시는 정상적으로 살 수 없으리라.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닦아내고 옷가지를 정리했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웃기를 바랐으니까. 내게 과분한 그였다. 이게 원래 내 삶인 것을. 나는 이 아픔에 익숙해 져야 할 것이다. 하룻밤 꿈을 꾼 것처럼,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에필로그-우진
그녀가 악을 썼다. 그녀의 손에 유리그릇들이 산산이 부서져 갔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져 가는 유리의 모습에,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에 여느 때보다 여실히 느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을. 그녀와 나의 비극적인 운명 따윈 진즉 떼어 버리는 것을. 더는 깨트릴 그릇이 없자 그녀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광분한 그 모습이 추했고, 증오스러웠다. 문득 때가 되자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떠나간 그 남자가 떠올랐다. 그땐 그가 참 몰인정하다고 여겼는데.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광인의 눈. 난 왜 그리 어리석었던가. 그 비 내리던 밤, 어둠이 달마저 삼켜버렸던 그날에 나는 왜 평생 후회할 패를 골랐던가. 내 머리가 얼음 같은 대리석 바닥에 찍 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쉬어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끝까지 통곡했다. 그러게 조금만 편히 살지 그러셨습니까. 그러게 조금만 덜 집착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러게 조금만 덜 집착하지 그러셨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러셨나요. 그래서 보십시오. 당신의 선택 결과입니다. 그녀는 이제 웃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듯한 웃음소리.마지막 한 줌의 먼지처럼 남은 영혼마저 빠져나가고 빈 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눈만이 남았다. 점점 어지러워진다. 바닥에 누워 가쁜 숨만 내려 쉬고 있자니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내 눈물 한 방울이 내 머리 근처에 흥건히 맺힌 피 웅덩이에 떨어졌다. 앞으로 얼마나 울어야 저 선홍빛 호수가 묽어진단 말인가. 이대로 영원히 잠들 수만 있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문득,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준영이 떠올랐다. 아니,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그를 잊지 못했다는 것이지. 날 미치게 한 그가 내 눈 앞에 또렷이 보인다. 죽도록 보고 싶은 그의 얼굴, 목소리, 말투, 외우고 있던 시가 차례로 나를 쓸고 지나간다. 그를 회상하자 무감각했던 지난날을 배반하고 심장이 아릿하게 아파진다. 너는 뭐길래. 너는 뭐길래 아직도 떠나지 않고 나를 맴도는가. 어두운 나를 외면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뻔뻔이 남아있는가. 나를 어디까지 절망하게 할 생각인가. 제발 돌아와. 다 용서해. 물에 젖은 스펀지를 움켜쥐는 양 가슴이 아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오늘따라 네가,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