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모 : 휘어진 거리

by 정상규 posted Dec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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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리가 이상하게 보인건 기분탓이 아닌 진짜였다. 두 눈을 말똥하게 쳐 뜨고 다시 한 번 비벼보고, 굴려보고 그렇게 거리를 다시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곧 죽어도 아니었다. 고급 빌라 창문으로 보이는 아스팔트 거리는 상당히 휘어 보였다. 


태양에 녹은걸까.


불가능 한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어제 기상예보는 폭염주의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얼마나 더워야 아스팔트가 녹는걸까.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휘어질대로 휘어버린 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거지.


그건 내가 아마 초등학교 2학년 쯤이었겠지. 그 때도 그렇게 휘인 거리를 본 적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많이 변질된 기억이겠지만, 나는 그 거리를 걸어보았었지. 내가 걷는 건 분명히 자의적 선택에 의해서 걸었던 것이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다. 허나, 나는 그 거리를 걸을 수 없었다. 그 시간은 짧았고, 찰나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나는 그 거리를 갈 수가 없었다. “그게 뭔 개소리야?”라고 지껄일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그렇겠지.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이상한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세상이 이상해! 거리가 휘었단 말이야. 나는 거리를 어떻게 걸어야할까.”라고 지껄인다면, 친구는 “날이 더워서 드디어 등신이 됐구나. 가뜩이나 등신인데. 하하!”라고 되받아 치겠지. 그러면 나는 남몰래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애써 아닌 척 하며, "하하! 등신인거 이제 알았어? 그럼 끊는다." 라고 재빨리 전화를 끊을게 분명할테다. 


더 이상 화를 내버리면 유일한 친구가 없어진다는 걸 알아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한심한 인간관계. 그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대인관계라는 하나의 곡선이 주체 없을 정도로 휘어져버린 것이었다. 내 인간관계가 망해서 한탄스럽게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스러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흩어져버린 모래와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도 분해된 지 오래였다.


그건 저기 있는 거리도 마찬가지인걸까. 휘어질대로 휘어져버린 어쩔 수 없는 거리.


초등학교 2학년 때 그 이상한 거리를 두번째 로 걸었을 때, 내가 좋아하던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었지. 시간의 지평선 사이로 멀리 사라진 그 아이의 얼굴은 지우개로 지우듯, 태양에 증발해버렸다. 마치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백지같은 그녀의 얼굴의 생김새에서 그나마 각인된 것이라곤, 뜨거운 한 여름날, 그녀가 나를 향한 채 단 한 번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뿐이다. 그 거리는 그녀와 걸을 때만큼은 여느 거리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한 거리였다는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창문을 다시 바라보고, 그 불투명한 세상을 비추어주는 유리의 감촉을 느껴보았다. 뜨겁다. 아니, 당연한 거겠지. 체감상으로 느껴도 족히 36도는 넘어갈 폭염이다. 머리라도 한 번 감을까. 세수라도 한 번 할까. 그렇게만 한다면, 저 거리는 꿀렁거리는 곡선을 그리지 않은 정상적인 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싫은거겠지. 왜 그런 것이냐고 이유를 대자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내 머릿 속에 있던 기억을 전부 꺼내버리고 차라리 자괴감에 빠져 거리 같은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외치고 싶지만, 쉽게 말해서 나 같은건 아무도 신경쓰질 않는 다는 것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눈이 소용돌이친다. 턱을 괸 채로 창가를 다시 바라본다. 거리는 아까보다 더 휘어, 민둥 산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광경에 기겁을 하고 고개를 휘저었다. 그랬더니, 거리는 아까의 그 휜 모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머리가 정말로 어떻게 된 걸까. 아니면 더위를 심하게 먹은 걸까. 그렇게 생각해보지만, 저 거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아직까지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쓸모없는 시간 낭비다. 거리가 어떻든, 집이 어떻든, 날씨가 어떻든, 내가 어떻든. 그런거 따위 알바가 아니겠지. 나는 방 가운데 떡하니 있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꾸깃해진 종이 덩어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래, 나는 저기에 신경을 쓰고만 있어야 된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주제의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취직서. 내 인생의 갈림돌. 저기 창문 앞에 있는 거리 마냥, 이상할대로 꼬여버린 내 인생을 대표하는 종이 한 조각. 고작 그 한 조각 때문에 내 인생은 이렇게 된걸까. 아니, 그건 어릴 적부터 잘못해온 내가 죄인이겠지. 지금 그 대가를 받고 벌을 치루는 중일 것이 분명하다.


2년간 사귀었던 Y가 출장을 간 후, 아르바이트도 동시에 그만두었다. 슬슬,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취업에 성공한다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가만히 손을 놔두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정말로 될 줄 알았지. 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잘못했다면 잘못한 거겠지만, 그건 순전히 내 변명에 불과한게 증명하지 않아도 증명될 현실인 것이다.


Y가 출장을 간 것도 벌써 한달 째다. 비가 내리던 날, 창가 밖의 정상적이었던 거리를 본 채 캔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을 때, Y는 나에게 갑작스레 통보했다. 


“K야. 나 두 달 동안 지방으로 출장 가니까. 그 때 동안 집 잘 보고 있어야 돼.”


“어디로 가는데.”


“그런 것 까지는 알 필요 없잖아. 너는 취업 걱정이나 하고 있어.”


“갑자기 취업 이야기는 왜......”


썅년. 내가 무슨 집 지키는 백구인가. 하기야, 이제 좋아한다는 감정도 들지 않는다. 우리 사이는 석달 전의 갑작스런 권태기로 인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애초에, ‘갭’이라는 것이 다르다. 그녀는 대기업 사원이었고, 곧 있으면 대리로 진급할 여자였다. 그에 비해 나는 방바닥에서 불알 한 쪽이나 긁고 있는 백수에 불과 했으니까. 이에 대하여, 길을 지나가는 한 여성이 “와, 그런 여자가 너 같은 남자를 왜 만나는 거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까 잡수세요. 네 알 바 아니잖아요.” 라고 하겠지만, 나와 같은 백수에다가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새끼. 운 좋구만. 복 받은줄 알아라.”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래. 부럽지?”라고 할 것이다.


사실, 별 이유는 없다. Y는 꽤 예쁜 여자였다. 그게 다였다.


아무래도, 나는 글러먹은 놈인 것 같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서 취직서 쓰는 것을 포기하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맥주라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까.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곧바로 냉장고로 달려가 캔맥주 하나를 따서 입 속에 벌컥벌컥 넣고 있는 나였다. 반 쯤 남은 맥주를 책상 위에 올려두자, 그 옆에 있던 담배갑에 시선이 갔다. Y가 출장을 간 이후로, 끊던 담배도 다시 피게 되었다. 나는 담배갑을 들고, 창가로 가서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휘어질대로 휘어진 그 거리에서 불어온 한 가닥의 더운 바람은 나의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그 거리 주변의 허름한 주택가는 괴상한 거리의 형상에 맞지 않게 이질감이 들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내뱉었다. 그 괴상한 거리를 확인해볼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거리를 걸어봐서,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확인해보는 것이겠지. 그 휘어진 거리를 걸어서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그 때는 내 머리가 어떻게 되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 밖에 더 안 되겠지. 그렇지만 정상으로 돌아와서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그냥 거리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내가 더위를 먹었겠구나 생각하면 그게 전부니까. 하지만 나는 왜 거리를 이 상태로 내비두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난 이 거리가 좋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행복해지거든. 걷기만 해도, 마음속에서 막 행복 덩어리 같은 것이 마구 피어올라.”


왜 자꾸 그녀 생각이 나는 걸까. 분명, 내 어릴 적 기억을 회상해보자면 어릴 적 짝사랑하던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때 살던 집 주변 거리는 한 여름밤이나, 아침이나 그녀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거리였으니까. 딱 한 번만이었지. 그녀의 손을 잡고 그 거리를 걸은 것은.


어느 날은, Y와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Y는 찬성을 했고, 그 거리를 걸어가며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더워. 잡지마.” 라고 강하게 뿌리치는 그녀에게 진저리가 났었다. 물론, 날씨가 더워 불쾌하기도 하겠지만 어릴 적, 그 아이는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내 손을 잡아주었었지. 하기야, 이런 생각해봤자 의미도 없다. 지금 와서 그런거 생각한들, 난 지금 여기 있고, 그 아이의 소식조차 알 수가 없으니까. 지나간 옛 기억에서 흩어져버린 한 줄기의 덧없는 희망일 뿐이다.


담뱃재를 털고 맥주 한 모금을 마신다. 최근에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낀다. 그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정신적인 것과 관련된 것 같다. 피폐해져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 만 같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내가 자초해서 만든 것도 많았지. 대학 생활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을 그렇게 대충 살다가는 훅 가버린다고. 그건 고등학교 생활에도 마찬가지였다. 꿈이 없이 살다가는 나중에 정말 후회한다고. 그건 중학교 생활에도 마찬가지였다.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휘어진 거리 마냥, 내 인생은 그렇게 휘어져 버린 것만 같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쓸 수도 없이 한 순간 만에, 비틀어 쥐어짜듯 망가뜨려버린 거지. 간단한 것일 수도 있다. 이대로 살다가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 것이 확실해라고 비관적이고도 부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된다면 정말로 죽는 그 순간 까지도 내 인생은 불행하다라고 느낄게 분명하니까. 고칠 마인드였다면 진즉에 고쳤겠지만.


아니, 원래 난 불행한 인생이었던 걸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던 걸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태양에 비춰진 아지랑이가 아스팔트 거리 위에 아롱아롱 피어오르듯, 보일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런 존재이며, 알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물보듯 뻔하게 되어버렸던 걸까.


그 동안 Y에게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내 쪽에서도 한 통도 걸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거리가 벌어질대로 벌어졌다. 휘어진 거리 마냥, 우리의 사이는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연락처를 열고 오랜만에 Y에게 전화를 걸어볼까하며, 맥주를 벌컥 들이킨다. 그러나, 연락처를 닫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어느 새, 노을은 지고 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반나절이 지나갔다. 무료한 삶. 지루하다 못해, 지겨운 하루. 벌써 이주째다. 슬슬, 아르바이트라도 시작해볼까. 아니, 그래야만 했다. 어찌어찌 졸업한 형편없는 대학은 기억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였으니까.


창가에는 담배 꽁초 세 개와 캔맥주 세 병이 의미없이 나뒹굴고 있다. 나는 다시 곡선을 그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지면 그 거리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사실 나도 모르지만, 예감으로는 그렇게 느껴진다. 어릴 적, 그 아이의 손이 내 손을 저녁까지 굳게 잡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그 때의 거리도 휘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왜 휘어졌을까에 대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마를 한 번 문질렀다. 세수도 한 지 꽤 돼서 기름이 잔뜩 묻어 나왔다. 질리는군. Y가 있을 때만 해도, “좀 씻어라. 더러워 죽겠네!”라고 잔소리라도 해주었지만, 이젠 그런 사람도 없다. 여긴 섬만 아니지, 무인도와 다름없다. 그저 바깥을 나갈 수만 있는 도시 속의 섬, 다시 한 번 맥주를 들이킨다. 벌써 네 병째다. 취기가 살짝 올라온다. 그 덕에, 거리는 더욱 더 휘어보였다. 창가 앞에 앉아 이러고 있는 것도 벌써 몇 시간째인지도 모르겠다. 그 동안, 많은 차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중에서 나를 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상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돌았다, 그 기운은 뭐라고 칭할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곧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Y에게 전화를 걸을 뿐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또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다시 한 번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결국에는 사용자의 부재중이라는 이유로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씨발.”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고 있는 노을이 영원했으면 하고 다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이상한 기운을 떨쳐내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이 기운은 전에도 많이 느꼈던 것이다. 그건 몇 년 전에도, 몇 십년 전에도 항시 느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몸이 흡수했으면 하고 바랬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무언가를 해도, 그 기운은 휘어져, 곡선을 그리며 나를 항상 괴롭게 했으니까. 허나, 불투명한 햇살에 가려 소용돌이치고 있던 그 기억속에서 만은 난 그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 기억은, 그 아이와의 휘어진 거리에서의 걸었던 기억이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떠올려도 그 기억만은 나에게 긍정적인 기억이라는 것 밖에 각인되어 있다. 달이 뜨면, 그 이상한 기운은 또 나를 감싸고 돌아서 괴롭고 고통스럽게 옥죄일 것이 분명하겠지. 


맥주를 5개째 들이켰을 때,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Y였다. 아마도 내 전화번호가 찍힌 것을 보고 곧바로 전화했겠지. 생각보다 의외였다. 그녀가 돌아올때까지 전화 한 통 안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화를 받았다.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 걸었었네.”

“아 그래. 왜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게,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 되지 않을까.”

“왜.”

“서로에 대한 감정 이제 다 사라진 것 같아. 그래서......, 전화로 하긴 너무 나도 미안했거든. 하지만,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도 싫었어.”

“그래.”

“그게......, 다음주면 아마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아서 빌라로 돌아갈 것 같아.”

“그래.”

“그러니까, 다음 주까지 방 좀 비워주면 고마울 것 같아. 부탁할게.”

“그래.”

“그래 밖에 없구나. 넌 항상 그랬지. 매사에 귀찮아하는 듯한 말투랑, 그 불만 가득한 표정이 개 엿같았거든. 그래도 내가 너랑 사귄 이유는 뭔지 알아?”

“뭔데.”

“그저......, 외로웠거든. 죽도록 외로워서 그냥 너를 사귀었던 것뿐이야.”

“어.”

“아, 씨발! 짜증나 죽겠네. 넌 그 딴말 아니면 할 말이 없는거야? 넌......, 나를 사랑하기는 해? 아니야. 됐어. 괜한 걸 물어봤지. 그만하자. 그냥 다음주까지 방 좀 빼줘. 부탁할게. 그럼 잘가.” 



통화 종료를 누르고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노을 진 석양의 빛을 받는 휘어진 거리는 그제서야 정상적인 거리로 돌아왔다. 나는 마지막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켜고, 창가에서 내려와 바닥에 드러누웠다. 알코올로 가득한 머리가 핑핑 돌아 곡선을 그렸다. 눈을 감고, 떴다.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떴다.


이상한 기운. 그건 외로움이 분명했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괴물에게 잡혀 먹히고, 흡수 당한 것이었다. 왜 이제야, 그걸 확실히 깨달은 걸까. 이젠 상관 없겠지. 그건 확실했다. 앞으로도 느낄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꽤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노을은 거의 진 채, 달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서 빌라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휘어졌던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젠 휘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그 거리는 어디에서나 볼 법한 정상적인 거리였다. 후미진 골목길에 위치한 가로등 하나가 불빛을 켰다. 그 주황색 불빛은 거리를 비추었다. 그 거리와 골목길은 그 아이와 걸었던 거리와 비슷했다. 분명, 같은 것은 아니겠지.


난 그 가로등 밑에 서 있는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의 모습은 어릴 적 그대로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레몬 빛을 띠는 그 긴 머리. 그 아이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 여자아이의 손을 잡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를 살짝 띄었다.


“안녕.”


나는 그 아이에게 인사했다. 그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


내 눈에서는 이유 모를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그 휘어진 거리. 아니. 그 옛날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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